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 두께의 절반에 불과한 초소형 전자 칩이 실명 환자들에게 '보는 기적'을 선사했다.
미국 스탠퍼드 의대 연구팀이 개발한 전자 안구 임플란트 '프리마(PRIMA)'를 이식받은 환자 중 84%가 글자와 숫자, 단어를 다시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17개 병원이 공동으로 진행한 이번 임상시험 결과는 국제학술지 '뉴잉글랜드의학저널(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에 20일(현지시각) 게재됐다.
임상에 참여한 환자들은 건성 황반변성을 앓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망막 중심의 빛 감지 세포가 서서히 손상돼 시야 중심이 점점 흐려지고 사라지는 질환이다. 얼굴 인식이나 독서가 불가능해지는 난치성 실명 질환으로 전 세계 약 500만 명 이상이 겪고 있지만 아직 치료법이 없다.
연구팀은 환자의 망막 중심 아래 가로세로 2㎜ 크기의 초소형 무선 칩을 이식했다. 이 칩은 증강현실(AR) 안경과 연결돼 작동한다. 안경의 카메라가 포착한 장면을 적외선으로 칩에 투사하면 칩이 이 신호를 전기 자극으로 변환해 시신경을 통해 뇌로 전달하는 방식이다. 환자는 안경을 통해 밝기와 대비를 조절하고 최대 12배까지 확대할 수 있다.
총 38명이 참여한 임상시험에서 32명이 1년 추적 관찰을 마쳤다. 이 중 27명(84%)이 글자와 숫자를 읽을 수 있게 됐다. 참가자들은 이 장치로 책, 식품 라벨, 지하철 안내판 등을 읽었으며 사용자 만족도 조사에서 약 3분의 2가 '중간 이상 만족'이라고 답했다.
영국 윌트셔에 사는 실라 어바인은 영국 일간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임플란트를 받기 전에는 눈앞이 두 개의 까만 원반처럼 보였고 주변은 왜곡돼 있었다"며 "처음 글자를 보기 시작했을 때 정말 흥분됐다. 다시 읽는 법을 배우는 건 쉽지 않지만 연습할수록 점점 나아진다"고 소감을 밝혔다.
수술은 2시간 이내에 끝났다. 환자들은 수개월의 시각 훈련을 거쳐 시야를 익혔다. 19명에게서 안압 상승, 망막 주변부 열상, 망막하 출혈 등의 부작용이 나타났지만 모두 경미한 수준이다. 생명을 위협하는 사례는 없었으며 대부분 2개월 내 회복됐다.
다니엘 팔란커 스탠퍼드 의대 안과학 교수는 "지금까지의 임플란트 시도는 사실상 빛을 구분하는 수준에 그쳤다"며 "우리는 처음으로 형태와 윤곽을 인식할 수 있는 '형태 시각(form vision)'을 제공했다"고 강조했다.
현재 프리마 장치는 흑백으로만 사물을 구분한다. 연구팀은 차세대 칩 개발을 진행 중이다. 새 모델은 픽셀 크기를 기존 100㎛에서 20㎛로 줄이고 해상도를 30배 높여 사물의 밝기 차이와 형태를 더욱 선명하게 구현할 계획이다.
팔란커 교수는 "이 연구는 인공 시력 기술의 출발점"이라며 "앞으로 더 정교한 전자 눈이 다양한 실명 원인 질환에 적용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참고자료>
-doi.org/10.1056/NEJMoa25013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