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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시 들려주고 아이돌 그룹도 아는 소탈한 ‘名재상’
야당은 “또 한 명의 대독 총리가 될 것”이라 했다. 여당에서도 “적임자를 못 찾아 이명박 대통령이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대타(代打)”라고 했다.그러나 2년5개월이 지나고 퇴임을 앞둔 지금, 김황식(65) 총리는 ‘명(名) 총리’ ‘공감·소통의 총리’란 평을 듣고 있다. 김황식 총리가 2010년 인사청문회에서 한나라당 이정현 의원이 ‘파독 간호사’를 다룬 글에 대해 질의하자 울먹이며 답하고 있다. [중앙포토] 관련기사 “한·일 정보협정 밀실 처리 논란 때 항의 표시로 사임할까 고민했다” “작년 12월 애기봉 등탑 점등 때 북한 공격 준비 정황 있었다” 김 총리는 재임 기간에 굵은 눈물을 세 차례 흘렸다. 2010년 국회 인사청문회장에서 파독 광부와 간호사 얘기를 할 때, 2011년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로 숨진 전사자 1주기 추모식에 참석했을 때, 지난해 6월 페루 댐 건설공사 사전 조사차 헬리콥터를 타고 나섰다 목숨을 잃은 7명의 해외건설 역군에게 그해 11월 훈·포장을 추서할 때 그랬다.김 총리의 눈물은 행사장의 권위와 엄숙함에 익숙한 우리 사회에서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공감과 연민을 그토록 여실히 드러내는 총리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국정을 장악하고 업무를 조정하는 데도 실력을 발휘했다. 검·경 수사권 다툼과 과학비즈니스벨트 입지 문제 등에서 뚝심 있는 조정자 역할을 해냈다.김 총리는 국민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섰다. 우선 소통 수단이 다양했다. 2011년 3월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시작했다. 그해 4월 제주 4·3사건 희생자 위령제 참석차 제주도를 방문했을 때는 ‘자작시’를 발표했다. “…누가 제주를 그저 우리 대한의 사랑스런 막내라고 하는가/ 제주가 노래하면 반도도 노래할 것이요/ 제주가 가슴앓이하면 반도도 가슴앓이할 것이다/ 그렇기에 제주는 희망·평화·번영의 섬이어야 한다….”젊은 세대와의 소통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지난해 3월 대전의 한 중학교를 방문한 자리에서 아이돌그룹 비스트를 예로 들며 “비스트는 다른 그룹에 속해서 연습하다 탈락한 아이들이 모여서 만든 그룹인데 지금 유럽에서 특히 인기가 있다”고 말했다. 그런 장면은 2010년 총리 취임 인사차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을 찾았을 때와 대조적이다. 자승 스님이 “공정 사회를 강조했는데 (환풍기 수리공 출신으로) 성공 신화를 이룬 허각을 혹시 아느냐”고 묻자 김 총리는 “모른다”고 답하며 민망해 했다.소탈한 성격은 많은 일화를 낳았다. 2011년 10월 총리공관에 학력 차별을 극복한 기업인 등을 초청한 자리에서 김 총리는 갑자기 바지를 걷어올렸다. 자신이 입고 있는 내복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어릴 때 어른들이 ‘건강 비결은 내의를 빨리 입고 늦게 벗는 것’이라고 했다”며 ‘내복 예찬론’을 펼쳤다. 김 총리는 인사청문회 때 “부친께서 농사도 지었지만 양말 공장, 메리야스(내복) 공장도 하셨다”며 내복과의 인연을 알리기도 했다.지난해 5월 모교인 광주일고를 찾았을 때는 대학 낙방 경험까지 털어놨다. “소속이 없다는 것이 사람 마음을 굉장히 허전하고 외롭게 만듭니다. 재수하는 친구들끼리 어울리다 보니 정도 깊어지고 동병상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어느 경우든지, 상황에 맞게 성실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하지만 김 총리는 여러 면에서 행복한 길을 걸어왔다. 4남3녀 중 막내인 그의 집안은 전남 장성군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였다. 아버지 는 한학자였고 형과 누나들은 의사, 교사, 군수, 대학총장 등으로 각각 활동했다.고교 때는 배드민턴과 농구를 즐겨 학교 대표선수로 활약했고, 서울대 법대를 거쳐 사시 합격 후 사법연수원에선 수석을 했다. 공직생활도 순탄했다. 대법관·감사원장을 거쳐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총리에까지 올랐다. 이제 김 총리는 ‘어떻게 인간이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새로운 인생’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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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 애기봉 등탑 점등 때 북한 공격 준비 정황 있었다”
관련기사 자작시 들려주고 아이돌 그룹도 아는 소탈한 ‘名재상’ “한·일 정보협정 밀실 처리 논란 때 항의 표시로 사임할까 고민했다” 김 총리의 15일 일정은 국가정책조정회의를 시작으로 꽉 차있었다. 오후 6시 10분 인터뷰 직후엔 재외공관장과의 만찬장으로 황급히 자리를 옮겨야 할 정도였다. 총리실이 세종시로 옮겨간 뒤에 동선은 더욱 길어지고 늘 시간에 쫓기고 있다는 것이다. 총리실 관계자는 “22일이 돼야 이삿짐을 쌀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황식 총리가 15일 본지와 인터뷰를 마친 뒤 홀가분한 표정으로 집무실을 떠나고 있다. 최정동 기자 -평소 점잖지만 정치권의 무차별 공격을 받으면 강단 있게 맞받아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이제 공론의 장이든, 사적 모임이든 모든 게 합리적으로 논의됐으면 좋겠다. 우리 사회에선 언제부터 자기 주장과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 경우에 따라 사실관계도 부정확하게 악용한다. 자기한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해서 쓰기도 한다. 특히 정치권에서 많다.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 상대방이 입을 상처나 타격을 배려하면서 (사안을) 논의하는 게 국가 발전을 위해 바람직하다.”-턱없는 공격을 받을 때 어떻게 대응하나.“그럴 때 흥분해서 이성을 잃으면 곧 나한테 마이너스다. 참고, 자제한다. 마음으로 컨트롤하는 편이지만 때론 화도 나고 서운한 점을 내보일 필요는 있겠다는 순간이 있다. 실제로 화가 나서 한다기보다도 이 부분에서 단호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겠다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진짜 화난 경우가 있었나.“(14일 국회에서 설전을 벌인) 김동철 의원은 내가 좋아하는 학교 후배(광주일고·서울대 법대)다. 아까도 나한테 전화를 걸어왔다. ‘서로 공적인 입장에서 한 것이다. 그 때문에 김 의원과 내가 인간적으로 사이가 나빠질 이유는 하나도 없다’고 얘기해줬다.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저렇게 하는 게 이해될 때도 있다.”-그래도 화가 많이 날 경우가 있을 텐데.“있다. 그래도 대부분 다 이해한다. 정치인 입장에서, 반대자 입장에서 그런 발언이나 행동을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섭섭하지 않다. 그런데 가끔 가다 ‘인간적으로 못된 사람이다’는 느낌이 올 때가 있다.”-누군지 궁금하다.“(손을 내저으며) 그런 건 말하면 안 되지. 물론 김동철 의원은 아니다. 그런 사람이 두세 명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참 안 됐다’는 생각이 든다.”-반대로 괜찮은 정치인이라고 평가하는 사람은 있나.“허허. 좋은 분들은 너무 많다.”-몇 명만 이름을 든다면.“이름을 다 거론하면 몰라도 몇 명만 나가면 다른 사람들이 섭섭해할 것 아닌가.”총리실 관계자들에 따르면 김 총리는 의외로 ‘전투력’이 세다. 그는 국회에 출석할 땐 물을 조금만 마신다. 화장실에 가느라 자리를 비우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명박 대통령과 조금 드라이한 관계”김 총리는 2010년 10월 취임했다. 정운찬 총리의 사퇴, 김태호 총리 후보자의 낙마로 마땅한 총리감을 찾지 못한 이 대통령이 당시 감사원장이었던 그를 ‘삼고초려’한 것으로 알려졌다.-감사원장에서 총리로 옮겨오게 된 건 이명박 대통령과의 인연 때문이었나.“이 대통령하고는 감사원장이 될 때까지 인연이 없었다. 먼발치에선 봤지만 개인적으로 대화한 적이 없었다. 왜 대통령이 나를 감사원장으로, 또 총리로 발탁했는지 모른다. 대통령도 지금까지 그 부분에 대해서 설명하진 않았다. 나도 궁금하다. 하지만 그런 문제를 대통령한테 물어볼 수도 없지 않나. 총리에서 물러나면 한 번 허심탄회하게 물어보려고 그런다.(웃음)”-대통령과 의견 충돌을 한 적이 있나.“그런 일은 없었다. 비교적 생각이나 철학, 기본 정책의 방향에 대해선 대통령과 많이 일치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항상 법과 원칙을 내세우고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대통령이 수긍할 수밖에 없다. 정치적이거나, 정치공학적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니 대통령과 부딪칠 일이 없었다.”-매번 똑같을 순 없지 않은가.“‘나하고 생각이 다른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은 받은 적이 있다. 사소한 정책들이었다.”-예를 들면.“그런데 내 짐작이니 무엇이라고 특정을 할 순 없다.”-그럴 경우 어떻게 했나.“나름대로 내 입장에서는 설득을 하기 위해 우회적으로 말을 하거나 내 뜻을 계속해서 밝혔다. 대통령이 거의 다 받아들여줬다. 내 의견을 존중해줬다.”-대통령과 사적 만남이 없었다면 이너서클에서 소외돼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겠다.“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해석한다. 내가 법관 출신이고 감사원장을 했던 사람이니 원칙과 상식, 행동 양식을 굉장히 존중해 주고 보호해 주려고 한 게 아닌가 싶다. 나도 개인적인 얘기를 안 하고, 대통령도 사적 요소가 개입될 만한 건 말씀을 안 한다.”-책임 총리보다 더 강한 게 분권형 총리인데, 한국 현실에서 필요하다고 보나.“운영의 묘를 살려서 하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불안정하다. 개인 의지에 따라 바꿀 수 있다. 필요한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세계 각국을 다녀보면 대통령과 총리 있는 곳에서 나름대로 상당 부분 역할 분담이 돼 있다. 우리도 제도의 틀로 검토해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34년간의 법관 경험이 총리직 수행에 얼마나 도움이 됐나.“행정도 결국은 법 집행이기 때문에 법을 많이 알고 적용해서 판단하는 게 총리직을 수행하는 데 굉장히 도움이 된다. 다만 행정 경험이 부족한 게 약점이 될 수 있다. 결국 법조인이 총리가 되는 게 옳으냐 그르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럴 만한 자질을 갖췄느냐가 문제다.”-역대 총리 가운데 롤 모델이 있다면.“그분들이 어떻게 했는지 잘 모르지만, 굳이 얘기한다면 고건 전 총리다. 다양한 행정 경험을 바탕으로 인품 있게, 품격 있게 총리직을 수행했다고 생각한다.”-이명박 정부가 연평도 포격 사건 대응 과정에서 우왕좌왕했다는 평가가 있다.“연평도 포격 때 정부는 도발에 대해선 강한 응징을 하겠다고 밝혔다. 그런 자세를 보인 뒤 별다른 도발이 없지 않은가. 지난해 12월 애기봉 크리스마스 트리 점화를 앞두고 북한에서 ‘좌시하지 않겠다’ ‘공격하겠다’는 협박 메시지를 보냈다. 실제로 도발을 준비하는 정황들도 포착됐다. 지난해 12월 21일 오후 5시 점등이 예정됐을 때 나는 청와대에서 여러 장관들과 만찬을 하고 있었다. 대통령이 ‘북한이 공격하는 것 같은 조짐을 보인다고 취소하면 안되지 않느냐’며 내 의견을 물었다. 그래서 나는 ‘그거야 당연한 말씀이다. 만일 포기하면 사사건건 북한에 끌려가게 될 것이다. 북한이 도발을 못할 것인데, 만약 한다면 그보다 더한 응징을 해야 한다’고 답했다. 그래서 점등 행사를 그대로 진행한 것이다.”대법관 출신인 김 총리는 ‘법치주의자’로 불린다. 법치주의에 대한 강한 소신 때문이다. 외부 강연을 통해 자주 “법을 통한 정의 실현 과정에서 다른 요소가 개입하면 혼란스러워진다”고 강조해왔다.-평소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법치와 사회적 자본을 강조했다. 박근혜 당선인도 통합을 내세우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기본적으로 사회 통합이 되려면 사회 질서가 유지돼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법과 원칙, 상식이 통하는 것이다. 법이 엄정하게 집행돼야 한다. 다른 한편으론 그 과정에서 소외되거나 불만이 있는 국민과 다른 차원에서 충분히 소통하고 설득하는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그런 관점에서 용산 사태, 쌍용차·한진중 문제가 잘 해결됐다고 보는가.“법과 원칙에 따라 결론을 내야 하는 문제인데, 철거민과 근로자 입장에선 그런 결과에 승복할 순 없지 않나. 그러니까 자꾸 불법적인 방법으로 자기 의사를 관철하려 하는 경향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의 딜레마다. 우선은 법과 원칙에 따라 처리해야 한다. 다만 그들을 내쳐버리지 말고 꾸준하게 대화하고 설득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어떤 대안이 마련되면 좋고, 그렇지 않더라도 정부의 노력이 전달돼야 한다.”-현 정부는 원칙을 지키면서 소통을 했나.“원칙에 벗어나는 행태에는 적극적으로 개입했지만 그들을 배려하려는 노력은 솔직히 부족했다.”-현 정부의 ‘고소영’ ‘강부자’ 같은 편파 인사, 친기업 정책, 고환율 정책 때문에 갈등이 촉발되거나 증폭된 측면도 있다.“고소영·강부자·고환율·친기업이라고 하는데. 그건 내가 총리를 맡기 전에 나온 지적들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통령하고도 많은 논의를 했다. 대통령의 기업 프렌들리 정책이란 게 대기업 프렌들리가 아니다. 모든 기업을 활발하게 활성화시켜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고 일자리를 만드는 정책이었다. 대통령도 친서민, 중도·실용 노선을 강조했다. 대기업 프렌들리 정책하고는 안 맞는다.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환율 정책이라는 게 어느 정도 국가가 관여해 컨트롤할 수 있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외환 시장과 경제 상황에 따라 정해진다. 정부가 꼭 고환율 정책을 썼다고 이야기하는 건 부분적으로는 맞지 않다. 고소영·강부자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부분적으로 상당한 오해가 있었다. 내가 총리로 취임한 뒤 이와 같은 지적들이 많이 희석됐다.”-총리께선 법관 생활을 34년간 했다. 국민들은 ‘법원 문턱은 높고 판사들은 고압적’이라고 생각한다. 법조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대부분의 법관들은 성실하고 청렴하다. 좋은 결론을 내고 있다. 일부 몇몇 미숙한 사람들 때문에 법원 전체가 불신을 받는다.”-개인 윤리 문제이기 때문에 사법부 개혁이 필요없다는 뜻인가.“(고개를 저으며) 아니다. 한 사람이라도 그런 사람이 있으면 안 되니까 제도를 바꿔야 한다. 법원이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추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법관 시절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 차장을 맡으면서 사법부 개혁에 관여했다. 원하는 성과를 거뒀다고 보나.“솔직히 법원도 많이 달라졌다. 우리 사회 모든 분야가 발전했는데, 거기에 호흡을 맞춰서 법원이 못 따라가면 굉장한 지탄을 받게 될 거다. 국민이 예전에는 법원에 섭섭한 의견을 표출하지 못했다. 지금은 언론과 국민으로부터 감시의 눈이 훨씬 커졌다. 그래서 법원의 문제가 드러나는 것이다. 요즘 법원은 (옛날에 비해) 훨씬 발전하고 향상됐다.”-전관예우 문제는 여전하지 않은가.“전관예우가 허용돼서는 안 된다. 예전에는 전관예우가 상당히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없다. 전관예우와 관련해 법원에서는 억울하게 생각한다. 전관예우는 법원의 이해(利害)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인연 문화를 법률 수요자들이 이용하는 측면이 있다. 최근 들어 전관예우가 많이 희석됐다.” “어머니 영향 가장 많이 받았다”김 총리는 2004년 광주지법원장 시절 매주 전 직원에게 보낸 e메일을 엮어 지산통신을 펴냈다. 지산은 광주지법의 주소지(광주광역시 지산2동)다. 그는 ‘어머니, 우리의 스승’이란 이 책의 글에서 “나에게 가장 영향을 미친 사람은 어머니였다”고 적었다.-어릴 때 집안교육은 어땠나.“한학자였던 아버지는 좀 엄정하고 어머니는 자애로운 분이셨다. 가정교육은 스스로 잘 받고 컸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특히 약자에 대한 배려는 철저하게 배웠다.”-기억에 남는 부모의 가르침은.“누구하고 다툼이 생길 때 상대방이 나보다 약자라고 생각하면 싸우지 말고 양보하라고 배웠다. 그러나 강자이거나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다퉈서 이기라고 하셨다. 우리 집이 웬만큼 살다 보니 일가 친척들이 늘 들락거렸다. 좀 불편했다. 그러나 그런 내색을 하면 어머니가 혼을 냈다. ‘손님이 오면 좋은 집안이 되니 복으로 알아라’고 하셨다.”-중학교 때부터 광주로 갔으면 부모와 일찍부터 떨어져 살았는데.“부모님이 원래 광주에서 살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님이 장성으로 귀향하셨다. 내가 떨어져 하숙하고, 자취하며 살았다. 부모님과 떨어져 살아도 버스로 1시간 거리(20여㎞)니까 주말에 집에 가고, 학교 방학 때는 한 달 넘게 머물렀다. 부모님한테 가정교육은 계속해서 받았다고 할 수 있다.”-자취하며 밥은 언제 처음 지어봤나.“늘 하숙하거나 누나들과 함께 자취했다. 그래서 밥을 지어본 적이 없다. 1978년 서른 살에 독일 유학을 갔을 때 등산을 가서 밥을 지어봤다.”(이 대목에서 그는 계면쩍게 웃었다.)-평생의 좌우명이 있다면.“온유하고, 겸손하고, 절제하는 삶을 살자는 것이다. 그렇게 노력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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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 촉수 뻗친 이야기꾼…허영만·이현세 ‘후계자’
어렸을 적 TV에 나온 고우영·허영만·이현세 등 만화가들을 보며 “연예인 같다”고 생각했던 윤태호 작가. 허영만 화백 문하생을 거쳐 데뷔한 그는 이젠 허 화백과 한 달에 한 번 술잔을 기울이는 애제자가 됐다. 최정동 기자 포털 사이트 다음에 연재 중인 웹툰 ‘미생’. 주간 누적 조회수 800만 회를 기록하고 있다. 바둑특기생 출신 장그래의 회사 생활이 소재다. [사진 위즈덤하우스] 장그래. 이 청년을 모르면 요새 회사원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장그래가 얼마나 유명한지를 말해 주는 사례를 보자. 최근 한화그룹은 국내 10대 그룹 중 처음으로 비정규직 2000여 명을 정규직으로 일괄 전환하겠다고 발표했다. 한화그룹 공식 블로그 ‘한화데이즈’는 이 소식을 “‘미생’의 장그래도 깜짝!”이라는 제목으로 전했다. 한 포털사이트에서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 중 ‘베플(베스트 리플, 댓글 중 추천수가 가장 많은 것)’로 선정된 것도 “장그래씨, 이제 정규직 될 수 있겠네요”였다. 한때 스포츠신문 연재만화 주인공 ‘무대리’가 샐러리맨의 애환을 달래줬다면, 이젠 그 역할을 ‘장그래’가 이어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둑 특기생이지만 입단에 실패한 후 종합상사 인턴을 거쳐 계약직 사원이 된 청년 장그래. 포털사이트 ‘다음’에 연재되는 웹툰 70여 개 중 주간 누적조회수 800만 회를 기록하며 1위를 달리는 ‘미생’의 주인공이다. 얼마 전 100회를 맞은 윤태호(44) 작가의 ‘미생’엔 무한경쟁으로 대변되는 시대의 숨막히는 분위기와, 비록 조직의 부속품일진 모르지만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톱니바퀴 역할을 하는 범인(凡人)들의 사연이 흥미진진하게 그려진다. 만화평론가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는 그를 “거시적 관점과 미시적 관점, 시대와 사람 둘 다 놓치지 않는 이야기꾼”이라고 평한다. “장차 한국 만화계에 (흥행성과 작품성을 겸비한) 스티븐 스필버그 같은 작가가 나온다면 그건 윤태호일 것”이라는 박 교수의 평가는 과찬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현재 한국 만화계에서 “허영만·이현세 다음엔 윤태호의 시대”라는 얘기가 나오는 것만은 사실이다. 윤씨는 이 작품으로 지난해 ‘2012 오늘의 우리만화상’ ‘2012 대한민국콘텐츠대상(만화 부문 대통령상)’ 등을 받았다. 만화 분야의 대표적인 상(賞) 2개를 차지한 것이다. 강우석 감독이 영화화했던 웹툰 ‘이끼’(2007)의 주인공 천용덕. [사진 한국데이타하우스] “만화는 이야기”…'모래시계' 대본 베끼며 공부윤태호라는 이름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건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 종이만화에서 인터넷만화, 즉 웹툰으로 갈아탄 ‘이끼’가 나온 게 2007년이다. ‘이끼’로 문화관광부가 주는 대한민국만화대상 우수상, 부천만화대상 일반만화상을 받았다. 종이를 뚫고 나올 듯한 과감한 화면 연출과 강렬한 비주얼, 현대 사회의 부조리를 정면으로 건드리는 주제의식에 젊은 독자들은 환호했다. 오죽했으면 ‘실미도’ ‘공공의 적’ 강우석 감독이 2009년 영화화 계획을 발표했을 때 “왜 당신이 ‘이끼’를 영화로 만드느냐”는 열혈 웹툰 팬들의 항의에 시달릴 정도였다. 하지만 윤씨는 웹툰 2편으로 하루아침에 뜬 작가는 아니다. 올해가 데뷔 20년이다.많은 만화가가 그랬듯 윤씨도 어렸을 때부터 그림 잘 그린다는 얘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 전북 군산에 살던 초등학생 시절 이미 학교 신문에 4컷 만화를 연재했다. 또래들처럼 TV 속 만화 주인공을 심심풀이로 끼적대는 수준이 아니었다. 교회 지도교사가 오르간 연주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칠판에 분필로 인물 데생을 할 정도였으니 차원이 달랐다. 친구들이 운동회 매스게임 연습하느라 땡볕에서 땀 흘릴 때 그늘에서 표어를 만들거나, 숙제를 안 해 간 대신 수채화를 그려 갈음하는 ‘특혜’를 누리곤 했다. 만화가가 되겠단 생각이 딱히 있던 건 아니었다. 고우영·신동우·허영만·이현세 등 당시 TV에 나오던 만화가들은 그때까진 연예인 같은 존재였다. 그림은 친구를 쉽게 사귈 수 없었던 그에게 탈출구였다. 아버지가 하던 일이 기복이 워낙 심했던 탓이었다. “결혼할 때 주민등록초본을 떼어보니 이사 다닌 주소지만 4장이 넘을 정도”로 자주 주거를 옮겨야 했다. 적응할 만하면 떠나야 하니 친구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게 쉽지 않았다. 악건성 피부도 약점이었다. 옷 벗고 개울에서 헤엄쳐야 할 나이에 그는 장난치며 노는 친구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집안 형편과 신체적 조건 때문에 움츠러든 자존심을 붙들어준 건 오로지 하나. ‘나는 그림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삿짐 실은 트럭이 고속도로를 달릴 때까지도 이사할 집이 정해지지 않은 경우”가 있을 정도로 어려웠던 집안 형편은 끝내 나아지지 않았다. 미대 진학의 꿈은 접어야 했다. 고교 시절을 보낸 광주를 떠나 만화학원을 다니겠다고 무작정 서울로 온 게 열아홉 살 때인 1988년이었다. 88올림픽을 앞둔 당시의 서울은 그의 눈엔 낯설기 짝이 없었다. 사촌형 하숙방에서 신세를 졌지만 마음이 편치 않아 이내 길거리로 나왔다. 신문지를 이불 삼아 하루 한 끼 라면 먹고 지내던 몇 달간의 노숙생활은 뜻밖에도 그를 허영만 화백의 문하생이 될 수 있는 길로 연결해 줬다. 대치동 은마아파트 앞에서 먹고 자던 그에게 다른 노숙자가 “허영만 화백 작업실이 이 아파트에 있다더라”고 알려준 덕이다. 몇 번 거절당한 후 가까스로 문하생이 된 그는 오늘날 애주가인 허 화백과 한 달에 한 번 술잔을 기울이는 애제자가 됐다.윤씨는 문하생 시절을 “성취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이글이글 불타던 때”라고 회고했다. 과시라도 하듯 화실 책상 위에 자신이 그린 그림을 펼쳐 놓고 잠도 그 위에서 엎드려 잤다. “나는 왜 가난할까, 나는 왜 공부를 못했을까, 나는 왜 피부가 좋지 않아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을까 하는 열등감”을 깨뜨릴 수 있는 건 오로지 그림 외엔 없었다. 2년 후엔 조운학 화백의 화실로 옮겼다. 데뷔는 93년, 다른 작품으로 여덟 번이나 퇴짜를 맞고 『월간 점프』에 ‘비상착륙’을 발표하면서였다. 그는 자신의 데뷔작을 ‘쓰레기’라고 부르기를 서슴지 않았다. “스토리는 형편없는데 ‘나 이 정도로 그림 잘 그려’라고 과시하고 싶어 몸이 달아 있는 게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죠.”석 달이나 공들여 그린 40쪽짜리 작품이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뼈아픈 평가를 스스로 내린 후 그는 스토리텔링 능력을 키우는 데 주력했다. “만화는 그림이 아니라 결국 이야기”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드라마 ‘모래시계’ 대본을 구해 필사를 하며 구성력에 대한 각오를 다지기도 했다. “그때까지 그림만 그리던 손의 습관을 바꾸자는 결심을 했어요. 소설만 열심히 읽으면 스토리텔링 능력이 저절로 생긴다고 여긴 생각이 어리석다는 걸 깨달았죠.” 이후 그는 ‘혼자 자는 남편’ ‘연씨별곡’ ‘로망스’ ‘발칙한 인생’ 등을 발표하며 차근차근 이력을 쌓아 나간다. 신안 보물선 도굴꾼 다룬 웹툰 준비 중윤씨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시대성’이다. 스스로도 “시대를 먼저 떠올려야 아이디어가 나온다”고 말한다. 사회 부조리를 짚어내고 지금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내면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현실감각이 애독자들이 꼽는 윤태호 만화의 강점이다. 시대를 짚어내는 더듬이가 남달리 발달된 이유는 아마도 5·18 항쟁의 도시 광주에서 사춘기를 보낸 점, 육성회비를 내지 못할 정도로 유복하지 못한 환경에서 자란 점 등과도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회성 짙은 소재에 만화적 상상력을 입혀 얼마든지 극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 예가 초기작인 ‘야후’(98년)다. 그에게 처음으로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안겨줬던 이 작품은 건물 붕괴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소년이 사회 모순에 분노를 느끼고 권력층을 무차별 응징한다는 내용이다. 그는 성수대교 붕괴에서 느꼈던 황당함과 분노 때문에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됐다. ‘이끼’에선 의문의 살인사건이 벌어진 외딴 마을을 우리 사회의 압축판으로 삼아 권력 관계에 반응하는 인간 군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미생’은 앞의 두 작품보다 시쳇말로 ‘센’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바둑에 빗대 인생을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기록한다는 점에서 시대적 리얼리티는 결코 뒤지지 않는다. “과장이 부장보다 높은 줄 알았다”고 할 정도로 기업 생리와 회사원 생활에 대한 지식은 전무했지만, 3년에 걸친 사전 준비기간 중 열성적인 취재를 통해 넘어서려 애썼다. “왜 대한민국 샐러리맨들이 밤마다 술자리를 전전하는지, 나를 하찮은 존재로 만드는 상사와 회사와 사회에 어떤 좌절감을 느끼고 있는지를 성공신화가 아니라 소소한 회사 생활을 통해 보여주려 했어요.”그는 두 개의 차기작을 계획 중이다. 하나는 인천상륙작전을 소재로 한 일간지 연재이고, 다른 하나는 신안 보물선 도굴꾼을 소재로 한 웹툰이다. 현실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평소 보수·진보 성향 신문을 비교하며 읽는다는 그가 혹시 만화가가 되지 않았다면 지금 뭘 하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전혀 꿈도 꿔본 적 없어요. 슬럼프가 올 때도 책상 앞을 떠나지 않습니다.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까지 스스로에게 기합을 준다는 생각으로 그냥 앉아 있어요. 노력하는 것만큼은 자신 있어요. 워낙 어려운 데서 시작했기 때문에 바닥에 떨어지는 게 두렵지 않아요. 지루하긴 하지만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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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패션 바라보는 시각 확 달라져”
관련기사 체크 무늬? 전통 창호 무늬로 관객들 매료 “한국 패션을 보는 시각이 달라진 걸 피부로 느꼈다.”2013년 FW 뉴욕 패션위크 개막 행사로 자리 잡은 ‘컨셉코리아’를 위해 뉴욕을 찾은 홍상표(56) 한국콘텐츠진흥원장의 말이다. 2009년 처음 선보인 이 행사는 올해로 일곱 번째 시즌을 맞는다.초반엔 시행착오도 있었다. 반응도 시큰둥했다. 그러나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뉴욕 패션위크 첫날 공식 프로그램으로 진행해 오자 이제는 태도가 달라졌다. 컨셉코리아에 데뷔하는 한국 디자이너가 뉴욕 패션계에서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다음은 홍 원장과의 일문일답.-일곱 차례 ‘컨셉코리아’를 개최하면서 달라진 점은 뭔가.“첫 두 시즌엔 한국의 패션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뉴욕 패션계도 호기심은 보였지만 디자이너를 직접 접촉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3·4시즌으로 이어지니까 참가 디자이너의 작품을 구매하는 바이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5·6시즌엔 100만 달러 가까운 계약이 성사됐다. 특히 뉴욕 패션계 신예 디자이너의 등용문으로 꼽히는 오프닝세리머니가 컨셉코리아를 보고 한국 디자이너 작품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스티브J&요니P’에 이어 올해는 계한희 디자이너의 작품이 오프닝세리머니 매장 다섯 곳에 진출한다.”-정부가 자국 디자이너를 후원하는 행사가 뉴욕에선 낯선데.“한국 패션계도 아시아에선 알아주지만 아직 디자이너 개인 힘만으로 뉴욕이나 파리·밀라노의 문을 두드리기엔 역부족이다. 그 길을 열어주려는 거다. 최근 브릭스(BRICS) 국가들도 자국 패션을 세계에 알리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패션을 알리면 라이프스타일과 문화가 전해지고 자연히 그 나라 상품이나 인재에 대한 수요도 늘어난다. 예컨대 지난해 브라질은 뉴욕 최대 백화점 메이시스와 함께 패션 및 문화 알리기 행사를 했다. 인도는 뉴욕 패션위크를 창설한 펀 맬리스를 수시로 초대해 자국 디자이너를 만나게 하고 그들의 작품을 접하게 한다. 뉴욕에서 중국 디자이너와 모델이 약진한 데도 중국 정부의 ‘보이지 않는’ 지원이 있었다.”-한 시즌에 5명의 디자이너를 소개하는 건 좀 많다는 지적도 있다.“초기엔 되도록 많은 디자이너에게 기회를 주자는 취지에서 5명을 선발했다. 런웨이 방식 대신 모델들을 한자리에 세워놓고 작품을 선보이는 프레젠테이션 방식을 택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번부터 런웨이 방식으로 바꾸면서 5명은 많다는 지적이 안팎에서 나왔다. 다음 시즌부턴 세 명 정도로 줄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뿐 아니라 뉴욕이나 파리·밀라노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에게도 문호를 여는 방안 역시 고려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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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크 무늬? 전통 창호 무늬로 관객들 매료
7일(현지시간) 뉴욕 링컨센터에서 열린 ‘컨셉 코리아 2013 FW’. 국내 디자이너 5명의 합동 패션쇼는 해외 언론과 패션계 인사들의 호평을 받았다. 왼쪽부터 최복호·계한희·김홍범·이상봉·손정완의 의상들. [사진 한국콘텐츠진흥원] 관련기사 “한국 패션 바라보는 시각 확 달라져” 세계 4대 패션 컬렉션 중 하나인 뉴욕 패션위크가 개막한 7일(현지시간) 오후 링컨센터 ‘더 스테이지(The Stage)’. 한국 디자이너들이 합동 패션쇼를 꾸미는 ‘컨셉코리아’ 현장은 뉴욕 패션계 인사와 셀레브리티는 물론 취재에 나선 현지 언론 등 700여 명이 몰려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컨셉코리아’는 문화체육관광부·한국콘텐츠진흥원·대구광역시·한국패션산업연구원이 함께 주관하는 ‘글로벌 패션 프로젝트’. 한국의 패션 문화를 세계에 알리고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의 해외 진출을 지원하는 행사다. 2009년 가을 첫발을 뗀 뒤 이번이 일곱 번째다. 주최 측과 디자이너들이 행사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계한희·이상봉·홍상표(한국콘텐츠진흥원장)·손정완·김홍범·최복호 디자이너. 이날 행사에는 계한희·김홍범·손정완·이상봉·최복호(가나다순) 등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5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한국의 문화가 흐르다’(流, Rhythm of Korea)라는 주제로 옴니버스 형식의 런웨이를 꾸몄다.특히 이번 패션쇼에서는 퓨전 국악과 어우러진 무대가 마련됐다. 개막과 함께 울려 퍼진 경쾌한 북소리에 맞춰 5명의 한국 디자이너가 작품을 만드는 과정이 오버랩됐다. 장면이 바뀌면서 퓨전 국악 리듬에 맞춰 모델들이 캣워크를 시작했다.첫 무대는 검정과 흰색 바탕 위에 주술적인 문양으로 시선을 잡아 끈 최복호의 작품. 그의 작품은 늘 화려한 색상과 과감한 표현으로 보는 이의 시선을 붙들었다. 지나치게 무거워지는 분위기를 빨간색 포인트가 살려줬다.이어진 김홍범의 무대는 튀지 않는 무채색이 주를 이뤘다. 세련되고 도시적인 디자인으로 심플하지만 디테일이 돋보이는 작품을 선보였다. 자칫 무료해질 수 있는 실루엣에 가죽과 모피로 포인트를 줘 신비로운 느낌을 살려냈다.바이올렛 색상과 여성스러운 실루엣은 손정완 패션의 ‘공식’이다. 올해는 추상화가 칸딘스키의 구성 시리즈와 캐서린(예카테리나) 궁전에서 얻은 영감을 세련되게 표현했다. 음악을 작곡하듯 그림을 그렸던 칸딘스키의 느낌을 패션 속에 녹여냈다.국민 디자이너 이상봉은 한국 전통 창호를 패션 디자인에 접목했다. 서양의 체크 무늬와는 다른 동양적인 선에 관객들이 매료됐다. 작곡가이자 가수 니온 히치는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도 이상봉 선생 작품”이라며 “오늘 작품은 무늬와 색상이 독특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마지막 무대를 장식한 계한희는 20대 디자이너답게 실험정신이 돋보였다. 버려지는 포장용지를 재해석한 이미지, 노숙자 패션에서 볼 수 있는 통 큰 실루엣, 얼핏 보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옷을 여려 겹 겹친 부조화를 통해 20~30대 젊은 세대의 불안한 심리를 포착해 냈다. 서울(Seoul)이란 글자를 그래피티화한 것이나 서울역과 해골을 이용한 엠블럼에서도 젊은 감각이 엿보였다. 계씨는 “청년실업이란 주제는 주변 친구들한테서 영감을 얻은 것인데 지금 뉴욕에서도 큰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며 “이런 무거운 주제를 재미있고 밝게 풀어보고 싶었다”고 작품을 설명했다.이에 대해 뉴욕 패션계 마당발로 통하는 말릭사 시크는 “청년실업 문제를 패션 디자인의 주제로 삼은 건 도발적이면서도 재미있다”며 “그의 옷을 보면 돈이 없어도 얼마든지 옷을 잘 입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는 “스트리트패션을 하이패션으로 승화한 솜씨가 20대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세련됐다”며 “요즘 뉴욕에선 옷을 몸에 꼭 맞게 입는 게 유행인데 거꾸로 헐렁한 박스형 디자인을 과감하게 도입한 게 신선했다”고 덧붙였다.이날 패션쇼엔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와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의상 스타일링을 맡았던 패트리샤 필드와 뉴욕 패션위크 창시자 펀 맬리스, 미국 언론 왕 윌리엄 허스트의 증손녀이자 패션모델인 리디아 허스트도 다녀갔다. 허스트는 “한국 패션이 이처럼 다이내믹한 줄은 몰랐다”며 “톡톡 튀면서도 세련된 작품에 매료됐다”고 말했다. 패트리샤 필드의 수석 스타일리스트 리오 쿠쿠는 “이번 쇼는 아주 개념적(conceptual)이었다”며 “늘 새로운 것에 목말라하는 뉴요커들에게 ‘컨셉코리아’의 신선한 감각은 청량제 같다”고 평했다. 그는 “컨셉코리아가 한국 디자이너들의 뉴욕 진출에 교두보가 되고 있다”며 “한국 디자이너가 뉴욕에서 얼마든지 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패션쇼가 진행되는 동안 무대 앞은 국내외 언론의 취재 열기로 뜨거웠다. CNN과 CNBC 방송은 사전 인터뷰에 이어 현장 취재까지 했고 월스트리트저널과 로이터통신도 이틀에 걸쳐 관계자를 인터뷰했다. 패션잡지 보그와 스타일 등의 취재진도 현장에서 쇼를 지켜봤다. 공식행사가 끝난 뒤에는 행사장 인근의 스탠더드 호텔에서 ‘애프터파티’가 열려 그 열기를 이어갔다. 디자이너 이상봉은 “패션쇼도 패션쇼지만 해외 유명 언론과 바이어, 패션업계 종사자들이 한데 모인 이번 파티를 통해 디자이너와 뉴욕 현지 관계자들의 자연스러운 만남이 이루어졌다”며 “뉴욕 현지 네트워킹 강화는 물론 현지 정착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뜻깊은 자리였다”고 밝혔다.행사를 기획한 한영아 총괄 감독은 “요즘 뉴욕 패션가 어디를 가도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며 “여기다 자동차·휴대전화 등 한국 상품도 고급품 대열에 끼면서 한국 패션과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패션과 문화는 한번 익숙해지면 한국과 한국 기업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는 폭발력이 있다”며 “한류 바람이 불 때 한국 패션을 더 알리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이 같은 관심은 실제 구매로도 이어지고 있다. 이번 패션쇼에 참가한 김홍범씨는 “과거엔 우리가 뉴욕 바이어들을 찾아 다니며 만나 달라고 사정해야 했지만 ‘컨셉코리아’ 참가 이후엔 먼저 연락해 오는 바이어가 생기기 시작했다”며 “벌써 약속 스케줄이 줄줄이 잡혀 눈코 뜰 새 없다”고 말했다. 이번에 참가한 5명의 디자이너는 지난해 봄 시즌 패션쇼 후 각기 현지 세일즈 쇼룸에 입점했다. 계씨는 지난봄 시즌 참가 후 뉴욕 디자이너의 등용문이자 대표적인 편집매장인 ‘오프닝세리머니’에 입점하기도 했다. 오프닝세리머니는 미국의 퍼스트레이디 미셸 오바마의 무도회 드레스를 두 번씩이나 만들어 화제가 된 제이슨 우 등이 거쳐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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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시설 나눠먹기로 지자체 통합 뒤탈 막으려다…
경남 창원시 진해구 여좌동 옛 육군대학 부지. 해발 528m의 장복산을 배경으로 완만하게 경사진 28만㎡의 부지에는 수십 년 된 아름드리 나무가 잘 보전돼 있다. 높은 곳에서는 멀리 바다도 볼 수 있다. 창원시가 지난달 30일 프로야구 제9구단인 창원 NC다이노스의 전용 야구장 건설 부지로 확정, 발표한 곳이다.부지 정문에서 조금 내려오면 360여개 점포가 몰린 진해중앙시장이다. 거리 곳곳에 ‘야구장 부지 확정’을 환영하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다. 시장 상인 박성훈(45)씨는 “상인들은 뭐라도 들어오면 다 환영하는 분위기”라며 “야구장이 들어오면 지역 경제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4개 도로망 확충되면 진해 구장 접근성 높아져” 야구계, 진해 부지 선정에 우려감하지만 신규 구장 부지에 대해 야구계의 눈길은 차갑다. 시즌 중 주 2∼3회씩 경기가 펼쳐지는 야구장의 입지를 고려할 때 인근 지역의 인구와 접근성이 가장 중요한데 진해 부지는 이런 점을 충족하기 어렵다는 게 이유다. 결정 과정에서 당사자인 NC다이노스 구단과 한국야구위원회(KBO)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다. KBO 양해영 사무총장은 “NC구단은 물론 KBO도 선정된 구장 부지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며 “야구계의 희망을 저버린 부지 선정 과정에 대해 용역 보고서 공개 등을 요구했지만 응답이 없어 창원시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상태”라고 말했다. 지난해 창원시의 구단 부지 평가작업에 참여했던 동명대 전용배(체육학과) 교수는 “배경 인구를 보자면 창원시는 9개 구단 중 가장 작은 시장인데, 그중에서도 외진 곳인 진해(인구 18만 명)에 구장을 짓겠다는 건 야구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KBO와 NC는 불만이 크지만 적극적인 의사표현을 못한 채 속앓이를 하고 있다. 당장 NC는 올해부터 1군에 참여해 현 마산구장을 연고지로 시즌을 보내야 한다. 그래서 창원시와 갈등을 빚는 게 부담스럽다. NC다이노스 이태일 대표는 “우리는 야구장이 가장 활성화될 수 있는 최적의 입지를 희망하는 것일 뿐 어떤 지역은 안 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며 “창원시는 진해 구장의 적기 완공과 접근성 문제 해결을 위해 시민, 구단, KBO 등과 사전 협의를 통해 구체적이고 책임 소재가 분명한 실천 로드맵을 제시해 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부지를 진해로 정한 창원시의 입장은 확고하다. 야구장 부지를 결정하는 것은 창원시의 고유 권한이며, 통합 창원시의 장기적 발전을 위해 최적의 부지를 선정했다는 입장이다. 창원시 황양원 문화체육국장은 “야구장 입지로는 물론, 장래 진해와 통합 창원시의 발전을 위해서도 최적의 선택”이라고 말했다. 황 국장은 “KBO와 약속한 2016년 3월까지 구장을 완공하기 위해 행정 전문가들로 구성된 사업단을 4일 발족했다”며 “각종 행정절차와 건설을 동시에 진행해 차질 없이 구장을 완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소지역주의 갈등이 근본 이유야구장 부지 문제는 빙산의 일각이다. 정작 창원 시내를 돌아보면 현재 시민들의 관심사는 야구장이 아니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공무원·시의원은 물론 시민 대다수가 야구장은 진해로 이미 확정된 것으로 본다. 진해중앙시장 번영회 하영옥 회장은 “해군의 단계적 축소와 지역 사업체의 부진으로 어려운 진해에 야구장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선정된 부지를 다시 바꾸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창원 시민들의 관심은 야구장 부지 위치보다 통합 시청사 이전에 쏠려 있다. 2010년 7월 창원·마산·진해시가 합쳐져 출범한 통합 창원시는 아직 통합 시청사를 지을지, 짓는다면 어디에 지을지 못 정한 상태다.통합 시청사 문제를 결정해야 하는 시의회 내부의 반목은 뿌리 깊다. 창원·마산·진해 출신 의원 3명씩으로 구성된 의원협의회가 5일 3차 회의를 했지만 의견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황일두 시의원(마산 교방·노산)은 “마산 시민들의 주장은 2010년 2월 통합준비위원회 합의를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라며 “창원 쪽 의원들이 합의 정신을 무시하려는 게 문제”라고 주장했다. 당시 통합준비위원회는 통합시 명칭은 창원시 통합 청사는 마산·진해 1순위, 창원 2순위 용역을 통해 시의회가 결정한다 등의 내용을 합의했다. 김동수 시의원(창원 북면·의창동)은 “합의 내용은 순위와 상관없이 마산·진해·창원 후보지 중 최적지를 정하라는 뜻”이라며 “마산 의원들이 합의 내용을 근거 없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는 게 문제”라고 엇갈린 해석을 했다. 마산 시민들은 강경하다. 마산살리기 범시민연합 조용식 회장은 “시의회 임시회가 끝나는 3월 초까지 통합 청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며 “합의 정신대로 되지 않으면 상상을 넘어서는 강경 대응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시의원은 통합 청사 마산 이전이 안 되면, 통합시의 이름을 창원시에서 마산시로 되돌릴 것을 주장하고 있다. 결국 3개 지자체의 통합이 무리하게 이뤄지면서 각종 개발사업이나 시설 유치를 두고 소지역 간 다툼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야구장 부지 선정에도 이런 소지역 갈등이 자리 잡고 있다. 시민들 자발적 합의 없었던 게 문제창원대 강정운(행정학과) 교수는 “통합을 빨리 추진하기 위해 대형시설을 각 지역에 선물로 주려다 보니, 야구장이나 시청 등 시설을 가져와야 지역 균형발전이 될 것처럼 주민들이 인식한다”고 말했다. 시민과 공무원, 의원 등 모든 이해관계자가 ‘시설 유치=지역발전’이란 프레임에 빠져 있다는 얘기다.홍준표 경남도지사가 지난해 도지사 보궐선거 새누리당 경선 과정에서 ‘도청 청사 마산 이전’을 들고나온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현재 창원에 있는 경남도청을 마산으로 옮기겠다는 얘기다. 홍 지사는 이 밖에 진주에 제2도청사를 짓고 진해에는 경상대 의대 캠퍼스 이전 또는 신규 의대 유치 등을 내걸었다. 하지만 현재는 이런 입장에서 한발 물러서 있다. 홍 지사는 4일 “우선 현안인 창원시청사 문제가 매듭지어진 뒤에 시민과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 도청사 이전을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부에서는 아예 통합을 되돌리자는 말도 나온다. 실제 지난해 도지사 선거 때 권영길(무소속) 후보는 “시민들의 합의 없이 통합이 졸속으로 이뤄져 문제가 컸다”며 “통합을 취소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이처럼 지자체 통합 과정에서 불거지는 갈등은 창원만의 일이 아니다. 여수시가 대표적인 사례다. 1998년 여수시와 여천시, 여천군이 통합한 지 올해로 15년째지만 여전히 여수에는 시청사가 세 곳이다. 통합 청사 위치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해 통합 전 각 지자체의 청사가 모두 그대로 남아 있다. 현재 통합을 추진 중인 곳만도 전북 전주시와 완주군 충북 청주시와 청원군 충남 홍성군과 예산군 등 여러 곳이다. 창원이나 여수와 비슷한 문제가 앞으로도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창원대 강정운 교수는 “어쨌건 통합을 해야 한다면 적어도 통합시의 명칭이나 시청사 등 상징적인 사안은 법적으로 확실하게 매듭짓고 시작해야 한다는 게 창원의 교훈”이라고 말했다. 한국매니페스토 실천본부 이광재 사무총장은 “시민의 자발적 합의 없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진행되는 지자체 통합의 모든 문제가 담겨 있는 사안”이라며 “정부도 통합 이후 과정을 지자체에만 맡기지 말고 갈등 사안의 합의 절차를 담은 매뉴얼을 만드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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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은 임영신 지난해 여야 3당 모두 여성 당수
관련기사 여성 대통령 탄생은 편견 깨는 첫걸음일 뿐 … 국회의장· 대법원장도 나와야 대한민국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는 1948년 실시됐다. 198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됐지만 여성은 없었다.헌정 사상 첫 여성 국회의원은 1949년 치러진 보궐선거(경북 안동)에서 탄생했다. 임영신(1899~1977·사진) 전 상공부 장관이다. 임 전 장관은 미국 남캘리포니아대학에서 공부했고 1945년 ‘대한여자국민당’을 창당했다. 미국에서 인연을 맺은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 초대 상공부 장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일부 상공부 간부는 “서서 오줌 누는 사람이 어떻게 앉아서 오줌 누는 사람에게 결재를 받느냐”고 했다. 임 전 장관이 국회의원이 된 뒤에도 “이승만 대통령이 뒤에서 지원하고 본인이 돈을 뿌려 당선됐다”는 말이 돌았다.2대 국회에선 임영신 외에 대한부인회 소속 박순천(1898∼1983)도 의원이 됐다. 박순천은 민주당 창당 후 총재가 돼 첫 여성 당수란 기록도 세웠다. 하지만 국회에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남성 의원의 인신 공격을 받았다. 이에 박순천은 “나랏일이 급한데 암탉 수탉 가리지 말고 써야지 언제 저런 병아리를 길러서 쓰겠느냐. 암탉이 낳은 병아리가 저렇게 꼬꼬댁거리니 길러서 쓰려면 아직도 멀었다”고 응수했다.이후 여성 의원은 3~8대 국회까지 1~5명에 불과했다. 여성 의원 수가 두 자릿수가 된 건 9대 국회(1973년·12명) 때다. 16대 국회 들어선 20명을 넘겼고, 17대 국회 땐 39명으로 두 배 가까이로 늘었다. 이후엔 42명(18대)을 거쳐 19대 국회 들어 47명이 됐다. 이는 공천을 받는 여성 후보자 수가 증가한 것과 무관치 않다. 16대 때는 전체 후보자 중 5.9%(69명)였지만 17대 때는 13%(156명)로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17대부터 비례대표 50% 여성 할당제가 의무화됐기 때문이다.2006년 노무현 정부는 재선 의원 출신이자 초대 여성부 장관을 지낸 한명숙씨를 헌정 사상 첫 여성 총리에 임명했다. 김대중 정부가 2002년 장상 전 이화여대 총장을 첫 여성 총리로 지명했으나 국회에서 인준동의안이 부결되면서 무산된 뒤였다.지난해 1월엔 여야 3당의 간판을 모두 여성이 맡았다. 한나라당 박근혜 비대위원장, 민주통합당 한명숙 대표, 통합진보당 이정희 공동대표다. 이에 대해 송호근 서울대(사회학) 교수는 “대한민국 60년은 마초 남성 지배 시대였다. 그러던 것이 한 갑자를 지나서야 바야흐로 모성 정치 시대를 맞이했다”고 평가했다. 2013년엔 동북아시아 3국 가운데 한국에서 처음으로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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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대통령 탄생은 편견 깨는 첫걸음일 뿐 … 국회의장· 대법원장도 나와야
여성 의원 4명이 지난달 31일 중앙SUNDAY편집국에 모여 대화를 나눴다. 왼쪽부터 민주통합당 이언주·유은혜 의원, 새누리당 이혜훈 최고위원·김희정 의원. 최정동 기자 관련기사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은 임영신 지난해 여야 3당 모두 여성 당수 [On Sunday] 여성 의원들이 열받은 이유 여성 대통령 탄생의 의미이혜훈 최고위원=21세기를 지배하는 세 키워드가 ‘3F’, 여성성(feminity), 감성(feeling), 상상력(fiction)이다. 여성 대통령 탄생은 시대적 흐름이다. 주요 20개국(G20) 국가를 보면 박근혜 당선인을 포함해 여성 대통령과 총리가 여섯 명이나 된다. 한국은 한·중·일 3국 중 제일 먼저 그 흐름을 받아들였다.김희정 의원=미국에서도 여성 대통령보다 흑인 대통령 탄생이 먼저였다. 많은 이들이 인종보다 남녀 벽을 넘기 힘들 거라 했다. 한국처럼 가부장적이고 유교 문화가 뿌리 깊은 곳에서 여성 대통령이 나왔다는 건 어떤 사회 변혁보다 확실한 사회적 메시지다. 오바마 대통령은 흑인 인권 운동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흑인을 바라보는 전 세계의 시선을 바꿨다. 박근혜 당선인도 그동안 많은 일을 한 여성 운동가들 이상의 일을 할 거라 기대한다.유은혜 의원=여성 대통령이 당선된 건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데 꽤 역할을 했다. 하지만 존경받는 여성 대통령이던 타르야 할로넨 전 핀란드 대통령은 2012년 방한 당시 “선거에서 여성과 남성이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정책 내용이고 그가 걸어온 방향이다. 한국에도 유력 여성 후보가 있다는 건 유권자들에게 선택지가 넓어진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했다. 단순히 여성이기만 한 게 아니라 걸어온 길, 지향점, 정책 역시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될 거다.이언주 의원=리더를 뽑을 때 예전보다 여성이냐 남성이냐를 선택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는 건 한국 사회가 상당히 선진화된 거다. 하지만 여성으로서 유리천장을 뚫고 리더로 올라온 모습을 많이 보였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물론 박 당선인도 정치권에서 여성이었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고 그걸 극복한 게 없진 않을 거다. 하지만 부인하기 힘든 건 전직 대통령의 딸이라는 프리미엄이다. 우리도 (여성 프리미엄) 그런 부분이 있었을 텐데, 앞으로는 여성도 배경과 상관 없이 경쟁해 커가는 환경이 정착됐으면 한다.유은혜=여성 의원 수가 많아진 건 2004년부터 비례대표에 여성을 50% 공천하는 제도가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동등한 경쟁 구조에서 여성들이 살아남기엔 아직 우리 환경이 부족하다. 사회 각계에서 의사를 결정하는 구조에 있는 여성은 아직 10%가 안 된다. 박근혜 당선인은 프리미엄이 없진 않았겠으나 당 최고 지도자로서 10여 년간 본인이 노력해 성과를 거둔 건 인정해야 한다. 김희정=설이면 어른들이 남자애들한테는 ‘장군감이네, 국회의원 해라’고 덕담하고 여자애들에겐 ‘미스코리아나 현모양처 돼라’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많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여자애에게 ‘대통령 돼라’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다. 이젠 여성 대통령이 나왔으니 손녀나 딸에게 ‘뭐든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박 당선인에게 프리미엄이 있지 않았겠느냐 하는데 처음엔 분명 있었을 거다. 그런데 그건 데뷔까지다. 그 프리미엄을 넘어 고위직으로 올라가는 건 자기 능력이다. 여러 여성 의원이 있지만 박 당선인, 추미애 의원을 빼곤 대부분 비례대표로 등단한 분들이다. 역시 (여성) 프리미엄인 거다. 이언주 의원이 (경기 광명을이 지역구이던) 전재희 전 의원을 꺾었다. 하지만 이 의원이 라이벌인 전 의원에게 도움 받은 면이 있다. 여성 의원을 지역구 의원으로 경험해 본 주민과 그렇지 않은 주민 앞에서 여성 정치인으로 선거운동하는 것엔 굉장한 차이가 있다. 전재희 전 의원을 이미 뽑아본 사람이기 때문에 이언주 의원에게도 여성이란 거부감이 없었을 거다. 그런 면에서 여성 대통령을 뽑아본 사람들에게 우리도 분명히 많은 도움을 받게 될 거다.이언주=전적으로 동의한다.유은혜=제 지역구(일산 동구)가 한명숙 전 총리(가 의원을 했던) 지역이다. 그 옆(일산 서구)에도 김영선 전 의원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보통 ‘여자가 무슨 정치냐’ 하는데 일산의 유권자들에게 ‘여자냐 남자냐’는 첫 번째 기준이 아니다. 나보다 먼저 여성이 의원을 했었고 경쟁자도 여성이 많았기 때문에 여성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게 선거 때 많은 도움이 됐다. 여성 의원을 경험해본 유권자들은 여성 대통령을 뽑는 징검다리 역할도 하지 않았을까. 여성 대통령을 통해 (가능성이) 더 확장될 거라 생각한다. 한국에서 여성 정치인의 삶유은혜=2004년부터 정당 활동을 했다. 남편이 같은 운동을 했던 사람이다. 모든 여성이 그렇지만 육아·가사 부담이 사회 활동을 어렵게 한다. 여성이 충분히 발전하기 위해선 다른 여성의 희생이 꼭 뒤따랐다. 대부분 친정엄마·언니나 동생이 그 역할을 한다. 난 그 역할을 시어머니가 해준 케이스다. 시부모님과 같이 사는데 시어머니가 멘토이시다. 아이도 봐주고 집안 살림도 봐주셔서 상대적으로 부담을 덜 느끼면서 일했다. 가족의 배려가 없었다면 참 힘들었을 거다.이언주=정치권에 오기 전 기업 임원으로 있었다. 그때도 바빴지만 지금은 스케줄이 예측 불가능하고 사생활은 보호되지 않아 더 힘들어졌다. 남편이 든든한 지원군이다. 처음엔 정치한다고 하니 말리더라. 대중에게 노출되는 삶이니 상처 받을 일이 많을 거라는 거다. 하지만 결국 이해해줬다. 그런 면에서 나도 운이 좋은 편이다. 한국에서 워킹맘의 삶은 거의 전쟁이다. 선거운동할 때 아이 볼 사람이 없을 때가 있었다. 아들을 데리고 다녔는데 사람들과 악수하는데 (아들이) 뒤에서 잡아 끌고 울더라. 사람들이 ‘저 사람 정치에 전념할 수 있을까’ 생각할 것 같아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지만 장점도 있다. 육아에 관심 많은 엄마·아빠들과 공감대가 잘 형성된다. 이혜훈=시아버님(김태호 전 내무부 장관)이 오래 정치를 하셨기 때문에 남편이나 시댁은 정치인 가족으로 산다는 게 어떤 희생을 수반하는지 안다. 정계 입문 전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정책 컨설팅을 했었는데 국회에 설명해도 못 알아듣는 게 답답했다. 직접 국회에서 정치를 하면 답답함은 줄일 수 있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시아버님이 돌아가시니 가족들이 (내가) 정치를 하게끔 이야기하더라. 그런데 애들이 힘들어했다. 첫 선거 때 아파트로 이사를 가고 다음 날 막내가 초등학교 입학식을 했다. 그런데 눈도 많이 왔고 아파트가 비슷비슷해 애가 집을 못 찾아왔다. 오전 11시면 끝나는 입학식인데 오후 7시에 경찰서에서 찾았다. 평생의 첫 입학인데 가족은 아무도 못 가고 아줌마가 데리고 오게 했는데 엇갈렸다. 누구나 가정과 일을 양립하는 게 힘들지만 정치는 주말도 없고 한밤도 없어 더 어려운 것 같다.김희정=(지역구가 부산이어서)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애 둘을 데리고 오갈 때가 있다. 우리 애들은 아직 어린데도 비행기나 KTX를 굉장히 많이 타 안쓰럽다. 일과 가정의 양립은 어렵다. 여성 정치인은 소수라서 아무래도 주목은 받는다. 하지만 2003년 처음 선거운동을 다녔을 땐 지금보다 어려서인지 사람들이 나에게 ‘어느 후보 딸이라고요?’ 묻더라. 조금 늙수그레하게 하고 다니면 ‘누구 사모님이냐’고 물어본다. 여성이 지역구 의원을 준비한다는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할 때라서 내가 후보라는 걸 설명하는 데도 굉장히 시간이 걸렸다.이혜훈=구의원·시의원을 대동해 재래상가에 가면 사람들이 제일 포스(힘) 있어 보이는 남자가 국회의원이라 생각하고 인사한다. 여자가 국회의원이라고 생각 안 하는 거다. 물론 여성 프리미엄도 있다. 공천 때도 기획상품처럼 같은 이력서를 가진 남성들보다 발탁이 빨리 된다. 하지만 본선에선 프리미엄이 아니라 약점이다. 과거 선거운동을 나가면 ‘뭐 여자야? 재수 없어’ 이런 말을 많이 들었다.장수하는 여성 정치인 드문 이유이혜훈=남성 정치인이 여성 정치인을 보는 시각 때문에 성장의 한계를 느낀다. 의정 활동을 잘하고 많이 사랑받은 여성 정치인이 공천에 탈락하기도 한다. 남성 정치인에겐 들이대지 않는 잣대를 들이대면서 공천에서 배제한다. 독자적인 정치인으로 대우하기보다 보조 수단, 서포터스 정도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여성 정치인이 서포터스의 위상을 벗어나 자기 경쟁자로 자리매김할 것 같으면 제거하는 문화가 있다. 바른 소리 하고 자기 길 걷는 여성 정치인을 세다, 독하다고 표현한다.이언주=여성 정치인을 장식품 또는 보조적인 역할로만 인식한다면 심각한 문제다. 여성 정치인으로 성장하려는 사람들도 자신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여성 할당은 불가피하다. 동등한 상태에서 경쟁하는 것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환경이다. (후보)경선을 할 때 동창회다 뭐다 여러 인맥이 작용한다. 여성들은 그런 인맥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유은혜=북유럽은 30%가 여성의원이다. 공천 시 30%를 여성에게 할당하는 걸 국회의원뿐 아니라 지방선거에서도 하는 게 필요하다. 잘하는 당에 인센티브를 줄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여성을 공천하자고 할 때 가장 많이 지적된 문제가 인력풀, 훈련된 여성이 없다는 거다. 지방의원의 경우도 여성을 의무공천하라고 하니 친인척이나 정치적 훈련이 안 된 사람을 공천하는 일이 있었다. 각 당에 여성위원회도 있고, 우리(민주당)는 여성 리더십 센터가 있는데,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인력풀을 키워야 한다.이혜훈=제도도 필요하지만 시각 전환이 필요하다. 서포터스 역할만 할 사람으로 30%를 채우면 숫자는 달성할지 몰라도 진정한 여성 정치 발전엔 도움이 안 된다. 몇 %인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채울까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쿼터가 양날의 칼이 될 때가 있다. 최고위원 선거 때도 다섯 명 중 하나는 반드시 여성을 넣어준다는 게 있어 여성이 입후보하면 남자들이 ‘쟤는 이미 당선이니까 표 주지 마라’고 한다. 여성 쿼터가 여성 정치인의 표를 깎아먹는 걸림돌이 되기도 하는 거다. 그럼에도 쿼터는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쿼터제를 해보니 문제가 있다’면서 쿼터제를 없애는 논리로 들고 나오는 건 잘못된 거다. 종이가 접힌 채 수백 년, 수천 년을 왔다면 이걸 한 번 펴는 걸로는 펴지지 않는다. 거꾸로 접고 뒤집어 줘야 원상복구가 된다. 거꾸로 한 번 뒤집어 주는 것, 이게 쿼터다. 국민 절반이 여성이면 국회와 지방 의회에도 여성이 절반이 될 때까지 중단하지 말고 해야 한다. 단, 부작용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게 중요하다.김희정=무턱대고 여성에게 할당하라고 하면 반감을 가지는 사람이 많다. 여성이어서 무임승차한다는 관점은 안 된다. ‘왜 여성이 많아져야 되는가’에 대한 공감이 중요하다. 여성이 절반이니 절반까지 가는 게 자연스럽고, 여성이 잘하는 분야가 분명 있다. 그동안은 여성 의원 수가 적으니 다 (국회) 여성위원회로 몰아넣었다. 그런데 인원 수가 많아지니 다른 상임위원회에도 여성이 들어간다. 변혁은 사실 거기에서 시작된다. 예를 들어 군인 가족과 여성 군인이 겪는 어려움은 여성 의원이 해결할 수 있다. 극장에 갔을 때 (남녀 화장실 사용 시간이 다른데) 남자 화장실과 여자 화장실 크기가 똑같아 문제인 것도 여자가 아니면 해결할 수 없다. 그동안 남자들이 못하던 일, 삶 속에 녹아 있는 여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니 여성 정치인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유은혜=쿼터제 얘길 했는데 남성이 부족한 분야도 생긴다. 취업 시험은 여성이 훨씬 잘 본다. 그래서 여성이 70~80%가 되는 게 걱정이란 얘길 듣기도 했다. 핀란드에선 어떤 분야든 한 성(性)이 40%는 돼야 한다고 정해 놓더라. 우리도 정치와 사회에서 남성이든 여성이든 성비가 최소 4:6은 되게 하자는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게 맞다. 남성들에게도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는 거다.이혜훈=공무원 임용시험은 한 성이 70% 넘으면 나머지 성을 30%를 확보하게 돼 있다. 남자가 70%일 때는 지키지 않았다. 그런데 여성이 70%가 넘으니 그 제도를 들고 나오는 부처가 생겼다. 외교부가 그렇다. 교사 등 성적으로 편중된 분야가 늘고 있는데 양성이 균형 있게 종사할 수 있는 정책이 마련돼야 할 것 같다.이젠 ‘엄마 리더십’ 발휘할 때이혜훈=여성 리더십의 특징이 비밀주의는 아니다. 오히려 남성들이 비밀주의적이다. 여성들은 일을 공개적으로 투명하게 절차에 따라 한다. 여성들은 남성들이 술집에서 하는 것에 비하면 절차에 강하다.유은혜=정치에서 문제 되는 게 밤의 문화였다.김희정=중요한 결정은 골프장, 남자 사우나실에서 이뤄졌다.이언주=기업에서도 중요한 정보는 한밤, 마지막 차수에 가서 얘기가 되더라.이혜훈=정치권도 그렇다. 거기서 회의를 하고 밀어붙이는 게 많았다.유은혜=지금은 여성의원이 늘어나면서 투명하지 않은 의사결정에 대해 지적을 많이 한다.이혜훈=평균적인 여성 리더십의 특징은 혈연·지연에서 자유롭고 공정하고 투명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 부패하지 않는 거다.유은혜=공감능력도 있다. 소통은 공감을 전제로 한다.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 배려, 경청이 있어야 소통이 되고 그런 공감은 여성이 더 잘한다.김희정=여성은 누가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인지 알아보는 능력이 분명히 남성보다 있다. 사람이 많이 모여 있어도 아픈 사람을 먼저 알아본다. 자신이 아파봤기 때문이다.이언주=여성이라면 누구든 가족이든 조직 안에서든 서러움과 어려움을 반드시 겪는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아픔을 더 이해할 수 있다. 난 원래 사회문제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아이를 갖고 나니 세상과 미래에 대한 걱정이 많아지더라. 많은 엄마가 나와 같은 심정일 거다. 그런 엄마들이 정치권에 들어올 때 사회가 더 나아질 거라 확신한다. 이젠 엄마 리더십이 발휘될 때다.다음 여성 대통령이 탄생하려면김희정=정치권과 사회가 여성을 함께 키우는 분위기가 돼야 한다. 일과 가족도 양립이 가능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권한 뒤엔 숱한 여성의 희생이 있었다. 누구는 일을 포기했고 누구는 가정을 포기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다른 여성의 희생을 안고 있다. 제도적으로 다른 여성의 희생을 딛고 서야 하는 게 아니라 함께 가는 방법을 찾는 게 중요하다.이언주=여성들이 교육을 받을 땐 좋은 성적을 올리는데 사회에 나가면 취직할 때부터 많은 장애에 부닥친다. 이런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여성이 정치에 더 많이 들어와야 한다. 남성도 이 문제 해결에 동참하면 좋겠다. 한국 정치는 너무 권위적이고 적대적이다. 호주 의회를 참관했는데 심각한 토론 중에 여성 의원이 얘기하다가 방청석을 향해 손을 흔들자 상대 당 의원들도 손을 흔들어 결국 화기애애하게 마무리되는 모습을 봤다. 아이를 가진 엄마가 정치를 하고, 그런 엄마를 보기 위해 아이를 데리고 방청석에 앉아 있는 아빠도 있었다. 그런 일상이 가슴에 와닿았다. 우리도 그런 날이 왔으면 한다.유은혜=박근혜 당선인이 잘해 주셔야 한다. 성공한 여성 대통령이 될 때 여성 대통령이 큰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게 더 확인될 거다. 여성 정치인들이 발전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거다. 여성은 아직 사회적 약자, 소수자다. 다른 약자들의 편에서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데 여성 대통령이 더 많은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이혜훈=여성 대통령 당선 자체가 여성에 대한 편견 개선의 완결형으로 받아들여지면 안 된다. 이제 첫걸음인데 다 됐다고 생각할까봐 걱정스럽다. 여성이 대통령만 할 게 아니라 대법원장도, 국회의장도 될 수 있어야 한다. 기업의 지도자도 많아져야 한다. 각계각층에서 여성들이 그런 자리에 오를 수 있어야 차별이 해결됐다는 징후가 되는 거다. 제도적인 걸림돌을 해결하는 건 이미 정치권에 들어와 있는 선배들의 몫이다. 안에서 편견의 벽을 부수는 일은 우리대로 매진할 테니 정치권에 진입하려는 여성 후배들은 자기 콘텐트를 채우는 일에 매진했으면 한다. 자기 콘텐트가 없으면 열매를 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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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은 사형 선고받고, DJ·노무현도 대북 송금 특검 충돌
30년 지기를 후계자로 삼아 대통령으로 만들어도 소용 없었다. 같은 정당 출신이 정권 재창출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신(新) 권력과 구(舊) 권력이 갈등을 빚어 결별하는 악연은 1987년 민주화 이후 26년간 한국 정치에서 반복돼 온 패턴이다.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8년 11월 강원도의 백담사에 쫓기듯 들어갔다. 광주 민주화 운동과 5공 비리에 대한 책임을 묻는 여론을 피해서였다. 대통령직에서 퇴임한 지 9개월 만이었다. 직접 후계자로 세운 육사 동기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이 같은 상황을 방조했다. 5공 청산론을 내세워 청와대에 있던 전두환 전 대통령과 가까운 군 출신 인사들을 대거 해임하기까지 했다.노태우 전 대통령도 다음 정부에서 뒤통수를 맞았다. 그는 자신이 이끌던 민주정의당 등의 힘을 보태 92년 김영삼(YS) 대통령을 당선시켰다. 하지만 3년 뒤 YS가 ‘역사 바로 세우기’를 내세우면서 사법처리 대상이 됐다. 반란죄·내란죄·수뢰죄로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12년형을 선고받았다.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는 사형이 선고됐다. 이들은 YS가 퇴임 직전 국민 대화합을 명분으로 특별사면해 주긴 했지만 약 2년간 수감생활을 견뎌야 했다.YS도 김대중(DJ) 정부에서 차남 현철씨 문제로 마음고생을 했다. YS는 평생의 라이벌이자 민주화 운동 동지로 97년 대통령 당선인이 된 DJ에게 한보 비리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던 아들 현철씨에 대한 선처를 부탁했다. DJ는 정부 출범 뒤 사면을 추진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참모들의 반대 등을 이유로 1년여가 지난 뒤에야 잔형 면제를 시켰고, 양김(金) 사이는 틀어졌다. DJ는 2002년 12월 대선에서 승리한 노무현 당선인을 나흘 만에 청와대 오찬에 초청하고 “모든 게 잘됐다”며 흐뭇해했다. 하지만 노무현 당선인은 김대중 정부 시절 6·15 남북 정상회담의 대가로 북한에 수천억원을 건넸다는 대북 불법송금 사건에 대한 소신 수사를 주문했다. 집권 후엔 야당이던 한나라당이 대북 송금 특검법을 발의하자 여당인 민주당과 진보단체의 반대에도 특검을 수용했다. DJ는 이를 강하게 비판했으나 달라진 건 없었다. DJ의 측근인 박지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노무현 전 대통령도 이명박 정부와 사사건건 충돌했다. 국가 기밀인 대통령 당시 기록물을 봉하마을로 불법 유출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정부 인사들을 대거 교체했다. 갈등은 2009년 부인 권양숙 여사가 금품을 수수한 혐의가 흘러나오고 노 전 대통령이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 정점으로 치달았다. 결국에는 노 전 대통령의 자살이란 헌정 사상 초유의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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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 당선인 설 특사 반대에 “야당도 불가피성 인정하는데…”
“우리가 청와대에 인사 명단을 주면 그분들이 임기 말에 보안이 되겠느냐? 왜곡된 정보도 많이 들어간다. 그러니 청와대에는 명단을 주기 어렵다.”(박근혜 대통령 당선인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관계자)“경찰청, 국세청에는 인사 명단을 주고 검증시키면서 왜 청와대는 못 준다는 건가?” (기자)“그건 모르겠다. 어쨌든 청와대에 명단이 들어가면 주변 사람들에게 굉장히 휘둘리게 된다. 못 준다.”(인수위 관계자)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 측의 갈등이 심상치 않다. 2일 중앙SUNDAY와 박 당선인 인수위 측의 통화에서 드러났듯 인수위 측은 앞으로도 총리·각료를 인선하면서 경찰청·국세청은 몰라도 청와대에는 명단을 줄 생각이 일절 없다고 말했다. 재산 현황과 아들들의 병역면제 같은 인사 검증의 가장 기본적인 사항 체크에 소홀해 김용준 총리 후보자의 낙마를 불렀음에도 검증의 핵심 정보를 쥔 청와대의 도움은 받을 의사가 없다는 것이다.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의 거취 문제도 신구 권력 간에 갈등을 빚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당초 목영준·민형기 전 헌법재판관을 헌재소장 후보 1, 2순위로 밀었지만 박 당선인 측이 이동흡 전 헌법재판관을 밀자 동의해 준 것으로 전해졌다. 이 때문에 청와대는 지난달 3일 이 전 재판관을 헌재소장 후보자로 지명하면서 “박근혜 당선인 측과 조율했다”(박정하 대변인)고 이례적으로 밝히기도 했다.검증 핵심 정보 쥔 청와대 도움 거절양측은 5년 전 임기 말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대통령 인수위원회가 퇴임하는 이택순 전 경찰청장의 후임을 놓고 어청수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으로 타협을 본 전례도 참고한 것으로 전해진다. 새누리당 관계자는 “이명박 정부는 지난해 12월 말 안에 시행할 인사만 자체적으로 하고, 1월 중에 시행할 헌법재판소장과 검찰총장 인사 등은 모두 박 당선인 측의 뜻에 따르겠다고 시그널을 보내놓았던 상태”라고 말했다.하지만 이동흡 후보자가 지명 직후부터 업무추진비 남용 의혹 등 논란에 휘말리자 양측은 이 후보자의 거취를 놓고 갈등을 드러냈다. 청와대 측은 “박 당선인 측의 의견이 반영된 인사”라면서 이 후보자의 거취에 관여할 뜻이 없음을 시사했다. 반면에 박 당선인 측은 “이 후보자는 이명박 대통령이 임기 중에 지명한 사람”이라며 “그의 거취를 우리 측에 왜 물어보느냐”고 반문했다.정치권에선 “김용준 총리 후보자 낙마로 상처를 입은 박 당선인 측이 이동흡 헌재소장 후보자의 거취까지 책임질 경우 내상이 더욱 커질 것으로 우려한 때문”이란 해석이 나왔다. 하지만 이 대통령 측근 인사들은 “박 당선인 측의 뜻을 존중해 결정한 인사인데, 막상 문제가 불거지니까 책임을 청와대로 떠넘긴다”며 불쾌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새누리당 관계자는 2일 “이동흡 후보자가 사퇴할 뜻을 밝히지 않고 있는 건 박 당선인 측이 이 후보자에게 사퇴하라는 시그널을 보내지 않고 있다는 뜻”이라며 “결국 이 후보자 본인의 뜻에 달렸는데, 그분은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지난달 29일 이명박 대통령이 단행한 설 특별사면에 대해 박 당선인 측이 이례적으로 반대하고 나선 건 양측의 갈등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켰다. 사면 직후 윤창중 인수위 대변인, 조윤선 당선인 대변인은 “국민의 지탄을 받을 일”이라고 비난했다. 이어 박 당선인 본인도 직접 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잘못된 관행을 확실히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그러나 이명박 정부와 가까운 여권 인사들은 “비판이 지나쳤다”며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이들의 설명에 따르면 청와대 수석급 고위 관계자는 지난달 중순 민주통합당 중진 의원을 만나 사면 내용을 미리 설명해 줬다. 그러면서 “이상득 전 의원 등 대통령 친인척은 사면에서 제외됐고, 서갑원 전 의원 등 야당 인사들은 포함됐다”고 이해를 구했다고 한다. 그러자 이 의원은 “대통령 임기 말에 측근들을 사면하는 건 미국 등 선진국 대통령은 물론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도 다 했던 당연한 일”이라며 “친인척도 사면 대상에 넣어야 한다. 우리가 야당이니 비난 성명을 한 차례 내겠지만 그걸로 끝날 것”이라고 오히려 훈계를 했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 측근 인사들은 “야당조차도 이렇게 임기 말 사면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는데, 친인척을 제외하고 최시중·천신일씨 등 측근 일부만 사면한 걸 전례 없이 문제 삼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박 당선인 측을 비판했다.그러나 박 당선인과 가까운 여권 관계자는 “사면 반대 입장은 평소 원칙과 법치를 강조해 온 박 당선인의 소신이 반영된 것”이라며 “박 당선인도 본인의 대통령 임기 말 겪게 될 수 있는 사면 문제에 대해 스스로 족쇄를 채우는 측면이 있음에도 반대 의사를 밝힌 걸 유념해 보아야 한다”고 덧붙였다.이명박 정부가 최대 치적으로 꼽는 4대 강 사업을 놓고도 신구 권력은 충돌했다. 윤창중 인수위 대변인은 지난달 22일 브리핑에서 4대 강 사업이 총체적 부실이라는 감사원 감사 결과와 관련해 “조사를 통해 의혹이 있으면 밝히고 고칠 것은 고치고 보완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17일 감사원이 감사 결과를 발표한 직후 “그런 문제에 대해 따로 입장을 내지 않겠다”고만 밝힌 데서 선회해 이명박 정부와 선 긋기에 나선 것이다. 그러자 청와대는 1일 배포한 ‘청와대 정책 소식지’ 전문가 칼럼을 통해 김태진(화학공학과) 수원대 교수의 기고를 실어 박 당선인 측의 주장을 간접적으로 반박했다. 기고에서 김 교수는 “지난해 여름 수차례에 걸친 태풍과 유례 없는 가뭄을 피해 없이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4대 강 사업의 효과”라며 “우리는 칭찬에는 인색하고 비판에는 능하다”고 주장했다.하지만 박 당선인과 가까운 새누리당 관계자는 2일 “4대 강은 어차피 박 당선인이 집권 뒤에 떠맡고 갈 수밖에 없는 이슈”라며 “이명박 정부에서 4대 강에 대해 책임져야 할 부분들은 미리 분명히 해놓고 가야 부담을 줄일 수 있다”고 반박했다.그럼에도 청와대는 박 당선인 측과 갈등이 부각되는 것을 최대한 꺼리는 분위기다. 청와대는 박 당선인의 사면 반대에 대해 익명의 관계자가 발언하는 형식으로 “사면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고 한마디 한 것 외엔 노코멘트로 일관하고 있다. 박정하 청와대 대변인은 박 당선인의 사면 반대에 대한 입장을 묻자 “아무 할 말이 없다”고만 말했다.“당내 권력 승계하고도 갈등 심한 게 문제”새누리당 관계자는 “과거 대통령들은 지지율이 떨어지거나 위기상황이 조성되면 전직 대통령이나 측근을 사법처리해 상황을 돌파하곤 했다”며 “이런 전례를 잘 아는 이명박 정부로선 속이 상하더라도 박 당선인 측과 갈등을 최소화하고, 협력하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여권 인사는 “박 당선인 측이 2007년 대선 후보 경선과 2008년 총선 ‘공천학살’ 논란, 2009년 세종시 수정안 논쟁 등을 겪으면서 이 대통령 측에 대한 불신이 쌓인 것이 현재 신구 권력 갈등의 본질적 원인”이라고 분석했다.그는 “하지만 박 당선인은 이 대통령의 탈당을 추진하지 않았고, 임기 말까지 이 대통령의 권한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도 강한 만큼 양측의 갈등이 걱정할 수준까지 격화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소장은 “미국은 백악관을 떠나는 전직 대통령이 후임자에게 남기고 싶은 얘기를 직접 편지로 써서 집무실 책상에 놓고 가면 후임 대통령이 들어와 그 편지를 읽는 것으로 첫 업무를 시작한다”며 “신구 권력이 충돌하면 정치권에 대한 불신을 키우고 정책 승계도 순조롭지 못한 만큼 양측이 대승적으로 협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도 “같은 당에서 권력이 승계됐는데도 갈등이 심하다는 게 문제”라며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도 취임 직후 대북 송금 특검 문제로 김대중 전 대통령 측과 싸웠지만 지금 같은 수준은 아니었다. 양측이 유연성을 갖고 협조를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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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동아시아 쥐락펴락 안 돼 중, 德政과 仁政 전파할 것
먼훙화 중국공산당 중앙당교 교수 관련기사 베이징·홍콩 석학이 보는 중국 민주화와 한·중 관계 중국 시위 하루 500건 넘어 이 중 40%는 농민이 주도 중국의 대외관계는 역사적으로 이무(夷務)에서 양무(洋務)를 거쳐 외무(外務)로 이어지는 과정이었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높다. 중화제국은 하늘→황제→백성으로 이어지는 계층질서를 주변 지역과 민족에게도 적용시켰다. 중국에서 국제전략이란 개념이 발전하지 못한 이유다. 대국전략, 동아시아전략, 국제관계이론 분야에 걸쳐 13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한 먼훙화(門洪華·44) 중국공산당 중앙당교 교수는 중국에서 국제전략 분야의 개척자다. 지난 달 25일 성균중국연구소 주최의 해외 저명학자 초청강연회에서 ‘중국의 국제 지위에 대한 이론과 실제’란 주제로 강연을 마친 먼 교수를 만나 중국의 대외전략과 한·중 관계를 물었다. 다음은 인터뷰 요지.-박근혜 당선인이 당선 축하 특사로 온 장즈쥔(張志軍) 중국 외교부 부부장을 통해 ‘한·중 관계 발전을 위해 5년 청사진을 만들자’는 제안을 시진핑(習近平) 총서기에게 전달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청사진에 들어가야 할 내용은.“한·중 간 주요 의제는 세 가지다. 첫째, 안보 문제다. 양자 간 전략대화에 안보를 포함시켜 실질적인 전면적·전략적 동반자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둘째는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이다. 한·중이 어떻게 FTA 문제를 솔선해 돌파하느냐에 따라 동북아 협력 내지 동아시아 자유무역지대 형성의 모범이 될 수 있다. 셋째, 북한 문제다. 두 나라가 적극적으로 협력해 북한의 안정과 개혁·개방을 추진해야 한다.”-중국은 동아시아 안보공동체 구상을 제안한다. 이 구상과 6자회담의 관계는. 미국의 위상은.“동아시아 안보의 특징은 전통적인 양자 군사동맹과 다자 안보협력 관계의 병존이다. 중국의 기본 목표는 개방적인 지역안보협력을 실현하는 데 있다. 6자회담은 중국이 구상하는 동아시아 안보협력의 중요 구성 부분이다. 중국의 안보 구상에 미국을 배제시키려는 목표는 없다. 단지 미국이 동아시아를 쥐락펴락 못하도록 만들기를 희망한다. 전통적인 동맹 안보가 아닌 아세안지역포럼(ARF)과 같은 다자 구조를 원한다.”-2010년 류밍푸(劉明福) 국방대 교수는 저서 『중국의 꿈(中國夢)』에서 경제력은 물론 군사력, 종합국력까지 미국을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은 미국을 언제 넘어설 것으로 보나.“20~30년 내 중국이 미국을 넘어설 가능성은 없다. 중국의 경제총량이 단기간 안에 미국을 넘어설 수는 있다. 하지만 경제질량에는 문제가 많다. 이노베이션 능력도 부족하다. 군사역량에서 중국은 단기간에 미국을 제치기 어렵다. 미국의 우세는 하드파워뿐만 아니라 소프트파워의 영향력에서 나온다. 중국이 배워야 할 점이다. 중국의 실력이 커지면서 동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은 미국을 넘어설 수 있다. 중국은 미국을 결코 추격·경쟁·초월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중국은 1980년대 일본이 경제력으로 미국을 넘어서려 하다 겪은 실패담을 기억하고 있다.”-중국은 전 세계에 문화력(文化力·지배적 가치)을 제공할 수 있나.“중국은 동양문화의 전범(典範)이다. 선천적으로 문화가 우세하다. 단, 지난 30여 년간 개혁·개방을 추진하면서 중국은 문화 번영과 개혁의 중요한 의미를 홀시했다. 국가 현대화는 경제·제도·문화 현대화의 결합을 뜻한다. 중국의 문화 현대화는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중국은 문화 개혁을 추진해 전 세계에 동양 가치관의 정수를 제공할 것이다. 이것이 중국이 진정으로 우뚝 섰느냐(崛起) 여부를 판단하는 요소다. 중국은 조화·덕정(德政)·인정(仁政) 등 동양적 가치관을 세계에 전파해 전 세계가 향유하는 가치 요소가 되도록 만들 것이다.”-한국인들의 기억에는 중국의 역대 왕조와 맺은 조공(朝貢) 관계의 기억이 깊다. 중국의 국제전략 측면에서 전통적 요인의 영향은.“조공 시스템에는 합리적인 요소도 있다. 예를 들어 다른 나라를 존중하는 (맹자의)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섬기는(以大事小)’ 사상과 경제·문화교류의 중요성을 강조한 점은 유지할 만한 가치가 있다. 물론 국가의 평등을 존중하지 않았던 점은 없애야 한다. 글로벌 시대에 조공시스템은 이미 존재할 수도 부활할 수도 없다. 상호 이해와 존중은 국가 관계의 기초조건이다.”-중국이 덩샤오핑(鄧小平)의 ‘도광양회(韜光養晦)’ 전략을 폐기했다는 주장이 나온다.“도광양회는 장기 전략 목표다. 시기를 기다려 나중에 복수하겠다는 식으로 이를 해석하면 중국은 세계의 위협이 된다. 내가 이해하는 도광양회는 겸허하고 자신을 완성시키려는 마음가짐으로 타인을 진솔하게 대한다는 의미다. 패거리를 맺지 않고 영원히 우두머리가 되지 않는다는(決不當頭) 입장이자, 한·중이 공유하는 유교철학과 일치한다.”먼훙화 1969년 산둥(山東)성 출생.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앙당교 국제전략연구센터 부주임, 중국개혁개방논단 이사직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 『개방과 국가전략체계』 『중국국제전략도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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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시위 하루 500건 넘어 이 중 40%는 농민이 주도
리롄장 홍콩중문대 교수 관련기사 베이징·홍콩 석학이 보는 중국 민주화와 한·중 관계 미, 동아시아 쥐락펴락 안 돼 중, 德政과 仁政 전파할 것 중국의 인간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중국의 저명한 사회학자 페이샤오퉁(費孝通·1910~2005)은 이를 동심원(同心圓)의 파문(波紋)에 비유했다. 돌 하나를 수면에 던지면 그려지는 동심원의 물결처럼 ‘나(我)’를 중심으로 인간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나’로부터 동심원의 파문이 멀어질수록 인간관계는 약해진다고 했다. 그는 이런 인간관계의 질서를 ‘차등적 질서구조(差序格局)’라 이름 지었다. 리롄장(李連江) 홍콩중문대 교수는 이 ‘차등적 질서(差序)’의 개념을 차용해 중국 정부에 대한 중국 농민의 신뢰를 연구한 학자로 유명하다. 그에 따르면 정부에 대한 신뢰는 행정등급이나 서열이 높아질수록 커진다. 그는 빈부격차가 확대되는 가운데 중국의 3농(農)문제, 즉 농업·농촌·농민 문제 해결을 고민해 왔다. 성균중국연구소 초청으로 한국을 찾은 그를 지난 달 28일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요지.-페이샤오퉁은 중국을 정확하게 인식하려면 인구의 80%를 점하는 농민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그건 1940년대 이야기다. 현재 비중은 50% 미만이다. 이제 중국 사회를 알려면 중국 도시를 연구해야 한다. 지금 문제되는 건 도시 빈곤 인구다.”-중국의 역대 지도자들은 모두 농촌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오는 3월 출범할 새 정부는 어떤가.“차기 총리로 유력한 리커창(李克强) 정치국 상무위원은 농촌의 빈곤타파 해결책으로 도시화를 생각하고 있다. 그 방법은 농촌 주변에 아파트를 지어 농민을 이주시키고, 원래 농민이 살던 곳을 개발하는 방식이다. 문제는 중앙의 정책이 지방으로 내려가 시행되는 과정에서 곧잘 변질된다는 점이다. 도시화가 지방 정부의 농민 토지 수탈로 악용될 가능성을 조심해야 한다.”-농촌을 비롯해 많은 곳에서 집단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위가 벌어지는가.“집단 시위는 보통 50명 이상이 모인 경우를 말한다. 한 해 18만 건 이상의 집단 시위가 벌어지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 수치는 광둥(廣東)성 정부의 한 내부 회의에서 ‘우리나라에선 하루 평균 500건 이상의 집단 시위가 발생하고 있다’고 한 말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나오게 됐다. 1년 365일에 500을 곱한 것이다. 이 중 농민 주도의 시위는 40%를 차지한다.”-중국 농민은 억울한 일이 있으면 베이징의 신방국(信訪局)을 찾아 탄원한다. 베이징으로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2005년엔 1270만 건의 신방이 접수됐다)“신방국을 찾아가는 걸 상방(上訪)이라 한다. 상방의 주된 이유는 중앙 정부가 지방 정부에 압력을 넣으면, 지방 정부가 자신의 문제를 처리하는 데 성의를 가져줄 것이라는 믿음에서다. 남의 힘을 빌려 공격하는 게 마치 태극권(太極拳)과 같다. 중국엔 ‘중앙은 은인이고, 성(省)은 친척이며, 현(縣)은 좋은 사람이고, 향(鄕)은 악인이며, 촌(村)은 원수(中央是恩人 省里是親人 縣里是好人 鄕里是惡人 村里是仇人)’라는 말이 있다. 행정 등급이 낮아질수록 신뢰가 작아진다.”-최근 상방인들이 몰려 있는 베이징의 상방촌(上訪村)에선 시진핑(習近平) 총서기 등 중국 지도자들의 주소와 e-메일 주소가 적힌 소책자가 불티나게 팔린다고 한다.“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국가신방국에 가서 일부 상방인을 만난 적이 있다. 원 총리로선 상방인들에게 애정을 표시한 셈이다. 그러나 좋은 방법은 아니다. 구체적인 사안 해결은 결국 지방 정부의 몫이다.”-신방국에 접수되는 사안 중 해결되는 건 0.2%도 안 된다고 한다. 그럼에도 중앙 정부가 신방 제도를 유지하는 이유가 뭔가.“중앙 정부가 지방 정부를 믿지 못해서다. 신방 제도의 존속엔 지방 정부를 통제하려는 중앙 정부의 의지가 담겨 있다.”-중국도 ‘민주(民主)’를 강조한다. 그러나 서방의 민주와는 다르다고 한다. 중국이 말하는 민주는 무엇인가.“중국의 민주는 일종의 정책 자문을 말하는 것이다. 새 정책을 시행하기에 앞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구한다. 중국에선 이것을 민주라 부른다.”-시진핑 시대에 대한 기대가 크다.“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당시엔 공산당 말고도 8개 민주당파가 권력을 나눠 가졌다. 부총리와 최고인민법원장 등을 민주당파 인사에게 맡겼다. 중국공산당의 독재는 54년 설립된 전국인민대표대회(의회 격)가 과거의 전국인민정치협상제도(통일전선 기구)를 대체하면서다. 이는 퇴보였다. 만일 시진핑이 54년 이전의 정치협상 제도를 회복한다면 이는 커다란 진보다.”-중국 특색의 민주모델은 구축 가능할까.“‘중국 특색’이나 ‘중국 모델’이란 말은 흔히 개혁을 거부하는 구실로 이용된다. 나라마다 특징이 있겠지만 민주나 인권·권리 같은 가치는 인류가 공유하는 것이다.”리롄장 1963년 허베이(河北)성 출생. 톈진(天津) 난카이(南開)대 철학 석사. 미 오하이오주립대 정치학 박사. 2006년부터 홍콩중문대학 정치학과 교수로 있으며, 중국 농민의 정치 참여와 농촌 기층(基層)에서의 민주주의 정착에 대해 연구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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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홍콩 석학이 보는 중국 민주화와 한·중 관계
관련기사 중국 시위 하루 500건 넘어 이 중 40%는 농민이 주도 미, 동아시아 쥐락펴락 안 돼 중, 德政과 仁政 전파할 것 한국과 중국은 정권 사이클이 일치한다. 2와 7로 끝나는 해마다 대통령 선거와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를 통해 지도자를 선출하고 다음 해 2월, 3월에 각각 새 정권을 출범시킨다.정권 초 외교관계의 첫 단추를 잘 채우려면 중국의 속내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게 필요하다. 박근혜 정부 출범을 한 달 남짓 앞두고 한국을 방문한 베이징과 홍콩의 대표적 석학 먼훙화(門洪華) 중앙당교 교수와 리롄장(李連江) 홍콩중문대 교수에게 중국의 고민과 한·중 관계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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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에너지가 테러 목표로…글로벌 경제 새 악재
#1 2013년 1월 16일 북아프리카 알제리의 동남부 인아메나스의 천연가스 공장. 에너지 메이저인 영국 BP사와 노르웨이 스타토일, 알제리 국영 석유가스회사가 공동 운영하는 시설이다. 미리 인부로 잠입한 테러범이 몰래 문을 열어주면서 무장 테러범 15명이 시설에 난입했다. 이들은 130여 명의 직원 중 외국인을 찾아내 일본인은 사살하고 서구인 목에는 폭탄을 설치한 뒤 인질로 삼았다. 인질극을 지휘한 무장세력 지도자 모크타르 벨모크타르는 미리 녹화해 둔 영상에서 “알카에다의 이름으로 인질극을 벌였다”며 “프랑스는 말리 공습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다음날 테러범들이 인질을 차량에 태워 옮기려는 순간 알제리군이 급습했다. 영국·일본·프랑스·미국·필리핀 등 외국인이 대부분인 48명의 인질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한국에선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가스전, 이슬람, 테러, 인질극, 구출작전 등 톰 크루즈 주연의 액션 영화에나 나옴 직한 요소만 눈에 띄었을 뿐이다. 하지만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달 30일 이번 사건이 테러와 에너지·자원의 연관성을 새롭게 보여줬다며 묵직하게 의미를 부여했다. FT는 톰슨 로이터 데이터 스톰의 자료를 인용해 2006년 이후 알제리·사우디아라비아·나이지리아 등에서 에너지·자원 관련 시설이나 직원에 대한 테러 공격이 벌어질 때마다 유가가 요동쳤음을 지적했다. 이번 알제리 인질 사태도 마찬가지다. 머나먼 사하라 사막에서 벌어진 사건이 우리 생활에 곧바로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이슬람 테러 세력은 전 세계 오지에서 진행되고 있는 에너지·자원 개발에 대한 공격을 강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슬람 테러 세력엔 태동기에 이어 선진국 주요 시설 테러와 9·11테러에 이어 새롭게 시작된 부흥기, 즉 알카에다 3.0 시대를 열 수 있는 기회다. 서방은 이를 막기 위해 새로운 대테러 활동 3.0 시대를 시작할 수밖에 없다. 이전까지 대테러 활동이 서방 세계를 지키기 위한 국가안보와 국익 보호 차원의 활동이라면 대테러 3.0은 지구 구석구석에서 벌어지는 에너지·자원개발 현장을 경비하는 경제이익 수호 활동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오게 된 근원과 앞으로의 전망을 차례로 살펴보자. #2 2011년 10월 20일 리비아 중북부 지중해 연안도시 시르테.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가 고향인 이 도시에서 주민들에게 체포돼 끌려가다가 총을 맞고 살해됐다. 그 곁을 마지막까지 지킨 사람은 아들 무타심과 몇몇 충복뿐이었다. 가장 믿었던 투아레그족 용병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해 봄 ‘아랍의 봄’ 영향으로 리비아에서 시민혁명이 발생하자 카다피는 투아레그족 용병을 동원했다. 투아레그족은 리비아 남쪽 사하라 사막의 남단 말리를 중심으로 알제리·니제르 등에 사는 유목민이다. 이들은 무자비하게 리비아 민간인들을 학살해 ‘검은 악마’로 불렸다. 카다피는 투아레그족을 포함해 말리·니제르·차드 등 주변국에서 계약금 1만 달러에 일당 1000달러까지 줘가며 검은 용병을 불러들였다. 2011년 10월 16일 말리 동북부 키달. 일자리를 잃은 리비아 용병 출신의 투아레그족 병사 1진 400여 명이 78대의 차량에 견착식 미사일과 기관총·박격포 등 무기를 잔뜩 싣고 알제리를 거쳐 키달로 들어왔다. 이에 대해 유엔 서아프리카 특사인 사이드 디진니트는 “실전 경험을 갖춘 투아레그 전사들이 귀국하면서 분리독립운동이 재개돼 그들의 본거지인 말리 북부의 불안이 고조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마그레브(북아프리카) 알카에다와 마약 밀매꾼들이 용병의 무기와 전투력을 사려고 달려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불행히도 그의 말은 사실이 됐다. #3 2012년 1월 말리 동북부 키달. 투아레그족은 귀국 용병을 주축으로 분리독립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정부군이 출동했지만 같은 해 3월 보급 불만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아마두 투마니 투레 대통령 정권을 전복시켰다. 이 지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알카에다 북아프리카 지부(AQIM)와 반정부 이슬람 운동 ‘안사르 디네’를 비롯한 알제리·리비아 등지의 이슬람 세력이 투아레그족과 손잡았다. 이들은 중세 말리 제국의 수도이자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탐북투를 비롯한 말리 북부를 차지하고 급진 이슬람식 통치를 했다. 절도범의 손발을 자르고 동거 남녀를 돌로 공개 처형했으며 비이슬람적이라며 문화유산을 파괴했다. 그러다 올해 초 말리 중앙정부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4 2013년 1월 11일 말리 수도 바마코. 디온쿤다 트라오레 대통령이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투아레그족과 이슬람 세력이 공격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같은 날 파리에선 프랑스의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말리 파병을 발표했다. 서방과 아프리카 몇몇 국가도 병력을 보냈다. 말리 사태는 국제전으로 비화했다. 파병은 말리와 이웃 니제르가 프랑스 원자력 에너지의 젖줄인 우라늄의 주요 생산지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지난달 16일의 알제리의 인질사태는 이런 상황에서 발생했다. 이제는 알제리 인질사태도 마무리됐고 프랑스군과 말리군이 지난달 30일 이슬람 세력의 최후 거점인 키달을 탈환하면서 말리도 안정을 찾았다. 알카에다 세력은 사막 저편으로 떠났고 투아레그족은 중앙 정부와 대화할 태세다. 하지만 사하라 사막에서 국경이란 건 의미가 없다. 말리와 알제리, 알제리와 리비아는 사하라 사막을 통해 얼마든지 오갈 수 있다. 테러세력이 은신하면 찾아내기도 쉽지 않다. 2013년 1월 아프리카의 알제리·말리에서 벌어진 사건이 언제라도 재연돼 세계경제를 휘청거리게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제프리 색스 “군사적 방안보다 개발이 해결책”더욱 큰 문제는 이번 인질극을 계기로 전 세계 에너지·자원 개발 상황이 크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도 지난달 28일 이번 인질 참사로 전 세계 주요 에너지 업체들이 아프리카·중동의 유전 보호 대책에 엄청난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석유 메이저의 하나인 로열더치셸의 피터 보저 최고경영자(CEO)는 다보스포럼에서 "새로운 보안 대책을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FT는 인질사태가 끝난 직후인 지난달 20일 알제리 인질 참사를 계기로 정치적으로 불안한 아프리카에 대한 투자 비용이 더 높아질 것으로 전망했다. 원유·천연가스 등 에너지 생산시설은 대부분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지역에 많이 분포하고 있어 이들 시설에 대한 안전·보안 비용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투자자 입장에서 보면 에너지·자원 관련 기업들이 더 많은 비용을 쓸 수밖에 없게 돼 투자 대비 이익이 줄어들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WSJ도 경비 강화에 추가로 들어갈 돈이 많아지면 원유 생산비 상승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실 그동안 주요 에너지 업체들은 납치나 폭탄 테러 등 소규모 파괴행위의 목표물이 돼 온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처럼 에너지 시설 전체가 점령당하고 직원 대부분이 인질로 잡혀 상당수 희생되는 참사는 없었다. 새로운 차원의 안전대책 필요성이 대두할 수밖에 없다. 에너지·자원 확보 현장에서 알카에다 3.0에 걸맞은 보안 3.0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에너지·자원 관련 시설의 보안과 경비를 맡은 민간 군사기업이나 사설 경비업체들이 호황을 누릴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183억 달러였던 보안 시장은 2021년엔 310억 달러로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하지만 에너지·자원이 무진장 묻혀 있는 알제리·리비아·말리 등 북아프리카 지역이 알카에다를 비롯한 이슬람 테러집단의 새로운 활동무대로 부상하고 있다는 점은 글로벌 경제의 새로운 두통거리다. 이 지역은 그동안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지역으로 꼽혀 왔다. 아울러 페르시아만 연안 등지의 자원이 고갈되고 있는 반면, 이 지역은 매장량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다만 사막 한복판이어서 개발·운반 비용이 문제됐으나 최근 고유가 행진으로 이를 상쇄할 수 있게 돼 개발 프로젝트가 활발히 진행돼 왔다. BP를 비롯한 석유 메이저들이 활발하게 진출하고 있는 이유다. 그러나 알제리 인질사태와 말리 내전으로 기업 안전비용이 급등함에 따라 효율성을 다시 따져봐야 할 상황이 되고 있다. 이대로 가면 에너지·자원의 탐사 및 시추가 위축돼 장기적인 공급 능력을 위협하는 사태를 불러올 수 있다. 벌써 BP는 알제리 공격 사태 이후 올해 하반기 리비아에서 시작하려던 원유·가스전 탐사시추 계획을 재검토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응책은 무엇일까. 아프리카 개발원조사업 전문가인 제프리 색스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의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그는 지난해 초 한 칼럼에서 이런 주장을 폈다. “말리 등 건조지역에서 계속 일해온 개발 전문가로서 나는 이 지역 국민이 계속 굶주리고 미래 희망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는 글로벌 안보를 위협한다. 이런 상황에선 어떠한 군사적 해결방안도 이 넓은 지역을 안정시킬 수 없다. 지속 가능한 평화로 가는 유일한 길은 지속 가능한 개발이다.” 한국도 이젠 글로벌 대테러 전쟁과 아프리카 개발원조 사업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지원해야 할 상황이 됐다. 2013년 1월 알제리와 말리에서 벌어진 사건은 세계 무대에서 한국의 역할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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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만 다운로드…안드로이드 무료 앱 1위
경기도 성남시 분당 판교벤처밸리 내 사무실에서 만난 신철호 의장. OGQ가 개발 중인 배경화면용 앱 버전3 ‘더 갤러리’ 작업대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조용철 기자 그는 한때 인터넷 스타였다. 그를 스타로 만든 건 사이버 정치인 증권시장인 ‘포스닥’이었다. 1999년 선보인 포스닥은 사이버 증시에 상장된 정치인이 잘하면 주가가 오르지만 잘못하면 주가가 떨어지는 방식으로 운영된 사이트였다. 참신한 아이디어로 큰 인기를 끌면서 90년대 말~2000년대 초 국내 언론뿐 아니라 월스트리트저널·NHK·BBC 등 해외 언론에도 많이 소개됐다. 투자 제안서가 밀려들었다. ‘얼마 안 되지만 내 투자를 받아달라’고 사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당시 제안받았던 투자액을 총 150억원 정도로 기억한다. 하지만 “더 큰 투자가 들어올 것”이란 기대에 부풀어 대부분 거절했다. 그러는 동안 정보기술(IT) 거품 붕괴와 직원 횡령 사건으로 회사 경영은 어려워졌다. 지금 포스닥이란 회사는 이름조차 사라졌다. 사진공유서비스업체 OGQ의 신철호(41) 이사회 의장 이야기다. 그는 최고경영자(CEO)로서 의료IT 서비스 업체 ‘하루에리’도 이끌고 있다. OGQ는 그가 KAIST에서 공부할 때 만난 김무궁(31) 현 대표 등과 함께 2년 전에 설립했다. OGQ는 오픈 글로벌 퀘스천(Open Global Question)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공개, 글로벌, 질문을 통한 세상탐구를 지향한다는 뜻이다. 이사회 의장이고 CEO라지만 그의 회사는 작다. 두 회사를 합쳐 연 매출은 6억5000만원밖에 안 된다. 구멍가게 수준이다. 분당 판교벤처밸리에 있는 사무실에서 만난 신 의장은 “직원 월급 주고 한 해 1억원가량의 이익은 남긴다”며 “매출보다 중요한 건 이익과 비전”이라고 말했다. 수익모델이 아직 빈약한 만큼 새로운 비즈니즈 모델을 개발하는 것도 큰 과제다. 그와 직원들은 위아래가 아니라 동지적 관계다. 사무실엔 그의 책상이 따로 없다. 빈 자리에 컴퓨터를 놓고 일하면 그곳이 자리다. 사무실 분위기는 대학 동아리방 같다. 자유 복장에 출퇴근 체크도 없다. 알아서 한다. 영어일어중국어 등 7개 언어로 서비스 사무실에서 동료들과 함께한 신철호 이사회 의장(뒷줄 왼쪽 둘째). 왼쪽 이미지는 2011년 가을 ‘백그라운드’가 안드로이드 무료 앱 분야 1위를 차지할 당시의 화면을 캡처한 것. OGQ는 작지만 나름 잘나간다. 세계적인 이미지 제공업체로 크겠다는 야심 찬 구상도 있다. 2011년 5월 내놓은 배경화면 설치용 앱 ‘백그라운드(backgrounds)’는 버전1, 버전2를 합쳐 지금까지 다운로드 횟수가 1700만 번에 달한다. 버전1은 2011년 9~10월 구글 안드로이드 무료 앱 분야에서 세계 1위를 20일 가까이 차지했다. 지난해에는 구글이 선정한 베스트 앱에 올랐다. 화질을 높인 버전2도 지난해 5월 출시 이래 지금까지 다운로드 횟수가 700만 번이다. 그는 동료와 함께 새로운 앱을 기획ㆍ개발하지만 돈 버는 데만 모든 에너지를 쏟지 않는다. 그는 앱을 크게 둘로 나눠 부른다. 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빨간색 앱’, 사회공헌을 목적으로 하는 ‘파란색 앱’이다. 빨간색 앱의 대표는 ‘배경화면’이고, 파란색 앱의 대표는 ‘테드 에어(TED Air)’다. OGQ를 설립하면서 신 의장과 김 대표는 “세계 1위 앱을 한번 만들어 보자”고 의기투합했다. 첫 번째 아이템으로 배경화면에 주목했다. 스마트폰 이용자들이 가장 먼저, 가장 많이 꾸미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작권 걱정 없이 누구나 사용 가능한 사진이나 그림을 활용할 수 없을까 하는 인식에서 출발했다.배경화면 원자료는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같이 저작권이 소멸된 명화, 국내외 작가로부터 사용을 허락받은 작품이 대부분이다. 대략 12만 장쯤 된다. 개인들이 저작권 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해준 각종 사진ㆍ그림까지 포함하면 수천만 장 이상으로 늘어난다. 배경화면은 계절·날씨 등을 고려해 색 보정, 제목 달기를 거쳐 제공된다. 사진을 다양한 기준에 따라 분류해 놓고 친구와 배경화면을 공유할 수 있는 메뉴도 갖췄다. 스마트폰에 내려받아 별도로 저장할 수도 있다. 이런 덕에 수천 개의 다른 배경화면 앱을 제치고 선두권을 유지하고 있다. 수익은 배경화면 앱에 붙는 광고에서 나온다. 22일 찾은 사무실의 유리벽에는 베트남 49, 체코 48, 덴마크 18 같은 숫자가 쓰여 있었다. “어떤 의미냐”고 묻자 “우리 배경화면 앱이 20위권 밖에 있는 나라들”이라며 “러시아에서 1위를 차지했고, 안드로이드 체제 스마트폰이 보급된 세계 50여 개국에서 대부분 20위 이내다. 지금은 베트남에서 49위, 체코에서 48위지만 조만간 20위권에 들 것”이라고 말했다. 배경화면 앱은 영어·일어·중국어 등 7개 언어로 서비스한다. 파란색 앱의 대표인 ‘테드 에어’는 세상에 잘 알려진 공개강연을 수집해 제공한다. TED(Technology, Entertainment, Design)는 세계적 명사들이 참여하는 기술ㆍ엔터테인먼트ㆍ디자인 관련 강연회다. 환경운동가인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의 강연 등이 제공된다. 지금까지 약 100만 번의 다운로드를 기록했다. 이를 이용해 영어를 공부하는 사람도 많다. 하루에리는 신 의장이 2010년 설립한 의료 IT서비스 회사다. 시술 전후 사진 비교, 치료비 할인정보, 임상정보 등을 제공한다. 치과를 중심으로 서너 곳의 병원 경영도 대행한다. 1년에 6~7회 ‘디지털 병원 경영 아카데미’를 연다. 그는 광주 살레지오고를 졸업하고 1993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한국통신(현 KT)에 다니던 아버지와 PC통신에 관심이 많았던 형 덕분에 그는 일찍 컴퓨터와 인터넷에 눈을 떴다. 중학교 때는 PC통신에다 ‘정권 바뀔 때마다 왜 교과서 내용이 바뀌어야 하나’라는 글을 게시판에 올렸다가 호되게 혼나기도 했다. 안철수 교수와 사제지간안 캠프 활동도그를 세상에 알린 포스닥은 어린 시절 지켜본 부모의 주식투자와 대학 시절 수업에서 출발했다. 대학 때 ‘시민사회와 정치’에 관한 수업을 들으며 인터넷과 정치의 연결을 고민했고, 이게 결국 사업으로 이어졌다. 공부보다 사업이 좋아 휴학을 거듭했다. 결국 3학년 1학기에 제적당했다. 학교는 그만뒀지만 포스닥은 한동안 승승장구했다. 서울시 포털시스템, 산업자원부ㆍ해양수산부 전자정부 프로젝트를 잇따라 수주했다. 한 해 86억원의 매출을 올린 적도 있다. 하지만 함께 일하던 직원이 수십 억원을 횡령하고 인터넷 사업 전반이 위기를 맞으며 2000년대 중반 사세는 기울었다. 급여ㆍ퇴직금을 제대로 못 줘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법정에 서기도 했다. 그는 빈털터리가 됐다.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재기의 기회는 엉뚱한 곳에서 찾아왔다. 그는 2000년대 중반 IPTV 관련 사업을 하던 후배의 일을 도와주면서 지분을 조금 받았는데, 그 회사가 200여억원에 팔리면서 수십억원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그 돈으로 빚을 갚고 새 사업을 구상했다. 공부도 다시 시작했다. 2009년에는 KAIST 기술경영학 석사과정에 들어갔다. 대학원에 들어갈 때 두 가지 목표를 세웠다. 당시 KAIST 안철수 교수의 수업을 모두 듣는 것,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과 창업 동지를 찾는 거였다. 그는 KAIST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정말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그전에는 ‘학교에서 실제로 뭘 배울 게 있나’라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KAIST 에서 바뀌었지요. 수업시간마다 교수님 강의를 모두 꼼꼼히 적었어요. 강의를 들으면서 과거 했던 일, 지금 하는 일, 앞으로 하고 싶은 일과 연결시키다 보니 수업이 너무 중요했죠. 안 교수님께도 많은 것을 배웠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대학에 가는 것보다 어느 정도 사회경험을 한 다음에 대학에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당시 안철수 교수는 그와 동료들이 함께 번역한 『승려와 수수께끼』 『마우스 드라이버 크로니클』의 추천사도 써주었다. 그는 당시 ‘언젠가 안 교수님이 나를 필요로 할 때 돕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지난해 안 후보 캠프에서 ‘IT혁신팀장 겸 소셜미디어 대변인’으로 일했다. 물론 안 교수가 대선 후보 직을 사퇴한 후에는 다시 본업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익을 내는 사업을 하나 할 때마다 사회적 이윤을 높이는 비영리 사업을 하나씩 하려고 한다. 대학 은사인 연세대 이신행(71) 명예교수를 도와 네 곳의 대안학교(풀뿌리학교) 설립을 지원한 것도 그 일환이다. 병원 강연 등에서 나오는 수입은 풀뿌리학교와 희망제작소의 창업교육에 기부한다.“예전 포스닥 시절에도 주변 사람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나중에 더 회사가 크면 하자’고 했지요. 그런데 나중이란 없더라고요. 많든 적든 지금 해야죠.” 이신행 교수는 “신 대표는 시대 흐름을 포착하는 감수성이 뛰어나다. 감수성에 그치지 않고 이를 프로젝트로 만들어 현실에 접목하는 기량도 있다”고 평가했다. 신 의장은 지금 배경화면 버전3인 ‘더 갤러리(The Gallery)’를 준비 중이다. 좋아하는 사진을 모아 자신의 갤러리처럼 꾸미는 컨셉트다. 하루에리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 병원도 참여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사업을 확장하겠지만 매출이나 직원이 많은 회사를 지향하지는 않을 겁니다. 과거 회사 경영을 잘못해 파트너 회사와 직원들에게 피해를 끼쳤었죠. 외형보다는 사회적 이윤(social profit)이 높은 기업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런 회사가 결국 지속적으로 혁신하고 성장한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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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체제 10년 내 무너질 가능성 최대 40%”
김영환(50)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은 “북한 김정은 체제가 10년 안에 붕괴될 가능성이 최대 40%”라면서 박근혜 정부는 이에 대비해 대북 개입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24일 중앙 SUNDAY와의 인터뷰에서 “김정은의 권력기반이 불안하고, 실정을 거듭할 가능성이 높다”며 이같이 전망했다. 이어 “북한이 연착륙하든 조기붕괴하든 한국은 북한의 개혁·개방을 지원하고 대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제언했다.지난해 중국 공안에 구금돼 전기고문을 당한 뒤 114일 만에 풀려나 북한 인권문제를 국제적 이슈로 부각시킨 김씨는 올해는 국내 진보진영이 북한 인권운동에 나서도록 힘쓸 계획이라고 밝혔다.-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북한에 원칙을 지키면서 대화를 추진한다는 입장이다. 어떻게 평가하나.“지금까지 나타난 것을 봐선 대화를 강조하는 것 같다. 하지만 박 당선인이 일관되게 강조해온 건 원칙과 신뢰인데, 북한은 이를 잘 지키는 나라가 아니다. 그래서 남북관계가 순항하긴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 결국 박 당선인이 정치력을 발휘해 원칙과 대화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는 게 중요할 것이다.”-박 당선인이 대화 가능성을 열어뒀지만 북한은 안보리 제재에 반발하면서 핵실험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북한의 그런 태도까지 포용할 수는 없다. 만일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하면 박근혜 정부에서도 남북대화는 상당 기간 이뤄지기 힘들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북한 문제에 철학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박 당선인은 북한 문제를 얼마나 고민해 왔다고 보나.“박 당선인은 북한이 연루된 테러로 어머니를 잃었고, 아버지가 숨졌을 때도 북한 문제를 가장 걱정했다. 이를 보면 북한에 대해 꾸준히 많은 고민을 해오지 않았을까.”-박정희 전 대통령은 ‘미친 개에겐 몽둥이가 필요하다’며 북한과 사생결단을 내려 했다. 박 당선인이 거기에 영향받은 측면은 없을까. “글쎄. 박 전 대통령은 남로당원을 하다 전향한 사람이다. 그래서 공산당의 실상을 누구보다 정확히 알았고, 북한에 누구보다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시대와 많은 시차가 있다. 박근혜 시대엔 다른 차원의 변화가 있지 않겠나.” -박 당선인은 11년 전에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일을 만났다. 이 점이 박 당선인의 대북정책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이나.“많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본다. 나도 1991년 방북해 김일성 주석을 만나면서 북한이 남북관계에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 감이 생겼다. 대남사업 간부들이 남북문제를 어떤 태도로 임하는지도 봤다. 박 당선인이 김정일을 만나면서 남북관계에 대해 최소한의 자신감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자신감이 있어야 강경책도, 유화책도 가능하다.”-박근혜 정부에서 3차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될까.“김정일은 지난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에서 남측의 지원만 받아내고 개혁·개방은 기피했다. 하지만 김정은은 김정일과 달리 젊고, 북한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려는 의욕이 있다. 따라서 내실 있는 회담을 원할 것이다. 문제는 그 밑의 간부들이 남측에서 뒷돈 챙길 궁리만 한다는 거다. 김정은이 남북정상회담을 하려면 이 문제부터 돌파해야 한다.” -박 당선인이 북한과 대화를 재개하려면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과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북한이 이들 문제에 대해 우회적으로라도 사과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북한에 중요한 건 군에 대한 장악력을 유지하는 거다. 사과한다면 군에서 누가 좋아하겠나. 결국 박 당선인이 결단을 내려야 한다. 사과로 받아들이기엔 어려운 멘트를 따내는 선에서 (대화로) 넘어갈 것인지, 아니면 그런 게 오히려 국민의 분노를 부를 수 있으니 아예 무시하고 넘어갈 건지 선택해야 한다.”-결국 우리가 천안함·연평도 문제를 대범하게 넘기고 북한과 대화를 진전시켜야 한다는 얘기로 들린다.“핵 문제 변수를 제외한다면 그렇다. 그런데 지금은 북한 핵실험 문제가 불거진 상황이다. 북한으로부터 핵실험을 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받아내야 대화를 할 수 있다. 다만 북한에 인도적인 지원은 일정 정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한다. 군이나 간부들이 중간에서 빼돌려도 낙수효과가 있다. 또 군이 빼돌린 식량은 결국 장마당에 나오니까 가격이 떨어져 북한 주민에 도움이 된다.” -박근혜 당선인의 대북정책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중간 정도가 돼야 할까.“아니다. 대북 개입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 인력과 예산을 늘려 다양한 형태로 개입을 강화해야 한다.” -김정은이 아버지 김정일의 사망으로 권력을 넘겨 받은 지 1년1개월이 됐는데.“김정은은 김정일 사망 전 아버지의 비호 아래 권력기반을 구축한 시간이 대단히 짧았다. 갑자기 이어받은 김정은의 권력이 안정돼 있다고 보긴 어렵다. 간부들이 겉으로는 복종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마음속까지 그럴 걸로 보이진 않는다. 내년 안에 어떤 식으로든 김정은의 실수가 드러나 정권에 어려움이 가중될 가능성이 있다.” -김정은 권력이 붕괴할 가능성도 있나.“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북한군의 쿠데타로 붕괴될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북한 군부는 다른 나라 군부처럼 사관학교나 지연 등을 고리로 군 장성·장교들 사이에 인맥을 형성하는 것을 철저히 차단해 왔다. 어떤 북한군 장성의 수기를 읽어보니 아주 절친한 동료 장성 생일인데도 공개적으로 축하를 해줄 수 없어서 새벽 3시에 몰래 음식을 싸가지고 만났다고 하더라. 이럴 정도니 현 시점에서 북한 군부 내 특정 그룹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그럼 어떤 형태로 붕괴될 가능성이 있나.“김정은 정권이 실정을 거듭한 끝에 총체적 난국으로 빠지는 거다. 권력 내부에 분열이 가중된 가운데 주민들의 소요에 이어 군 내에서 동요가 일어나 반란으로 붕괴되는 시나리오다. 이렇게 될 가능성을 굳이 수치화해 본다면 박근혜 정부 5년 안에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20~30%, 차기 정부까지 10년 안에 일어날 가능성이 30~40%로 본다.” -북한 급변사태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북한의 급변문제는 우리가 관여할 수 없고, 관여하려 해서도 안 된다. 어차피 김정은 체제가 붕괴될 것이라면 조기붕괴가 낫다는 게 내 입장이다. 다만 김정은 정부가 개혁·개방을 추진하는 움직임을 보이면 적극 지원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북한 체제가 연착륙해도 좋은 거다. 김정은 정부가 끝내 붕괴될 경우엔 우리는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다. 북한이 새 정부를 수립하고 재건하는 데 깊숙이 관여해야 한다.”-새 정부 수립을 도우면 분단이 이어지는 것 아닌가. 우리 주도로 통일을 추진해야 하지 않나.“그럴 경우 중국이 강력히 반대할 것이다. 중국이 반대하는데 미국이 우리 편을 들 리도 없다. 따라서 우리 주도의 통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동독 정권이 무너진 뒤 1년 만에 통일을 이룬 서독의 경우는 우리와 다르다. 당시 동독의 배후에 있었던 옛 소련은 무너져가는 제국이었고 옛 소련을 이끌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서방에 적극적인 유화정책을 폈기 때문에 서독 주도의 통일이 가능했다. 반면 북한의 배후인 중국은 급상승하는 제국이다. 요즘 미국에서 중국 경계론이 나오는 건 그만큼 중국에 겁을 내고 있다는 얘기다. 한반도 통일문제를 놓고 중국과 무리하게 대결하는 쪽으로 가지 않을 것이다.”-김정은 정권이 붕괴되면 북한에 친중적 성격의 새 정권이 들어설 것이란 얘긴가.“북한 내에 친중 세력은 김정일이 철저히 막아왔기 때문에 현재는 없다. 하지만 김정은 정권이 붕괴되면 북한 고위층도 처세를 위해 친중적 성격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 밑바탕에 친중 성향은 없다. 한국이 북한과 꾸준히 협의해가면 친중적 정권이라 해도 친한적 정권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김정은 정권을 대신해 정부를 수립할 세력은 현재 당 간부 중 일부 그룹이 될 가능성이 있다. 흔히 얘기하는 장성택 세력이 정권을 장악할지는 의문이다. 김정은이 민심을 잃어 정권이 붕괴된 상황에서 고모부가 정권을 잡긴 어렵지 않겠나.”-결국 김정은 체제 붕괴 뒤 완충적 정권을 거쳐 국제사회의 인정 속에 통일되는 모델을 추진하자는 얘긴데 당대에 가능한가.“당대에 분명히 가능할 것으로 본다. 앞으로 10년 안에 김정은 정권이 붕괴되고, 그 뒤 15년에서 20년간 완충 정권이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이 기간 중 우리는 지속적으로 정치력과 국력을 키워나가 통일에 대비해야 한다.”-올해 활동 계획은.“좌파가 북한 인권운동의 전면에 나서는 모델을 추진할 생각이다. 인권운동은 원래 좌파적 성격이 강하지 않나. 요즘은 좌파 내에 북한 인권에 관심을 갖는 인사들이 개별적으로 나오고 있다. 나보다 젊은 세대들도 있다. 다만 깃발을 들 수 있는 중심적 역할을 할 만한 분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정치엔 여전히 뜻이 없나.“지금은 그렇다.”-3년 뒤 20대 총선에는 출마할 생각이 있다는 의미인가.“그때 생각해봐야겠다.”-종북 논란이 끊이지 않는 통합진보당은 어떻게 해야 하나. “통진당을 이끄는 사람들끼리 관계가 굉장히 긴밀하다. 가족을 초월한다. 그런 구조에서 종북 성향 이념을 변화시킬 리더십이 당내엔 없다. 민주당은 통진당과 당연히 결별해야 한다. 다만 북한 체제의 문제점을 깨닫고 고민하는 당내 인사들은 종북세력으로 몰지 말고 포용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 국민들은 북한이나 통일 문제보다 생활고 해결이 시급하다는 주장이 많은데. “노인에게 기초연금을 10만원 줄지, 20만원 줄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북한 변수가 한국 사회에 미칠 장기적인 영향이 굉장히 크다. 정치 지도자들이 북한 문제에 훨씬 더 많이 관심을 갖고 체계적으로 학습해 핵심 어젠다로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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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조항 우후죽순 … ‘공포사업자’·꽃뱀공포증 부작용
성범죄에 대한 형량이 크게 높아지고 있다. 사진은 성추행 누명을 쓴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 ‘그래도 나는 하지 않았어’의 한 장면. #판결 1. 2010년 10월. 서울 남부지법은 친딸(사건 당시 15세)을 성폭행하고 임신시킨 40대 노모씨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5년간 신상정보 공개, 7년간 전자발찌 부착도 명령했다. 같은 해 12월 항소심에서 서울고법은 이씨의 형량을 징역 7년으로 줄였다.#판결 2. 2012년 12월. 수원지법은 내연녀의 딸(사건 당시 16세)을 성폭행한 50대 이모씨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10년간 신상정보 공개, 20년간 전자발찌 부착도 명령했다. 두 사건의 판결은 친딸과 내연녀 딸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2년 사이 성범죄에 대한 형량이 크게 늘어났다는 점이 주목된다.최근에는 성범죄가 살인죄와 형량이 비슷하거나 더 높은 경우도 있다. 지난해 12월10일 서울중앙지법 형사법관회의에서 살인죄에 대한 양형 기준을 높이자는 의견이 나온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현행 대법원 양형 기준에 따르면 ‘참작할 동기가 있는’ 살인의 양형 기준은 징역 4~6년이다. 그러나 13세 미만 강간에 대한 권고형량은 8~12년이다. 살인죄가 여타 범죄의 형량을 결정하는 기준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형량 아무리 높여도 만족 못 해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지난해 10월 성인대상 성범죄의 양형 기준을 올리는 방안을 논의했다. 여론의 뒷받침으로 미성년자와 장애인에 대한 양형 기준을 먼저 끌어올리고 보니 성인 대상 성범죄와 격차가 커졌기 때문이다.최근 몇 년 사이 성범죄 단죄 법률이 새로 생기거나, 법정형과 양형 기준이 모두 높아지면서 생긴 현상이다. 사회적으로 관심이 쏠린 아동 대상 성범죄에 대한 형량이 높아지면 성인 대상 성범죄 형량도 따라가고, 살인 등 다른 범죄의 형량에도 영향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형량을 높이면 과연 범죄가 줄어드는지에 대한 의문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형사정책연구원 김유근 연구위원은 “특정 범죄만 형량이 높아지면 일종의 착시 현상이 생겨 범죄에 대한 사람들의 분별력이 떨어진다”며 “최근에는 성범죄 형량을 아무리 높여도 사람들이 만족하지 않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그는 “형량을 높이는 게 범죄 억제에 효과가 있는지는 의문”이라며 “성범죄를 실제로 줄이려면 신고율 향상, 상습적 성범죄자 치료 등 사회정책적인 대안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관련 법이 너무 많고 복잡해 정비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국회에는 지난해 9월부터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아청법) 개정안만 20여 건이 제출 됐다. 성범죄 관련 법률도 형법 외에 ‘성폭력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아청법’ 등 여러 개가 있다.류여해 사법교육원 교수는 “같은 성범죄에 대해 법무부·여성가족부 등 여러 부처에서 법률이 만들어지는 것은 문제”라며 “사회적 공분을 사는 성범죄가 생길 때마다 법을 새로 만들고 형량을 높이는 것은 법의 명확성을 오히려 떨어뜨린다”고 말했다. 연세대 법무대학원 박상기 교수도 “우리 성범죄 법률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 처벌 조항이 이미 충분하며 처벌 강도 역시 더 이상 높이기 어려울 정도”라고 말했다.법이 양산되는 과정에서 모호한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범죄임을 의식하지 못한 채 전과자를 양산할 가능성도 커진다. 이 과정에서 준법 의식이 떨어지면 결과적으로 애초에 보호하려 한 법익조차 훼손된다는 것이다. 아청법 제2조 5항의 아동·청소년 이용 음란물의 정의가 대표적인 논란거리다. 현행법의 아동·청소년으로 ‘인식될 수 있는’이라는 부분이 너무 광범위하다며 논란이 일자 개정안은 여기에 ‘명백하게’라는 단어를 추가했다.우리만화연대 신유경 사무국장은 “여전히 실존 인물이 아닌 만화 속 창작물이 포함돼 범위가 너무 넓고 모호하다”며 “창작자의 자기 검열을 강요하는 문제도 생긴다”고 말했다. 김유근 연구위원은 “미국에서도 아동 음란물 제작자와 소지자를 모두 가혹하게 처벌하지만 어디까지나 실존 인물을 이용할 경우”라며 “창작물까지 과도하게 처벌하고 모호하게 처리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생긴다”고 말했다.성희롱 관련 법규도 전과자 양산 우려2007년 초 일본에서 개봉된 영화 ‘그래도 나는 하지 않았어(それでもボクはやってない)’. 스오 마사유키(周防正行) 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치한 혐의를 받은 주인공이 무죄입증을 위해 노력하나, 강경 일변도인 일본 사법시스템에 좌절한다는 내용이다. 사회적 공분을 사는 치한 범죄의 경우 가해자(피의자)에 대한 징벌의식이 강한 나머지 ‘무죄추정의 원칙’이나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을 고려한다’는 근대 사법의 원칙마저 사라지는 역설을 보여주고 있다.영화는 ▶혐의 입증을 위해 피의자의 집에서 성인 잡지·영화를 찾아 증거로 삼는 관행 ▶혐의를 부인하면 혹독한 대우를 받지만 인정만 하면 실제 범죄자라도 벌금과 합의금으로 손쉽게 일상으로 복귀하는 허점도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런 허점을 이용하도록 부추기는 변호사와 법조 브로커 등의 존재가 암시된다. 모호한 법률과 지나치게 강력한 처벌 사이에서 이권을 목적으로 합의를 강요하거나 편법을 안내하는 이들은 일종의 ‘공포사업자’로 부를 수 있다.소수지만, 처음부터 금품을 목적으로 성범죄를 악용하는 꽃뱀의 문제도 자주 지적된다. 24일 서울중앙지검은 경찰관과 합의하에 성관계를 맺고도 강제로 성폭행당한 것처럼 고소한 혐의(무고)로 황모(27)씨를 불구속 기소했다. 황씨는 2011년부터 서울과 경기도의 경찰관을 노려 같은 수법으로 돈을 챙겨오다 적발됐다.법 체계가 정리가 안 돼 생기는 혼란은 ‘성희롱’도 마찬가지다. 김태훈 변호사는 “성범죄와 달리 피해자의 느낌만으로도 처벌이 가능한 성희롱 관련 법규가 불필요하게 전과자를 양산할 수 있다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소송 전에 피해자와의 합의를 유도하는 일이 많고, 브로커 등 공포사업자가 개입하게 된다. 드물지만 꽃뱀 같은 악용사례도 생긴다. 김 변호사는 미국처럼 성희롱을 민사상 문제로 처리하거나, 유럽처럼 수사 전에 행정기관이 조정을 하는 사전심사 제도를 도입하는 게 대안이라고 말했다.서울대 곽금주(심리학) 교수는 “우리 사회가 아직도 성범죄, 특히 아동·청소년에 대한 범죄에 대한 대응책이 부족하기 때문에 법률을 더 강화할 필요는 있다”고 전제하고 “문제는 실태를 잘 파악해 현실에 맞는 처벌을 해야 한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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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두나 ‘클라우드 아틀라스’ 주연급 출연 … 비·이병헌도 활약 돋보여
한국 영화인들의 할리우드 도전에는 주로 배우들이 앞장섰다. 가장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인 건 가수 겸 배우 비(정지훈)와 이병헌, 배두나다. 세 사람은 언어장벽에도 불구하고 워너브러더스와 파라마운트 등 할리우드 대형 스튜디오들이 제작한 블록버스터급 영화에 주연 혹은 주연급 조연으로 출연해 강도 높은 액션 장면을 소화해 내며 폭넓은 관객층에 얼굴을 알렸다.비는 2008년 ‘스피드 레이서’에서 조연으로 열연한 데 이어 이듬해 ‘닌자 어쌔신’으로 주연 자리를 꿰찼다. 한국인이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에서 단독 주연을 한 건 사상 최초였다. 다만 흥행 면에선 두 영화 모두 고전을 면치 못해 다소 빛이 바랬다. ‘매트릭스’ 시리즈로 유명한 워쇼스키 남매가 감독한 ‘스피드 레이서’는 세계적으로 9400만 달러를 벌어들였지만 1억2000만 달러의 제작비를 메우기엔 역부족이었다. ‘닌자 어쌔신’은 6200만 달러의 흥행 수입을 올렸다. 손익분기점을 넘기긴 했지만, 당시 아시아 최고 스타였던 비의 티켓 파워를 증명하기엔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비의 연기 역시 액션은 괜찮았지만 대사 처리는 미흡했다는 지적이 많았다.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고 있는 건 이병헌이다. 그는 ‘지.아이.조’(2009)로 할리우드에 데뷔했다. 원작만화에서도 가장 팬이 많은 캐릭터인 ‘스톰 섀도’를 연기한 덕에 조연임에도 확실한 인지도를 쌓을 수 있었다. 섬세한 연기력으로 살려낸 특유의 눈빛과 카리스마는 단번에 할리우드 관계자들을 사로잡았다. 대사가 많지 않은 역할이었다는 점도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다. ‘지.아이.조’는 3억 달러가 넘는 돈을 긁어모으며 대성공을 거뒀고, 이병헌은 ‘지.아이.조2’ 출연 기회를 잡았다. 그의 배역 비중이 한층 커진 걸로 알려진 속편은 3월 미국 개봉 예정이다. 이병헌은 여세를 몰아 브루스 윌리스, 앤서니 홉킨스, 헬렌 미렌, 캐서린 제타 존스 등과 함께 ‘레드2’에도 캐스팅됐다. 현재 후반 작업 중인 ‘레드2’는 미국에서 8월 개봉된다.지난해 ‘클라우드 아틀라스’에 주연급으로 출연한 배두나(사진)의 활약도 돋보인다. 워쇼스키 남매에게 전격 발탁돼 스토리의 핵심 인물인 손미 역을 맡았다. 그동안 한국과 일본에서 착실히 쌓아 온 연기내공과 존재감을 확실히 선보이며 할리우드 관계자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하지만 영화의 흥행 성적은 7100만 달러 정도로 저조한 편이다. 메이저 스튜디오 영화나 흥행작은 아니지만 ‘워리어스 웨이’(2010)에 출연한 장동건과 미·중 합작 ‘설화와 비밀의 부채’(2011)에 나온 전지현도 ‘할리우드 주연 배우’라는 타이틀을 달긴 했다. ‘엑스맨 탄생: 울버린’(2009)의 다니엘 헤니, ‘드래곤볼 에볼루션’(2009)의 박준형도 비중은 작지만 미국 영화계에 입성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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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스토커’는 최고로 예술적인 스릴러”
미국 파크시티에서 열린 ‘2013 선댄스 영화제’에서 20일 ‘스토커’를 공개한 박찬욱 감독(왼쪽). LA에서 14일 열린 영화 ‘라스트 스탠드’ 시사회에 참석한 김지운 감독. [LA·파크시티(유타주) AP=뉴시스] 2013년은 한국 영화감독들의 할리우드 진출 ‘원년’으로 기록될 만한 해다. 한국을 대표하는 실력파 감독 박찬욱(50)과 김지운(49)이 할리우드에서 첫 영어 영화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국 영화인들의 할리우드행은 배우들이 주도해 왔다. 감독들의 본격 진출은 할리우드 메이저 시스템이 한국 감독의 연출력을 인정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박찬욱 감독의 ‘스토커(Stoker)’는 20세기폭스의 자회사 폭스서치라이트가 제작과 배급을 맡았다. 김 감독의 ‘라스트 스탠드(The Last Stand)’는 ‘트랜스포머’ ‘지.아이.조’ 시리즈를 만든 디보나벤추라가 제작하고 대형배급사인 라이온스 게이트가 배급했다. 이들이 문화 장벽을 넘어 미국 대중영화 시장에서 어떤 평가를 받느냐에 따라 ‘K무비’ 혹은 ‘K필름’으로 불리는 ‘영화 한류’의 향후 가능성이 걸려 있다.2000년대 들어 한국 영화는 세계적 권위의 영화제에서 줄줄이 수상하며 인지도를 높여 왔다. 박 감독도 ‘올드보이’(2004)와 ‘박쥐’(2009)로 칸 영화제에서 두 차례나 상을 받았고, 김지운 감독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장화, 홍련’(2003) 등으로 해외 영화제에서 여러 차례 상을 받았다. 채프먼대 영화학과 이남 교수는 “그동안 두 감독에 대한 관심이 주로 영화산업 관계자와 매니어 층에 한정돼 있었는데, 이제 이들이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 들어와 미국, 나아가 세계에서 보다 폭넓은 관객과 만나게 됐다”고 평했다.아널드 슈워제네거 주연 ‘라스트 스탠드’는 18일 미국 전역에서 개봉됐다. 니콜 키드먼을 내세운 ‘스토커’는 미국 유타주 파크시티에서 20일 개막한 선댄스 필름 페스티벌에서 세계 최초로 공개됐다. 둘 다 철저히 상업적인 팝콘 무비(김지운)와 작가주의적 색채가 강한 예술 영화(박찬욱)로, 장르와 타깃 관객층이 판이하다. 하지만 두 한국 감독과 작품에 대한 관심만큼은 똑같이 뜨거웠다. 선댄스 영화제 최고 화제는 ‘박찬욱’‘스토커’는 20일부터 27일까지 열린 ‘2013 선댄스 필름 페스티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선댄스 영화제는 ‘내일을 향해 쏴라’ ‘스팅’의 전설적 배우 로버트 레드퍼드가 주도해 만든 세계 최대의 독립영화 축제. ‘스토커’가 21일(현지시간) 공개된 후 영화제 참석자들의 화제는 ‘Chanwook Park’이라는 이름 석 자였다. 박 감독이 관객과의 대화에 참여한 22일엔 치열한 티켓전쟁이 벌어졌다. 티켓을 구한 사람들도 조금이라도 앞자리에서 박 감독을 보기 위해 두시간 전부터 줄을 길게 늘어서는 풍경을 연출했다.베일을 벗은 ‘스토커’는 관객과 평단을 매료시켰다. 단순하면서도 겹겹이 층을 이루며 심도를 더해가는 강렬한 이야기 구조는 러닝타임 98분 내내 객석을 파고들었다. 치밀하게 디자인된 영상과 사운드는 비밀스러운 캐릭터들과 더해지며 섬뜩한 긴장감과 서늘한 아름다움을 동시에 선사했다. 엄마와 딸, 삼촌의 불편하고도 팽팽한 삼각관계는 한 특별한 소녀의 기괴한 성장 스토리로 승화되며 ‘박찬욱 월드’의 개성을 다시 한번 드러냈다.프리미어 직후 열린 애프터 파티에서 박 감독과 니콜 키드먼, 미아 바시코브스카, 매슈 굿 세 주연배우는 몰려드는 사람들로부터 축하 인사를 받느라 바쁜 모습이었다. 이튿날 영화진흥위원회 주최로 열린 ‘선댄스 한국영화의 밤’ 행사에서도 이런 풍경은 이어졌다. 숙소와 행사장을 오가는 버스 안에서도 ‘스토커’의 감흥을 나누는 사람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시내에선 ‘박찬욱의 열혈팬’임을 자처하는 택시기사도 만날 수 있었다.유력 외신들은 월드 프리미어 직후부터 경외에 가까운 찬사를 쏟아냈다. 버라이어티는 “미국 영화 제작으로 자신의 특출 난 재능을 가져 온 박찬욱 감독은 ‘스토커’를 통해 가능한 모든 것을 보여줬다”며 “특출나고도 절묘하게 디자인된 영화”라는 평을 내놓았다. 할리우드 리포터는 “박 감독은 오랜 세월 동안 볼 수 없었던 최고로 예술적인 스릴러를 만들어냈다”고 극찬했다. ‘스토커’는 3월 1일 미국에서 개봉될 예정이다.‘라스트 스탠드’ 평가는 극과 극‘라스트 스탠드’에 대한 현지 반응은 선명하게 양분됐다. 개봉 전 프로모션 초반엔 모든 게 순조로웠다. 이달 초 할리우드에서 열린 언론시사회에선 예상치 못했던 깨알 같은 유머에 쉴 새 없이 웃음이 터졌다. 다음날 열린 기자회견장의 분위기도 뜨거웠다.주연을 맡은 슈워제네거는 “엄청난 비전을 지닌 데다 언어 장벽을 넘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전달할 줄 알고 모든 스태프와 잘 어울려 일하는 감독”이라며 치켜세웠다. 김 감독을 할리우드로 스카우트해온 할리우드 거물 프로듀서 보나벤추라 역시 “촬영 현장 분위기가 달라 문화 쇼크가 있었을 텐데 이를 잘 극복하고 모두와 협동해 멋진 영화를 만들어냈다”고 평했다. 분업이 확실하고 의사 결정 과정이 복잡한 할리우드 시스템에 빠르게 적응해 배우와 제작진을 만족시킨 점만큼은 확실히 인정을 받았다는 얘기다. 김 감독이 목표로 했던 ‘소프트 랜딩(연착륙)’은 무사히 이룬 셈이다.개봉에 임박해 할리우드에서 열린 월드 프리미어에서도 분위기는 달아올랐다. 레드카펫 행사가 열린 할리우드 거리는 출연진을 보려는 영화팬들로 장사진을 이뤘다.영화 상영 직전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매체들의 리뷰는 극과 극으로 나뉘었다. 온라인 매체들은 100%에 가까운 극찬을 내놓았다. 반면 인쇄 매체의 리뷰는 온도 차가 극명했다. LA타임스와 월스트리트저널, 버라이어티 등은 호평이었다. AP통신의 영화평론가 크리스티 르마이어는 “김지운 감독은 영화 속 모든 장면을 생기 넘치게 이어갔다. 아무 생각 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에 충분한 영화”라는 호의적인 평을 내놨다. 반면 워싱턴포스트, 보스턴글로브, 샌프란시스코 크로니컬 등은 혹평을 했다. “슈워제네거가 액션 스타로서 더 이상 충분한 매력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평이 골자였다.이 같은 혹평은 결국 예상치를 밑도는 첫 주말 성적으로 이어졌다. ‘라스트 스탠드’는 주말 동안 북미지역에서만 721만 달러(약 77억원)를 벌어들이며 박스오피스 9위에 올랐다. 할리우드 관계자들은 “아무도 슈워제네거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특히 가족의 가치를 중시하는 미국인들이 불륜과 사생아 사건으로 이미지가 추락한 그의 컴백을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제작진은 슈워제네거의 지명도가 높은 아시아와 여러 조연진의 출신지인 남미권에서는 또 다른 행보를 보일 것을 기대하고 있다. 국내 개봉은 다음달 21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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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 출범과 새누리당 -이군현 의원 父子의 ‘6030토크’
이필립=공대생이 정치에 관심이 적다고들 하지만 그중에서도 정치색을 표현하는 친구들은 야당을 지지하는 경우가 많다. 기존 사회와 기성세대에 대한 울분이랄까, 저항의식이 있는데 그게 진보와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KAIST에서도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모여도 사회에 나가면 뭐 먹고 살아야 하는지 걱정을 많이 한다. 취업을 생각하면 일자리가 없어 캄캄하다. 결혼도 해야 하는데 가진 돈도 없다. 부모님께 손을 벌려야 하는데 그것도 힘들다. 그런 상황에서 보수보다는 진보가 복지에 신경을 쓰는 것 같아 보인다. 주변 친구들은 지금 상태가 잘못돼 있는 것 같으니 변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있다.이군현 의원=우리도 젊을 땐 야당이었다. 우리도 데모도 하고 ‘기성세대와 우리는 다르다’고 했다. 젊은이들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뭔가 바꾸면 새로운 것이 올 거란 막연한 기대를 한다. 젊은 사람들은 진보 세력과 야당이 자신들을 위한 정책을 더 갖고 있으리라 막연히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 않다. 실제 새누리당엔 젊은 사람들을 위해 마련한 많은 정책이 있다. 그런 정책은 오히려 우리가 더 많다. 반값 등록금 정책도 있고 0~3세 무상보육 정책도 내놓았다. 뜯어보고 분석하고 따져보면 새누리당이 야당 못지않게 젊은 세대를 걱정하고 일자리 대책을 세우고 있다.필립=친구들은 공부하고 취업을 준비하느라 공약을 하나하나 보고 ‘이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되겠구나’ ‘보수지만 진보적인 공약도 내놓았구나’ 판단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저도 아버지 말씀을 들어야 ‘아, 이런 게 있구나’ 하고 알게 된다. 주변 친구들은 아무래도 부모 세대가 이룬 것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자라왔는데 막상 자기가 가정을 이루려 하니 막막한 부분이 많다. 대학 때는 등록금 때문에 어려움을 겪어도 한 계단, 한 계단 나아가면 어머니·아버지가 가정을 꾸린 것처럼 나도 준비가 돼 있겠지 막연히 생각하며 노력한다. 하지만 막상 결혼할 시기가 되니 스스로 준비를 하기엔 어려운 부분이 많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이 의원=우리는 급격한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겪은 세대다. 또 IMF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격동의 시대에 고난을 이겨내고 자녀를 교육시켰다. 아들 세대인 30대는 그런 걸 체험한 세대가 아니다. 하지만 비싼 등록금과 취업 문제를 겪는다. 결혼도 어렵고 출산도 안 하려 한다. 이렇게 체험한 게 다르기 때문에 세대 간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새누리당 이군현 의원(왼쪽)과 아들 필립씨가 대화하다 함께 웃고 있다. 필립=기성세대는 우리나라가 이렇게 살 만하게 만들어 놓으신 분들이다. 어려운 상황에서 자수성가한 사람이 많은 걸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 세대는 어떻게 보면 부모님 세대에 비해 온실 속 화초처럼 혜택을 받으면서 자란 부분이 있다. 하지만 군대도 전방에 가든 후방에 가든 고생하는 건 마찬가지다. 그처럼 우리 세대도 일자리 문제 때문에 답답하고 불만이 생긴다. 어려움과 고민이 있다. 그런데 부모님 세대는 우리 세대에 대해 ‘의지가 없는 것 아닌가’라고 한다. 우리 세대는 나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부모님과 공감대가 형성 안 되면 속상하다. 그걸 대화로 풀지 못하니 이후에도 어차피 말하면 핀잔을 들을 거라고 생각하고 대화를 아예 포기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이 의원=기성세대 입장에선 젊은이들이 좀 더 도전하고 자신감을 가졌으면 좋겠다. 젊은이들의 상실감이 너무 큰 것 같다. 세계는 넓다. 얼마나 글로벌한 세계인가. 새로운 것을 도전하고 부딪치려 하고 주저앉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필립=아버지가 정치를 시작(2004년)하시기 전 야당 후보들을 보면 대부분 신선하다고 생각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처음 나왔을 때 친근한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3김(金)시대 옛날 인물들만 보다가 야당이 새로운 인물을 세우는 걸 보면 ‘저 사람은 뭔가 다른 것 같다’ ‘뭔가 바뀔 것 같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이 의원=정치는 현실이다. 결국 국가 지도자가 할 일은 세 가지다. 자기 국민을 안전하게 지키는 일, 자기 국민을 등 따습고 배부르게 하는 일, 문화와 가치를 교육하고 계승 발전시키는 일이다.필립=(20대보다) 30대는 투표할 때 당을 본다. 물론 사람만 보고 투표하는 친구들도 있다. 하지만 제 주변에는 사람 이상으로 그 사람이 어떤 당에 소속돼 있는지도 많이 본다. 새누리당이 자유시장경제를 더 추구하는 정책을 내놓다 보니 사람들이 부자 정당이란 인식을 갖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물론 부자 정당이라고 부자를 위한 공약만 낸다고는 생각 안 한다. 새누리당도 그런 이미지를 보완하는 정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인식은 퍼지고 있다. (지난해 4월 총선 때) 아버지 선거운동을 도우면서 시장을 많이 돌았다. 열심히 뛰는 걸 알아봐 주시는 분들이 있었지만 명함을 받자마자 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요새 (새누리)당이 정말 잘하고 있는 거냐”며 한마디하시는 분도 있었다. 서울에서도 유인물을 돌린 적이 있었는데 지역(통영-고성)보다 더 안 받아줬다. 여당이 싫다기보다 정치에 대한 회의가 많은 것 같았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싫다는 거다. 정치인들이 소명의식을 가져야 하는데 부정부패 하는 모습을 보이니 외부에선 ‘그 밥에 그 나물’이라고 한다. 아버지는 어떻게 해야 나라가 발전할까 고민하면서 정치를 하는 걸 알고 있다. 제가 주변에서 본 어떤 사람보다 열정적으로 일을 하신다. 하지만 부정부패 하는 사람들이 정치인의 이미지를 흐려놔서 그런 사명의식이 국민에게 잘 전달이 안 되고 있다.이 의원=정치인들이 특권을 내려놔야 한다. 국민 정서에 맞지 않는 것들은 다 내려놔야 한다. 국회의원이라서 (책임을) 면제받는 것도 그렇게 해야 한다. (잘못을 저지른 국회의원 징계를 논의하는) 국회 윤리특위도 외부 인사들로 구성해야 한다. 여야가 같은 국회의원을 징계한다는 게 쉽지는 않다. 따라서 외부 인사들을 통해 국민 눈높이에 맞춘 윤리 기준을 세워야 한다. 정치인들이 싸잡아 비난받고 국회가 부정부패의 온실처럼 되지 않도록 제도를 갖춰야 한다.필립=박근혜 당선인이 이공계 쪽에 관심을 많이 보이는 건 좋게 본다. 이공계 기피 현상이 심각한데 이공계에 있는 사람들이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제가 이공계 출신이라 그런지 나라가 일류가 되려면 이공계가 잘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래창조과학부도) 투자를 하려는 움직임이라고 보고 좋게 생각한다. 박 당선인이 일을 비밀스럽게 하는 데 대해선 비판이 있다. 하지만 더 좋은 방향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생각하고 지켜보려 한다. 장기적으로 보고 평가할 거다.이 의원=박 당선인이 인사는 시스템을 갖춰 하는 편이 좋다. 너무 갑자기 깜짝 인사를 하는 건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가 과학기술을 중시하는 건 핵심을 잘 잡았다 싶다.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일자리도 생기고 수출도 늘 거다.필립=박 당선인과 새누리당이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가 화합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세대와 세대가 소통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어야 할 것 같다. 2030세대가 5060세대의, 5060세대가 2030세대의 가치관을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체험해 볼 수 있는 프로그램도 있으면 좋겠다.이 의원=젊음은 희망이고 우리의 미래다. 하지만 옛말에 ‘늙은 말이 길을 안다’는 게 있다. 낯선 길을 갈 때는 새 말을 갖고 가는 게 아니라 길을 아는 말을 가지고 떠나야 한다는 거다. 젊은 세대는 열정과 도전의식은 있지만 지혜는 아무래도 적다. 그러니 경험을 가진 기성세대와 열정이 있는 젊은 층을 어떻게 조화시켜 끌고 갈지 박근혜 정부가 고민해야 한다. 세대 간 대통합을 위해 어떤 제도와 시스템이 있어야 할지 전문가와 국민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검토해야 한다. 결국 서로 경험을 공유하고 대화를 많이 해야 할 거다. 전화로든 SNS를 통해서든, 대화의 전제는 신뢰다. ‘무신불립’이란 신뢰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이다.필립=아버지 말씀대로 대화가 중요하다. 군대에 있을 때 아버지로부터 편지를 대여섯 통 받았는데 굉장히 좋았다.이 의원=떨어져 있으니 편지를 썼다. ‘내 사랑하는 아들아’ ‘나의 자랑스러운 아들아’로 시작하는 편지를 통해 신뢰와 사랑을 보여주려 했다. 신뢰가 있다면 세대 갈등은 줄일 수 있다고 본다. 보수·진보 갈등도 마찬가지다. 어느 시대나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있다. 진보는 꿈에 대한 열망이 있는 거고 보수는 기존에 있는 것을 지키려는 성향이 강하다. 진보와 보수가 끊임없이 마찰하고 갈등하는 건 어찌 보면 긍정적이다. 갈등이 없는 사회는 현실에 안주하고 만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진보와 보수라는 두 축의 수레바퀴로 굴러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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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끼리 서로 모방 ‘패치워크’로 풍요롭게 된다
황태연(왼쪽) 교수와 김종록 작가. 문명의 대(大)전환기다. 동아시아의 급부상과 함께 전 세계에 공자(孔子) 열풍이 불고 있다. 공자는 꼭 필요한 ‘혁신’이자 ‘오래된 미래’라고 주장하는 정치철학자가 있다. 패치워크 문명 시대의 공맹(孔孟) 정치철학 『공자와 세계』를 펴낸 황태연(56·사진) 동국대 교수다. 황 교수는 동서양 철학의 숲을 관통하고 통섭하면서 공맹 사상에 대해 독특한 해석을 해왔다. 중앙SUNDAY 객원기자인 김종록 작가가 21일 오후 본지 인터뷰 룸에서 3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다. 『공자와 세계』 -『공자와 세계』 5권을 내리읽었다. 소행성의 지구 충돌 같은 지적 경험이었다.“김 작가의 독후감이 문학적이다 못해 천문학적이다. 헤겔과 마르크스를 시작으로 30여 년간 연구한 성과물이다. 플라톤이나 베이컨, 칸트 등 서양철학의 거대한 빙산들을 원전(原典)으로 차례차례 꿰뚫었다. 이후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시대의 여러 철학자들을 독파하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패치워크 문명(patchwork civilization)이라는 용어도 아주 새롭다.“패치워크는 원래 헝겊 조각들을 모아 짜깁기해 만든 옷이나 보자기·우산·이불 등의 섬유제품을 말한다. 오늘날엔 문화 분야로 전의돼 기존의 여러 글이나 영화 따위를 편집해 완성품을 만드는 일이나 작품을 가리키는 데 쓰이기도 한다. 이혼과 재혼의 증가로 심지어 ‘패치워크 가족’이라는 말도 생겼다. 흔히 문명을 융합모델과 갈등모델로 나누곤 한다. 나는 그런 개념이 맞지 않다고 본다. 문명들은 융합하지도 갈등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문명들은 오직 서로 모방을 통해 패치워크될 뿐이다.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서로의 장점을 취해 자연스럽게 짜깁기된다. 그러면서 더욱 다채로워지고 풍요로워진다.”-공자로 재단한 세계철학사로 읽힌다. 놀라운 건 『논어』『중용』 『주역』 같은 동양고전의 완벽한 재해석과 통찰이다.“10년 이상 동양 고전과 씨름했다. 성리학자인 주자(朱子)를 읽으려고 직접 ‘주희 한문 소사전’을 만들어 활용했다. 『주역』은 인류가 아직까지도 완전한 재해석을 못하고 있다. 계속 연구, 보완 작업해 나갈 참이다.”-서양철학을 전공했는데 왜 공자주의(Confucianism)에 빠졌는가.“일찍이 박사학위 논문에서 몇 가지 의문점을 지적했었다. 서양철학의 합리론은 이성을 중시하나 인간 감성을 무시한다. 대표적인 철학자가 칸트다. 감성을 인정해주는 척하다가 무시해 버린다. 한마디로 역겨운 트릭 철학이다. 로크나 흄, 애덤 스미스 같은 영국 경험론자들은 감성을 인정하지만 곧잘 합리주의의 수렁으로 빠진다. 서양철학 자력으로는 도저히 돌파할 수 없는 모순이 있다. 잘 생각해보라. 인간은 어떤 대상의 옳고 그름을 실천이성을 발휘해서 아는 게 아니다. 오감과 쾌, 불쾌의 감정을 가지고 직관적으로 안다. 이성이 아니라 감성으로 공감하는 것이다. 공자가 말하는 ‘학이사(學而思:배우고 깊이 생각한다)’는 인간 감성을 이용한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중앙일보 같은 언론사도 독자 공감대에 따라 매일매일 재판받고 있다. 민심의 바다에서. 개인이 시비를 가리는 것이지만 공감대가 형성되면 곧 민심이 된다. 공자의 공감정치, 경험에 입각한 덕성주의 철학에 답이 있었다. 한계에 놓인 서양철학은 공자가 대안이자 미래라는 걸 그때 이미 확신했다.”-공자를 경험론자로 읽어내고, 그의 ‘술이부작(述而不作:서술해서 전할 뿐 지어내지 않는다)’에서 착안해 서양 합리론자들을 ‘우주나 신(神)같이 잘 모르는 것까지도 함부로 지어낸다(不知而作)’고 조롱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한 데카르트는 표절자로, 칸트는 공허하고 맹목적이며 위험한 철학자로 단정한다. 게다가 조선왕조의 정치철학이었던 주자학은 사특한 공리공론으로 폄하한다. 저자야 통쾌하겠지만 전공자들의 공격이 만만치 않겠다.“아직은 조용할 뿐 큰 반론이 없다. 폭풍 전야의 고요한 바다일지도 모르겠다. 아마 서양철학 전공자들은 동양철학을 잘 모르고, 동양철학 전공자들은 서양철학을 잘 몰라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동서양에서 떠받들어온 철학자들의 사상적 실체를 파헤치고 인류 문명사에 어떤 부작용을 낳았는가를 집중적으로 드러냈다. 편의상 철학사적 의의나 장점은 생략했다. 그 때문에 무리한 평가라고 여길 독자들이 있겠지만 나는 명확한 근거들을 제시했다.”-합리주의자 칸트처럼 살지 말고 경험주의자 공자처럼 살아야 인류가 행복하단 말인가.“맞다. 현대물리학 이전 시대라고 치자. 북극에 안 가본 서양의 합리주의자나 조선의 성리학자는 태양이 1년에 한 번만 뜨고 지는 걸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북극점에서 넘어지면 어느 쪽으로 넘어지는가. 어디로 넘어지건 남쪽으로 넘어지는 거다. 그런데 동서남북이 있는 조선 땅의 성리학자는 그걸 경험하지 못해 그 빤한 사실을 알 수가 없다. 공자는 ‘경험에서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공허하고, 생각하기만 하고 경험에서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고 했다. 머리 많이 굴리며 살지 말고, 발품 많이 팔며 살아야 바른 세상이 된다는 얘기다.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고,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다’고 말한 칸트는 경험의 내용과 감성적 직관을 중시하는 것 같지만 그의 경험과 감성은 선험적 주관주의와 감각적 관점주의에 빠진 나머지 맹목이자 공허가 돼버린다.”-16∼17세기 유럽 계몽주의의 싹이 공자철학의 영향이라고 논파했다. 그리고 그 근거로 많은 원전을 들어 조목조목 제시했는데.“서양 계몽주의는 1688년 영국 명예혁명에서 1789년 프랑스대혁명까지 약 100년간의 새로운 변혁 사조를 가리킨다. 공자철학이 계몽주의의 기원과 융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건 의심할 수 없는 정설이다. 공자는 ‘계몽주의의 수호성인(the patron saint)’이었고 동서양 철학은 멋지게 패치워크됐다. 볼테르, 흄과 애덤 스미스 같은 철학자들이 주도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는 당시 유럽보다 경제적으로 앞섰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 그 전거가 분명할 뿐더러 서양 통계학자들의 데이터(1권 405~407쪽)가 뒷받침한다. 공자철학을 패치워크했던 계몽주의는 마침내 아메리카합중국과 빅토리아 치세의 영국을 잉태한다. 근대자유주의 정치·경제사상의 창안에 공자가 있었다.”-멋지다. 공자철학의 정수가 어떻게 그렇게 전해졌나.“우리가 잘 아는 마테오 리치(1552~1610)의 경우처럼 선교사들은 중국에 기독교를 효과적으로 전파하려고 중국문화를 배워야만 했다. 적응주의라는 거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하늘을 아는 공자와 접했다. 공자를 번역하다 그만 공자의 매력에 빠져버렸고 거꾸로 유럽에 전파했다. 엄청난 대형 사고가 터져버린 것이다(웃음). 공자사상은 스콜라철학을 박살내 버린다.”-전파 동기가 흥미롭다. 그 무렵 조선에서는 이른바 사단칠정 논쟁이 벌어진다.“성리학은 동아시아의 스콜라철학이다. 물론 유럽에 전해진 공자철학은 성리학이 아니라 선진 공자철학이다. 세상이 개벽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에 갇힌 조선 사대부들은 공리공론에 빠진다. 공자가 그린 대동사회(大同社會)는 뒷전이었다. 『예기』에 나오는 ‘대동’은 임금과 관리가 현자와 능력자 중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되고, 대인(大仁)과 대의(大義)의 원리에 따라 화목과 영구평화가 달성되며, 완전고용과 보편복지가 실현된 신분차별 없는 사회다.”-대동사회는 공자가 희망한 유토피아일 뿐이다. 그것이 실현됐다는 당우(唐虞:요순)시대는 전설 같은 이야기다.“이상적인 모델이 있는 것과 없는 건 큰 차이가 있다. 배부른 ‘온포(溫飽)시대’가 된 중국은 2020년까지 ‘전면적 소강(小康)사회’ 건설을 완료하고, 2021년부터는 모두가 잘사는 ‘대동사회’를 건설한다는 장기발전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동아시아에선 우경화로 치닫는 일본이 문제다.”-정암 조광조의 개혁드라이브에도 대동사회가 등장하긴 한다.“그러다 희생되지 않는가? 선조 때 정여립도 마찬가지다. 대동사회를 꿈꾸다 자그마치 1000명의 독서인들이 무고하게 죽는다. 그게 받아들여졌다면 서양보다 더 빨리 민주사회가 됐을 거고 근대화도 가능했다. 그랬다면 일본이 조선을 침탈하지도 못했을 거다.”-공자철학과 서구의 패치워크 산물은 칸트를 기점으로 결국 제국주의로 뒤틀렸다. 동아시아의 변방국 일본도 배워 이웃 나라에 써 먹었다. 인류 문명사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영국 경험론자들이 공감정치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곧잘 합리론에 빠졌다는 얘기는 앞에서도 했다. 합리론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독백(monologue) 모델’을 ‘대화(dialogue) 모델’의 소통 패러다임으로 전환했던 하버마스의 시도도 실패한다. 두 치 혀로 하는 소통행위로는 말 없이 교감하는 공감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경험주의적 패러다임 전환을 할 수 없다는 얘기다.”-어느새 철학적 세계일주를 마칠 때가 되었다. 대동사회의 완전고용과 보편복지가 부러운 때다.“정부가 복지비용을 말하면 국민은 세금폭탄이라고 불평한다. 준조세 빼고 기껏 10% 남짓 내는 세금을 폭탄이라고 하면 안 된다. 스웨덴은 무려 소득의 50%를 세금으로 낸다. 어렵지만 우리도 세금을 성장통이라고 생각하고 기꺼이 더 내야 한다. 성장을 자동차의 앞바퀴로, 복지를 뒷바퀴로 삼되 동력은 뒷바퀴 축에 둬야 한다. 길게 보면 복지가 원활해야 성장도 잘된다.”-거침없는 달변가인 것 같다. 정치토론 좋아하는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공자와 세계』 콘서트를 열면 불꽃 튀겠다.“기회가 되면 어떤 전문가의 반론이건 즐겁게 받아들이겠다. 일말의 소명감도 느낀다.”황태연 동국대 정외과 교수.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와 독일 괴테대학에서 마르크스를 재해석한 ‘지배와 노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실증주역』과 다수의 역저가 있다.김종록 작가. 성균관대 한국철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저서로 『소설 풍수』 『장영실은 하늘을 보았다』 『바이칼』 『근대를 산책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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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음성·스타일 인식해 TV채널 추천 척척
이관민 교수가 성균관대 인터랙션 사이언스학과 실험실에서 기술과 인문학의 융합을 설명하고 있다. 이 실험실은 영상을 보는 사람의 뇌파 변화를 측정하는 장비를 갖췄다. 조용철 기자 지난 7일(현지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 만달레이 베이 호텔. 가전 분야 세계 최대 전시회인 CES(Consumer Electronics Show)의 공식 개막을 하루 앞두고 주요 기업들의 발표회가 열렸다. 수년 전부터 CES에선 삼성전자·LG전자 등 한국 업체들의 존재감이 두드러진다. 올해도 두 회사의 다양한 신기술들이 관심을 모았다.이날 삼성전자는 발표회에서 신형 모바일 프로세서 ‘엑시노스 5 옥타’와 휘는 디스플레이 등 첨단기술을 선보였다. 하지만 올해 시장에 나올 제품 중에서 큰 관심을 끈 것은 삼성전자의 스마트TV 신제품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관심 대상은 제품의 하드웨어가 아니었다. ‘어떻게’ TV를 이용할 것이냐 하는 ‘개념’이었다. 어떤 기술로 제품을 만들었느냐보다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따지는 개념인 사용자 인터페이스(UI·User Interface) 또는 사용자 경험(UX·User Experience)이 본격적으로 적용됐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TV를 켰을 때 지금처럼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며 프로그램을 찾을 필요가 없다. 그냥 TV에 대고 ‘뭐 볼 만한 것 없나?’라고 말하면 목소리를 알아들은 TV가 가장 적절한 프로그램을 추천하는 식이다. TV를 켠 사용자가 누구인지 TV는 이미 얼굴 인식기능을 통해 알고 있다. 그래서 평소 어떤 프로그램을 즐겨 봤는지, 지금 시간대가 어떤지 등을 감안해 개인화(personalized)된 맞춤형 추천을 한다. 지상파뿐 아니라 케이블TV와 유튜브, 개인이 저장한 동영상·사진, 다양한 TV 앱 등도 쉽게 검색할 수 있다. 검색과 실행은 말이나 리모컨 외에 동작(제스처)으로도 가능하다. 프로그램 목록이 나오거나, 스마트폰이나 스마트패드처럼 빽빽한 메뉴 아이콘이 깔리는 기존 방식보다 훨씬 빠르고 직관적인 것은 물론이다. 자료:CES, [외신 종합] 커뮤니케이션 분야 최다 인용 논문 저자CES에 참석했던 이관민(41·사진) 성균관대 인터랙션 사이언스학과 교수는 “TV 기술이 아닌 TV 사용자를 중심에 둔 접근법이 글로벌 미디어와 전문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지난 1년 반에 걸쳐 삼성전자 연구팀과 함께 새로운 스마트TV의 UI와 UX를 개발한 주역이다. 그는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휴대전화에 대해 기존과 전혀 다른 접근법으로 ‘스마트폰’을 세상에 내놓은 것처럼 TV를 이용하는 문화를 바꿀 새로운 체계를 만들었다. 앞으로 애플TV가 출시되더라도 우리가 제시한 방식과 크게 다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TV 개발 참여자라는 것에서 오는 선입견과 달리 이 교수는 엔지니어가 아니다. 커뮤니케이션과 심리학을 전공한 사회과학자다. 2009년 교육과학기술부의 국책사업인 월드 클래스 대학(World Class University·WCU) 프로젝트의 사업단장으로 성균관대에 초빙돼 인터랙션 사이언스학과를 창립했다. 그는 서강대 신문방송학과를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가 미시간주립대에서 석사, 스탠퍼드대에서 커뮤니케이션과 심리학(부전공) 박사 학위를 받았다.그의 경력은 화려하다. 만 29세에 미국 USC 커뮤니케이션학과(아넨버그스쿨) 조교수, 35세에 종신교수가 됐다. 현재도 성균관대와 USC의 교수직을 겸직하며 한국과 미국 양쪽에서 연구활동과 후진 양성을 하고 있다. 세계 최대 규모인 국제커뮤니케이션학회(ICA)의 커뮤니케이션 기술분과 회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그는 뉴미디어·컴퓨터 등으로 구현되는 가상세계의 ‘현존감·몰입감(presence)’ 개념을 체계화한 학자로 유명하다. 예컨대 사람들은 TV로 스포츠 경기를 볼 땐 신체적(physical) 현존감으로 현장을 느낀다. 이에 비해 게임에서 캐릭터를 만든 뒤 스스로와 동일시할 때는 자아(self) 현존감을 느낀다. 전화나 화상통화처럼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다른 이들과 교류할 때는 사회적(social) 현존감이 필요하다. 현존감을 이렇게 셋으로 분류해 각각의 특성과 응용 방향을 규명한 게 그의 업적이다. 그의 논문은 현재 스탠퍼드·MIT·코넬 등 미국과 전 세계 주요 대학에서 교재로 쓰인다. 2000년 이후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논문 중 하나라고 한다. 이 교수의 화려한 경력과 연구성과를 보면 해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엄친아’가 연상된다. 하지만 그는 손을 내젓는다. “대전시에서 고교까지 마친 토종 한국인입니다. 경제적으로 유복했다고 할 수도 없죠. 중학교 때는 전 과목 평균이 100점일 정도로 최상위권이었고, 고교 입학시험에선 만점이었죠. 당시 전국에 만점자가 오십명 내외였는데, 그중 한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고교 때 공부를 안 했죠. 질풍노도의 시기였다고나 할까요. 고3이 돼서 공부를 다시 시작해 겨우 대학에 갔죠. 시대의 첨단을 달리는 융합학문을 전공하게 되리라고는, 당시엔 생각도 못했어요.”이 교수는 대학 전공 중에서도 전통 언론학보다 뉴미디어 분야가 적성에 맞는다고 느꼈다. “처음 유학 갈 때는 뉴미디어와 경영을 접목하는 분야를 전공할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인문학과 정보기술(IT)을 비롯한 첨단기술의 융합에 눈을 뜬 데는 예상치 못했던 인연이 작용했다. 노스캐롤라이나대에 있던 프랭크 비오카(현 시러큐스대 교수) 교수가 당시 그가 유학 중이던 미시간주립대 석좌교수로 왔다. 이 교수는 비오카 교수가 만든 M.I.N.D(Media Interface & Network Design) 연구소의 창립 멤버로 연구에 참여했다. 박사 과정을 위해 진학한 스탠퍼드대에선 ‘소셜 인터페이스(Social Interface)’ 개념의 창시자인 클리퍼드 내스 교수를 만났다. IBM·마이크로소프트·SAP를 비롯한 실리콘밸리의 많은 벤처기업과 프로젝트를 수행한 계기였다. 아직도 학문적으로 서로 교류하고 있는 두 멘토의 영향 덕에 이 교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 원리와 규칙들을 사람과 기계의 상호작용에 응용, 새로운 인터페이스 개념을 디자인하고 연구하고 있다. 연구 내용에 대해 그는 “다양한 기업과의 협업을 통해 기술을 위한 기술이 아니라 기술과 사용자와의 관계가 어떻게 만들어지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세상이 올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융합은 단순하게 서로 다른 분야를 붙여 놓는 게 아니라 무엇을 중심에 두느냐가 핵심이라는 점도 배웠다”고 말했다. ‘중심’에 둘 것은 당연히 기술이 아니라 사용자, 즉 사람이다. 그는 스티브 잡스의 스마트폰 말고도 UI·UX를 통해 새 시장이 만들어진 예로 일본 게임기 업체 닌텐도의 ‘닌텐도 위(wii)’를 들었다. 닌텐도 위가 나오기 전 게임기 시장은 소니(플레이스테이션)와 마이크로소프트(엑스박스)의 경쟁터였다. 당시 두 회사는 더 빠르고 실감나는 화면을 위해 그래픽 기술에 엄청난 투자를 했다. 하지만 닌텐도는 해상도가 다소 떨어져도 사용자와 그 분신(아바타)의 동작이 자연스럽게 일치하는 맵핑(mapping) 기술이 몰입감에 훨씬 영향을 준다는 데 착안했다. 이 교수는 “자아 현존감을 극대화한 접근 방식이 성공해 닌텐도 위는 하드웨어 성능이 떨어짐에도 삽시간에 게임기 시장을 평정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훌륭한 UI나 UX가 적용된 제품은 일단 만들고 나면 오히려 평범하게 느껴진다. 스마트폰도 그렇고 닌텐도 위도 그렇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만지고 보는 순간, 바로 기능을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는 직관성을 갖췄다. 워낙 자연스러워 더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이 교수는 “문제는 그런 제품을 처음 생각하고 고안하는 게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와 삼성전자 연구팀도 스마트TV의 새로운 UI·UX를 구상하면서 수많은 시간과 품을 들였다. 가장 편하고 자연스러우면서도 사용자에게 재미와 감동을 줄 방법을 찾기 위해 뉴욕과 할리우드의 시나리오작가들과 협업했다.“무엇을 중심에 두느냐가 융합 핵심”이 교수는 인문학과 기술의 융합이 필요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TV의 예를 들자면 공학자는 해상도를 높이거나 3D 효과를 최대화하는 데 집중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해상도는 인간의 눈으로 더 이상 구분할 수 없게 되는 지점이 있다. 3D는 진화심리학에 따르면 빠른 속도로 주변 상황을 일별(스캔)해야 하는 인간의 본성과 일치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많은 TV 제조사들이 3D 기술을 강력하게 추구해도 소비자 입장에선 3D 기능에 별로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한마디로 3D 시청 경험은 인간의 일상적 시각 경험에 반한다. 비(非)자연스러운 경험을 소비자는 거부한다. 그보다는 소비자가 정말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찾아내 가장 적절한 비용으로 그 욕구를 채워 주는 접근이 더 효율적이다.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철학·심리학·사회학이 기술 분야와 꼭 함께 가야 하는 이유다.”이 교수가 2009년 다른 학자들과 성균관대에 개설한 인터랙션 사이언스학과의 연구목표도 여기에 있다. 대학원 과정인 이 학과가 공과대학 또는 자연과학대학이 아닌 인문대학에 개설된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교수는 다른 8명의 교수, 40여 명의 석·박사 과정 학생과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학생들은 학부에서 공학과 사회학은 물론 동양철학 등 다양한 전공을 공부했다. 이 교수는 “인터랙션 사이언스학과 같은 융합학문은 미국 등에 비해 우리도 출발이 크게 늦지 않아 가능성이 높다”며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꼭 필요한 학문이라는 생각이 하루빨리 자리 잡길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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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서 매일 500년 분량 유튜브 콘텐트 활용”
조용철 기자 유튜브는 동영상을 공유하는 온라인 공동체(community)다. 유튜브는 ‘플랫폼(platform)’으로 정의되기도 한다. 플랫폼은 운영체제·환경이다. 플랫폼은 ‘뭔가 다른 일을 가능하게 하는 그 무엇’이기도 하다.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플랫폼이라는 유튜브의 특성에서 막강한 힘이 나온다.전 세계를 하나로 묶는 공동체·플랫폼인 유튜브는 사회 변화의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공공외교의 막강한 수단이라는 것도 확인됐다. 유튜브 덕분에 많은 세계인이 한국하면 이제 삼성·현대와 더불어 싸이를 떠올린다. 한국전쟁, 분단국가 이미지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한국이미지커뮤니케이션연구원(CICI)은 15일 유튜브에 ‘한국 이미지 징검다리상’을, 가수 싸이(박재상·36)에게 ‘디딤돌상’을 줬다. 유튜브를 선정한 이유는 K팝을 세계에 알리는 데 가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CICI는 대한민국이라는 브랜드를 세계에 알리는 작업을 하는 공익재단이다. CICI 이사장인 최정화(57) 한국외대 교수는 우리나라 최초의 동시통역사다. 그는 통역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다니카 셀레스코비치상(2000년)과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2003년)를 받았다.유튜브를 대표해 징검다리상을 받으러 온 인물은 앤서니 자메츠코프스키(유튜브 아태뮤직 파트너십 총괄·사진)다. 그가 하는 일은 유튜브와 아시아·태평양지역 음악회사들 사이의 비즈니스 파트너십을 관리하는 것이다. 15일 서울 삼성동에 있는 그랜드인터컨티넨탈호텔 비즈니스센터에서 그를 만나 유튜브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들었다. 다음은 인터뷰 요지. CICI 최정화 이사장과 ‘CICI 한국 이미지 디딤돌상’을 받은 싸이. -유튜브가 속한 분야에서 한국의 정보기술(IT) 활용 수준을 평가한다면.“한국 회사들은 글로벌 스탠더드를 끌어올리고 있다. 일본·인도 등 다른 나라들은 한국 시장이 무엇을 시도하는지 주시하고 있다. 유튜브와 관련해 말하자면 한국 회사들은 유튜브가 제공하는 모든 기능을 잘 활용하고 있다. 예컨대 영어·일본어 자막을 넣어 해외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한국은 유튜브에서 모바일 접속이 개인용 컴퓨터(PC) 접속을 추월한 최초의 국가이기도 하다.”-유튜브의 세계에서 한국이 주도국이라면 바짝 뒤따라오고 있는 나라는.“아태 지역에서는 인도가 사용자 타기팅(targeting)을 잘하고 있다. 볼리우드 콘텐트로 전 세계의 ‘인도인 공동체’에 다가가고 있다.”-싸이의 성공을 유튜브는 어떻게 보는가.“세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우선 싸이는 일종의 ‘도구상자(toolbox)’라고 볼 수 있는 유튜브의 잠재력을 극대화했다. 싸이의 소속사 YG엔터테인먼트는 우리의 ‘콘텐트 검증기술(Content Identification·CID)’을 활용해 수익을 올렸다. CID는 저작권자가 자신의 저작물을 사용한 모든 유튜브 동영상들의 현황을 확인해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직접 선택할 수 있게 한다. 차단할 것인지 아니면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고 지켜볼 것인지 또는 광고를 붙여 수익화할 것인지를 저작자가 선택할 수 있다. YG는 CID로 ‘강남스타일’의 음원과 영상을 사용한 패러디를 파악하고 패러디에 광고를 붙여 수익을 창출했다.둘째는 유튜브의 도달력(reach)이다. 유튜브는 54개 언어로 현지화돼 있으며 매달 사용자 수는 8억 명이다. 그들은 유튜브에서 매월 40억 시간 분량의 영상을 재생한다. 유튜브의 사회적 측면도 중요했다. 유튜브 콘텐트는 페이스북·트위터 같은 소셜네트워크 서비스(SNS)에 심어 놓을 수 있다. 페이스북에서 사람들은 매일 500년 분량의 유튜브 콘텐트를 보고 있다.”-싸이는 이번 ‘한국 이미지 디딤돌상’ 수상 소감에서 “외국인들에게 물어보니 된소리가 많은 한국어 발음이 다이내믹하다고 굉장히 좋아한다”고 말했다. ‘강남스타일’을 ‘로컬(local) 대 글로벌(global)’이라는 잣대로 보면 어떤가.“두 가지를 모두 갖춘 게 성공요인이다. 영상이나 춤을 보면 글로벌, 한국어로 불렀다는 점에서는 로컬이다. 또한 서구인들이 흔히 듣는 음악과 아주 다르다는 점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싸이의 사례는 향후 음악시장의 트렌드에 대해 무엇을 알려주는가.“‘강남스타일’은 음악시장에 추진력(momentum)을 제공했다. 일과성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다른 K팝 스타들뿐만 아니라 인도·브라질·파키스탄 등 전 세계에서 수많은 싸이가 나올 것이다.”-‘강남스타일’을 유튜브에 올린다는 통보를 받았나.“아니다. 우리와 맺은 협약에 따라 YG는 올리고 싶은 비디오를 마음껏 올릴 수 있다. 유튜브는 수천 개의 음악회사와 파트너 관계를 맺고 있다. 매 분 72시간 분량의 비디오가 올라온다. 일일이 다 파악할 수 없다.”-유튜브는 ‘인위적’으로 ‘강남스타일’과 같은 성공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그렇게 하지 않는다. 유튜브에서는 누구나 다 평등하다. 유튜브는 표현의 자유와 커뮤니티의 활성화를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민주적인 플랫폼이다. 조언을 해 줄 수는 있지만 콘텐트 유포 과정에 개입하지 않는다.”-아시아 시장의 특징은.“국제적인 음악이 강세인 유럽과 비교하면 아시아에서는 로컬 음악이 아주 강하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아시아는 유럽보다 훨씬 단편화된(fragmented) 곳이다. 아시아에서 유튜브는 한국·일본·중국·인도 등 나라마다 다른 접근법을 구사해야 한다. 소비자들 성향이 나라마다 다르다. 한국 소비자들은 디지털기기활용에 능숙하지만 일본만 해도 보다 전통적인 시장이다. 아직 CD를 많이 구매한다.”-유튜브의 진로는.“사람들이 더 오래 유튜브에서 시간을 보내고 더 많은 채널에 가입하게 하는 게 주요한 도전이다. 실시간 중계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유튜브는 점점 더 방송사처럼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아니다. 우리는 플랫폼으로 남을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사람들이 좋은 콘텐트와 채널을 개발하는 것을 계속 도울 것이다. 채널의 성공사례가 점점 늘고 있다. 한국의 경우 SM엔터테인먼트나 YG엔터테인먼트가 채널 경영을 아주 잘하고 있다.”-마지막으로 한국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한국 음악회사들이 업계를 주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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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인 공부모임 멤버 두각…수첩 속 인재도 ‘다크호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박근혜 정부의 조직개편안을 발표한 15일 이후 정치권에선 이런 이야기가 돌았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이미 국무총리 후보자와 각 부처 장관 후보자에 대한 구상을 마쳤다더라. 조직 개편안도 그런 그림을 염두에 두고 발표했다더라.”이와 함께 정·관계에선 조직의 수장이 누가 될지를 놓고 하마평이 쏟아졌다. 최근 5일간 각계에서 거론된 인물들을 분석해 본 결과 17개 부처 장관 물망에 오른 이는 100여 명에 달했다. ‘공룡 부처’로 떠오른 미래창조과 학부는 거론되는 인사만 10명이 넘는다.이 중 실제 박 당선인의 마음속에 있는 이는 얼마나 될까. 본지가 접촉한 당선인 비서실 이정현 정무팀장을 비롯해 박근혜계 인사들은 하나같이 “당선인만 안다”고 했다. ‘밀봉인사’란 말이 나올 정도로 극소수 실무진만 검증작업을 하고 박 당선인 본인이 최종 결정을 내리는 만큼 주변에선 어떤 관측도 내놓기 어렵단 얘기다. 이에 본지는 박 당선인이 그동안 보여 준 용인술을 바탕으로 후보군을 살펴봤다. 박 당선인은 인수위 인선과 과거 당 대표·비상대책위원장 시절 요직 인선 때 일정한 원칙을 보여 줬다. ‘인사 기준’을 묻는 질문에 박 당선인은 2007년 5월 16일 중앙SUNDAY 창간 기념 인터뷰에서 이같이 답했다.“그 직책을 가장 잘할 수 있는 분, 그거를 위주로 해서 제가 인사를 했습니다. 신뢰할 수 있는 그런 성품, 아무리 똑똑하고, 세상에 머리가 잘 돌아가고 뭐 학위도 많이 받고 하여튼 그런 것에 있어 실력이 있다 하더라도, 이해관계에 따라 쉽게 마음이 변한다면 그건 아무 소용이 없잖아요. 같이 일을 하려면, 우선 서로 믿을 수 있어야 되니까, 그런 것도 중요하겠죠.”박 당선인은 이후에도 기자들이 인사 기준을 물을 때마다 같은 취지의 말을 했다. ▶그직책을 가장 잘할 수 있느냐 ▶신뢰할 수 있느냐가 가장 중요하다는 거다. 원론적인 이야기 같지만 이는 ‘박근혜식 인사’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다.능력 뛰어나면 과거 정권 인사도 배제 안 해이는 박 당선인이 전업 정치인보단 전문가 출신을 요직에 써 온 것과 무관치 않다. 박 당선인 측근 중엔 법조인(김용준·진영·황우여·이주영·권영세)과 경제학 박사(김종인·김광두·최경환·서병수·이한구·이혜훈·유승민) 출신이 많다. 이번에 총리와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에 거론되는 이들의 주요 직업군과도 일치한다.총리 후보로 거론되는 김용준 인수위원장, 조무제 전 대법관, 이강국 헌법재판소장, 김능환 전 선관위원장은 법조계에서 경륜과 신망을 쌓은 원로들이다. 새누리당 고위 관계자는 “박 당선인은 법치를 좋아하는 DNA가 있다”며 “집권 초반 총리나 장관 인사 때 법조인 출신이 중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역시 경제학 박사 출신인 진념 전 경제부총리와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과 김종인 전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은 경제부총리뿐 아니라 총리 물망에도 올라 있다.일각에선 박근혜 정부의 초대 총리는 그 상징성 때문에 박 당선인이 과거와 다른 스타일의 사람을 발탁할 수 있다는 말도 나온다. 김용준 인수위원장은 18일 기자들과 만나 능력보단 통합에 무게를 두는 취지의 말을 했다. 박 당선인의 측근 인사도 “경제부총리는 경제부처 전반에 리더십을 행사해야 돼 중량감이 있어야 하지만 총리는 국민적 신망을 고려한 명망가형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그러나 각 부처 장관 인선에선 철저하게 능력과 전문성이 중시될 전망이다. 하마평에 오르는 인사 대다수도 박 당선인에게 상당기간 조언해 온 전문가 그룹이다. 박 당선인은 2007년 대선 경선 패배 뒤 학자들과 수십 개의 모임을 꾸려 호텔 비즈니스센터 등에서 공부해 왔다. 공부모임 멤버들은 2010년 발족한 싱크탱크인 국가미래연구원 회원→일부 국회의원 진출→일부 대선 캠프·대통령직인수위 진출→부처 장관 후보 물망 등의 코스를 밟아 왔다.우선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출신인 안종범 의원과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인 안상훈 인수위원이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로 거론된다. 대선 당시 공약을 다듬는 국민행복추진위원회에서 일했던 곽병선 전 경인여대 총장과 김재춘 영남대 교수도 교육부 장관 후보물망에 올랐다. 박 당선인과 여성·복지정책을 공부해 온 의사 출신 안명옥 전 의원과 최성재 서울대 명예교수는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로 꼽힌다.박 당선인은 실무 경험이 있는 관료 출신도 선호한다. 문화관광 분야에 30년간 몸담아온 관료 출신 모철민 예술의전당 사장이 인수위 분과간사에 이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거론되는 건 그 때문이다. 중소기업청장 출신 이현재 의원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후보로 점치는 사람도 있다.박 당선인은 능력이 뛰어나면 전(前) 정권출신이거나 진영이 달라도 쓴다. 노무현 정부출신인 윤병세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 대표적인 예다. 윤 전 수석은 외교부 장관 또는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장관급)으로 거론된다. 김황식 총리의 연임설도 돌고 있고,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장과 김승규 전 국정원장, 김도연 전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최인기 전행정자치부 장관 같은 전 정부 출신들도 다시 봐야 한다는 말이 있다.검증된 인물 선호… 핵심 측근도 후보군박 당선인이 신뢰를 중시하는 건 본인이 직접 지켜봐 왔거나 써 본 사람을 다시 쓰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사람을 새로 쓴다면 적어도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이 추천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유민봉 성균관대 교수와 이혜진 동아대 교수가 인수위에 입성했을 때 ‘깜짝 인사’란 말이 나왔지만 사실은 박 당선인이 상당기간 지켜봐 왔거나 주변의 추천을 받은 경우였다.이 때문인지 장관 하마평에 오른 인수위 출신도 10명이 넘는다. 박 당선인 측이 “인수위 멤버를 그대로 새 정부로 데려가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해도 곧이곧대로 듣지 않는분위기다. 신뢰하는 사람을 쓰고 또 쓰는 당선인 성격상 인수위원 중 어느 정도는 정부에 들어갈 거란 관측이다.같이 일해 온 당 핵심 측근들도 무시할 수 없다. 당선인 주변에선 “지역구 의원은 장관겸직 시 지역구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가급적 내각에 기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함께 일하는 과정에서 검증된 사람을 선호하는 당선인의 성격상 여전히 후보군이다.서병수 새누리당 사무총장은 안전행정부 장관과 해양수산부 장관에 자꾸 거론된다. 대선 후보 비서실장을 지낸 최경환 의원도 경제부총리나 대통령 비서실장 후보로 오르내린다. 역시 비서실장 출신으로 취임준비위부위원장에 임명된 유정복 의원도 대통령 비서실장과 안전행정부 장관 후보로 꼽힌다. 검사 출신으로 대선 종합상황실장을 지낸 권영세 전 의원은 법무부 장관과 국정원장에 거론된다. 이혜훈 최고위원도 공정거래위원장 후보로 꼽힌다.“후보 명단에서 빼주는 게 도와주는 것”하마평에 오른 이들은 이렇게 박 당선인과의 인연이 드러난 사람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박 당선인의 숨은 인맥도 상당하다. 과거 민생 행보에서 만난 26세의 이준석 클라세스튜디오 대표를 기억해 뒀다가 비상대책위원으로 임명한 데서 보듯 박 당선인이 의외의 장소에서 만나 수첩에 적어 놓은 인재가 돌출할 수 있다는 얘기다.박 당선인은 명망가 2세들도 많이 파악하고 있다고 한다. 깜짝 총리나 장관 카드로 거론되는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산업자원부장관을 지낸 장재식 전 의원의 아들이다.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부터 내려온 인맥도 있다. 국정원장에 거론되는 민병환 전 국정원 2차장은 부친이 박정희 대통령 시절 문교부 장관을 지낸 민관식 전 의원이다. 정수장학회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에 다닌 이들의 모임 ‘상청회’(회원수 3만8000여 명)와 박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이름을 따 만든 서울대 기숙사인 ‘정영사’ 출신도 잠재적 인재풀이다.미래창조과학부처럼 박 당선인이 야심 차게 추진하는 새 부처의 수장으론 삼성전자 사장 출신인 황창규 지식경제R&D전략기획단장과 이석채 KT 회장이 거론된다. 이들은 언뜻 박 당선인과 별 인연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박근혜계 의원 등 여권 인사들과 교류가 있다.박 당선인이 검찰·경찰과 국세청 수장 인선에선 내부 조직을 존중할 거란 전망도 나온다. 경찰청장으론 김기용 청장 유임설이 나오고, 검찰총장으로 유력시됐던 차동민 전 서울고검장은 본인이 거절의 뜻을 최근 밝혀 전남 순천 출신인 소병철 대구고검장이 부상하고 있다고 한다.그러나 박 당선인이 언론에 거론되는 사람을 피한다는 건 박근혜계 내부에선 정설로 통한다. 언론 플레이를 싫어한다는 거다. 모 부처 수장 후보로 거론되는 한 박근혜계 인사는 “언론에 나오는 순간 ‘아웃(out)’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상황이 이렇다 보니 유력한 후보조차 언론의 하마평을 꺼린다. 국무총리와 경제부총리 후보로 거론되는 한 인사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박 당선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도 없는데 언론에만 자꾸 거론돼 난처하다”며 “가급적 쓰지 말아 달라”고 했다. 과거 하마평에 오르는 것 자체를 영광스럽게 여기던 분위기가 180도 달라진 것이다. “명단에서 빼주는게 도와주는 것”이란 말이 나온다.그럼에도 일각에선 하마평도 무시할 수 없다고 본다. 박근혜계 3선 의원은 “당선인의 인재풀에도 한계가 있는 만큼 언론이 크게 틀리진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 당선인은 17일 한 인사가 “언론에 후보로 거론되는 사람은 하나도 발탁되지 않는 거냐”고 물었을 때 크게 웃었다고 한다. 그 웃음의 의미는 결국 이르면 다음 주에 있을 총리 후보자 발표 이후에야 밝혀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