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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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면 한국 제조업은 5년 안에 중국에 밀려 설 자리를 잃을 겁니다. 중국에 엄청난 악재가 생기거나 한국이 기업 관련 시스템을 확 갈아엎지 않는 한….”

한국 제조업 미래를 묻는 질문에 국내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 내놓은 답은 거의 똑같았다. ‘레드테크’(중국의 최첨단기술) 힘과 속도를 감안할 때 5년 뒤에도 살아남는 국내 기업이 많지 않을 것이란 얘기였다. ‘중국 제조 2035’가 완성되는 10년 뒤에는 최후의 보루인 첨단 반도체와 친환경 선박 분야가 따라잡히고 그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벌어질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도 들려줬다.
"첨단산업은 국가대항전…정부가 앞장서 대표 선수 키워야"
"첨단산업은 국가대항전…정부가 앞장서 대표 선수 키워야"
CEO들과 중국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해법에 ‘묘수’는 없었다. 지금 당장 정부와 기업, 학계가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찾아나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 똑똑한 인재가 공대에, 또 기업에 들어와 한국을 먹여 살릴 기술 개발에 자신의 미래를 걸도록 사회 분위기를 바꾸는 동시에 교육, 노동, 인센티브, 산업 정책 등 모든 시스템을 기업 친화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얘기다.

◇“국가 주도 첨단기술 육성 전략 세워야”

"첨단산업은 국가대항전…정부가 앞장서 대표 선수 키워야"
전문가들은 중국 제조 2025처럼 한국도 국가 차원에서 반도체, 배터리, 바이오, 인공지능(AI) 등 핵심 산업을 선정해 촘촘한 육성 플랜을 짜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병서 중국경제금융연구소장은 “정부 주도로 대규모 펀드를 조성해 소재·장비 국산화 프로젝트에 투자해야 한다”며 “예컨대 성장성은 크지만 한국이 뒤처지고 있는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부문에 기업이 대규모 투자할 수 있도록 정부가 보증하는 방식도 고려해볼 만하다”고 말했다.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회장도 “과거엔 기존 기술을 더 좋고 싸게 만드는 게 경쟁력의 원천이었다면 지금은 기술을 혁신해 신시장을 창출하는 게 핵심 경쟁력이 됐다”며 “기업이 5~10년의 인큐베이팅 시간과 지속적인 투자를 감내할 수 있도록 정부가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첨단산업 육성 과정에서 나오는 대기업 특혜 논란은 국민적 합의를 거쳐 해결하자고 제안했다. 김세연 동일고무벨트 전략고문(전 국회의원)은 “글로벌 첨단산업 경쟁은 사실상 ‘국가대항전’으로 치닫고 있는 만큼 우리도 국가대표 선수를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가 핵심 기술 장학생 키우자”

중국 대학에선 매년 대학 졸업생 1200만 명이 나온다. 그중 40%가량인 470만 명이 자연과학, 공학 등 이공계다. 22만 명인 한국 대학의 이공계 졸업자 대비 20배를 넘는다.

그런데도 중국은 해외 전문가 유치에 엄청난 공력을 들이고 있다. 칭화대와 베이징대 등은 AI 인재를 모시기 위해 연봉 2억원을 제시한다. 그나마 한국이 맞설 수 있는 길은 ‘의대 쏠림’을 ‘공대 쏠림’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려면 성과를 낸 엔지니어에게 충분한 인센티브를 줘야 한다.

황 회장은 “의사를 하는 것보다 기업에서 신기술을 개발하는 게 보람과 보상이 더 크다는 걸 학부모와 학생이 느끼게 해야 한다”며 “최근 SK하이닉스가 ‘성과급 1억원’을 준 일이 젊은이들에게 의대에서 공대로 목표를 바꾸는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전 소장은 “‘국가핵심기술 장학생’ 제도를 도입해 첨단기술 분야 대학생에게 학자금을 지원하고, 해외 유학 중인 이공계 박사급 인재가 귀국하면 주택자금, 연구비를 지원하는 제도를 검토해볼 만하다”고 했다.

◇“인허가 신속 통과제 도입하자”

중국 베이징과 상하이, 광둥의 첨단 제조 혁신 클러스터 등은 30일 이내에 인허가 절차를 완료하는 ‘신속 통과제’를 운영하고 있다. 한국도 ‘첨단산업 특별자유구역’ 등을 지정해 환경, 건축, 노동 규제 등을 한꺼번에 풀어주는 식으로 인허가를 간소화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백서인 한양대 글로벌문화통상학부 교수는 “중국은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사람)와 ‘불이 꺼진 채 돌아가는 공장’(로봇)에 미래를 걸었다”며 “중국의 생산성이 한국보다 높은 건 규제 완화 덕분”이라고 지적했다.

◇설계·소프트웨어·브랜드 확보해야

전문가들은 한국 기업이 살 길은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전환하고 소프트웨어, 브랜드로 승부하는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황 회장은 “스마트폰에 중국산 패널을 쓰더라도 핵심 소프트웨어로 차별화해야 한다”며 “‘중국에서 만들고 한국에서 지배한다’는 전략으로 위기를 돌파해야 한다”고 밝혔다.

LG전자에서 가전 사업을 담당하는 류재철 HS사업본부장(사장)도 “부품을 가장 빨리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는 중국의 제조 생태계를 우리도 활용해야 한다”며 “가격으론 중국과 맞설 수 없는 만큼 가치 차별화로 승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LG전자는 ‘가성비’ 중국 가전 기업인 스카이워스를 활용해 합작개발생산(JDM)을 하고 있다. 핵심 기술 바탕의 제품 기획과 품질, 브랜드 관리는 LG가 맡고 범용 부품의 설계와 생산은 스카이워스가 하는 방식이다. ‘머리’는 한국이, ‘몸’은 중국이 만드는 것이다.

◇“美 기술 동맹·中 인프라 활용”

미·중 갈등 국면을 우리 기업이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미국과 기술 동맹은 유지하되 중국의 생산 인프라를 활용하는 ‘하이브리드 전략’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전 소장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황 회장도 “미국과 중국 모두 한국을 같은 편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김보형/은정진 기자 kph21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