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종이는 상품이 아니라 장인이 만든 작품 같아요. 필리핀에 돌아가는 대로 구입해서 내년 전시회를 위한 작업을 하고 싶어요. 벌써 신나네요.”

필리핀 일러스트 작가 다니엘라 플로렌도는 15일(현지시간)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 마련된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부스에서 한지를 만져본 뒤 이렇게 말했다. 올해 도서전 주빈국인 필리핀 정부의 초청으로 참석한 그는 “평소에 한국과 일본의 종이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데, 유럽에 처음 와서도 결국 한국 종이를 보고 있다”며 웃었다.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개막일인 15일(현지시간) 한 관람객이 청주고인쇄박물관 부스에 전시된 <직지> 디지털 책을 살펴보고 있다.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개막일인 15일(현지시간) 한 관람객이 청주고인쇄박물관 부스에 전시된 <직지> 디지털 책을 살펴보고 있다.

개막일 전 세계 출판인 발길 이어져

이날 제77회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이 개막했다. 행사가 열리는 메세 프랑크푸르트는 오전부터 전 세계에서 모여든 출판인들로 북적였다. 올해 도서전은 10월 15일부터 19일까지 5일간 개최된다. 예년처럼 첫날과 이튿날은 출판 전문가를 위한 저작권 교류 행사 위주로 진행되고, 17일부터는 일반 관람객도 입장 가능하다.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도서전이다. 1949년 프랑크푸르트에서 현대적 형태로 처음 열렸는데, 그 기원은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 발명 직후인 15세기 말부터 인쇄물을 사고팔던 책 시장에 있다.

도서전이 열리는 메세 프랑크푸르트는 실내 전시장 면적만 총 40만㎡에 달한다. 서울 코엑스의 11배 정도 되는 공간에 전 세계에서 공수된 책과 관련 자료가 전시되는 셈이다. 관람객의 식사를 위한 푸드트럭과 대형 전시물이 설치된 야외 공간까지 합치면 전시 면적은 60만㎡에 육박한다.

도서전은 전 세계 출판계가 주목하는 저작권 거래 시장이자 홍보·교류의 장, 강연장이다. 각국 출판사와 공공기관 등이 전시 부스를 차려두고 손님을 끌어모은다. 도서전 주최 측에 따르면 지난해 153개국 4300개 출판사 및 에이전시, 기관이 참여했다.

국내 한 출판계 인사는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은 ‘문화 올림픽’의 성격을 띤다”며 “각국에서 홍보 부스를 차리고 자국 출판물과 출판산업의 저력을 홍보한다”고 했다. 출판이 영화, 드라마, 뮤지컬 등 각종 콘텐츠의 핵심 지식재산권(IP)으로 떠오르자 유망 영상화 판권을 확보하고 이를 팔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한지와 ‘까치 호랑이’도 등장

①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부스에 전시된 각종 한지.
①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부스에 전시된 각종 한지.
지난해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한국 문학 작품의 위상은 달라졌다. 창비 관계자는 “해외에서도 2030 여성이 주요 독자이다 보니 한국 문학 중에서도 젊은 여성 작가들에 대한 문의가 집중되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올해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흥행으로 한국 전통문화가 주목받자 관련 기관들도 도서전에 대거 참여했다. 청주고인쇄박물관은 ‘한국 호랑이와 까치를 만나다’를 주제로 한국 민속화 ‘호작도’ 판화와 금속활자 인쇄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내년 출간될 자신의 책을 알리기 위해 도서전을 찾은 셰리 햄비 사우스대 세와니캠퍼스 박사는 ‘까치 호랑이’ 그림이 새겨진 금속판에 잉크를 발라 한지에 찍어본 뒤 “당연히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봤고 좋아하는데 ‘더피’와 ‘써시’가 이 그림에서 유래된 건 처음 알았다”며 웃었다.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은 한지를 사용해 기와지붕을 연상시키는 곡선 모양으로 전시 부스를 꾸며 그림책 출판사 관계자와 공예 작가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회화를 위한 종이인지, 인쇄도 가능한 건지’ 등 방문객 질문이 이어지자 진흥원 직원들은 올해 광복 80년을 기념해 제작한 한지특별판 도서 3종을 꺼내 들었다.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이육사의 <육사시집>,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한지에 새긴 책들이다. 진흥원 관계자는 “올해는 기념용 한정판으로 300부만 제작했는데 반응이 뜨거워 내년에는 판매용 한지 도서도 제작할 계획”이라고 했다.

개막 전부터 뜨거운 열기

②구텐베르크 재단이 전시한 구텐베르크 금속활자 인쇄기 복원물.
②구텐베르크 재단이 전시한 구텐베르크 금속활자 인쇄기 복원물.
도서전이 막을 올리기 전부터 도시 곳곳은 이미 저작권 거래의 장이었다. 개막일 전날인 14일 프랑크푸르트 금융가 한복판에 있는 슈타이겐베르거 프랑크푸르트 호프 호텔은 전 세계에서 모인 저작권 에이전시, 출판편집자들로 입구부터 소란했다. 해마다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개막 전에 이곳에서 출판 에이전시 교류 행사가 열리는 게 전통처럼 자리 잡았다. 아셰트그룹 미국 뉴욕본사에서 온 한 편집자는 “여기 모인 사람들은 30분 단위로 미팅이 잡혀 있어 기자도 인터뷰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며 웃었다.

영국 런던 소재 출판 에이전시 다니엘라슐링만리터러리스카우팅의 해리엇 에글턴 씨의 가방에는 각종 서류와 함께 자신의 명함이 여러 상자에 담겨 있었다. 해외 출판사·출판 에이전시와의 약속이 줄줄이 잡혀 있어서다. 그는 “영미권 출판사나 TV 드라마·영화 제작사들이 관심 가질 만한 책을 발굴하고 판권을 계약하기 위해 호프 호텔에 왔다”며 “10년째 방문하는 연례행사”라고 했다.

<82년생 김지영> 등을 해외에 소개해온 듀란킴에이전시의 남유선 대표는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과 이런 교류의 장은 출간 또는 집필 계약 전부터 비공식적으로 판권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통로”라며 “그나마 올해는 주최 측이 저작권 교류 행사장을 미리 개방해 사람들이 분산됐지만 보통 땐 호텔 로비를 걸어 다니면 계속 어깨를 부딪혀 지나갈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도시 먹여 살리는 국제도서전

③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이 열리고 있는 메세 프랑크푸르트 전시장 일부.
③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이 열리고 있는 메세 프랑크푸르트 전시장 일부.
그렇다고 출판인들이 행사장만 오가는 건 아니다. 뢰머광장, 제일 쇼핑거리 등 주요 관광지에는 도서전 입장권을 목에 건 출판인들이 눈에 띄었다. 올해로 77번째 개최되는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은 프랑크푸르트시의 주력 관광 상품이다.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측이 추산하는 지난해 도서전 방문객은 약 23만 명. 지난해 프랑크푸르트를 찾은 전체 방문객 638만 명의 약 4%에 해당하는 숫자다.

도서전 기간에는 메세 프랑크푸르트 바깥에서도 각종 출판 행사가 이어진다. 독일 대표 서점 체인인 후겐두벨의 프랑크푸르트 매장 입구에는 도서전과 연계한 북토크 등의 행사 일정이 안내돼 있었다. 도서전 기간 열리는 ‘뢰머의 문학’ 프로그램은 뢰머광장 일대에서 작가 낭독회와 북토크 등을 무료로 진행한다.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독일국립도서관 역시 도서전 강연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동시에 도서전 기간에 맞춰 도서관 내 특별 행사를 준비했다.

도심과 도서전 행사가 열리는 메세 프랑크푸르트를 잇기 위한 시도는 계속된다. 도서전 주최 측은 올해 주빈국 필리핀과 함께 ‘지프니 저니’를 도서전 기간에 운영한다. 구텐베르크 동상이 서 있는 로스마르크트광장에 필리핀 특유의 대중교통 지프니를 세워둔 채 전통음식을 판매하고 전통 조명 파롤 만들기 체험을 한다. 지프니는 필리핀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군 지프를 개조해 소형 버스처럼 쓰면서 자리 잡은 독특한 문화적 상징이다. 차량 외관을 화려하게 꾸며 필리핀 문화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프랑크푸르트=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