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박상영 "이제 재희와 헤어질까 해요…내겐 다른 이야기도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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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소설가 박상영
'복숭아 통조림·기억의 무게' 발표
계간 ‘문학동네’ 올해 가을호에 중편 ‘복숭아 통조림, 기억의 무게’를 발표한 그는 최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라며 “소설을 발표한 뒤 독자의 반응을 궁금해하는 순간이 오랜만이라 설렌다”고 말했다.
이번 소설은 슬럼프에 빠진 퀴어 소설가 ‘태석’이 대학 시절 친구와의 우정, 자신의 찬란하던 시절을 돌이켜보는 내용이다. 상실과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얼핏 퀴어 남성 ‘영’과 주체적 여성 ‘재희’의 우정을 그린 <대도시의 사랑법>을 떠올리게 하지만, 청춘을 담담하게 회고하는 태도는 소설가로서의 전환을 예고한다.
“등단 10년 차가 되고 책을 여섯 권 내니까 변하고 싶었어요. 어떤 의미로든. 그래서 드라마에 도전하기도 했고, 전혀 다른 장르의 장편소설도 쓰고 있어요. <대도시의 사랑법>이 낭만적으로 20대를 회고하는 작품이었다면, 이번에는 추하고 슬픈 순간까지도 조명하고 싶었어요.”
그는 “이제는 재희와 <대도시의 사랑법>의 세계를 떠나보내려 한다”며 “그 소설은 내게 많은 걸 준 작품이고 아마 평생 저의 대표작 중 하나로 남을 테지만 제겐 아직 다른 이야기도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차기작은 미스터리 장르, 새로운 시대와 색다른 인물에 도전한다. 박 작가는 “1940년대 태어난 재벌가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한 미스터리 소설 <지푸라기 왕관을 쓴 여자>(가제)를 마무리 작업 중”이라며 “뭔가로 규정되는 순간 거기서 도망가고 싶은 건 창작자의 특징인 것 같다”고 했다. “이제 진짜 매콤한 거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웃음)”
작품 속에서 ‘복숭아 통조림’은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여름 한 철 나오는 복숭아를 봉인해둔 통조림은 달콤한 청춘의 증거이자 상실을 상기시키는 장치다. ‘작가 박상영은 어떤 기억을 통조림에 잠가두고 싶은지’ 묻자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은 이미 소설에 다 썼다”는 답이 돌아왔다.
“작가는 참 좋은 직업 같아요. 연예인이 화보 찍을 때 말하는 것처럼 작가도 찬란하던 순간의 감정을 잘 기록해 놓을 수 있는 직업이에요. 제가 갑자기 죽더라도 제 작품들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있겠죠? 그래서 이 직업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게 돼요.”
박 작가는 “소설 속 주인공처럼 슬럼프를 겪으며 소설가라는 직업을 돌이켜보게 됐다”고 했다. 그는 <대도시의 사랑법>을 드라마화하는 과정에서 감독 한 명이 그의 동의 없이 시나리오를 바꿔버려 앓아누울 정도로 마음고생을 했다. 퀴어 소재에 대한 반감으로 드라마 예고편이 내려가자 외신과 인터뷰하며 한국 문화의 폐쇄성을 고발하는 투사 역할을 자처했다. 이런 순간들도 신작 소설에 고스란히 ‘박제’했다. 그는 “장편소설 마감을 어겨 작가가 된 이후 처음으로 출판사 담당 편집자의 메일에 답장을 피하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그를 일으켜 세운 건 선배 작가들과 담당 편집자였다. 박 작가는 “문학 행사에서 은희경 선생님께 사정을 말했더니 ‘그냥 써. 아니면 나중에 더 힘들어질걸’이라고 말씀해주셔서 힘을 냈다”고 말했다. 당초 원고지 300장 넘게 쓰고도 “이야기가 안 끝난다”며 완성하지 못하던 소설을 1주일 만에 새로 써서 발표했다. “마감을 못 할 거 같다고 하면 편집자님이 선해서 화도 못 내고 ‘몰라요….’ 딱 한마디 하시더라고요. 그 말이 저를 쓰게 만들었어요. (웃음)”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