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라도 로키산맥의 해발 약 2,400m에 위치한 아스펜은 맑고 청정한 자연환경과 사계절이 뚜렷한 기후를 지닌 도시로, 여름에는 평균 기온이 10~25℃로 쾌적하고 겨울에는 풍부한 적설량을 자랑한다. 19세기 후반 은광 개발로 형성된 작은 광산촌이던 아스펜은 은광이 고갈된 이후 급격히 쇠퇴했으나, 20세기 중반부터 뛰어난 자연경관과 이상적인 기후 조건을 활용해 스키 리조트와 휴양지로 재탄생했다. 특히 1940년대 이후 스키 산업과 부유층의 휴양 수요가 맞물리며 전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되었고, 현재는 개인 전용기와 초고가 부동산으로 상징되는 미국 대표 리조트 타운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니다.

아스펜에는 1949년부터 매년 여름 개최되고 있는 '아스펜 뮤직 페스티벌 & 스쿨(Aspen Music Festival and School, AMFS)'이 있다. 여름이 되면 아스펜은 전 세계 음악 애호가들이 모이는 음악의 성지로 변모한다. 인구 6,500명 남짓의 소도시가 여름이면 약 2만 명으로 불어나고, 인근 계곡과 주변 타운까지 합치면 약 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올해로 76회를 맞이한 AMFS는 아스펜의 여름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 무엇이 있었길래 70년 이상 지속될 수 있었을까.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이 다는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그 화려함의 이면에 어떤 노력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뮤직텐트 밖 잔디석 / 사진출처. © AMFS
뮤직텐트 밖 잔디석 / 사진출처. © AMFS
1949년, 시카고의 산업가이자 자선가인 월터 페프케는 아스펜에서 ‘괴테 200주년 기념 음악회와 학문 축제’를 개최했는데, 이 행사가 바로 아스펜 인스티튜트와 AMFS의 시작이었다. 페프케는 유럽의 지적 살롱 문화와 음악 축제를 미국 서부의 자연 속에 구현하고자 했고, 이 과정에서 아스펜 인스티튜트를 설립하며 예술·철학·음악을 결합한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이 행사에 참여했던 음악가들과 교수진이 여름 음악학교 및 공연 프로그램을 이어가면서 현재의 AMFS로 이어져 오게 되었다. 하지만 단지 부유층의 여름 휴양지에 음악 축제와 학교가 생겨났다고 해서, 이것이 저절로 70년 이상 안정적으로 명맥을 유지해 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AMFS의 구성과 규모를 보면 단순히 음악 축제를 넘어 하나의 학교라 보는 것이 더 맞을 듯했다. 매년 전 세계에서 열정과 재능을 가진 학생들이 AMFS에 지원하며, 심사를 통해 최종 선발된 약 500명의 젊은 음악가들이 모여 8주간 세계 정상급 연주자와 함께 배우고 연주한다. 100여 명의 교수진은 뉴욕 필, 베를린 필 등 주요 오케스트라의 단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학생들은 오케스트라 연주회와 체임버 콘서트, 독주회 등 크고 작은 다양한 프로그램에 직접 참여한다. AMFS의 프로그램은 올해 기준, 운영 기간인 7월 2일부터 8월 24일 기간 중 300여 개 내외의 프로그램이 다채롭게 구성되어 관객들을 맞이했다.
바이올리니스트 길 샤함(Gil Shaham) 클래스 진행 모습 / 사진. © Diego Redel
바이올리니스트 길 샤함(Gil Shaham) 클래스 진행 모습 / 사진. © Diego Redel
지휘자이자 페스티벌 음악감독 로버트 스파노(Robert Spano)  © Diego Redel
지휘자이자 페스티벌 음악감독 로버트 스파노(Robert Spano) © Diego Redel
아스펜은 도시 규모에 비해 놀라운 공연 밀도를 자랑한다. 아스펜의 인구 규모는 6000여 명 정도로 한국 평창군의 대관령 지역 인구와 거의 비슷하다. 이러한 규모의 마을에서 300여 개의 프로그램이 진행된다는 것이 놀랍기도 했지만, 굳이 왜 이렇게 많은 연주회를 기획하는지 궁금했다. 이러한 질문에 AMFS 아트 총괄 디렉터인 패트릭 체임벌린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는 “우리는 단순히 공연을 만드는 조직이 아니라 학교입니다. 교육이 공연을 이끌고, 공연이 교육을 완성한다고 믿습니다. 학생들이 교수진과 나란히 무대에 서는 경험은 다른 곳에서는 쉽게 할 수 없는 기회입니다.”라며 학생들이 무대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보다 더 좋은 교육은 없다는 것이 AMFS의 철학이라고 덧붙였다.
하프시코드 연주자 니콜라스 맥기건(Nicholas McGegan) / 사진. © Diego Redel
하프시코드 연주자 니콜라스 맥기건(Nicholas McGegan) / 사진. © Diego Redel
즉, 학생들에게 최대한 많은 연주 기회를 제공하려고 하다 보니 2개월 기간 동안 300여개 내외의 프로그램을 선보이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설명을 듣고 보니, 매년 지원하는 학생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는 AMFS의 부대표이자 운영총괄인 힐러리 레스페스의 언급이 자연스레 이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정상급 연주자들을 섭외하여 교수진을 꾸리고 연주를 기획하는 것은 또 다른 노력이 필요한 일처럼 보였다. AMFS의 부대표이자 총괄 매니저인 케이트 노스필드 라니치는 “AMFS를 한번 거쳐 간 음악가들은 스스로 AMFS의 졸업생이라 생각하고 홈커밍데이를 기다리듯 일정만 맞는다면 동료 음악가, 제자, 가족들과 언제든 방문하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AMFS의 문화이자 우리는 든든히 지탱해 주는 기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수의 연주자를 섭외하는 것은 상상하는 것과는 달리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이 그녀의 대답이었다. 바이올리니스트 이츠하크 펄먼, 바이올리니스트 미도리 고토, 피아니스트 조너선 비스 등을 언급하며 이들 역시 AMFS를 거쳐 간 졸업생들이라 설명했다. 또한 전 세계 유명 오케스트라에 AMFS의 졸업생이 없는 곳은 없을 것이라 자부했다.

그럼 관객은 어떤가. 아스펜 음악제의 청중 대부분은 미국 전역에서 여름휴가를 맞아 정기적으로 AMFS를 찾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단순히 티켓을 구매하는 소비자가 아니라, 매년 학생들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는 동시에 후원하는 ‘동반자’로서의 정체성을 갖는다. 관객들은 공연장 주변을 오가다 학생 연주자들을 마주치면 자연스레 본인의 감상 또는 감동을 전하고 연주자에게 사인을 요청하거나 사진 촬영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것이 단순한 팬덤이라기보다는 연주자들의 열정과 꿈을 함께 나누고 응원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장면은 따로 있었다. 공연 시작에 맞추어 헐레벌떡 등장하는 관객들은 거의 없었다.
야외 연주 학생들 / 사진출처. © AMFS
야외 연주 학생들 / 사진출처. © AMFS
특히 마이클 클라인 뮤직텐트 공연의 관객 대다수는 공연 시작 2시간 전부터 삼삼오오 피크닉 물품을 메고 들고 여기저기서 등장했다. 그러더니 공연장인 텐트를 둘러싼 잔디 이곳저곳에 매트를 깔거나 캠핑 의자를 가지런히 두고 앉아서 책을 보거나, 준비해 온 음식을 나누어 먹거나, 강아지와 함께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잔디는 텐트 가까이에 있는 집중 음악 감상구역, 조금 멀리 위치한 편안한 음악 감상구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다(이곳은 티켓을 구매할 필요가 없는 무료공간이다). 놀랍게도 뮤직텐트의 벽면은 병풍처럼 쪼개져 있는데 각각의 면이 사선으로 열리면서 외부와 내부를 자연스럽게 연결해 주고 있었다. 즉, 집중 음악 감상구역에 자리만 잘 잡으면 생생한 연주는 물론이고 연주자의 모습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마이클 클라인 뮤직텐트 내부 / 사진출처. © AMFS
마이클 클라인 뮤직텐트 내부 / 사진출처. © AMFS
티켓을 구매한 사람과 구매하지 않은 사람을 억지로 나누지 않고 누구나 음악을 듣고 싶은 사람이라면 최대한 즐길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있었다. 나 역시도 그곳에 앉아 머리 위로 드리운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와 오케스트라의 음악을 함께 들으면서, 옆 사람 눈치 보지 않고 화이트와인에 샌드위치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신났다. 게다가 무료로! 가끔 1시간이 넘어가는 공연이 조금 힘들 때도 있고, 전체 레퍼토리 중 일부만 듣고 싶을 때도 있는데, 무료 공연의 경우 실내 콘서트홀에서 30분 내외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았고, 뮤직텐트 공연의 경우 잔디석에서 듣고 싶은 곡만 선택해서 들을 수 있어서 음악을 즐기는 데 전혀 부담이 없었다.

AMFS의 관객들이 클래식 음악을 삶에 두는 방식은 그들의 여름 문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주변 로키산맥의 산을 등산하다가, 산악자전거를 타다가, 골프를 치다가, 또는 점심을 먹고 산책을 나온 길에 들러 잔디밭에서 음악을 듣다 가거나, 자신이 꼭 보고 싶은 공연은 티켓을 구매하여 그날만큼은 공연장에서 진지하게 음악을 감상하고 있었다. 매년 이곳을 찾는 이들이 친구, 친지, 가족들과 나누는 담소 속에서 AMFS의 역사와 유산이 함께 보이는 듯했다.
뮤직텐트 잔디석 관객 / 사진출처. © AMFS
뮤직텐트 잔디석 관객 / 사진출처. © AMFS
올해 AMFS 캘린더 포스터의 빼곡한 텍스트 속에서 몇몇 연주자들의 사진이 등장했다. 그중 하나가 피아니스트 조성진이었다. 7월 20일에는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7월 22일에는 솔로 리사이틀이 있었다. AMFS의 부대표이자 총괄 매니저인 케이트 노스필드 라니치를 인터뷰하던 도중 그녀가 조성진이라는 이름을 너무나 정확하게 발음할 때 조금 놀랐지만, 이곳에서의 반응이 이 정도일 줄 몰랐다. 물론, 아스펜 지역 신문을 펼쳤을 때도 그의 공연에 대한 기사가 있었고, AMFS 매거진에서도 그에 대해 다루고 있었기에 반신반의하였지만, 공연장을 채운 관객들이 연주가 끝나기 무섭게 전체가 모두 기립하여 함성과 박수갈채를 보내는 관객을 보며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실력과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 / 사진. © Diego Redel
피아니스트 조성진 / 사진. © Diego Redel
피아니스트 조성진 / 사진. © Diego Redel/AMFS
피아니스트 조성진 / 사진. © Diego Redel/AMFS
조성진의 피아노가 흘러나오던 여름 저녁, 서서히 어둑해지는 산맥 너머로 석양이 내려앉았다. 음악은 산과 맞닿았고, 청중의 숨결은 조용히 하나로 섞였다. 아스펜의 여름은 그렇게, 음악과 자연, 그리고 인간의 호흡이 하나로 이어지는 순간을 선사했다. 70여 년 전 음악의 씨앗을 심어, 새싹이 나고, 새싹이 묘목이 되고, 아름드리나무숲이 된 아스펜은 음악과 자연, 교육과 공연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마이클 클라인 뮤직텐트 외부 / 사진출처. © AMFS
마이클 클라인 뮤직텐트 외부 / 사진출처. © AMFS
강지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