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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간사이 지방의 한 대형 와인샵에 진열된 프랑스 보르도 와인들. 천호성 기자
일본 간사이 지방의 한 대형 와인샵에 진열된 프랑스 보르도 와인들. 천호성 기자

얼마전 저녁 모임에 곁들일 와인을 급히 사야 했다. 식사 메뉴는 일식 조리법을 가미한 이탈리아 음식. 성게알, 참치 붉은살처럼 익히지 않은 식재료가 많이 쓰인다고 했다. 와인을 마실 사람은 6명. 모두 먹고 마시기를 즐기지만 와인에 까탈스러운 편은 아니었다.

메뉴로 미루어, 탄닌이 많아 날음식과 떫게 충돌하는 레드 와인보다는 하늘한 질감의 화이트 와인이 필요했다. 날이 무더우니 산미가 높아 청량한 느낌을 주면 더욱 좋을 것이었다. 코르크를 연 후 맛의 변화를 천천히 지켜봐야 할 ‘복잡한’ 와인은 피하고 싶었다. 750ml 들이의 와인이 참석자 6명에게 한잔씩만 돌아갈 테니, 와인은 첫 잔에서부터 제 향과 맛을 피워내야 했다.

곁들이는 음식과 가격을 따져 고른 ‘샤르도네’

그래서 정한 포도 품종은 샤르도네였다. 샤르도네는 소비뇽 블랑 등과 함께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마시는 화이트 와인 품종이다. 레몬·라임 같은 새콤한 과실미를 기반으로 높은 산도를 내는 편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등에선 속을 태운 오크통에 이 품종을 숙성해 바닐라·초크(분필) 같은 묵직한 향을 만들기도 하지만, 이날은 대체로 그런 향이 덜한 프랑스 부르고뉴의 샤르도네를 고르기로 했다. 부르고뉴의 세부 생산지 중에서도 숙성된 과실미와 미네랄향 등이 조화로운 푸이 퓌세(Pouilly-Fuissé) 마을이 이날의 목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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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방문한 와인샵의 가격대가 대체로 높았다. 다른 소매점이나 대형 마트에서 7만원대에 파는 푸이 퓌세 와인에 9만원 이상의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와인 시음이 목적인 모임이 아닌데 웃돈을 내며 와인을 장만하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푸이 퓌세 주변의 넓은 생산지를 통틀어 일컫는 마콩 빌라주(Mâcon-Villages) 지역의 와인을 5만원 정도에 구입했다.

샤토 퓌세 마콩 빌라주(Château Fuissé Mâcon-Villages) 2023 빈티지(오른쪽 보틀). 천호성 기자
샤토 퓌세 마콩 빌라주(Château Fuissé Mâcon-Villages) 2023 빈티지(오른쪽 보틀). 천호성 기자

다행히 와인은 모난 데 없이 음식과 잘 어울렸다. 레몬류의 상큼한 향은 예상보다 적었고 밀감·리치·오렌지껍질 등 달달한 과일내가 도드라졌지만, 입안에서는 부르고뉴 샤르도네 특유의 산미가 뚜렷했다. 오크 숙성의 흔적인 달달한 바닐라는 세지 않았고, 대신 고소한 곡물류가 은은하게 피었다. 성게와 곁들이니 입속에 남는 비린 맛을 와인이 씻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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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마신 지인들도 더운 날에 어울리는 화이트 와인이라며 만족해했다. 와인이 저녁 식사의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기분을 돋워주는 제역할은 해낸 셈이다.

와인의 DNA를 이루는 ‘품종’과 ‘생산지’

와인을 열심히 쟁인지 8년째이지만 지금도 매대 앞에 서면 뭘 고를지 고민하다가 수십분을 쓰기 일쑤다. 이날처럼 여러 사람과의 모임에 급히 한병을 골라 가야 하는 날은 특히 생각이 길어진다. 국내 수입되는 와인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고 그 매력이 제각각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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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와인을 고를 때 고려하는 요소는 매번 같다. 그것은 무엇보다 ‘품종’이다. 품종은 와인 맛을 큰 틀에서 결정하는 디엔에이(DNA)와 같다. 품종마다 특징적인 산도·탄닌·당도·알코올 함량 등이 있어, 그날의 필요나 시음자의 입맛에 따라 적합한 품종을 고를 수 있다.

예를 들어,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재배하는 레드와인 품종인 카베르네 소비뇽은 비교적 높은 탄닌과 알코올을 갖는 강건한 품종이다. 메를로·카베르네 프랑과 함께 이른바 ‘보르도 블렌딩(배합)’을 이룬다. 블랙커런트(카시스)·검은 자두·검은 체리 등 검붉은 열매의 향과 맛을 내며, 오크 숙성에 따라 에스프레소·훈연향 등을 내기도 한다.

반대로, 세계적으로 사랑 받는 또다른 품종인 피노 누아는 딸기·체리·산딸기·라즈베리 같은 붉은 과실을 주로 뿜는다. 오크통에 숙성하는 기간이 대개 카베르네 소비뇽 등보다 짧아 섬세한 과실을 느낄 수 있는 경우가 많다. 탄닌이 뻑뻑하고 거칠기보다는 부드러운 질감을 지녀 우아하다는 인상을 준다.

이외에도 특유의 매콤한 향으로 한식과 잘 맞는다는 평을 듣는 시라(또는 쉬라즈)나, 후추 등 다양한 향신료내를 만들어내는 ‘론 블렌딩’(그르나슈·시라·무르베드르 배합)도 소매점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높은 산미의 레드 와인을 좋아하는 애호가라면 산지오베제·네비올로 같은 이탈리아 원산 품종도 즐길 것이다. 이 정도만 기억하더라도 와인샵이나 대형 마트에서 파는 대다수 레드 와인의 맛을 상상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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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명생산지 부르고뉴 ‘클로 드 부조’ 밭에서 난 피노 누아 와인. 천호성 기자
세계적인 명생산지 부르고뉴 ‘클로 드 부조’ 밭에서 난 피노 누아 와인. 천호성 기자

품종들은 생산지에 따라서도 다른 특징을 띤다. 지역마다 토질과 기후, 즉 테루아(terroir·풍토)가 다르기 때문이다.

세계의 생산지를 구분하는 가장 큰 분류 기준은 구대륙과 신대륙이다. 구대륙은 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 등 유럽의 산지를 말한다. 주요 품종들의 원산지이며, 천년 이상의 포도 재배 역사를 가진 곳들이 숱하다. 반면 유럽을 뺀 미국·아르헨티나·칠레·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등을 포함하는 신대륙 포도밭은 비교적 최근에 와인 생산을 위해 개간됐다. 일조량이 풍부한 방대한 토지에서 조방적으로 포도를 생산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특징으로 꼽히나, 신대륙 안에서도 나라·지역·생산자마다 구현하는 향과 맛은 천차만별이다.

예컨대, 봄·가을이 한랭한 프랑스 내륙 부르고뉴에서 재배된 피노 누아는 산도가 높고 당도가 절제된 편이다. 미국에서는 안개가 잦고 서늘한 캘리포니아주 러시안 리버 밸리나 오리건주에서 부르고뉴 스타일의 피노 누아가 난다. 반대로 볕이 센 캘리포니아 나파 밸리 등에선 당미가 한층 뚜렷하고 밝은 인상의 피노 누아를 만든다. 취향에 따라 어떤 이는 부르고뉴 피노의 우아한 산미를, 다른 이는 직관적으로 맛있게 다가오는 나파 피노의 당미를 즐길 것이다.

선택의 마지막 관문, ‘가격’

원하는 품종과 생산지를 좁혔다면 길다란 와인 매대에서도 선택지가 10종 안팎으로 줄어 있을 것이다. 이미 네자릿수 이상의 와인을 경험한 애호가라면 생산자별 특징과 빈티지(수확연도), 심지어 와인을 국내에 들여온 주류 수입사의 안목 등을 참고해 최종 선택을 내릴 것이다.

다만 아무리 와인에 익숙해도 마지막 관문인 ‘가격’을 따져야 기분 좋게 구매를 마칠 수 있다. 국내 수입 주류 가격은 다른 나라보다 센 주세와 유통사 마진 등으로 세계적으로 비싼 편이다. 정가 개념이 없어 같은 와인이어도 유통 채널마다 가격 널뛰기도 심하다.

프랑스 보르도 한 대형마트 와인 매대. 한국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대중적인 보르도 와인인 ‘무통 카데’를 11.5유로(약 1만8000원)에 팔고 있다. 천호성 기자
프랑스 보르도 한 대형마트 와인 매대. 한국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대중적인 보르도 와인인 ‘무통 카데’를 11.5유로(약 1만8000원)에 팔고 있다. 천호성 기자

한국 소비자들의 ‘생존 전략’은 다른 나라 판매가와의 비교다. 한 와인이 국외에선 얼마의 가치를 인정받는지를 확인한 뒤, 얼마큼을 지출할지 따지는 것이다. 와인 전문 애플리케이션 와인서쳐(Wine-Searcher)는 전세계 와인의 빈티지별 세계 평균 판매가와, 앱에 등록된 매장마다의 판매가를 보여준다. 와인닷컴(wine.com) 같은 온라인 판매 플랫폼이나 프랑스 유통체인 카르푸(www.carrefour.fr) 등에서도 와인별 가격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나는 보통 국내 판매가가 국외 가격과 30% 이내로 비싸면 좋은 가격으로 친다. 가격이 좀 비싸도 꼭 구하려는 와인이면 국외보다 50∼60% 비싸도 고른다. 하지만 국내에서 상당수 와인의 소매가는 국외 대비 이보다 비싸다. 한국의 비싼 주세 등을 감안해도 이정도면 과한 가격으로 보아 나는 되도록 집지 않는다.

예컨대 이날 내가 고른 ‘샤토 퓌세 마콩 빌라주’(Château Fuissé Mâcon-Villages) 2023 빈티지를 와인서쳐에서 찾아보면, 세계적으로 평균 3만7342원에 팔린다. 원산지인 부르고뉴에서 가까운 벨기에의 한 샵에서는 약 20유로(약 3만2000원)에 팔고 있었다. 나는 5만5000원을 줬으니 세계 사람들보다 50% 정도는 더준 셈이다.

고민을 줄이려면 대형 마트들이 주기적으로 여는 대규모 할인 행사(‘와인 장터’) 때 여러병을 쟁이거나, ‘성지’로 불리는 저렴한 와인샵을 주로 찾는 것도 방법이다. 즐거움이 큰 만큼 따질 일 많은 취미가 와인이다.

천호성의 천병까기는

먹고 마시기를 사랑하는 이라면 한번 쯤 눈독 들였을 ‘와인’의 세계. 7년 간 1000병 넘는 와인을 연 천호성 기자가 와인의 매력을 풀어낸다. 품종·산지 같은 기초 지식부터 와인을 더욱 맛있게 즐길 비기까지, 매번 한 병의 시음기를 곁들여 소개한다. 독자를 와인 세계에 푹 빠트리는 게 연재의 최종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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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호성의 천병까기

https://www.hani.co.kr/arti/SERIES/3315

천호성 기자 rieux@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