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행정부의 약가 인하 정책과 대중(對中) 관세 강화 움직임이 재점화되면서 글로벌 제약 공급망에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미국 내에선 필수 의약품 부족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한국 제약업계에는 기회와 위협이 동시에 찾아올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수출 확대라는 기회가 있는 반면 원료 의존이라는 구조적 한계도 여전하다.
29일 제약바이오 업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이후 약가 인하를 목표로 수입 의약품에 대한 고율 관세를 거듭 압박하고 있다. 그는 25일(현지시간) 백악관 연설에서 “독일에서는 80달러, 여기서는 1300달러짜리 제품이 판매되는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며 “약가를 1500%까지 낮출 것”이라고 강조했다. 1500%라는 수치는 현실성이 없지만 제약사에 대한 강도 높은 압박으로 해석된다.
전문가들은 미국 의약품 공급망이 원료 생산과 제제화가 여러 나라에 분산된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는 만큼 고율 관세 부과가 가격 인상과 공급 불안을 동시에 촉발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항암제 같은 고가 특허 의약품은 주로 유럽과 미국에서 생산되지만 항생제·고혈압제 같은 저가 복제약(제네릭)은 대부분 중국과 인도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는 최근 보도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는 미국인들이 가장 흔히 복용하는 약품에 직격탄이 될 수 있다”며 특히 고혈압제 로사르탄과 항생제 아목시실린 같은 '필수 의약품'이 취약하다고 지적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산 제네릭이 미국의 대체 공급원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로사르탄은 한미약품, 유한양행, 종근당, 대웅제약 등 대형사와 다수의 중견·중소사가 단일제와 복합제를 생산해 국내 시장 규모만 800억 원에 이른다. 아목시실린 역시 여러 제형으로 국내에서 폭넓게 생산되고 있는 만큼 미국 시장의 공급 불안을 메울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는 평가다.
문제는 한국 역시 구조적 취약성을 안고 있다는 점이다. 원료의약품 자급률이 10~20%에 불과해 중국과 인도에 크게 의존하고 있어 관세 충격이 본격화되면 한국산 제네릭도 원가 상승과 공급 불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글로벌 의약품 밸류체인이 중국과 인도에 집중된 만큼 어느 한 축이 흔들리면 가격과 공급이 즉각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이 모든 영역을 감당하기는 어렵지만 필수 원료의약품이나 일부 제네릭에서는 전략적 기회를 찾을 수 있다"면서도 "제네릭은 본질적으로 단가 경쟁에 좌우되기 때문에 구조적 한계가 뚜렷하다"고 진단했다. 한국은 오히려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바이오시밀러와 위탁개발생산(CDMO)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회장은 최근 일본 후지필름 등 해외 기업들이 미국 현지 생산기지를 확대하는 상황을 언급하며 "한국도 미국 주정부 인센티브를 활용해 공장을 인수하거나 신설하는 등 중장기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제 학계에서도 트럼프 행정부의 약가 인하 정책이 글로벌 의약품 공급망에 심각한 충격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날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게재된 정책분석논문(POLICY ARTICLE)에서 지오나 카시라기 스위스 취리히연방공과대(ETH) 교수 연구팀은 “미국의 필수 의약품 공급망은 중국, 인도, 멕시코 등 소수 국가에 과도하게 집중돼 있으며 관세나 수출 규제가 발생할 경우 환자 치료에 직접적 타격이 불가피하다”고 경고했다.
연구팀은 아목시실린, 헤파린, 모르핀 같은 필수 의약품이 낮은 수익성 탓에 일부 국가에만 생산이 몰려 있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관세가 붙으면 단순히 약값이 오르는 데 그치지 않고 생산 중단과 공급 공백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관세는 새로운 위험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취약한 글로벌 공급망 구조를 악화시키는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미국이 수입하는 필수 의약품 원료의 43%는 중국에 의존하지만 이는 중국 전체 대미 수출의 0.2%에도 미치지 않아 공급 차단 시 미국만 큰 타격을 입는 ‘비대칭 구조’라는 점도 함께 짚었다.
이번 정책과 관련해 '재고를 돌려 쓰는' 임시방편은 해법이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공급망을 투명하게 관리하고 각국이 데이터를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일부 생산을 미국이나 다른 지역으로 옮겨 다변화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참고 자료>
- doi.org/10.1126/science.adx08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