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생,성실한 남편,친구 같은 아빠,회사에선 주목받는 최고경영자(CEO)의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며 살아왔는데 이젠 어떤 역할이 아니라 진정한 '나'를 찾게 됩니다. 난… 누구죠?"(강병수 · 45 · 회사원)

"서울 올라온 친구들에게 결혼에 대해 물었더니 먹고 살기 바쁜데 무슨 결혼이냐고 되물어요. 그럼 먹고 살 만하면 하겠냐고 물어보니 '너 많이 해라' 하네요. "(차유남 · 26 · 카페 매니저)

약간 어색한 듯한 표정도 잠시였다. 소극장 무대의 조명 아래에 선 배우들은 자신만의 색깔로 대사를 쏟아냈다.

실제 배우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은 사랑과 삶,정체성에 대한 창작 연극 '고백,오 마이 갓' 연습 현장이다. 연출가가 무대감독을 향해 소리친다. "자,여기서 조명이 페이드 아웃(희미해짐) 됩니다. "

3일 오후 8시,서울 망원동 주택가에 자리잡은 성미산마을극장 지하 2층 소극장에선 연극 연습이 한창이었다. 배우들은 대부분 직장인.세종문화회관 산하 단체인 서울시극단이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운영한 시민연극교실의 참가자들이다.

주말(6~7일)에 선보일 공연을 위해 퇴근을 서두르거나 아예 월차를 냈다는 이들도 적지않았다. 이날 배우들이 처음 전막(全幕)을 연기하고 스태프들은 조명과 무대 세트를 조율하느라 리허설은 밤 10시를 훌쩍 넘겨서야 마무리됐다.

서울시극단이 올 4월 시민 45명을 공개 모집해 구성한 시민연극교실 '두드림(Do Dream)'은 6개월 동안 매주 두 번씩 모임을 가져왔다. 월요일은 각종 연극이론 특강,화 · 수 · 목요일은 3개 반으로 나뉘어 연극 실습에 나섰다.

회사원에서 자영업자,CEO,금융회사 직원,교사,보험설계사 등 직업도 다양하지만 연령층도 20대부터 60대까지다. 전문적으로 연기를 해본 지원자들은 아예 제외됐기 때문에 모두가 연기에 처음 도전했다.

도대체 이들은 왜 무대에 설까. 연기를 시작한 동기는 제각각이었다. 회사를 운영하는 양재현씨(51 · 넥서스커뮤니티 대표)는 "군대 간 둘째 아들이 연극영화과 학생인데 아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참여했다"고 말했다.

27년간 삼성SDS에서 근무하다 미국계 회사인 한국인포메티카의 한국법인 대표를 맡기도 했던 최고령 배우 문광수씨(66)는 "2008년 은퇴하기 전까지 기업 임원으로서 생산성과 성과에 몰두하며 빡빡하게 생활했다"며 "그래서 새로운 나를 찾아보고 싶었다"고 털어놨다. 문씨는 "재미있고 감동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마누라는 '당신이 중학생인 줄 아느냐'고 놀린다"고 껄껄 웃었다.

연극을 통해 이들이 얻는 성취감도 다양하다. 뉴욕생명 보험설계사인 곽경석씨(35)는 "연기를 통해 가식적인 모습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을 배우게 된다"고 말했다. 회사원 강병수씨는 "영업 일을 하다보니 대인 접촉이 많은데 연극을 통해 정신적인 포만감과 다른 사람들과의 교감을 얻게 된다"고 했다.

시민연극은 점차 확대되고 있다. 명동예술극장도 주부와 직장인을 대상으로 4주(11월16일~12월14일) 일정의 아마추어 배우교실을 운영하기로 하고 오는 10일까지 지원자를 모집하고 있다.

김석만 서울시극단 단장은 "평범한 시민들이 연극 무대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단순히 연극 및 지역예술의 대중화 차원에서만 바라볼 게 아니다"며 "치열한 경쟁과 스트레스를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자신의 틀을 깨는 연기에 도전하고 배우나 관객들과 어울림으로써 소통과 치유,창조를 경험하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시극단 시민연극교실은 6~7일 '진짜 진짜 리얼리티쇼'(화요일반),'고백,오 마이 갓'(수요일반),'라배도 이야기'(목요일반) 등 세 편의 짧은 연극을 성미산마을극장에서 총 6차례 선보인다. (02)399-1133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