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급이 적더라도 앞날이 보이면 괜찮습니다. 그러나 각 연구기관에는
''내가 나이가 들면 저렇게 돼야지''하는 모델이 될만한 나이든 연구원이
없습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떠나 세칭 일류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H교수의 말이다. 우리 정부출연연구기관들은 명예를 지킬만한 월급수준
도 보장돼 있지 않은데다 연구원으로서 꿈꿔볼만한 ''카리스마연구원''이
없다는 것도 젊은 연구원들을 실망케 하는 요소라는 지적이다.

정년이 가까워서도 연구에 열중하고 훌륭한 논문을 계속 써내는 정력적
인 노년의 전문연구원들을 우리 연구소에서는 어떤 연유에서인지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정치 잘해서 기관의 장이 돼 고급승용차를 타는 목표밖에 설정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지요'' H교수의 한숨어린 실토이다.

나이가 들면 연구생산성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공계 연구의
특성은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노년의 연구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열러 있어야 한다. 정년때까지 연구를 계속하느냐 아니면 연구의 경험을
살려 연구기관의 행정직으로 방향을 바꿀 것이냐를 어느 연령선에 이르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유도해줘야 하는 것이다. 즉 연구기관의 보직자
가 되느냐 또는 평연구원으로 평생 실험실에서 비크를 잡을 것이냐를
결정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연구기관에는 이같은 방향설정이 쉽지 않다. 아예
선택할길이 마련돼 있지 않다는 지적이다. 연구원은 모두가 연구경영이란
목표를 세워야 하는 분위기 때문이다. 연구기관들이 전문화되지 못한채
불안정한데다 개별 연구원마저 자신의 전공을 꾸준히 살릴만한 터전이
돼있지 못하다고 판단해 자주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외부에서 프로젝트도 따오고 논문도 발표하고 외부에서 자신을 알리는
''정치''도 잘 해야만 좋은 연구원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연구실에만 앉아
있다가는 무능한 인물로 평가받기 십상이다. 연구와 행정을 모두 겸해야
만 살아 남을수 있는 것이다. 많은 연구원들이 원장이나 소장이 되기
위해서는 오로지 정치를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다보니 젊어
서부터 연구에는 관심도 없이 정치에만 신경을 쓰는 연구원들도 있다는
것이다.

한국화학연구소에서 성균관대로 자리를 옮긴 지옥표교수는 은퇴를
앞둔 연구원들에 대한 배려도 심각하게 고려돼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연구경영쪽으로 나가길 원할 경우 행정 능력을 키워주는 재교육이 실시
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KIST출신의 H교수는 정부출연연의 연구방향을 기획하고 평가하는 기관
인 KIST산하 과학기술정책연구소 연구기획관리단의 운영방안을 개편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한다.

현재 각 연구기관에서 2년 임기로 파견해 근무토록 하고 있는 연구
기획관리단의 전문위원직을 각 기관의 경험많고 나이든 연구원들이
전임직으로 맡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얘기다. 이 경우 연구에 대한 평가
의 독립성을 확보할 뿐 아니라 나이든 연구원의 활용 측면에서도 훨씬
효율적이라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