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현장에서 본 미술 출판과 유통, 그리고 한국 제도의 허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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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변현주의 Why Berlin
베를린 미술 출판 현장
동시대 미술 담론의 장으로서의 책
베를린 미술 출판 현장
동시대 미술 담론의 장으로서의 책
그러나 오늘날 미술의 접점은 전시장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동시대 미술의 경험은 상당 부분 간접적 방식으로 이뤄진다. 소셜 미디어의 이미지와 온라인 아카이브에서 제공하는 전경 사진, 그리고 특정 전시와 작품을 기록하고 담론화하는 출판물이다. 특히 책은 이미지의 단편적 소비를 넘어선다. 치밀한 기획과 글, 디자인과 편집을 통해 미술의 독립적 매체로서 완결성을 가지며, 계속 읽히고 회자된다. 책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독자와 관객을 만나고 실제 작품을 마주하는 짧은 경험을 더 넓고 깊은 지평으로 확장하게 한다. 그렇기에 미술 출판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담론을 확산시키는 핵심적 예술 실천으로 작동한다.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주요 미술 출판사로 독일 최대 규모급 출판사인 하체 칸츠(Hatje Kanz), 케르버(Kerber) 등이 있다. 보다 소규모로 독특한 개성을 펼치는 출판사로는 책을 하나의 전시처럼 큐레이팅하는 케이 퍼락(K.Verlag), 예술 비평과 이론에 집중하며 비평과 문학을 접목한 실험적 미술 출판을 하는 슈테른베르크 프레스(Sternberg Press), 완성도 높은 전시도록과 모노그래프로 유명한 디스탄츠(Distanz), 출판 행위를 하나의 예술 실천으로 여기며 정치·미학적 질문들을 던지는 글로리아 글리처(Gloria Glitzer), 디자이너 안야 루츠(Anja Lutz)와 큐레이터 겸 비평가 악셀 랩(Axel Lapp)이 공동 설립한 출판사로 작가와의 긴밀한 협업을 통해 예술 작품의 연장선으로서 출판의 매체적 가능성을 탐색하는 더 그린 박스(The Green Box) 등이 있다.
또한 베를린에는 한국 출신 큐레이터 김재경이 운영하며 전시와 책의 경계를 넘나드는 전시 및 출판물을 선보이는 아인부흐하우스(einBuch.Haus), 디자이너 김영삼이 이끌며 아시아의 독립 출판사들과 연계하는 커먼임프린트(Common Imprint) 등이 있으며, 미술 출판의 다층적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처럼 베를린에서는 책을 통해 미술에 접근하고 경험할 수 있는 경로가 폭넓게 형성되어 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바로 출판사의 의지와 노력의 차이다. 미술 전문 출판사들은 대체로 공통된 국제 배포망(Idea Books, Les Presses du Réel, Anagram Books, Perimeter Distribution 등)을 통해 책을 유통한다. 하지만 유통망에 책을 보낸다고 자동으로 서점 매대에 오르는 것은 아니다. 서점이 발주하지 않으면 책은 창고에 머무를 뿐이다. 따라서 출판사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서점과 어떠한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유통의 성패가 갈린다. 자기 자본을 들여 책을 제작한 출판사라면 당연히 이 과정에 힘을 쏟는다. 이벤트를 열어 독자와 소통하고 서점과 직접 교류하며 책을 시장에 자리 잡게 만든다.
더불어 수익 구조에도 문제가 있다. 이 사업의 대다수의 경우, 판매 수익을 해외 출판사가 가져간다. 한국 작가와 기획자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만든 프로젝트는 가시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묻히고, 국민 세금으로 조성된 지원금은 실질적 효과 없이 해외 출판사에 귀속된다. 이 사업의 목적이었던 ‘한국 미술의 해외 확산’은 달성되지 않는다.
미술 출판은 동시대 미술에서 단순한 기록물이 아니라 담론을 확장시키는 핵심 매체이다. 전시는 일시적이고 공간적 제약을 지니고 있지만 책은 오랫동안 읽히며 새로운 독자와 관객에게 지속적으로 맥락을 전달한다. 베를린의 미술 출판 현장은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서점과 출판사, 디자이너, 기획자, 작가가 긴밀히 협력하며 책을 예술적 실천이자 사회적 담론의 장으로 확장시키고, 다양한 유통 채널과 독립적 시도가 서로 얽혀 미술 출판의 활발한 생태계를 만든다.
따라서 한국미술을 출판을 통해 해외에서 효과적으로 알리려면 단순히 해외 출판사에 제작비를 지원하는 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현장에서 책이 어떻게 기획되고 유통되며 독자에게 도달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제도는 반드시 현장 전문가의 조언을 반영해 설계되고 운영되어야 한다. 해외 서점과 배포망의 작동 방식, 출판사의 동기 부여, 독자 및 관객과의 접점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같은 질문에 답할 때, 지원이 비로서 실질적 성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래야만 한국미술이 국제 출판 현장에서 가시성을 확보하고 동시대 미술 담론 속에서 자리매김할 수 있다.
베를린=변현주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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