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연휴 끝에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자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중심으로 불안감이 증폭하고 있다. 원화 하락폭이 다른 주요국 통화에 비해 큰 것으로 나타나자 일각에선 무역협상이 장기화하는 등 미국과의 외교관계가 삐그덕댈 징후가 나타난 게 핵심요인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엔화 가치 하락·프랑스 위기…곳곳이 지뢰밭"

10일 서울외환시장에서 달러화 대비 원화 환율은 전 거래일 주간 거래 종가(오후 3시30분 기준)보다 23.0원 오른 1423.0원으로 출발했다. 이는 장중 1440원을 찍은 지난 5월2일 이후 5개월여 만에 최고 수준이다.
사진=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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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 기간 유로화, 엔화 급락이 촉발한 달러화 강세를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역외 거래에서 1420원대 중반까지 치솟았던 원·달러 환율 흐름이 이날 시초가부터 반영된 것이다. 역외 환율은 지난 5일(1407.06원)부터 8일까지 16원 넘게 올랐다.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는 99.4 수준을 나타내고 있다. 지난 2일 종가인 97.9보다 1.5원가량 상승했다. 최근 한 달간 달러화 대비 환율은 원화가 2.38%, 엔화가 3.82%, 유로화가 1.16% 뛰었다.

이와 같은 환율 상승은 미 연방정부의 '셧다운'(일시적 업무정지)을 비롯한 연휴 기간의 여러 변수가 한꺼번에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미국 의회의 예산안 처리 지연으로 연방정부가 일부 기능을 멈추는 '셧다운' 상황이 지난 1일(현지시간)부터 9일째 지속되며 안전자산 선호가 강화됐다.

프랑스 정국 불안도 달러화 강세의 요인으로 지목된다. 프랑스 세바스티앵 르코르뉘 프랑스 총리가 취임 한 달 만에 사임해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을 향한 정치 압박이 최고조에 이르자 유로화가 약세 압력을 받기도 했다.

엔화는 일본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다카이치 사나에가 승리하면서 달러 대비 가치가 급락했다. 다카이치는 적극적 재정 정책과 완화적 통화정책을 주장하는 아베노믹스 계승을 자처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적자 국채 발행 확대와 일본은행의 금리 인상 지연 가능성이 반영되면서 엔·달러 환율은 이날 장중 152엔대까지 급등했다.

통상 국제 금융시장에서는 원화와 엔화가 한 몸처럼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박성철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한·미 재무당국이 환율과 관련해 인위적 개입을 지양한다는 내용의 협정을 체결하면서 추석 연휴 기간 환율 방어 움직임이 제한된 상황 속 엔저가 나타났다"며 "이에 같은 아시아 통화권으로 묶이는 원화가 동조하면서 약세를 보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민경원 우리은행 연구원은 "추석 연휴 기간 프랑스 총리가 1개월 만에 사임하며 프랑스발 정치적 불확실성 확대에 유로화가 급락했고, 엔화는 다카이치가 자민당 총재가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아베노믹스 정책이 부활할 것이란 시장 평가에 급락했다"고 분석했다.

"한·미 협상 교착 장기화에 원화 약세"

이번 환율 급등세는 3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진 가운데 증권가에선 미국이 관세 부과를 이어가며 협상 장기화 우려가 커진 영향이 기름을 붓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국과 미국은 지난 7월 말 한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고 3500억달러를 미국에 투자하는 내용의 협상을 타결한 후 투자 방식과 이익 배분을 두고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지난 4일 미국에서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과 만났지만, 결론을 내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만약 미국 정부의 요구처럼 3500억달러를 현금으로 투자해야 한다면 외환시장은 전례 없는 상방 압력에 부딪히게 된다. 3500억달러가 한국 외환보유액의 84%에 달하는 규모인 만큼 이를 현금으로 선불 투자하면 환율 급등과 수입 물가 상승 등으로 인해 '제2의 외환위기'가 현실화할 수 있다는 우려다.

이에 한국 정부는 무제한 통화스와프 체결 조건을 제안하는 등 돌파구를 모색했으나, 미국 측에서 아직 유의미한 답변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통화스와프는 자국 통화를 상대국에 맡긴 뒤 정해진 환율로 상대국 통화를 빌려오는 제도로, 외환시장의 급변동성에 대응할 수 있는 국가 간 마이너스 통장 같은 역할을 한다. 외환보유고를 소진한 뒤 다시 적립하는 것보다 비용 측면에서 유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과거 한국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2020년 코로나 위기 시 미국과 한시적 통화스와프를 체결한 바 있지만, 이번처럼 대규모 투자를 위한 무제한 스와프를 요구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이달 말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원화 강세 요인을 끌어낼 만한 우호적 합의가 도출될지도 아직 불투명한 상황이다.

문다운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대내적으로는 3500억달러 대미 투자 협상에 대한 불확실성이 원화 고유의 약세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10월 말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을 전후로 양국이 한국 외환시장에 미칠 파급 효과를 감안해 대미 투자 협상을 타결할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대미 투자 협상이 타결되면 외국인 투자자의 매수 흐름이 양호한 상황에서 급반락할 가능성도 있다. 박상현 iM증권 연구원은 "대미 투자 협상이 우리 측이 제시한 투자 비율 등이 반영된 형태로 타결되면 원·달러 환율은 1360원대까지 가파르게 하락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당분간 1400원대 흐름 등락"

향후 관건은 당국의 개입 신호다. 환율 수준이 점차 국내 증시에 부담이 되는 수준으로 갈 경우 적극적으로 억제 신호를 보낼 수 있다는 분석이다.

유상대 한국은행 부총재는 이날 오전 열린 '시장 상황 점검 회의'에서 "미국 연방정부 셧다운 장기화 가능성과 주요국 재정 이슈 등 글로벌 리스크(위험) 요인이 다소 증대된 모습"이라며 "향후 미 관세정책 관련 불확실성, 미 중앙은행(Fed) 금리인하 경로, 주요국 재정건전성 우려 등 대내외 불안 요인이 상존한 만큼 경계감을 갖고 시장 상황을 계속 면밀히 점검하겠다"고 언급했다.

전문가들은 당분간 원·달러 환율이 주요국의 정치 이벤트와 국내 증시 외국인 매수 흐름, 당국의 개입 등을 지켜보며 1400원대에서 등락할 것으로 내다봤다.

문 연구원은 "미국 고용 둔화로 뚜렷한 약달러 재개 전까지는 환율 하락 재료가 마땅치 않은 상황인데, 이마저도 미국 연방 정부 셧다운으로 지표 발표가 잠정 중단된 상황"이라며 "월말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국과 원화에 우호적인 협상이 타결될지도 미지수"라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현재 매크로 변수를 통해 추정한 적정 환율 레인지의 상단에 근접해가고 있는 만큼 레벨 부담과 당국 개입 등으로 향후 달러·원의 추가 상승 폭과 속도는 제한될 것"이라며 "하단의 경우 빅피겨(큰 자릿수) 1400원에서 강한 하방 경직성이 예상되는 점을 감안하면 당분간 1400원대 등락이 불가피할 전망"이라고 덧붙였다.

노정동/고정삼/진영기 한경닷컴 기자 dong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