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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있으면 고소득, 푸른 작업복 입는 2030…"쇠 뚫어 취업난 뚫어요"
━ AI도 두렵지 않다, 요즘 주목받는 ‘네오블루칼라’ 한국폴리텍대 울산캠퍼스에서 한 학생이 용접 실습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윙~. 쉭~. 여기서 쇠를 자르고, 저 너머에선 쇠를 붙였다. 쇠에도 냄새가 있다. 그 쇠 냄새가 지난 2일 울산시 한국폴리텍대 에너지산업설비과 실습실에 퍼졌다. 10월의 선선함에도 뜨거움이 가득했다. 쇠, 그러니까 철강은 제조업에 필요한 밑재료다. 조선과 자동차·반도체는 ‘철공예’로 부른다. 손기술이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다. 삼성이 베트남을 반도체 해외 생산기지로 낙점할 때 기준 중 하나가 ‘젓가락 문화’였다는 일화가 있다. 손기술 때문이다. 실습실에서 쇠 절단 작업 중이던 박모(24)씨는 “정교한 손기술로 취업난을 뚫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쇠를 뚫고 있다”며 땀을 닦았다. 경기도의 한 마이스터고에 다니는 이모(18)군도 “일자리를 위해선 기술 먼저, 대학은 나중에”라고 말했다. “정교한 기술 필요한 곳, 블루칼라 더 필요” 국가기술자격증을 취득하려는 2030세대가 실습에 집중하고 있다. [사진 진윤근] 20대 취업난은 심각하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지난 8월 20대 고용률은 60.5%. 1년 전보다 1.2%포인트 떨어지면서 12개월 연속 반등하지 못하고 있다. 20대 실업률은 5%로 1%포인트 올라 2022년(5.4%) 이후 3년 만에 최고치다. 구직 활동을 하지 않은 ‘그냥 쉼’ 20대도 50만 명을 넘었다. 이런 취업난 속 김씨와 이군처럼 푸른 작업복을 입은 20대 블루칼라가 늘고 있다. 이들은 고숙련 기술로 무장하고 고소득을 향해 뛰고 있다. 3D(Dirty·Dangerous·Difficult)를 도맡으며 저임금을 받는 기존의 블루칼라 이미지와 확연히 다르다. 새로운 블루칼라, 이른바 ‘네오블루칼라(Neo-Blue Collar)’다. 이들은 “땀 흘린 만큼 보상이 따른다”며 만족도도 높다. 실제로 진학사 캐치가 Z세대(1990년대 후반 이후 출생)에게 물어봤다. ‘연봉 7000만원 교대근무 블루칼라’와 ‘연봉 3000만원 야근 없는 화이트칼라’ 중 58%가 블루칼라를 택했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하지만 인공지능(AI) 시대, AI 학자인 제리 카플란이 『인간은 필요 없다』 에서 지적했듯, 블루칼라는 화이트칼라와 동반 추락할까. 이종선 고려대 노동대학원 교수는 “화이트칼라로 은퇴를 앞둔 중장년층이 심심치 않게 하는 말이 ‘기술이 최고’다. 블루칼라는 정교한 기술이 요구되는 곳에서 수요가 더 생기면서 위상이 오히려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마침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1일 열린 ‘제조 AI 전환(MAX) 얼라이언스 전략회의’에서 2030년까지 제조기업의 AI 도입률을 40%로 끌어올리기 위해 ‘AI 팩토리(공장)’ 선도사업장을 500개까지 확대하기로 했다. 앞서 HD현대미포는 “AI 로봇을 투입해 용접 검사와 조립 시간을 12.5% 단축했다”고 밝혔고, GS칼텍스는 “AI로 정유 공정 데이터를 실시간 분석해 비용을 20% 절감했다”고 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이런 제조업 AI의 역할은 데이터 분석과 평가에 집중된다. 관련기사 작년 취업률 73%…‘명장’ 꿈꾸는 청소년들 마이스터고 몰린다 “조선 용접 자동화 85%, 나머지 사람 몫…세세한 손기술 들어가야 좋은 선박 건조” 고윤열 울산과학대 기계공학부 교수는 “쇠를 잘라 붙이고(용접), 그 쇠로 정유관을 만들며(제관), 그 정유관을 설치(배관)하는 일은 결국 ‘사람’이 한다”며 “AI가 컴퓨터 속 데이터는 무한대로 학습할 수 있어도, 컴퓨터 밖 세상은 배울 길이 없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AI가 대체할 수 없는 현장과 손기술, 이른바 ‘AI 시대의 역설’이다. 고 교수는 “20대 중심의 네오블루칼라는 오히려 AI를 이용하면서 고도로 진화하는 중”이라고 분석했다. 실제 한국폴리텍대에서는 챗GPT 등을 이용해 쇠를 절단하고 배관 설계도를 그린다. 명장의 증가는 우리 사회에서 기술이 얼마나 중요한지, 자동화 흐름에도 얼마나 필요한지 일깨우는 척도가 될 수 있다. 명장은 고도의 숙련된 기술자에게 부여하는 칭호다. 1986년부터 올해까지 명장은 719명. 이중 공예·서비스 직종을 제외한 제조업 분야 명장은 400명 남짓이다. 22개 분야 37개 직종으로 시작했다가 2018년부터는 37개 분야 97개 직종으로 선정 범위가 넓어졌다. 이우영 산업인력공단 이사장은 “명장 선정 분야가 전통 산업·공학 중심에서 금형·차량·소재 등으로 세분됐듯, 제조업은 AI 시대에도 도태되지 않고, 오히려 분야를 확장해 나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도배사들이 한 구축 주택 현장에서 작업하고 있다. [중앙포토] ‘쇠’에만 네오블루칼라가 뛰어드는 건 아니다. 서울 은평구의 한 기술학원에 다니는 윤형준(27)씨는 “무작정 인테리어업체를 찾아가 도배와 타일 작업을 어깨너머로 배우다가 안 되겠다 싶어 전문적으로 왔다”며 “타일 기능사 자격을 따면 일당도 오르고 평생 일할 밑천이 될 것”이라고 했다. 현재 윤씨의 일당은 15만원 정도. 자격증을 따면 두 배 가까이 늘어난다. 기능장 취득 30대 4년새 1818명→2562명 그래픽=남미가 기자 윤씨처럼 기술 자격증을 따는 2030 세대가 늘고 있다.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지난 7월 발표한 국가기술자격통계연보에 따르면 ‘기능장’ 자격을 취득한 20대는 2020년 269명에서 2024년 432명으로, 30대는 1818명에서 2562명으로 각각 1.5배가량 증가했다. 명장이 말 그대로 명예로운 ‘칭호’인 것과 달리 기능장은 고난도 기술 ‘자격증’이다. 국가기술자격 체계에서는 일반적으로 기능사·산업기사·기사·기능장·기술사 순으로 높은 기술력을 요구한다. 3년 전 위험물 기능장을 취득한 이영재(31)씨는 현재 화장품 제조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이씨는 “위험물 취급과 관리에 대한 안전성을 평가하는 자격증이기 때문에 화장품은 물론 고무·금·염료 등 다양한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다”며 “우리 공장에서 일부 제조는 자동화했지만, 위험물 취급은 기계보다 사람에 대한 신뢰가 더 높다”고 말했다. 이호준(29)씨는 지난해 한국폴리텍대를 졸업하고 가스 공급업체에 취업했다. 그는 ABS(미국선급협회) 국제 선급 용접 등 6개의 국가기술자격증을 보유했다. 이씨는 “현장에서 기술을 활용할수록 나 자신도 발전한다는 성취감이 매우 크다”고 말했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고숙련을 통한 자격증은 고소득과 직결된다. 화이트칼라는 수요보다 공급이 많다. 반면 블루칼라는 수요가 공급을 넘어선다. 현장에선 “고숙련자 일당은 부르는 게 값”이라는 말도 나온다. 본지가 지난해 일당을 살펴봤더니 특고압 케이블 작업공은 42만1236원을 받았다. 고층 임시 가설물을 설치하는 비계공(28만1721원)과 용접공(26만2551원), 미장공(25만6225원), 도장공(24만9977원) 등도 임금이 높은 직종에 속했다. ‘AI 시대의 네오블루칼라’는 우리만의 현상이 아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Z세대를 ‘공구 벨트(tool belt) 세대’로 정의하며 이들이 냉난방·배관·전기 등 자동화가 어려운 분야로 몰린다고 보도했다. 배관공만 해도 연평균 9만348달러(약 1억2800만원)를 버는 ‘고소득’이 이유 중 하나라는 분석이다. 최성용 서울여대 경영학과 명예교수는 “취업난 속 만족감과 자기계발 가능성이 높은 네오블루칼라에 대한 젊은 세대의 관심이 높아졌다”며 “또 화이트칼라가 은퇴하는 연령에도 일을 계속할 수 있어 선호도는 계속 높아질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네오블루칼라의 시대’로 단정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블루칼라의 수요가 공급을 넘어선 이유도 그간의 저임금, 부정적 인식으로 인한 인력 이탈 때문. 11년 차 배관 기술자인 정승훈(39)씨의 “이제 막 일을 배우려는 신입은 많아도 10년 이상 일한 30~40대 숙련공은 드물다”는 발언에는 이런 현장의 어려움도 묻어난다. 30년 넘게 특고압 케이블 포설 작업을 했다는 김형수(59)씨는 “젊은 친구들이 자격증은 따도, 막상 현장에 오면 며칠 못 가 그만두는 게 부지기수”라며 “일감은 계속 밀려드는데 동료들은 은퇴가 머지않아 언제까지 일을 맡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도 했다. 이종선 교수는 “블루칼라 종사자의 80% 이상이 여전히 저임금·장시간 노동에 시달린다”며 “대다수가 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 정규직의 절반도 안 되는 월급을 받고, 업황에 따라 일감이 꾸준히 보장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산재 신청도 어려운데 이를 보완할 정부의 제도 마련과 함께 기술의 가치를 인정하는 사회적 인식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고 제언했다. 허정연 기자 jypow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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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취업률 73%…'명장' 꿈꾸는 청소년들 마이스터고 몰린다
━ AI도 두렵지 않다, 요즘 주목받는 ‘네오블루칼라’ 미래의 기술 명장을 꿈꾸는 청소년들이 마이스터고에 눈길을 되돌리고 있다. 마이스터고는 2010년 도입된 산업 수요 맞춤형 고등학교다. 학교와 기업이 협약을 맺고, 현장에서 바로 활용할 수 있는 기술 인력을 양성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2013년 첫 졸업생을 배출한 마이스터고의 초기 취업률은 90.6%에 달했다. 취업자의 90%가 정규직이라는 점에서 고등기술교육 모델의 표본으로 자리잡았다. 이렇듯 ‘취업 보증수표’로 통하며 한때 평균 입학 경쟁률이 4대 1을 웃돌 만큼 치열했지만 2010년대 후반 기업들이 고졸 채용 규모를 축소하는 등 부침을 겪으며 인기가 식었다. 그러나 장기 경기 침체의 여파로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 문턱을 넘지 못하는 청년이 늘면서 마이스터고가 재조명 받는 분위기다. 지난해 전국 마이스터고 51곳의 졸업생 취업률은 72.6%를 기록했다. 이는 전체 직업계고 졸업생 취업률(26.3%)을 크게 웃도는 것은 물론 전체 대졸 취업률(2023년 기준 70.3%)과 맞먹는 수치다. 입학률도 덩달아 올랐다. 서울시교육청에 따르면 2025학년도 서울 관내 마이스터고는 모집정원 558명 중 824명이 지원해, 이중 565명이 최종합격했다. 모집 정원 대비 충원율이 101.25%를 기록하며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충원율 100%를 넘어섰다. 관련기사 기술 있으면 고소득, 푸른 작업복 입는 2030…“쇠 뚫어 취업난 뚫어요” “조선 용접 자동화 85%, 나머지 사람 몫…세세한 손기술 들어가야 좋은 선박 건조” 중학교 1학년, 3학년 두 자녀를 둔 강혜성(50)씨는 “애매한 성적으로 인문계를 가서 대학에 진학한다고 해도 취업이 어려운 게 현실”이라며 “아이가 AI에 관심이 많은데 이왕이면 마이스터고에 입학해 진로를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경기도 평촌에서 고교 입시 컨설턴트를 하는 김주현(42)씨는 “대기업과 공기업 취업률이 높은 상위권 마이스터고의 평균 경쟁률은 3대 1에 달한다”며 “이들 학교에 입학하려면 중학교 내신 성적이 최소 상위 30%에는 들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런 수요에 힘 입어 첫 해 전국 21개로 출발한 마이스터고는 지난해 54개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올해는 대구·경북·충남지역 3개교가 새로 추가됐다. 분야도 더욱 세분화됐다. 기계·매카트로닉스, 자동차, 항공, 조선 등 정통 제조업 분야로 시작해 반도체장비, 해양플랜트, 로봇, 소프트웨어 등으로 다변화됐다. 경기도교육청의 박기철 진로직업교육과 장학관은 “마이스터고는 기업과 연계한 실무 교육을 펼쳐 졸업 후 취업은 물론 현장에서의 빠른 적응을 돕는데 강점이 있다”며 “내달 말 내년도 입학 전형이 시작되는데 더 많은 학생이 지원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허정연 기자 jypow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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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용접 자동화 85%, 나머지 사람 몫…세세한 손기술 들어가야 좋은 선박 건조"
━ AI도 두렵지 않다, 요즘 주목받는 ‘네오블루칼라’ 진윤근 교수는 억대 연봉을 마다하고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사진 한국산업인력공단] ‘최연소 명장.’ 진윤근(54) 한국폴리텍대 에너지산업설비과 교수를 따라다니는 별칭이다. 현대중공업(HD현대중공업)에 재직 중이던 2013년, 그는 선박건조 용접 부문 명장에 올랐다. 공고 졸업 후 용접 일을 시작한 지 20여 년 만이었다. 만 42세 명장은 대한민국 제조업계에서 전무후무하다. 진 교수는 35년간 조선 분야에 근무하며 직접 개발한 용접 관련 특허도 28개나 따냈다. 곡선으로 움직이는 ‘자동 판계용접 장치’와 수직 용접 시 용융금속의 흘림을 막는 ‘받침쇠’ 등이 노력의 산물이다. 회사에서 승승장구했다. 그런데 명장이 된 지 꼭 10년 만인 2023년, 그는 돌연 산업 현장을 떠나 학교에 자리 잡았다. 억대 연봉을 포기하고 후학 양성에 나선 이유가 뭘까. “이대로는 뿌리 산업의 대가 끊길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단다. 관련기사 기술 있으면 고소득, 푸른 작업복 입는 2030…“쇠 뚫어 취업난 뚫어요” 작년 취업률 73%…‘명장’ 꿈꾸는 청소년들 마이스터고 몰린다 진 교수는 “최근 세계가 조선·방산 등 K제조업을 주목하며 기술의 중요성이 다시금 떠오른 건 기쁜 일”이라면서도 “산업 현장에서는 블루칼라가 ‘스킬 엔지니어’로 진화하는데, 사회적 인식과 대우는 아직 부족한 게 안타깝다”고 전했다. 지난 10일 그를 한국폴리텍대 울산캠퍼스에서 만났다. 인공지능(AI) 시대의 블루칼라는 어떤 모습인가. “사실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라는 이분법적인 용어조차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 산업 발전에 속도가 붙으며 경계가 희미해졌기 때문이다. 산업 고도화 시대, 엔지니어들은 고숙련된 전문 기술로 새로운 어떤 것, 그러니까 혁신을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 블루칼라의 스킬 엔지니어로의 진화다. 과거처럼 단순 노동에 그쳐선 안 되고, 이른바 ‘네오블루칼라’가 되는 것이다.” 산업 현장이 점차 자동화되는데 블루칼라의 역할이 지속할까. “조선업만 놓고 보자면 현재 용접 자동화 비율이 85% 정도 된다. 그런데 그게 최대치다. 나머지 15%는 사람 손이 닿을 수밖에 없다. 선박 구조물이라는 게 얽히고설킨 아주 복잡한 형태로 돼 있다. 프로그램을 세팅하면 로봇은 1부터 10까지 같은 값으로 용접한다. 그런데 구조물이 어떻게 직선일 수만 있을까. 갭 크기에 따라 다른 손기술이 들어가야 한다. 내가 곡선으로 움직이는 용접장치를 개발하긴 했어도 사람처럼 구현할 순 없다. 벌크선 한 척 길이가 400m, 높이와 폭은 각각 38m, 36m다. 거대한 크기지만 쭈그려 앉아야만 겨우 작업할 정도의 협소 공간도 많다. 이런 일은 로봇이 대체할 수 없다.” 진 교수가 꼽은 ‘조선 기술’은 100여 개. 그는 “용접뿐 아니라 전기·설비 등 모든 직종에 있어서 AI가 대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강조했다. 최근 불이 난 국가정보자원관리원도 AI나 로봇이 대체 못할 좋은 예로 들었다. 정보자원관리원의 데이터 보관과 분석은 AI가 한다. 하지만 여기에 필요한 설비를 만들고, 유지·보수하는 일은 사람의 몫이다. 진 교수는 “그게 미래 블루칼라의 역할이니 더는 단순 노동자로 치부할 순 없다. 제자들에게도 기능과 기술을 겸비한 스킬 엔지니어가 돼야 한다고 늘 얘기한다”고 말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며 블루칼라의 위상 변화를 체감하나. “폴리텍대의 경우 학생들의 연령대가 점차 높아지는 추세다. 매년 입학생의 연령대가 높아져서 올해는 만 28세에 육박한다. 이들 대부분이 사회생활 경험이 있고, 30%가량은 타 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후 학교로 돌아온 ‘U턴’ 학생이다. SKY는 물론 대학원 출신도 있다. 학업이 우수한 학생들도 기술을 배워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폴리텍대에 들어오는 것이다. 내가 1989년 처음 취업할 때만 해도 기술을 배운다는 건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런데 요즘 같은 세상에 진짜 배가 고파서 기술을 배우려는 애들이 과연 몇이나 되겠나. 자기 적성을 찾아서 혹은 더 높은 목표를 위해 기술을 배우려는 것이다. 블루칼라가 블루칼라의 위상을 스스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현장에선 숙련 기술인이 부족하다고 한다. “명장이 되려면 한 직종에서 최소 15년 이상의 숙련 기술을 닦아야 한다. 그렇게 익힌 기술은 물론 개인적 성과이기도 하지만 국가 발전의 토대가 된다. 문제는 명장 후보자들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마이스터고나 특성화고를 졸업하고, 기술을 배우려는 젊은이는 느는데 우리 사회가 아직 그 친구들을 받아들일 여건이 안 된 것 같다. 그 친구들이 15년 동안 현장에서 배우고, 성취감을 느낄 수 있게 해줘야 숙련 기술인, 나아가 명장이 될 수 있다.” 기술 강국의 명맥이 이어지려면. “기술자에 대한 충분한 기회와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 협력사 직원들도 노력하면 정규직 시켜주고, 교육도 꾸준히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인재가 부당한 대우에 실망해 현장을 떠나고, 그 자리를 저숙련 외국인 노동자가 채우게 놔두는 것은 엄청난 국가적 손실이다. 우리나라 조선업이 세계 최고 수준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해운업이 발달해서도, 엄청난 자본이 투입돼서도 아니다. 손기술이다. 우리와 똑같은 설계도를 보고도 다른 나라가 우리처럼 만들 수 없는 건 결국 손기술 차이다.” 진 교수는 “우리 손기술은 천부적인가”라고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AI 시대에도 그 좋은 DNA는 대물림해야 하지 않겠나.” 허정연 기자 jypow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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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동력 다 빼앗으면 어찌 크라는 건가" 탁상행정에 분노
━ 정주영 110주년…미공개 회의록으로 본 ‘위기극복 리더십’ 〈4〉 “각 업종을 통폐합하거나 경쟁을 제한하는 식의 행정 조치는 더 이상 있어선 안 된다. 정책 입안자 입장에서는 통합이나 조정이 국가경제에 이익이 된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장규모가 작다고 해서 정부가 나서서 ‘이 업종은 하나로 합치라’고 하게 되면 결국 기업은 국내시장에만 의존하게 되고 국제경쟁력은 영원히 갖출 수 없게 된다.” “정부는 정부에 대한 찬사에 기뻐하기보다는 문제점을 제시할 때 이를 긍정적으로 점검해보는 냉철한 정책 태도를 가질 때 상호 신뢰를 조성하게 될 것이다.” 1982년 6월 14일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특강 발언이다. 청자(聽者)는 부총리가 이끌던 5공화국 경제기획원의 간부들이었고 정 회장은 전국경제인연합회(현 한국경제인협회) 회장 신분이었다. 불과 1년 반 전엔 권력 수뇌부로부터 전경련 회장직에서 물러나라는 압박을 받았을 정도로 미운털이 박혔었다. 하지만 1년 여 후엔 ‘잘 나간다’는 경제 관료들에게 쓴소리를 하는 입장이 됐다. 1964년 충북 현대시멘트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부부와 정주영 회장. [사진 김명호 교수의 ‘건설자 정주영’] 정 회장과 전두환 정권은 이처럼 여러 차례 요동쳤다. 대기업 중심의 경제개발 체제이던 박정희 정권이 붕괴하고 무력으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극심했던 박정희 정권말의 최악의 경제 상황을 극복할 숙제를 떠안았다. 기업들의 과잉·중복…부실 투자도 난제 중 난제였다. 현대도 걸린 문제였다. 한때 “정치는 정치가가, 기업은 기업가가” 1980년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이하 국보위)가 추진한 산업합리화 정책이 대표적으로, 과다 경쟁을 막는다며 자동차와 발전설비 분야도 각 1개사로 통합하게 했다. 정 회장에 따르면 “국보위나 전두환씨가 총을 가지고 정권을 뺏을 수는 있어도, 남의 재산까지 뺏을 순 없다. 공산주의를 하지 않는 이상 그건 절대 안 된다”고 버텼지만, 끝까지 버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결국 발전설비를 포기했다. 국보위에선 현대가 발전설비를 택하도록 압박했지만 정 회장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상처는 오래 갔다. 정 회장은 회고록에서 “아우 인영이가 옥고까지 치르면서 1전 한 푼 못 건지고 창원 중공업 공장을 강탈당했던 기막힌 시간은 잊히지가 않는다. 전쟁만큼은 아니지만, 자격이 없는 이들의 손에 쥐어진 권력이라는 칼날 아래 기업을 하면서 정변 때마다, 정권 교체 때마다 그때그때 겪은 고난과 고통도 쉽지는 않았다”고 했다. 정 회장이 2년 후 경제 관료들에게 ‘통폐합’ 등에 대해 비판적으로 언급한 배경이다. 또 그렇게 특강까지 할 수 있게 관계 개선이 됐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가까운 관찰자 이명박 전 대통령은 “5공 초기의 현대와 신군부와의 관계는 아주 나빴다. 단순히 길들이기의 차원을 넘어 재계 개편 시나리오에 의한 타도작전을 방불케 하는 공격이었다. 그러다가 5공 중반에는 밀월 관계가 이루어진다. 그러고는 말기에 가면 다시 관계가 악화되면서 정주영 회장에게 정치에 대한 환멸과 권력에 대한 동경이란 모순된 정서를 심어주게 된다”(『신화는 없다』)고 기록했다. 사실 기업이라면 정치에 대해 어느 정도 불신할 수밖에 없다. 정치는 효율의 논리를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정 회장도 사장단 회의에서 솔직하게 드러내곤 했다. “경제는 정부가 아니라 기업과 은행이 하는 것”이 기본 인식이었다. 1984년 정부가 대기업 집중화를 막겠다며 은행들에게 30대 기업에 대한 여신 규모를 전년 수준으로 동결하도록 하자 정 회장은 10월 15일 사장단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우리나라 30대 그룹의 연간 이익을 전부 합해도 일본 대기업 하나의 연간 이익만도 못한데, 무슨 30대 그룹이 더는 크면 안 된다고…상식 이하의 사람들이 상식 이하의 짓을 하고 있어. 이 사람들 큰일 났다.” “정부에서는 자기 돈으로 크라는 겁니다”라는 보고자의 말에 이렇게 대꾸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 참 모르는 거다. 조그만 구멍가게는 자기가 자기 돈으로 크지만, 큰 기업은 공신력을 가지고 크는 거다. 크는 원동력을 상실시켜 놓고 도대체 어떻게 크라고 하는 거야. 발전을 균형시키는 게 아니고, 발전된 경제에서 세금을 거둬들여 극빈자를 도우면서 생활을 균형시키는 것이 균형경제다.” 정부의 현실 인식이나 역량에 대한 의구심은 전후로도 여러 차례 확인된다. “우리나라 금융은 동남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뒤처져 있다. 정부가 지나치게 간섭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세부적인 것까지 정부가 기업은 위축되고 산업은 뒷걸음칠 수밖에 없다. 자유경제 체제의 핵심은 ‘창의성’이다.”(1984년 9월 24일) “요즘 신문 보니까 상공회의소에서 재무장관이 나와서 부채비율을 200%로 만들겠다고 했다. 우리나라 10대 기업 중 실제로 300% 이하인 곳은 없다. 30대 기업 안에서도 서너 군데밖에 없다. 국가정책은 기업인이 절반은 따라갈 수 있게 세워야 한다. 일본은 평균 500% 될 거다.”(1984년 12월 10일) 1980년대 중후반을 거치며 권위주의 시대에 균열이 나고 민주화 요구가 분출하게 된다. 정 회장은 정치적 격변이 기업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의를 기울였다. “선거로 인한 정치권의 활성화는 잘못하면 기업을 위축시키는 분위기로 전환될 가능성도 크다. 그렇다고 해서 대기업이 지나치게 민감해질 필요는 없지만, 사회의 여러 압력이 우리 일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1985년 2월 25일) 곧 이은 총선에서 창당 한 달 남짓의 신한민주당이 67석을 얻으며 제1야당으로 부상하며 파란을 일으켰다. 김영삼·김대중 등 양 김씨도 이 과정에서 야권 지도자로 다시 부상했다. 직선제 요구 등 정치적 목소리가 커졌다. “우리는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우리 일에 열중하면 된다. 정치는 정치가들이 맡고 기업은 기업가들이 확실히 자기 일을 해야지, 정치적 변동기에 기업이 휘말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1985년 2월 25일)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은 정치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 정치에 휘말리는 형태 중 하나는 정치적 문담을 쓸데없이 하는 것이다.”(1985년 3월 4일) 정 회장은 이 무렵인 1984년 10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정치에 나설 것이냐’는 질문에 “개인적으로 정치에 직접 나설 생각은 없다”고 했다. 92년 통일국민당 창당…같은 해 대선 출마 1992년 12월 14대 대선에 출마한 정주영 회장이 부산 유세장에 입장하는 모습. 정 회장은 낙마 후 이듬해 의원직을 사퇴하고 정계 은퇴했다. [중앙포토] 하지만, 그는 7년 뒤 정계로 진출했다. 정 회장은 1992년 2월 통일국민당을 창당했고 한 달 만에 치러진 14대 총선에서 31명(지역구 24명, 전국구 7명)의 당선자를 내는 파란을 일으켰다. 그해 12월 치러진 14대 대선에도 출마했다. 결과는 김영삼·김대중 후보에 이은 3위였다. 현대의 영지(領地)와도 같았던 울산에서조차 김영삼 후보보다 적게 나오자 정 회장은 크게 실망했다. 이듬해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정계 은퇴했다. 왜 당초 쳐다도 보지 않겠다던 정치에 뛰어들었을까. 주변에 따르면 직접적으론 노태우 정권과의 불화가 꼽힌다. 정 회장은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 (더욱) 힘들어졌다. 큰 불편 없이 기업을 꾸려가려면 정부의 미움을 받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때마다 지도자한테 뭉텅이의 돈을 바쳐야 하는 이 나라가, 나라이기는 한 것이냐는 한심스러운 생각을 참 많이도 했다. 내가 정치 헌금을 중단하자 6공은 현대그룹 세무조사로 감정 풀이를 했고, 노 대통령은 3 최고위원(김영삼·김종필·박태준)과 회동할 때마다 나를 강도 높게 비난했다고 한다.” 정 회장은 1992년 신당창당 기자회견서 정치헌금 등을 폭로했다. [중앙포토] 1991년 여름 국세청이 현대그룹에 두 달간 특별세무조사를 벌여 1361억원의 세금을 물렸다. 결국 정 회장은 노 전 대통령 임기말인 1992년 1월 9일 “1988~1990년 사이 청와대에 최소 260억원을 갖다 주었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그는 “김영삼 정부 역시 기업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을 맛의 시대’였다”며 “나의 1992년 대선 출마에 대한 앙갚음으로 우리 현대가 당한 불이익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악몽”이라고 회고했다. ■ “이명박 사장 열심히 일했다” ‘젊은 임원’ MB에 무한 칭찬…정치길 들어서며 사이 갈라서 「 1990년 이진삼 육참총장, 정 회장(가운데), 이명박 현대건설 회장이 한강둑 복구공사를 협의 중이다. [중앙포토] 정주영 회장과 27년간 ‘현대인’이었던 이명박 전 대통령과의 관계는 극적이다. 이 전 대통령의 ‘신화’인 20대 이사, 30대 사장, 40대 회장을 가능케 한 건 정 회장의 신뢰와 용인술이었다. 1980년대 회의록 곳곳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정 회장은 1983년 1월 7일 계열사 중역들에게 전한 신년 특별메시지에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다행히 작년말 기준으로 총 47억 불 규모의 계약을 유지한 상태로 올해를 시작하게 됐다. 수주 활동에서 이명박 사장이 매우 열심히 일했다”고 말했고, 1984년 10월 8일 사장단 회의에선 “과거에는 현장에 상주하다시피 했지만, 지금은 이명박 사장이 주로 현장을 관리하고, 저는 연말에 바그다드에 가서 주요 개선사항만 점검하면 된다”고 했다. 사장단 회의에서 공개 칭찬에 박한 정 회장이지만, 이 사장에 대해서만은 달랐다. 둘은 그러나 정치를 앞두고 갈라섰다. 1992년 1월 3일 신년하례식에서 정 회장은 “오늘 날짜로 나와 이명박 회장, 이내흔 부사장은 정치에 참여하는 거로 결정하고 오늘부로 회사를 사임한다”고 했지만 이 전 대통령은 응하지 않았다. 대신 두 달 후 여당인 민주자유당의 전국구 제안에 응했다. 정치권에선 ‘정주영 바람’ 차단을 위한 전략적 영입이라는 설이 파다했다. 정 회장은 훗날 “배신한 건 아니고, 욕심을 좀 부린 것”이라는 정도로 말했다고 한다. 이 전 대통령은 ‘의리론’에 대해 “진정한 전문경영인은 오너보다 더 주인답게 살아야 한다”고 썼다. 」 유성운·신수민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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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치는 자금, 겉으론 호황인 미국 회사채 시장…기업파산·셧다운 '복병'
━ 자산 시장 ‘에브리싱 랠리’ 트럼프 대통령이 7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미국 연방정부는 1일 셧다운에 돌입했다. [연합뉴스] 주식·채권·금·비트코인까지 ‘에브리싱 랠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회사채 시장도 겉으론 호황이다. 낮은 금리에도 투자자가 채권을 앞다퉈 사들이며 국채 대비 초과 수익률(스프레드)은 수십 년 만에 최저치로 좁혀졌다. 그러나 이면에선 기업 파산과 신용 부실이 늘며 불안이 커지고 있다. ICE 데이터 인디시스에 따르면 9월 투자등급 회사채 스프레드는 0.74%포인트까지 떨어져 1998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10월에도 0.75% 안팎에 머물며 여전히 저점 수준이다. 8일 정크본드 스프레드는 2.82%포인트로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 수준에 근접했다. 스프레드 축소는 투자자가 신용 위험을 무시한다는 뜻이다. 우선 자금이 넘친다. 은퇴자부터 연기금까지 연준의 금리 인하를 예상하며 회사채 매입에 나섰다. 뱅크오브아메리카는 “투자처를 찾는 현금이 여전히 넘친다”고 전했다. 실제 9월 발행된 투자등급 회사채는 2100억 달러(약 294조 원)로 9월 기준 역대 최대였다. 그러나 바닥의 풍경은 다르다. 피치 레이팅스에 따르면 프라이빗 크레딧 부도율은 올해 8%대로, 팬데믹 때(7%)보다 높다. 일부 대출은 현금 대신 차용증서(PIK)로 이자가 지급되는 등 차입자의 상환 능력 저하가 뚜렷하다. 관련기사 코스피 사상 첫 3600선…'에브리싱 랠리' 가속 기업 파산도 이어졌다. 저신용 자동차 대출업체 트라이컬러 홀딩스는 파산을 신청했고 채권 가격은 20센트까지 폭락했다. 자동차 부품업체 퍼스트브랜드도 숨은 부채가 드러나며 파산보호에 들어갔다. 불과 2주 전까지만 해도 안정적이던 채권이 순식간에 3분의 1토막 났다. 정치 리스크도 겹쳤다. 1일(현지시간) 미국 연방정부가 셧다운에 돌입했다. 2018~2019년 35일간의 최장 셧다운 당시 회사채 발행이 절반 가까이 줄고 스프레드가 급등한 전례가 있다. 이번에도 장기화할 경우 낙관론이 흔들릴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월가의 목소리는 신중해진다. 하워드 막스 오크트리자산운용 공동회장은 “우호적 환경 속에 자금과 낙관론이 넘쳤다”며 “결과적으로 채권 가격은 높아지고 품질은 떨어졌다. 최고의 시기에 최악의 대출이 나온다”고 지적했다. 로이드 블랭크페인 전 골드만삭스 CEO도 “4~5년에 한 번씩 위기가 찾아왔다”며 “이번 위기는 신용시장에서 비롯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일부 전문가는 아직 위기 국면은 아니라고 본다. 인플레이션 압력이 완화되고 고용시장이 버티는 한, 연준의 금리 인하가 차입 부담을 덜며 안정세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그러나 스프레드가 사상 최저 수준인 만큼 작은 충격에도 균열이 확산할 수 있다는 우려는 공통적이다. 바클레이즈는 현 상황을 “사방에서 벽이 압박해 오는 스타워즈의 쓰레기 압축기 안”에 비유했다. 배현정 기자 bae.hyunj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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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피 사상 첫 3600선…'에브리싱 랠리' 가속
━ 자산시장 고공행진 추석 연휴를 마치고 개장한 코스피가 10일 반도체주 강세에 힘입어 사상 처음으로 3600선을 돌파했다. 이날 코스피는 전장(지난 2일)보다 1.73% 상승한 3610.60으로 장을 마감했다. 사진은 서울 여의도 한국증권거래소 전광판에 당일 종가가 표시되고 있는 모습. 김정훈 기자 코스피 지수가 ‘3600’의 벽을 넘어섰다. 10일 추석 연휴 직후 열린 첫 거래일, 장 시작 2분 만에 3606선을 돌파한 뒤 3610.60으로 장을 마치며 새로운 정점을 찍었다. 지난 2일 3500선을 밟은 지 거래일 기준 하루 만에 사상 최고가를 경신했다. 시총 1·2위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두 대장주가 코스피 상승을 주도했다. 삼성전자는 전장보다 6.07% 오른 9만4400원에, SK하이닉스는 8.22% 오른 42만8000원에 거래를 마쳤다. 두 회사 모두 종가기준 최고가 기록이다. 코스닥도 전 거래일보다 5.24포인트(0.61%) 오른 859.49에 장을 마쳤다. 전날엔 엔비디아가 아랍에미리트(UAE)에 AI칩을 수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리면서 장중 1.8% 상승하며 사상 최고가를 갈아치웠다. 미국 AI 관련주가 상승하자 국내 반도체주도 수혜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 관련기사 넘치는 자금, 겉으론 호황인 미국 회사채 시장…기업파산·셧다운 ‘복병’ 국내 증시의 급등세는 세계 자산시장의 랠리와 맞물린다. 코스피는 올해 비트코인을 제치고 금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미국·일본·중국·유럽 증시도 일제히 상승세를 보이며 글로벌 자산시장이 ‘에브리싱 랠리(Everything Rally·모든 자산이 오르는 현상)’로 들썩이고 있다. 월가에서는 “비관론자의 항복(surrender of the bears)”이란 진단까지 나온다. 중앙SUNDAY와 미래에셋증권 리서치센터가 집계한 ‘17개 주요 자산군별 올해 투자 수익률’(1월 1일~9월 26일)에 따르면 금(43.3%)과 국내 주식(41.1%, 코스피 기준)이 가장 높았다. 미국(23%), 일본(18%), 유럽(16%) 주식도 두 자릿수 상승률을 기록했다. 비트코인도 숨 고르기 후 상승세로 돌아서 17.43% 올랐다. 글로벌 리츠(8.4%)와 서울 아파트(7.5%), 원자재(1.8%)까지 강세를 보이며 자산시장은 ‘모든 게 오르는 장세’로 치닫고 있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다만 원화 약세는 변수다. 10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달러당 원화값은 1421.20원에 마감, 5개월 만의 최저 수준(원·달러 환율 상승)으로 떨어졌다. 미국의 관세 불확실성과 대미 투자 부담 등이 원화 약세를 자극했다. 통상 국내 시장에서 외국인 매수세가 강하면 환전 수요로 환율이 낮아지지만, 연휴 기간 달러 강세가 한꺼번에 반영되며 이례적 흐름이 나타났다. ━ 5년 전엔 유동성이 주도, 이번엔 미국 연준발 금리 인하 기대감이 방아쇠 금은 전통적으로 ‘최후의 피난처’로 불리지만, 이번에는 에브리싱 랠리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위기 회피 수요와 유동성 랠리가 맞물린 이례적 현상이라는 분석이다. 국제 금 시세는 8일(현지시간) 온스당 4070.5달러로 최고치 기록을 다시 세웠다. 은값도 이날 장중 49.57달러에 거래되며 2011년 4월 이후 14년 만에 사상 최고치를 새로 썼다. 국내에서는 환율 불안까지 엄습하며 원화가 아닌 자산을 보유하려는 수요까지 더해졌다. 국내 시세가 국제 시세보다 비싼 ‘김치 프리미엄’이 붙으며 금 한 돈(3.75g) 가격은 80만원을 넘어섰다. 금·은 투자 전문가인 조규원 스태커스 대표는 “경기 침체 우려, 금리 인하, 인플레이션, 여기에 트럼프발 불확실성까지 겹치며 금에는 최상의 시나리오가 펼쳐졌다”고 말했다. 이재명 정부 확장 기조에 국채는 역주행 그래픽=남미가 기자 코스피는 10일 전인미답의 ‘3600’ 문을 열었다. 지난해 말 2399.49에서 올 한해 숨 가쁘게 뛰어올라 마침내 3600선을 돌파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완화 기대가 증시 전반을 뜨겁게 달구면서다. 새 정부의 상법 개정과 지배구조 개혁 추진으로 외국인 자금이 대거 유입됐다. 반도체 업황 회복 기대도 증시를 끌어올린 주요 동력이 됐다. 미국 증시도 최근 흐름이 예사롭지 않다. S&P500은 지난달까지 3개월 동안 25차례나 사상 최고치를 갈아 치웠다. 엔비디아 등 빅테크주는 AI 수요 확대의 중심에 서면서 폭등세를 이어가고 있다. 일본과 유럽 증시도 동반 반등했다. 일본은 엔저 효과와 기업지배구조 개선책이 맞물리며 외국인 자금이 밀려들었고, 니케이225는 지난해 말 3만9894.54에서 지난 8일 4만7734.99로 뛰었다. 유럽 역시 금리 인하 기대와 경기 회복 신호, 에너지 가격 안정에 힘입어 유로스톡스50이 같은 기간 4895.98에서 5649.74로 급등했다. 글로벌 유동성에 정책 모멘텀이 더해지며 증시 랠리가 지역과 국경을 가리지 않고 확산하는 모습이다. 에브리싱 랠리는 5년 전에도 있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직후 각국 정부가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 전례 없는 돈 풀기에 나서자, 시장에 쏟아진 유동성이 주식·금·원유 등 대부분의 자산 가격을 밀어 올렸다. 2020년 4월부터 12월 말까지 S&P500은 53.8%, 나스닥은 72.7% 급등했고, 일본(45.3%)·중국(48.3%)·인도(80.8%)·브라질(67.4%) 등 주요국 증시도 폭발적인 상승률을 기록했다. 당시에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7년에 걸쳐 풀린 유동성의 70%가 불과 1년 안에 풀릴 정도로 돈이 넘쳐흘렀다. 낙폭 과대에 따른 반발 매수까지 겹치며 “현금은 쓰레기(Cash is Trash)”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위험자산과 안전자산을 가리지 않고 모든 자산이 뛰는, 문자 그대로의 에브리싱 랠리가 펼쳐졌다. 그러나 이번 랠리는 결이 다르다. 제로금리와 양적완화가 몰아쳤던 당시와 달리, 지금은 고금리 시대를 거친 뒤 연준의 ‘보험성 금리 인하’가 방아쇠가 됐다. 팬데믹 직후처럼 모든 자산이 일제히 오르는 양상은 아니다. 금리 인하 국면에도 한국 국채는 역주행했다. 금리가 내리면 국채 가격이 오르는 공식이 국내에선 통하지 않았다. 새 정부의 확장 재정 기조로 발행 물량 부담이 커진 데다, 원화 약세와 환율 불안으로 외국인 수요마저 줄어든 결과다. 원유와 달러화 가치 역시 하락하며 이번 랠리에서 소외됐다. 이진우 메리츠증권 리서치센터장은 “달러·금리 같은 전통 변수와 무관하게 금이 독주하는 것처럼, 지금은 유동성의 낙수효과가 아닌 ‘가장 확실한 자산’에 쏠림이 집중되는 국면”이라고 진단했다. 일종의 ‘선택적 에브리싱 랠리’에 가깝다고 분석한다. 부동산도 소위 ‘한강벨트’ 등 인기 지역 중심으로 가격이 상승하고 있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올해 송파구 아파트값은 지난달 29일까지 누계 기준 13.98% 올라 서울에서 가장 높은 상승률을 기록했다. 성동구(12.03%), 서초구(10.86%), 강남구(10.73%) 등 강남 3구와 성동구도 두 자릿수 상승률을 보였다. 반면 중랑구(0.4%), 도봉구(0.41%), 금천구(0.82%), 구로구(1.86%) 등은 2%에도 미치지 못했고, 지방 아파트 가격은 여전히 하락세다. 고준석 연세대 경영전문대학원 상남경영원 교수는 “경기·인천만 해도 미분양이 쌓이고 있다”며 “지금 부동산 시장은 전형적인 ‘서울만의 랠리’”라고 했다. 시장에선 경기 둔화와 ‘K자형(양극화 심화) 경제’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고용은 정체되고 실물 경기는 둔화하는 데, 자산 시장만 활황을 보이는 불균형에 대한 불안이 짙어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지난달 “연준은 특정 자산의 특정 가격을 목표로 삼지 않지만 현재 주가는 상당히 높다”며 증시 과열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실제로 최근 미국 증시의 총 가치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363%까지 치솟았다. 닷컴 버블 정점(212%)을 압도하는 수준이다. 김영익 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는 “지금의 주가 수준은 실물 경기와 괴리가 크다”며 “경기 회복 기대도 있겠지만, 금리 인하로 인한 유동성 증가를 과대 반영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유동성 장세…‘주가 급락’ 경계 우려도 이 같은 괴리 속에서 투자자의 행태도 달라졌다. 서상영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욜로(You Only Live Once) 투자가 만연하고 있어 예측이 불가능한 시장”이라고 진단했다. ‘인생 뭐 있어’ 식의 단기 수익 추구가 늘면서 상한가 따라잡기(상따) 전략, 레버리지 투자, 밈 주식 쏠림이 빈번해졌고 그때그때 이슈에 따라 폭등 종목이 바뀌는 모습이다. 기업 실적이나 펀더멘털에 기초한 전망은 점점 힘을 잃고 있다. 월가에서도 랠리가 특정 테마를 중심으로 퍼질 경우 리스크가 커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제프 슐츠 클리어브리지 인베스트먼츠 투자전략가는 “지금의 증시 랠리는 안도감을 주지만 지속 가능성에는 의문이 있다”며 “포트폴리오를 배당성장주 및 다양한 섹터로 분산할 것”을 권고했다. 향후 변곡점은 경기와 물가다. 미국 경기선행지수는 올해 2월부터 8월까지 6개월간 2.7% 하락했다. 현재 랠리의 바탕이 되는 ‘유동성’의 지속 여부도 관건이다. 자비에 가백스 하버드대 교수가 제시한 ‘비탄력적 시장 가설’에 따르면, 주가는 기업의 실적보다 시장에 풀린 자금의 양(수급) 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유동성 장세는 자금이 빠져나갈 경우 주가 급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를 내포한다. 3600선 고지를 밟은 코스피에 대한 국내 투자자들의 시각도 엇갈린다. “이러다 4000 가겠네”라는 기대와 “이제 번지점프대에 올라섰다”는 불안이 교차하며 갈팡질팡하는 분위기다. 다만 국내 증시는 3저(저금리·저유가·저달러) 환경과 반도체 가격 상승에 힘입어 추가 모멘텀 기대가 커지고 있다. 일시적 조정은 올 수 있지만 우호적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염승환 이베스트증권 이사는 “상법 개정, 금리 인하, 반도체 사이클이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면 당분간 국내 증시 강세장은 유지될 것”이라며 “중장기적으로 코스피 4000은 가능하다”고 내다봤다. 다만 그는 “미·중 관계나 APEC 정상회의 결과에 따라 단기 변동성은 확대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파죽지세인 금값의 장기 전망도 낙관론이 우세하다. 글로벌 투자은행(IB) 골드만삭스는 “연준의 독립성이 훼손될 경우 내년 금값이 온스당 5000달러까지 오를 수 있다”고 전망했다. 도이치뱅크 역시 2026년 평균 금 가격 전망을 온스당 4000달러로 내다봤다. 다만 단기 과열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다. 조규원 대표는 “장기적으로 금값 상승 여력은 여전하지만, 최근 단기 급등과 김치 프리미엄을 고려하면 이미 자산의 10% 이상을 금·은에 배분한 투자자는 오히려 관심이 덜한 시기를 기다리는 게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배현정·고석현 기자 bae.hyunj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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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현장 직접 다녀왔다"…사장들 긴장시킨 '매의 눈'
━ 정주영 110주년…미공개 회의록으로 본 ‘위기극복 리더십’ 〈3〉 “토요일 오후 현대전자 다녀왔는데, (현대종합)목재는 확인 안 해봤나? 새 건물을 지으면 따라가서 뭐 납품할 게 있나 보고 협력하라고 했는데, 아무런 추진이 안 됐다.” 1984년 7월 9일 현대그룹 사장단 회의. 시작과 함께 정주영 회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나무 책상 이야기했었다. 같은 값이면 철제보다 더 고급스러워 보이니 그렇게 공급하자고 했는데 왜 실행을 안 했지? 물건을 구매할 때, 그룹 내에서 조달이 불가능할 때만 외부에서 사라고. 두 회사(현대전자·현대종합목재) 모두 시말서 제출하라.” 현대그룹 사장단 회의는 종종 ‘무덤’과도 같았다. 현장을 직접 챙기고 잘 아는 정 회장의 스타일 때문이었다. “내가 다녀왔는데…” “내가 가봤더니…”로 시작되면 타깃이 된 계열사는 대개 진땀을 흘려야했다. 한 계열사 사장이 얼이 빠져 나가다 캐비닛을 문으로 착각해 열고 들어갔다는 후일담도 있을 정도였다. 현대울산조선소 건설현장을 찾은 정주영 회장과 김성곤 쌍용그룹 회장 겸 당시 국회재경위원장(왼쪽 다섯째). 첫 수주한 유조선을 건조하고 있다. [사진 김명호 교수의 ‘건설자 정주영’] 이날도 예외가 없었다. 이윽고 현대정공으로도 불똥이 튀었다. “현대정공 사장 나왔나? (예, 나왔습니다.) 미국에서 컨테이너 하우스를 수주했지? 내가 공장에 갔을 때 출입구 발판이 아연도금 처리돼 있었는데, 너무 형편없었다. 어디서 했냐고 물어봤더니 외부에 맡겼다고 하던데, 현대중공업 옆에 도금 공장 있는데 왜 굳이 외부에 맡겼나? 우리 쪽에서 더 잘 만들 수 있는데 왜 외부에 맡겨서 형편없이?” 현대강관 차례였다. “자재 관리나 제품 관리에 대한 교육은 잘 이뤄지고 있나? 지난 번에 공장과 창고를 전부 둘러봤더니, 제품들이 시뻘겋게 녹슬어 있어. OOO 부사장이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는 걸 그때 느꼈어.” “본사에서는 공장에 가면 사무실에서 얘기만 하지 말고 공장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직접 확인도 하고 재고를 줄일 수 있는 방법도 연구하라. 노력하면 (재고를) 줄일 수 있고 그게 곧 이익인데, 거기 가서 저 아래 겨우 과장 정도나 만나고 오는 모양이다. 그게 본사야?” “혼자 쥐고 있지 말고 기술자에게 물어라”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현장에서의 정 회장. 이 공사는 현대를 비롯한 한국 기업들의 중동 건설 붐을 이끌었다. [사진 김명호 교수의 ‘건설자 정주영’] 정 회장은 어려운 때일수록 현장에서 ‘해답’을 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유명한 그의 말 “한 번 해봤어?”도 현장을 강조한 철학이 담겨 있다. 그는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실패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유가 있고, 어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때는 그에 대한 원인이 있기 마련”이라며 “그 이유를 극복한 사람이 성공하는 것이다. 현장에 가면 구경만 하지 말고, 반드시 목적을 파악하고 개선하라”(1984년 9월 17일)라고 지시했다. 같은 해 11월 26일 그가 계열사인 인천제철 임원과 나눈 대화에는 이런 면이 잘 드러나 있다. 정 회장은 “인천제철은 시설 빨리 개선해서 명년에는 H빔(건축에서 건물의 뼈대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H모양의 강철기둥)을 꼭 계획대로 내놓아야 한다. 언제쯤 완성되나”라고 물었다. 인천제철이 수압으로 쇳물을 받아내는 시설을 미쓰비시에서 들여오는 데 8개월이 걸린다고 답하자 이런 대화가 오갔다. ▶정 회장=“그걸 우리가 여기서 만들지, 뭐 하러 일본까지 가서 해오나.” ▶인천제철=“그건 저희가 못 만듭니다. 그 안에 물을 통과시켜 냉각을 시켜야 하고, 그 통로 부분을 동(銅)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국내 제작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정 회장=“그렇게 혼자 어물거리지 말고 (현대)엔지니어링 OOO 부사장이랑 상의해라. 견본 보고 만들면 되지 않나. 우리도 만들 수 있다.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왜 기술자도 아닌 당신이 혼자 붙들고 있나. 내가 항상 얘기하지 않았나. 그런 일은 반드시 기술자한테 자문하라고. 몇 달을 허비했어? 참 한심하다.” 해외 현장도 마찬가지였다. 정 회장은 “종합상사 해외지사는 뉴저지 지점과 샌프란시스코 지점 중 한 곳에서는 월요일 아침 6시, 다른 한 곳에서는 화요일 아침 6시에 나한테 꼭 전화하라고 일러달라. 리야드는 수요일 아침 6시에 전화 달라”(1985년 6월 3일)고 지시했다. 정 회장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현장의 사나이’로 통했다. 모두들 참 열심히 일했으나 그래도 내가 현장에 있을 때와 없을 때가 크게 달랐다. 현장 사람들 모두의 걸음걸이부터 달랐으니, 경영자가 직접 현장을 챙기고 안 챙기고의 차이는 대단히 큰 법이다… 원효로 4가에 있는 중기 공장은 매일 하루 한 번씩 가다가, 어떤 날은 하루 두 번도 갔다. 방심하고 있던 직원들을 혼이 빠지게 만들기도 했다.” “주부들 입빠르다” 소비자 평판도 중시 정주영 회장 스케치. [사진 김명호 교수의 ‘건설자 정주영’] 1984년 10월 1일 사장단 회의에도 이런 그의 성향이 잘 드러난다. “동서산업도 P.C(Precast Concrete) 콘크리트에 대해서는 지난번 현장에서 해 놓은 작업을 기준으로 보면 낙제다. 콘크리트의 품질도 그렇고, 강도도 그렇고 앞부분이 너무 두꺼워질 수밖에 없지 않아? 내가 보기엔 아직도 10년 전 방식을 그대로 쓰고 있던데, 과거 중동에서 하던 방식보다 발전된 형태로 구상해서 발전시켜야 한다.” “현대전자 공장 (건설현장)에서 하는 걸 보면 딱 보여. 지난 주 일요일에 나가봤더니 예산 승인도 안 났는데, 공사를 하고 있길래 중단시켰다. ‘얼마에 하느냐’ 했더니 ‘삼천몇백만원입니다’라고 하더라. 100만원이면 될 일을 3000만원에 한다고? 당신네 밑에 있는 사무 라인에서 전부 현장 조사를 하면 그런 계획은 나올 수 없다. 어물쩍 넘기지 말라. 회사 이익보다 자기 실수나 장난이 드러날까봐 더 걱정하니까 발전이 없지.” “반도체 공장도 똑같은 설계를 했는데 캘리포니아에서 만든 것과 우리나라에서 만든 건 완전히 천지 차이다. 국내 건설본부장이 질 향상에 관심이 없다는 얘기야. 책임자가 만족해버리니 현장 사람들도 더 나아지려 하지 않는다.” 그는 임원들도 ‘발품’을 팔아서 현재에 안주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책임자들이 아무리 바빠도 기계공업 전시장 등 모든 전시장에 전부 나가서 보라. 그걸 보고 바깥 세상이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지 알아봐야 한다. 무슨 전시든지 밑에 사람만 보낼 게 아니라 윗사람들이 나가보는 게 좋다. 그래야 감이 오는 게 있고, 설계를 할 때나 그 무엇을 할 때 남들보다 앞질러서 발전을 할 수가 있다.”(1984년 7월 9일 사장단 회의) 국내외 리셉션에도 웬만하면 참석하라고 했다. 정 회장은 “나는 리셉션이 아주 좋은 사교 장소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과 안면을 트고 인맥을 넓히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해달라. 그게 영업이기도 하고 개인의 대인관계를 넓히는데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정 회장은 소비자 평판을 중시했다. 그 또한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1984년 10월 1일엔 이렇게 질책했다. “또 하나, 경종을 울려야 할 것은 한국도시개발(현대 그룹 계열사) 당신네가 짓는 주택이 현대건설보다 한참 떨어진다는 거야. 그렇지? 그런데 팔 때는 ‘현대 아파트’ 이름으로 팔고 있지? 그건 회사의 공신력을 떨어뜨리는 거다. 돈으로 따지면 몇 푼 안 되는 것 같지만, 그로 인해 떨어지는 공신력은 엄청나다. 특히 주택은 소비자인 주부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지는 속도가 빨라. 불만이 생기면 걷잡을 수 없다. 각서를 받아서 품질을 확실히 보장하라.” ■ “하청업체 울리지 마라” 어음보다 ‘현금 지급’ 강조 「 정주영 회장은 “팔아주는 것이 큰 권리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라며 “우리나라 기업 중 누가 먼저 그 생각을 버리느냐가 제일 진보된 기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1984년 8월 27일 사장단 회의였다. 하청업체를 염두에 둔 발언이다. 그의 말이다. “대부분 하청업자들은 모기업보다 비싼 이자를 물고 자금을 돌린다. 수형(어음)을 늦게 떼 주면 결국 하청업자를 망하게 하든가, 아니면 돈을 더 주고 비싸게 사게 된다고. 하청업자가 어쩔 수 없이 받아간다고 해서 3개월 이상 수형 떼 주는 걸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넘기는 회사가 있는데, 현금을 못 주고 한 달이든 몇 날이든 수형으로 줄 때는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돈이 없어서 못 주면서 수형을 끊어준 걸 더 당당하게 여기는 건 옳지 않다. 물건을 납품하면 현금을 지급하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회사에서 지급이 제일 늦은 회사가 어디야?” 계열사 상황을 보고받은 정 회장은 이렇게 덧붙였다. “현대자동차와 인천제철은 90일이라는데, 이 사람들은 경영을 잘 못 하고 있는 거야. 자기 회사가 크다고 하청업체를 울리면 안 된다. 정부가 정책(2개월)을 시행하면 그대로 따라라. 인천제철도 반드시 두 달 안에 지급하고 될 수 있으면 한 달 안에 지급하라.” 」 유성운·신수민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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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 하는데 왜 못해" 주력산업 차·반도체로 교체 승부수
━ 정주영 110주년…미공개 회의록으로 본 ‘위기극복 리더십’ 〈2〉 정주영의 현대는 중후장대(重厚長大)하다. 대규모 설치 투자와 높은 자본 집약도, 방대한 전·후방 연관 산업이 특징이었다. 그는 요체를 이렇게 정리했었다. “우리가 잘 되는 것이 나라가 잘 되는 것이며 나라가 잘 되는 것이 우리가 잘 될 수 있는 길이다.” 그 정신은 위기 국면에서도 여전했다. 1985년 6월 정 회장은 사장단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대가 하는 업종 가운데 세계 경기가 좋은 건 자동차 하나뿐이라고 보고 있다. 조선업도 그렇고 수리조선은 좋은 편이 아니며 건설도 좋지 않다. 어려울 때 잘 이겨내고 후퇴하지 않는 것이 저력이다. 각 회사가 열심히 연구해서 불경기라고 해서 후퇴하지 말고 창의력을 발휘해 저력을 보여달라. 각 회사의 저력이 곧 현대 전체의 저력이 되고 현대의 저력이 국가의 저력이 된다.” “어려울 때 후퇴하지 않는 것이 저력” 해외 수출을 기다리는 현대자동차. [사진 김명호 교수의 ‘건설자 정주영’] 종종 일본·대만을 언급하며 독려했다. “대만이 할 수 있으면 우리가 할 수 있다. 일본이 하는 것은 우리도 할 수 있다”(1984년 7월 2일)는 식이었다. 이듬해 10월에도 정 회장의 목소리엔 힘이 실려있었다. “왜 일본 사람이 할 수 있는 걸 한국 사람이 못하냐. 일본은 100년 조선업 역사를 가진 나라다. 미쓰비시 같은 회사도 100년 역사를 가지고 있고 2차 세계대전 때는 전함을 전부 만들었지만 지금은 그들도 우리보다 많이 못 만든다. 우리는 불과 15년 만에 일본 어느 조선소보다 더 많이, 더 싸게 배를 만들고 있다. 결국 여기 있는 여러분이 얼마나 진취적으로 움직이느냐가 관건이다.” 이 시기 정 회장은 주력 산업 교체란 승부를 던졌다. 1950년대 이래 그룹 계열사 종합 매출액은 현대건설이 명실상부 1위였다. 현대중공업은 세계 1위 조선소를 굳혔다. 하지만 현대자동차와 반도체(현대전자)로 옮겼다. 불경기가 배경이긴 했다. 1980년대는 흔히 ‘3저(低) 호황’으로 알려져 있지만, 전반기는 사정이 달랐다. 그동안 외화벌이 창구 역할을 톡톡히 했던 중동의 건설 붐도 차츰 사그라지기 시작했고, 세계 조선 수주도 한창때 연간 4000만t에서 1400만t으로 3분의 1토막이 난 상태였다. 중동에선 불안한 정세 때문에 돈이 들어오지 않기 일쑤였다. 정 회장이 본 건 그러나 그 너머였다. “기존 주력인 건설과 중공업이 앞으로 성장이 힘들기 때문에 거기에 쏟을 정력을 다른 데로 돌려야 한다” “다른 회사에서 만드는 것이 세계 경쟁력이 있다면 굳이 우리가 새로 만들 필요가 없다”고 본 그는 1984년 10월 8일 사장단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앞으로 현대자동차와 현대전자에 보다 집중하려고 한다. 현대자동차와 현대전자에 모든 역량과 노력을 집중해 세계 시장으로 적극 진출할 계획이다. 각 회사도 이러한 방향을 참고하여 내년도 사업 계획을 수립해 달라.” 1980년대 초 전시된 포니2 모델을 바라보는 정주영. [사진 김명호 교수의 ‘건설자 정주영’] 직전에도 “오늘 회의가 끝나면 자동차회사의 중역들은 내 방으로 오도록 하라. 일주일에 한 번씩 나와 회의할 자료를 가지고 바쁘더라도 꼭 회의하자. 나는 이 자동차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세계적인 대기업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쁘더라도 자료를 준비해서 오도록 하라”고 당부했었다. 그러면서 이해 캐나다로 포니를 수출하며 북미 시장에 진출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 시장의 적극적인 공략을 당부했다. “20만 대, 30만 대, 50만 대를 미국에 수출하려면 주마다 쿼터 문제를 해결할 인재를 배치하라. 변호사만 믿지 말고 실력 있는 인재를 직접 기용하라. 우리가 뜻을 크게 품고 그에 맞는 노력을 한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 세계 시장은 크다. 일본이 하는 것을 한국이 못 할 이유는 없다. 사장단은 이 점을 깊이 연구해달라. 지금 한국에서 제일 큰 회사라고 해서 절대 만족해서는 안 된다.” 기아자동차 인수 후 1999년 3월 화성공장을 찾은 정주영 명예회장을 정몽구 그룹회장이 수행하고 있다. [사진 김명호 교수의 ‘건설자 정주영’] 정 회장은 이전부터 자동차산업에 애정이 깊었다. 1940년 서울 아현동에 ‘아도써비스’란 자동차 수리공장을 세웠고 해방 직후인 1946년에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했다. 1967년 제조업에 진출했고 그 유명한 포니가 나온 건 그로부터 9년 후였다. 미국 측으로부터 독자개발 대신 주문 생산을 제안받았을 때 정 회장이 “자동차는 달리는 국기(國旗)나 다름없고, 일생에 번 돈을 다 들여 실패하더라도 후대에 자동차 공업을 성공시킬 디딤돌을 놓는다면 후회는 없다”고 뿌리쳤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졌다. 경기 최악 때도 “해야 할 투자는 해야” 반도체를 지목한 건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한국의 소형차 산업 이상으로 전망이 좋다고 확신하고 있다. 반도체 산업이나 자동차 산업에 방대한 투자를 해야 한다”(1986년 6월)고 봤기 때문이다. 스스로 “전자화는 장차 자동차 사업의 성패를 가늠할 궁극적 핵심 요소가 될 것이 분명했다. 자동차 산업은 그때 막 보급되기 시작했던 퍼스널 컴퓨터와 함께 최대의 반도체 수요 제품이 되었다”고 회고한 일도 있었다. 그는 사활을 건 경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반도체 산업계가 버티지 못할 것이란 얘기도 나오는데 원칙적으론 못 버티는 게 맞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노력하는 사람은 살아남을 것이라고 본다. 모든 사업엔 항상 도산이 다르기 마련이고 그래도 새로 투자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계가 지금은 초창기가 어려움을 겪는다 하더라도 장래가 매우 유망하다고 본다. 일본 후지쯔에 가서 둘러보면서 이해한 바인데 우리나라 사람들 잘만 가르치면 고급 두뇌가 참 많아질 것이란 것이다. 고급 두뇌가 많은 나라는 반도체 산업에 가장 유리한 나라다.”(1985년 6월 3일) 그의 목표는 늘 세계 1위였다. “나는 현대자동차의 모든 이들이 세계적인 대기업을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을 갖길 바란다. ‘세계 제일’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공장부터 최고위 경영진까지 모두 그런 인식을 가지고 확신을 가져야 비로소 회사가 제대로 선다.”(1984년 9월 24일) “우린 처음에 선체 도면만 구매해서 만들기 시작했지만 불과 13년 만에 세계 1위에 올랐다. 자동차 산업도 마찬가지로 추진할 것이다.”(1984년 10월 8일) “우리는 수출산업 중심으로 조선이면 조선, 자동차면 자동차, 반도체 산업이면 반도체 산업, 각 분야에서 세계 최고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세계 1위는 어렵더라도 최소한 2위는 도달하겠다는 목표를 가져야 한다. 반도체 산업도 세계 1위까지는 아니어도 세계 일류급에 든다는 목표로 일해달라.”(1985년 1월 14일) 정 회장은 불경기라고 투자가 위축되는 것에도 부정적이었다. 이듬해 경기가 최악일 거라고 전망했던 1984년 10월 15일 사장단 회의에서는 “지금은 투자해서 경기가 유발되는 것이 제일 좋다. 투자를 해서 유발되는 것은 미래에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소비를 조장해서 경기를 유발시키는 것은 백해무익”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국민에게 진정한 혜택이 되는 건 생산설비에 투자하는 것밖에 없다. 공장을 하나 짓는다는 건, 모든 산업이 다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생산설비에 투자했어야 했는데, 소비재만 늘려서 인위적으로 경기를 부양하려 한 건 근본 방향부터 잘못된 것이다. 어떤 시책을 펴더라도 우리는 투자를 가장 효율적으로 진행해야 하고, 억제하더라도 꼭 해야 할 투자는 해야 한다.” 실제 1984년부터 1988년까지 전자 분야에 5000억원을 투자했다. ■ 현대전자, LG반도체와 합병했지만 IMF 위기 못 버텨 「 1998년 현대전자 미 반도체공장. [중앙포토] ‘현대=제조업’이란 이미지가 강하고 실제로도 그렇다. 1950~70년대는 건설과 조선, 80년대 이후엔 전자·자동차·중공업 등을 주력으로 했다. 정주영 회장은 “나는 자체 수요나 국내 시장만으로 끝나는 수출 경쟁력이 없는 사업에는 흥미를 못 느낀다”며 “전자산업도 남들이 이미 하고 있는 가전 분야에 뒤늦게 끼어들어 경쟁만 심화시키기보다는 수출 잠재력이 크면서도 기술이나 자금 문제 등으로 타 기업이 선뜻 나서기를 꺼리는 분야를 선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정 회장이 예견했듯이 실제로 현대전자 설립 20여 년 후 반도체는 한국 경제를 먹여 살리는 성장 동력이 됐다. 하지만 그가 1980년대 자동차와 더불어 집중 육성했던 현대전자는 국제통화기금(IMF) 위기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1998년 말 김대중 정부의 ‘빅딜’ 정책에 따라 LG반도체를 합병했지만 이게 결국 탈이 났다. 막대한 인수자금에 따른 유동성 위기를 넘지 못했고, 2001년 정 회장 사망 후 하이닉스반도체로 개명해 현대그룹에서 분리됐다. 이후 하이닉스는 10여 년간 주인 없는 회사로 떠돌다가 SK 품으로 안겼고 현재 ‘알짜 자산’이 됐다. 훗날 구자경 LG 명예회장은 “반도체를 잘하고 있는데 누가 욕심을 부려서 빼앗아갔다. 소 떼를 몰고 북으로 가고 돈을 쓰더니… 우린 안 된다고 버티다가 결국 포기했다”고 회고했다. 정 회장을 겨냥한 것이다. 」 유성운·신수민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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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개편에 셋으로 쪼개진 원전 관련 부처…업계 “규제 더 심해질까 우려”
━ 탈원전 2막, 원전업계 전전긍긍 “시어머니가 셋인데 눈치가 안 보이겠냐, 국감 앞두고 상임위도 늘었다.” 최근 발전사 공기업 관계자가 한 말인데, 실제 그렇다. 에너지 부문을 담당했던 산업통상자원부 2차관이 환경부로 이관하는 과정에서, 원전 관련 부처도 셋으로 쪼개지면서다. 규제를 포함한 원전산업 전반은 기후에너지환경부가, 수출·통상은 산업부, 기술개발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담당한다. 셋인 것도 부담인데 주무 부처인 기후에너지환경부의 김성환 장관은 본인은 탈원전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주변에선 탈원전주의자로 분류하는 인물이다. 최근엔 이미 예정된 원전도 국민 공론화가 필요하다고 해서 아리송함을 더했다. 김 장관은 1일 기후에너지환경부의 출범사에서 “2030년까지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를 100기가와트 수준까지 확대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재생에너지는 일곱 차례 언급했지만, 반면 원전을 포함한 다른 에너지원은 단 한 차례도 언급하지 않았다. 관련기사 탈원전 기우는 정부…원전업계 깊은 한숨 산업용 전기료 3년간 7회 ‘인상 폭탄’…기업 체납액 702억서 1288억으로 급증 지난달 15일 국회 기후위기특위 국민의힘 간사인 김소희 의원실 주최 ‘기후에너지환경부’ 신설에 대한 긴급토론회에서도 ‘원전산업 축소 가능성’이 제기됐다. 손양훈 인천대 교수는 “에너지 한 톨 안 나는 나라에서 원전 설비 개발부터 생산, 수출까지 국가 산업경쟁력을 키워왔다”며 “에너지원을 산업과 유리시킨다면 경쟁력 잃는 건 물론, 에너지산업 혁신이 이권 카르텔로 지목되는 중국에 넘어갈 것”이라 말했다. 일관된 에너지 정책이 가능할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됐다. 조성봉 숭실대 교수는 “기존 산업부에서 일괄하던 에너지원별 기본수급계획이 과연 균형 있게 다뤄질지 의문”이라고 했다. 업계 관계자는 “환경부 주 역할이 규제인데, 원전 산업 자체만도 규제가 심한데 더 까다로워질까 우려된다”고 했다. 에너지공기업 통폐합도 논란이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8월 기자간담회에서 “공공기관 중 제일 큰 게 발전 공기업” “발전 공기업만 하더라도 신재생에너지 시대에는 전혀 다른 역할이 요구될 수 있다”와 같은 발언을 한 게 계기가 됐다. 여권에선 발전사 5곳을 화력발전 공기업(2개)으로 통폐합하고 신재생에너지, 원자력발전 공기업으로 재구조화하는 법안까지 발의됐다. 상대적으로 신재생에너지에 중점을 두는 방향이라 원전 업계에선 우려가 커지고 있다. 신수민 기자 shin.su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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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용 전기료 3년간 7회 ‘인상 폭탄’…기업 체납액 702억서 1288억으로 급증
━ 탈원전 2막, 원전업계 전전긍긍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처럼 한 놈만 패듯이 산업용 전기요금만 올리는 건 탄소중립·합리성·형평성에 위배된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미래에너지융합학과 교수는 지난달 29일 국회기후변화포럼 주최로 열린 ‘탄소중립과 산업경쟁력을 위한 전기요금의 방향과 과제’ 주제의 정책세미나에서 이렇게 말했다. “산업용 전기요금의 지속적 상승으로 경영 부담이 증가하고 산업 경쟁력이 훼손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다. 한국의 산업용 전기요금이 가정용 전기보다 저렴하다는 것은 옛날 얘기다. 최근 3년간 7회에 걸쳐 집중적으로 오르는 ‘인상 폭탄’을 맞으면서다. 2022년 1분기 105.5원/㎾h에서 올해 7월엔 194.1원/㎾h로 84% 상승했다. 같은 기간 주택용 전기요금의 상승치(109.2원/㎾h→162.7원/㎾h, 49%)보다 갑절 가량이 높은 셈이다. 2000년부터 잡으면 그 차이는 더욱 벌어진다. 2000년 당시엔 산업용 전기가 58원/㎾h으로 가정용 전기(107원/㎾h)의 절반 수준이었다. 저렴한 전기요금은 제조업 강국인 한국의 경쟁력 중 하나로 꼽혔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말 기준 한국의 산업용 전기요금은 ㎿h(메가와트시)당 122.1달러로 주요 제조국인 미국(80.5달러)이나 중국(60~80달러)보다 훨씬 높다. 이종배 국민의힘 의원실이 2일 한국전력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8월까지 받지 못한 전기요금은 2824억원이다. 이는 지난해 (1~12월) 전체 2816억원보다 많은 액수다. 특히 산업용 전기요금을 체납한 업체는 최근 5년간 1만2000여 업체에서 1만5000여 업체로 25%가 늘었다. 체납액도 702억원에서 1288억원으로 83.5% 급증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원인은 복합적이다. ‘탈원전’ 여파와 ‘표퓰리즘’이 엮이면서다. 급격한 탈원전 추진은 전기료 상승을 불러왔다. 올해 5월 기준 한국전력공사가 사들인 연료별 가격을 보면 태양광 1㎾h당 130.5원, 풍력 123.6원으로 80원인 원자력에 비해 1.5배가량 비싸다. 2022년 산업통상자원부의 ‘단위 발전량 대비 투자비용 분석’에서도 1㎾h 전기생산에 원전은 500원이 사용되는 반면 태양광은 3422원으로 원전의 6.8배, 풍력은 4059원으로 원전의 8.1배의 비용이 소요된다. 관련기사 탈원전 기우는 정부…원전업계 깊은 한숨 조직 개편에 셋으로 쪼개진 원전 관련 부처…업계 “규제 더 심해질까 우려” 이런 이유로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7년 5월 산업통상자원부는 탈원전을 추진하기 위해선 2030년까지 매년 전기요금을 2.6% 인상해야 한다고 정부에 보고했다. 전기요금은 2017년 1㎾h당 109.53원이던 것을 2018년 112.38원을 시작으로 2022년 124.53원까지 인상해야 한다고 봤다. 하지만 실제로 책정된 전기요금은 2018년 108.74원으로 출발해 2022년 110.41원에 그쳤다. 최근 급격하게 치솟은 산업용 전기요금은 이때 억눌렸던 풍선이 터진 효과다. 2024년 4분기에 9.7%를 인상했을 때도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20대 법인이 부담할 전기료는 1년 새 1조2000억원이 상승했다. 손양훈 인천대 교수는 “가뜩이나 산업용 전기료 인상으로 힘든 상황에서 이같은 기조는 제조업 위주 산업구조를 갖는 우리에겐 큰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해외 선진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산업용 전기요금 지원도 적다는 게 유 교수의 분석이다. 독일은 2023년 11월 최대 280억 유로의 전기요금 보조금을 도입했다. 영국은 전력 다소비 기업 전기요금을 최대 25% 인하하는 방안을 2027년부터 시행한다. 중국도 올해 산업용 전기요금을 최대 16% 인하했다. 자국의 제조업을 보호하고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그는 “해외와 달리 별다른 보조금이 없는 상황에서 이대로 에너지 전환을 추진하면 기업들은 생산을 줄이거나 오프쇼어링을 할 것”이라며 “산업용에만 집중된 전기요금 인상은 원가주의를 정면으로 위배한 것이다. 주택용, 일반용, 농사용 전기요금을 인상하고 그 여력으로 산업용 전기요금을 낮춰야 한다”고 제언했다. 문제는 앞으로도 추가 인상 요인이 수두룩하다는 것이다. 이재명 정부가 역점 사업으로 추진하는 AI데이터센터 등이 추진되면 전기 사용량은 급증할 것으로 예상한다. 여기에 정부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원전을 추가하는 대신 신재생에너지를 확대하겠다는 방침이다. 올해 2월 발표된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2024~2038) 조정안은 신규 대형원전 3기를 짓기로 했던 원안 대신 원전은 2기로 줄이고 태양광 발전을 2.4GW 확대하기로 했다. 국회입법조사처에 따르면 조정안대로 시뮬레이션할 경우 전기 발전 정산단가는 0.49원/㎾h 증가해 전체 정산액도 89조1232억원에서 89조4497억원으로 3260억원이 증가한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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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원전 기우는 정부…원전업계 깊은 한숨
━ 탈원전 2막, 원전업계 전전긍긍 경남 창원의 원전 기자재업체 영진테크윈은 탈원전 당시 일감이 끊긴 이후 최근에서야 공장 가동을 시작했다. 신수민 기자 “어쩔 수 없죠. 다시 원점이 됐으니까.” 지난달 29일 창원 의창구 북면에 있는 영진테크윈 공장에서 만난 강성현 대표는 “이제 좀 잘 될 거란 희망이 있었는데 정권이 바뀌니 다시 원위치”라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왜 이렇게 (원자력이) 정치에 좌지우지하게 된 건지 모르겠다”라고도 했다. 영진테크윈은 원자력 제어봉 구동장치와 원자로 냉각펌프 등 원자력발전소의 핵심 기능과 관련된 부품을 생산하는 업체다. 지난달 29일 찾은 공장은 저녁 늦게까지도 ‘위이잉~’하는 기계 소리로 가득했다. 겉으론 호황기 같았다. 강 대표는 그러나 “공장이 다시 가동된 건 두 달이 채 안 됐다”고 했다. 그는 “윤석열 정부 초 재개 승인 난 게(2022년 7월 신한울 3·4호기) 이제야 저희한테 일감이 온 것”이라며 “지난 3년간은 진짜 고역이었다”고 했다. 관련기사 조직 개편에 셋으로 쪼개진 원전 관련 부처…업계 “규제 더 심해질까 우려” 산업용 전기료 3년간 7회 ‘인상 폭탄’…기업 체납액 702억서 1288억으로 급증 보통 제작부터 납품까지 최소 3년이 걸리는데, 탈원전을 한 문재인 정부 때는 그나마 이전 물량으로 버텼으나 이후엔 일감 자체가 뚝 끊겼다는 것이다. 30억원대 매출은 8억원대로 고꾸라졌다고 한다. 지난해엔 15억원이었는데 대출을 갚으려 억대 설비를 하나둘 매각한 게 수입으로 잡히면서다. 강 대표는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다른 일을 알아보다 되레 사기를 당해 빚이 배로 불었다”며 “대부분 설비가 수억원대라 한 번 구입할 때 큰맘 먹고 사는데, 정권 때마다 손바닥 뒤집히듯 하니 감당이 되겠냐”고 한숨을 내쉬었다. 부산 강서구 녹산산단의 원전 주기기 업체인 경성정기 공장엔 정권이 바뀔 때 마다 오락가락하는 원전 정책 탓에 매출과 인력 모두 반 토막이 났다. 신수민 기자 원전 주기기 업체인 부산 녹산산단의 경성정기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인력도 매출도 반토막이 났다. “너무 힘들었다”며 힘겹게 입을 연 한태교 이사는 “최근에도 회사를 접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을 정도”라고 했다. 120억원대를 오가던 수주잔고는 탈원전 정책 이후 40억원대로 주저앉았고 기술자 절반 이상은 다른 업종으로 떠났다. 한 이사는 “기댈 곳은 원전밖에 없는데 정권 바뀔 때마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힘들다)”라며 “최근 분위기만 봐도 국내선 더는 (원전을) 건설하지 않겠다는 건데 많이 불안하다”고 했다. 실제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장관은 1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현 정부 임기 안에 재생에너지를 지금의 3배 수준으로 확대하겠다”면서 원전에 대해선 “안전성을 담보로 해서 (원전)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고만 했다. 그는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라 예정된 신규 원전 2기를 두고도 “국민 의견을 들어볼 것”이라고 했다. 백지화 가능성을 열어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김 장관은 “재생에너지를 확대하되 발전 비용을 낮춰 요금 인상 압박을 조절하겠다”고 했지만 전문가들은 회의적이다. ━ 정권따라 원전 정책 오락가락…창원 노즐회사 임원 “5년 전 악몽 살아나” 손양훈 인천대 교수는 “(재생에너지는) 에너지저장장치(ESS)를 달고 송전망을 건설하는 등 시스템 구축비까지 포함하면 가장 비싼 방법”이라며 “재생에너지를 대폭 늘리면 전기요금이 몇 배가 뛸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탈원전’은 원전 산업 종사업체에겐 다시 목도하기 싫은 악몽이다. 원전 기자재 등 원전에 들어가는 수백만 개의 부품 중 단일부품을 생산하는 소규모 하청업체들에겐 더하다. 정부가 이들의 명줄을 쥐고 있는 셈이다. 한국원자력산업협회가 지난해 7월 발간한 원자력산업실태조사에 따르면 원자력 산업 총매출액은 2016년 27조원에서 2018년 20조원으로 줄었다가 2022년에서야 25조원으로 반등했다. 그 사이 대표적 원전 대기업인 두산에너빌리티의 협력사 발주액도 2015년 1924억원에서 2021년 769억원으로 급감했다. ‘탈탈원전’의 윤석열 정부 때인 2022년에서야 400여 협력업체에 1541억원어치의 물량을 주문했다. 이게 원전 하청업체들에겐 ‘가뭄 끝 단비’였다. 하지만 2023년 한국원자력산업협회가 국내 원전업체 1037곳 대상으로 벌인 조사에서도 여전히 업체들은 ‘원전 경쟁력 제약 요인’으로 ‘안정적 수주물량 부족’(32.2%)을 압도적으로 많이 꼽았다. 완전히 ‘해갈’된 건 아니란 의미다. 현장 “국내선 더는 원전 안 지을 분위기” 이런 마당에 이재명 정부가 초기와 달리 ‘탈원전’ 메시지를 내자 원전 업체들은 전전긍긍이다. 원전 노즐을 생산하는 창원 산단 내 B업체 황모 전무는 형편을 설명하던 중 “대통령 당선 전후로 발언 분위기가 달라지지 않았냐”며 목소리가 높아졌다. 황씨는 “지금도 5년 전 악몽을 다시 꾼다”며 “당선 전엔 ‘원전 추진하겠다’ 해놓고 지금 와서 ‘원전 검토’ 의견을 낸다. 안 하겠단 소리 아니냐”라고 했다. 과거 문재인 정부 때처럼 ‘탈원전’을 내걸고 8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 원전 신규건설을 전면 백지화한 것이 재현되는 게 아니냐고 우려하고 있다. 당시 신규 원전 6기를 백지화하고 수명연장 가동 중이던 월성 1호기도 사실상 가동을 중단했고 노후원전 10기(8.5GW)는 설계 수명을 연장하지 않기로 했었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실제 이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엔 공약으로 ‘원전을 포함한 에너지믹스’를 강조해 원전 업계의 기대감을 높였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지난 5월 2050년까지 400GW로 늘리는 것을 목표로 삼은 행정명령 4건에 서명하면서 한국 원전 업계에도 특수를 누릴 거라는 장밋빛 전망이 팽배했다. 5월까지 2만5000~2만6000원대를 맴돌던 두산에너빌리티 주가는 5월 이후 급상승해 6월 7만원대까지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달 11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선 “원전 짓는 데 15년 걸린다” “건설 부지가 있고 안전성 담보되면 하는데, 제가 보기엔 현실성이 없다”며 당선 전과는 다른 말을 했다. 1일부터 원전 사업을 관할하는 기후에너지환경부의 김성환 장관도 곧이어 이전 정부에서 확정된 신규원전 건설계획에 대해 ‘공론화’를 내걸며 백지화할 가능성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최근 고리 2호기의 10년 가동연장 결정이 지연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게 업계 판단이다. 지난달 25일 고리 원전 2호기의 10년 가동연장 여부를 결정하려고 열린 원자력안전위원회에선 결론을 내지 못했고 10월 다시 열기로 했다. ‘안전성’이 재론됐다고 한다.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재가동 심의 안건이 올라갔다는 건 이미 허가 기준이 통과됐단 얘기인데 ‘안전성’을 문제 삼으면 정치적 판단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앞서 이 대통령은 대선후보 토론회에선 “우리의 현실이 있기 때문에 이미 지어진 원전들은 계속 잘 쓰자, 그리고 가동 연한이 지났더라도 안전성이 담보되면 더 쓴 것도 검토하자”고 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당분간 수출에 초점을 둘 수밖에 없을 것 같다”(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라는 의견이 있지만, 국내 사업성이 담보되지 않는데 수출이 되겠냐며 회의적 시각도 많다. 한태교 이사는 “수출로 판로를 연다 해도 자국 내에서 하지 않는 걸 수출한다고 하면 이해를 못 하지 않겠느냐”라며 “국내서 계속해서 기술 축적이 이뤄져야 수요가 생기고 해외에서도 수요가 생길 것”이라 했다. ‘탈원전’으로 매출이 급감한 경상남도 창원시 봉암공단의 원전 기자재업체는 업종을 전환하는 등 살 길을 모색하고 있다. 신수민 기자 이렇다 보니 진즉에 탈원전한 업체들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 마산봉암공단의 A업체 대표는 “내 판단이 맞았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원전 업체에 전력설비 표식 기기를 납품했던 이 업체는 탈원전 정책 당시 매출이 30% 넘게 주는 등 크게 고전한 후 업종 자체를 바꿨다. 그는 “5년마다 사업성이 바뀌는데 투자를 할 수 있겠냐, 사업을 접으란 얘기밖에 안 된다”며 씁쓸해했다. “에너지 정책 하루살이식으로 하면 안돼” A업체는 그나마 성공한 경우다. 업종 전환이 쉬운 건 아니어서다. 1990년대 사업을 시작한 신규원전 건설 보조기기 제조전문 C업체 관계자는 ‘울며 겨자 먹기’식 다각화라고 표현했다. 그는 “신규원전 건설 자체를 안 하니 가뜩이나 줄어든 인력으로 공사부터 유지·보수공사·용역까지 닥치는 대로 다 하고 있다”며 “사업 다각화가 더 힘든 게 원전은 전문성도 높아 해당 분야 전문인력을 구해야 하고, 인건비로 기업 이윤은 줄고 매출도 줄고 결국 은행의 빚 상환 독촉까지 이어지게 된다”고 말했다. 연명에 급급하니, 연구개발(R&D)은 꿈도 꾸지 못하는 상황이다. 원전 관계자는 “이대로 두면 한국 원전업계는 기술 경쟁력에서 뒤처져 자연 도태할 수도 있다”라며 “그 틈을 중국 등 해외 업체가 가져갈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튀르키예 정부는 2일 신규 원자력 발전소 건설 프로젝트를 발표하며, 협상 대상국으로 한국 외에도 캐나다·중국 등을 꼽았다. 원전 업계가 장기적으로 우려하는 건 또 있다. ‘탈원전→친원전→탈원전’의 오락가락 정책 여파로 전문·숙련 인력 양성과 수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한태교 이사는 “인력의 절반이 유출됐고 숙련인력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라며 “정책 여파로 작업을 쉬면 경력 단절이 되고 기술이 축소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비단 사업체만이 아니라 산업 경쟁력 자체도 떨어지고 있다는 게 업계의 걱정”이라고 했다. 강성현 대표도 “(탈원전) 당시 30% 인력이 감축됐는데 이후 매출이 없으니 신규 인력 충원은 꿈도 못 꿨다”며 “최소 연차가 5년 차인데 숙련인력이라 하긴 어렵다”고 했다. 실제 원자력 공급 산업체 인력은 2016년 2만2000명으로 최대치를 찍은 직후 2017년부터 줄어 2021년 1만8000명으로 감소했다. 양승훈 교수는 “정권을 떠나 원전 산업에 대한 중장기적 로드맵이 부재한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정범진 교수도 “전문성과 정밀함이 필요한 에너지 정책은 하루살이식으로 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외국은 원전으로 유턴하고 있다. 중국은 최근 첨단 산업과 제조업의 필수인 전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현재 58기인 원전을 2035년까지 최대 180기로 약 4배가량 늘리기로 하고 흔들림 없이 추진 중이다. 블룸버그통신도 29일 보고서를 통해 “미국 원자력 산업이 부활을 준비하고 있다”며 미국의 원자력 발전 용량이 2050년까지 63%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현재 수십 개 기업이 SMR 설계를 개발하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창원=신수민 기자 shin.su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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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명도 살지 않는 읍·면 400곳…'기후안전마을' 같은 미래형 모델 확산시켜야
━ 농가인구 200만명 붕괴 직전, 급페달 밟는 농촌 붕괴 1403곳. 전국에 위치한 읍·면의 숫자다. 이 가운데 거주 인구 상위 10%에 전체 농촌 인구의 절반가량이 모여 산다. 반면 하위 10%에 해당하는 읍·면에는 고작 1.6%만 거주한다. 2000명 미만의 읍·면이 400곳을 넘어서고 이곳의 평균 고령화율은 50%에 달한다. 농촌 인구 불균형이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주는 숫자다. 최근 우리 사회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과제 중 하나는 ‘농촌 소멸’이다. 총인구 감소와 저출생·고령화, 청년층의 도시 집중이 맞물리면서 농촌 인구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이는 단순히 사람 수의 문제가 아니다. 인구가 줄고 고령자가 늘면 상점·학교·의료기관 등 기초 서비스가 하나둘 사라진다. 수도나 도로 같은 기반 시설 투자가 중단되면서 공간은 빠르게 노후화되고 청년 부족은 지역 경제를 마비시킨다. 결국 청년층은 더 빠르게 도시로 떠나고 농촌은 최소한의 기능만 간신히 유지하는 공간으로 전락한다. 공동체 기반이 약화되면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역량도 사라지고 전통문화 계승이나 농촌 경관·농업유산 관리도 멈추게 된다. 이처럼 ‘농촌다움’이 사라지는 순간 국민은 농촌을 단순히 ‘시골’로만 인식하게 되고 국토 전체의 잠재력이 함께 소멸하게 된다. 농촌을 경험하지 못한 우리 자식 세대들이 자라나면 농촌은 글자 그대로 ‘소멸’할 수 있다. 관련기사 고추 수확 한창 농가엔 외국인 일손만…“불법체류자라도 데려다 쓸 판” 리모델링 빈집으로, 강진 품에 안긴 도시인들 이 같은 일은 국내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파이낸셜타임즈(FT)에 따르면 유럽연합(EU)에선 2014년 이후 10년간 주요 농촌 거주 인구가 약 800만 명(8.3%) 줄었다. 이에 대해 선진국들은 정보통신기술(ICT)과 스마트 기술을 적극 활용해 생활서비스를 혁신하고 주민 협력 체계를 지원하며 농촌을 국가의 미래 자산으로 바라보고 있다. 반면 한국의 농촌 정책은 오랫동안 도시 대비 열악한 여건을 보완하는 ‘시혜적’ 접근에 머물렀다. 이젠 우리도 농촌을 ‘정책 수혜자’가 아니라 국가의 전략적 투자 대상으로 재정립해야 한다. 농촌은 국토의 89%를 차지하고 있으며 식량안보·생태자원·여가공간 등 국가적 가치를 담고 있다. 그런 만큼 농촌을 새로운 성장축으로 육성하는 전략의 전환이 필요할 때다. 무엇보다 농촌 자원을 활용한 차별화 전략이 필요하다. 지역 특산물과 문화를 기반으로 미식·관광 벨트를 조성하고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기후안전마을·고령친화마을·에너지자립마을 등 미래형 모델을 확산해야 한다. 농촌은 인구 비중이 18.8%에 불과하지만 전체 사업체의 22.5%가 위치한 공간이기도 하다. 돌봄·청소·수리 같은 생활 편의 서비스 창업을 지원하고 청년들이 지역에서 일할 수 있는 창업·금융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법과 제도의 정비도 절실하다. 지금의 제도와 법률은 인구가 증가하고 사업이 확장하던 시기에 맞춰 설계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인구 감소와 농촌 소멸 시대에는 기존 제도가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농촌 재생 패러다임에 맞게 제도와 법률을 전면 점검하고 필요한 경우 특정 지역에 인적·물적 자원이 집중될 수 있도록 과감한 규제혁신도 뒤따라야 한다. 농촌은 단순히 소멸 위기에 놓인 주변부가 아니다. 인구 감소, 고령화, 빈집과 유휴시설, 기후위기와 재해 등 국가적 난제를 농촌은 이미 앞서 경험하고 있다. 농촌의 현재는 5년 뒤 한국의 고령화율, 10년 뒤 청년 인구 구조를 미리 보여주는 ‘거울’이다. 따라서 농촌의 변화를 연구하고 다양한 정책 실험을 통해 대안을 모색하는 건 곧 한국의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다. 농촌을 지키는 일은 특정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내일을 지키는 국가적 과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이철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촌정책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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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 수확 한창 농가엔 외국인 일손만…"불법체류자라도 데려다 쓸 판"
━ 농가인구 200만명 붕괴 직전, 급페달 밟는 농촌 붕괴 지난 17일 전북 고창군 농가에서 외국인 근로자들이 고추를 분류하고 있다. 최기웅 기자 “지금은 바쁘니까 쫌 이따가 이따가….” 가을비가 내린 지난 17일 전북 고창군 대산면. 한 농가에 외국인 근로자 10여 명이 모여들었다. 논밭을 둘러보다 잠시 비를 피해 비닐하우스를 찾은 외국인 근로자들 사이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던 응우엔 티하(46)는 기자가 다가가자 손사래를 쳤다. “수확한 고추를 분류하고 배추 모종을 옮기는 게 오늘의 임무인데 지금은 동료들과 손을 맞춰야 하니 일을 마친 뒤에 얘기하자”면서다. 잠시 뒤 휴식시간에 마주한 그는 “베트남에 가족을 두고 홀로 한국에 왔다”며 “기회가 되면 내년에도 계절근로자로 이곳에 와서 일하며 세 딸 교육비를 마련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이젠 외국인 근로자 없이는 농사 못 지어요.” 이들 외국인 근로자를 고용한 농가 소유주인 안찬우(53)씨는 “일손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해 추수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이 태산”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벼농사와 배추·고추 등 밭농사를 함께 짓고 있다는 안씨는 “국내 인력만으로 한 해 농사를 감당하는 건 이미 옛말이 된 지 오래”라며 “지금은 고추 수확기라 그나마 여유가 좀 있지만 조금 있으면 벼를 수확해야 하는 시기여서 일손을 확보하는 게 무엇보다 시급한 상황”이라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올해 외국인 근로자 13명을 고용했다는 안씨는 “내년엔 20명을 신청할 계획인데 그만큼 배정받을 수 있을지 걱정”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지자체, 전용 기숙사 마련해 영입 공들여 안씨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이날 오후 고창군 고창읍내에서 만난 김창환(47)씨는 일손을 구하러 고창에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김씨는 “파종이나 추수 시기를 놓치면 한 해 농사를 망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요즘 대부분의 농가들이 일손 구하기에 혈안이 돼있다”고 귀띔했다. 그는 “일부 농가에선 불법 외국인 근로자라도 쓸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일손이 급하다”며 “그나마 고창엔 외국인 근로자가 많이 들어왔다길래 혹시 남는 일손이 없나 싶어 와봤는데 역시나였다”고 허탈해했다. 고창군은 외국인 근로자 전용 기숙사를 마련하는 등 농가 일손을 보탤 외국인 근로자 도입에 공을 들여 왔다. 올해도 전국에서 가장 많은 3200명의 외국인 근로자가 입국해 일하고 있는데, 이 정도 인력 규모는 고창군의 수요를 충당하기에도 빠듯하다는 게 현지 농민들의 공통된 전언이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저출산과 고령화, 수도권 인구 집중이 불러온 ‘농촌 소멸 시대’. 농가 인구 200만 명 붕괴가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가을철 농촌에선 일손 구하기에 비상이 걸렸다. 통계청에 따르면 1980년 1082만 명에 달하던 농가 인구는 지난해 말 200만4000명까지 급감했다. 이런 추세라면 올해는 200만 명 밑으로 떨어질 게 확실시된다. 가구 수 기준으로는 2023년(99만9000가구)에 이미 100만 가구가 무너졌고 지난해 말에는 97만4000가구까지 줄어들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앞으로 8년쯤 뒤엔 농사지을 사람이 사실상 없는 면 단위 지역이 나올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관련기사 2000명도 살지 않는 읍·면 400곳…‘기후안전마을’ 같은 미래형 모델 확산시켜야 리모델링 빈집으로, 강진 품에 안긴 도시인들 실제로 지속적인 인구 감소 추세 속에서 인력 부족은 농촌의 가장 큰 고민거리로 떠올랐다. 지난해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조사에서도 농업인들이 지목한 가장 큰 위협 요소로 일손 부족(49.5%)이 절반을 차지했다. 이를 해소할 방안으로는 외국인 인력 활용(26.4%)이 첫손에 꼽혔다. 이미 작물 재배 농가의 64.2%가 외국인 근로자를 고용하고 있을 정도로 농민들 사이에선 외국인 근로자가 일상이 됐지만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란 얘기다. 고창군 외국인 계절근로자 관리센터. 최기웅 기자 이에 정부와 전국 지자체들은 계절근로(E8) 비자로 외국인 근로자들을 초청해 농가에 인력을 공급하고 있다. 계절근로 비자는 외국인 근로자가 농가와 계약해 농번기에 국내에 체류하며 일한 뒤 농한기엔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한 제도다. 외국인 근로자는 고용 농가의 재계약 요청이나 추천을 받으면 이듬해 다시 E8 비자를 받을 수 있다. 지난해 E8 비자로 한국을 찾은 외국인 근로자는 6만7778명에 달한다. 정부도 농촌 현장의 요구를 적극 수용해 올해부터 별도의 연장 신청 없이 국내 체류 기간을 최장 8개월로 늘려주고 E8 비자 대상자도 전년 대비 41.2% 늘어난 9만5700명을 배정하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선 상태다. 그러나 농업 현장에선 단순히 외국인 근로자 규모를 늘리는 것만으론 인력 부족 문제가 해소되기 어렵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고 있다. 당장 농가 입장에선 주로 동남아시아 출신인 외국인 근로자들의 농업 숙련도를 일정 수준 국내 인력을 대체할 수 있을 정도까지 높이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외국인 근로자들이 한국 생활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적응할 만하면 계절근로 비자 기간이 끝나 본국으로 되돌아가는 상황도 반복되기 일쑤다. 3년째 외국인 계절근로자로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는 캄보디아 출신 쁘록 나완(33)도 “한국에 온 첫해엔 캄보디아에선 본 적이 없는 기계로 농사를 짓는 모습에 당황하기도 했고 어려움도 많았는데, 다행히 3년간 경험하다 보니 한국식 농법에 익숙해지면서 지금은 한결 편해졌다”며 “앞으로 본국으로 돌아가면 이 농법을 적극 적용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외국인 근로자들이 전용 기숙사에서 통역관들과 대화하고 있다. 최기웅 기자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자체들도 자체 예산으로 현지인 통역관을 채용하는 등 외국인 근로자 대책 마련에 나섰다. 올해 초부터 고창군에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들의 통역관으로 근무 중인 레티 이엔리(35)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도움을 요청하는 문제의 대부분은 문화적 차이에 따른 것”이라며 “사소한 일이라도 통역을 통해 서로의 입장을 정확히 파악하다 보면 오해도 줄고 만족도 또한 높아지는 모습”이라고 전했다. 농가 소득 늘려 ‘돌아오는 농촌’ 만들어야 문제는 농촌 소멸이 갈수록 가속화하는 현실 속에서 외국인 근로자 도입은 미봉책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청년층의 지속적인 유출과 남은 인력의 고령화라는 양대 난제에 직면한 농촌의 붕괴를 막으려면 보다 근본적인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실제로 지난해 국내 농가 인구의 절반 이상(50.8%)은 70세 이상 고령층인 반면 50세 미만은 16.3%에 불과했다. 농업 종사자 열 명 중 8~9명은 50세 이상인 게 오늘날 한국 농촌의 현실인 셈이다. 한때 인기를 모았던 귀농도 점차 시들해지는 추세다. 중장년층도 도시 생활을 선호하는 현상이 뚜렷해지면서 “나이 들면 고향으로 돌아가 볼까”라는 인식도 급격히 줄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다 보니 매년 1만 가구 이상 농촌으로 향하던 귀농 인구도 지난해엔 8243가구로 전년에 비해 20% 이상 줄면서 귀농 인구 1만 명 시대를 마감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농촌 소멸에 제동을 걸려면 농업 소득뿐 아니라 농업 외 소득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농가 평균 소득은 5060만원으로 도시근로자(2인 가구 기준) 평균인 6576만원보다도 1500만원 이상 적은데, 그중에서도 농업 소득은 958만원에 불과하고 숙박·음식점 등 관광·레저 소득은 2014만원으로 두 배 이상 많았던 실정이다. 생산성 향상 등으로 ‘농업’을 살리는 방안과 농업 외 소득 증진을 통해 ‘농촌’을 살리는 방안을 함께 강구해야 한다는 제언이 잇따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명기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농업 소득이 정체된 가운데 국내 농가의 75%는 농업 소득만으론 생활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도시에도 다양한 산업이 존재하는 것처럼 농촌에서도 농사를 짓지 않고도 소득 창출이 가능해져야 농촌 경제도 되살아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용렬 농촌경제연구원 농업관측센터장은 “지금의 농촌은 지역 공동화 위기에 처한 지방 소도시들의 10년 뒤 미래 모습일 수 있다”며 “정부와 지자체도 보다 체계적인 정책 지원을 통해 더 늦기 전에 ‘다시 찾는 농촌’을 모색해야 할 때”라고 조언했다. 고창=황건강 기자 hwang.kun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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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델링 빈집으로, 강진 품에 안긴 도시인들
━ 농가인구 200만명 붕괴 직전, 급페달 밟는 농촌 붕괴 김덕영씨 부부가 전남 강진군 자택 마당에서 자녀들과 휴식을 취하고 있다. 황건강 기자 “내년 2월 결혼합니다.” 지난 18일 전남 강진군 병영시장에 위치한 파스타 가게. 서울 토박이인 임고은(36)씨가 미소를 지으며 주방에 서 있는 한 남성을 바라봤다. 그와 눈이 마주친 예비 신랑 박민재(30)씨는 부산에서 나고 자라 직장에 다니던 ‘부산 사나이’. 30대 절반이 결혼하지 않는 시대에 400여㎞ 떨어진 서로 다른 도시에서 나고 자란 젊은 남녀가 연고가 전혀 없는 전남 강진에 터를 잡고 가족이 되기로 한 계기는 강진 특산물인 여주였다. 2년 전 서울에서 청년 창업을 준비 중이던 임씨는 쓴 오이로 불리는 여주로 피클을 만들 생각에 강진을 찾았다. 생애 처음 와본 곳이지만 푸르른 자연이 이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마침 강진군청과 청년협동조합 ‘편들’에서 진행한 청년 홈스테이에 참가하게 되면서 그의 강진살이가 시작됐다. 홈스테이를 마친 뒤에도 강진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던 그는 결국 귀촌을 결심했다. 그러자 임씨와 사귀고 있던 남자친구 박씨도 부산의 회사를 그만두고 흔쾌히 강진행에 동참했다. 임씨는 “오래 살려고 올해 자비로 집도 구입했다. 서울처럼 집값이 비싸지 않아 자가 마련이 어렵지 않았다”며 활짝 웃었다. 관련기사 고추 수확 한창 농가엔 외국인 일손만…“불법체류자라도 데려다 쓸 판” 2000명도 살지 않는 읍·면 400곳…‘기후안전마을’ 같은 미래형 모델 확산시켜야 국내 인구 절반이 수도권에 거주하는 시대. 농촌 소멸 위기 속에 귀촌을 선택한 3040세대는 이들만이 아니다. 올여름 전남 강진군 옴천면의 한 마을로 이사를 마친 직장인 김덕영(42)씨도 강진의 자연환경에 반해 귀촌을 선택했다. 1남 4녀의 아버지인 김씨는 도시에선 다섯 자녀가 마음껏 뛰어놀긴커녕 층간소음을 걱정해야 하는 환경이 늘 마음에 걸렸다. 결국 그는 서울 회사엔 격주로 출근하는 대신 급여를 낮추기로 하고 지난 8월 말 귀촌했다. 김씨는 “돈은 나중에도 벌 수 있지만 아이들과 뛰놀던 추억을 쌓을 시간은 지금뿐”이라며 “아이들이 맑은 공기를 마시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잘한 결정이다 싶다”며 만족해했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이들처럼 농촌살이를 선택한 귀촌 가구는 지난해 31만8658가구 42만2789명에 달한다. 각각 전년 대비 4.0%, 5.7% 늘어난 규모다. 같은 기간 귀농 인구가 20% 이상 줄어든 것과는 상반된 모습이다. 이들 대부분은 ‘농사’를 짓기 위해서가 아니라 ‘농촌’에 살기 위해 귀촌을 선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농림축산식품부 조사에서도 귀촌을 선택한 이유로 자연환경(19.3%)과 정서적으로 여유 있는 삶(19.0%)이 첫손에 꼽혔다. 더 이상 ‘농촌=농업’으로 여기지 않는 사회적 인식의 변화가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귀촌을 결심한 이들이 마주하는 현실적 관문도 만만찮다. 당장 주거 문제가 넘어야 할 산이다. 농촌에 연고가 있는 경우(74.3%)가 대다수인 귀농인들과 달리 귀촌인의 절반(48.9%)은 농촌에 연고가 없는 도시 출신이다 보니 살 집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반면 소멸 위기에 처한 농촌 마을에선 갈수록 늘어나는 빈집이 골칫덩이다. 방치된 빈집은 안전 문제로 이어질 우려도 크다. 그런 가운데 강진군은 이런 빈집을 리모델링한 뒤 월 1만원만 받고 귀촌인들에게 제공하는 ‘강진품애(愛)’ 사업을 도입해 호평을 받았다. 경쟁률이 22대 1에 달할 정도로 높은 관심을 모은 이 사업을 통해 지난 2년간 78가구 218명이 귀촌해 강진에 정착했다. 인구 3만여 명인 강진군의 이 같은 성공 사례는 전국 농촌 지자체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됐고 정부 우수 정책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일곱 식구가 함께 강진으로 이주한 김씨도 귀촌 결심 후 살 집을 마련하는 게 첫 번째 과제였다. 당장 그의 발목을 잡은 건 나이였다. 지자체들이 귀촌을 결심한 이들에게 각종 지원과 혜택을 제공하고 있지만 정작 40대는 지원 자격에서 제외돼 있는 경우가 상당수였다. 김씨는 “다행히 강진군에선 나이 제한을 두고 있지 않아 강진품애 사업에 지원해 귀촌할 수 있었다”며 “농촌의 고령화 문제로 젊은이들이 더 필요한 게 현실이겠지만 농촌에서 자녀를 키우고 싶어 하는 40대에게도 문턱을 낮추면 어린 미래 세대가 함께 귀촌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주거 문제를 해결한 귀촌인들의 두 번째 고민은 직업 문제였다. 농사를 지어도 수익이 나지 않는다는 경험담 속에 농촌에서 농사짓기를 망설이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러나 고속철도와 재택근무, 온라인 상거래 등의 발달로 지역 간 거리가 크게 좁아지면서 귀촌인들의 고민도 한결 가벼워졌다. 임씨는 “요즘 귀촌을 결심하는 사람들 중에 농사로 돈을 벌어 생활하겠다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라며 “인터넷 시대를 맞아 농촌에서도 얼마든지 생업을 유지하며 삶의 질도 높일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고 있다”고 전했다. 박준기 한국농업경제학회장(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농촌 공동화를 막기 위해선 농사를 짓지 않더라도 농촌에 사람들이 정착할 수 있는 제반 환경을 마련하는 게 급선무”라며 “정부와 지자체도 이를 위한 실효성 있는 정책 개발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강진=황건강 기자 hwang.kun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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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취적인 사람 필요, 샌님은 안 돼"
━ 정주영 110주년…미공개 회의록으로 본 ‘위기극복 리더십’ “1984년은 현대가 탄생한 이후 ‘가장 후퇴한 해’가 된 것이다.” 그해 12월 17일, 여느 때라면 연말의 들뜬 분위기가 감돌았을 이날 서울 계동 현대그룹 대회의실의 분위기는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그룹 각 부문 사장들의 시선은 모두 정주영 회장의 입을 향해 있었다. 1984년 현대그룹의 매출은 8조1714억원, 전년 대비 14.2%가 증가했다. 그해 한국의 실질 성장률(10.6%)보다 높았다. 하지만 순이익은 줄었다. 전년 대비 21.3%가 하락한 978억원이었다. 정 회장은 “현대는 창립 이래 고용·매출 모두 평균 35%씩 성장해 왔는데 금년에 많이 후퇴했다”고 했다. 1984~1985년은 70년대 말 오일쇼크를 딛고 일어섰던 한국 기업들에 다시 찾아온 위기의 순간이었다. 미국 등 주요국의 경기 침체로 건설·조선 등의 해외 수주가 막히기 시작했다. 금리는 주요 선진국보다 2배 가까이 높았다. 머지않아 ‘3저(低) 호황’이 왔지만 당시엔 예견할 수 없었다. 정주영 현대 회장이 매주 주재한 사장단회의 중 1984년 10월 1일자 속기록. 신수민 기자 중앙SUNDAY는 당시 정 회장이 매주 사장단회의를 열어 위기극복 방안을 논의한 회의록을 입수, 5회에 걸쳐 소개한다. 정 회장 탄생 110주년(11월 25일)을 맞아 11월 말 그가 주재했던 비공개 사장단회의를 비롯해 내부 훈시, 각종 연설문과 특강 등을 엮은 책이 한·영·중어본으로 나오는데 그 중 일부다. A4용지 4200장 분량이다.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던 사장단 회의록엔 격랑의 시기를 헤쳐간 기업인 정주영의 혜안과 리더십이 두드러진다. 오늘날에도 유효한 진단과 해법이다. ━ “일류대 필요 없다”…학벌 장막 걷고 인재 키운 정주영 1981년 4월 서울 종로구 계동 사옥 집무실에서 사원들과 대화하는 정주영 회장. 정 회장은 사우지 인터뷰 등을 통해 사원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했다. [사진 김명호 교수의 ‘건설자 정주영’] “가장 큰 책임은 나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1984년 12월 17일 정 회장은 자신을 먼저 질책했다. “체육회 회장이니, 전경련 회장이니 하면서, 낮이든 저녁이든 손님 대접하고 하는 시간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럴 시간에 현대를 더 챙겼어야 하는데 말이다. 나는 될 수 있으면 공직에서 손을 떼고, 국내외 현장을 예전처럼 다시 둘러보려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가 “이런 상황은 금방 고칠 수 있다”며 강조한 건 ‘인사’였다. 그는 “예전 사람보다 약간 부족하더라도 새로운 사람이 더 좋은 자세를 갖고 있다면 그 부족한 부분은 충분히 메꿀 수 있다고 본다”고 했다. 1983년 여름 하계수련회에 참석한 정주영 회장. 정 회장은 이런 행사에서 직원들과 노래하거나 씨름 등을 하며 어울리는 분위기를 즐겼다. [사진 김명호 교수의 ‘건설자 정주영’] 실제 그는 유독 ‘사람’을 강조하곤 했다. “우리가 어제, 오늘 뿐만 아니라 수십 년을 선두에 서 있고, 매상에 있든 기술에 있든 모든 분야의 실적에 있든 우리나라에서는 다른 업체가 뒤따를 수 없는 위치에 서 있다. 우리 모든 사원들이 질에 있어서든 수에 있어서든 다른 회사와 추종을 불허하는 인재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그런 우위적 입장에 서 있다.”(1980년 1월 16일 고졸 사원 특강) “급성장, 나이·경력보다 우수한 인재에 달려” ‘허리띠 졸라매기’를 강조하며 인적 조정을 예고한 1985년에도 연구 인력만큼은 증원을 지시했다. 그는 1984년 12월 10일 “금년은 창립 이래 가장 부진한 해”라며 그 이유로 “국제 경쟁력을 위한 연구개발 투자 비중이 매우 낮다”고 했다. 경쟁 기업과 비교하며 대놓고 지적하기도 했다. 1985년 1월 14일의 발언인데 이랬다. “앞으로는 삼성, 그 다음 럭키금성(LG)이 가장 크게 발전할 것으로 보이네. 두 회사는 개발 투자에 제일 적극적이야. 대우는 눈에 띄는 개발 투자가 없으니 미지수인데, 삼성하고 금성은 고도 기술 산업으로 발전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 우리가 이걸 중요시하면 얼마든지 개발 투자할 수 있을텐데, 각 회사 경영자들이 개발 투자에 너무 소홀한 감이 있다. 수출 산업 중심으로 조선이면 조선, 자동차면 자동차, 반도체면 반도체, 각 분야에서 세계 최고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는 시작이었다. 정 회장은 이후 사장단회의 내내 연구인력 확보를 독려했다. “대외 여건이 나쁘다고 해서 우리가 할 수 없다면, 결국 우리 회사 전체가 문을 닫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그것을 극복하려면 우수한 인재가 필요하다. 각 사장들은 기술 연구 투자 및 연구 인력 확보는 단시일 내에 반드시 실행해 달라.”(1985년 3월 11일) “성장은 결국 시설과 사람에 달렸으니, 더 성장하려면 시설이 부족한지 사람이 부족한지 살펴봐라. 이제 관리만으로 원가 절감이 어렵고, 어떻게든 시설을 경쟁력 있게 개량하고 대체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기술 연구 요원 보강에서 아주 뒤떨어져 있다.”(1987년 6월 17일) 그에게 연구개발이 특정 분야에 한정되는 일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우리에게 연구가 필요 없는 분야는 없다. 선박은 독자적인 대형 연구소를 통해 연구 중이며, 자동차와 건설 부문 역시 마찬가지”라며 “건설 부문에서도 새로운 공법을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연구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시공 현장에서 경험을 쌓은 사람을 활용하고, 설령 실패하더라도 전 세계적으로 방대한 기술자 모집에 투자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그가 특히 중시한 덕목은 진취성과 창의성이었다. 회의록 곳곳에 그의 직설적인 발언이 녹아있다. “중역이 발전하지 못하면 그 밑은 절대로 발전하지 못한다. 윗사람이 진취적이면 그 영향을 받아서 아랫사람들도 진취적으로 일할 수 있다. 진취적인 생각조차 없는 사람이 위에 앉아 있으면, 그 밑에 있는 사람이 아무리 애써도 밀려서 발전할 수가 없다.”(1984년 10월 15일) 1984년 10월 1일 사장단회의 속기록 표지와 1984년 신입사원 하계수련회 정 회장 특강 원고. 신수민 기자 나흘 전에도 “소위 이사니 상무니 하는 사람들이 진취성이 없어. 내가 전화해서 뭐라고 하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말만 반복한다. 밤낮 최선만 다하면 뭐하냐”라던 정 회장이다. 그는 ‘샌님’은 안 된다라고도 했다. 1984년 10월 1일의 발언인데 노골적이다. “부사장은 자기 일이 많을 테니 내가 현장 나갈 때는 부사장 대신 똑똑한 이사를 한 명 붙여달라. 샌님은 절대 안 된다. 매일 야단만 맞고 아무 일도 못해. (…) 나는 일할 때 진취적인 사람 좋아한다. 예전 이 빌딩 골조를 지을 때 있던 그 사람을 다시 데려올 수 있다면 꼭 불러왔으면 좋겠다. 내가 새벽에 나가면 그 사람은 항상 현상에 먼저 나와 있었고 그래서 현장도 순조롭게 잘 돌아갔다. 괜히 내보내고 나중에 샌님 같은 사람 데리고 와서 마무리하니까 결국엔 마감 때 난리났지 않나.” “사무직 능률 검토 왜 안 하나” 타성 경계 자동차 부문을 얘기하며 “지금처럼 젊고 무경험자를 책임자로 기용하는 것이 좋다”고도 했다. 그는 “급성장은 나이와 경력보다 우수한 인재를 얼마나 발굴하고 기용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역할도 ‘제어’ 정도로 이해했다. “현대차가 진취적으로 해나갈 때 내가 브레이크를 거는 식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회의 하면 좋겠다”며 “윗사람은 제재하는 건 쉽지만 밑에 활기를 불어넣는 건 좀 어렵다”고 했다. 사람 강조는 사내 교육 강조로도 이어졌다. 사장단회의에서 빈번하게 등장한 단어 중 하나가 ‘교육’이었다. “회사마다 특성이 있으니 거기에 맞춰서 인력 교육 계획을 잘 좀 세웠으면 좋겠다. 그리고 회사마다 계층별로 어떻게 교육을 시키느냐 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1985년 1월 7일) “자리가 올라갈수록 전문 지식을 배양하는 데 너무 소홀하다. 과장, 차장 이상만 되면 실무를 전혀 하지 않는다. 일은 밑에서 하고 위에서는 결재만 한다는 식의 사고가 회사의 발전을 저해한다고 생각한다.”(1985년 1월 12일) 이는 임원에 대한 질타로도, 사무직에 대한 관리 강조로도 나타나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신생국이어서 성숙한 인재가 부족해 젊은 나이에 차장, 부장, 중역으로 승진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들이 권위 의식에 사로잡혀 일을 직접 하지 않고 사무실에 앉아서 결재만 하려고 드는데, 그런 행동은 바로 자기 발전에 종지부를 찍는 것과 마찬가지다.”(1987년 11월 2일 사장단 회의) “사장이나 부장들을 보면, 그 많은 대졸 사원이 쉬는 것은 신경 안 쓰고, 현장 공원들 쉬는 것만 신경 쓰고 있다. 공장 근로자 생산성은 많이 따지는데,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 능률은 거의 검토 안 하고 있다. 사무실 직원들은 공장 직원들보다 훨씬 더 비용이 많이 들어가고 그들이 일하는 사무실은 비싼 땅에 비싼 건물을 짓는다. 사실 더 고급이고 비용도 많이 드는데 지금은 사실상 방치된 상태다.”(1984년 11월 26일) 대신 현장은 강조했다. ‘고졸 신입사원 특강’(1980년 1월 16일)을 하곤 했던 그는 이런 말을 했다. “현대는 일류 대학을 나와야만 행세하는 회사가 아니다. 대학을 졸업하지 않아도 고교 졸업 후 4년 동안 자기 위치에서 누구나 진급 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지고, 거기에 합격하면 대학 출신 자격을 주기로 되어 있다. 이런 제도를 도입한 회사는 현대밖에 없다.” ■ “홀로 가정 지키느라 수고 많으시다”…파견 근로자 부인까지 유럽여행 보상 「 정주영 회장은 현대건설이 해외 수주로 외화를 끌어모으던 1970~80년대 해외 파견된 근로자들의 부인들을 각별히 챙겼다. 1981년 12월 27일에도 이들을 위한 연말 만찬 자리에서 “여러분들의 바깥어른들이 오랫동안 나가서 근무하는 동안 가정을 지키고, 부모를 봉양하고, 자식들을 키우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으시냐”며 위로했다. 그는 “중동에서 고생하는 분들에게는 2년 만기로 일을 하고 돌아올 때 부인과 함께 구라파(유럽) 쪽으로 돌아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이 있었는데 대단히 진취적이고 좋은 생각”이라며 “같이 여행을 해도 비행기 표만 더 들지, 호텔 방값은 똑같다. 낭비라기보다는 생활의 향상 내지는 우리에게 추억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또 부인들에게 강조한 것이 저축이다. 정기적으로 계열사 저축액을 체크했다. 1984년 12월 17일 사장단회의에서도 계열사별 저축액이 보고됐다. 그는 “만기 저축 해약금이 635억6800만원인데, 이중 계모임 6억6500만원”이라는 보고를 받자 즉각 지시를 내렸다. 정 회장은 “(계모임이) 현대건설이 가장 높다. 중동에 나가 있는 부인들이 계를 트는 모양”이라며 “위험하다는 걸 교육하고. 계를 하지 말고 대신에 어떤 저축이 낫다든지, 그 외 다양한 상품을 소개하는 자료를 만들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부인 만찬회에서도 “개개인의 생활 안정뿐 아니라 국가발전에도 크게 기여하니 저축에 힘써달라”고 당부하는 걸 잊지 않았다. 당시 국가 차원에서 외채 아닌 자체 투자 재원을 조달하자며 저축 드라이브가 한창이었다. 정기예금 금리도 높아서 10%대였다. 」 유성운·신수민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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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정부 5년간 늘어날 나랏빚 500조…역대 정부와 견줘도 이례적 빠른 증가 속도
━ 이재명 정부 ‘확장 재정’ 지난달 28일 구윤철 경제부총리가 정부세종청사에서 ‘2026년도 예산안’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재명 정부 들어 ‘채무 시계’는 한층 빨라졌다. 매년 ‘슈퍼 예산’을 편성한 여파로 집권 5년간(2025~2029년) 늘어날 나랏빚이 500조원을 넘어설 전망이다. 김대중 정부 이후 역대 정부 평균 증가액(약 198조원)의 2.6배,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특수 상황 속에서 채무가 급증했던 문재인 정부(407조2000억원)보다도 100조원 이상 많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급격한 위기 상황이 아님에도 재정 확대의 가속 페달을 밟는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이달 국회에 제출된 ‘2026년 예산안’과 ‘2025~2029년 국가재정운용계획’에 따르면, 내년 총지출은 728조원으로 올해보다 55조원 늘어난다. 버는 돈보다 쓰는 돈이 많아 나라 곳간은 빠르게 비어간다. 실질적인 재정 건전성을 가늠할 수 있는 관리재정수지는 내년 109조원 적자가 예상되며, 이후에도 계획대로라면 해마다 110조~120조원대 적자가 이어진다. 그 결과 국가채무는 2029년까지 515조원 불어날 전망이다. 김우철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는 “경기 회복이 시급하다고 해도 매년 100조원 넘는 채무 증가를 공개적으로 천명한 정부는 전례가 없다”고 우려했다. 역대 정부와 견줘도 빚의 증가 속도는 이례적으로 빠르다. 보수 정권으로 분류되는 이명박·박근혜·윤석열 정부와의 대비는 더욱 선명하다. 글로벌 금융위기 속 이명박 정부(2008~2013년)에서는 국가채무가 180조8000억원, 기초연금을 도입한 박근혜 정부(2013~2017년)에서도 170조4000억원 증가에 그쳤다. 직전 윤석열 정부(2022~2025년)와도 대조적이다. 당시 국가채무는 205조9000억원 늘었지만, 건전 재정을 내세운 기조와 부동산 시장 진정 효과로 GDP 대비 비율은 오히려 1.3%포인트 낮아졌다. 김대중 정부 이후 집권 기간 국가채무 비율이 줄어든 사례는 이때가 유일하다. 관련기사 “내수 회복, 금융 부실 차단…한시적 확장재정 당연” “교부금·기초연금 등 ‘재정 수술’ 미루면 안 돼” 역대 보수 정부가 비교적 재정의 고삐를 조였다면, 진보 정부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현 정부와 비슷한 확장 재정 정책을 폈던 문재인 정부는 첫해 660조2000억원이던 국가채무를 임기 말 1067조4000억원까지 끌어올렸다. GDP 대비 채무 비율은 11.8%포인트나 뛰었다. 이러한 ‘재정의 적극적 역할’이 성장률 반등으로 직결된 것도 아니다. 문재인 정부의 평균 성장률은 2.3%로, 김대중(5.6%)·노무현(4.7%)·이명박(3.3%)·박근혜(3%) 등 이전 정부에 모두 못 미쳤다. 코로나 충격으로 지출 확대가 불가피했던 2020~2021년과 달리, 2022년 진정 국면에서도 추경을 거듭하며 지출 확대를 상시화했다는 비판도 뒤따랐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코로나라는 특수 상황과 저출산·고령화로 저성장이 굳어진 점을 고려해도, 단기 현금성 지원과 복지 지출에 치중해 성장력 제고로 이어지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현 정부는 확장 재정 기조를 잇되, 인공지능(AI)·연구개발(R&D) 등 성장 투자에 재원을 집중해 ‘성장-세수-재정’의 선순환을 만들겠다는 복안이다. 재정 건전화만이 능사도 아니었다. 건전 재정을 내세웠던 윤석열 정부는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을 낮췄지만, 나라 살림은 오히려 쪼그라들었다. 경기 둔화로 세수가 줄어든 탓이다. 법인세 수입 감소 등으로 지난해 세수 부족액만 30조8000억원에 달했다. 당시 기획재정부는 재정 건전성을 지키겠다며 ‘3% 재정준칙’(GDP 대비 관리재정수지 적자를 3% 이내로 관리)을 추진했지만, 실제 적자 규모는 이를 매년 넘어섰다. GDP 대비 적자 비율은 2022년 5.4%, 2023년 3.9%, 2024년 4.1%였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긴축을 펴도 4%대 적자가 불가피하고, 확장을 택해도 비슷한 수준이라면 어느 쪽이 더 합리적이냐는 질문이 남는다”고 말했다. 배현정 기자 bae.hyunj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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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수 회복, 금융 부실 차단…한시적 확장재정 당연" "교부금·기초연금 등 '재정 수술' 미루면 안 돼"
━ 이재명 정부 ‘확장 재정’…전문가들의 네 가지 시선 ‘성장의 씨앗’이냐, ‘재정의 폭주’냐. 이재명 정부가 편성한 첫 예산안이 국회에 제출되면서, 심의 과정은 피할 수 없는 격돌의 무대로 향하고 있다. 정부·여당은 확장 재정을 ‘회복의 불씨를 지펴낼 마중물’(구윤철 경제부총리)이라 칭한다. 얼어붙은 경제의 심장에 따스한 숨결을 불어넣어 다시 뛰게 하겠다는 구상이다. 그러나 야당은 상반된 시각으로 맞서고 있다. 송언석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이를 ‘미래세대를 갉아먹는 재정 패륜’으로 규정하며, 내일을 짊어진 세대에게 빚의 굴레를 씌우는 길이라고 경고한다. 이 논쟁은 더 이상 정치권만의 화두에 그치지 않는다. 학계와 사회 전반으로 불길처럼 번지고 있다. 한국 재정의 방향타는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그 치열한 공방의 중심에서, 전문가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 최근 정부는 내년도 예산안을 올해보다 8.1% 늘어난 확장 재정으로 편성했다. 저성장으로 세수가 늘지 않아 확장 재정이 재정적자와 국가부채를 증가시켜 재정 건전성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그러나 확장 재정의 긍정적 효과 또한 고려해야 한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먼저 내수진작으로 금융부실 확산을 막을 수 있다. 그동안 고금리, 고물가와 일자리 감소로 소비와 투자가 줄어들어 내수 침체가 심화하면서 건설업을 비롯한 자영업자의 도산과 금융 부실이 늘어나고 있다. 확장 재정은 내수를 회복시켜 서민들과 중소상공인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으며 금융 부실의 확산도 막을 수 있다. 미국 관세 충격을 완화할 수도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정책으로 수출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자동차와 철강에 대한 고관세로 8월 대미수출은 12%나 감소했다. 수출감소는 성장률을 둔화시키고 경기 경착륙을 불러온다. 확장 재정정책은 내수를 진작시켜 수출감소 충격을 완화할 수 있다. 금리정책 사용이 어렵다는 점도 확장 재정의 필요성을 높인다. 한국은행의 금리 인하 정책은 부동산가격 상승이나 가계부채 증가로 사용이 제약받고 있다. 환율정책 또한 환율을 높이면 물가상승과 자본유출이 우려되고, 낮추면 수출이 감소하는 딜레마에 빠져있다. 금리와 환율정책 수단이 제약받고 있는 상황에서 내수진작을 위한 재정정책의 역할은 중요하다. 신산업 육성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디지털화와 신산업의 등장으로 산업구조는 전환기를 맞고 있다. 성장률과 수출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신산업 육성이 필요하며 전문인력 양성과 신기술개발에 있어 정부 재정지원 확대가 필수적이다. 관련기사 이재명 정부 5년간 늘어날 나랏빚 500조…역대 정부와 견줘도 이례적 빠른 증가 속도 마지막으로 재정 건전성 지표가 아직은 크게 위험하지 않다는 것도 배경이다. 현재 재정적자가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대로 기준치인 3%를 넘어서지만 선진국과 비교할 때 위험한 수준은 아니다. 국가부채 역시 50%대로 국제기준인 60%에 미달한다. 국채이자 지급 30조원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대로 기준치인 3%보다 낮으며 국가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4%대로 선진국보다 낮다. 그러나 앞으로는 저성장과 고령화로 세수는 감소하는데 재정수요는 늘어나 재정 건전성이 급속히 악화할 것이 우려된다. 비록 한시적으로는 필요하지만, 지속적인 확장 재정정책 사용은 경계해야 한다. 정책당국은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한 적극적인 대책을 수립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선심성 재정지출을 줄이고 산업간 연관 효과가 큰 부문에 재정투자를 늘려서 성장률을 높여 세수를 증대시켜야 한다. 또한 각종 공제 및 감면제도를 정비해 공정 세정을 구현하고 세수 누출을 막아야 한다. ━ 유혜미 한양대 경제금융대학 교수 정부의 2026년 예산안이 베일을 벗었다. 총지출이 전년 대비 8.1% 증가한, 4년 만에 최대 규모의 확장 재정이다. 정부의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이 0%대에 그치고 여러 기관의 내년 경제성장률 전망치도 한국은행 추정 잠재성장률(1.8%)에 못 미치는 상황에서 확장 재정은 당연한 수순이다. 다행히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도 2% 수준에서 안정되며 재정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토대도 마련됐다. 경기 침체에도 인플레이션 우려로 긴축이 불가피했던 지난 3년과는 대조적이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하지만 급격한 고령화 진전과 경제활동인구 감소로 재정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커 필요 최소한의 확장 재정으로 최대 효율을 내는 예산 배분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특히 잠재성장률이 계속 하락하고 있어 단기적 경기 회복뿐만 아니라 미래 성장동력 확보를 위한 예산 배분이 절실하다. 이를 염두에 둔다면 내년 예산안은 다음과 같이 보완이 필요하다. 우선, AI와 신산업·연구개발(R&D) 투자 확대가 성과를 거두려면 집중 투자 대상 선정에 민간의 역할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내년 예산안은 정부가 투자 대상으로 직접 선정한 중점사업과 핵심기술을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있다. 하지만 급변하는 세계 기술 생태계에서 초격차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혁신의 방향키는 민간이 잡고 정부는 관련 인프라 정비와 규제 혁신을 통해 투자 유인을 높이는 데 집중해야 한다. 시시각각 변하는 글로벌 기술 경쟁의 속도를 정부가 따라잡기란 불가능하다. 또한 내년 예산안에는 건설 경기 대책이 미흡하다. 건설투자는 5분기 연속 감소하며 현재 경기 침체를 이끌고 있다. 건설투자는 고용 유발 효과도 제조업보다 크고, 연관 산업 파급효과도 커 경기 회복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한국은행의 통화신용정책보고서는 최근 건설 경기 침체가 상당 부분 인구 고령화, 공급 과잉 등 구조적 요인에 기인했다고 분석했다. 따라서 사회간접자본(SOC) 투자와 같은 단기 처방에서 벗어나 지역 불균형 해소, 스마트 건설기술 도입 등을 통한 건설업 체질 개선 및 지속가능한 성장 기반 마련에 예산을 집중해야 한다. 일자리 예산 역시 정책 엇박자로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내년 예산안은 취업 및 직업 훈련 지원 등 노동 공급자 위주 대책에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은 법인세 인상, 노란봉투법 통과 등 노동 수요자인 기업의 일자리 창출 유인을 꺾는 정책을 펴고 있다. 일자리 예산이 성과를 내려면 기업을 경영하기 좋은 환경 조성을 위한 노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마지막으로 예산 효율화를 위해서는 정확한 성과평가 체계가 필수적이다. 확장 재정이 경제성장의 마중물이 되려면 ‘얼마나’보다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 한정된 재원이 최대의 효과를 내도록 정부의 치열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 정부가 최근 발표한 ‘2025~2065년 장기재정전망’은 대한민국 재정의 지속가능성이 훼손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현행 제도가 그대로 유지된다면, 기준 시나리오상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2025년 49.1%에서 2065년 156.3%까지 폭증한다. 이는 구조개혁 없이는 암울한 미래가 불가피하다는 경고다. 정부는 GDP 대비 의무지출 비율이 2025년 13.7%에서 2065년 23.3%까지 치솟을 것으로 전망했다. 의무지출의 상당 부분이 공적연금이나 노인 대상 복지 혜택 등 고령화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기 때문이다. 2025년 3591만 명인 15~64세 생산연령인구는 2065년 1864만 명으로 거의 반 토막 나는 반면, 65세 이상 고령 인구 비율은 20.3%에서 46.6%로 두 배 이상 증가한다. 인구구조의 변화는 법률에 따라 자동적으로 늘어나는 경직성 경비, 즉 의무지출을 가파르게 늘린다. 그렇지 않아도 세금 낼 사람은 줄어드는 상황에서 의무지출의 급증은 재정 기반을 무너뜨린다.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내놓은 2026년 예산안과 중기재정운용계획은 재정의 지속 가능성 확보에 대한 고민이 빠져있다. 총지출을 전년 대비 8.1%로 대폭 늘리면서 관리재정수지 적자는 GDP 대비 -4.0%, 국가채무는 51.6%로 악화시켰다. 심지어 2029년까지 적자 기조를 유지해 국가채무를 58.0%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정부 스스로 장기 재정 위험을 경고하면서, 단기적으로는 빚을 내 현금을 살포하는 모순적 행태마저 보이고 있다. 지역사랑상품권 발행, 농어촌 기본소득 등 선심성 사업을 부채로 충당하며 미래세대의 주머니를 터는 무책임한 재정 운용이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재정 건전성 강화를 위해선 고통스럽지만, 구조개혁을 더는 미룰 수 없다. 첫째, 의무지출 중에서 지방교육재정교부금과 기초연금 제도를 손봐야 한다. 학령인구 급감에도 불구하고 내국세 수입의 20.79%를 기계적으로 연동하는 교부금 제도는 매년 수조 원의 예산이 남아 방만하게 운영된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이를 학생 수 기반의 수요 연동형으로 전환해야 한다. 기초연금 또한 노인 빈곤 완화라는 본래 취지에 맞게 소득 하위 70%라는 대상을 어려운 계층에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 둘째, 세수 확대를 위한 방안으로 세대 간 세 부담의 형평성을 도모할 수 있는 부가가치세 증세를 공론화해야 한다. 소득세와 법인세는 줄어드는 생산연령인구와 기업에만 부담을 지우지만, 소비세는 소득이 적어도 자산이 많은 은퇴 세대까지 포괄하는 넓은 세원을 갖는다. 이렇게 확보한 재정 여력은 잠재성장률을 높이는 데 투입해 세수가 지속해서 늘어나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생산성 높은 노동 투입을 확대하고, 기업의 투자를 촉진하며, 노동과 자본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규제를 철폐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 신승근 참여연대 조세재정개혁센터 소장 국민의 74.2%가 우리나라의 재정 부족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원인으로는 ‘예산 낭비’가 1위, ‘부유층·대기업 감세’가 2위로 꼽혔다. 이는 참여연대가 이재명 정부의 첫 예산안 발표를 전후로 실시한 국민 여론조사 결과다. 이러한 여론은 단순한 인식 차원을 넘어 정부 정책 전반에 고려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정부가 내놓는 각종 재정정책의 타당성과 정당성이 국민 신뢰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하는 만큼, 재정 운용의 효율성과 공정성에 대한 요구는 더욱 커지고 있다. 재정 지출은 앞으로도 확대될 수밖에 없고, 재정 부족 문제는 갈수록 심화할 전망이다. 가장 큰 이유는 저출생·고령화와 총인구감소로 인해 고령자 비율이 급증하는 한편 생산가능인구 감소가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또한 노인 빈곤율과 자살률마저 심각한 상황이다. 한편, 조세 수입 측면에서 보면 생산가능인구의 감소는 투자와 소비 감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으며, 조세 측면에서는 소득세와 소비세 감소로 귀착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재정 건전성을 확보하려면 자산 과세를 강화할 수밖에 없다. 국가부채 확대를 통한 재원 조달은 이자 비용 급증으로 이어져 지속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는 자산 과세 강화와 더불어 예산 절감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 국민 여론 역시 재정 부족의 가장 큰 원인을 예산 낭비로 보고 있다. 실제로 여론 조사 결과, 재원 확보 방안에 대해서는 “예산 감소를 통해 재원을 확보해야 한다”는 응답이 50%를 넘었다. ‘세금 인상’은 15.9%, ‘국가부채 확대’라는 응답은 9.4%에 그쳤다. 여론은 “먼저 지금 쓰고 있는 돈부터 제대로 아껴 쓰라”는 요청이었다. 문제는 예산 절감만으로는 향후 급증하는 복지 예산을 충당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결국 증세를 통해 재원을 마련할 수밖에 없고, 현실적으로 향후 소득세와 소비세 세수가 감소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은 자산에 대한 과세 강화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한국보다 먼저 이러한 위기를 겪고 있는 일본의 사례는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일본은 신자유주의 정책이 한때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었지만, 동시에 양극화를 심화시켜 경제적 격차를 확대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을 이루는 ‘새로운 자본주의’ 실현을 목표로 내세우며, 조세 부담의 공평성 차원에서 금융자산에 대한 소득세를 강화했다. 또한 이미 12년 전에 상속세 기초공제 중 정액공제액을 인하하고, 법정 상속인 수 1인당 공제액을 축소했으며 과세표준 20억원 이상 구간에 대한 세율을 5%포인트 상향했다. 재정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재분배 정책’은 다원적인 소통만으로는 극적인 합의에 이르기 어렵다. 결국 새 정부의 철학과 가치를 반영한 증세를 통해 본질적인 재정 부족 문제를 타개해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배현정 기자 bae.hyunj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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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장막에 가려진 사생활…혼외자 수 명, 은닉재산 최대 2000억 달러 추정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사생활은 극히 제한적으로 공개된다. 정치적 약점으로 활용될 수도 있고, 국제사회에서 제재의 대상으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푸틴 대통령의 가족과 재산 등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푸틴 대통령은 1983년 류드밀라 푸티나와 결혼해 두 딸을 낳고 2013년 이혼했다. 큰딸 마리아 보론초바(40)는 내분비학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둘째 딸 카테리나 티호노바(38)는 러시아 국가지력발달재단(NIDF) 총책임자로 러시아군과 관련된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이들은 강연을 하는 등 공개 석상에도 종종 등장한다. 보론초바는 네덜란드 사업가와 결혼했으며 현재 네덜란드에서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티호노바는 러시아 재벌 키릴 샤말로프와 결혼했으나 이혼했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은 이들을 자신의 딸이라고 공개적으로 인정한 적은 없다. 이들 외에도 푸틴 대통령에게는 혼외자로 막내딸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22살로 루이자 로조바 또는 엘리자베타 올레그노바 루드노바라는 이름을 쓰고 있으며 현재 프랑스 파리에서 살고 있다. 로조바는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에 춤추는 동영상을 올리는 등 활발히 활동했으나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계정을 삭제하거나 비공개로 돌렸다. 로조바의 어머니는 스베틀라나 알렉산드로브나 크리보노기흐(50)로 푸틴의 내연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에도 푸틴 대통령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리듬체조 선수 출신의 알리나 카바예바(42) 사이에서도 혼외자를 뒀다는 소문이 있다. 관련기사 ‘강한 남자’ 푸틴 뒤엔 여전한 막강 팬덤…내부통제, 반서구 고삐 더 죌 듯 트럼프 종전구상에 협조 않는 푸틴…CSIS “러 경제 3년은 버틸 수 있어” 푸틴 대통령의 정확한 재산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다. 차명으로 보유한 자산에 대한 확인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2024년 대선 때 러시아 중앙선관위원회가 공개한 대통령 후보 재산 정보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지난 2017~2022년 소득이 6759만1875루블(약 10억원)이었고, 10개의 은행 계좌에 약 8억800만원을 보유하고 있다. 주택은 모스크바에 아파트(153㎡) 1채를 갖고 있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도 소형 아파트(77㎡) 1채와 차고(18㎡) 1개가 있다. 하지만 실제 푸틴 대통령의 재산은 세계 최고 부호급일 것이란 관측이 많다. 한때 대러 투자의 큰손이었던 영국의 투자자 빌 브라우더는 2017년 미 의회 청문회에서 “푸틴의 은닉 재산은 약 2000억 달러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또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2007년 푸틴의 재산을 400억 달러 이상으로 추정했다. 2021년에는 러시아 반정부 운동가인 알렉세이 나발니가 흑해 연안에 초호화 저택의 사진을 공개하면서 실제 소유주가 푸틴이라고 주장했다. 서방국가들은 지난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 때 제재를 위해 푸틴의 숨겨진 재산을 추적했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외신들은 “푸틴 대통령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은 올리가르히(재벌)들에게 이권을 주고 그 대가를 받았기 때문”이라며 “믿을 만한 측근들의 명의로 많은 재산을 숨겨놨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최익재 기자 ij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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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종전구상에 협조 않는 푸틴…CSIS "러 경제 3년은 버틸 수 있어"
지난 10일 우크라이나 지토미르 지역의 소방관이 러시아 드론·미사일 공격을 받은 주택가 화재를 진압하고 있다. 이 곳은 키이우에서 서쪽으로 약 100㎞ 떨어져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전쟁의 승패는 러시아 경제가 먼저 무너지느냐, 우크라이나가 먼저 무너지느냐에 달려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의 최근 분석이다. 러시아 경제와 우크라이나군의 방어력이라는 두 개의 모래시계 중 먼저 모래가 떨어지는 쪽이 패배한다는 의미다. 이런 관점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입장은 다소 느긋하다. 러시아 경제가 우크라이나군보다 더 오래 버틸 것이라는 자신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미국의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러시아가 전쟁을 3년 정도는 더 지속할 수 있는 여력을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2~3년을 버티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다. 러시아의 공세로 영토를 빼앗기는 것보다 먼저 군사력 특히 병력 부족으로 인해 전쟁 수행이 어려워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현재 우크라이나군의 주력은 농촌과 지방의 중년 남성들로 채워져 있고, 도시의 중산층과 청년들은 입대를 회피하고 있다. 이 때문에 우크라이나 정부는 지난해 징집 대상 연령을 27세에서 25세로 낮췄지만, 전문가들은 18세로 내리지 않으면 병력 부족이 심각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관련기사 ‘강한 남자’ 푸틴 뒤엔 여전한 막강 팬덤…내부통제, 반서구 고삐 더 죌 듯 철의 장막에 가려진 사생활…혼외자 수 명, 은닉재산 최대 2000억 달러 추정 푸틴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종전 협상 요구에 적극 나서지 않는 것도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와의 협상 카드로 우크라이나의 돈바스 지역을 양보하는 방안을 내밀고 있지만, 푸틴 대통령은 별다른 호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실제 지난달 15일 미국 알래스카에서 열린 미·러 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끝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게다가 러시아 측은 우크라이나에 서방의 안전보장군을 배치하겠다는 미국의 구상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그들(안전보장군)을 정당한 타격 목표물로 간주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가입해 나토의 군대를 주둔시키겠다는 우크라이나의 당초 계획과 같은 것”이라면서다. 트럼프 대통령의 종전 구상이 심각한 장애물을 만난 것이다. 지난달 18일 “미·러 정상회담 2주 안에 다시 열릴 수 있다”고 말했던 트럼프 대통령의 희망도 실현되지 못했다. 이와 관련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푸틴이 트럼프를 가지고 놀았던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처럼 푸틴 대통령이 자신의 셈법을 고집한다면 우크라이나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러시아의 현 상황이 녹록한 것만은 아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전으로 지속되고 있는 만큼 푸틴 대통령에겐 국제적 고립과 서방의 경제 제재에 따른 러시아 경제 상황 악화 등 극복해야 할 과제가 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이 지난 3일 중국 전승절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베이징을 찾은 것도 국제적 고립 탈피 등을 위한 행보로, 중국·북한 등과 함께 반미 연대를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과시한 것으로 해석된다. 앞선 지난달 알래스카 미·러 정상회담에 응한 것도 고립에서 벗어나겠다는 전략의 일환이었다. 당시 로이터통신은 “이번 미·러 정상회담은 푸틴 대통령이 승리했다고 볼 수 있다”며 “러시아가 휴전 등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고립에서 벗어나 다시 미국과 맞상대하게 됐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지난해에도 푸틴 대통령은 국제적 왕따 신세에서 벗어나고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지난해 10월에는 러시아에서 열린 브릭스(BRICS) 정상회의에 참석해 중국·인도·남아프리카공화국 정상 등과 회담을 했다. 반서방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 북한과 베트남을 방문하기도 했다. 아프리카에서의 우군을 확보하기 위해 러시아-아프리카 파트너십 포럼을 러시아에서 열기도 했다. 이런 노력으로 푸틴 대통령의 고립 탈피 전략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가중되는 경제적 부담과 악화되는 러시아 경제 상황은 여전히 커다란 난제다. 특히 러시아의 에너지 수출을 옥죄기 위한 서방의 압박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을 가를 전망이다. 원유와 천연가스 수출 등이 러시아의 전비 조달의 창구이기 때문이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지난 7일 “살인자(푸틴)를 멈추게 하는 방법은 그의 무기를 빼앗는 것이다. 에너지가 그의 무기”라고 강조했다. 스콧 베센트 미 재무장관도 NBC 방송 인터뷰에서 “러시아에 대한 압박을 강화할 준비가 돼 있다”며 “유럽의 파트너들이 우리를 따르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유럽 국가들이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을 중단해야 한다는 의미다. 베센트 장관은 또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추가 제재에 들어가 러시아 원유를 사는 나라들에 대해 2차 관세를 부과하면 러시아 경제가 완전히 붕괴할 것이고, 푸틴이 협상 테이블로 나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따라서 서방의 대러 추가 제재는 러시아에 대한 직접 관세 외에도 원유 등 러시아산 제품을 구매하는 나라들에게 관세를 부과하는 ‘2차 관세’가 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러시아 경제 상황은 만만찮다. 일단 가장 우려되는 것은 경기 침체다. 러시아 재무부는 서방의 제재를 감안해 올해 경제성장률을 2.5%(4월)에서 1.5%로 하향 조정했다. 경기 침체와 물가 상승이 동시에 발생하는 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한 경고도 계속 나오고 있다. 하지만 소비자 물가가 연이율 9.2%에 육박하고, 금리도 높아 내수 회복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또 고금리로 인한 기업의 투자 및 생산도 위축되고 있다. AP통신은 “트럼프 대통령이 장담했던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이 현재로썬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푸틴 대통령은 중국·인도·북한 등과의 협력 강화를 통해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다. 반미 연대를 통해 경제 위기를 최소화하고, 전쟁 수행을 위한 외부 지원을 최대한 얻어내려는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최익재 기자 ij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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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남자' 푸틴 뒤엔 여전한 막강 팬덤…내부통제, 반서구 고삐 더 죌 듯
━ 집권 25년 ‘푸티니즘’ 향배 러시아 제국의 ‘부활’을 추구해온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21세기의 차르’라고 불린다. 총리 시절(2008~12년)에도 실질적인 1인자였던 것을 포함하면, 그의 통치 기간은 만 25년이 넘는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5월 집권 5기를 시작했다. 6년 임기를 마치면 스탈린의 집권 기간(1924~53년)인 29년을 넘어서게 된다. 2030년 대선에서도 승리할 경우 84세가 되는 2036년까지 집권하게 된다. 이럴 경우 푸틴의 통치 기간은 36년으로 18세기 예카테리나 2세의 재위 기간인 34년을 추월하게 된다. 역사상 표트르 대제(39년 재위)만이 푸틴보다 더 오래 통치한 인물로 남게 된다. 장기 집권 체제를 구축한 푸틴의 통치 이념인 푸틴주의를 분석하고, 우크라이나 전쟁 등에 따른 러시아의 현 상황을 진단해봤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푸틴 대통령과 21세기의 러시아는 분리하기 어렵다. 푸틴 대통령의 통치력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강한 국가 건설’을 표방한 푸틴의 국정 철학과 통치 이념은 ‘푸틴주의(Putinism)’다. 푸틴주의는 다음 네 개의 영역, 이를테면 주권 민주주의(정치), 국가자본주의(경제), 유라시아주의(대외 정책), 국제기독교 보수주의(사회)가 골간을 이룬다. ‘주권 민주주의’는 일종의 러시아식 민주주의로 국내 정치적 질서와 안정을 담보하기 위한 국정 운영 방침으로 권력 수직화, 즉 1인 권력과 연방 권력 강화를 요체로 한다. 러시아 연방의 영토적·법적 통일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를 강화하고, 동시에 러시아의 혼란과 분열을 끊임없이 부추기는 외부 세력(색깔 혁명)의 준동을 차단하기 위한 정치적 방어기제다. 러시아인들 ‘제국 증후군’ 열망 해소해 줘 지난해 5월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열린 대통령 취임식에서 푸틴 대통령이 레드 카펫 위를 걸어가고 있다. [AP=연합뉴스] ‘국가자본주의’는 국가의 시장 개입을 강화하는 것으로 약탈적 시장경제 질서를 바로잡아 국부(國富)를 키우고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경제정책 기조다. 기본적으로 시장경제 원칙에 바탕을 두면서도 석유, 가스, 전력 등 핵심 기간 산업과 우주, 항공, 원자력 등 전략 산업에 대해서는 국가가 적극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옐친 대통령 집권 당시 러시아는 국영기업들이 마구잡이로 민영화되면서 국가의 막대한 부가 아무런 제약 없이 서방으로 빠져나가는 부작용을 경험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를 막기 위해 주요 국영기업들을 재국유화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관련기사 철의 장막에 가려진 사생활…혼외자 수 명, 은닉재산 최대 2000억 달러 추정 트럼프 종전구상에 협조 않는 푸틴…CSIS “러 경제 3년은 버틸 수 있어” ‘유라시아주의’는 푸틴의 대외 정책 지향성을 제시하는 이념이다. 궁극적으로 서구에 결연히 맞서 글로벌 강대국으로서 러시아의 국제적 지위 확보와 지정학적 영향력 강화를 목표로 한다. 이는 대외 정책에서 전략적 독자성을 강화하는 가운데 다극 세계의 독자적 중심축들과 다면적인 협력 관계 확대를 통해 미국 중심의 일극 우위적 패권 질서를 견제하고 러시아의 배타적 세력권과 전통적 영향권을 복원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러시아가 주도해서 형성한 유라시아경제연합(EAEU), 상하이협력기구(SCO), 브릭스(BRICS) 등은 유라시아주의 이념의 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국제기독교 보수주의’는 푸틴의 대내외 정책에 도덕적·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다분히 자기충족적인 종교 이데올로기다. 이 종교 이념은 ‘모스크바=제3로마’라는 자부심에서 출발하고 러시아가 동로마제국의 계승자로서 기독교 정신세계의 중심지이자 전통적인 기독교 가치의 수호자라는 메시아니즘적 종교관에 기초한다. 이런 인식을 기반으로 크렘린은 종교의 보수적 가치를 옹호하는 국가들과의 국제적 연대 확대를 추구한다. 이 네 개의 기둥이 떠받치는 푸틴주의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국가주의와 반서구주의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그렇다면 러시아 민초들은 푸틴 대통령의 통치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푸틴 대통령의 인기와 지지율은 선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푸틴 대통령은 작년 3월 우크라이나 전쟁 중에 치른 대선에서 77.44%라는 역대 최고의 투표율 속에서 87.28%라는 높은 득표율을 얻었다. 장기 집권과 부정 투표 논란에도 민심은 푸틴을 압도적으로 선택했다. 그렇다면 여론이 푸틴 대통령에 호의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손상된 러시아의 대국적 자존심을 회복시켜 준 점을 꼽을 수 있다. 2000년 집권 후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인들이 느끼는 과거 초강대국 영광에 대한 향수, 즉 ‘제국 증후군’의 열망을 해소해줬다. 미국 군사 방어시스템의 폴란드·체코 배치 무력화, 조지아 전쟁 승리,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병합, 키르기스스탄에서의 미군 축출, 시리아 내전 개입과 중동·아프리카 내 영향력 회복, 나토의 동진 차단을 위한 특수군사작전 등이 사례일 것이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고난의 시기 경제 위기 탈출과 성장도 푸틴에 대한 강한 팬덤 형성에 일조했다.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구가 강력한 제재를 가했지만, 러시아는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경제성장률은 2022년 -2.1%로 선방했고 국내총생산(GDP)은 2조2404억 달러를 기록해 세계 8위를 차지했다. 2023년에는 경제가 플러스 성장세로 돌아서 3.6%의 고성장을 구가했다. 미국으로 대표되는 나토와의 대결에서도 밀리지 않고 우크라이나 돈바스 점령 지역 확대와 러시아에 유리한 전황도 푸틴 지지율의 고공행진을 견인했다. 푸틴의 장기 집권 비결은 푸틴주의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긍정적 평가에서 비롯된다. 푸틴과 대중 사이의 권력 관계에서 푸틴주의가 작동하는 원리는 이렇다. 푸틴은 강력한 리더십으로 국가에 질서와 안정, 경제 성장을 구현하고, 대외적으로는 위대한 강대국 러시아의 위상을 확보할 테니 그 과정에서 정치적·시민적 권리와 자유, 시장 원리는 당분간 유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안정’과 ‘국가 권력의 자의성’ 교환인데, 이 ‘푸틴과의 계약’은 선거라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통해 대중의 자발적 동의와 지지를 얻었다. 그런 측면에서 2024년 러시아 대선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이끄는 푸틴 체제에 대한 일종의 ‘신임 투표’ 성격이었다. 집권 5기지만 여전히 2000년 체제 머물러 지난 3일 중국 전승절 행사에서 만난 푸틴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 [AP=연합뉴스] 푸틴 대통령은 앞으로도 여론의 강력한 지지를 발판으로 국내적으로는 침체한 경제 진작에 집중하면서 내부 동요를 차단하는 한편, 국제적으로는 다극세계의 독자적 중심축으로서 공세적이고 개입주의적인 대외 정책을 강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공세성 강화, 나토의 동진 차단, 탈소비에트 공간에 대한 통제권 강화, 유라시아경제연합(EAEU)의 발전적 확대, BRICS·SCO와의 협력 메커니즘 활성화, 반미·반서구 세력(중국, 이란, 북한 등)과의 전략적 연대 강화, 글로벌 사우스와의 공고한 협력 체제 구축, 다극적 국제 질서의 이식, 러시아의 안보 이익을 제도적으로 반영하고 법적으로 보장하는 신국제 안보 질서 형성 등을 위한 대외적 노력을 적극 전개할 것으로 보인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2024년 집권 5기의 출범은 ‘푸틴주의’가 국가·사회적으로 여전히 유효하고 그 기제가 지속적으로 작동하리라는 점을 시사한다. 이는 러시아가 2000년 체제에 여전히 갇혀 있음을 방증하고, 푸틴 5.0 시대에도 과도하게 집권화·사인화한 권력 구조 아래서 통치 체제와 사회·경제적 제도의 큰 변화 없이 서구와 대립각을 세우는 방향으로 국정을 운영할 공산이 크다는 점을 예고한다. 홍완석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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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채용 프로세스 기술은 크게 진전, 남은 건 사회적 합의·비용"
━ AI 시대 취업시장 빛과 그림자 인공지능(AI)이 채용 전 과정을 재설계하는 전환기가 도래했다. 기업은 선발을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AI 알고리즘을 개발하고, 구직자는 생성형AI로 글쓰기와 표현력을 ‘증강’한다. 취업시장이 ‘사람 대 사람’에서 ‘사람+AI 대 사람+AI’ 구도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선주(사진) 연세대 컴퓨터과학과 교수는 “AI가 면접에서 표정·어투를 보고 평가하는 건 기술적으로 어렵지 않다”면서도 “지금 필요한 건 사회적 합의와 비용에 대한 판단”이라고 말했다. AI 활용에 기술적 한계는 없나. “자소서는 물론 면접 과정에서 AI가 사람 얼굴이나 물체를 알아보는 기술은 이미 많이 진전됐다. 기업이 원하는 인재상이 있다면 AI로 충분히 평가해낼 수 있다. 미세한 표정의 움직임도 포착할 수 있다. 기존 데이터만 충분하면 면접에서 얻은 정보를 점수로 환산해 평가하고, 기업이 원하는 알고리즘을 학습시켜 일관된 채용 프로세스를 설계하는 것도 가능하다.” 모든 취준생이 AI로 쓴 자소서·리포트를 낸다면 평가는 어떻게 하나. “실무 능력에 관해서는 AI를 배제한 1차 평가가 여전히 필요하다고 본다. IT 대기업들이 필기형 코딩 테스트에서 전자기기 사용을 막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AI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도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 보겠다는 거다. 반면 ‘AI를 얼마나 잘 쓰는가’를 공정하게 측정하는 방식은 아직 충분히 논의되지 않았다. 향후 관건은 AI 활용 능력을 어떻게, 어디까지 반영해 평가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다.” 관련기사 취준생은 AI로 자소서 작성, 기업은 AI로 걸러내…“모두 쓰지만 서로 불신” 저무는 코딩 불패, 설 자리 잃은 초급 개발자, AI발 구조조정…판교 IT 대기업들 ‘해고 바람’ 김 교수는 그러면서 “문제를 정의하고, 논리적으로 풀며,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힘은 AI 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하다는 점을 구직자들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이와 함께 앞으로는 데이터 출처 표기나 개인정보 보호, 저작권 감수성 등 AI를 안전하고 책임 있게 쓸 수 있는 ‘AI 리터러시’가 새로운 역량으로 요구될 것으로 전망했다. AI 신뢰성과 공정성은 어떻게 담보하나. “기술의 구현 가능 여부와 별개로 어디까지 기계에 맡기고 무엇을 사람 판단으로 남길지에 대해서는 사회 전반의 공감대가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 표정·감정 분석은 사생활 침해나 차별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공개 가능한 데이터로 학습했는지, 특정 집단에 불리하게 작동하진 않는지, 사람이 최종 검토를 하는지 등의 원칙도 정해야 한다.” 이는 기업의 이해와도 직결되는 부분이다. 채용 AI 도입으로 처리량이 늘고 편차가 줄어드는 장점이 있지만 설명 가능성, 책임 소재, 이의 제기 절차 등에 대한 세부 매뉴얼을 보완하지 않으면 법적·평판 리스크가 커질 수 있다는 점에서다. 김 교수는 “결국 경제성의 문제”라며 “데이터 수집에 드는 인력과 시간, 학습 단계에 소요되는 고성능 칩 비용 등을 합하면 기업 부담이 만만찮을 수 있는 만큼 이를 어떻게 해결할지도 숙제”라고 진단했다. AI 기술의 미래는. “머잖아 ‘AI가 곧 컴퓨터 그 자체’인 시대가 올 것이라고 본다. 인터넷·스마트폰 등 지금까지의 그 어떤 기술혁신보다 더 큰 변화가 예상된다. 다만 실질적인 대전환이 가능하려면 온디바이스 등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혁신이 함께 동반돼야 할 것이다.” 원동욱 기자 won.dong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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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무는 코딩 불패, 설 자리 잃은 초급 개발자, AI발 구조조정…판교 IT 대기업들 '해고 바람'
━ AI 시대 취업시장 빛과 그림자 “이젠 코드 짜는 기술보다 ‘어떤 일을 인공지능(AI)에 시켜야 하는지’가 더 중요한 시대가 됐어요.” 판교의 한 IT 스타트업 최고기술책임자(CTO) 김모씨는 “AI가 코드 작성부터 테스트까지 짧은 시간에 식은 죽 먹기로 처리하니 초급 개발자들이 하루아침에 설 자리를 잃고 있다”며 “GPT나 코파일럿 등 AI 도구와 경쟁하려면 웬만한 실력으론 어림도 없게 됐다”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그러면서 “최근 IT 채용 분야에서 ‘코딩 불패’ 신화가 빠르게 깨지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라고 진단했다. AI의 급속한 기술 발전은 국내 IT 업계 일자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신규 채용 감소는 물론 구조조정 바람도 거세지는 모습이다. 판교 IT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개발자 조준식(32)씨도 최근의 달라진 분위기를 실감하고 있다. 그는 “신입 채용은 확연히 줄었고 기존 개발자도 실력이 부족하다 싶으면 이내 구조조정 대상에 오르는 실정”이라며 “판교에도 해직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실제로 인사 채용 플랫폼 원티드랩이 현직 개발자 18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43%가 ‘깃허브·코파일럿·GPT 등 새로운 AI 도구의 코딩 실력이 경력 1~3년차 개발자들 실력을 이미 능가했다’고 답했다. 그러다 보니 기업들도 신입 개발자 채용을 꺼리는 추세가 심화되고 있다. 올 1분기 신입 개발자 구인 공고도 1년 전에 비해 18.9% 감소했다. 대표적인 IT 기업인 엔씨소프트의 경우 지난해 신입 공채 없이 경력직 개발자만 채용했고 이 기조를 올해도 유지할 방침이다. 그래픽 디자이너 업계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판교 스타트업에서 어플의 UI(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디자인하는 정진희(33)씨는 “예전엔 5명이 며칠씩 걸려야 했던 디자인 시안을 미드저니 같은 AI 툴은 단 몇 분 만에 쏟아내고 있다”며 “정작 우리가 손댈 부분은 AI가 만든 이미지의 미세한 터치나 감독자 역할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정씨는 “그렇잖아도 신입 채용이 줄고 있는데 기존 일자리마저 AI에 밀리니 설자리가 갈수록 좁아지는 느낌”이라고 우려했다. 관련기사 취준생은 AI로 자소서 작성, 기업은 AI로 걸러내…“모두 쓰지만 서로 불신” “AI 채용 프로세스 기술은 크게 진전, 남은 건 사회적 합의·비용” AI의 파고는 개발자와 디자이너를 넘어 콘텐트 제작자 등 전방위 분야로도 확산되고 있다. 11번가와 토스 등은 이미 반복 작업과 기본 시안 작성을 AI에 맡기고 있다. 토스 관계자는 “AI 툴이 비전문가도 고품질 이미지를 만들 만큼 쉽게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초급·신입 인력 수요는 사실상 사라지는 추세”라며 “앞으론 최종 디렉팅 경험이 있는 소수의 핵심 인력만 남게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는 수치로도 확인되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에 따르면 2022년 72%였던 기업들의 ‘신규 채용 계획 있음’ 응답이 올해는 60.8%까지 하락했다. 같은 기간 신규 채용 임금 근로 일자리도 604만5000개에서 546만7000개로 줄었다. 대기업 인사담당자 이모(46)씨는 “이젠 한꺼번에 공채로 뽑는 대신 빈자리가 나면 수시로 선별해 인력을 충원하는 게 보편화됐다”며 “AI가 채용 방식도 완전히 바꿔놓고 있다”고 전했다. 이런 흐름은 국내만의 현상이 아니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도 잇따라 대규모 해고를 단행하고 나섰다. 마이크로소프트(MS)의 올해 누적 해고 규모는 1만7000명에 달한다. 지난 7월엔 글로벌 전역에서 약 9000명을 추가 감원한다고 발표했다. 올해 1월과 5월에 이은 세 번째 감원으로 2023년 이후 최대 규모다. 사티아 나델라 MS 최고경영자(CEO)는 “MS 내부 코드의 20~30%는 이미 AI가 작성 중”이라고 밝혔다. 구글·아마존·메타 등도 지난 2년간 대규모 감원에 나선 데 이어 최근에도 수백 명씩 수시로 직원을 내보내고 있다. AI 확산이 노동시장에 미치는 충격은 스탠퍼드대 연구진이 최근 발표한 ‘광산의 카나리아?’라는 제목의 논문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연구에 따르면 생성형AI 도입 후 AI에 많이 노출된 직군에서 22~25세의 젊은 노동자 고용이 평균 13% 감소했다. 신입·초급 단계에선 진입 기회 자체가 크게 줄었고 상대적으로 기존 경력자만 고용이 유지되고 있는 것도 확인됐다. 논문은 “AI가 노동시장 하단의 사다리를 무너뜨리며 고용 진입 문턱을 전례 없이 높이고 있다”며 “이런 흐름이 지속될 경우 AI에 밀리는 초보 인력이 채용에서 배제되는 차원을 넘어 사회 전체의 혁신 유입 경로 자체도 언제든 차단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국내 IT 업계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AI가 초급 개발자의 단순 작업은 상당 부분 대체할 수 있지만 산업별로 요구되는 복합적 문제 정의나 맥락 해석, 종합 판단 등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어야 한다는 제언도 곁들여진다. 이재성 중앙대 AI학과 교수는 “AI 효율만 좇는 구조가 지속될 경우 미래 혁신의 밑바탕이 될 젊은 인력이 충원되지 못하고, 그로 인해 인력풀 자체가 급속히 고갈되면서 5년 안에 돌이킬 수 없는 혼란이 초래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이 교수는 “사다리 걷어차기 현상을 이대로 방치하면 단순히 특정 직군의 위기를 넘어 국가 차원의 혁신 동력과 사회의 지속 가능성 확보 또한 크게 위협받을 수 있다”며 “신규·초급 인력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과 지원을 통해 사회적 사다리를 보존하는 데 정부와 산업계가 머리를 맞대야 할 때”라고 조언했다. 최재식 KAIST XAI(설명가능 인공지능연구센터) 센터장은 “기업뿐 아니라 개발자들도 기존의 기술 발전을 따라만 갈 게 아니라 미래의 혁신이 어디에서, 어떻게 일어날지 함께 고민하며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원동욱 기자 won.dong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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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준생은 AI로 자소서 작성, 기업은 AI로 걸러내…"모두 쓰지만 서로 불신"
━ AI 시대 취업시장 빛과 그림자 # 지난 1일 서울 신촌의 한 대학 도서관. 취업준비생 김예진(25)씨는 자리에 앉자마자 노트북을 펴더니 챗GPT를 소환했다. “이 기업에 맞는 지원 동기와 내 장단점을 정리해줘.” 인공지능(AI)으로 자기소개서 초안을 만들고 문장을 다듬는 게 요즘 그의 주된 일과 중 하나다. “제 주변에 AI를 안 쓰는 취준생은 거의 없어요. ‘어떻게 잘 활용하느냐’가 중요할 따름이죠. 관건은 마치 AI를 쓰지 않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올가을 본격적인 취업시즌을 앞두고 ‘AI 변수’가 최대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AI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고도화됨에 따라 실제 채용 과정에서 사람보다 AI가 더 많은 역할을 맡게 되면서 취준생도, 기업들도 ‘AI가 지배하는 취업시장’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놓고 고민이 깊어지는 모습이다. 생성형AI를 활용한 취준생의 자소서 작성이 일상화되고 기업들도 AI 면접을 통해 지원자를 선별·평가하는 현실 속에서 기업·구직자 모두 AI에 대한 불신 또한 만만찮아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실제로 지난 5월 채용 플랫폼 캐치 조사 결과 구직자 10명 중 9명 이상(91%)이 생성형AI를 활용해 자소서를 작성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AI를 안 쓴다’는 응답은 9%에 불과했다. 취업컨설팅회사 더라이징스타헤딩 정재훈 팀장은 “취업 과정에서 AI는 이제 ‘변수’가 아니라 ‘상수’가 됐다”며 “예전의 ‘컴활 자격증’처럼 지금은 AI를 잘 쓰는 능력 자체가 취준생의 기본 소양이자 역량으로 인정받는 시대”라고 설명했다. 관련기사 “AI 채용 프로세스 기술은 크게 진전, 남은 건 사회적 합의·비용” 저무는 코딩 불패, 설 자리 잃은 초급 개발자, AI발 구조조정…판교 IT 대기업들 ‘해고 바람’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기업의 시선이 여전히 곱지만은 않은 게 현실이다. 조사 결과 면접 등 채용 과정에서 AI를 활용한다는 국내 기업이 41.1%였는데, 그중 챗GPT를 활용한 자소서에 대해서는 64.1%가 ‘독창성과 진정성이 부족하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AI 탐지 프로그램을 가동해 감점 또는 불합격 처리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실제로 응답 기업의 42.2%는 AI 활용 자소서로 확인될 경우 ‘해당 전형 감점’, 23.2%는 ‘불합격’ 처리한다는 방침을 세워둔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 4월 삼성전자 감독관이 직무적성검사 응시자 예비 소집을 진행하고 있다. [연합뉴스] 판교의 IT 기업 인사 담당자 이모(38)씨는 “AI를 사용한 자소서의 경우 문장은 매끄러워 보여도 내용은 판에 박힌 것처럼 정형화돼 있거나 부실한 경우가 적잖다”며 “허위 사실이나 경험 등 이른바 ‘할루시네이션’이 확인돼도 명백한 감점 사유”라고 말했다. 취준생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대학생 이주영(26)씨는 “AI를 쓰지 않으면 나만 뒤처질까봐 어쩔 수 없이 사용하고 있지만 찝찝함을 지울 수 없는 게 사실”이라며 “동료들도 ‘취업시장이 점점 더 낯설고 불확실해지고 있다’며 답답해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취준생은 너도나도 AI의 도움을 받아 취업 도전장을 내고 기업은 또 다른 AI로 응시자를 걸러내는 등 구인·구직자 모두 AI를 적극 활용하곤 있지만 정작 어느 누구도 AI를 온전히 신뢰하지 않는 미증유의 취업시장이 도래한 셈이다. # 지난 2일 서울 강남의 한 스터디 카페. 올 하반기 취업에 도전하는 대학생 다섯 명의 ‘AI 면접 스터디’가 한창이었다. “시선이 약간 흔들린 것 같다” “자세를 좀 더 바르게 해야지” 등의 피드백이 끊임없이 오갔다. 조은영(24)씨는 “AI 면접은 사람보다 훨씬 더 기계적”이라며 “표정이나 시선 등을 더욱 세밀하게 조절하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기업들이 채용 전형에 AI 면접과 AI 역량검사를 앞다퉈 도입하면서 하반기 채용 시즌을 앞둔 취준생들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임유정 라온제나스피치 대표는 “AI 면접은 사실 ‘능력 있는 사람을 뽑는’ 것보다는 ‘부적합자를 걸러내는’ 기능에 더 최적화돼 있다”며 “표정·시선과 목소리 톤 등 하드웨어적 요소가 감점 요인으로 작용하는 구조다 보니 구직자들도 AI의 눈에 들기 위해 형식적인 부분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이에 따라 AI 면접 학원을 따로 수강하는 취준생도 늘고 있다. 최대 20만원에 달하는 일대일 수업에 ‘4시간 완성’이라고 홍보하는 회당 7만5000원짜리 인터넷 강의도 인기를 모으고 있다. 취준생 정원형씨는 “채용 규모는 갈수록 줄고, AI 면접 등 준비할 건 계속 늘고, 돈은 더 많이 들고…. 2030세대 취업이 점점 더 힘들어지는 분위기”라며 고개를 저었다. 한국노동연구원 조사 결과 구직자의 67.7%는 여전히 사람이 평가하는 기존 채용 방식을 선호한다고 답했고 AI 기반 채용을 선호한다는 응답은 32.3%에 그친 것도 청년세대의 이 같은 불안감이 반영된 결과라는 분석이다. 반면 기업들이 잇따라 AI를 활용해 자소서를 평가하고 면접을 실시하는 배경에는 ‘효율성’과 ‘공정성’ 측면에서 크게 도움이 된다는 판단도 작용하고 있다는 게 인사 담당자들의 공통된 전언이다. 특히 수백~수천 명의 지원자가 몰리는 대기업과 공공기관의 경우 AI를 활용하면 적임자를 가려내는 시간과 노력을 크게 단축시킬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한 유통 대기업 관계자는 “AI 도입 후 채용 업무가 한결 수월해진 게 사실”이라며 “면접관이 보지 못한 포인트를 AI가 잡아주는 등 효용성도 매우 높은 편”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기업이 내세우는 ‘기계적 공정성’과 구직자들이 우려하는 ‘신뢰성’이 여전히 충돌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상기 테크프론티어 대표는 “표정이나 어조에 기반한 AI의 판단이 아직은 과학적 근거가 충분하지 않고 실제 속이는 것도 어렵잖은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AI가 사람의 미세한 감정까지 평가할 경우 오류 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한다”며 “AI를 활용하되 민감한 부분은 사람이 재확인·재평가하는 등의 보완 과정이 꼭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 지난달 30일 오후 AI 면접을 마친 황지우(27)씨도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이번에도 떨어질 것 같아요. 매번 AI 면접 단계에서 탈락했는데 근거를 알 수 없으니 억울하고 답답할 따름입니다.” 최근 AI 면접에서 고배를 마셨다는 배경훈(31)씨도 “AI 알고리즘이 잘못됐거나 시스템 오류로 불합격 처리되면 대체 누가 책임지는 거냐.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는지 공개라도 해줘야 개선을 하지 않겠느냐”며 불만을 토로했다. 전문가들도 AI를 활용한 채용 방식이 정착되려면 제도적 보완과 함께 개인정보보호법과 노동법 등의 모호한 규정도 새롭게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하고 있다. 특히 신뢰 가능한 AI 알고리즘과 공정한 평가 체제 구축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전창배 국제인공지능윤리협회 이사장은 “공정한 채용은 무엇보다 신뢰가 바탕이 돼야 하는 만큼 어떤 책임 구조 속에서 작동하고 제어되는지 명확히 규정할 필요가 있다”며 “누군가의 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채용이란 행위의 최종 책임은 결국 인간에게 있다는 걸 꼭 유념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원동욱 기자 won.dong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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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실시공 건설사에 벌점, 무량판 구조는 ‘특수 건축물’로 지정해 안전관리
━ ‘순살 아파트’ 사태 그 후 28개월…‘신축 포비아’ 확산 이른바 ‘순살 아파트’ 사태 이후 정부는 재발 방지를 위해 관련 제도를 대폭 뜯어고쳤다. 부실시공 문제는 단순히 시공을 맡은 건설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관리·감독 부실 등 건설산업 전반의 제도적 허점에서 비롯된 측면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제도 변화의 방향은 크게 두 갈래다. 철근 누락 등 부실시공을 한 건설사에 대한 패널티와 시공 과정에서의 관리·감독 강화다. 정부는 우선 2023년 건설산업기본법 시행규칙을 개정(2024년 시행)해 건설사의 시공능력평가 때 부실시공에 대한 패널티를 강화했다. 시공능력평가는 공사실적·경영·기술능력·신인도 등 4개 요소를 평가액으로 산출해 금액에 따라 순위를 매긴다. 정부는 부실시공을 막기 위해 신인도 평가액 비중을 확대하고 경영 평가액 비중을 줄였다. 신인도 평가는 건설사가 사회·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지표로 영업정지·과징금, 부실벌점, 공사대금 체불, 벨떼입찰 등 불공정거래 등을 평가한다. 평가가 좋으면 평가액이 늘어나지만, 감점을 받으면 평가액이 감액된다. 특히 부실시공에 따른 벌점은 1점만 받아도 감점이 되고, 최고구간인 15점 이상의 벌점을 받으면 감점비율이 최고 9%에 이른다. 기존에는 3%에 그쳤다. 예컨대 공사실적 평가액이 1조원인 건설사가 15점의 벌점을 받으면 기존에는 300억원이 최종 시공능력평가액에서 감산됐으나 지난해부터는 900억원 적게 평가되는 것이다. 관련기사 물 새는 곳 바로 옆에 전기차 충전시설…최근 5년간 ‘하자 분쟁’ 2만건 폭주 “브랜드에만 집중하는 건설업계…기술·품질 투자 외면, 부실 키워” 관리·감독권도 강화됐다. 순살 아파트 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던 ‘무량판 구조’는 특수구조 건축물로 지정해 안전 관리가 강화됐다. 국토교통부는 지난해 4월 건축법 하위 법령을 개정해 무량판 구조가 해당 층 기둥 지지 면적의 25% 이상인 건축물을 특수구조 건축물로 정하고 설계·시공·감리 전반에 대한 관리를 강화했다. 특히 감리자와 건축구조기술사의 배근 확인 주요 공정에 무량판 구조인 지하층이 포함된다. 설계·감리 부문의 입찰 비리를 막기 위한 종합심사낙찰제(이하 종심제)도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국토부는 지난해 1기 통합평가위원회 위원 임기가 만료함에 따라 위원 선출 과정에서 투명성을 높였다. 자천(自薦)을 금지하고, 기관장의 추천을 받도록 했다. 또 4단계 검증을 통해 위원들의 청렴성을 제고하고 성실·품위유지 의무 위반, 수사 진행 중인 사람은 제외했다. 이와 함께 주관성이 높은 정성평가 및 총점 차등제를 조정하는 등 종심제 심의 과정 전반을 손봤다. 국토부 관계자는 “건설현장의 안전·품질·불법행위에 대한 평가가 강화됨에 따라 건설사의 안전사고, 부실시공 방지 노력이 강화됐다”고 평가했다. 황정일 기자 obidius@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