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다음달 3일 ‘중국 항일 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80주년’(전승절) 열병식에 참석하기로 했다. 국제 다자 외교무대 데뷔 장소로 그간 다소 멀어지기는 했지만 전통적 혈맹관계인 중국을 택한 셈이다. 북한 내에서는 ‘유일 영도체계’를 구축한 김 위원장의 ‘외교적 위상’이 사진과 영상을 통해 전 세계에 확인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북한 당국은 물론 북·중·러 밀착을 예의 주시하는 한·미·일은 베이징 천안문 성루에 설치될 열병식 관람대 자리배치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시진핑 주석을 중심으로 누가, 어떤 자리에 배치되느냐가 강력한 외교적 상징성을 띄기 때문이다. 이번 80주년 기념행사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비롯해 김정은 위원장, 이란·베트남·라오스·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몽골·파키스탄·네팔·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키르기스스탄·투르크메니스탄·벨라루스 등의 정상이 참석 예정이다. 한국에서는 우원식 국회의장이 참석한다. 미국·영국·프랑스 등에서도 고위 인사가 참석자 명단에 올랐다.
10년 전인 2015년 9월3일 열린 70주년 전승절 열병식 자리배치 역시 큰 관심을 끌었다. 한국 정상이 한때 적성국이던 중국·러시아 정상과 나란히 서서, 굴기한 중국 인민해방군의 무력을 과시하는 대규모 열병식을 90분간 지켜봤기 때문이다. 당시 대통령은 박근혜였다. 박근혜는 미국과의 불편한 관계를 무릅쓰고 중국을 방문해 열병식에 참석했다. 그런 만큼 중국이 보여줄 외교적 대우와 성의에 관심이 쏠렸다.
천안문 광장을 내려다보는 열병식 관람대에서 외교 관례상 최고 상석인 시진핑 주석 오른쪽 옆자리는 푸틴 대통령이 차지했다. 박근혜는 푸틴 대통령 다음 자리에 배치됐다. 전통적 우방인 러시아와의 관계를 고려하면서도 한국 대통령에게도 각별한 예우를 한 것이다. 1954년 김일성 북한 수상이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 바로 옆에 서서 중국 건국 5주년 기념 열병식을 지켜봤던 바로 그 자리였다. 중국은 정상들이 행사 장소 등으로 이동할 때나 환영만찬에서 시진핑 오른쪽에 푸틴, 왼쪽에 박근혜를 배치하는 등 극진한 외교적 안배를 했다. 한·중 우호적 분위기는 이듬해 박근혜 정부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결정하고, 중국이 경제보복을 하면서 틀어졌다.
당시 전승절에는 북한 대표단장으로 최룡해 북한 노동당 비서가 참석했다. 열병식 관람 때 최룡해의 자리는 시진핑·푸틴·박근혜 등이 위치한 줄의 맨 오른쪽 구석이었다. 결과적으로 박근혜와 최룡해의 동선은 겹치지 않았고, 두 사람이 마주치는 일도 없었다.
80주년 전승절 열병식 등에서 우원식 국회의장의 자리가 어디에 배치될 지도 관심을 끈다. 열병식·기념촬영·만찬 때 위치와 동선, 대기장소에 따라 김정은 위원장과의 만남도 있을 수 있다. 중국이 남북한 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한 북한 입장을 고려해 동선을 ‘통제’하더라도 다자 외교의 특성상 ‘우연한 마주침’까지 막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