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칼럼] ▶▶▶ 비너스를 닮은 여인 '파르테노페'…삶의 심연은 늙어야만 보인다네

이탈리아 현대 영화의 상당수, 그것도 괜찮은 이탈리아 영화들이라면 대체로 수다스럽다. 물론 과학적인 사고는 아니다. 통념이다. 물리적으로 대사의 양이 많고 표현이 과하며 대개 과장된 제스처, 액션이 곁들여진다. 굳이 말하자면 상당히 연극적인 전통에 기대서 있다. 이건 이탈리아어가 갖는 독특한 리듬감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탈리아 영화들은 대부분 연극적 영화들이고 그래서 비현실적인 정서를 풍긴다. 그러다 점점 시공간을 이탈해 몽환적인 분위기, 의식의 세계 이쪽과 저쪽을 넘나들기도 한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이 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향일 수 있다. 그의 <달콤한 인생>과 <8과 1/2>의 전통을 잇고 있는 셈이다.

이탈리아에서 현존하는 감독 중 거의 최고 격으로 평가받는 파올로 소렌티노는 펠리니의 적자이다. 펠리니를 다시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거기에 소렌티노는 몇 개의 캐릭터를 더 중첩 시킨다. 이른바 마술적 리얼리즘의 작가로 불리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장문 스타일, 폴 오스터와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에두르고 에둘러 돌아가는 서사의 우회 구조 등을 닮아있다. 소렌티노의 시끌벅적한 소동극을 보고 있으면 영화가 지닌 총체성이란 게 무언지를 목격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소렌티노의 신작 <파르테노페>는 관념성과 유물성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삶과 세상에 대한 통찰은 그 두 가지 강을 다 건너야만 얻어지는 것이다. 일정한 시간이 걸리고 통과의례를 다 밟아야 한다. 그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길이다. 축지법을 쓸 수가 없다. <파르테노페>는 그런 깨달음에 관한 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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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르테노페>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소렌티노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어디서 저런 여배우를 데리고 왔을까 싶을 때가 많다. 여배우들이 육감적이다. 그것도 매우. 그래서 영화의 외피는 늘 섹시하고 에로틱하며 관능적이다. 거침없는 섹스가 벌어질 것만 같고 마치 로마 시대처럼 질펀한 그룹의 향연이 펼쳐질 듯한 기묘한 기대감을 준다. <파르테노페>에서 파르테노페 역을 맡은 셀레스트 달라 포르타는 루키(rookie)이다. 완벽한 신인이다. 그러나 이번엔 특히나 더욱, 이 신인 여배우를 벗기고 샅샅이 카메라로 훑고 탐하며 끊임없이 훔쳐보게 한다. 그런데 그건 소렌티노의 철저한 연출이다. 소렌티노는 셀레스트 달라 포르타를 마치 화초를 키우듯 직접 만지고 달래고 가꿨을 것이다. 이번 영화의 핵심은 이 여배우이다. 이 여자의 젊음, 미모, 그 미칠 듯한 페로몬의 향기이다. 그것이야말로 영화가 다 끝나갈 때쯤에 우리가 깨닫는 인생의 덧없음, 외모와 미모와 섹스의 능력과 물질의 능력이 다 쓸모가 없는 것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소렌티노가 넷플릭스 영화 <신의 손>에서 보여줬던 극단적인 노출감 같은 것과는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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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르테노페>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신의 손>에서 주인공 파비에토(필리포 스코티, 이건 소렌티노 자신이며 이 영화는 자전 스토리이다)와 함께 나폴리에서 살았던 이모 마리아(테레사 사포난젤로)는 조카 앞에서든 사람들 앞에서든 훌떡훌떡 벗어젖힌다. 멜론 같은 커다란 가슴을 드러낸다. 소렌티노 영화의 극 중 여성 캐릭터는 아름다우면서도 도발적이고 기괴하다는 특질을 지닌다. 소렌티노가 생각하기에 ‘리얼리티는 형편없는 것(Reality is lousy)’이다. 그래서 출렁출렁 가슴을 드러내는 판타지가 더욱더 그럴듯하다고 얘기한다. 소렌티노 영화에 나오는 거침없는 섹스도 우리의 머릿속 욕망이며 꿈속의 카니발리즘이다. 리얼은 형편없다. 영화로라도 느끼라고 말한다.

이번 영화 <파르테노페>에서 소렌티노는 자기 장기인 소동극의 강도를 다소 낮춘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이번 영화는 평가의 갈림길에 섰다. 소렌티노가 순해졌다는 얘기도 나왔다. 그러나 소렌티노는 자신이 잘 그려냈던 헛소동보다는 이번엔 인생에 관한 성찰 과정에서 얻게 되는 ‘깨달음의 소동’에 주목하려 한다. 결국 그 휘황찬란하던 파르테노페도 늙는다. 영화에서 배우는 청순한 셀레스트 달라 포르타(28)에서 노년의 스테파니아 산드렐리(79)로 옮겨 간다. <파르테노페>는 바로 그 같은 허망함에 대한 영화이다. 그건 슬픈 얘기지만 진솔하고 진지한 얘기이다. 그래서 역시 다시 한번 인생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만든다. 마치 로베르토 베니니가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1998)에서 줬던 역설과도 같은 느낌이다.

영화 속 파르테노페 주변에는 두 명의 젊은 남자가 있고 세 명의 늙은 남자, 엄밀하게 얘기하면 세 명의 늙은이들이 있다. 두 명의 젊은이 중 한 명은 오빠 라이몬도(다니엘 리엔조)이다. 다른 한 명은 집안 가정부의 아들로 산드리노(다리오 아이타)이다. 파르테노페와 같이 컸다. 산드리노는 파르테노페에게 약혼하자고 한다. 그는 그녀와 사랑에 빠져 있다. 그러나 영화 <파르테노페>의 진짜 골간은 근친 욕망이다. 오빠는 파르테노페에 빠져 있다. 그에게 있어 그녀는 파르테나(순수한 처녀)이다. 세이렌이다. 그리스신화 속 오디세우스 이야기와 달리 영화 <파르테노페>에서의 세이렌은 바닷물에 빠져 죽지 않는다. 죽는 건 다른 사람이다.
영화 <파르테노페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파르테노페>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파르테노페의 부모는 이런 오누이를 늘 걱정의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이 치명적인 사랑은 어쩔 수가 없다. 관능적 유혹에 빠져 있는 젊음의 사랑은 늘 그렇듯이 허망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법이다. 파르테노페가 잃고 얻는 것, 그것은 탐미적인 무엇과는 다른 선상에 놓여 있다. 영화 오프닝과 클로징에 반복해서 나오는 내레이션은 프랑스 작가 루이 페르디낭 셀린(『Y교수와의 인터뷰』 『밤의 끝으로의 여행』)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진행된다. “난 자유를 갈망했고 열정은 살아있었다. 인생은 길고 세상은 넓어 길을 잃기 쉬우니까.” 자유를 갈망하지 않았다면 길을 잃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열정이 있었다고 해도 길을 잃지 않았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파르테노페가 만나는 늙은 남자들은 한결같이 그 얘기를 한다.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 말한다. 매력적인 노신사 존 치버(미국 작가. 그는 자신의 교도소 경험담을 쓴 소설 『팔코너』로 명성을 얻었다. 영화에서 파르테노페는 술과 양성애 섹스에 탐닉하는 시절을 기록한 자전 에세이 『존 치버의 일기』를 읽으며 그의 우울증이 좋다고 말한다)는 당신의 산책길에 동행해도 되겠냐는 파르테노페의 물음에 “난 너의 젊음을 단 1분도 빼앗고 싶지 않다”라고 말한다. 치버는 “어제 술을 너무 먹고 다 까먹었다며 영원한 사랑도 사라졌다”라고, “인생은 단순해…견딜 수가 없다”라고 고백한다. 파르테노페는 이 늙은 예술가에게 정말 매료됐을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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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르테노페>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파르테노페가 자신의 인류학 교수 마로타(실비오 올란도)가 인간 말종이라고 경고한 주교(페페 란체타)를 만난다. 인간 말종답게 주교는 파르테노페와 한바탕 유사 섹스를 나누고 떠나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주교는 파르테노페가 고통과 함께 지나가는 시간의 문제(아무리 고통스러운 순간도 결국은 잊게 된다는 또 다른 고통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고 있지?, 라고 갈파하면서도 곧바로 “그게 아닐 수도 있고”라며 또다시 꿰뚫어 본다. 고통의 시간을 붙들고 고민하는 척 그것도 망각해 가고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파르테노페의 지도교수와 주교는 삶의 진리와 실체를 알아내는 것이 인류학도 아니고 신앙도 아니며(주교가 봉직하는 성당은 나폴리 두오모인 성 젠나로 대성당으로 매우 신성한 곳이다. 매년 두 번, 이곳에 모신 성 야누아리오의 피가 흐른다, 고 알려져 있고 그렇게 믿긴다) 젊음도 사랑도 욕망도 다 사라진 다음에야 가능하다고 말한다. 허망의 본질을 깨닫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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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르테노페>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감독들에겐 귀소본능이 있다. 자신이 지닌 상상력의 근원, 아직도 헤매고 있는 욕망의 원천, 여전히 풀어내지 못한 지적 호기심의 시작점 등등. 감독은 늘 돌고 돌아 그 시기와 공간으로 돌아가곤 한다. 그건 마치 주세페 토르나토레가 만든 <시네마 천국>의 주인공 토토가 유명 스타 감독이 된 후에 어릴 적 고향인 시칠리아로 돌아가 홀로 극장에 앉아서는 키스신만을 모아 만든 짜깁기 필름(과거 마을 신부가 검열한 것)을 보면서 울다 웃다 하는 심정과 같은 것이다. 영화감독들은 자신의 영화가 향하는 공간을 꼭 한번 그려내고 싶어 한다. 파올로 소렌티노에게 있어 그곳은 나폴리이다. 나폴리는 소렌티노의 물리적 고향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은 바로 나폴리이다.

파르테노페가 대학교수에서 정년 퇴임한 후 나폴리로 돌아와 거리에서 축구에 열광하는 일군의 젊은이들을 보며 미소 짓는 장면은 페데리코 팰리니의 <달콤한 인생>의 거리 풍경을 닮았다. 파르테노페가 이제야 깨달음의 행복을 얻은 표정이다. 파올로 소렌티노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 <파르테노페>는 슬프지만 아름다우면서 평화로운 엔딩신을 지녔다. 근데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꿈꾸는 인생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양립이 가능한, 우울한 평온감이 들 것이다. 어쩌면 바로 그게 영화가 사람들에게 제공해야 할 무엇인지도 모른다. <파르테노페>는 지난 9월 24일에 전국 개봉했다.
영화 <파르테노페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파르테노페>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오동진 영화평론가

[Parthenope | Official Trailer HD | A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