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남자가 '드랙퀸' 변신? 무모한 도전 덕에 더 뜨거운 삶

    상남자가 '드랙퀸' 변신? 무모한 도전 덕에 더 뜨거운 삶

     ━  [비욘드 스테이지] 뮤지컬 ‘킹키부츠’ 롤라 역 강홍석   영화 ‘파일럿’에선 취업을 위해 여장을 한 조정석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에선 드랙퀸(화장과 의상으로 과장된 여성성을 연기하는 남자)이 아무리 짙은 화장을 하고 짧은 스커트를 입어도 남성성을 감추기 힘들다. 아니, 애초에 누굴 속이려는 게 아니다. 여성의 아름다움을 숭배하다 못해 직접 몸에 두르고 스스로를 만족시킬 뿐.   이런 남자들이 10년 전만 해도 미친 사람 취급 받곤 했지만, 지금은 독특한 성향을 인정받는다.   10주년을 맞은 뮤지컬 ‘킹키부츠’의 주인공 롤라도 한몫 했다. 2014년 초연 당시 상남자 포스로 ‘여자 옷을 입어야 자신 있는 남자’에 빙의했던 무명 배우 강홍석은 뮤지컬어워즈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현재 ‘하데스타운’과 ‘알라딘’까지 3개의 브로드웨이 대형 뮤지컬을 동시에 섭렵하고 있는 ‘강홍석의 시대’를 열어준 것도 롤라다.   제리 미첼이 가장 아끼는 한국 배우 7일 개막하는 뮤지컬 ‘킹키부츠’(11월 10일까지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의 주역 강홍석. 10년 전 무명배우였던 그는 이 작품으로 단숨에 스타로 떴다. 최영재 기자 “롤라는 누가 해도 사랑 받는 역할이에요. 요즘 ‘쥐롤라’도 인기지만, 10주년이 되니 초연 때 더블캐스팅이었던 오만석 선배가 많이 생각나네요. 정말 많은 가르침에다 밥까지 먹여주시면서 하나하나 같이 만들어 주셨거든요. 초연 끝내고 뉴욕에 공연 보러 갈 때 주신 용돈으로 지금의 아내와 함께 ‘알라딘’을 보며 언젠가 지니 역할을 꼭 하겠다고 다짐했는데, 그게 이번에 이뤄진 거라 감사한 마음이 더하네요.(웃음)”   뮤지컬 '킹키부츠'에서 드랙퀸 롤라를 연기하는 강홍석. [사진 CJENM] ‘킹키부츠’는 수퍼스타 신디 로퍼의 음악과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핫한 창작자 제리 미첼의 연출·안무로 토니상 6개 부문을 휩쓴 작품. 제리 미첼이 가장 아끼는 한국 배우로 알려진 게 강홍석이다. “처음엔 드랙퀸이면서 이성애자인 롤라의 정체성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제리 미첼이 미국·영국에는 그런 사람 너무 많으니 어렵게 접근하지 말라더군요. 분명 존재하고 있는 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메시지를 즐겁게 전하는 캐릭터가 롤라예요. 아마 제리 미첼이 자신을 투영한 것 같아요. 공연 때마다 꼭 오시는데, 말이 안 통해도 주변을 밝게 만드는 분이거든요. 65세에 복근도 엄청나시고, 정말 매력적인 분이죠.(웃음)”   그는 요즘 10년 새 달라진 세상을 누구보다 실감하고 있다. 초연 당시엔 캐스팅되고도 드랙퀸에 대해 잘 몰랐을 정도로 생소한 문화였다. “롤라의 기분을 느껴보려고 풀착장 상태로 대학로에 간 적이 있어요. 이렇게 쳐다보는구나 싶고, 택시 안 공기도 너무 이상했죠. 관객도 대부분 뮤지컬 마니아인 젊은 여성분들이었어요. 어느 순간부터 그분들이 주변인들을 데려오면서 점점 달라졌죠. 얼마 전 작은 콘서트를 했는데, 롤라처럼 꾸미고 온 ‘오빠’들이 정말 많았어요. 누구나 즐길 만한 공연인데, 그런 세상이 된 것 같아 좋네요.”   ‘킹키부츠’ 공연에서 드랙퀸 롤라 역을 맡은 강홍석(가운데)과 엔젤 역 남자배우들. [사진 CJENM] 스토리는 평범하다.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두 청년 찰리와 롤라가 서로의 빈틈을 채워주며 성공을 향하는 성장 스토리인데, 강홍석도 트라우마가 있었단다. “얼굴이 큰 트라우마였어요. 뮤지컬을 처음 접할 땐 조정석 선배나 주원 같은 훈남들의 직업이라 생각해서 꿈도 안 꿨죠. 최근까지도 누가 외모를 칭찬하면 늘 부정했는데, 한 팬이 편지를 주셨어요. 자기는 제가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사람이라 생각한다며 자신을 깎아내리지 말라는 말에 한방 먹었죠. 이제 제가 잘생긴 사람이라 믿으며 살기로 했어요. 미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른데, 그걸 알려줘서 고마워요. 정말 훈남이라고요? 엄청 노력하고 있어요. 오늘을 위해 어제 이 더위에 한강을 11㎞나 뛰었죠. 초연 오디션 영상을 보면 저도 깜짝 놀라요. 지금이 더 어려 보여서요.(웃음)” 20일 오후 강홍석배우를 중앙일보빌딩 스튜디오에서 중앙SUNDAY가 인터뷰 했다. 최영재 기자. 2024.08.20.   사실 강홍석은 국내외를 통틀어 가장 상남자 롤라다. 특히 해외 버전의 롤라들은 선이 고운데, 그를 상반된 캐릭터로 이끈 건 흑인음악이었다. “어려서부터 흑인이 되고 싶을 정도로 흑인음악을 좋아했어요. 힙합, 모타운 재즈, 아프리카 음악까지 들었죠. 그런데 제가 엄청 좋아하던 빌리 포터가 브로드웨이 초연 롤라였던 거예요. 그분 영상을 보고 갑자기 총 맞은 것처럼 가슴이 뜨거워졌죠. 너무 아름답고 섹시했거든요. 28년간 남성성만 키워왔는데, 나도 한번 아름다움을 고민해보면 어떨까 싶었어요. 다음날 바로 다이어트를 시작했죠.”   흑인음악 애정 담은 자작곡 싱글 내기도 그럼에도 롤라는 인생에서 가장 큰 도전이었다. 100㎏가 넘는 거구가 한 달 20㎏을 감량하는 등, 무모한 도전이 삶을 바꿔 놓은 셈이다. “지니처럼 ‘딱 내꺼’도 있지만,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을 거라곤 상상해본 적 없었는데, 세상 사는 데 정답은 없나 봐요. 중요한 건 뜨거움이죠. 전에도 제가 워낙 뜨거웠거든요. 뭐 하나 없을까 열심히 찾았죠. 뮤지컬 판도 분명 팝의 세상이 올 거라 믿으면서요. 클래시컬 쪽에선 ‘버터 빼라’는 얘기도 들었지만, 지금 브로드웨이가 다 팝 천지가 됐네요.” 뮤지컬 '킹키부츠'에서 드랙퀸 롤라를 연기하는 강홍석. [사진 CJENM]   그의 도전은 진행 중이다. 흑인음악에 대한 사랑을 담은 자작곡 싱글 앨범도 냈고, 최종 목표는 뮤지컬 영화를 만드는 것이란다. “‘라라랜드’나 ‘드림걸즈’ 보면 너무 부럽거든요. 우리 이야기로 그런 걸 꼭 만들고 싶어요. 제가 봉산탈춤과 마당극을 전공하다시피 했고, 마당극을 세계화시키는 게 꿈이죠. 꼭두각시놀음을 요즘 감각으로 만들면 어떨까요. 황정민 같은 배우가 출연하고 정재일 같은 분이 음악을 맡아 꽹과리· 장구·피아노·드럼까지 더한 멋진 작품을 찍을 생각을 하면, 심장이 떨립니다.” 강홍석은 지금도 뜨거웠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2024.09.07 00:59

  • 유럽에 수출하는 K타로…"페미니즘 타로냐고요?"

    유럽에 수출하는 K타로…"페미니즘 타로냐고요?"

     ━  ‘K타로카드’ 글로벌 인기, 바나 작가   한국 타로카드를 그린 바나 작가. 그의 타로카드는 국내외 펀딩에서 누적 5억원을 달성했다. 최기웅 기자 디지털 세상이 될수록 신비주의가 득세한다. ‘핸섬가이즈’ 같은 병맛 코미디도 오컬트와 만나 히트하고, 천만 영화 ‘파묘’ 덕에 한국의 무당과 굿이 해외에서도 환영받는 K컬처가 됐다. ‘K타로’까지 인기다. 서양 오컬트인 타로카드를 바나(김수진) 작가가 한국 문화로 재해석한 ‘한국 타로’는 국내외 크라우드 펀딩에서 누적 5억원을 모았을 정도로 핫하다. 올해 출간한 해설서 『바나의 한국 타로』(북레시피)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판권이 팔렸고, 미국과 대만에서도 관심이 높다.   메이저 카드 22장, 마이너 카드 56장으로 이뤄진 유니버설 타로카드는 역사가 깊다. 문양도 14세기 이탈리아 귀족의 생활상과 세계관을 표현했다는 게 정설이다. 고대 이집트 신화를 모티브 삼고 플라톤의 4주덕, 기독교 사상까지 포괄하고 있는 서양 신비주의의 집합체를 한국 문화로 번역한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싶은데, 해설서를 보면 다른 각도로 보게 된다. 남사당패 같은 민속예능부터 바리데기 같은 무속신화, 한복과 장신구 등 복식문화까지, 한국의 전통과 상징을 입체적으로 소개한 백과사전에 가깝다. 오방정색의 화려한 그림체도 마성의 매력으로 잡아당긴다.   바나 작가는 타로 마스터는 아니다. 영화 ‘인사이드아웃2’의 한복 포스터, 오리온 꼬북칩의 거북이 캐릭터 등을 그린 컨셉트 아티스트다. “본격 타로카드를 만들 생각은 아니었어요. 아트워크 개념으로 메이저 카드 22장만 그리려고 했죠. 그림 작가로서 의미와 상징이 담긴 그림에 관심이 많고, 그게 타로카드에 잔뜩 있잖아요. 타로를 테마로 작품을 하려고 펀딩을 했는데, 의외로 타로 마스터들이 78장을 다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더군요. 1년여 제대로 공부해서 풀세트를 만들었죠.”   바나의 한국 타로카드들. 5번 ‘교황’ 카드엔 한복 입은 성모를, 13번 '죽음' 카드엔 제주 차사본풀이 설화의 검물덕여인을 그렸다. [사진 북레시피] 그의 재해석은 주술을 떠나 철저히 시각적인 관점에서 이뤄졌다. 해설집에도 타로를 보는 방법이 아니라 도상들의 역사와 문화를 담백하게 소개했다. “예컨대 ‘교황’ 카드는 원래 근엄한 교황을 대머리 수도사 두 명이 받들고 있는 그림이고, 영적인 지지를 뜻하죠. 의미는 좋은데 할아버지 교황이 아니라 나를 토닥여줄 수 있는 영적인 존재면 어떨까 싶어서 한복 입은 성모로 바꿨어요. 수도승 대신 기도하는 손을 그리고, 장미와 백합은 그대로 가져왔죠. 배경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성전의 의미를 살려 절에 있는 꽃살문으로 대체했고요.”   타로 업계도 독특하고 그림이 예쁜 카드를 찾는 추세라지만, 한국 상징으로 외국인의 점괘가 나올까. “저도 궁금한데, 외국인들은 동양적인 신비에 더 끌리나 봐요. 근데 구도는 원본과 다르지 않거든요. K컬처에 관심 많은 사람들이 해설집을 재밌게 공부하면서 자기만의 카드로 만드는 것 같아요.”   교황을 성모 마리아로 바꾸는 등, 바나의 타로엔 여성이 많이 등장한다. 아니, 좋은 건 다 여성이다. 심지어 3번 여제와 4번 황제는 순서를 바꿨다. 다양한 버전의 타로가 있지만 순서를 건드린 건 최초란다.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어요. 타로를 그리며 화가 났던 게 여자는 순종, 풍요와 다산밖에 없고, 동적인 건 모두 남성이란 거였죠. 제 카드에 여자가 많은 건 단순히 예쁜 그림을 위해서인데, 황제·여제만큼은 의미 자체를 양보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3번에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효종을, 4번을 야망과 성공을 꿈꾸는 선덕여왕을 그렸죠. 하지만 성별을 걷어내면 카드의 의미는 같아요. 호불호는 있지만, 오랜 마스터들은 다 이해하시고 오히려 더 좋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어요.”   그렇다고 ‘페미니즘 타로’는 아니다. 중성적인 느낌을 추구했을 뿐이다. “제 카드는 예뻐야 되는 게 무조건이라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많아졌을 뿐이에요. 다양한 연령과 인상을 그리지 못한 아쉬움은 나중에 생겼죠. 그래서 새 작업은 할머니나 중년 남성 같이 다양한 인물을 넣고 있는데, 그들도 예쁘게 그리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사실 타로 종류는 엄청 많다. 중국·일본·베트남 타로도 있고, 무속인들이 쓰는 만신타로도 있다. 테마에 따라 다양한 문화가 담기지만, 바나 타로는 한국 역사와 민속에 대해 각주까지 단 해설서 덕에 해석의 결이 풍부해졌다. “원래 한국사 덕후거든요. 실록 읽기도 좋아하고, 궁궐이나 박물관도 엄청 다녔어요. 컨셉트 아트를 하다 보니 한국적 전통이나 한복을 많이 그리게 돼서 꽤 긴 시간 자료수집을 했었고요.”   타로 점을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없다. 다만 각종 상징들에 담긴 중용·절제·정의·인내 같은 덕목을 거울삼아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에 대한 불안을 다스리는 도구로 삼을 뿐이다. 그가 꼼꼼한 해설서를 만들면서도 고증에 집착하지 않은 이유다. “도서관에 발품 팔고 민속자료 사이트를 뒤지면서 셀프 검증한 정도죠. 이렇게 관심 받을 줄 몰랐고, 세계에 알리겠다가 아니라 그저 재밌는 아트워크로 작업했으니까요. 고증이 필요한 역사보다는 재미있는 전래동화 위주로 풀었고, 그래서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타로카드 이후엔 한국의 24절기를 담은 오라클 카드를 완성했고, 지금은 타로보다 직관적인 해석이 가능한 36장짜리 레노먼드 카드 작업에 돌입했다. 카드 제작비의 원천은 크라우드 펀딩이다. 17일 오픈하는 펀딩은 넷플릭스 드라마화 예정인 소설 『탄금』의 로맨틱 삽화 버전 『홍랑』판 24절기 카드로, 국내외에서 벌써 8번째 펀딩이란다. “글로벌 펀딩은 대행업체에서 콜라보 제안을 받아 시작했어요. 미국 킥스타터엔 우리나라 아이디어 제품이 많이 올라오거든요. 우리 같은 창작자들에겐 펀딩 플랫폼이 굉장히 요긴해요. 업체가 아니면 재고 감당하기도 힘든데, 펀딩은 금액이 달성되면 거기 맞춰서 제작하면 되니까요. 펀딩이 창작의 원동력이죠.”   그는 이제 펀딩의 달인이 됐다. 오픈하자마자 1등을 찍을 정도라 최근엔 펀딩 성공비법 강연도 했다. “초기엔 시행착오도 겪었어요. 타로가 아닌 한국적 굿즈는 실적이 저조했죠. 첫 타로 펀딩은 그렇게까지 잘될 줄 몰라서 당황했고요. 100명만 들어왔으면 했는데 1900명이 들어와 6400만원을 달성하니 혼자 감당하기 힘들더군요. 비법은 따로 없어요. 무조건 하라, 안 돼도 하고 보라는 것밖에.(웃음)”   ■  「 QR코드를 찍으면 인터뷰 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2024.07.06 02:16

  • 빌리 엘리어트 떨어진 소년, '발레계 변우석' 되어 날다

    빌리 엘리어트 떨어진 소년, '발레계 변우석' 되어 날다

     ━  [비욘드 스테이지] ‘대한민국발레축제’ 화제의 발레리노 전민철     지금 내가 뭘 본거지. 지난 6일, 2024 대한민국발레축제 기획갈라 ‘발레 레이어’(김용걸 안무·총연출)를 보면서 눈을 의심했다. 피아노 라이브 연주와 함께 서정적인 파드되 ‘산책’에 등장한 발레리노 전민철(한예종 무용원) 탓이다. ‘발레계 변우석’이랄까. 서양인도 울고 갈 우월한 피지컬부터 왕자 포스인데, 한치 흔들림없이 깔끔한 회전과 점프는 기본, 나비의 날갯짓처럼 우아하게 흐르는 춤선까지. 차원이 다른 남성 발레의 아름다움에 넋이 나갔다. 장인주 무용평론가도 “손끝부터 발끝으로 이어지는 긴 선, 우아한 자태, 부드러운 점프까지, 파리오페라발레의 심장이었던 니콜라 르 리슈의 젊은 시절이 떠오른다”고 감탄했다.   “마린스키 간판 김기민이 롤모델”  184㎝, 64㎏의 전민철은 유난히 긴 팔다리 덕에 독보적으로 우아한 춤선을 가졌다. 박종근 기자 잠시 후 이어진 ‘볼레로’의 솔로 탭댄서도 시선을 강탈했다. 선글라스에 수트 착장이라 느낌은 달랐지만, 독보적인 실루엣과 빈틈없는 퍼포먼스는 역시 민철이었다. 스무살 대학생 댄서의 팔색조 매력에 객석은 새로운 발레계 히어로 탄생을 인증했다. 함께 관람한 최태지 전 국립발레단장,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장도 “국보급이다” “대한민국의 기적”이라고 입을 모았는데, 아니나다를까. 클래식 발레의 최고봉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이 점찍었단다.   차원이 다른 남성 발레의 우아함을 보여주는 발레리노 전민철. 박종근 기자 더 놀라운 건 그가 2017년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최종 후보로 방송을 탔던 소년이란 사실이다. ‘볼레로’의 탭댄스 장인으로 변신할 수 있었던 이유다. 당시에도 ‘완성형 빌리’로 불렸으나 키가 웃자라 탈락의 쓴잔을 마셨던 소년이 어느새 ‘실사판 빌리’로 비상을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큰 무대와 많은 관객은 처음이었어요. 떨렸지만 연습한 걸 잘 펼치자는 마음이 컸죠. 공연을 즐겨야 한다는 마음으로 긴장을 덜어낸 것 같아요. 무대 위에 있는 사람이 여유로워 보여야 관객도 보기 좋잖아요.”   대한민국 발레축제 기획갈라 '발레 레이어' 중 김용걸 안무 '볼레로' 중심에 선 전민철. [사진 Photographer Baki] 민철은 발레축제의 또 다른 무대 ‘라이프 오브 발레리노’(유회웅 안무)에도 서는 등, 여러 단체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다. 지난해 유스 아메리카 그랑프리 우승 후 1년 새 급성장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안무가들의 뮤즈로 뜬 것이다. ‘발레 레이어’를 총연출한 한예종 김용걸 교수는 “‘볼레로’의 경우 30~40%는 민철의 안무로 봐야 한다. 함께 작품을 만들다 보면 내가 꽤 괜찮은 선생이 된 것 같고,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그 스승처럼 같이 성장하는 기분”이라고 했다.   대한민국 발레축제 기획갈라 '발레 레이어' 중 김용걸 안무 '볼레로' 중심에 선 전민철. [사진 Photographer Baki] “작년부터 교수님들 외부 공연을 많이 했어요. 학교에서 저만 이렇게 스케줄이 많아서 벅차긴 한데, 그 과정들이 저를 만들어준다고 생각해요. ‘볼레로’처럼 겁나게 힘든 작품도 절정으로 힘들 때 뿜어내는 에너지가 희열감으로 오는 게 되게 재밌거든요.”   스무살. 무대에서의 아우라와 달리 뽀얀 우윳빛깔 민철에게선 아직도 아기냄새가 났다. 7년 전 ‘빌리’가 못됐을 땐 어떤 심정이었을까. “많이 울었죠. 열정과 자신감이 넘치던 시절이라 키가 문제라도 뽑힐 거라고 기대했었거든요. 공연을 볼 땐 가장 많이 연습했던 ‘앵그리댄스’ 장면에서 눈물이 났고요. 근데 만약 빌리가 됐다면 지금 발레를 하고 있을까 싶어요. 그 당시 꿈꿨던 뮤지컬배우 쪽으로 갔을지도 모르죠.”   184㎝, 64㎏의 전민철은 유난히 긴 팔다리 덕에 독보적으로 우아한 춤선을 가졌다. 박종근 기자 민철의 발레인생은 빌리스쿨에 빚지고 있다. 빌리스쿨 전에는 한국무용을 했고, 탈락 후에는 춤을 잠시 포기했었다. “트레이닝이 다 도움됐지만, 가장 감사한건 따로 있어요. 떨어진 충격으로 무용을 관두고 평범하게 중학교를 다니다가 지지샘(‘빌리 엘리어트’ 안무감독 노지현)이 보고 싶어 찾아갔는데, 너는 발레를 해야 빛난다고 잔소리를 하시면서 선화예중에 편입제도가 있다고 알려주셨거든요. 그 잔소리 덕에 다시 시작한 거라, 정말정말 감사해요.”   당시 방송에서 발레를 반대하던 아버지도 묵묵히 응원해 편입에 성공했지만, 처음부터 날아다닌 건 아니다. “앞서있는 친구들과 비교를 당하니 스트레스가 됐어요. 부족한 걸 알면서도 맘처럼 안되서 노력도 많이 안했는데, 중3 때 나간 국제콩쿠르에서 큰 꿈을 갖게 됐어요. 콩쿠르가 열린 링컨센터에 다시 서고 싶고, 해외발레단에 가서 그곳을 대표하는 무용수가 되고 싶었죠. 그런 목표가 생기니 남들과 비교하며 받던 스트레스는 아무 의미 없더라고요. 내 목표만 보고 달리면서 실력이 부쩍 좋아졌죠. 예고 입학식날 실기 1등으로 제 이름이 불리니 친구들이 놀라며 돌아보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하반기 ‘라바야데르’로 만날 듯   184㎝, 64㎏의 전민철은 유난히 긴 팔다리 덕에 독보적으로 우아한 춤선을 가졌다. 박종근 기자 민철은 7월초 마린스키 입단 오디션을 위해 러시아로 간다. 마린스키는 아직도 동양인 단원이 2명밖에 없을 정도로 순혈주의가 강하고, 입단이 확실시되는 무용수만 오디션을 보는 것으로 알려졌다. 마린스키 간판스타 김기민이 민철을 적극 돕고 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마린스키가 꿈이었거든요. 김선희 교수님 통해 제 꿈을 알게 된 기민 선배님이 유리 파테예프 단장에게 영상을 보여주며 다리를 놔주셨고, 그 이후 비자 서류부터 오디션 작품 선정까지 모든 부분을 챙겨주고 계셔요. 기민 선배님의 춤도 춤이지만, 저도 커서 그렇게 후배를 이끄는 선배가 되고 싶습니다.”   민철의 마린스키 입성이 발레계에 경사만은 아니다. 내년 봄 떠나면 국내서 그의 무대를 보기 힘들어진다. 29일 발레축제 화성 투어, 7월 성남아트센터 발레스타즈, 8월 마포아트센터 M발레시리즈 등이 예정되어 있지만, 아직 클래식 전막 무대를 선보인 적 없다는 점도 아쉽다. 박인자 발레축제 조직위원장은 “해외 나가기 전에 국내 팬들에게 좋은 모습을 더 많이 보여주고 가야된다. 마린스키 김기민, 파리오페라 박세은도 국내발레계가 ‘돈키호테’ ‘백조의 호수’ ‘라바야데르’에 먼저 세웠기에 해외서 좋은 역할로 시작할 수 있었다”고 짚었다.   다행히 하반기 전막 데뷔가 성사될 가능성이 높다. 올해는 발레계 양대산맥인 국립발레단(10월)과 유니버설발레단(9월)이 가장 화려한 전막발레 ‘라바야데르’ 대전을 벌이는 해다. 양쪽 다 민철을 탐내지만, 객원 캐스팅 규정이 몹시 까다로운 국립에 비해 유니버설이 적극 움직이고 있다. 학생 신분이라 학교측의 최종 허가가 남았지만, 민철도 “기회만 된다면 꼭 전막을 하고 가고 싶다”며 의욕적이다. 올가을, 전사 솔로르로 도약할 전민철의 ‘그랑쥬떼(grand jete)’가 눈에 선하다.     ■  「 QR코드를 찍으면 인터뷰 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2024.06.29 00:01

  • 로또 당첨금 들고 튄 직장동료…국토종주 자전거길로 추격하다

    로또 당첨금 들고 튄 직장동료…국토종주 자전거길로 추격하다

     ━  국내 최초 ‘자전거 로드무비 소설’ 쓴 정진영 작가   국토종주 자전거길인 전북 진안군 모래재를 달리는 사람들. [사진 한국관광공사 오정식] 중소기업 회식자리에서 사장이 호기롭게 뿌린 로또가 1등에 당첨된다. 당첨금을 들고 사라진 과장을 잡아오면 연봉 1000만원을 올려 주겠다는 사장의 약속에 직원들은 SNS 속 단서를 찾아 때 아닌 자전거 국토종주에 나선다.   국내 최초 ‘자전거 로드무비 소설’이 나왔다. 직장인에게 느닷없이 주어진 5박 6일간의 일상탈출을 그린 정진영 작가(일러스트)의 신간 『왓 어 원더풀 월드』(북레시피). 자전거여행이라는 낭만적인 테마에 고용문제 등 사회적 소재, 로또당첨이라는 판타지에 미스터리 추격전과 반전의 휴먼드라마까지, 한편의 영화가 그려진다. 팔당역에서 능내역, 비내섬, 탄금대, 이화령고개를 넘어 낙동강하굿둑에 이르는 국토종주 자전거길 홍보영화로 딱이다. 추격자들의 이동경로를 따라 펼쳐지는 풍광과 맛집 등 ‘하드웨어’는 모두 실존하니, 국토종주 도전자를 위한 가이드북도 된다.   황정민·윤아 주연 드라마 ‘허쉬’ 원작자   정진영 작가 일간지 기자 출신 정진영 작가는 실제 자전거 마니아로, 고용노동부를 출입하며 수집한 중소기업 직장인들의 애환과 본인의 국토종주 경험을 버무려 소설을 썼다. “2016년 부장과 대판 싸우고 무작정 떠났거든요. 돈 안드는 여행이란 생각만 했지 아무 개념도 없는 상태로 저렴한 미니벨로 한 대만 사서 ‘개고생’을 했습니다. 1주일 만에 간신히 도착한 낙동강엔 별것 없었어요. 근데 집에 돌아오니 자꾸 생각이 나는 거죠. 4~5년간 전국의 인증된 자전거길은 모조리 달렸습니다.”   2011년 『도화촌 기행』으로 등단한 정 작가는 황정민·윤아 주연 드라마 ‘허쉬’(2020)의 원작자다. 앉아서 상상하기보다 발로 뛰어 취재한 현실밀착형 소설을 쓰는 게 모토인 소위 ‘사회파 작가’인데, 비교적 말랑한 신간이 “가장 어렵게 쓴 장편”이란다. “지금까지 쓰던 심각한 소설과 결이 달라요. 자전거길에서 풀내음 섞인 바람을 온몸으로 맞던 그 좋은 기분을 전하느라 힘들었죠. 그렇다고 한가한 힐링소설이 아니라 현실에 발을 붙여야 하니까요. 회사일이 바빠 엄두를 못내다가, 2020년 전업작가가 돼서 두 번째 국토종주를 한 다음 본격적으로 쓸 수 있었습니다.”   로또 당첨자를 추격한다는 설정만 허구일 뿐, 거의 실제상황이다. 고라니 울음소리와 뱀 출현에 기겁하고, 오밤중에 멧돼지와 대치하는 에피소드도 다 경험담이다. “앉은뱅이소설을 제일 싫어해요. 지금 벌어지는 우리 이야기를 쓰고 싶죠. 등장인물들도 아무 경험없이 국토종주에 나선 셈이라 제 경험들을 살려봤어요. 그렇다고 다큐와는 달라요. 다큐는 한발 떨어져 보게 되지만, 소설은 그 안에 몰입해서 간접경험을 하게 되잖아요.”   정진영 작가의 소설 『왓 어 원더풀 월드』. [사진 북레시피] 회식자리에서 뿌린 로또 당첨금을 회수하려는 사장의 찌질함도 사실적이다. 그 역시 2006년부터 한주도 빠짐없이 로또를 사고 있다는데, 거기서 추격전의 아이디어도 싹텄다. “누구나 일확천금의 꿈이 있고, 제 모습도 투영돼 있죠. 저는 매주 같은 번호를 사다보니 한 주라도 안 사면 불안해요. 그사이 그 번호가 당첨될까봐요.(웃음) 소설 속 ‘1, 2, 3, 43, 44, 45’ 라는 번호도 영 황당하진 않아요. 몇주 전 ‘11, 13, 14, 15, 16, 45’가 나왔잖아요. 현실이 소설보다 더한 셈이죠.”   그는 두번의 국토종주가 “생애 가장 잘한 일”이라고 했다. 길마다 나타나는 다채로운 풍경을 만나며 인생을 절로 긍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강 따라 달리다보면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을 못보고 살았나 싶고, 우리나라 살 만하네 느끼게 돼요. 물론 그런다고 인생이 바뀌는 건 아니죠. 그냥 마음가짐이 달라져요. 주인공도 계속 다니던 회사를 다니지만 훨씬 긍정적인 사람으로 진화하잖아요.”   국토종주 자전거길에 선 정진영 작가. 그는 자전거길 예찬론자다. “이렇게 살찐 내가 미니벨로를 타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간다는 게 자전거길이 없었다면 엄청 위험한 일”이란 것이다. 초심자에게도 안전한 자전거길이 애초부터 있었던 건 아니다. 2009년부터 4대강 정비사업과 함께 전 국토를 일주할 수 있는 자전거 전용도로가 닦였다. 이후 방치되어 오다 이번 정권 들어 정비사업을 재개해 올해까지 총 2237㎞의 국토종주 자전거길이 완성될 예정이다.   “최고의 코스는 한강 자전거길 양평구간”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같은 지역이라도 자전거길은 차로 가거나 걷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차로 하는 건 여행도 아니”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풍경을 보고 지나가도 하나도 기억이 안나니까요. 서울서 대전까지 3박 4일 걸어도 봤는데, 하루종일 풍경이 똑같아요. 자전거는 딱 그중간이죠. 모든 풍경을 보면서 속도도 적당해요. 이런 인프라가 세계적으로도 드문데, 그래서 자전거타는 사람들이 MB 안 미워해요.(웃음) 주요 길목에 있는 인증센터도 중요하죠. 여권처럼 스탬프를 찍게 돼있는데, 사실 그것 때문에 달릴 수 있어요. 힘들다가도 인증센터가 얼마 안남았다는 걸 알면 동기부여가 되거든요.”   자전거 여행이 마냥 안전하진 않다. 밤길을 달린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멧돼지와 대치한 순간은 생애 가장 큰 공포였어요. 밤에 혼자 산길을 힘겹게 내려온 순간 거대한 멧돼지와 마주친 거죠. 10분 넘게 대치했는데, 결국 멧돼지가 논두렁을 점프해 사라지길래 허벅지가 터져라 페달을 밟았죠. 사실 밤이 아니면 뱀이나 고라니를 만나도 안 위험해요. 야생동물은 사람을 보면 다 도망가거든요. 심지어 개구리를 삼키고 있는 뱀을 만난 적도 있는데, 개구리를 뱉어놓고 도망가더라구요.(웃음)”   그의 말처럼 자전거 여행이 다 드라마는 아니다. 다만 “능동적으로 뭔가를 성취해 본 경험의 영향력”을 전하고 싶단다. “요즘엔 신입사원 부모가 회사에 전화를 한다죠. MZ들에게 가장 부족한 게 뭔가 스스로 성취해본 경험이거든요. 주인공은 끝까지 완주를 해본 거고, 한번 해보면 다른 일도 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어요. 저부터 국토종주를 하고 나니 뭐든 하겠다 싶더군요. 그래서 퇴사하고 쓴 게 드라마 ‘허쉬’ 원작인 『침묵주의보』였죠. 작게나마 성취한 경험이 얼마나 삶에 영향을 주는가를 그리고 싶었어요.”   전국의 모든 자전거길을 섭렵한 뒤 꼽는 최고의 코스는 어디일까. 그는 ‘한강 자전거길 양평구간’을 강추했다. “초심자가 자전거길 매력을 느끼고 싶다면 양평이죠. 경의선이 지나가서 접근성도 좋고, 길도 편하고 풍경도 아름답거든요. 가장 아름다운 곳은 섬진강이고요. 제일 여행다운 맛은 제주도죠. 자전거 대여도 잘되고 숙소와 음식점, 편의점이 다 훌륭하니까요. 동해안은 숙소가 없고, 낙동강엔 아무것도 없어요.(웃음)”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2024.06.01 00:35

  • "눈 대신 기억과 상상력으로 봐…훈련하면 뇌세포에 한계 없어"

    "눈 대신 기억과 상상력으로 봐…훈련하면 뇌세포에 한계 없어"

     ━  [비욘드 스테이지] 빵터지는 코미디로 돌아온 송승환   중요한 회의를 할때 삼성전자의 시각장애인용 안경을 쓴다는 송승환은 제품 업그레이드에 피드백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는 “떨림현상과 선명도가 좀더 개선되어야 한다. 일반 안경처럼 가볍게 쓰게 될 날도 곧 올 것 같다”고 기대했다. 최기웅 기자 뛰어난 연기력과 타고난 말빨을 갖춘 만능 엔터테이너. 공연사에 길이 남을 글로벌 히트작을 만들어 세계를 누비고 올림픽 개폐막식까지 총지휘한 최고의 프로듀서. 그런데 정상에 올랐을 때 눈앞이 흐려졌다. 한국의 ‘위대한 쇼맨’ 송승환 얘기다.   쇼는 비극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송승환은 ‘쇼 머스트 고 온(Show must go on)’을 외치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비극을 희극으로 바꿔가고 있다. 심지어 희극의 대명사 ‘웃음의 대학’ 무대에 올랐다. 전쟁 중에도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연극에 사활을 건 작가와 연극 따윈 필요 없다는 검열관이 벌이는 100분간의 해프닝이다. 최고의 공연제작자인 그가 검열관이 되어 시침 뚝 떼고 공연을 방해하는 아이러니에 객석은 빵빵 터진다. “대본을 보고 제작사에 먼저 연락을 했어요. 억지로 웃기지 않고 내 역할만 충실히 하면 관객이 웃을 수밖에 없는, 정말 잘 쓴 작품이라 탐이 나더군요.”   오직 두 사람의 대화만으로 객석을 들썩여야 하는, 호흡이 핵심인 무대다. 전방 30㎝ 안쪽의 사물만 보인다는 그가 상대 배우와 어떻게 호흡을 맞출까. “기억력과 상상력으로 봅니다. 실루엣만 보여도 내가 기억하는 사람들은 알아보는 것처럼, 훈련하면 돼요. 중요한 지점에선 리허설 때 상대 배우를 촬영해서 그 표정을 기억해 두고, 무대에선 그걸 상상하며 연기하는 거죠. 인간 뇌세포의 능력이 무한하다 싶어요.”   대본 보고 제작사에 연락해 출연 자청   사실 믿기 힘들었다. 테이블 너머로 마주 앉아 기자의 눈을 보며 대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의 눈을 보는 것도 일종의 연기였다. “눈코입은 안 보여요. 꼭 보려면 아이패드를 렌즈 삼아 보죠. 리허설도 아이패드로 줌인해서 보면서 했는데, 암전 때 등퇴장이 제일 어려워요. 내려올 때 떨어질 뻔한 일도 있어서 상대 배우의 도움을 받아야 하죠. 몇 발자국 가면 계단이란 걸 세어 놓지만, 그래도 위험하거든요. 나보다 먼저 퇴장한 작가 역 배우가 암전 후 다시 뛰어들어와 나를 부축해서 들어가죠. 깜깜한 속에서 사실 그게 더 코미디일텐데.(웃음)”   “이 없으니 잇몸으로 산다”는 그에겐 도구가 많았다. 아이패드를 몸에 다는 웨어러블과 손전등이 달린 지팡이는 직접 만들었고, 공연을 보거나 중요한 회의를 할 땐 삼성전자가 개발한 시각장애인용 안경을 오페라글라스처럼 쓴단다. “처음엔 셀프로 확대경을 만들어 썼는데, 삼성전자에서 시각장애인용 안경을 개발한다고 연락이 와서 내가 마루타가 됐어요. 아직 좀 어지럽고 무거워서 업그레이드를 계속해야 하거든요. 이런 걸 개발해 주는 것만 해도 감사하고, 보통 안경처럼 작고 가벼워질 날이 곧 올 것 같아요. 불편한 건 적극 해결책을 찾고 있어요. TV를 볼 때 자막을 읽어주는 서비스도 제가 건의해서 삼성에서 이번에 나왔고, 전자책은 AI가 읽어주니 스탠드 켤 필요도 없어서 좋죠. 휴대폰 문자메시지가 안 보이는 게 가장 답답했는데, 읽어 주는 기능이 있더군요. 이런 것들을 아무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으니 찾느라고 시간이 걸렸어요. 하지만 나름 발견의 기쁨이 있고, 세상에 없던 걸 만드는 재미도 있더군요.”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직후 황반변성과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시각장애 4급 판정을 받은 그는 초기엔 어떻게든 고쳐보려고 했단다. 용하다는 한·중·일 의사를 모두 찾아가 치료를 받아도 효과는 없었다. “마지막에 미국의 망막전문 안과에서 누가 병을 고쳤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정말 큰 기대를 품고 갔어요. 거기서도 방법이 없다는 얘길 듣고 그날 밤새 혼자 펑펑 울었습니다. 근데 좌절감은 그렇게 털어냈어요. 다음날 아침 파란 하늘을 보는데 감사하다는 소리가 절로 나오더군요. 형체는 안 보여도 하늘이 보이는 게 어딘가요. 치료에 대한 희망은 접고, 이대로 살아갈 방법을 찾기로 했죠. 다행히 진행이 느려서 죽을 때까지 실명은 안 올거라네요.”   청춘스타로 누리던 최고 인기를 뒤로 하고 새로움을 찾아 뉴욕으로 떠날 만큼 천성이 진취적인 그다. 시각장애라는 위기도 송승환 답게 ‘도전’이라는 프레임으로 전환시켜 버렸다. “살다 보면 도전을 하게 되잖아요. 내게 첫 번째 도전은 ‘난타’였죠. 공연을 해외에 가져가 전용극장을 만든다는 게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까. 두 번째는 올림픽 개폐막식이라는, 수억 명이 보는 가장 큰 공연을 만드는 거였고, 지금이 세 번째네요. 안 보이는 상황에서 어디까지 연기할 수 있을까 하는 거죠. 때마침 코로나까지 터져서 극장문도 닫고 사업적인 위기까지 겹쳤지만, 시간적 여유가 생기니 유튜브에도 도전하게 됐어요. 원로배우들 인터뷰 아카이브인데, 구독자가 26만이에요. 어려서부터 그분들과 촬영장에서 잡담하며 들은 재미난 얘기들이 많거든요. 1번이었던 오현경 선생이 얼마 전 돌아가셨는데, 기록이라도 남겨놔서 그나마 다행이었어요.”   그의 대학로 사무실에는 68년 연극 데뷔작 ‘학마을 사람들’로 받은 동아연극상 트로피와 82년 ‘에쿠우스’로 받은 백상예술상 트로피도 진열돼 있었다. 그런데 90년대 이후 연기상이 없었다. ‘난타’ 이후 제작에 몰두했고, 연극 출연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2020년 ‘더 드레서’가 9년 만의 연극 복귀작이었으니, 시각장애가 그를 다시 무대로 불러온 셈이다. “이 눈으로 그나마 잘할 수 있는 일이 연기니까요. 그 중에서도 무대가 제일 좋아요. 집이나 사무실보다 무대라는 공간이 편하죠. 그 위에 있는 2시간만큼은 세상만사 다 잊는 선(禪)의 경지와 비슷하거든요. 고도로 집중해 몰입의 경지에 도달했을 때의 카타르시스는 길어야 2~3분씩 집중하는 매체 연기와 비교할 수 없어요. 그래서 돈도 안 되는 연극을 하는 거죠.”   앞만 보며 달려오다 앞이 잘 보이지 않게 되니 뒤도 돌아보게 됐다. ‘용서’와 ‘감사’라는, 전에 없던 감성코드도 생겼단다. “‘더 드레서’에서 내가 맡은 늙은 배우가 ‘나한테 필요한 건 망각 뿐이야’라는 말을 하거든요. 자기 과오를 후회한다는 뜻인데, 나도 인생을 돌이켜 보게 되니 남들에게 잘못한 게 많다는 걸 깨닫게 됐어요. 그런 기억을 잊고 싶고, 용서를 빌고 싶어요. 내가 이렇게 일해온 게 다 주변 사람들이 도와줘서 가능했던 거예요. 공연은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하는 일이니까. 지금도 눈 나쁜 배우를 뭐 하러 캐스팅하냐고 하면 끝이고, 동료들도 나 때문에 성가실 텐데 기꺼이 도와주고 있잖아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하는 습관 들여   연극 ‘웃음의 대학’은 20주년을 맞은 연극열전의 대표작이다. [사진 연극열전] 일본의 국민작가 미타니 고키의 대표작인 ‘웃음의 대학’은 평생 크게 웃어본 적 없는 무뚝뚝한 사람이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연극을 꿈꾸며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이야기다. 과연 있을 법한 일이냐 물으니 “비슷한 경험이 있다”고 답한다. “올림픽 같은 행사에서 공무원들과 일하다 보면 처음엔 그 위치에서 할 말만 하거든요. 근데 같이 몇 달 작업하고 나면 전혀 공무원답지 않은 언어로 오히려 아이디어를 내기도 하는 걸 봤어요. 극중에 검열관이 이렇게 재밌는 세상이 있는 줄 몰랐다고 고백을 하면서, 징집되는 작가에게 ‘꼭 살아 돌아와서 연극을 만들어달라’고 하잖아요. 공권력의 끝자락에서 국가주의를 외치던 사람이 희극을 통해 인간성을 회복한 건데, 그게 바로 연극의 힘인 것 같아요. 이런 주제를 어떻게 이렇게 코믹하게 풀었을까요.”   1965년 라디오 드라마 ‘은방울과 차돌이’로 데뷔한 그는 올해로 60년차 배우다. 하지만 공연제작자로 더 큰 업적을 남긴 게 사실이다. “‘난타’로 보관문화훈장, ‘평창’으로 체육훈장 맹호장, 진보와 보수에서 다 훈장 받은 사람”이라며 웃는다. ‘K팝’이라는 말도 없던 시절 사물놀이를 재해석해 해외시장을 개척할 엄두를 어떻게 낸 걸까. “80년대 뉴욕에서 3년 살면서 많은 경험을 했거든요. 내가 가던 해에 뮤지컬 ‘캣츠’ ‘레미제라블’ ‘오페라의 유령’이 다 오픈했는데, 한국에선 뮤지컬이 아예 없을 때니 높은 벽을 실감했죠. 근데 3년쯤 되니까 내가 만들어도 이거보단 잘 만들겠다 싶은 것까지 보이더군요. 아래도 보이고 허점도 보이니 뉴욕이 두렵지 않게 된 거죠.”   10년 전만 해도 배우로, 연출로, 프로듀서로 종횡무진하며 “하루를 3일처럼 살기에 많은 일을 할수 있다”던 그가 이제 “하루를 하루로 살면 된다. 서두르지 않고 뭐든지 천천히 하는 습관을 들이고 있다”고 말하니 어딘지 쓸쓸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많은 일을 한다. 밤에 ‘웃음의 대학’ 공연을 하면서 낮에는 어린이뮤지컬 ‘정글북’ 제작에 돌입했고, 7월엔 올림픽 개폐막식 해설을 하러 파리로 간다. 9월엔 ‘한국의 에든버러 페스티벌’을 꿈꾸며 파주페어 북앤컬처 총감독으로 다시 나선다. “3년간 야심차게 준비한 축제예요. 재작년에 파주출판도시가 출판을 넘어 문화예술이 함께 하는 도시로 업그레이드하고 싶다고 내게 강의를 부탁하더군요. 가서 에든버러 페스티벌 얘기를 했죠. 당장 에든버러에 가자더군요. 다녀와서 1년 넘게 축제 마스터플랜을 짰어요. 사실 ‘난타’가 97년에 한국 공연사상 최초로 에든버러에 가서 생각지도 못한 좋은 기회를 많이 얻었는데, 그 뒤로 별다른 히트작이 없었잖아요. 후배들을 돕고 싶어서 프린지 부문을 만들었어요. 두 편을 선정해 에든버러 출전을 지원할 겁니다. 이 눈으로 힘들지 않냐구요? 배우만 하기에는 조금 심심하잖아요.(웃음)”   송승환은 천상 ‘위대한 쇼맨’이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2024.05.25 00:01

  • 대사 많아 큰일났다 생각, 스타워즈 사전까지 공부했죠

    대사 많아 큰일났다 생각, 스타워즈 사전까지 공부했죠

     ━  한국 배우 최초 스타워즈 출연 이정재   해마다 5월 4일이면 영화 ‘스타워즈’ 팬들은 축제를 연다. 일명 ‘스타워즈 데이’다. 영화 속 명대사 “포스가 당신과 함께하기를(May the Force be with you)”의 발음이 5월 4일(May the Fourth)과 비슷해서 시작된 축제다. 한국에선 2015년부터 매해 스타워즈 데이 행사를 열고 있는데, 특히 올해는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 일대에서 4일, 5일 양일간 드론 쇼와 함께 팬 퍼레이드, 오케스트라 공연, 샌드 아트, 팝업 체험존까지 풍성한 볼거리가 펼쳐졌다.   한국 스타워즈 데이, 부산서 이틀간 열려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애콜라이트’에서 주역을 맡으면서 광선검을 든 ‘K-제다이’ 신화를 쓴 배우 이정재. [사진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가 올해 스타워즈 데이 행사를 키운 건 배우 이정재가 출연하는 8부작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애콜라이트’ 1, 2회가 6월 5일  전 세계 동시 공개되기 때문이다. 한국 배우 최초로 스타워즈에 출연해  ‘K-제다이’ 신화를 쓴 이정재. 그가 활약하는 ‘애콜라이트’는 평화를 수호하는 제다이 기사단의 황금기로 불리던 시대에 제다이 연쇄살인이 벌어지고, 그 뒤에 숨겨진 비밀과 새롭게 떠오르는 어둠의 세력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미스터리 액션 스릴러다. 9개월간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촬영을 마친 이정재가 맡은 역은 뛰어난 무술 실력과 지혜로 제자와 동료들에게 존경받는 제다이 마스터 ‘솔’. 5월 4일 부산 해운대 스타워즈 데이 행사장에선 ‘마스터 솔 이정재 스페셜 영상’이 선공개 됐고, 이정재가 직접 무대에 올라 스페셜 토크도 진행했다. 다음은 중앙SUNDAY가 이정재와 함께 나눈 이야기들이다.   영화 ‘스타워즈’에 대한 추억이 있다면. “어렸을 때의 충격은 컸죠. 이게 과연 영화가 맞나? 스타워즈 시리즈가 70년도부터 지금까지 영화 역사상 가장 큰 IP로서 게임, 피규어·광선검 등을 비롯한 완구, 체험 테마파크까지 다양한 산업과 협업하고 애니메이션·TV 시리즈로도 확장되는 것을 보면 많이 부럽고, 또 한편으로는 의욕도 생기죠.”   루카스 필름과의 작업은 어땠나요. “아카데미·에미상 수상자, 전 세계 톱 스태프들이 함께했는데 최고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진짜 심사숙고하고 집중하는 게 현장에서 느껴졌어요. 대본에 적힌 지문 한 줄, 대사 한 줄도 누구 한 명 함부로 바꾸지 않고 함께 상의하죠. 70년대부터 시작된 전체 이야기의 흐름과 맥이 닿아 있는지, 관객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고민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이런 노력들 덕분에 스타워즈의 가치가 여전히 빛나는구나 생각했죠.”   ‘애콜라이트’스틸. [사진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애콜라이트’는 에미상 후보에 올랐던 시리즈 ‘러시아 인형처럼’의 레슬리 헤드랜드가 연출을 맡았다. 함께 출연한 배우들도 쟁쟁하다. ‘당신이 남긴 증오’ ‘헝거게임’의 아만들라 스텐버그, ‘퍼펙트 스트레인저스’의 매니 자신토, ‘히스 다크 마테리얼’ ‘로건’의 다프네 킨 등 할리우드 대표 명작에서 열연을 펼친 배우들이 이정재와 함께 앙상블을 펼친다.   영어 연기가 쉽진 않았을 것 같아요. “내게 주어진 대사가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웃음) 미국에서 활동하는 배우가 아니니까 작품을 위해서라도 적당히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역할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캐스팅이 결정된 다음 8부작 시리즈의 대본을 보고 ‘이렇게 많이 나온다고? 이렇게 대사가 많다고? 이거 큰일 났다, 못한다고 해야 되나’ 생각이 많았죠. 솔직히 스크립트를 해석해서 읽는 것도 쉽지 않았어요. 스타워즈 시리즈의 내용을 다 알아야 인물 캐릭터 간의 역학 관계나 상황을 알 수 있는데 어떤 단어는 스타워즈 사전을 봐야만 알 수 있었으니까요. 무엇보다 일반적인 일상을 다루는 감정 신들이 아니어서 선과 악이 공존하는 캐릭터들 간의 대칭, 이런 것들을 어떻게 연기해야 할까 고민하는 게 쉽진 않았죠. 촬영이 끝나도 계속 영어 레슨이 필요해서 잠을 제대로 못 잤어요.”   내달 5일 1·2회 전 세계 동시 공개   캐스팅 제안을 받고 ‘광선검을 어떻게 거절하냐’ 했다죠. “‘광선검을 쓰는 역할이냐, 안 쓰는 역할이냐? 쓴다면 어떤 색깔이냐?’ 물어봤더니 딥 블루라고 하더군요.(웃음)”   K콘텐츠·K무비 글로벌 확산의 선두주자인데 부담감은 없나요. “현재를 최대한, 최대치로 잘 해내자는 생각뿐이에요. 내가 충실하게 한 작품을 끝낸다면 그 콘텐트는 조금 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스타워즈를 시작으로 ‘오징어 게임2’도 나올 거라 미국에 와서 중요한 미팅을 하자는 제안이 많아요. 해외 작품에 출연하는 건 의미 있고 소중한 경험이니 감사하죠. 더불어 한국에 직접 와서 촬영하는 해외 합작영화들도 많아져서 한국 콘텐트가 호평 받는 기회가 늘어나길 바래요. 제가 기획 혹은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작품들도 대부분 그런 것들이죠. 외국 배우들이 한국에 와서 벌어지는 일들…쉽지는 않은데 지금이 시도하기에 좋은 때가 아닌가 싶어요.”   정우성씨와 더불어 ‘매력적으로 참 잘 늙어가는 배우’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런 말씀 들으려고 관리도 하고, 더 노력도 하죠. 저도 안성기 선배 같은 훌륭한 선배님들을 보면서 저렇게 멋진 배우로 늙어갔으면 좋겠다는 꿈을 가졌으니까요. 우리 세대 배우들을 롤 모델로 삼는 누군가에게 ‘저 사람은 계속 열심히 하는구나’ 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어요.”   늘 패션 감각이 뛰어납니다. “해외 팬들 중에는 한국 셀럽들이 뭘 입고, 어떻게 꾸미고 나오는지 관심 있는 분들이 많으니까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요. 우리 어렸을 때 홍콩 배우들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인데, 이젠 한국 배우들이 참 세련되고 멋있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요. 콘텐트든 스타일이든 이야기의 중심이 한국이 됐으면 하죠.”     ■ 영화 의상 원단까지 고증해 입는다…스타워즈 글로벌 팬 조직 ‘501군단’ 「 지난 4일 부산 해운대에선 스타워즈 데이를 맞아 ‘501군단’ 퍼레이드 등이 펼쳐졌다. [사진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전 세계에서 펼쳐지는 ‘스타워즈 데이’의 가장 큰 볼거리는 다스베이더, 스톰트루퍼 등 영화 속 의상을 똑같이 입고 등장하는 팬들의 코스튬 퍼레이드다. 그 중에서도 ‘501군단’은 미국에 본부를 둔 글로벌 팬 조직으로 유명하다. 해운대 스타워즈 데이 때도 거리 퍼레이드로 큰 박수를 받은 501군단의 김유미 한국 지부장과 ‘팬 소장품 전시’ 부스에서 각종 의상과 무기를 선보인 김현도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501군단 명칭의 유래는. “영화 속 다스베이더의 직속 부대 이름을 땄다. 2017년 미국 본부의 승인을 받은 한국 지부 멤버는 32명이다.”(김유미)   멤버들은 미국 본부의 승인을 받은 의상만 착용해야 한다던데. “영화의 고증을 철저히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원단과 재질, 심지어 의상에 달린 작은 소품의 위치까지도 고증에 맞아야 한다. 모두 개인 소장품으로 그래서 군단에 들어오기 굉장히 까다롭고, 그만큼 열정이 엄청난 분들이 모였다.”(김유미)   부스 전시품들은 어떻게 수집했나. “키트를 구입해 직접 만든 것들이다. 해외에는 스타워즈 팬들이 많고, 그들이 영화 스크린 샷을 하나하나 찍어서 무기나 의상 매뉴얼을 만들어 공유하고, 키트를 만들어 판매도 한다.”(김현도)   지난 4일 부산 해운대에선 스타워즈 데이를 맞아 드론 쇼 등이 펼쳐졌다. [사진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정기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나. “비영리 목적의 집단이라 스타워즈 데이, 각종 영화제 참여뿐 아니라 봉사·기부 활동도 자주 한다.”(김유미)   악역인 다스베이더의 부대가 봉사활동을 한다니 재밌다. “우리의 모토는 ‘Bad Guys Doing Good(나쁜 놈들이 좋은 일을 한다)’이다.”(김현도)   땡볕에서 마스크 쓰고 고생하던데. “짐이 많아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힘들지만 다들 열정이 많아서 행사가 끝나면 엄청난 보람을 느낀다.”(김유미)   스타워즈의 매력은 뭔가. “사람들이 좋아하는 콘텐트가 다 들어있다. 광선검 같은 소품부터 로봇·우주·외계인이 등장하고 사랑과 선과 악도 있다. 오래 전 시리즈를 보면 20~30년 전 작품이라 요즘 눈높이로는 특수효과가 올드해 보일 수 있지만 스토리, 캐릭터 등 다양한 매력이 있는 작품들이라 일단 한 번 빠져들면 헤어나올 수 없다.”(김현도) 」        부산=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2024.05.11 00:38

  • 내 모든 걸 다 쏟아 부은 음악…이게 날 지탱해준 코어 근육

    내 모든 걸 다 쏟아 부은 음악…이게 날 지탱해준 코어 근육

     ━  희귀암 극복한 가수 윤도현   그런 목소리가 있다. 거침없이 포효하는 사자처럼, 울다가 지쳐버린 외로운 남자처럼, 등 뒤에서 조용히 위로해 주는 친구처럼 들리는 목소리. 이들의 공통점은 기교 없이 묵묵하고 담백하다는 것이다. 가수 윤도현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느끼는 바다.   20대는 폭주기관차, 지금은 KTX 목소리   3년 여의 암 투병 후 완치 판정을 받은 가수 윤도현은 지난 3월 대구를 출발해 6월 초 서울까지 이어지는 전국 투어 공연에 나섰다. [사진 디컴퍼니] 지난해 8월, 윤도현은 희귀성 암인 위말트 림프종 진단을 받고 3년의 투병 끝에 완치 판정을 받았다고 깜짝 고백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그가 무대로 돌아왔다. YB는 현재 3월 대구를 시작으로 수원·안산·창원·부산·인천 등 전국을 누비며 ‘2024 YB TOUR LIGHT; INFINITY’ 콘서트를 진행 중이다. 종착지는 6월 8·9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리는 서울 공연이다. 오직 음악과 조명만으로 정면승부를 하겠다는 포부로 시작된 YB만의 공연 브랜드 ‘LIGHT’에 무한함을 뜻하는 ‘INFINITY’를 덧붙였다. YB만이 할 수 있는 한계 없는 음악적 스펙트럼을 강조한 의미다.   방송 출연 외에는 내내 미디어 인터뷰를 거절했던 그와 지난달 26일 어렵게 만나 근황에 대해 들었다. 다행히도 그는 건강해 보였다. 콘서트 무대에서도 파워풀한 가창력은 여전하다. “아무래도 건강에 더 신경 쓰니까요. 투어 일정이 주말이라 금요일에 지방에 가면 무조건 호텔에서 8시부터 자요. 공연 끝나면 또 바로 와서 자고. 예전 같으면 자전거도 타고 등산도 했을 텐데 요즘은 공연과 건강에만 집중하고 있어요.”   이번 전국 투어에선 특별하게 공감 토크 ‘YB의 DM 레터’ 이벤트를 진행한다. 윤도현의 선후배 뮤지션과 지인들, 깜짝 게스트, 그리고 미리 사연을 보낸 이들이 무대에 올라 ‘공감’과 ‘위로’를 주제로 노래하고 이야기하는 코너다. 암 완치 소식 후 많은 암 환자와 가족들이 SNS에 ‘힘을 얻었다’는 메시지를 보냈고, 윤도현은 사연마다 모두 댓글을 달았다. 누군가 내 이야기에 공감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는 걸 알기 때문이다. 부산 공연에선 11살짜리 초등학생이 무대에 올랐다. 라디오 프로그램 ‘4시엔 윤도현입니다’에 10년 간 병마와 싸우고 있다는 사연을 보냈던 학생이다. 윤도현이 공연에 초대했고, 사연을 들은 관객들은 ‘흰수염고래’를 열창하며 소년을 응원했다.   공연이 아닐 때는 새 음반 준비에 몰두한다. 6월쯤 첫 선을 보일 새 음반 장르는 메탈이다. “고등학교 때 ‘단두대’라는 메탈 밴드를 했는데, 80년대 말 얼터너티브 장르가 생기면서 메탈이 촌스럽게 느껴졌어요. 이후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아플 때 우연히 유튜브에서 스타일리시하고 멋진 메탈 음악을 접하고 완전 빠져들었죠. 마치 우주여행을 하는 것처럼 자유로웠어요. 그래, 이거다!”   ‘필’은 받았지만 록 밴드 YB에게 메탈은 엄청난 도전이라 음반 작업이 쉽진 않다. “YB 스타일도 아니고, 멤버들 나이가 다 50이 넘어서 체력도 달려요.(웃음) 우리가 알던 클래식 메탈이 아니라 최신 메탈이라 더 어렵고. 에릭 클립톤이 메탈에 도전하는 격이랄까.(웃음) 그래도 모두 의지를 불태우며 맹연습 중이죠. 안 될 것 같은 걸 해내는 게 인생의 큰 재미니까요.”   보컬리스트인 그에게도 새로운 도전이다. YB의 색깔과 새로운 메탈의 접점을 찾으려면 멜로딕한 목소리와 ‘그로울링(낮은 톤으로 짐승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는 창법)’이 공존해야 한다. “한 곡에서 보컬리스트의 자아가 극과 극으로 바뀌는 거죠. 그로울링은 괴물 같은 소리라 들으시면 놀라실 거예요.”   KBS 환경 다큐멘터리‘ 지구 위 블랙박스’에 출연한 윤도현이 물이 차오르는 수조 안에서 노래하며 해수면 상승 위기를 경고했던 장면. [사진 디컴퍼니] 올해 나이 52세. 중년이 된 그는 어떤 고민을 할까. 옆에서 데뷔 때부터 29년을 지켜본 기획사 대표는 “형은 만년 뽀로로”라고 했지만 윤도현의 대답은 딱 대한민국 중년 남자다웠다. “멤버들끼리 만나면 애들 얘기, 교육 얘기, 돈 들어가는 얘기, 건강 얘기.(웃음) 록커도 아빠고, 남편이니까요.”   아빠 윤도현은 요즘 속으로 안절부절 못한다. 스무 살 딸내미가 곧 미국 유학을 간다. 딸이 커가는 세상은 남성 위주의 세상도, 여성이라고 무시당하는 세상도 아니길 바라며 부부의 성을 나란히 붙여 지은 이름은 ‘윤이 정’. 한자로는 ‘정(情)’. 당시 인기였던 초코파이 CF를 보고 지었다. “다른 광고들에 비해 가장 정서적으로 안정을 주는 광고였죠. 그 CF만 나오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좋았어요. 우리 애도 정을 나누는 사람이길 바란 건데, 이름 따라 간다고 진짜 정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에요.” 어차피 자주 뉴욕을 오갈 거라면 공연을 해도 좋겠다 했더니 “YB의 미국 시장 진출이 시급하다”며 활짝 웃었다.   신해철은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미친 사람   추억을 찾아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는 나이. 그는 얼마 전 ‘학전 어게인’ 공연을 하며 참 많이 울었다고 한다. “학전은 어머니 뱃속 같은 공간이고, 김민기 선생님은 아버지 같은 존재시죠. 김민기 선생님은 아프시고, 학전은 없어지고. 리허설 후 감정이 북받치더라고요.” 데뷔도 전에 윤도현을 알아본 김광석이 자신의 공연에 게스트로 그를 세웠던 공간 또한 학전이다.   어제 10년 전 세상을 뜬 신해철이 AI목소리 모델 ‘AI 신(新)해철’로 돌아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신해철의 생전 육성자료들로 음성 인공지능 모델을 학습시켰다고 한다. 각별했던 신해철과의 기억을 떠올리며 들려준 일화는 웃기면서도 애틋하다. “해철이 형은 애티튜드나 음악에 대한 열정이나 제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미친 사람이었어요. 그런 캐릭터의 사람은 두 번 다시 나올 수 없을 만큼. 개인적으로는 귀여운 형이었지만요. 술 마시자는 청을 귀찮아서 몇 번 피했더니 집으로 불러서 직접 음식을 만들어 주더라고요. 형이 살이 좀 찐 후라 앞치마를 두른 뒷모습이 장모님 같아서 한참 웃었죠.(웃음) 그날 저녁 형 작업실에서 컴퓨터에 담긴 미발표 곡을 밤새 들었어요. 미발표 곡이 무려 200곡이나 된다니 이 형 정말 미쳤구나, 대단하다 생각하면서도 새벽 무렵에는 너무 졸려서 형의 질문들에 대충 대답했어요. 그때 내가 더 잘 할 걸…아쉬워요.”   김광석·신해철 모두 아티스트로서 사회적 영향력이 컸던 선배들이다. 요즘 윤도현은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노력 중이다. KBS 다큐멘터리 ‘지구 위 블랙박스’ 촬영 때는 바닷물이 점차 차 오르는 수조 안에서 노래하는 퍼포먼스로 해수면 상승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메탈리카 30주년 앨범 ‘The blacklist’에 참여했던 관련 수익은 모두 환경단체 그린피스에 기부했다. 라디오에선 ‘가치합시다’ 코너를 통해 청취자들과 함께 텀블러 쓰기, 세제 물에 풀어 쓰기, 계단 오르기, 일회용품 사용 자제 등 일상 캠페인도 벌인다. “무분별한 난개발들로 자연이 무너지고 있으니 안타깝죠. 이제 단순히 보호·보존 차원을 넘어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위해 지구인 전체가 노력하고 연구할 때에요.”   올해는 YB가 결성된 지 29년이 되는 해다. 외국의 60~70대 밴드들이 노익장을 과시하며 공연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에게도 이런 밴드가 있기를 바라고, 그 기대를 YB에 걸어보는 이들이 많다. “데뷔 후 4년 간 앨범을 계속 발표했지만 히트곡이 없었어요. 그래도 계속 했죠. 사람들이 한 곡도 모르는 앨범도 있어요. 그런데도 계속 했어요. 대중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걸 다 쏟아 붓는 음악, 이런 음악이 우리를 오래 지탱해 준 코어 근육 같은 존재죠. 꾸준히 하는 것, 그 자체가 우리가 오래 갈 수 있는 에너지인 것 같아요.”   인터뷰 내내 그 특유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질문이 생겼다. 29년 동안 늙지 않는 목소리의 비결이 뭘까. “변했어요.(웃음) 20대 때는 폭주기관차 같았는데 지금은 KTX에요. 20대에는 투박하지만 불을 활활 태워가며 막 달렸다면, 지금은 뭔가 힘이 달리니까 노련미와 기술의 힘으로 보완하는 거죠.” 세월이 다듬은 윤도현의 진짜 목소리를 확인하려면 공연장에 가야겠다.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2024.05.04 00:29

  • 난 엄마 마에스트라…누구처럼 독재하면 요즘 다 도망가요

    난 엄마 마에스트라…누구처럼 독재하면 요즘 다 도망가요

     ━  [비욘드 스테이지] 여자경 대전시향 예술감독   배우 이영애의 최근작 ‘마에스트라’는 기대했던 음악드라마는 아니었지만, 남성중심으로 돌아가는 클래식 업계에서 고독한 여성 리더의 포스를 뿜어내는 이영애의 냉철한 카리스마 연기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젠더 파괴의 시대에 아직 ‘남성적 세계’가 좀 있다. 음악에선 대표적인 게 오케스트라 지휘다. 힘자랑을 하는 일도 아닌데 아직 남성 비율이 절대적이다.   한양대 대학원 ‘지휘전공 1호’로 유명   여자경 대전시향 예술감독 지난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서울시오페라단(단장 박혜진) 시즌 개막작 ‘라트라비아타·춘희’를 4일간 이끈 마에스트라는 여자경 대전시향 예술감독이었다.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자 손지훈, 카디프 콩쿠르 우승자 김기훈 등 초특급 오페라가수를 비롯해 200명에 가까운 연주자들이 1900년대 경성 배경으로 옮긴 낯선 무대에서 베르디의 음악을 역량껏 펼칠 수 있게 한 것이 그의 리더십이었다. “각색된 무대가 연주자들에게 쉽진 않죠. 장면이 바뀔 때마다 음악의 템포와 호흡도 다르거든요. 그래도 너무 좋은 가수들을 만나서 즐거웠어요. 사실 교향악 지휘가 훨씬 편하지만, 저는 오페라 지휘를 더 좋아하죠. 많은 분야 사람들과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성공적인 무대를 향해 가는 게 재밌잖아요.”   오페라 공연에선 흔히 오케스트라 피트 위로 솟은 지휘자의 뒤통수가 보인다. 여자경은 뒤통수 대신 열정적인 지휘봉만 보이는 작은 체구다. 한양대에서 작곡을 전공했지만 ‘지휘전공 1호’로 유명한데, 당시 대학원에 없던 지휘과 개설의 계기가 되서다. 그런데 지휘자가 되려고 지휘를 전공한 건 아니라니, 반전의 연속이다. “오페라 때문에 지휘공부를 하게 됐어요. 대학 오페라에 피아니스트로 참여했는데 성악가들 코칭하는 게 재밌더군요. 지도교수님이 오페라를 하려면 지휘를 해야 한다면서, 본인 경험을 살려 커리큘럼을 만들어주셨죠. 여자로서 승산이 있겠냐는 소리도 들었지만, 저는 지휘자가 되려던 게 아니라 지휘라는 학문이 궁금했어요. 오페라 코치나 교단에 서고 싶은 생각이었죠.”   임윤찬의 반 클라이번 콩쿠르 파이널 무대를 지휘하고 눈물을 흘렸던 마린 알솝이 런던 음악축제 BBC 프롬스 폐막 공연 최초의 여성 지휘자로 오른 2013년 이래 세계 주요 무대에서 여성이 약진하고 있다. 성시연·김은선·장한나 등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한국 여성도 꽤 있다. 여자경도 2020년 클래식 전문지 객석이 꼽은 ‘세계의 파워 여성지휘자 16인’ 중 하나다. 하지만 그가 시작한 1990년대만 해도 성공사례가 거의 없었다. “한국에서 배움의 장도 좁은 시절이었어요. 빈에 유학을 간 것도 내가 잘 배워서 좋은 지휘자 육성을 하고 싶어서였죠. 그런데 학교가 아니라 연주 쪽으로만 기회가 이어지더군요. 그렇게 조금씩 알려지면서 여기까지 왔네요.(웃음)”   짧은 커트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 무채색 일상복 차림의 그는 얼핏 중성적으로 보이고, 목소리 톤도 아주 낮았다. 그런데 지휘의 영역이 ‘남성적 세계’라고 인정하면서도 여성이라 특별할 건 없다고 했다. “남자였으면 좀 편하게 했을텐데 하는 생각은 가끔 해요. 출장을 가도 남자들은 짐싸서 가면 되는데 나는 아이의 일주일 먹거리를 다 준비해놓고 가야하니까요. 일하는 엄마들이 다 그럴테죠. 사실 올해 아이가 스무살이 돼서 조금 자유로워졌지, 그동안 애 밥 챙기느라고 쪽공부하면서 살았거든요. 모든 걸 다 직접 해 먹이는 편이라 해외에서 콜이 와도 못갔어요. 일 욕심도 많지만 엄마가 1순위란 생각으로 살았으니까요. 엄마가 지휘하는 거죠 뭐.(웃음)”   엄마의 그림자를 드러내니 솔직히 마에스트라의 카리스마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수십명 연주자를 일사불란하게 단결시키려면 ‘마에스트라’의 이영애나 영화 ‘타르’의 케이트 블란쳇처럼 강인한 이미지 메이킹이 필요한 것 아닐까 싶은데, “나는 포디움 위아래가 똑같다”고 답한다. “‘베토벤 바이러스’란 드라마도 있었지만, 요즘은 그렇게 하면 다시는 콜을 못 받아요. 같은 동료인데 내가 지휘라는 파트를 맡은 것일 뿐,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는 게 지휘자 역할은 아니죠. 소통이 정말 중요하고, 단원들이 동조하지 않으면 움직이지도 않아요. 단원들을 음악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게 지휘자의 카리스마죠. 지휘자 말이 맞다고 느껴야 소리를 내니까. 그러니 포디움 위에서 나 자신이 나올 수 밖에 없어요.”   최근 오페라 ‘라트라비아타·춘희’ 지휘   지난해부터 대전시향을 이끌고 있는 마에스트라 여자경. 10일 대전시향 40주년 특별 공연을 직접 지휘한다. [사진 대전시향] 같은 악보라도 지휘자에 따라 다른 음악이 탄생하니, 방점은 악보 해석에 찍힌다. 해석의 기준은 “악보의 비밀을 찾아내는 것”이란다. “악보의 70~80프로는 누구나 생각하는 정답이 있고, 나머지 20~30프로를 지휘자 해석으로 제안하게 돼요. 작곡가가 그 시대적 배경에서 악보에 마킹한 것들이 뭘 의미하는지, 남들이 찾아내지 못하는 걸 찾아내서 그대로 실현에 옮기기를 추구하면서 거기에 약간의 내 색채를 입히는 정도죠. 그랬을 때 연주자들이 동조하게 하는 게 지휘자 역량이고요.”   지난해부터 그가 이끌고 있는 대전시향은 올해 40주년을 맞았다. 10일에는 40년 전 창단 연주를 오마주한 특별 공연으로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 5번을 직접 지휘한다는데, 그의 해석은 뭐가 다를까. “차이콥스키가 교향곡 3악장에 왜 왈츠를 썼을까. 아직 요한 스트라우스가 살아있었고, 파티장에서 왈츠 추는 게 한창 유행이었기에 가져왔겠지 하고 유추를 해봐요. 후원자에게 5번 교향곡이 실패작이라고 털어놨던 만큼 전반적으로 우울한 모티브가 깔려있는데, 3악장만 유독 밝은 이유죠. 그런 걸 알고 접하느냐 아니냐는 사운드를 만들어갈 때 굉장한 차이거든요. 그런 보이지 않는 악보의 비밀에 예민하게 접근할 때 나만의 색채를 입힐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죠.”   그러고보면 지휘자란 센 직업이 아니라 굉장히 섬세한 일이다. 차별화된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게 다양한 오케스트라의 존재이유라서다. “예전에야 권위적으로 나를 따르라고 하는 게 카리스마인줄 알았지만, 요즘 그렇게 하면 다 도망가지 누가 따르나요. ‘타르’의 케이트 블란쳇이 멋있긴 해도 2024년에 그렇게 하면 지휘 못해요. 물론 단체를 끌고 갈 때 민주주의를 완전히 내버려두면 하나로 가져갈 수 없고, 1%의 독재가 가미되어야 하는 건 맞아요. 그 1%는 내가 책임을 져야 하고, 그만한 책임감이 있어야 리더라 생각해요. 좋은 건 너희 덕이고 안 좋은 건 내가 책임진다. 그 마음가짐이 지휘자 자격요건입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2024.05.04 00:27

  • 어느 순간 슈퍼히어로된 느낌…우리 노래, 이제부터 시작

    어느 순간 슈퍼히어로된 느낌…우리 노래, 이제부터 시작

     ━  ‘싱어게인3’ 홍이삭·소수빈   전 세계가 K팝에 열광한다지만 노래를 들으며 감동할 일은 잘 없다. 세련된 공산품같은 노래에 중독은 될지언정 감동은 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영혼이 느껴지지 않아서다. 최근 종영한 JTBC ‘싱어게인’ 시즌3에 대국민 문자투표 60여만 통이 몰리고 콘서트 티켓이 10분 만에 동 난 건 우리가 아직 인간적인 노래를 원하고 있다는 뜻이다. 1·2위를 차지한 ‘무명가수’ 홍이삭(58호)과 소수빈(49호)의 무대에 늘 감동했던 것도 기타 하나 달랑 메고 노래하는 이들의 정직한 목소리가 너무도 순수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외치는 음악 같다’는 누군가의 표현이 적확하다.   사실 파이널은 긴장감이 없었다. 미리 공개된 온라인 투표와 동영상 조회수에서 워낙 둘의 인기가 압도적이었다. 막판 음이탈을 한 홍이삭이 심사위원 평가에서 앞선 소수빈을 문자투표로 뒤집는 역전극이 있었을 뿐. “결국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누구 음악이 좋아졌는지가 중요한 거잖아요. 심사위원 점수는 잠시 기분이 좋을 뿐, 지나고 나면 큰 의미 없는 것 같아요.”(소)   일찌감치 라이벌 구도 형성 화제몰이   싱어게인3 우승자 홍이삭(왼쪽)과 준우승자 소수빈. 박종근 기자 “끝이 안 보이다가 이제 다 왔다 싶으니까 살짝 안일하고 교만해졌어요. 실수하는 순간 그 실수를 하기까지 빌드업된 사소한 결정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더군요. 난 아직 멀었구나, 한참 더 해야 된다 느꼈습니다.(웃음)”(홍)   오히려 일찌감치 두 사람이 맞붙은 2라운드와 5라운드가 하이라이트였다. 라이벌 구도인 둘의 한치 양보 없는 진검승부에 시청자들은 손에 땀을 쥐었지만, 막상 이들에겐 전우애가 싹텄단다. “5라운드 상대로 형을 지목했을 때 저를 응원하는 분들은 엄청 뭐라 했지만, 그게 옳은 선택이었어요. 우리 행동 하나하나가 이야기가 된다고 생각하니 쉽게 넘어갈 수 없었고, 어느 정도 스트레스가 있어야 배울 게 있잖아요. 실제로 많이 배웠어요. 결국 져서 패자부활전에 갔는데, 음악 인생에서 가장 진귀한 경험을 했죠. 그 순간에 너무 집중해서 뭔가에 씐 느낌을 받았는데, 나중에 봐도 그 때 표정은 제가 아닌 것 같아요.”(소)   “저는 사실 피하고 싶었어요.(웃음) 왜 이렇게 힘들게 하나 싶었는데, 어느 순간 수빈이를 잊고 제가 할 수 있는 걸 고민했죠. ‘싱어게인’이란 방송이 그런 것 같아요. 승부에 대한 갈급함과 동시에 내 음악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자연스럽게 만들어 주더군요.”(홍)   사실 홍이삭은 그 누구도 대적하고 싶지 않은 강적이었다. 2019년 ‘슈퍼밴드’로 주목받은 이후 꽤 인지도를 얻었다. ‘찐무명’이 아니라는 얘기다. “30대 중반이 되니 고민이 많아졌어요. 조금 알려지긴 했지만 현실적으로 통장에 돈이 없거든요.(웃음) 저만의 결을 갖지 못한 것도 불안했죠. 수빈이처럼 소신 있게 자기 결을 가져야 성장할 수 있고 듣는 사람도 안정적인데, 내면이 성장하기 전에 쉽게 유명해지는 길을 좇아왔던 게 잘못이란 걸 절감하고 돌파구가 필요한 상황에 ‘싱어게인’이 왔어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 한계에 부딪쳐 보고 떨어지는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자 생각했고, 가진 걸 다 쏟자는 각오로 도전한 거죠.”(홍)   [홍이삭-소수빈/20240127/상암동/박종근] jtbc 싱어게인3에서 각각 우승-준우승한 가수 홍이삭과 소수빈이 27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에서 중앙선데이와 인터뷰했다. 박종근 기자 아이돌 산업 위주로 흘러가는 음악시장에서 인디 뮤지션들이 설 자리를 찾기란 쉽지 않다. 홍대 인디씬도 사라져 시장을 스스로 개척해야 하니 닥치는 대로 활동해 왔지만, “어느 순간 넥스트가 없더라”는 게 소수빈의 말이다. “겁이 많아서 오디션 프로에 못 나갔어요. 나도 모르는 내 모습이 방송에 비치는 게 두려워서 적게라도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된다 생각했는데, 점점 리스너가 줄어드는 걸 보며 현실적인 고민을 하게 됐죠. 다행히 ‘싱어게인’이 좋은 기회가 돼서 다음 단계로 갈수 있었다 생각해요.”(소)   “좀 슬픈 게 중간이 없거든요. 시작하고자 하는 사람과 명성의 지점은 있는데 중간이 결국 오디션 프로인가 봐요. 100석, 200석짜리 공연장에서 지속가능한 문화가 없으니까요. 로드맵도 없이 페스티벌이나 행사를 뛰다 보면 내가 성장하고 있단 걸 알 수 없죠. 안개가 껴서 내가 보이지 않았어요.”(홍)   문자투표 60만통, 콘서트 10분 만에 매진   파이널 2라운드 경연 모습. [사진 JTBC] ‘싱어게인’은 자신을 재발견하는 장이 됐다. 사실상 제작진이 리드하는 다른 오디션 프로와 달리 자기 음악으로 승부하도록 자유와 책임이 부여되기에, 뮤지션 각자가 자신의 능력치를 시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자기 결을 지속할 수 있는 사람이 남게 되더군요. 선곡과 편곡이 각자의 몫인데, 사실 나답게 노래하려면 그 두 가지를 다 내가 붙잡아야 하죠. 5라운드에서 저는 엄청 대중적인 곡을 골랐지만 수빈이가 경연에 어울리지 않는 ‘트라이 어게인’이란 곡을 고르면서 ‘그냥 내꺼 하겠다’는데 진짜 멋있더군요. 그게 맞거든요. 떨어져도 결국 그렇게 가야 앞으로 10년을 더 갈 수 있는 거니까. 그게 ‘싱어게인’의 엄청난 차별점인 것 같아요.”(홍)   “이야기를 본인이 만드는 방송이었어요. 정말 원하면 하라고 하더라고요.(웃음) 방송이 원하는 방향도 있겠지만, 본인이 자신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자기 능력을 계속 시험하면서 재밌는 상황이 생기더군요. 내 한계를 알고 있는데, 어떤 순간 슈퍼히어로 같은 힘이 나온다는 걸 깨닫는 거죠. ‘싱어게인’ 하면서 아직 더 할 게 있단 것도 알게 됐어요.”(소)   “나만의 결이 없다”지만 홍이삭은 ‘자연주의’로 통한다. 서늘한 가을바람처럼 불어와 광활한 대지를 깨끗이 씻어내는 소나기 창법으로 뭉클한 서라운드 감동을 만들어낸다. 선교사인 부모를 따라 파푸아뉴기니의 대자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영향이 크다. “타이어 안에 진짜 튼튼한 고무 튜브가 들어 있거든요. 강에서 그걸 타고 한 4시간 동안 내려가면 폭포도 만나고 급류도 있고 진짜 재밌어요. 그렇게 맨발로 뛰어다니며 놀았던 것들이 정서적으로 기반이 된 것 같아요. 학교에서 브라스밴드 하고 록밴드 형들 동경하면서 음악이 얼마나 재밌는지 깨달았고요.”(홍) [홍이삭/20240127/상암동/박종근] jtbc 싱어게인3에서 우승한 가수 홍이삭이 27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에서 중앙선데이와 인터뷰했다. 박종근 기자   지금도 소년같은 외모의 소수빈은 솜사탕처럼 포근하고 살랑이는 봄바람처럼 촉각적인 음색이 귀를 간지럽힌다. 그런데 자기 음악에 대한 확신이 단단하다. 어릴 적 장난치다 오른쪽 검지가 절단되고도 독학으로 기타를 마스터 할 수 있었던 것도 애초에 자신을 의심하지 않아서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장롱 타고 올라가다가 손가락이 끼어서 잘렸어요. 어린 나이에 큰 충격이긴 했죠. 근데 애초에 기타를 치기 전에 다쳐서 익숙해요. 손가락이 짧아서 기타 치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번도 안 해봤죠. 어릴 땐 부끄러웠지만 지금은 당당하게 나의 자랑으로 삼고 있어요.”(소)   짧지 않은 세월 ‘무명가수’로 머물며 우여곡절도 많았다. 두 사람 다 음악을 포기할 뻔한 순간도 있지만, 주변의 도움이 있어 여기까지 올수 있었단다. “처음 들어간 회사에서 계약이 잘못돼 한 7년 음악을 제대로 못했어요. 친구들이 사회에서 자리를 잡는데 나는 꿈만 꾸고 있으니 어떡하나 싶더군요. 그만두려는 순간 감사하게도 가까운 사람들이 포기하지 말라고, 같이 노래하자고 손 내밀어 줬어요. 덕분에 음반을 냈고, 거기 힘 입어서 지금까지 하고 있죠. ‘트라이 어게인’을 불렀던 것도 그래서예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도 그 노래를 듣고 좌절 딛고 일어섰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요.”(소) [소수빈/20240127/상암동/박종근] jtbc 싱어게인3에서 준우승한 가수 소수빈이 27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에서 중앙선데이와 인터뷰했다. 박종근 기자   “20대 때 부정교합이 심해 음역대도 좁고, 얼굴도 비뚤어져서 무대 서기도 부끄러웠어요. 버클리 음대 유학을 가느라 집안 기둥뿌리도 뽑혀 있었고요. 막다른 길에서 후원을 받아 수술을 할 수 있었죠. 그 덕에 음역대와 발성도 좋아졌고, 잘생겼다는 말도 서른 지나 처음 들어봤어요.(웃음) 사실 지금의 얼굴과 성대가 제 것이라 생각 안해요. 선물로 받았으니 더 열심히 해야겠죠.”(홍)   경연 과정에서 이들은 ‘나다운 음악’에 대한 갈증을 얘기했었다. 주로 남의 노래를 불렀던 ‘싱어게인’에서 100% ‘나다운 음악’을 들려주진 못했을 터.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인 이유다. “49호는 49호답게 할 겁니다. ‘쉬운 가수’를 내걸고 나온 만큼, 나만 어려우면 되고 여러분에게는 쉬운 가수로 남으려고요. 아직 못 보여준 게 많아요. 재즈, 블루스도 잘하고 웅장한 것도 좋아하거든요. 경연은 차력쇼가 아니니까 안 했을 뿐이죠.”(소)   “전 좀 차력쇼를 한 것 같아요.(웃음) 매 라운드 더 이상 보여줄 게 없을 만큼 쏟아 부었거든요. 이젠 온전히 새로운 곡들에 내 이야기를 담는 게 숙제가 되겠죠. 아직 갈 길이 멉니다.”(홍)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2024.02.03 00:23

  • "연극배우 연봉이 200만원? 가난한 이미지에 가두지 마세요"

    "연극배우 연봉이 200만원? 가난한 이미지에 가두지 마세요"

     ━  [비욘드 스테이지] 연극 ‘와이프’ 화제의 배우 이승주   화제의 연극 ‘와이프’에서 마초와 게이를 넘나드는 폭넓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이승주 배우. 김상선 기자 최근 소녀시대 수영의 연극 데뷔작 ‘와이프’ 공연 중 관객의 대포카메라 촬영 사건이 화제였다. 우리 관람문화에 무지한 외국인 관객이 벌인 해프닝이었다고 한다. 엉뚱한 이슈가 터졌지만 ‘와이프’는 연극계 블루칩 신유청이 연출한 보기드문 웰메이드 연극이다. 영국 극작가 사무엘 아담슨이 입센의 ‘인형의 집’을 창조적으로 해체해 성소수자와 다양성에 관한 담론을 제시한 작품인데, 2019년 국내 초연 당시 동아연극상 3관왕과 최초의 백상연극상까지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이번엔 수영 뿐 아니라 정웅인·김소진·박지나·송재림 등 매체 배우들이 대거 출연해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소녀시대 수영·송재림 등 출연 유명세   그런데 연극팬이라면 이보다 놀랄만한 재발견이 있다. 마초남 ‘로버트’에서 동성애자 ‘아이바’를 거쳐 하남자 ‘핀’으로 3단 변신하는 배우 이승주다. 2010년대 한태숙 연출의 ‘유리동물원’, 김광보 연출의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M.버터플라이’‘사회의 기둥들’ 등 굵직굵직한 작품에서 주연으로 활약하다 2017년 예술의전당 기획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를 끝으로 무대서 사라졌다. 1년 전 국립극단 ‘세인트 조앤’으로 조용히 컴백했지만, 이번에 신들린 ‘게이 연기’로 빵 터졌다. 뮤지컬계 게이 연기의 달인 김호영이 연상될 정도인데, 빈틈없이 반듯한 외모라 더 충격적이다.   “스테레오타입의 동성애자 연기는 처음이라 초기엔 힘들었어요. 요즘은 매체를 통해 쉽게 접근할 수 있지만, 전형적인 표현이 될까봐 오히려 안 찾아봤거든요. 아이바란 인물이 가진 상태에만 집중하니 연출님에게 ‘너무 남자답다’는 걱정을 듣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 속된말로 ‘게이스런’ 몸짓이 조금씩 나오더군요. 역시 껍데기가 아닌 마음부터 채우는 게 옳은 선택이었나 봐요.”   걸그룹 소녀시대의 최수영(왼쪽)의 마초 남편 로버트도 이승주의 1인 3역 중 하나다. [사진 글림컴퍼니] 최초의 페미니즘 연극 ‘인형의 집’ 속 젠더 이슈가 현대에도 여전하듯, ‘와이프’도 1959년에서 시작해 1988년·2023년·2046년까지 시대별 에피소드의 순환구조 속에서 변함없이 소외받는 성소수자의 입장에 확대경을 댄다. 이승주는 막이 바뀔 때마다 전혀 다른 캐릭터로 변신하는데, 1인 3역이 경제적인 이유 때문은 아니다. “로버트같은 인물, 아이바같은 인물, 핀같은 인물을 한 배우가 하는 게 정말 큰 의미가 있고, 셋이 전혀 다른 사람이지만 근간에 내가 있다는 걸 드러내는 게 관건이에요. 극단적인 캐릭터 사이 벽을 깨부수는 거죠. 세 사람을 가르는 시선은 하나의 틀일뿐, 그 틀로 사람을 규정할 수 없다는 뜻 같아요. 단순히 퀴어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과 연극에 관한 이야기죠.”   2막에 20대였다가 3막에 50대 다른 배우로 등장하는 아이바는 동성 커플 관계상 갑에서 을로 극명한 변화를 보여주면서 작가의 의도를 대변하는 캐릭터다. “연습 때 실제 성소수자들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는데, 딱 ‘50대 아이바’같은 분도 있더군요. 굉장히 시니컬하고 자조적인 태도였는데, 중년 게이로 산다는 게 그만큼 힘들고 외롭다고 해요. 젊어서는 당당히 싸웠지만 점점 운신의 폭이 좁아진다는 거죠. 어쩌면 가장 소외된 계층일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스테레오타입의 동성애자 몸짓을 찰지게 표현하는 이승주. [사진 글림컴퍼니] 그들에게 공감이 잘 되냐고 물으니 “대한민국의 40대 남자 연극배우만큼 소외된 계층도 없다”고 답한다. “좀 웃픈 얘긴데, 연극한다고 하면 밥은 먹고 다니냐, TV는 언제 나오냐, 돈도 벌어야지 그래요. 30대까지는 미래성을 봐줬다면, 40대인 나를 보는 사회의 시선은 소외 그 자체죠. 연극에서 기반을 다져 매체에서 잘되신 분들이 토크쇼에 나가 ‘연봉 200만원이었다’는 식의 얘기는 제발 안했으면 해요. 본인이 좋아서 했고 얻은 게 있다면 그 시간과 노력을 돈으로 견줄 수 없는데, 그런 얘길 하면 어떤 부모가 연극하라고 할까요. 러시아처럼 존경받진 못할지언정 어둡고 가난한 이미지에 갇히는 게 속상해요. 연극 덕을 봤으면 연극이 너무 좋고 너무 배웠다고 말해도 모자란데, 한 달에 20만원 받았다는 얘기만 하는 건 화가 나요.”   완벽한 외모 때문에 편견을 갖기 쉽지만, 이승주는 누구보다 연극에 진심이다. 하지만 연극인이 연극만으로 연극판에서 버티기 힘든 시대인 건 사실이다. 그가 무대를 사랑하지만 떠나야 했던 것도 그래서다. 영화 ‘악녀’(2017), 드라마 ‘스케치’(2018) 등 매체 문도 두드렸지만, 개점휴업 상태가 오래 갔다. “작품 하나 끝나면 몇 개월 쉬게 되는 그 시간을 못 견딘 거죠. 우연히 전혀 다른 일을 하게 됐는데, 나름 성취감도 있더군요. 연기를 관두겠다는 결심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세월이 갔어요. 그런데 희한하게 힘들 때마다 한태숙, 김광보 연출님이 ‘너는 연극배우다. 잊지 마라’는 문자를 보내주셨어요. 혼자 많이 울었죠.”   5년 공백기 거친뒤 예민한 성격 둥글어져   연극 '와이프'에서 마초남 로버트를 연기하는 이승주. [사진 글림컴퍼니] 결국 다시 돌아온 것도 김광보 연출의 부름을 받고서다. 하지만 5년 만에 쿨하게 무대를 밟기란 쉽지 않았다. “미칠만큼 힘들었다”면서 오히려 데뷔무대답지 않은 연기력을 보여주고 있는 수영을 추켜세웠다. “발가벗겨진 느낌이라 처음엔 무대에 잘 서있기도 힘들거든요. 그런데 수영이는 종류는 달라도 큰 무대에 많이 서봐서 그런가봐요. 혼자 준비한 것뿐만 아니라 리액션도 잘하고 되게 살아있죠. 영감을 주는 배우랄까요.”   공백기가 약이 된 면도 있다. 연기에 대해 병적으로 예민하던 성격이 조금은 둥글어졌다. “너무 깊게 파고들지 않으려고 해요. 전에는 첫 리딩 때 대본을 다 외워갈 정도로 필사적이었죠. 연출님한테 새벽에 카톡 보내고. 그저 잘하고 싶은 순수한 마음이었는데, 그게 남을 불편하게 했다는 걸 쉬면서 깨달았어요. 본질은 그대로겠지만, 날카롭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전작인 ‘튜링머신’ 공연과 ‘와이프’ 연습을 병행하는 ‘겹치기’도 데뷔 이래 처음 해 봤다고. “스스로 가장 치열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지금 간절한 버킷리스트도 생겼다. “오래 전 로렌스 올리비에의 햄릿을 봤거든요. 마치 연극을 찍어놓은 것 같은 오래된 흑백영화였는데, 왠지 모르게 온몸에 전율이 일었고 그 영향으로 연극을 하게 됐어요. 그런데 10년 전 ‘유리동물원’ 드라마투르그였던 이화여대 강태경 교수님이 최근 햄릿에 관해 쓰신 책을 보내주셨어요. ‘자네의 햄릿을 꼭 보고 싶다’는 편지와 함께요. 복귀 후에도 늘 불안했었는데, 한 사람의 작은 관심이 다른 사람을 크게 변화시킬 수 있더군요. 죽을 때까지 연극을 놓지 말자고 결심했고, 햄릿도 꼭 하고 싶습니다.” 왕자형 외모에 살짝 미친 듯한 연기가 전매특허인 이승주 만큼 햄릿에 찰떡인 배우가 있을까.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2024.01.27 00:07

  • 대역전 드라마 쓴 ‘팬텀 키즈’…스포츠영화 같은 감동 줄 것

    대역전 드라마 쓴 ‘팬텀 키즈’…스포츠영화 같은 감동 줄 것

     ━  팬텀싱어4 우승팀 ‘리베란테’   최근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성과로 성악계가 떠들썩하다. 준결선에 진출한 남성 9명 중 8명이 한국인이었다니, 새삼 ‘가무의 민족’임을 실감한다. 최근 막 내린 JTBC ‘팬텀싱어’ 시즌4에서도 탄탄한 실력의 크로스오버 싱어가 여럿 배출됐다. 지난 2일 생방송으로 치러진 결승 2차전에서 대역전극 끝에 우승한 ‘리베란테’는 연세대 성악과 재학생 3명(테너 진원·정승원, 바리톤 노현우)과 성악을 전공한 뮤지컬 배우 김지훈이 뭉친, 평균 나이 26.7세의 역대 최연소 팀이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포기하고 출연   JTBC ‘팬텀싱어’ 시즌4 우승팀 ‘리베란테’. 왼쪽부터 바리톤 노현우, 테너 정승원, 뮤지컬배우 김지훈, 테너 진원. 최기웅 기자 쟁쟁한 유학파 선배들을 제치고 왕좌에 오른 건 팬덤의 힘이 컸다. 결승 1차전에서 월드클래스 카운터테너 이동규가 이끈 ‘포르테나’가 압도적인 점수로 우승 문턱까지 갔지만, 리베란테 팬덤이 대국민 투표에서 화력을 과시했다. 신촌 유플렉스 전광판에 리베란테 투표 독려 광고가 걸렸을 정도다. “신촌 한복판에 우리 얼굴이 걸리리라곤 생각해 본 적도 없거든요. 팬들이 함께 마음 모아서 해 주신 것인 만큼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김) “지쳐가는 타이밍에 그 메시지들이 너무 큰 격려가 됐어요. 보답하기 위해서 열심히 하자는 마음을 가졌던 게 11개월 여정에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노)   리베란테는 좀 이상한 팀이다. 혼자 나와서 4중창 팀을 결성해 가는 콘셉트인 방송이니 웬만큼 일심동체가 아닌 이상 팀 구성이 오리무중인데, 이들은 한 명씩 더해 가는 과정이 마치 무적의 아이템을 장착해 가는 듯했고, 깨지지 않을 팀이란 게 뻔히 보였다. “‘MZ네 진지맛집’으로 처음 완전체가 됐을 때 마음가짐이 절대 안 변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이 벅차오름은 한 번 느끼면 잊을 수 없는 감정이라는 걸 깨달았죠. 의리보다 더한 진심이 통했달까요.”(노) “처음에 원이와 ‘꼬제(Cose)’ 부르면서 가슴 속 뜨거움을 동시에 느꼈거든요. 승원이, 현우가 더해지면서 점점 뜨거워졌고요. 이 사람들과 함께 음악을 하면 이 뜨거움을 유지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있었어요.”(김)   13일 오후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 스튜디오에서 중앙SUNDAY가 팬텀싱어4 우승팀 리베란테를 인터뷰 했다. 최기웅 기자 2라운드 진원·김지훈의 ‘진지맛집’부터 탄탄하게 구축된 서사가 있었다. 듀엣 결성을 위해 서로를 탐색하는 장에서 지훈이 원에게 다가가 “빛나게 해 주고 싶다”며 끈질기게 구애(?)하는 과정이 생생히 전파를 탔다. 이후 한 명씩 더해질 때마다 아빠미소를 지으며 모두가 빛나는 무대를 만들어가는 지훈의 모습은 마치 마에스트로 같았다. “중창 팀에서 제가 메인이 될 사람은 아니란 걸 일찌감치 깨닫고, 그렇다면 내가 정말 좋은 사람들 모아 멋진 팀을 꾸려보자고 한 거죠. 빛나게 해 주겠다고 했지만 제가 도움 받은 게 더 많아요. 팀원들이 아이디어가 훨씬 많고, 저는 그저 정리하고 조율하는 역할만 하고 있어요.”(김) “혼자 무대에 서는 것과 교감하면서 노래하는 건 정말 다르더군요. 한 명이 늘어날 때마다 달라지는데, 지훈이 리더로서 음악에 빠질 수 있게 분위기를 잘 만들어줘서 좋은 무대가 나올 수 있었어요.”(진)   그런 지훈도 혼자는 어려웠다. ‘음색깡패’의 면모를 처음 과시한 프로듀서 예심 때는 사실 컨디션 난조로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전날 밤을 꼴딱 새고 새벽에 갔더니 목이 꽉 잠겨 버린 거예요. 시작하는 순간까지 극심한 공포감에 시달렸죠. 준비했던 것 하나도 못 보여드렸어요.”(김) “제가 같은 조라 다 목격했어요. 유독 긴장을 많이 하는 사람이 있더라고요.(웃음) 안절부절 못하고 굉장히 불안해 하길래 안쓰러웠죠.”(정)   2016년 시작된 ‘팬텀싱어’는 음악계를 어느 정도 바꿔놨다. 중장년층 여성 위주로 성악가들에게 대중적 팬덤이 생겨났고, 공연 시장의 판도까지 달라졌다. 최근 비중이 부쩍 커진 클래식 공연 중 티켓파워 상위권을 차지하는 건 크로스오버 공연들이다. 역사가 짧은 크로스오버가 당당히 클래식의 한 축으로 떠올랐고, 성악가들의 활동반경도 넓어졌다. 실제로 남자 성악도 상당수가 팬텀싱어 도전을 고민한다고 한다.   13일 오후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 스튜디오에서 중앙SUNDAY가 팬텀싱어4 우승팀 리베란테를 인터뷰 했다. 최기웅 기자 “노래하는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고민할 걸요. 무대에 대한 간절함이 있으니까요.”(진) “성악도들은 콩쿠르유학파와 팬텀싱어파로 나뉘는데, 중간에서 고민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아요. 유학파인 줄 알았던 승원이 형이 나올 줄은 전혀 예상 못했거든요.”(노) “사실 저는 어린 시절 싸이가 ‘챔피언’ 부르는 모습에 반해 노래를 시작했어요. 부모님 권유로 성악으로 돌려 순탄하게 노래를 해 왔는데, 뭔가 인생에 첫 도전을 해보고 싶던 차에 팬텀싱어가 타이밍이 잘 맞았죠. 근데 초반엔 참 어렵더군요. 나를 내려놓는 방법을 몰랐으니까요. 아무에게도 선택받지 못하고 남겨졌을 때 ‘진지맛집’을 만났는데,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 고민이 사라지고 정말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죠.”(정)   파바로티의 화려한 발성을 닮은 승원이 의외로 싸이로 인해 노래를 시작했다면, 진원과 노현우는 팬텀싱어로 인해 노래를 하게 된 ‘팬텀 키즈’들이다. 진원은 시즌1 우승팀 ‘포르테 디 콰트로’ 손태진의 사촌으로 유명한데, 무려 5수 끝에 성악과에 입성했다. 아이돌 같은 외모에 테너 치고 묵직한 발성이 반전인데, 알고 보니 바리톤으로 시작했다고. “형 때문에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권유가 있었는데, 고3 때 노래를 시작해 재수까지는 억지로 했어요. 3수 때부터 조금씩 애정이 생겼고 발전도 있었지만 시험운이 없었죠. 막판에 선생님 권유로 성부를 바꿨는데, 테너로서는 운 좋게 4개월 만에 들어갔네요.”(진) “저도 인문계 고등학생일 때 엄마가 챙겨 보시던 팬텀싱어를 중간에 우연히 보게 됐어요. 따라할 수도 없는 소리로 노래하고 화음 맞추는 것에 두근거림이 있었고, 저도 모르게 성악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죠. 팬텀싱어 무대에 서는 꿈을 품고 노래를 시작한 건데, 막상 나와 보니 너무 힘들었어요. 바리톤 솔로는 더 울림 있고 질감 있는 소리를 내기 위해 훈련하는데, 중창에서 튀지 않고 묻어나는 법을 모르겠더라고요. 근데 이 팀에서는 잘하고 있다고 칭찬을 해 주고, 신나게 하다 보니 어느새 묻어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됐어요.”(노)   ‘MZ네 진지맛집’ 으로 완전체 구축   지난 2일 결승 2차전에서 우승이 확정되자 기뻐하는 리베란테 멤버들. [사진 JTBC] 엄청난 성량의 동굴저음과 카운터테너 뺨치는 극고음을 겸비한 노현우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본선에 올랐지만, 팬텀싱어 일정과 겹쳐 과감히 콩쿠르를 포기했단다. 팬텀싱어가 되기 위해 성악을 시작했기에 당연한 선택이었지만, “언젠가 오페라에도 도전하고 싶다”고 했다. “팬텀싱어가 오페라나 성악계에도 긍정적인 작용을 한다고 생각해요. 팬텀싱어를 통해 음악을 사랑하게 된 저같은 학생도 있고, 오페라계에서도 크로스오버까지 할 수 있게 된 세상이 왔으니까요. 초창기엔 오해와 의심의 말들도 있었지만, 팬텀 출신이라고 오페라에 도전 못하는 세상도 아니고, 오페라를 한다고 팬텀에 도전 못하는 세상도 아니라 생각합니다.”(노)   13일 오후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 스튜디오에서 중앙SUNDAY가 팬텀싱어4 우승팀 리베란테를 인터뷰 했다. 최기웅 기자 3명이 대학생이라 기말고사 보느라 바쁘다는 ‘리베란테’ 청년들은 순수 그 자체였다. “음악 하는 사람들도 가지각색이지만, 신기하게 결이 같은 사람들이 모였다”(정)는 게 이들의 말이다. 선배 팬텀싱어들처럼 각자 완성된 예술가는 아니지만, 서로 부족함을 채워가며 합을 내는 모습이 훈훈하다. 제법 커진 크로스오버 시장에 막 뛰어든 ‘팬텀 키즈’들은 이제 흰 도화지를 어떤 색깔로 채워 나갈까.   “계속 듣고 싶은 음악을 하고 싶어요. 4중창은 직관적으로 자극시켜 줄 수 있는 힘이 있지만, 편안하게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음악, 가장 대중적인 크로스오버 팀이라는 말을 듣고 싶거든요. 자체 콘텐트도 만들고 여러 가지 모습 보여드리면서 대중에게 가깝게 다가가겠습니다.”(김) “4중창은 하나의 레이스 같아요. 노래 한 곡이 끝날 때까지 집중력을 절대 잃지 않고, 같은 감정과 같은 생각으로 하나도 어긋나지 않게 음을 맞춰 가는 과정이죠. 다양한 사람이 팀으로 모여 협력해서 역전승을 거두는 짜릿한 스포츠영화 같은, 그런 감동을 드리고 싶습니다.”(노)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2023.06.17 00:01

  • “팀 나와 몇달 폐인처럼 지냈다... 자유로운 지금이 내 본모습”

    “팀 나와 몇달 폐인처럼 지냈다... 자유로운 지금이 내 본모습”

     ━  [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성악가로 돌아온 ‘팬텀싱어’ 테너 김민석   ‘팬텀싱어’ 김민석이 돌아왔다. 시즌3 결승팀 ‘레떼아모르’의 멤버로 활약하다 훌쩍 무대를 떠난지 1년여 만이다. 지난 1월 예술의전당과 이천문화재단 신년음악회에 바리톤 김기훈, 소프라노 박소영 등 월드클래스 성악가들과 함께 등장했고, 지난달 발매한 첫 솔로 앨범 ‘아리아 다모레’는 클래식 차트 정상을 밟았다. 다음달 1일에는 롯데콘서트홀에서 첫 리사이틀도 연다.   컴백에 훈풍만 분 건 아니다. 지난해 건강문제를 호소하며 갑자기 팀을 탈퇴한 터라 레떼아모르 팬덤에선 곱지 않은 시선도 있고, 멤버들과 껄끄러운 사이가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크리스털처럼 쨍한 고음과 우유처럼 부드러운 중저음을 겸비한 테너 김민석의 독보적인 음색을 “1년여간 유튜브만 돌려보며 기다렸다”는 팬들이 더 많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서너달 동안 아무 것도 못했어요.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거든요. 누구도 못 만나고 집에서 나가지도 못했죠. 노래도 놓다시피 하고 폐인처럼 지냈는데, 그렇게 계속 살 순 없더군요. 조금씩 사람들을 만나면서 온기를 찾았고, 복귀를 위해 열심히 연습했어요. 일단 퇴보한 상태에서 준비 과정이 쉽진 않았죠. 성악은 조금이라도 게을리 하면 녹슬고 균형이 깨지는 몸의 기관과 같다는 걸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지난해 활동을 중단하고 잠적했던 ‘팬텀싱어’ 출신 테너 김민석이 최근 첫 솔로 앨범을 내고 컴백했다. 박종근 기자 ‘무책임하게 팀을 떠났다’는 비난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제작 여건상 하루 2회씩 공연을 강행해야 하는 그룹 활동은 테너에게 큰 무리였다. 서정적이고 중저음이 돋보이는 ‘리리코’로 훈련해 온 그가 극고음을 소화하는 ‘레제로’ 역할을 요구받으면서 “한도초과가 됐다”는 게 그의 말이다. “감사한 마음으로 활동을 시작했지만, 스케줄이 감당 안됐어요. 무대에 설 때마다 실수에 대한 불안이 쌓이면서 정신적으로 힘들어졌죠. 멤버들이 끌어주려 애썼지만, 도움 받을 수 없는 부분이 있으니까요. 고음 담당자로서 혹시라도 팬들 실망시킬까봐 매사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고, 저로 인해 피해가 가는 상황을 견딜 수 없어 팀을 떠나게 된 거예요. 멤버들에게 미안한 마음입니다.”   다시 나올 용기를 준 건 팬들이었다. 쉬는 동안에도 팬카페에 매일 들어가며 멀리서 팬들을 바라봤다는 그다. “들어갈 때마다 불안한 마음도 있었어요. 팀 탈퇴에 실망해 떠나가신 분들에겐 죄송한 마음뿐이죠. 그런데 활동할 때부터 저의 힘듦을 공감해 주신 팬들이 계시고, 그런 분들이 꾸준히 저를 기다려 주셨어요. 영상도 만들어 주고 옛날에 같이 했던 얘기도 나누면서요. 그렇게 제가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주신 것 같아요. 오래 기다리신 만큼 앨범이 좋은 선물이자 의미가 됐으면 합니다.” 팬텀싱어 출신으로 첫 솔로앨범 발매하고 리사이틀 예정인 테너 김민석. 박종근 기자   수줍은 미소 너머로 서글서글한 눈빛은 ‘팬텀싱어 올스타전’이 한창이던 2년 전 만났을 때와 똑같았다. 팬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이야기할 때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부쩍 말이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당시엔 아주 과묵한 사람처럼 보였는데, 팀 안에 수렴될 수 없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탓이다.   “그땐 정답만 추구했다면 지금은 저다워졌달까요. 솔직히 그 땐 눈치보기 바빴거든요. 제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미지라서, 실수하지 말고 완벽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팀 입장에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죠. 4차원이냐고요? 그런 소리도 듣지만, 저는 정상이라 생각해요.(웃음) 그냥 저는 생각이 달라요. 내추럴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고 인터뷰를 해도 솔직하고 싶거든요. 혼자가 되니 책임감은 무겁지만, 지금 제 모습이 더 저다운 것 같습니다.”   첫 솔로 앨범 ‘아리아 다모레’는 오페라 라보엠 중 ‘그대의 찬 손’, 아이다 중 ‘청아한 아이다’ 등 아리아 8곡을 오케스트라 반주로 녹음한 정통 클래식 앨범이다. 테너라면 꼭 도전해 보고 싶은 아리아들로만 골랐단다. “대학 시절 성악을 한창 배울 때 로망이었던 곡들로 골랐어요. 테너가 오페라 아리아를 오케스트라 반주로 녹음한 경우는 별로 없다던데, 그만큼 열심히 했습니다. 타이틀곡을 꼽으라면 ‘그대의 찬 손’이죠. 주변에서도 목소리가 잘 감긴 것 같다고 하고, 저도 꼭 완창해보고 싶었거든요.”   팬텀싱어 출신으로 첫 솔로앨범 발매하고 리사이틀 예정인 테너 김민석. 박종근 기자 클래식으로만 승부하려는 걸까 싶은데, “크로스오버 가수가 아니라 정통 테너로서 여러 장르를 소화하는 성악가로 자리매김하고 싶다”는 게 그의 말이다. 4월 1일 첫 리사이틀에서도 다양한 장르를 들려준단다. “첫 단독 콘서트를 너무 큰 홀을 잡아서 많이 부담이 돼요. 잘 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되고, 다 안 차면 어쩌나 싶고요.(웃음) 테너가 한 공연에서 마이크 없이 ‘찐 클래식’도 부르고 크로스오버도 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니거든요. 성악과 팝은 발성의 톤 자체가 달라서 잘 계산하지 않으면 금방 목이 지치고 고장이 나죠. 저는 성악가지만 다양한 노래를 색다르게 부를 수 있다는 걸 보여드리려 해요. 극비인데 ‘싱어게인’ 출신 게스트와 듀엣으로 팝도 부를 예정이니 기대해 주세요.(웃음)”   1부에선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고, 2부에선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중 ‘뮤직 오브 더 나잇’, ‘지킬앤하이드’ 중 ‘지금 이 순간’, ‘웨스트사이드스토리’ 중 ‘마리아’ 등 대표적인 뮤지컬 넘버들을 부른다니 문득 궁금해졌다. 오페라나 뮤지컬에서 그를 만날 수도 있을까. “오페라는 대학 때 모차르트 ‘코지판투테’에서 페란도 역을 한 번 해본 적 있어요. 오페라나 뮤지컬이나 워낙 많은 사람의 노고가 필요한 분야인데, 제가 갑자기 할 수 있는 건 아니죠. 아직 경험도 부족하고 연기도 해본 적 없으니까요. 만일 ‘오페라의 유령’ 섭외가 온다면요? 그럼 해야죠. 기왕 할 꺼면 팬텀 역을 하겠습니다.(웃음)” 팬텀싱어 출신으로 첫 솔로앨범 발매하고 리사이틀 예정인 테너 김민석. 박종근 기자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2023.03.25 00:02

  • “플랫폼·개발사·소비자 모두 웃는 앱 생태계 만들어야”

    “플랫폼·개발사·소비자 모두 웃는 앱 생태계 만들어야”

     ━  장대익 가천대 창업대학장   장대익 가천대 석좌교수 는 “글로벌 플랫폼 기업이 영세 개발사와 함께 성장하는 게 중요하다는 관점을 갖고 실천하는 점을 국내 기업들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 플레시먼힐러드코리아]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에서 게임·웹툰·동영상 등의 유료 콘텐트가 있으면 소비자는 앱의 내부 결제 시스템을 통한 ‘인앱결제’를 해야만 한다. 앱 유통 플랫폼을 운영하는 기업들이 2020년 이를 의무화해서다. 이 때문에 논란도 거셌다. 특히 콘텐트 개발자들은 플랫폼에 30%씩 내야 하는 인앱결제 수수료 부담이 큰 것을 호소했다. 그러자 구글은 자사 앱 유통 플랫폼 ‘구글플레이’에서 유료 콘텐트를 판매하는 개발사들에 받던 인앱결제 수수료를 2021년 7월부터 반값 수준으로 인하했다. 최초 100만 달러(약 12억6000만원) 매출에 15% 수수료를 적용, 이를 초과한 매출에 대해서만 30% 수수료를 받는다. 전체 개발사의 99%가 연매출 100만 달러 미만임을 고려하면 영세 사업자일수록 비용 부담을 덜게 된 셈이다.   7일 만난 장대익 가천대 석좌교수(창업대학장)는 “구글 측이 ‘앱생태계상생포럼’을 통해 각계 의견을 청취하는 데 열린 자세를 가졌기에 가능했던 변화”라며 “수직적 의사 결정 구조가 강한 국내 대기업들이 배울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앱생태계상생포럼은 국내 앱 생태계를 둘러싼 다양한 시각을 공유, 앱 생태계의 상생과 지속 가능한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2020년 11월 구글코리아가 발족한 전문가 포럼이다. 장 교수가 의장을 맡은 가운데 정보기술(IT)·법률·심리·언론 등 다양한 분야 전문가 10명이 각 기수 멤버로 참여했다(현재 3기 운영 중). 구글의 수수료 인하는 이 포럼에서 나온 목소리가 반영된 결과물 중 하나다.   지난해 서울대 교수를 하다 가천대 창업대학장으로 옮길 때 큰 화제가 됐는데. “종합대학에서 창업대학을 따로 만들어 본격적으로 창업 관련 교육을 하는 게 한국 사회에선 새로운 일이다. 흔히 하는 말로 ‘맨 땅에 헤딩’이었다. 진화심리학자로서 학생들한테 인간에 대한 이해도를 가르치는 데 힘쓰고 있다. 모든 비즈니스의 핵심은 타인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기가 나빠져서 창업 열기도 확 식지 않았나. “확실히 힘든 시기다. 하지만 지금이 오히려 창업 준비의 적기(適期)다. 혹한기인 지금 아이디어를 잘 발전시키면서 내실 있게 준비했다가 경기가 좋아질 때 치고 나가면 된다. 현재 창업대학 1기 수료생 30명이 희망찬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앱생태계상생포럼 의장을 3기째 맡고 있다. “처음 구글코리아에서 의장을 맡아달라고 했을 때 고민이 많았다. 특정 기업 입장을 대변하는 모임이 되진 않을까 해서였다. 초기에 인앱결제 문제를 논하면서 구글 측 반응을 살폈더니 외부 의견을 진심으로 경청하려 한다는 게 느껴졌다. 김경훈 구글코리아 사장은 2021년 2월 취임 이후 단 한 번도 포럼에 결석하지 않았다. 적당히 축사(祝辭)만 하고 빠지는 게 아니라 들은 내용을 빽빽이 기록하고 더 고민하면서 포럼에서 나온 얘기를 임직원들과도 계속 공유한다고 들었다.”   포럼에선 어떤 얘기들을 하나. “데이터 문제, 알고리즘의 편향성, 웹 3.0, 스타트업 지원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구글코리아 경영진과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다보면 나도 많이 배운다. 구글 전체에서 이런 포럼을 여는 곳은 한국밖에 없지만, 여기서 나온 얘기가 번역돼 미국 본사로 넘어간다고 들었다.”   운영 성과는. “인앱결제 수수료를 기존 30%에서 15% 비율로 낮추는 데 일조한 게 대표적이다. 과거에 비해 영세 사업자들이 그만큼 구글플레이에 입점하기 좋은 환경이 됐다. 포럼에 참여하는 법학자와 심리학자, 개발자, 뇌과학자 등이 앱 생태계의 진화 방향을 입체적으로 고민한다. 플랫폼 기업과 콘텐트 개발사, 소비자 모두 웃는 앱 생태계 조성이라는 목표를 위해서다.”   앱 생태계가 왜 중요한가. 소비자 입장에선 단순히 서비스가 빠르고 사용료가 저렴하면 그만 아닌가. “플랫폼마다 수많은 개발사가 입점해 자기 것을 판매하고, 수많은 소비자가 그걸 이용한다. 그 과정에서 개발사는 각종 법적 리스크로부터 최대한 자유로워야 하고, 소비자는 안전하게 개인 정보를 보호받아야 한다. 이렇게 되도록 플랫폼 기업이 시간·비용을 들여서라도 제 역할을 해야 한다. 누구나 개발자가 될 수 있고 누구나 소비자가 되는 지금 같은 환경에서 앱 생태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이해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든 현명하게 앱을 다룰 수 있다.”   인앱결제 의무화는 논란이 거셌다. “나도 처음엔 소비자 입장에서 부정적으로 봤는데 포럼 활동을 하면서 다양한 의견을 들으니 (인앱결제가) 필요하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관점을 바꿔 서비스 유지를 위한 비용이라고 볼 수 있다. 구글이 운영하는 유튜브만 봐도 극소수의 잘나가는 스타 유튜버가 대부분의 수익을 가져가고 대부분의 유튜버는 수익이 거의 없다. 이들도 유튜브 생태계를 건강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 보상이 없다면 불공정한 게 아닌가. 이게 평상시의 내 불만이었다. 그런데 거꾸로 구글 측은 소수로부터 발생하는 수익을 대다수가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서버 등의) 유지비로 쓴다고 하더라. 기업 입장에선 이런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플랫폼 기업과 영세 개발사 간의 상생도 중요한데. “구글의 경우 구글플레이에 새로 입점한 영세 개발사로부터는 돈을 받지 않는다. 충분한 시간을 준 다음 일정 수준 매출이 발생해야 돈을 받기 시작한다. 구글은 스타트업 지원 프로그램 ‘창구’(창업+구글플레이)를 통해 국내 소규모 개발사들이 해외에 진출하려 할 때 초기 마케팅 비용 등을 지원해주기도 한다. 글로벌 기업으로서 다른 스타트업과 함께 성장해나가는 게 중요하다는 관점을 확실히 갖고 있다. 국내 기업들이 배울 점이다.” 이창균 기자 smilee@joongang.co.kr

    2023.02.18 00:56

  • 김기현 국민의힘 당대표 후보 “당정은 밀당 부부, 대통령과 손발 맞는 당대표 필요”

    김기현 국민의힘 당대표 후보 “당정은 밀당 부부, 대통령과 손발 맞는 당대표 필요”

     ━  [국민의힘 전대 ‘2강’] 김기현 당대표 후보   김기현 국민의힘 당대표 후보는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지금은 대통령과 손발이 맞는 대표가 꼭 필요한 시기”라며 “보수 정체성 측면에서도 내가 적임자”라고 강조했다. 김상선 기자 김기현 국민의힘 당대표 후보는 자신을 ‘승리의 리더’로 정의했다. “2021년 소수 야당 시절 원내대표를 맡은 뒤 20%대였던 당 지지율을 2배 가까이 끌어올리고 정권 교체와 지방선거 승리를 이끌며 2전 2승을 기록했다. 스포츠에 빗대면 A매치 승률 100% 사령탑”이라면서다. 그러면서 “이젠 일하는 여당의 모습으로 총선에서 승리해 윤석열 정부의 성공을 이뤄낼 것”이라며 “이를 위해 지금 우리 당은 대통령과 손발이 맞는 당대표가 꼭 필요한 시기”라고 강조했다.   관련기사 “내년 총선 170석 압승으로 정권 교체 결자해지할 것” 3·8 국민의힘 전당대회가 중반전에 접어들면서 그 어느 때보다 선명성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100% 당원 투표제 도입으로 열성 당원들 표심이 당락을 결정짓는 최대 변수로 떠오르면서 당대표 후보들도 TV 토론과 합동 연설회에서 정통 보수의 정체성을 앞다퉈 강조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김 후보는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오랜 세월 보수 정당을 굳건히 지켜온 뚝심으로 세대·지역·계층을 두루 포용하는 당대표가 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당정일체론’을 거듭 주장하고 있는데. “당정 관계는 ‘밀당 부부’에 비유할 수 있다. 당과 정부는 운명 공동체다. 잘되면 같이 잘되고 잘못되면 같이 잘못되는 사이다. 별거 중인 부부 관계가 아니란 뜻이다. 더 나아가 당정이 건강한 부부 관계로 거듭나려면 때론 밀당도 필요하다. 한쪽 입장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게 아니라 서로 치열하게 논의하고 협의하는 과정이 뒷받침돼야 한다.”   일각에선 당이 ‘용산 출장소’로 전락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적잖다. “터무니없는 소리다. 자꾸 대통령의 당무 개입을 지적하는데 참 답답한 노릇이다. 애당초 대통령의 당무 개입이란 용어는 성립하지 않는다. 당헌 8조를 보면 대통령에 당선된 당원은 당의 정강 정책을 국정 운영에 잘 반영하고, 당은 대통령이 업무 수행을 잘할 수 있도록 협조하게 돼 있다. 민심을 정책에 반영하기 위해 대통령이 집권 여당과 머리를 맞대는 걸 어떻게 당무 개입이라 할 수 있나.”   윤 대통령의 명예 대표 추대 가능성은. “전혀 없다. 당헌상으론 대통령이 명예직을 갖는 게 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대통령과 당은 동지적 관계다. 어떤 직책을 따로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부부 관계에서 남편이면 남편이고 아내면 아내지 명예 남편이라고 부르는 걸 본 적이 있나.”   김 후보가 당대표가 되면 ‘윤핵관’이 득세할 것이란 지적도 끊이질 않는다. “오히려 윤핵관이 왜 나쁜지 되묻고 싶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에도 ‘가신’이라 불린 측근 그룹이 있었는데, 그럼 그들도 다 나쁜 사람인가. 문재인 정권 때도 운동권 출신 인사들이 대통령 주변에 많았는데 그들도 무조건 찍어내야 할 대상인가. 오로지 자신들 필요에 따라 상대방을 비판하기 위해 만든 나쁜 프레임일 뿐이다. 대통령에게 믿을 만한 정치적 동지가 있다면 그게 더 바람직한 일 아닌가.”   김 후보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낮은 수도권 인지도가 약점으로 거론되는 데 대해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내 인지도가 한 자릿수에 그쳤지만 지금은 50% 턱밑까지 상승했다. 보수 정체성은 물론 외연 확장성 측면에서 내가 적임자란 뜻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어 “총선 승리는 당대표의 수도권 인지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수도권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리더십이 핵심”이라며 “나는 지난 대선과 지방선거를 승리로 이끌며 그 리더십을 입증했다”고 강조했다.   내년 총선의 공천 원칙이 있다면. “오롯이 후보의 경쟁력을 기준으로 상향식 공천을 통해 최상의 후보를 뽑을 것이다. 다행인 건 우리 당이 그동안 수차례 공천 룰을 개선하면서 가장 바람직한 공천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만큼 지금의 제도를 바꾸는 방안은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총선을 앞두고 대통령의 공천 개입 논란이 불거지면 어떻게 대응할 건가. “오히려 당이 총선 과정에서 대통령 의견을 듣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당 차원에서 일반 당원들 의견도 경청하는데 1호 당원인 대통령의 생각은 당연히 들어봐야 하는 것 아닌가. 대통령 의사도 듣지 않을 거면 집권 여당을 왜 하나. 대통령뿐 아니라 당의 원로들과 당 외곽에서 우리 당을 사랑하는 분들의 고견을 충분히 듣고 최적의 공천 시스템이 작동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대표가 되면 뭘 가장 먼저 할 생각인가. “대선 이후 당내 많은 분란이 생기면서 본의 아니게 서로 상처를 주고받은 일이 많았다. 그런 만큼 지금은 당을 안정시키는 게 급선무다. 전대 과정에서 ‘연포탕(연대·포용·탕평) 정치’를 계속 강조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당대표가 되면 좋은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당을 본궤도에 올려놓은 뒤 노동·교육·연금 등 3대 개혁 과제에 집중할 생각이다.”   김 후보는 야당과의 관계 설정에 대해선 “민생 현안만큼은 여야가 최대한 협치에 나서야 한다”며 “대표가 되면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야당 대표와 회동하는 자리를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야당과 싸워야 할 땐 적극적으로 싸울 것이다. 협상의 결과는 상대방에게 빌어서 얻는 게 아니라 싸워서 획득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안철수 후보의 정체성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김안연대’ 가능성도 내비쳤는데. “당대표가 아닌 당 소속 의원 자격이라면 안 후보와도 얼마든지 뜻을 같이할 수 있다는 취지다. 같은 당 의원인데 당의 발전과 총선 승리, 나아가 보수 정권의 재창출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연대하고 손을 맞잡을 수 있지 않겠나. 하지만 안 후보가 당대표가 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과거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문재인·박원순 당시 후보들과 연대한 이유를 안 후보는 우리 당원들에게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 심지어 우리 당은 곧 사라질 정당이란 말까지 하지 않았나. 앞뒤 행적이 다른 분이 당대표가 돼선 안 된다.”   남은 기간 경선 전략은. “상품에 비유하면 나는 신선함이 강점이다. 명시적인 성과도 있다. 반면 상대 후보는 선거 때마다 출마했지만 성과는 미미하다. 대표가 되면 당이 어떻게 바뀔지 당원 한분 한분께 소상히 보여드릴 거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1위를 기록하고 있지만 끝날 때까지 알 수 없는 게 선거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전력을 다해 당심에 호소할 계획이다.” 김나윤 기자 kim.nayoon@joongang.co.kr

    2023.02.18 00:01

  • 안철수 국민의힘 당대표 후보 “내년 총선 170석 압승으로 정권 교체 결자해지할 것”

    안철수 국민의힘 당대표 후보 “내년 총선 170석 압승으로 정권 교체 결자해지할 것”

     ━  [국민의힘 전대 ‘2강’] 안철수 당대표 후보   안철수 국민의힘 당대표 후보는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내년 총선은 수도권에서 승패가 갈릴 것”이라며 “내가 대표가 되면 170석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김경빈 기자 “당대표 후보 중 유일한 수도권 3선 의원인 내가 내년 총선을 이끌면 170석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 안철수 국민의힘 당대표 후보는 중앙SUNDAY·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더불어민주당은 이재명 대표를 필두로 선출직 최고위원 전원이 수도권 지역구”라며 “우리 당도 3·8 전당대회를 통해 민주당 전략에 대항할 필승 진용을 짜야 한다”고 강조했다.   관련기사 “당정은 밀당 부부, 대통령과 손발 맞는 당대표 필요” 당대표 본경선 날짜가 다가올수록 후보 간 신경전도 고조되고 있다. 지난 15일 첫 TV 토론에서도 김기현 후보가 ‘정통 보수의 뿌리’를 강조하자 안 후보는 ‘수도권 대표론’으로 응수하며 팽팽히 맞섰다. 최근엔 친윤계 핵심 인사들이 군불을 지핀 ‘당정일체론’이 ‘대통령 명예대표론’으로 확산되며 분위기가 한층 과열되는 양상이다. 이에 대해 안 후보는 “전당대회는 윤심에 맞는 후보를 뽑는 자리가 아니라 내년 총선을 승리로 이끌 당대표를 뽑는 선거”라며 정면 돌파를 선언했다.   대통령 명예대표론이 논란을 빚고 있다. “우리 당헌상 대통령은 명예직을 맡을 수 있다. 하지만 전당대회 중에 이런 말이 불거지면 자칫 대통령이 당무에 개입하는 것 아니냐는 느낌을 국민에게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시기적으로 매우 부적절하다. 또 대통령을 전당대회에 끌어들이는 게 과연 내년 총선 승리에 도움이 되겠느냐. 이번 전당대회는 민심에 호소해 내년 총선을 승리로 이끌 당대표를 뽑는 선거다. 나를 포함한 당대표 후보 모두 이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김 후보는 컷오프 1위라고 주장한다. “컷오프 결과는 철저히 비공개 사안이다. 사실 확인이 안 된 보도를 활용하는 건 공정하지 못한 일이다. 그런 주장을 하려면 증거를 제시해야 하는데, 증거를 내면 선거법 위반이고 못 내면 허위사실 유포다. 어느 쪽이든 당대표 후보로서 매우 부적절한 결과일 수밖에 없다. 미발표된 컷오프 결과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나에 대한 두려움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고 있다. 전쟁 중에 장수가 병사 앞에서 덜덜 떠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되듯 당대표도 위기 앞에서 두려움을 보이면 안 된다는 충고를 건네고 싶다.”   대통령 탄핵과 탈당 공방도 오가는데. “패배가 두려워 나온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전략적으로 당원들을 상대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거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다. 집권 여당의 당대표 후보라면 탄핵 운운하며 흑색선전으로 당의 분열과 위기를 조장하면 안 된다. 이런 막말과 실언은 총선에도 악영향만 미칠 뿐이다.”   김 후보는 지난 12일 “(안 후보는) 그동안 민주당과 결이 같은 주장을 펴며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해임을 요구한 바 있다”고 주장했다. 안 후보의 보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김 후보는 이어 “지금은 정권 초기여서 대통령 눈치를 볼 수 있겠지만 대표가 되고 나면 이 장관 탄핵처럼 대통령에게 칼을 겨눌 수 있다는 걱정을 충분히 할 수 있지 않겠느냐”며 탄핵 논쟁에 불을 지폈다.   이 장관 탄핵에 대한 입장은. “나는 지난해 12월 민주당의 이 장관 해임건의안에 분명히 반대 의사를 밝혔다. 이번 탄핵소추도 마찬가지다. 민주당의 탄핵 추진은 ‘이재명 대표 수호’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국민이 부여한 탄핵권을 이 대표 개인 비리를 옹호하기 위한 정치 공세 수단으로 전락시켰다. 민주당의 이런 행태는 내년 총선에서 국민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결선 투표 가능성도 큰데. “3월 8일 전당대회에서 1등을 하는 것 외에 다른 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날 반드시 1등을 하겠다. 자신 있다.”   내년 총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당대표가 어떤 자질을 갖춰야 한다고 보나. “첫째는 수도권 민심 파악, 둘째는 승리의 경험, 셋째는 중도층과 2030세대로부터 호응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이다. 수도권 선거는 많아봤자 5%포인트 이내에서 승부가 갈린다. 나는 20~30% 차이로 이겨 왔는데 이렇게 압도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건 중도층과 2030세대의 고정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국민의힘은 중도층 이탈로 지지율이 박스권에 갇혀 있는 형국이다. 중도층 표를 다시 가져올 수 있는 내가 내년 총선을 이끌면 170석도 충분히 가능하다.”   나부터 기득권을 내려놓겠다고 했는데. “당의 혁신을 위해 모든 걸 내려놓겠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당대표가 되면 공천 관리에만 집중하고 공천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 당대표의 사심이 들어간 공천은 총선 패배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당대표가 먼저 공천 불개입을 엄중하게 표명해야 정실 공천도, 외압 공천 시비도 사라질 수 있지 않겠느냐. 또 당이 원한다면 전국의 어느 험지든 가리지 않고 출마하겠다. 당대표가 먼저 희생을 감수해야 당을 결집시키고 민심도 얻을 수 있다. 만약 당에서 이재명 대표 지역구에 출마해 이 대표와 맞붙으라면 기꺼이 그러겠다.”   대표가 되면 뭘 가장 먼저 할 생각인가. “3대 개혁을 추진하겠다. 첫째는 ‘개혁 대 반개혁’ 구도를 만들 거다. 당에 반부패 정치혁신특위를 설치하고 정치개혁 원스트라이크 아웃 제도를 시행해 반부패 운동을 선도하고 확산시키겠다. 둘째는 ‘미래 대 과거’ 구도를 갖추겠다. 민간인 전문가들까지 포함한 인공지능(AI) 정치혁명위원회를 구성해 ‘챗GPT 대국민 소통 서비스’처럼 민주당이 절대 따라올 수 없는 스마트 정당을 구축하겠다. 여의도연구원에 청년 정치 리더십 스쿨도 개설할 생각이다. 셋째는 ‘실용 대 진영’ 구도를 통해 극단적 진영 세력의 포퓰리즘 정치와 맞서 싸우며 개혁·실용정당을 발전시켜 나가겠다.”   남은 기간 어떤 각오로 임할 건가.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 오세훈 후보를 도와 정권 교체 가능성을 연 데 이어 지난해 대선 때는 윤석열 대통령과 후보 단일화로 정권 교체를 이뤄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거대 야당이 독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진정한 정권 교체를 완성하는 길은 내년 총선에서 우리 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하는 것뿐이다. 나는 내가 시작한 일은 내가 끝내겠다는 결자해지의 각오로 이 자리에 섰다. 이런 절박한 심정을 당원들도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최현목 기자 choi, hyunmok@joongang.co.kr

    2023.02.18 00:01

  • “강제징용 배상, 전범 기업 참여가 관건…기시다 결단 필요”

    “강제징용 배상, 전범 기업 참여가 관건…기시다 결단 필요”

     ━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는 지난 7일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대일 관계는 반일이나 친일이 아닌 일본을 적극 활용하는 용일(用日)이 바탕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종근 기자 수교 이래 최악의 상태에 빠졌던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한 양국 정부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특히 관계 개선의 선결 조건인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를 타결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달 30일 열린 양국 외교부 국장급 협의에 이어, 오는 13일에는 미국 워싱턴에서 한·미·일 외교차관 협의회를 계기로 한·일 차관이 만난다. 17~19일 독일에서 열리는 뮌헨안보회의에서는 박진 외교부 장관이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과 양자회담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전방위적으로 해법 찾기에 나선 것이다.   한·일 관계 정상화는 윤석열 정부가 내세운 주요 외교 정책 중 하나다. 특히 상반기 방미를 앞두고 이 문제를 매듭지어 한·미·일 3각 공조를 더욱 공고히 하고, 한·일 정상간 셔틀 외교를 복원하겠다는 게 윤 대통령의 기대다. 5월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도 초청국 자격으로 참가하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현재 강제동원 협상은 기금 조성에 일본 기업의 참여 여부를 놓고 양국 이견이 팽팽하다.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를 만나 현재 진행 중인 강제징용 문제 협상에 대한 분석과 전망을 들어봤다.   강제징용 해법의 가장 큰 걸림돌은. “양국이 협의하고 있는 방안은 제3자 변제다. 다시 말해 한국이 정부 산하 재단(강제동원 피해자 지원재단)을 통해 피해자들에게 대신 변제하는 방식이다. 여기에는 포스코 등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상의 수혜 기업 등이 참여한다. 관건은 미쓰비시 중공업와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 같이 실제 강제동원 피해자를 고용했던 기업들의 참여다. 일본은 한·일 청구권 협상으로 이 문제가 매듭지어졌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이들 기업의 참여를 관철하기 위해 협상력을 집중하고 있다.”   양국이 타협안을 도출하지 못하면 결국 협상은 결렬되는 것 아닌가. “현재로썬 협상 타결 여부를 전망하기 어렵다. 단지 이전보다 일본 내 분위기가 훨씬 좋아졌다고는 말할 수 있다. 2013년 신일철주금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1억원씩 배상하라는 서울고법 판결이 나왔을 때 일본 여론은 싸늘했다. 한국이 이미 끝난 문제를 다시 끄집어내 트집을 잡는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과거 식민지배를 했던 동남아에서도 유사한 소송이 제기될 수 있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컸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 실질적인 소송 당사자가 1000여 명밖에 되지 않고, 이 가운데 증거 부족 등으로 대법원까지 가서 승소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200명 정도다. 2018년 대법원 판결 이후 이미 시효 3년이 지나 새로운 소송을 제기할 수도 없다. 금전적으로 봤을 때 200억원 정도면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인식이 일본에서 확산되고 있다.”   일본이 끝내 미쓰비시 중공업 등의 배상금 참여를 거부할 것으로 보는가. “일본은 실용주의 외교를 중시한다. 일본 정부는 협상의 성공 여부에 따른 손익을 계산할 것이다. 특히 한·일 관계 정상화를 원하는 미국과의 관계를 중시하기 때문에 일본 정부의 고심은 깊을 것이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 등 최고위층의 결단이 요구되는 사안이다.”   국내 여론도 만만찮다. 전범 기업의 참여가 없으면 배상금을 받지 않겠다는 피해자들도 있는데. “우리 정부도 이와 관련해 또 다른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피해자들이 최대한 공감하는 배상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개인 생각으로는 지원재단으로부터 배상금을 받지 않겠다는 피해자들의 경우 대법원의 판결대로 일본 기업의 국내 재산을 매각해 현금화해 지불하는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 일본을 설득해야 하는 것이 우리 정부의 또 다른 과제다.”   양국은 배상과 함께 사과 문제에 대해서도 협의하고 있는데. “여기엔 큰 이견이 없을 것 같다. 일본 측이 식민 지배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사과를 담은 무라야마 담화와 김대중-오부치 선언 등을 계승하겠다는 선에서 정리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협상에서 보듯 윤석열 정부의 대일 정책이 문재인 정부 때와는 크게 달라졌다. 윤 정부가 한·일 관계 개선에 나서는 이유는. “윤석열 정부는 한·일 관계의 불필요한 악화로 인해 글로벌 외교 전략에 차질을 빚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대미 외교를 더욱 활성화하기 위해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일 관계는 단순한 양자 관계라기보다 한·미 관계 속에 숨은 히든 코드로 볼 수 있다. 한·일 관계가 나쁠 때 한·미 관계가 원활하게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도 한·일을 하나의 세트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다면 일본을 외교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사실 일본은 우리에게 굉장히 큰 외교적 자원이자 공간이다. 제대로 활용하면 도쿄는 워싱턴에 긴밀히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고, 베이징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 될 수도 있다. 심지어 대북 관계에서도 일본을 외교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또 미국이나 중국에 비해 우리 외교가 운신할 수 있는 공간이 상대적으로 크다. 이런 인식은 현 정부 내에서도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국내에선 여전히 일본에 대해 친일과 반일 구도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19세기 패러다임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반일을 고집하면서 전략적 이익을 계속 추구할 수 있다면 반일도 나쁜 선택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친일이나 반일 대신 실용적으로 일본을 활용하는 ‘용일(用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태도도 많이 달라졌다. 일본 정부가 보는 한국의 전략적 가치는. “아베 신조 정부 때부터 일본이 한국에 대한 전략적 비중을 많이 낮춘 것은 사실이다. 일본에선 한국의 지난 정부가 대립각을 세웠기에 협력의 공간이 좁아졌다고 탓한다. 그러면서 미국과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국을 배제하는 행보를 보여왔다.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의 틀을 놓고 봤을 때도 한국의 입지는 상당히 애매하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한반도는 일본 외교의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 외교의 1순위인 미국의 압력도 무시할 수 없다. 결국 일본도 한국과의 관계 개선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최익재 기자 ijchoi@joongang.co.kr

    2023.02.11 01:09

  • “당 골병 너무 깊이 들어, 멀어진 지지층 되찾는 게 급선무”

    “당 골병 너무 깊이 들어, 멀어진 지지층 되찾는 게 급선무”

     ━  취임 100일 맞은 이정미 정의당 대표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당명까지 바꿀 각오로 재창당에 매진해 당을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고 강조했다. 김경빈 기자 정의당이 풀어진 신발 끈을 다시 조이고 있다. 지난해 출범한 이정미 대표 체제가 이달부터 재창당 수순에 돌입하면서다. 이 대표는 오는 11일 재창당추진위를 구성해 직접 위원장을 맡으며 당의 전면적인 쇄신 작업에 나선다. 4일 취임 100일을 맞은 이 대표는 “당명 개정까지 염두에 두고 올 상반기까지 재창당 작업을 마무리할 예정”이라며 “대대적인 혁신과 변화를 통해 당원과 지지층의 동력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 대표 앞에 놓인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다. 대선과 지방선거의 잇단 참패로 당의 성장 엔진은 사실상 실종됐다. 성 비위 사건과 갑질 논란 등 연이은 악재에 당원들의 집단 탈당 사태까지 불거지며 원내 3당으로서의 존재감도 급속히 약화된 상태다. 정의당은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중앙SUNDAY가 이 대표를 만나 위기 원인에 대한 진단과 극복 방안을 들어봤다.   취임 100일을 맞은 소감은. “하루하루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취임 다음날 이태원 참사가 발생해 진상 규명에 힘쓰다 보니 그새 100일이 지나간 것 같다. 무엇보다 창당 이래 당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대표를 맡게 된 만큼 마음이 매우 무겁다. 임기는 2년이지만 사실상 내년 총선까지가 내게 주어진 시간이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뛰고 있다.”   이정미 대표 체제의 성과가 아직 눈에 띄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는데. “당장의 성과를 내겠다는 욕심을 가졌다면 취임하자마자 당에 분칠부터 했을 것이다. 당명도 바꾸고 특권도 내려놓겠다고 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3년 만에 당에 복귀해 보니 그동안 당이 입은 내상이 생각보다 깊더라. 골병이 너무 깊이 들어 장기 치유가 필요한 상황인데 겉모습만 가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지금은 현장을 다니며 당과 지지층의 멀어진 거리를 좁히는 게 급선무다.”   내년 총선까지가 내게 주어진 시간   정의당은 지난해 9월 “새로운 진보정당을 만들기 위한 정의당의 지난 10년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고 규정했다. 이에 대해 이 대표는 “당을 운영하다 보면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기 마련”이라며 “정의당의 경우 공교롭게도 안 좋은 일이 계속 겹쳤고, 그 상황을 극복할 리더십이 굳건히 서 있지 못해 위기를 더욱 키운 것 같다”고 진단했다.   ‘포스트 심상정’의 차세대 리더십을 육성해야 한다는 요구도 적잖다. “그 부분은 나를 비롯한 중진들 책임이 크다. 지난 총선 때 지역구에서 살아 돌아와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대선 과정에서도 심상정 의원을 능가할 수 있는 리더십을 보여줘야 했는데 여러모로 부족했다. 개인적으로도 뼈아픈 부분이다. 당이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니 지지자층 입장에서도 기대감은 계속 줄고 꾸지람은 더욱 잦아지는 것 같다.”   10년째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민주당 2중대’ 논란도 해결해야 할 과제 아닌가. “요즘엔 ‘국민의힘 2중대’란 지적이 더 많다(웃음). 2017~19년 첫 당대표 시절엔 특정 정당이 의회 과반 의석을 차지하지 못해 정의당이 사안에 따라 여러 정당과 공조하며 캐스팅보터로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구조였다. 하지만 지금은 민주당이 과반을 차지하고 있고 대통령은 야당과 완전히 대립각을 세우고 있지 않나. 지금 정의당이 할 일은 거대 양당 사이에서 양자택일하는 게 아니다. 민주당이든 국민의힘이든 민생 얘기라면 어느 당과도 협력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재창당에 대한 구체적인 복안은. “크게 두 가지 축이다. 우선 기후위기·돌봄 등 대한민국이 처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통합적인 정책 비전을 제시하려고 한다. 또 정의당과 함께할 사람들과 세력 확장을 도모할 계획이다. 다른 당의 재창당 사례를 보면 당 대 당 통합하는 경우도 있고 기존 당을 환골탈태하는 시도도 있었는데 정의당은 이를 상황에 따라 취사선택할 생각이다.”   부울경 노동 벨트 뿌리 말라가고 있어   이 대표는 그러면서 “내년 총선을 앞두고 지역구 10개를 전략 지역으로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과거 정의당은 부울경(부산·울산·경남) 중심의 영남 노동 벨트가 중심축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지역이 너무 취약해지다 보니 당을 지탱하는 뿌리도 점점 말라가고 있다”며 “이젠 비례의석을 늘리는 전략만으론 총선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게 내부 판단”이라고 설명했다.   현실적으로 정의당의 지역구 의석 확대가 가능할지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 부분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당의 존립 근거가 무너진다. 지금의 선거제도는 지역에서 당선돼야 하는 구조다. 이를 깨기 어렵다며 도전하지도 않으면 당을 어떻게 운영하겠나. 힘들더라도 해내야 하는 몫이 있다면 총력을 다해야 한다. 재선 의원을 배출하지 못하는 정당이란 지적도 넘어야 할 산이다.”   당의 어젠다가 실종됐다는 비판도 많다. “우리 당은 최저 시민소득 도입, 노동시장 이중구조 타파, 돌봄 복지국가 등 주요 정책 대안을 줄기차게 얘기해 왔지만 여의도 정치 지형에 묻혀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지난 대선 때도 정책 경쟁은 사라지고 대장동 개발 사업 논란과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의혹을 놓고 선거 내내 싸우지 않았나. 지금도 마찬가지다. 양당에 그만 싸우고 민생을 논의하자고 아무리 설득해도 좀처럼 바뀌질 않는 게 현실이다.” 김나윤 기자 kim.nayoon@joongang.co.kr

    2023.02.04 00:50

  • “21세기 학생을 20세기 교수들이 19세기 방식으로 교육”

    “21세기 학생을 20세기 교수들이 19세기 방식으로 교육”

     ━  임기 마친 오세정 전 서울대 총장   오세정 전 서울대 총장은 2일 중앙SUNDAY와 인터뷰에서 “줄 세우기, 공식 외워 답 찾기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교육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박종근 기자 “1등은 불안하고 2등부터는 불만인 것이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입니다. 아무도 행복하지 않아요. 국내총생산(GDP)은 많이 올랐는데 행복지수는 꼴찌 수준이고, 청소년 자살률도 높습니다. 지금 중고등학교에서 벌어지는 점수로 줄 세우기는 교육이 아닙니다. 기성세대, 특히 교육계에 있는 사람들이 책임감을 느껴야 합니다.”   지난달 31일 임기 4년을 마친 오세정(70) 전 서울대 총장은 “21세기 학생을 20세기 교수들이 19세기 방식으로 가르친다는 말이 있다”며 “정보화 사회에 맞는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을 찾아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서울대 교수직을 퇴임하고 2016년 국민의당 비례대표로 금배지를 달았던 그는 2019년부터 서울대 총장으로 재직했고 이제는 전공분야인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가 됐다.   1등도 불안, 아무도 행복하지 않은 교육   지난 4년을 돌아본다면. “우리나라 교육의 전환기였다고 생각한다. 과거 산업사회에서 대학 교육의 목표는 남보다 빨리 첨단 지식을 배워서 좋은 직장을 얻는 것이었다. 그런 취지라면 줄 세우기가 의미도 있고 효용도 충분했다. 하지만 정보화 사회인 지금은 지식의 라이프타임이 3년이다. 평생 새로운 지식을 배워야 한다. 남하고 다르게 생각하고 빨리 변화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재상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지난 4년간 어떻게 학생을 뽑고 어떻게 교육할까 많은 고민을 했다. 그런데 입학 정원을 바꾸는 건 전쟁이더라. 그래서 일단 들어온 학생의 선택권을 존중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복수전공, 부전공을 확 풀었다. 앞으로 정원의 3분의 2 정도는 복수전공을 할 것이다. 학과에 대한 지원 규모도 입학 정원이 아니라 복수 전공을 포함, 수강생의 수로 기준을 바꾸자고 제안했다. 임기 중 인구 문제부터 시작해 양극화, 교육 등 장기 계획을 세우고 지금부터 준비하기 위해 국가미래전략원을 만들었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나 헤리티지재단 같은 씽크탱크가 목표다.”   재임 중 성과는 있었나. “지난해 QS 세계대학 평가에서 처음으로 20위권에 진입했다. 하지만 아직도 세계를 선도하는 대학이라고 자부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솔직히 서울대는 학생들이 알아서 좋은 성과를 내기 때문에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하는 면이 있다.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프린스턴대 수학과 교수나 수많은 히트곡을 만든 방시혁 HYBE 이사회 의장이 학교에서 뭘 배워서 성공한 건 아니지 않나. 좋은 친구들을 모아 놓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지원하는 것이 학교의 할 일이다.”   지난해 8월 오세정 당시 서울대 총장이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에게 ‘자랑스러운 서울대인’ 증서를 수여하고 있다. 허 교수는 지난해 수학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을 수상했다. [뉴시스] 올해 서울대 수시 합격자 138명이 등록을 포기했다. 연고대까지 합치면 미등록자가 2200명이 넘는다. 대다수가 다른 학교 의대를 선택한 자연계 학생이라고 한다. 이공계 인력의 편중현상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미래를 생각했을 때 의대를 나오면 억대 연봉을 받고 늙어서까지 일할 수 있다. 반면 자연대나 공대를 나와서 대기업에 취업한들 정년까지 다니는 사람이 드물고 중간에 퇴직해서 갈 곳이 없다. 교수들이 황창규·진대제 등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공계 선배들 얘기를 해도 학생들은 그건 간혹 나오는 한두 명 사례에 불과하다고 반응한다. 근본적으로 이공계를 졸업한 사람들이 불안하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 미국도 의대를 선호하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공대를 그만두고 갈 정도로 심각하진 않다.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해소될 수도 있을 것이다. 불과 15년 전만해도 외환위기 이후 연구직들이 많이 쫓겨나서 이공계 기피 현상이 있었다. 그때는 문과를 더 많이 갔다. 지금은 4차 산업혁명이 뜨고, 소프트웨어 전공이 각광받으며 상황이 역전됐다. 의대 편중이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지만 산업구조나 인력구조가 망가지는 상황까지는 아니라고 본다.”   우리 교육의 질적 변화에 가장 큰 걸림돌은. “입시다. 대입 전문가들 얘기를 들어보면 제도를 어떻게 바꾸든 어차피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들어오니 합격자의 70%는 똑같을 것이라고 한다. 문제는 그들이 중고교에서 어떤 공부를 하고 어떤 훈련을 받느냐인데, 그건 입시제도를 어떻게 바꾸냐에 따라 큰 영향을 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과정은 보지 않고 결승점에 들어오는 순서대로 뽑는 정시 전형은 좋은 제도가 아니다.”   국민 다수는 학생부 전형 같은 수시 전형을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여론조사를 하면 정시 선발이 공정하다는 응답이 70% 이상이다. 조국 사태가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그런데 논문이나 수상 실적을 본 것은 10년 전의 얘기지, 지금은 학생부에 쓰지도 못하기 때문에 문제점은 많이 해소된 상태다. 오히려 정시는 단 하루 시험 결과만으로 평가하고 한 문제만 실수해도 만회할 방법조차 없는데, 그게 과연 공정한 제도인지 의문이다. 아무리 얘기해봐야 설득이 안된다. 수능만으로 학생들의 능력을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몇년 전 출제위원으로 선정돼 수학 문제를 풀어봤는데 반나절 동안 채 절반도 못 풀었다. 짧은 시간에 많은 문제를 풀어야 하니 수백개의 공식을 외워 답만 찾는 훈련을 반복해야 수능에서 고득점을 받는다. 그런 공부로 과연 수학의 원리나 재미를 찾을 수 있겠나.”   입학 전형별로 학습능력에 차이가 있나. “특목고나 8학군 출신이 수능 점수 위주로 선발하는 정시에 가장 많다. 그런데 추적조사를 해보면 입학 후 학점은 수시 일반전형이 제일 좋고, 그 다음으로 정시, 지역균형 전형 순이다. 반면 졸업 성적은 수시 일반전형, 지역균형, 정시 순으로 높다. 정시가 가장 낮다. 취직도 이 순위다. 수능은 반복해서 훈련하면 점수가 높아지는 시험이다. 점수에 맞춰서 전공을 선택했거나 시키는 공부만 해서 그런지 대학 성적이 그렇게 좋지 않다. 지역균형 학생들이 처음에는 힘들어하는데 수업에도 적극적이고 곧잘 적응한다.”   지방대학은 벚꽃 피는 순서대로 망해간다는 말처럼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인구절벽에 따른 지방소멸은 심각한 문제다. 20년 뒤에는 수도권 대학 정원을 다 채우면 지방대에는 한 명도 안가도 된다. 이미 지방거점 국립대학교도 영향을 받고 있다. 수요에 맞지 않는 정원은 이미 바뀌고 있고, 바뀔 것이다. 하지만 지방에 지역구를 둔 국회의원들이 자기 지역에 대학교 하나 없는 상황을 두고 보겠나. 그러면 수도권 대학의 정원을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질 것이다. 미국의 사례를 참고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오래전부터 미국 공대 대학원은 한국·중국·인도 학생들이 정원을 채우고 있다. 우리도 개발도상국의 똑똑한 학생을 데려올 방안을 찾아야 한다. 다행히 한류 영향으로 인도네시아·베트남 등에 한국에 관심 있는 친구들이 많다. 호찌민의 베트남 국립대학에 가보니 한국 대학에서 받아준다면 오겠다는 친구들이 적지 않았다. 지금은 학부 졸업 후 싱가포르 국립대에 가는 것이 목표라고 하더라. 이런 친구들에게 한국이 대안이 될 수 있다. 건설 노동자나 베이비시터만 받을게 아니라 탑클래스 사람들을 받아야 한다.”   개도국 똑똑한 학생 유치 방안 찾아야   유학만으로 해결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수도권 과밀화를 해결하는 것이 근본적인 대안이다. 사실 정부 기관이나 공기업 지방으로 내려보내는 것은 효과가 제한적이다. 좋은 일자리, 의료 시스템, 인프라를 갖춰야 지방에서 가족과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다. 좋은 기업은 예전에는 제조업이었지만, 지금은 4차 산업혁명으로 IT기업이 됐다. 그만큼 대학 인재가 중요하다. 좋은 대학이 없는 곳으로 좋은 기업이 가지 않는다.”   오 전 총장은 미국의 피츠버그와 디트로이트를 예로 들었다. 석탄과 철광석을 기반으로 한 제철 도시로 이름 높았던 피츠버그는 현재 금융·교육·의료 중심지로 제2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다. 반면 자동차의 도시 디트로이트는 쇠락해 녹슨 지역(러스트 벨트)의 대명사가 됐다. 오 명예교수는 이런 차이를 불러온 요인으로 피츠버그의 카네기멜런대, 피츠버그대 혁신연구소, 에너지기술연구소 같은 연구시설을 들었다. 반면 디트로이트는 수준급 대학이 없어 자동차 산업이 몰락하자 대안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도 세계적인 기업을 뒷받침할 수 있는 좋은 대학이 지방에 생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 대학의 변화는 어디까지 왔나. “학생 선발, 교육 과정 등에 대한 문제는 인식한 것 같다. 해결책을 향해 몇 발자국 뗀 셈이다. 지금까지는 외국 명문대를 바라보며 재빠르게 따라가기만 했다. 이제는 중장기적으로 나아갈 방향을 잡아야 한다.” 만난 사람=김창우 사회에디터 changwoo.kim@joongang.co.kr, 정리=윤혜인 기자

    2023.02.04 00:01

  • “디지털 인재 100만 양성 방안, 겉만 번지르한 부실 밥상”

    “디지털 인재 100만 양성 방안, 겉만 번지르한 부실 밥상”

     ━  한국 최초 전산학 박사 문송천 교수   문송천 KAIST 경영대학 명예교수는 “ 미래를 책임질 고급 데이터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유진 기자 지난해 8월 정부는 2026년까지 총 100만 명의 정보기술(IT)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디지털 인재양성 종합방안’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정부는 향후 5년간 인공지능(AI), 소프트웨어(SW), 빅데이터, 메타버스, 클라우드, 사물인터넷(IoT), 5G·6G 통신, 사이버 보안 등 8개 분야에서 초급(고졸·전문학사) 16만명, 중급(학사) 71만명, 고급(석·박사) 13만명 등 총 100만명을 양성할 계획이다. 고급 인력을 빠르게 공급하기 위해 고등교육법을 개정시켜 5년 6개월 만에 박사 학위를 취득할 수 있는 학사·석사·박사 통합과정도 신설할 예정이다.   하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 같은 정부 목표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인재 양성에 필요한 교원 확보나 관련학과 정원 확대 등 구체적인 실행방안에 대해서는 별다른 조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을 양성한 후에는 어느 분야에 투입해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하나도 알려진 게 없다. 국내 최초 전산학 박사이자 컴퓨터 데이터베이스(DB) 분야의 권위자인 문송천 KAIST 경영대학 명예교수는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기초 코딩 인력만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전형적인 선심성 정책”이라며 “향후 국가 경쟁력이 될 소프트웨어 영역, 특히 DB를 설계, 제작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퇴직 교수·기업인 교육 현장에 투입해야   정부가 내놓은 계획을 종합적으로 평가한다면. “5년 내 100만 명의 인재를 양성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공장에서 찍어내듯 배출만 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문제는 이들 중 90% 이상이 단순 코딩을 소화하는 수준에만 머무를 것이란 점이다. 이런 인력은 지금도 남아 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고차원의 데이터를 직접 설계, 제작해 여러 방면에서 활용할 수 있는 인력이다. 그런데 이런 고급 인력을 어떻게 양성하겠다는 계획은 하나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100만명이라는 상징적인 숫자를 달성하는 것에만 공들인 계획이 아닐까 싶다. AI, 빅데이터, 메타버스 등 얼핏 들으면 전문적으로 보이는 분야만 늘어놓고 겉모습만 번지르르하게 차려둔, 실속 없는 밥상 같다.”   정부는 조기교육을 내세웠는데. “초등학교·중학교 정보 수업시수를 현행 17시간, 34시간 수준에서 2배 이상 늘리겠다고 하는데, 터무니없다. 학기당 10시간을 배우든, 100시간을 배우든 이들이 고급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이 될까. 코딩만 주야장천 하지 않겠나. 학교 선생님들조차 지식이 부족한데 시수만 늘려서는 결코 소프트웨어 인재를 길러낼 수 없다. 대학에서는 인문계 전공생들이 달려들어 컴퓨터공학을 복수전공하고, 초등학생 때부터 코딩 학원에 다니는 등 그야말로 전 국민이 소프트웨어 교육에 매달리고 있다. 하지만 고급 인력들은 모두 기업에 가버리니 이들을 가르칠 사람이 없는 상황이다. 교육부에 따르면 특성화중을 제외한 전국 중학교 3172개교 중 정보교과 정교사가 배치된 학교는 1510개교(47.6%)로 절반이 채 안 된다.”   교육인력을 확보할 방안이 없나. “사실 이 문제는 법만 개정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수년 사이 쏟아져나오는 퇴직 교수, 은퇴 기업인들을 재고용해 교육 현장에 투입하는 거다. 정부는 민간인력에 교직을 개방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내놨는데, 기업과 학교에서 오랜 경력을 쌓은 사람들을 왜 낭비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정보·컴퓨터 교과 정교사 자격을 가진 사람이 2000명도 되지 않는데 감당이 가능한가. 나조차도 은퇴 후 학교를 찾아다니며 학생들을 지도하고 싶었는데 자격이 안 된다며 뽑아주질 않는다. 나름 전산학 1호 박사인데. (웃음)”   그간 수십만 명의 SW 전공자가 배출됐는데. “IT 강국인 우리나라 기업 중 세계 100대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에 이름을 올린 기업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2곳밖에 없다. 심지어 이 회사들은 소프트웨어와는 관계없는 하드웨어(반도체) 기업이다. 무늬만 ‘IT 강국’이었다는 게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네이버, 카카오도 해외 시장에서는 먹히지 않는 내수용 기업이지 않나. 세계 SW 시장 규모는 매년 커지는데, 우리나라 점유율은 0.9%에 불과하다. 아무리 미국이 독점하고 있는 시장이라고 해도 경쟁국인 중국, 일본, 대만 등에 뒤처졌다는 건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DB 관리 안 돼 2000억 들인 시스템 삐끗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가. “그동안 AI, 빅데이터 등 최상위층에 있는 기술 개발에만 매달려 뜬구름만 잡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SW 개발의 시작은 DB를 구축하고, 설계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코드를 가져다 입력해도 밑바탕이 되는 DB가 엉망이면 결과물이 좋을 수가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화려한 용어와 신기술에 휘둘려 이 부분을 소홀히 해왔다. 대학에서도 이미 정제된 DB를 가지고 시험문제를 풀게 하고, 기업들은 자체 DB 개발보단 외주업체 대행을 선호해왔으니 누가 제대로 다룰 줄 알겠나.”   문 교수는 최근 LG CNS, 한국정보기술 등 국내 최고수준의 시스템 통합(SI) 업체들이 투입된 보건복지부 차세대 사회보장시스템이 개통 첫날부터 말썽을 부린 것도 기초가 소홀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2000억원에 가까운 세금을 투입했는데, DB가 제대로 설계되지 않아 그야말로 폭삭 무너졌다는 것이다. 매번 반복되는 금융사 개인정보 유출 문제도 모두 DB 관리를 소홀히 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기초 DB가 형편없는데 최상위 기술인 AI, 빅데이터, 클라우드 등을 개발할 수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대안은 있나. “인도처럼 단순 코딩만 반복하는 SW 용역 국가를 지향한다면 지금처럼 전공자 숫자만 늘리는 정책이 효과적일 수 있다. 하지만 SW는 우리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신산업 먹거리 아닌가. 언제까지나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이 가진 능력에 기대 살아남을 순 없다. 필연적 미래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모든 디지털 기술의 원천인 DB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 말만 그럴듯한 AI를 내세워 ‘디지털 인재’를 키우겠다고 할 것이 아니라 기초부터 탄탄하게 다질 ‘데이터 인재’를 만드는 일이 급선무다.” 오유진 기자 oh.yoojin@joongang.co.kr

    2023.01.28 00:55

  • “경제 위험 과대 해석 말라, 올 하반기 이후 개선될 듯”

    “경제 위험 과대 해석 말라, 올 하반기 이후 개선될 듯”

     ━  이종렬 한국은행 부총재보   위기를 경계하되, 균형잡힌 시각이 중요하다. 이종렬 부총재보는 “현재의 위험은 올바른 정책대응으로 관리 가능한 수준”이라고 했다. 김상선 기자 “우리가 경제 상황에 대한 지나친 우려로 지레 위축될 경우 오히려 위기를 자초할 수 있다는 점에도 유의해야 한다.” (이창용 한은 총재, 지난 3일 범금융 신년인사회)   “지방간이나 위염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중병에 걸릴 것으로 지레짐작하여 일상생활을 포기하고 방안에 누워있기보다는 식습관을 고치고 규칙적인 운동을 시작하는 것이 올바른 대처법이다. 과도하게 위축되거나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이종렬 한은 부총재보, 지난 9일 한은 블로그)   최근 한국은행 고위급 인사들이 경제 상황에 대한 과도한 우려를 경계하는 메시지를 연이어 내놨다. 위험을 과대 해석해 불안에 떨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 부총재보는 지난해 12월 한은이 발표한 ‘2022년 하반기 금융안정보고서’를 바탕으로 ▶현재 금융시스템 상황 ▶가계 채무상환 능력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위험성에 대해 아직 위기 상황은 아니라고 진단했다. 이처럼 한은 부총재보급 인사가 최근 경제 상황에 대한 평가가 담긴 글을 직접 한은 공식 블로그에 올린 것은 처음이다. 이 부총재보는 금융안정보고서를 작성하는 금융안정국 등을 총괄하고 있다.   차주 DSR, 코로나 이전 수준 밑돌아   올해 경제 전망은 어느 때보다 암울하다. 전세계적으로 긴축 기조가 이어지며 글로벌 경기가 둔화하고 있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대내외 불확실성이 크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하반기 이후 단기 금융시장이 불안해졌고, 고질적인 가계부채와 자산가치 하락에 따른 부동산 관련 부실 문제도 직면하고 있다. 정부도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1.6%로 낮췄다. 한은 보고서에서도 금융시스템 리스크 불안 가능성이 상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12월 금융안정보고서를 통해 발표한 ‘국내외 금융·경제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한 2022년 하반기 시스템 리스크 평가’ 결과에 따르면, 단기(1년 이내) 시계에서 시스템 리스크 발생 가능성이 높다고 응답한 비중이 58.3%에 달했다. 2012년 시스템 리스크 평가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실제 한은이 바라보는 우리 경제의 위험 수준은 어떨까. “과도하게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는 바탕은 무엇일까. 이종렬 한은 부총재보를 인터뷰했다.   대내외 경제 상황이 어려운데도 ‘위축되지 말자’는 메시지를 직접 올린 이유는. “지난해 12월 금융안정보고서를 통해 우리나라 금융안정 상황을 평가하고 그 취약성과 리스크에 대한 점검 결과를 발표했다. 이후 리스크 요인이 부각되면서 잠재위험의 현실화 가능성에 대한 과도한 우려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에 금융안정 상황을 균형감 있게 바라볼 수 있도록 더 자세한 설명을 담은 글을 올리게 됐다. 앞으로 다가올 위험을 지나치게 걱정하거나 이를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우리의 대응능력을 과소평가해 위험을 증폭시키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시장 참가자의 불안이 과도하게 커지면 오히려 자기실현적 손실로 이어져 불안이 더 확대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세간의 반응이 엇갈린다. 대체로 경제 위기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한 목적에는 수긍하면서도 “얼마나 경기가 안좋으면, 한은이 연일 위축되지 말자고 강조하냐”는 시선부터 “감당하기 힘든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는데, 아직도 한은이 갈팡질팡한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한은의 상황 인식이 다소 낙관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 위기 발생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것 아닌가. “2022년 하반기 이후 우리나라 금융시스템은 주요국 정책금리가 빠르게 인상되는 가운데 레고랜드 사태와 같은 우발적인 신용사건이 더해지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영향이 반영되면서 금융불안지수(FSI) 지표가 위기단계(22) 수준까지 빠르게 높아졌다. FSI는 한은이 금융안정 상황을 가늠해보는 지표로, 단기적 시계에서 가격변수의 변동성과 신용스프레드, 심리지수 등 금융시스템의 불안 상황을 보여준다. 다만 과거 글로벌 금융위기 발생 당시에 비해 크게 낮은 수준이었고, 이후 정부와 한은의 적극적인 시장안정화 조치에 힘입어 지난해 11월 이후 FSI는 다시 하락세로 돌아서 진정되는 양상이다. 또한 금융시스템에 내재된 중장기적 취약성을 나타내는 금융취약성지수(FVI)도 장기평균 수준으로 점차 수렴해 가고 있다. 금리상승 과정에서 단기적으로 FSI가 상승할 수 있겠으나, 중장기적으로 대내외 부정적 충격이 금융부문 취약성을 통해 실물경제로 전이되는 영향이 줄어들면서 경제가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다져지고 있다고 본다.”   올해 경제 전망이 어둡다. 경제가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다져지고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다시 말하자면 단기(1년 이내)로는 어려울 수 있지만, 중장기적 관점에서는 안정적으로 바라봐도 되지 않을까 하는 차원이다. 여기에서 ‘단기’는 올해다. 개인적으로 2023년, 아니 올 상반기가 제일 어려운 시기일 수 있다고 본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이 부총재보는 가계채무와 부동산 경착륙 우려에 대해서도 크게 걱정할 단계는 아니라고 진단했다. 특히 이 부총재보는 지난해 3분기 주택담보대출을 받은 차주의 평균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은 60.6%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전인 2015년~2018년(62~63%) 수준을 하회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주택담보대출 연체율도 낮은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금융 불안 뇌관으로 떠오른 부동산 PF도 대출 일부가 부실화되더라도 우리 금융시스템이 자체적으로 손실을 흡수할 수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특히 한은이 실시한 스트레스 테스트 결과를 통해 부동산 경기 부진이 단기에 그칠 경우(주택가격 15% 하락, 부진 기간 1년) 금융기관 전반 자본비율은 양호한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봤다. 부동산 경기 부진이 장기화할 경우(주택가격 30% 하락, 부진기간 3년)에는 금융기관 자본비율이 상당폭 하락할 수 있지만, 이는 예외적인 상황이라고 선을 그었다.   지난해 전국 주택 가격이 실거래 기준 15% 하락했다. 3년간 30% 하락도 올 수 있지 않나. “한은이 스트레스 테스트에서 ‘주택가격이 30% 하락하고 그 기간도 3년 이상 장기화하는 경우’라고 말한 시점은 2022년 9월 말 기준이다. 여기서 추가로 30% 하락은 매우 예외적인 상황이다. 금융기관의 양호한 건전성과 최근 정부의 연착륙 대책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보면 주택시장 부진이 시스템 리스크로 확산할 가능성은 제한적이라고 본다.”   ‘숨겨진 연체’에 대한 우려가 크다. “가계대출 연체율은 최근 들어 대내외 여건이 안 좋아지면서 상승 전환했다. 그러나 2022년 9월 말 기준 금융권 가계대출 연체율은 0.6%로 과거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2009년 3월말 2.3%) 수준을 크게 하회하고 있다. 대내외 충격에 대한 가계와 기업 등 경제주체 전반의 건전성은 여전히 양호한 것으로 평가된다. 다만 정부의 금융지원정책이 지속함에 따라 자영업자 대출을 중심으로 연체 발생이 아직 표면화되지 않은 측면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금융기관들도 대손충당금 추가 적립, 자본확충 등을 통해 손실 흡수능력을 높여가야 한다.”   지난 13일 한은 금융통화위원회가 기준금리를 3.5%로 인상한 직후, 이창용 총재는 향후 금리 동결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러나 금통위 직후 시장에선 앞으로 금리가 동결될 것이라는 분석이 쏟아졌다. JP모건과 씨티 등은 현 수준인 3.5%에서 금리 인상이 종료될 것으로 예상했다. 금리 수준을 선반영하는 국고채 금리도 떨어졌다.   컨틴전시 플랜 준비해 신속 조치   한은은 추가 금리 인상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지만, 시장은 사실상 동결로 보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금리가 급상승할 때는 어디가 고점인지 모르는 불확실성이 컸다면, 지난번에 기준금리 3.5% 또는 3.75% 가능성이 나오면서 어느 정도 금리 인상의 끝이 보이는구나 하고, 거기에 맞춰 시장이 반응하는 것이라고 본다. 1월 금통위에서 이창용 총재는 “현시점에서는 시기상조이나 물가가 중장기적으로 정책 목표 수준으로 확실히 수렴해 간다는 확신이 있으면 그때 가서 금리 인하에 관해서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그런데 최근 기대인플레이션이 오히려 소폭 상승했다. 물가가 잡히지 않는다면, 금리 동결이나 금리 인하는 예단하기 어렵다.”   금리 인상이 3.5~3.75%로 종료될 경우 한·미 금리차에 따른 리스크는. “지난해 하반기 우리 경제를 돌아볼 때, 한·미 간 정책금리 격차가 자본유출입 등에 기계적으로 영향을 미치기보다는 국내외 경제 및 금융시장 여건 등 다른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줬다. 따라서 금리 격차에 대해 유의해서 지켜봐야 하겠지만, ‘얼마 이상이면 위험하다’는 식으로 단정해 부정적 영향을 지나치게 우려할 필요는 없다.”   현재 위험은 “올바른 정책 대응으로 관리 가능한 수준”이라고 했다. 근거가 무엇인가. “위험에 대비한 대응 방안, 소위 컨틴전시 플랜을 준비하고 각 위기 진행단계에 맞는 조치를 신속히 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지난해 레고랜드발 단기 자금시장(PF ABCP)  불안에 대응해 한은과 정부는 정책 공조를 통해 시장안정화 조치를 전격 시행하고, 상황에 따라 대응조치 수준을 조절해 나갔다. 가계부채 및 부동산 등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중장기적인 대응방안 마련을 강구하고 있다. 부동산과 연계돼 누증된 가계부채 리스크 관리를 위해 DSR 등 소득기반 대출원칙을 정착해 나가는 한편 가계부채의 질적 구조 개선에도 노력하고 있다. 앞으로도 한은은 정부와 함께 보다 근본적인 처방을 고민해 나갈 것이다.” 배현정 기자 bae.hyunjung@joongang.co.kr

    2023.01.28 00:01

  • “명령 따른 계엄군, 그들도 죄책감·트라우마로 고통”

    “명령 따른 계엄군, 그들도 죄책감·트라우마로 고통”

     ━  용서·화해의 손 내민 5·18 단체 회장들   황일봉(왼쪽) 5·18민주화운동 부상자회 회장과 정성국 5·18민주화운동 공로자회 회장. 최근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을 찾아 계엄군과 경찰 묘역을 참배한 이들은 “명령을 수행하다 목숨을 잃거나 고통받는 이들을 용서한 것”이라고 말했다. 장정필 객원기자 “명령을 따르다가 어쩔 수 없이 가해자가 된 계엄군의 손을 잡은 것입니다. 그들도 죄책감과 트라우마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지난 17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투입됐다가 숨진 계엄군 묘역에 참배하고 광주광역시로 돌아온 5월 3단체(유족회·부상자회·공로자회) 임원들은 이렇게 말했다.   황일봉 5·18부상자회 회장(이하 황 회장), 정성국 공로자회 회장(이하 정 회장), 홍순백 유족회 상임부회장 등 임원단은 최익봉 대한민국특전사동지회 총재(이하 최 총재) 안내로 계엄군과 경찰 묘역을 참배했다. 현충원에는 계엄군 장교 3명(29묘역)과 사병 20명(28묘역), 경찰 4명(8묘역)이 안장돼 있다.   황 회장은 참배를 마친 뒤 최 총재에게 특전사동지회 중앙 차원에서 광주 국립5·18민주묘지 참배를 건의했다. 최 총재 등 특전사동지회 모두 흔쾌히 찬성했다고 한다. 특전사동지회 150여명은 다음 달 19일 5월 3단체 사무실을 찾을 예정이다. 이때 5월 단체 150여명과 함께 매년 5·18묘역에 참배하겠다는 등의 내용이 담긴 ‘화해와 감사- 새로운 도약 공동 선언식’을 하기로 했다. 이날 5·18묘역도 찾을 예정이다.   5월 단체 임원이 마음을 열기 시작한 건 지난해 12월 11일 옛 광주 국군통합병원 터에서 청소 봉사를 하던 계엄군 출신 시민을 만난 뒤부터다. 이 병원은 5·18 당시 고문과 폭행 피해자들이 치료를 받았던 곳으로 현재는 국가폭력 피해자를 위한 국립 트라우마센터 건립이 예정돼 있다. 청소하던 계엄군 출신 시민은 5·18 당시 대원 80명을 데리고 시민 진압 작전에 투입됐던 박성현 대위였다. 그는 5월 단체 임원들에게 사죄하며 자신의 용서를 구하면서 다른 계엄군도 트라우마로 고통을 겪고 있다고 전했다.   5월 단체는 조심스럽게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5월 항쟁 당시 군인들은 명령 복종에 어쩔 수 없이 부당한 지시를 따랐단 점, 그 기억과 죄책감으로 43년 동안 고통받아왔던 점 등을 고려하면 계엄군 또한 피해자일 수 있단 생각이 들어서다. 5월 단체와 특전사동지회 첫 공식적인 행사도 진행됐다. 지난 11일 특전사동지회 광주전남지부 관계자 3명은 군복을 입고 광주 서구 5·18기념문화센터에 있는 5월 단체 사무실을 방문해 감귤 20박스를 전달했다. 마음의 문을 연 5월 단체는 특전사 군복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음에도 이들의 방문을 환영했다.   이번 참배에 대해 일부 5·18 단체 회원들은 “시기와 절차가 적절치 않다”며 아쉬워하고 있다. 김형미 오월어머니집 관장은 “회원 대부분이 계엄군 묘역 참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신문 기사를 보고 안 뒤 누구 마음대로 한 결정이냐며 카톡방(메신저 단체 대화방)에 난리가 났다”며 “계엄군 당사자가 먼저 손을 내밀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황 회장은 “현충원 참배를 위해 상경하는 길에서 많은 비판이 있을 거라 예상했던 일이지만 용서와 화해는 더 늦출 수 없다”고 말했다. 다음은 황 회장과 정 회장의 1문 1답.   지난 17일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 장교 묘역을 찾은 황일봉 5·18 부상자회 회장. [연합뉴스] 5월 3단체는 무슨 일을 하는가. “5·18민주화운동 희생자는 세 부류로 크게 나뉜다. 계엄군 총·곤봉·대검 등에 사망한 분과 행방불명된 분 가족이 유족회다. 계엄군에게 폭행이나 총상을 당한 피해자와 구속된 분은 부상자회, 경찰 등에 연행·구금되거나 민주화 운동 활동을 한 분 등은 공로자회 회원이다. 3단체는 공식 단체로 회원 복지를 우선시하고 그다음에 5·18 정신을 선양·계승·발전시켜 나가는 일을 한다.”   계엄군 묘지에 참배하게 된 계기는. “사연이 있었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5·18 조사위) 조사에 임하던 계엄군이 한 시민을 총으로 쐈다고 진술하면서 사죄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쏜 총에 숨져 5·18민주묘역에 안장된 희생자를 찾아 사죄했다는 소식을 5·18 조사위로부터 들었다. 이 밖에도 트라우마를 겪는 계엄군 등의 사연을 계엄군 당사자와 5·18 조사위에게 직·간접적으로 들었다. 그들은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를 통해 조금이나마 마음의 짐을 덜어내고 싶어하지만 아무도 만나주지 않고 손을 내민 사람도 없는 상황을 알게 됐다. 숨어 지내야만 했던 계엄군에 손을 내밀고, 그들이 증언하면 진상규명에 더 힘을 보탤 수 있겠다는 마음에 참배했다.”   일부 회원은 아쉽다고 하는데. “‘시기가 이르다’는 지적은 맞지 않는다. 25년 전쯤 특전사와 5월 단체가 용서하고 화해한 적이 있지만 일회성으로 끝나면서 지금까지 왔다. 43년이나 지나서 늦으면 늦었지 빠르지 않다. 5·18 조사위 활동이 곧 끝난다. 그 전에 숨어 있는 계엄군 당사자를 발굴해 더 많은 진술을 확보할 수도 있다. 지난해 12월 5월 송년회에 모인 단체 회원 700여명에게 계엄군의 참배 의사를 밝히고 동의를 구했다. 그 자리에서 열변을 토했고 박수를 얻었기 때문에 절차는 거쳤다고 봤다. 회원들께서 취지를 이해해주면 좋겠다. 명령을 수행하다 목숨을 잃거나 고통받는 이들을 용서한 것이지 신군부 수뇌부를 용서한 게 아니다.”   ‘용서와 화해’를 이어갈 향후 계획은. “25년 전 같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특전사동지회와 매년 5·18묘역을 참배하며 진정한 5·18 전국화를 이룩할 계획이다. 또 5월 단체와 특전사동지회가 함께 김치를 담그고 이웃에게 나누는 등 다양한 사업을 통해 대화합을 이룰 예정이다. 이제는 특전사동지회와 5·18 진상을 규명할 때다.” 황희규 기자 hwang.heegyu@joongang.co.kr

    2023.01.21 00:04

  • “과거사는 돈 아닌 마음 문제, 일본 무한 책임 의지 보여야”

    “과거사는 돈 아닌 마음 문제, 일본 무한 책임 의지 보여야”

     ━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12일 서울 중구 조선호텔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일본 정부가 ‘무한 책임’, 즉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점을 명시하고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해야 합니다.”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 일본 총리는 지난 12일 위안부·강제징용 등 한·일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책임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이날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과거사 피해자를 포함해) 한국 국민이 분노하는 부분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을 통해 해결된 문제를 더는 반복해서 제기하지 말라는 일본의 고압적 태도 때문”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인터뷰가 진행된 이날 국회 의원회관에선 외교부가 주최한 ‘강제징용 해법 논의를 위한 공개 토론회’가 열렸다. 정부는 이에 앞서 민관협의회를 네 차례 열고 피해자 측과 각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청취했다. 윤석열 정부 출범 후에도 두 차례 한·일 정상회담을 개최했고 차관·국장 등 각급에서 실무 협의를 지속했다. 이날 토론회엔 강제징용 피해자 지원단 등 시민단체가 불참하며 ‘반쪽 토론회’가 됐다. 토론회가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피해자 측의 거센 항의와 고성이 오가며 향후 강제징용 해법 마련을 둘러싼 진통을 예고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한국 정부의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스스로 (정치적) 리스크를 감수하며 노력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경우 현재 지지율이 많이 떨어진 상황에서 기존의 입장을 바꾸기 어려운 정치적 환경이지만 그럼에도 윤 대통령과 함께 리스크를 감수하고 타협의 길을 찾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지난 11일 우당이회영선생교육문화재단(이사장 이종찬)이 수여하는 우당특별상을 수상했다. 신흥무관학교 설립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우당 이회영 선생의 독립운동 정신과 평화 사상을 기리는 재단이 일본의 정치인에게 특별상을 수여한 건 매우 이례적이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시상식에서 “한·일 양국에 가로 놓인 엄연한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 이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마음을 잊지 않으면서 동시에 미래 지향적인 관점에서 양국의 우호 발전과 동아시아 평화 구축에 미력하나마 힘써 나가고자 한다”고 말했다.   강제징용 해법 마련을 위해 일본 측이 할 수 있는 ‘성의 있는 호응 조치’는 뭔가. “개인적으로는 한·일 청구권 협정을 통해 과거사 문제가 해결됐다는 일본 정부의 입장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가 간에 아무리 다양한 협정을 체결했다 해도 개인의 청구권은 유효하다는 게 국제적인 상식이 됐다고 확신한다. 일본에는 ‘잘못을 고칠 땐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미 (잘못을 고칠 수 있는) 시기가 많이 늦은 만큼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한다.”   일본 정부의 입장이 바뀔 수 있다고 보나. “일본 측이 우리는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를 고수한다면 강제징용 문제는 해법을 마련하기 어렵다. 전쟁으로 상처를 입은 분들께서 더는 사죄하지 않아도 된다고 할 때까지 (일본 정부가) 사죄하는 마음을 갖는 게 중요하다. 과거사 문제의 해법은 금전적인 문제가 아닌 마음, 심리적인 문제다.”   일본은 한·일 협의를 거쳐 마련될 강제징용 문제의 해법이 ‘최종적 해법’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을 갖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사실상 무력화하면서 일본은 이미 한국의 정권 교체에 따라 국가 간 합의가 효력을 잃는 과정을 경험했다. 이 같은 일본의 우려에 대해 하토야마 전 총리는 한참을 고민하다 “매우 어려운 문제”라며 운을 뗐다.   이번에 도출될 강제징용 해법의 최종성과 신뢰성을 높일 방법이 있나. “정권이 교체되면 정권마다 생각과 방향성이 달라진다. 다만 2015년 위안부 합의의 경우 일본 측에서 ‘이 합의로 모든 게 끝났고 해결됐다’ ‘우리는 사죄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를 보인 걸 위안부 피해자들이 납득하지 못한 거라고 생각한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돈을 달라는 게 아니라 명예와 존엄, 인권을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정권이 바뀌어도 합의의 토대 위에서 양국 정부가 약속을 이행하고 협력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을 지향해야 한다.”   한·일 관계 개선은 윤석열 정부의 핵심 외교 과제다. 양국 관계 개선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다고 보나. “비단 한·미·일 3국이 공조해서 중국에 대립각을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만 한·일 관계가 개선돼야 한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미·중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한·일 양국이 어느 한 편에 서서 적대적 행동에 나서는 건 상호 국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일 두 나라는 미·중 대립을 어떻게 완화할 수 있을지를 놓고 공조해야 한다. 한국과 일본이 단독으로 하면 효과가 부족하겠지만 함께 힘을 합쳐 미·중 대립을 제어한다면 한·일뿐 아니라 미·중에게도 큰 이익이 될 것이다.”   북한이 미사일 도발을 재개하며 북핵 문제가 한·일 양국의 핵심 현안으로 부상했다. “북한의 핵 문제는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가 가장 바람직한 해법이지만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CVID라는 높은 수준의 목표를 강조하는 동안 북한은 핵과 미사일을 지속적으로 개발해 온 게 현실이다. CVID는 결코 포기해선 안 되지만 목표를 한 단계 낮춰서 대응하는 방향이 바람직하다. 우선 북한의 핵 개발 동결을 목표로 내걸고 달성될 경우 대북 제재를 일부 해제해 주는 대응 전략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또 한·일 공조를 통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북한 문제에도 조금 더 시선을 돌릴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를 통해 북핵 문제와 관련해 해결 가능한 조건을 제시하고 북·미 관계가 개선될 수 있도록 한·일 양국이 공조해야 한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2023.01.14 05:00

  • “북한이 인권 유린 가해자인데, 왜 우리끼리 싸워야 하나”

    “북한이 인권 유린 가해자인데, 왜 우리끼리 싸워야 하나”

     ━  이신화 북한인권국제협력대사   이신화 북한인권국제협력대사가 중앙SUNDAY와 인터뷰에서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해 국제 공조를 더욱 확대할 방침”이라고 밝히고 있다. 최영재 기자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일어난 각 분야의 정책 변화 가운데 가장 큰 변화 중 하나가 북한 인권에 대한 접근 방식이다. 남북관계 개선을 최우선 순위에 올려놓고 북한 인권 문제에 소극적이었던 문재인 정부와 달리 새 정부는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국제사회의 대북 압박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지난 11일 외교부와 국방부의 신년 업무보고에서 “북한 인권 문제는 단순한 인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안보의 문제”라며 “북한 인권 실태를 전 세계에 알리는 건 국가 안보에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고 한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 속에 이런 정책기조 변화의 배경이 함축돼 있다.   앞서 정부가 5년간 공석 상태이던 북한인권국제협력대사에 유엔 등 국제무대에서 다양한 활동 경력을 가진 정치학자 이신화 고려대 교수를 임명한 배경도 윤 대통령의 발언으로 설명이 된다. 북한인권국제협력대사는 2016년 북한인권법 제정에 따라 법적 근거가 마련됐지만 문재인 정부를 거치는 동안 내내 공석이었다. 지난해 7월 취임한 이 대사는 최근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과 인권 유린 문제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 선후 관계가 있을 수 없다”며 “북한의 군사 도발과 인권 문제는 따로 볼 게 아니라 함께 풀어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북한 인권에 대한 윤석열 정부의 기본 원칙은 뭔가. “2016년 북한 인권 실태를 파악하고 개선하기 위해 제정된 북한인권법은 특정 정당이 일방적으로 추진한 게 아니라 여야 공동 발의를 통해 만들어진 법이다. 이는 정치적 성향과 상관없이 북한 인권 문제만큼은 정쟁화하지 않겠다는 데 의견이 일치한 셈이다. 그런 만큼 남북관계를 이유로 인권을 유린하는 북한 정권의 눈치를 봐선 안 된다. 북한 주민의 인권 침해를 이해득실에 따라 외면하고 침묵하는 나라가 어떻게 글로벌 중추국가로서 국제무대에서 활동할 수 있겠는가.”   유엔총회는 지난해 12월 북한인권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문재인 정부 때의 전례를 뒤엎고 윤석열 정부는 공동제안국에 참여했다. 지난달 결의안엔 탈북 어민 북송 사건을 간접 언급한 것으로 보이는 “북한으로 송환되는 북한 주민이 강제 실종, 자의적 처형, 고문과 부당한 대우의 대상이 돼선 안 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이에 대해 이 대사는 “북한이 가해자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통해 북한을 압박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며 “그동안 우리 정부가 이런 조치를 선제적으로 하지 못한 게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특히 인권 문제를 보편적 가치가 아닌 정쟁의 대상으로 삼은 걸 반성해야 한다. 진짜 잘못한 당사자는 북한인데 왜 우리끼리 싸우고 있어야 하느냐”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비핵화가 인권 문제보다 더 시급한 과제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 것으로 안다. “안타깝게도 이전 정부는 남북관계를 고려해 북측이 예민해 하는 인권 문제를 사실상 외면하다시피 했다. 유엔에서 북한인권결의안이 제출될 때도 공동 제안국에서 3년이나 빠지지 않았나. 하지만 결과적으로 비핵화도 이루지 못했고 북한 주민들 인권도 좀처럼 나아지지 못했다. 양자택일이 아니라 두 문제를 패키지로 풀어야 근본적인 해법을 마련할 수 있다.”   실제로 지난해 북한이 쏘아올린 60여발의 미사일 발사에 든 비용만 최대 5억3000만달러(약 6590억원)으로 추정된다. 북한이 중국에서 수입한 7~8년치 쌀값과 맞먹는 규모다. 그만큼 북한 주민들은 굶주림에 허덕일 수 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만성 식량난에 시달리는 북한 주민의 생존권이야말로 방치할 수 없는 인권 문제 아닌가. “북한 주민의 인권 유린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질적으로 북한 주민을 살리기 위해서는 인도적 지원이 필수다. 하지만 인도적 지원이 단순히 식량이나 코로나19 백신 등을 원조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그 단계를 뛰어넘어 북한 주민의 알 권리를 보장해 주는 수준까지 확장돼야 한다. 주민들이 북한 당국의 지시대로만 움직이는 게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갖고 나라 안팎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대로 알게 해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국제사회가 중국의 위구르족이나 소수 민족이 겪는 인권 탄압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듯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서도 국제적 공감대를 형성하며 함께 이슈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실제로 국제 무대에서 북한 인권 얘기를 하면 오히려 우리보다 더 단호한 입장을 보이는 국가들이 적잖다.”   북한에 억류돼 있는 국군 포로와 납북자 문제도 장기 미결 과제다. “정부 공식 추산으로 북한에 억류된 우리 국민은 516명에 달한다. 문제는 이들의 가족이 억류자를 만나지도 못하고 있고 생사도 알 길이 묘연하다는 점이다. 이 또한 국제인권법 위반이다. 앞으로 억류자 생사뿐 아니라 수용소 내 처우 환경도 적극 조사할 방침이다. 때마침 지난해 11월 한·미·일 정상회의에서도 억류자의 조속한 석방을 요구하는 공동 성명이 채택됐고 통일부도 억류자 석방 논의에 본격 나서기로 한 만큼 조만간 의미 있는 성과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한다. 북한이 이산가족 상봉을 막는 데 대해서도 그동안 쓴소리 한 번 못했지만 이젠 제대로 비판할 필요가 있다.” 김나윤 기자 kim.nayoon@joongang.co.kr

    2023.01.14 00:51

  • “문학구장 만원 땐 팬티 입고 뛴다” 약속 지키자 여성팬 눈물

    “문학구장 만원 땐 팬티 입고 뛴다” 약속 지키자 여성팬 눈물

     ━  [정영재의 레전드를 찾아서] 원조 공격형 포수 ‘헐크’ 이만수   이만수 감독이 지난해 한국야구위원회(KBO)가 선정한 KBO 40년 레전드 유니폼을 입고 포즈를 취했다. 이 감독은 “포수는 잘 받고, 잘 던지고, 잘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SK 와이번스 감독 그만두자마자 2014년 11월 12일 라오스로 갔어요. 솔직히 ‘야구 불모지에서 재능기부 한다’는 얘기 좀 듣고 멋있게 현장에 복귀하려고 했죠. 한 달 뒤 작별인사 하고 돌아설 때 왜소한 체구의 아이가 ‘아짱(라오스어로 선생님), 저희들하고 같이 야구해요’ 하는데, 태어나서 천사를 처음 봤습니다. 그 순간 마음먹었죠. 남은 인생은 동남아에 야구를 보급하고, 이 아이들과 같이 야구하는 데 바치겠다고요.”   ‘헐크’ 이만수 감독은 10년째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 그는 ‘야구’라는 단어조차 없었던 라오스에 야구를 보급해 팀을 만들고 야구장을 지었다. 라오스야구협회를 결성해 2018년 아시안게임에 출전했다. 베트남에도 같은 방식으로 야구를 보급하고 있다. 2월 24~26일 라오스에서 인도차이나반도 4개국(태국·베트남·라오스· 캄보디아)이 출전하는 첫 국제대회를 연다. 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인 그는 국내에서도 전국을 돌며 재능기부를 하고, 장애인 야구단체도 돕고 있다.   이만수는 프로야구 1호 안타·타점·홈런 기록을 갖고 있는 ‘공격형 포수’의 원조다. 삼성 라이온즈에서만 16년을 뛰었고, 메이저리그 시카고 화이트삭스 코치로 월드시리즈 우승도 경험했다. 나눔과 베풂의 전도사로 변신한 이만수 감독을 서울 강서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야구 통해 꿈이 바뀐 아이들 보며 보람   “야구 하면 밥이 나오나 떡이 나오나” 소리를 많이 들으셨죠. “맞습니다. 사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입니다. 월급은 안 받는데 쓰는 건 두 배 이상이니까요. 라오스 활동 시작하고 3년쯤 지나 아내한테 ‘그동안 퍼주기만 했는데 뭘 먹고 사냐’고 물었어요. 아내가 ‘진짜 숟가락 못 들 정도 되면 얘기 할 테니까 그 전까지는 마음껏 일하세요. 평생 야구로 받은 사랑을 되돌려줘야 하잖아요’ 하더라고요. 그래서 당시 TV 광고 두 편 찍고 받은 4억원을 기부하면서 재단을 만들었죠.”   아이들은 야구를 통해서 뭐가 바뀌었나요. “라오스 온 초기에 아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었어요. ‘하루 세 끼 먹는 게 꿈’이라고 해서 쇼크를 받았습니다. 그 뒤에 20여명을 부산에 데려가 바다 구경도 시켜주고 인천에 와서는 제가 다니는 교회 도움으로 홈스테이를 하게 했죠. 3박4일 일정을 마치고 안 가겠다며 우는 아이들을 데리고 라오스로 돌아왔는데, 몇 달 뒤 다시 물어보니 꿈이 다 바뀌었어요. ‘정치인이 돼서 군부가 장악한 나라를 바꿀래요’ ‘병원이 없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고치는 의사가 될 겁니다’ ‘돈을 많이 벌어 우리나라를 잘 살게 하겠어요’ 라고요. ‘아, 야구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아이들의 인생을 바꿀 수 있구나’ 싶어서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이만수는 또래보다 늦은 중1 때 야구를 시작해 1년을 유급했다. ‘호랑이 이상사’였던 직업군인 아버지는 운동을 제대로 안한다 싶으면 도끼로 배트를 찍어버렸다고 한다. 그는 하루 4시간만 자고 새벽 4시에 일어나 연습하겠다고 다짐했다. 너무 힘들어서 코피를 자주 흘리는 바람에 그 시절 별명이 ‘쌍코피’였다고 한다. 이 감독은 “중-고-대 11년을 그렇게 하니까 습관이 돼서 지금도 하루 6시간 이상 안 잡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습관이 있었다면? “단체운동 전에 미리 나와서 체조를 30분간 합니다. 제가 뻣뻣할 것 같은데 다리와 가슴이 붙을 정도로 유연해요. 그래서 은퇴할 때까지 큰 부상이 없었죠. 꿈나무들을 만나면 ‘일기를 쓰고, 야구 일지를 써라’고 말합니다. 기록을 해야 내 장단점과 보완할 점을 알게 되거든요. 다른 사람의 인생을 알기 위해 베스트셀러나 유명인의 자서전을 읽으라고도 권합니다.”   테니스 선수인 동생의 서브를 받아치는 훈련을 했다죠. “동생이 국가대표였는데 서브 시속이 200㎞ 넘어요. 원 바운드된 공을 배트로 치는 건데 며칠간은 맞히지도 못했죠. 한 달 정도 지나니까 제가 다 칩디다. 메이저리그 가 보니 테니스공을 쏴 주는 피칭머신이 있는데 시속 300㎞가 넘어요. 더 놀라운 건 그 공에 색칠을 해 놓는데 무슨 색인지 선수가 파악해야 하는 겁니다. 그렇게 동체시력(動體視力)을 강화하는 훈련을 멋모르고 제가 했던 겁니다. 하하.”   하도 연습을 많이 해서 굳은살이 터졌다면서요. “저희 때만 해도 야구장갑이 없어서 맨손으로 타격 연습을 하다 보면 굳은살이 쌓입니다. 겨울에는 물집이 생기고 몇 번 더 까지고 나면 허연 뼈가 보여요. 일본 타격왕 출신 장훈 선배가 자전거 튜브를 감고 연습했다는 걸 책에서 보고 따라해 봤는데, 스윙 몇 번 하다보면 굳은살 터진 곳에서 피가 흘러 미끄럽더라고요. 그럴 땐 온기가 좀 남은 연탄재에 손을 쓱쓱 비빈 뒤 스윙을 계속 했죠.”   타자 약 올리는 데 최강이셨죠. 무슨 얘기를 했습니까. “우리 때는 일본 야구 영향을 받아서 포수는 ‘이빨’을 잘 써야 한다고 했어요. 김봉연 선수에겐 ‘선배님, 어젯밤에 어떤 아가씨하고 데이트 하던데 형수한테 다 일러줍니다’ 하면 ‘뭐, 이 XX야?’ 하면서 흥분합니다. 김우열 선수한테는 ‘형님 뭐 합니까. 이 나이에 머리 다 빠져서’ 라고 하고, 감독 겸 선수였던 백인천 선배님께는 ‘감독님, 우리도 먹고 살아야지예. 한국까지 와서 와 이러십니까’라고 긁어 놓죠.”   친구 최동원 탓 통산 타율 3할 못 넘어   2007년 5월 26일 문학구장에서 ‘팬티 세리머니’를 하고 있는 이만수 SK 코치. [사진 이만수] 요란한 홈런 세리머니 때문에 보복도 많이 당하셨죠? “최정(SSG) 선수가 몸 맞는 볼 세계신기록 세웠다고 하던데, 빈볼(위협구)은 제가 더 많이 맞았을 겁니다. 홈런 친 뒤에 만세 부르고 춤추면서 들어오면 바로 다음 타석에 빈볼이 날아옵니다. 그런데 이게 천성이에요. ‘좋은데 좋다고 표현을 해야지’ 하는 생각이거든요. 그런 천성 때문에 미국 생활도, 동남아 야구 보급도 잘할 수 있지 않았나 싶네요. 지금은 서로 자극하는 행동은 안 하는 게 맞죠.”   제일 치기 힘든 게 최동원 공이었다면서요? “최동원은 제 친굽니다. 중학교 때 부산 토성중에 안경 낀 친구가 공을 던지는데 너무 빠른 겁니다. 동원이 커브는 좌우로 휘는 게 아니라 위에서 드롭성으로 뚝 떨어지니까 맞히기가 너무 힘들어요. 제 프로 통산 타율이 0.296인데 동원이 때문에 타율 다 까먹어서 3할을 못 넘긴 겁니다(웃음). 동원이가 암 투병할 때 마지막까지 제가 병상을 지켰는데 어머님이 ‘동원이가 이루지 못한 꿈을 네가 좀 이뤄줬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대성통곡했던 기억이 납니다.”   2007년 5월, 프로야구는 SK 수석코치 이만수의 ‘팬티 세리머니’로 들썩였다. 이 코치가 농담으로 “문학구장 만원 되면 팬티만 입고 운동장 돌겠다”고 한 말이 중계를 통해 전국에 알려졌다. 그는 “아내와 아들에게 ‘미쳤냐’는 소리를 들었는데 ‘10경기 안에 만원이 되면 한다고 했다. 절대 그럴 일 없을 거다’고 했죠”라며 당시를 떠올렸다.   결국 팬티 세리머니를 하게 됐죠. “D데이였던 5월 26일 KIA 타이거즈전에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와 1회 끝나기도 전에 ‘오늘 경기 만원’이 떴어요. 5회 끝나고 라커에 걸어놨던 ‘원숭이 팬티’로 갈아입고 있는데 빨리 나오라고 난리가 났어요. 구단에서 ‘이만수 수호대’ 22명을 모집했는데 5분 만에 다 찼다는 겁니다. 그분들과 함께 3만 관중이 기립박수를 보내는 운동장을 도는데 여기저기서 여성 팬들이 울더라고요.”   이만수 프로필 무슨 의미의 눈물이었을까요. “약속을 지키는 모습을 본 감동이겠죠. 자신이 한 말을 밥 먹듯이 뒤집는 세상에서, 농담처럼 한 말이라도 지키려는 한 남자의 우직함을 본 거죠. 당시 한국 사회가 반으로 딱 갈렸대요. ‘이만수는 무식하니 팬티 입고 뛸 거다’는 측과 ‘월드시리즈 우승팀 코치까지 한 스타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짓을 하겠나’는 쪽이었죠.”   고교 선수 대상으로 이만수 포수상-홈런상을 6년째 시상하고 계신데요. “포수상 만든다고 했을 때 주위 분들이 말렸어요. 포수는 인기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강팀엔 좋은 포수가 있다’는 걸 팬들이 깨닫기 시작했고, 양의지가 2019년 FA 대박(4년 총액 125억원)을 터뜨렸죠. 올 시즌 4명(박동원·박세혁·양의지·유강남)이 총액 343억원의 FA 계약을 하면서 ‘포수 전성시대’가 열렸어요. 지난해 이만수 홈런상을 받은 포수 김범석(경남고→LG)은 저를 능가하는 엄청난 선수가 될 겁니다.”   좋은 포수의 조건이 뭔지 물었다. 이 감독의 대답은 ‘기본’을 벗어나지 않았다. “첫째, 잘 받아야 합니다. 프로야구에 패스트볼(포수가 공을 놓치는 것)이 너무 많아요. 둘째, 잘 던져야 합니다. 2루 송구든 1루 견제든 빠르고 정확해야죠. 셋째, 잘 막아야 합니다. 블로킹 동작이 잘못된 프로 선수가 의외로 많은데 꿈나무들이 그걸 따라 하더라고요. 앞사람의 발자국이 뒷사람의 길이 됩니다.”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 jerry@joongang.co.kr

    2023.01.14 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