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동구 상일동 한 아파트 단지에 붙은 현수막. 사진=한경DB
서울 강동구 상일동 한 아파트 단지에 붙은 현수막. 사진=한경DB
서울의 오래된 아파트들은 동네와 숨을 함께 쉬었습니다. 낮은 담장은 이웃을 가르는 경계가 아니었고, 단지 사이의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습니다. 덕분에 해당 단지 주민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단지를 가로질러 지하철역이나 버스정류장, 학교 등으로 향할 수 있었고, 여러 아파트 단지들은 그저 동네의 일부였습니다.

하지만 최근 지어진 재건축 단지들에서는 이러한 풍경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습니다. 최근 강동구 상일동의 한 아파트는 단지 중앙을 통과하는 공공보행로 곳곳에 입주민만 드나들 수 있도록 카드 인식 자동문과 펜스를 세우기로 했습니다. 다른 단지 주민이 오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인데, 지역 주민들은 지하철역으로 가기 위해 약 500m를 돌아가야 합니다.

해당 아파트 측은 "입주민 안전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는 입장입니다. 지난 7월 이 아파트에 살지 않는 청소년 3명이 공공보행로를 통해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와 차량에 소화기를 뿌리는 등 난동을 부린 일이 결정적으로 작용했습니다. 1월에는 인근 아파트 거주자가 공공보행로에서 넘어져 수술과 치료를 받고 보험금을 요구해 수령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서울 강남구 개포동 한 아파트 단지에 펜스와 출입문이 세워져 있다. 사진=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서울 강남구 개포동 한 아파트 단지에 펜스와 출입문이 세워져 있다. 사진=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외부인이 단지 내에서 음식물을 먹거나 반려동물과 산책하며 배설물을 치우지 않는다든지, 보행자들이 위협을 느끼도록 전동킥보드와 전동자전거를 타는 등의 문제를 겪다가 결국 과태료를 감수하면서라도 외부인 출입을 막기로 한 것입니다. 아파트 측은 "지자체의 유지·관리·단속 등이 없어 여러 부담이 입주민에게 전적으로 전가되고 있다"며 "입주민 안전과 질서가 심각하게 훼손됐다"고 주장했습니다.

비슷한 논란은 강남구에도 있었습니다. 강남구 개포동의 한 아파트도 입주 직후 설계에 없던 펜스와 출입문으로 단지를 둘렀습니다. 대모산을 가는 외부인들이 놀이 삼아 드나든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그로 인해 시가 공공기여 차원에서 허가한 공원과 산을 잇는 생태 다리는 아파트 주민 전용이 됐습니다.

이에 반발한 인접한 아파트 단지들도 펜스와 출입문을 세우고 외부인 출입을 막기 시작하면서 주민들의 불편은 한층 커졌습니다. 이들 아파트 사이 2만7000평 넘는 근린공원 출입구 5곳이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결국 강남구청이 시정명령을 내리고 경찰 고발도 했지만, 여전히 개포동에는 높은 펜스가 서 있습니다.

과거에는 '조금 불편하더라도 함께 쓰는 길'이 있었지만, 지역 공동체에 대한 불신과 피로감이 커지며 이제는 '내 공간, 내 안전'을 우선으로 삼게 됐기 때문으로 풀이됩니다. 이렇듯 신축 단지들이 외부인 출입을 제한하는 분위기는 서울뿐 아니라 수도권 전역으로 확산하고 있습니다. 인천 영종도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는 다른 단지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놀았다는 이유로 입대의 회장에게 붙잡히고 경찰에 신고당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사건 당시 초등학생이 자필로 작성한 글. /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사건 당시 초등학생이 자필로 작성한 글. /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이러한 변화를 바라보는 노후아파트 주민들 사이에는 씁쓸함이 감돌고 있습니다. 한 노후 아파트 주민은 "우리 때는 서로 양보하며 살았다"며 "아이들이 이 단지에서 저 단지로 오가며 놀고 어울리는 게 당연했는데, 이제는 다 막혀버리니 서운하다"고 말했습니다.

실제 노후 아파트는 출입문이 없는 단지 경계에서 외부인 통행과 외부 차량 주차, 쓰레기 등의 문제를 감수하며 살고 있습니다. 예전부터 그래왔듯이 타인으로 인한 불편을 서로 조금씩 끌어안으며 나누는 일상을 보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담장으로 길을 막은 단지들은 그런 불편을 감수하지 않겠다는 입장입니다. 한 신축 아파트 주민은 "내 단지 안에서 안전하고 쾌적한 생활을 바라는 것이 죄는 아니지 않느냐"고 강조했습니다. 지자체에서 과태료를 물리더라도 액수는 많아야 수백만원에 그치기에 입주민들에게는 '안심할 권리'를 사는 값으로 여겨집니다.

지자체도 사유지 개방을 강제할 수 없기에 해법을 내놓지 못하는 사이에 길은 점차 닫히고, 아파트는 점점 더 높은 담장을 두르며 섬처럼 고립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웃과 함께 쓰던 공간은 '내 구역'으로, 함께 쓰던 길은 통제구역으로 변하는 풍경 속에서, 함께 사는 공동체의 마음도 조금씩 닫히고 있는 건 아닐지 고민해볼 문제입니다.

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ses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