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이 여성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고 있어요. 체력이 많이 필요했던 일도 이제 AI 덕분에 한결 수월해졌죠. '여성은 이래야 한다', '여성은 여기까지밖에 못 한다' 같은 자기제한적 신념(limiting belief)은 깨버리세요. 머물면 도태됩니다. 치고 나가세요. 지금이 여성에게 '기회의 시간'입니다."
지난해 새로운 도전을 위해 독일로 과감히 떠났던 '스타 과학자'가 1년 만에 한국을 찾았다. 13일 인천 송도 컨벤시아에서 'APEC 2025 여성 STEM 심포지엄'의 기조강연자로 선 차미영 막스플랑크연구소(MPG) 단장(KAIST 전산학부 교수)을 만났다.
APEC 2025 여성 STEM 심포지엄은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WISET)과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AI 분야에서 여성의 참여와 리더십을 확대하기 위한 방안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원국들과 논의하기 위해 연 행사다.
차 단장은 구글 스칼라 기준 피인용 수 2만 회가 넘는 데이터 과학 전문가다. 초대형 데이터를 계산하고 분석하는 방법론을 연구한다. AI를 이용해 가짜뉴스를 탐지하는 기술 개발, 세관에서 벌어지는 불법적 행위를 적발하는 알고리즘 개발 등 삶과 밀접한 사회 현상을 분석한 연구 결과를 냈다. 코로나19 팬데믹 때는 '루머를 앞선 팩트' 캠페인을 기획해 감염병 관련 잘못된 정보에 대한 팩트체크 결과를 151개국에 전파해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차 단장은 1년 전 막스플랑크연구소로 자리를 훌쩍 옮겼다. 그는 "소속 기관, 한국에서의 일상, 연구 등 소중한 것 투성이었지만 '내 앞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 기초과학연구원(IBS) 수리 및 계산 과학 연구단 데이터 사이언스 그룹 CI를 맡고 있었다. 현재 그는 막스플랑크연구소에서 '인류를 위한 데이터 과학' 연구그룹을 이끌고 있다. 첫 한국인 막스플랑크연구소 단장이다.
만 6세 만 13세 두 아이의 엄마인 차 단장은 스스로를 "고민을 많이 하지 않고 결정하는 편"이라고 평했다. 그는 "여성과학자로서 어떤 결정을 할 때 고민하기 시작하면 포기하게 만드는 현실의 장벽이 너무 많다"며 "내게 어떠한 제약도 없을 때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결정하고 자잘한 고민은 고이 접어둔다"고 말했다.
막스플랑크연구소는 세계 과학 연구의 최전선에 있는 기관이다. 막스플랑크연구소를 관할하는 막스플랑크연구회는 지금까지 39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차 단장은 한국에서 함께 일하던 박사후연구원 4명, 박사과정 제자 7명을 데리고 막스플랑크연구소로 향했다. 새로운 환경에서 연구의 폭을 넓히기 위해 도전을 한 셈이다. 차 단장의 꿈은 논문에서 끝나는 연구가 아니라 인류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연구를 하는 것이다.
차 단장은 “한국에서처럼 아침 일찍 출근해 늦게 퇴근하는 습관을 유지하면서도 연간 30일 휴가와 재택근무 활성화 등 복지가 강화된 독일 연구 환경에 적응하고 있다”며 “이런 환경에서 어떤 연구 성과가 나올지 기대된다”고 웃으며 말했다.
차 단장은 한국에서 진행하던 연구를 조금 더 높은 성능의 AI 모델을 이용해 독일에서 이어가고 있다. 차 단장은 "AI 성능이 높아지며 안 풀리던 문제들이 갑자기 풀리면서 연구성과가 나오는 속도가 굉장히 빨라졌다"며 "한편으로는 연구의 깊이가 과학계 전체적으로 낮아지지 않았나 하는 고민이 있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큰 문제를 잘 찾고 장기적으로 투자해 해결하는 연구방향이 중요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사회적 영향력이 큰 대표적인 문제가 'AI 윤리 문제'다. 차 단장은 "대부분의 나라가 AI 분야에 진입하는 초기 단계에 있어 기업, 국가들이 경쟁적으로 AI 투자를 하면서 'AI 윤리 문제'가 다소 잊혀진 상황이다"며 "투자가 무르익고 AI가 실생활에 완전히 파고들면 AI 윤리 문제는 또 다시 중요해지고 빛을 볼 것이기 때문에 관련 연구를 계속 진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차 단장은 지금은 여성들이 AI 같은 기술 분야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이라고 역설했다. 차 단장은 "안타깝게도 여전히 국내외 주요 AI 학회에 가면 여성이 현저히 적다"며 "AI로 인해 여러 사업의 변화가 나타나는 대변환기에 여성도 빠르게 적응하고 도전해야 한다"고 했다.
차 단장은 "밤을 새우고 체력 소모가 큰 일을 해야만 했던 기술 분야는 이제 AI·자동화 덕분에 진입 장벽이 낮아졌다"며 "여성이 현 상황을 잘 이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차 단장은 과학자를 꿈꾸는 여성에게 스스로 정한 자기 한계를 과감히 깨뜨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차 단장은 "20대 학생과 많이 면담하다 보면 '저는 이걸 못할 것 같아서 이런 진로를 선택했어요', '저는 이런 사람이라 자신이 없어요'라는 말을 쉽게 한다"며 "그때마다 '지금 몇 살이냐', '이런 믿음은 언제 생겼냐', '생긴 지 얼마 안 된 믿음으로 평생 커리어를 결정할 것이냐'라고 조언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우리가 굉장히 스스로에 대해 많은 자기제한적 신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우리 모든 사람은 같은 화학물질로 이뤄졌다. 우리는 다른 인간이 하는 일은 무조건 할 수 있다"며 "스스로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던 한계를 한 번 깨보는 연습을 해보자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강원도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차 단장은 "어렸을 적 내가 교수가 될 것이라고, '박사후연구원 1명만이라도 연구실에 있기를' 바랐던 조교수 시절 내가 독일에 갈 것이라고 누가 생각했겠냐"라고 반문하며 "시간이 걸릴 수는 있지만 우리는 무조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상상해 보는 거예요. 내가 이 세상에 모든 걸 다 할 수 있다면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뭘까. 저만 해도 아이가 있으니까 출장을 자유롭게 못 가겠죠. 그래도 하고 싶은 100가지를 적어봐요. 하나씩 지우다 보면 가장 내게 중요한 것이 튀어나와요. 그걸 향해 일단 나아가는 거예요. 저도 긴 커리어 중 지금 어느 한 점에 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차근차근 목표하는 방향으로 걸어가는 겁니다. 우리, 그래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