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는 설 명절을 맞아 사회적 경제기업 제품으로 ‘따복선물꾸러미’를 내놓고 26일부터 특별판매한다. 따복선물꾸러미 상품은 도내 사회적 기업에서 직접 재배하고 생산한 과일류, 식품류, 생활용품, 떡국용 사골육수 등 설 명절에 필요한 제품으로 구성됐다. 네이버 온라인 쇼핑몰 ‘경기행복샵’과 도내 10개 따복가게(두레생협)에서 구입하면 된다.
용역을 동원해 독립운동인명사전 원고료를 부당수령하다가 환수 조치를 당하고도 대필자를 구해 또다시 원고료를 받은 독립기념관 전·현직 연구원들에게 벌금형이 내려졌다.연합뉴스에 따르면 대전지법 천안지원 형사4단독 김병휘 부장판사는 사기 등의 혐의로 기소된 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A씨(68)에 대해 벌금 1500만원을, 함께 기소된 연구원 4명에 대해 벌금 200만~700만원씩을 각각 선고했다.이들은 2015년에 독립운동인명사전 사업을 맡게 됐다. 광복 이후 포상된 독립운동가 1만5180명의 생애와 활동을 사전으로 편찬하는 사업이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집필자를 선정해 집필을 의뢰하고 원고의 교정·교열, 사업비 지급 등 업무를 총괄했다.독립운동가들 중 400여명에 대해서는 내부 연구원을 집필자로 선정했다. 문제는 정부의 예산운용 지침상 연구원들은 원고료를 지급받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이에 연구원들은 외부기관에 용역을 맡기고 원고료를 돌려받는 방식으로 부당이득을 취했다. A씨는 단국대 동양학연구원에 2차례에 걸쳐 2억7900만원 규모의 용역을 발주하고 대금을 집행한 뒤, 단국대 동양학연구원이 내부연구원 16명에게 1억4822만원의 원고료를 지급하도록 했다.이 같은 행위는 국가보훈처 감사에서 적발돼 지급된 원고료가 전액 환수조치됐다.하지만 A씨 등은 ‘원고가 아까우니 원고를 살릴 수 있도록 대필 행세할 사람을 구해 처리하자’며 대필자 명의를 빌려 8800만원의 원고료를 지급받았다.김 부장판사는 A씨에 대해 "내부 연구원들에 대해 원고료가 전액 지급되지 않을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고, 수사기관에서 '기존 원고가
한경 로앤비즈의 ‘Law Street’ 칼럼은 기업과 개인에게 실용적인 법률 지식을 제공합니다. 전문 변호사들이 조세, 상속, 노동, 공정거래, M&A, 금융 등 다양한 분야의 법률 이슈를 다루며, 주요 판결 분석도 제공합니다.A사는 B사 소유 건물을 임차해 사업을 영위하던 중 경영난에 직면했다. 임대차계약 체결 당시 A사의 지급정지나 회생절차 신청 시 B사가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는 조항을 넣어두었다. 한편 A사는 C사로부터 물품을 공급받으며 자사 소유 토지에 1순위 근저당권을 설정해줬다. 결국 A사는 회생절차개시 결정을 받았고, C사는 그 이후에도 계속 물품을 공급했다.이 경우 B사는 약정대로 임대차계약을 해지할 수 있을까? 또 C사가 회생절차 개시 후 공급한 물품대금도 근저당권으로 담보받을 수 있을까? 기업 회생 실무에서 자주 마주치는 이 두 가지 쟁점은 채무자의 재기 가능성과 채권자의 정당한 권리 보호라는 가치 사이의 미묘한 균형점을 보여준다. 도산해지조항의 효력,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계약 당사자들은 상대방의 재산 상태 악화에 대비해 이른바 '도산해지조항'을 계약서에 포함시키곤 한다. 지급정지나 회생절차 신청 등이 발생하면 계약을 해지하거나 당연히 종료되도록 정하는 조항이다. 특히 고가의 부동산 임대차나 대규모 거래에서 이런 조항을 흔히 볼 수 있다.채권자 입장에서는 당연한 자기 보호 장치로 보인다. 그러나 회생절차의 관점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재기를 위해 회생절차를 신청한 기업이 그 신청 사실만으로 사업 기반이 되는 핵심 자산을 잃게 된다면, 회생절차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법조계에서는 이 조항의 효력을
채계선 여사(90·사진)와 가족들은 지난 7월 이삿짐을 싸다 고민에 빠졌다. 채 여사가 고등학생 때부터 70년 동안 써온 일기와 결혼한 뒤 본격적으로 작성한 가계부가 사과 상자 두 개를 가득 채울 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이사를 가기 전 다 버려야 하나 싶던 중, 채 여사의 셋째 딸이 박물관 기증을 제안했다. 하마터면 폐지가 돼 사라질 뻔했던 일기장과 가계부는 역사적 자료로 가치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으로 향했다.채 여사는 지난 24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오래돼 누렇게 뜬 일기장과 가계부를 박물관에 기증하게 된 건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고 말했다. 막상 본인은 담담했는데, 자녀들이 신기해하며 ‘우리 엄마, 새삼 다시 보게 됐다’는 반응이었다고 했다. 채 여사는 1953년 성의고등학교에 진학해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매일 일기를 쓰게 됐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 교장을 지낸 학교다. 당시는 남아선호사상이 강해 여성이 진학하는 게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채 여사도 지금 기준으로는 졸업했을 나이에 고등학생이 됐다. 소소한 일상을 담아 일기를 쓰던 습관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