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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서를 빨리 만들려 하지 말라.’
세종 13년(1431년) 6월2일 세종이 신하들에게 과거 중국과 조선의 잘못되고 억울한 판결 사례 11건, 즉 ‘형옥의 변’(刑獄之變)을 이르며 법을 맡은 관리의 7가지 자세를 하교했다. 조선왕조실록은 이를 3844자로 기록하고 있다. “죽은 자의 원한과 산 자의 한탄이 없도록” “정밀하고 명백하며 마음을 공평하게 하여” 실천해 달라는 7가지 자세는 다음과 같다.
①자기 의견에 구애되지 말기 ②선입(先入)된 말에 묶이지 말기 ③부화뇌동 말기 ④구습에 얽매이지 말기 ⑤죄수의 쉬운 자복을 기뻐하지 말기 ⑥판결서[獄辭] 빨리 만들려 하지 말기 ⑦여러 방면으로 따져보고, 반복해서 구해낼 방도 찾기.
세종이 하교한 법 관리의 7가지 자세는 지난해 9월 법원행정처가 서울대 산학협력단에 의뢰해 발간한 ‘세종대왕의 재판관으로서의 면모 및 사법제도 운용사례에 대한 연구’ 보고서에도 담겨 있다. 보고서는 세종시기 △법전 편찬 △법령의 사전 고지 등 사법제도 정비 △재판제도 정비 △판관의 위법행위 규율 등 재판 공정을 위한 제도 정비 △수인 보호를 위한 재판 절차 등을 두루 정리했다.
조희대 대법원장의 22일 발언 상당 부분도 법원행정처가 발간한 이 보고서를 토대로 하고 있다. 조 대법원장은 이날 대법원이 주최한 ‘2025 세종 국제 콘퍼런스’ 개회사에서 “세종대왕은 이미 법의 지배와 사회적 약자 보호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시대를 앞서서 실현했다”고 강조하며 △지나친 고문 제한 △감옥 환경 개선 △공법 제정 전 전국 여론조사 △노비 출산휴가 등 보고서가 주요하게 다룬 사례 등을 열거했다.
조 대법원장 발언에서 가장 큰 논란을 부른 “세종대왕은 법을, 왕권 강화를 위한 통치 수단이 아니라 백성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그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규범적 토대로 삼았다”는 명시적 해석은 법원행정처 연구보고서에는 없다. 아무리 세종이 민본정치를 강조했다고 해도 봉건왕조인 조선에서 ‘법은 왕권 강화를 위한 통치 수단이 아니었다’고 확대 해석하는 것은 무리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조 대법원장의 “왕권 강화 통치 수단” 표현에 반색한 것은 국민의힘이다. 국민의힘은 “법치주의와 삼권분립을 흔들려는 시도”를 거론하며 “이재명 대통령과 민주당은 세종대왕의 철학을 부디 새겨듣길 바란다”고 했다.
정작 40여분 이어진 조 대법원장 연설에서는 연구보고서가 주요하게 다룬 ‘법을 맡은 관리의 자세’나 현행 형사소송법의 법관 제척과 유사한 상피 제도에 대한 세종의 선구적 업적을 언급하는 부분은 없다. 단지 “법조인은 인간에 대한 깊은 존중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피상적 수준의 언급만 있을 뿐이다.
이 대통령 사건 9일 만에 ‘유죄 파기’…5개월째 침묵
세종의 ‘자기 의견에 구애되지 말라’ ‘판결서 빨리 만들려 하지 말라’ ‘다방면으로 따져보라’는 하교는 조 대법원장도 새겨들어야 할 내용이다. 조 대법원장은 이재명 대통령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을 단 9일 만에 무죄 원심을 뒤집고 파기환송했다. 대선을 한 달여 남겨둔 상황에서 후보 지위마저 흔드는 사건을 전례 없는 속도로 처리한 것이다. 법원 안에서도 사법 논리보다 정치적 의도가 크게 작동했다는 의심을 사고 있지만, 조 대법원장은 이에 대해 어떠한 해명도 하지 않고 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민주당 주도로 오는 30일 ‘조희대 대법원장 대선 개입 의혹 관련 긴급 현안 청문회’를 연다. 조 대법원장이 증인으로 채택됐지만 출석 가능성은 없다. 당 지도부와 협의하지 않은 추미애 법사위원장의 독단 행보에 대한 비판도 나온다.
다만 정부·여당이 추진하는 사법개혁 방향과 속도에 대한 여론은 나쁘지 않다는 것이 여권 내부 판단이다. 한국갤럽 조사(16∼18일)에서 이재명 대통령 직무 수행 부정평가 이유로 검찰·사법개혁을 꼽은 이들은 4%였다. 외교(18%), 과도한 복지·민생지원금(10%), 독재·독단(8%), 경제·민생(6%) 등에 견줘 비중이 크지 않다.
현직 고위 법조인은 23일 “검사들이 ‘검찰 독립’을 주장할 때 어떤 국민도 믿지 않는 것과 동일한 상황에 판사와 법원이 직면하게 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정치 검찰의 행태를 숱하게 봐왔던 국민은 조희대 대법원의 초고속 판결이나 지귀연 재판부의 윤석열 구속취소 결정을 정치적 행태로 의심하는데, 판사들은 이에 대한 납득할 만한 해명 없이 ‘그런 의심도 사법 독립 침해’라고 주장한다. 검찰이 공중분해 되면서 이제 여론의 화살은 법원으로 쏠리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