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의 비타민 경제] '우리가 남이가'에 담긴 휴리스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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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설사 이방인이 우호적이라고 해도 이를 확인하는 데는 탐색비용(search cost)이 든다. 발톱이 날카로운 네발짐승을 피하는 게 상책이듯, 이방인을 배척하는 게 자신과 집단에 유익하다고 여겼다. 탐색비용을 줄이는 관행으로 오른손 악수(무기가 없다는 신호)가 생겨난 것은 고대국가 이후의 일이다.
오늘날에도 타인을 배척하는 심리는 그대로 남아 있다. 우리 속담에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하듯이 영어에도 ‘The skin is nearer than the shirt(피부가 셔츠보다 가깝다)’라는 속담이 있다. 혈연 지연 학연 등 무슨 연줄이든 엮으려는 연고주의다. 누군지 모르는 장삼이사(張三李四)보다는 친인척, 동향, 동문에 더 정이 간다.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는 데는 집단 내에선 탐색비용이 필요 없고, ‘배신은 영구 추방’이란 불문율이 담겨 있다.
하지만 현대인의 삶은 전혀 모르는 타인들과의 끊임없는 관계망 속에서 이뤄진다. 그 범위는 집단, 도시, 국가를 넘어 세계적이다. 우리가 물건을 살 때 만든 사람의 민족 인종 종교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오직 가격이란 신호와 약속 이행의 신뢰만 있으면 그만이다. 이것이 인류 번영을 가져온 시장경제의 비결이다.
세상이 복잡다단해지면서 ‘끼리끼리’의 유혹은 더 커진다. 정치와 연고를 무기로 진입장벽을 세우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는다. 거기에 독점적 지대(rent)가 있기 때문이다. 중세의 길드, 조선의 육의전과 같은 배타적 집단은 지금도 적지 않다. 따라서 타인 경계의 휴리스틱은 반(反)시장과도 맥이 닿는다. 해법은 하나다. 거미줄 같은 연고나 특정 집단에만 유리한 편법이 아닌 만인에게 평등한 법치뿐이다. 복잡할수록 단순한 데 답이 있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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