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철의 글로벌 북 트렌드] 대법관의 정치적 중립은 과연 가능한가
미국 최고의 사법기관은 ‘연방대법원’이며, 연방대법관은 9명으로 구성된다. 미국 대통령은 ‘헌법 제2조 제2항 제2절’에 따라 상원의 동의를 얻어 연방대법관을 지명할 권한을 가진다. ‘헌법 제3조 제1항’에 따라 연방대법관은 종신직으로 사망하거나, 은퇴하거나, 사임하거나, 탄핵당하지 않는 한 자리를 유지한다. 2020년 대중적인 인기를 누린 진보 성향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연방대법관이 사망하자 당시 대통령이던 도널드 트럼프는 후임으로 보수 성향의 에이미 코니 배럿을 임명했다.

‘헌법 원본주의자’로 알려진 배럿이 대법관으로 임명되는 과정에서 그를 향한 대중의 관심이 치솟았다. 최상위 로스쿨이 아닌 노터데임대 로스쿨을 졸업한 사실이 화제가 됐고, 대법관 임명 이후 실제 판결에서 잇따라 진보적인 의견을 내며 주목받았다. 아울러 자녀 7명 가운데 한 명이 지적장애를 갖고 있고, 두 명이 아이티 출신 흑인 입양아라는 가정사가 알려지면서 개인적 삶에 대한 궁금증도 늘어났다. <법에 귀를 기울이며(Listening to the Law)>는 그를 향한 대중의 질문에 배럿 대법관이 직접 답하는 책이다.
[홍순철의 글로벌 북 트렌드] 대법관의 정치적 중립은 과연 가능한가
책에는 배럿이 노터데임대 로스쿨 교수와 앤터닌 스캘리아 대법관의 재판연구관을 거쳐 대법관이 되기까지 법과 함께한 여정이 소개된다. 배럿 대법관은 법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끊임없이 ‘듣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법에 흥미를 느끼고 공부를 시작한 과정에서부터 시작해 헌법의 기본 원리와 대법원의 운영 방식, 법을 집행하는 법관의 역할과 책임, 대법원의 정치적 중립성 유지 필요성, 법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 등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법을 연구하고 사건에 대해 판결하면서 겪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무엇보다 법이 단순히 규칙의 집합체가 아니라 인간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된 ‘생동감 넘치는 소리’라는 해석이 인상 깊게 다가온다.

‘낙태 허용’ 결정을 내린 ‘로 대(對) 웨이드 판결’을 뒤집은 2022년 대법원 결정을 회고하면서 배럿 대법관은 ‘개인의 권리’와 ‘사회의 이익’이 충돌할 때 무엇을 먼저 고려해야 하는지 설명한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판결인 데다 ‘동성애 허용’ 관련 판결을 앞두고 있어 미국 사회는 대법원 결정에 촉각을 기울이고 있다.

배럿 대법관은 책에서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 자신의 분명한 ‘사법철학’을 소개한다. 첫 번째 ‘사법적 절제(judicial restraint)’다. 판사가 자신의 신념을 법에 반영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개인의 이념이 법 해석과 판결에 영향을 미쳐서는 공정한 법 집행을 할 수 없다. 두 번째 ‘원본주의(originalism)’는 법이 국민의 변화하는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헌법을 제정하고 비준한 이들의 의도에 따라 해석돼야 한다는 것이다. 여론이 판결에 영향을 주면 안 된다는 뜻이다. 세 번째 ‘문언주의(textualism)’는 자의적 해석을 방지하기 위해 법은 조문에 적힌 그대로 해석돼야 한다는 것이다.

[홍순철의 글로벌 북 트렌드] 대법관의 정치적 중립은 과연 가능한가
보수 쪽으로 기운 연방대법원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고 있다는 지적이 잇따르는 가운데 법관의 정치적 편향성을 둘러싼 논란으로 미국도 상당히 시끄럽다. 이런 상황에 현직 대법관이 자기 생각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책을 출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상당히 흥미롭다.

홍순철 BC에이전시 대표·북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