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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환의 과학세상] '느린 기초과학'으로 되돌아간 노벨 과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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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환의 과학세상] '느린 기초과학'으로 되돌아간 노벨 과학상

2025.10.15 12:00
2025년 노벨화학상 시상식 현장. 연합뉴스 제공
2025년 노벨화학상 수상자 발표 현장. 연합뉴스 제공

유난히 길었던 추석 연휴에 묻혀버린 올해 노벨 과학상(생리의학·물리학·화학상)의 핵심 키워드는 ‘느린 기초과학’(slow basic science)이다. 


처음 모습을 드러내면서부터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인공지능(AI)이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휩쓸었던 작년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다. 특히 미국의 생명과학자(데이비드 베이커), AI 소프트웨어 전문가(데미스 허사비스)에게 주어졌던 화학상이 다시 정통 화학자들에게 돌아간 것은 화학을 업으로 삼았던 필자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다.


뉴욕타임스는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선정하는 스웨덴 왕립과학원이 결국 호기심을 바탕으로 세상을 더 잘 이해하고 싶은 열망이 반영된 느리고 기초적인 연구의 중요성을 인식했다"고 전했다. 국내 언론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노벨 과학상이 “산업적 성과보다 인류 난제 해결을 강조하는 노벨상 본래의 취지로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 느린 기초과학의 놀라운 성과


올해 노벨 과학상의 수상 업적은 모두 30년 이상 숙성된 것이다. 물론 노벨상을 받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린 것만 유별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올해 과학상의 수상 업적이 모두 경제적 가능성은 물론 과학적으로도 분명한 의미를 찾기 어려운 소박한 관심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소중한 연구비와 노력을 투자해야 할 어떠한 명분이나 전망도 찾기 어려운 전형적인 기초과학의 과제였다는 뜻이다. 오로지 인간과 자연에 대한 소박한 호기심에서 시작한 순수한 기초과학 연구였다.


생리의학상은 '면역 체계가 신체를 공격하지 않도록 만드는 말초 면역 내성 영역에서 획기적인 발견'을 완성한 메리 브랑코(미국)·프레드 람스델(미국)·사카구치 시몬(일본)에게 돌아갔다. 우리의 면역 체계가 어떻게 작동하고 정상적인 상태에서 왜 자가면역질환이 발생하지 않는지 등의 이유를 밝혀냈다.


일본 이화학연구소(RIKEN)의 면역학자 사카구치 시몬(坂口志文)이 1995년 흉선(thymus)을 제거한 쥐의 자가면역을 연구하던 중에 과도한 면역 반응을 억제하는 ‘조절 T세포’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시작이었다. 사카구치의 소박한 호기심이 결국 자가면역 질환, 암, 장기이식을 비롯한 200여 가지 소중한 임상 치료법으로 이어졌다.


물리학상은 거시적 양자 터널 현상을 확인한 존 클라크(미국)·미셸 드보레(미국)·존 마티니스(미국)에게 돌아갔다. 전자·원자·분자와 같은 미시적 입자가 고적역학의 상식으로는 절대 넘을 수 없는 에너지 장벽을 통과하는 미시적 양자 터널 현상은 양자역학이 정립되기 시작했던 100여 년 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1981년에 개발되어 1986년에 노벨 물리학상이 주어졌던 주사터널현미경(STM)이 전자의 양자 터널 효과를 이용하는 대표적인 기술이다. 


그런데 미국 클라크가 1984년 거시적인 전자 회로에서 양자 터널 효과를 관찰했다. 극저온의 초전도체로 만든 거시적인 조셉슨 접합(Josephson junction)에서 전자가 쌍을 이루는 ‘쿠퍼 쌍’(Cooper pair)이 에너지 장벽에 해당하는 절연체를 통과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드보레와 마티니스의 지도교수였던 클라크 교수는 당시에는 “그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도 없었고 오늘날의 응용을 예상할 수도 없었다”고 기억했다. 새로운 과학적 현상이 어떤 기술에 활용될 것인지를 처음부터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화학상은 다공성의 3차원 구조를 가진 ‘금속유기 골격체’(MOF)의 화학을 개발한 리처드 롭슨(오스트레일리아)·오마르 야기(미국)·기타가와 스스무(일본)가 받는다. “원자와 분자가 결합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확장해서, 인류가 원하는 성질의 소재를 자유롭게 설계할 수 있는 시대를 열었다”는 것이 노벨상 위원회의 평가다.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대학의 롭슨이 1989년 구리 이온과 유기 리간드를 이용해서 처음 합성했던 어설픈 MOF가 시작이었다. 롭슨이 처음 만든 MOF는 매우 불안정해서 아무 쓸모가 없었다. 그러나 자연에서 발견되는 제올라이트와 같은 3차원의 다공성 구조를 실험실에서 자유롭게 합성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 


결국 교토대학의 기타가와 수수무(北川進)와 팔레스타인 출신의 오마르 야기에 의해서 완성된 튼튼하고 안정적인 MOF는 다양한 촉매의 합성 등에 널리 활용되고 있다. 건조한 사막의 공기에서 물을 뽑아낼 수 있는 것도 MOF 덕분이다.


● 되살아나는 노벨 과학상에 대한 갈증


올해 2명의 일본 과학자가 과학상을 받으면서 노벨 과학상에 대한 우리의 해묵은 갈증이 되살아나고 있다. 이제 일본은 31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보유한 ‘노벨상 대국’이다. 미국(425명)·영국(144명)·독일(116명)·프랑스(78명)·스웨덴(34명)에 이어 세계 6위다. 과학상 수상자만 무려 27명이나 된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과학상 수상자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작년에 한강 작가가 문학상을 받았지만 우리 국민의 노벨상 갈증 해소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노벨 과학상 갈증이 이제는 의사에게로 번지고 있다. 


올해 생리의학상을 받은 사카구치 시몬이 교토대 의대를 졸업한 소위 의사과학자(MD·PhD)라는 사실이 알려진 탓이다. 2012년 수상자 야마나카 신야와 2018년 수상자 혼조 다스쿠도 역시 의대를 졸업한 의사과학자다. 사실 생리의학상 수상자의 30%가 의사과학자라는 지적도 있다.
 

우리도 2019년부터 의사과학자 양성을 시작했지만 전망이 밝은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의사과학자 양성 과정을 수료한 77명 중에서 연구를 계속하고 있는 진짜 의사과학자는 34명뿐이라고 한다. 연구직의 소득이 임상의와 비교해서 턱없이 낮고 앞으로의 진로도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유능한 의사과학자의 생리의학상 소식도 기대하기 어렵다.
 

과학계의 변명이 옹색하다. 일본의 노벨 과학상 약진은 “실패를 감수하면서 기초과학에 꾸준히 투자한 결과”라고 한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일본은 과학기술을 재건의 기둥으로 삼았다. 우리보다 10여 년 앞선 1956년에 과학기술청을 설치했고 1980년부터 본격적인 투자를 시작했다. 21세기에 들어서 일본이 노벨상 대국으로 우뚝 서기 시작한 것은 그런 투자의 결과라고 한다.


우리가 노벨 과학상을 받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노력을 게을리했던 것도 아니고 우리 과학자의 능력이 모자란 것도 아니다. 우리가 낯선 현대 과학기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1958년이었다. 


극심한 전력난 해소를 위해 원자력에 대한 투자를 시작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원전은커녕 변변한 화력발전소도 없었던 우리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창립 회원이 된 것은 과감한 선택이었다. 


그로부터 반세기 동안 우리 사회가 과학자에게 기대했던 것은 노벨상이 주어지는 ‘과학’이 아니었다. 남의 기술을 베끼고 흉내를 내는 한이 있더라도 국가 경제를 살리기 위한 ‘산업화 기술’을 서둘러 개발하라는 과학자에게 주어진 지상명령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세계가 놀라는 수준으로 성공했다. 1주일을 1달러로 살아내야 했던 우리가 반세기 만에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서게 된 ‘한강의 기적’이 바로 그 결과다.

 

이제는 법대 출신의 대통령과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이 폐기하겠다고 벼르고 있는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전 기술을 확보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돌려달라고 떼를 쓰고 있는 반도체·자동차·배터리·조선 기술도 마찬가지다.


물론 우리가 노벨상에서는 일본에 뒤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절망할 이유는 없다. 반세기의 투자로 ‘노벨상’과 ‘경제 성장’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 와야 한다는 요구는 명백하게 과도하고 지나친 욕심이다.


이제라도 노벨상을 위한 기초과학에 본격적인 투자를 시작해야 한다. 10월의 노벨상 계절에만 반짝하고 사라지는 기초과학에 대한 관심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오히려 노벨 과학상에 대한 국민적 갈증을 생각하면 ‘인공지능 3대 강국’보다 ‘노벨 과학상 수상’이 더 절박한 목표라는 사회적 공감대가 필요하다. 더욱이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를 ‘약탈적 이권 카르켈’로 몰아붙이는 정치권의 황당한 인식도 확실하게 바로잡아야 한다.


노벨 과학상이 우리 사회를 발전시켜 줄 것이라는 어설픈 환상도 확실하게 버려야 한다. 노벨상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절대 아니다. 평화상을 받았다고 곧바로 우리 땅에 평화가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문학상을 받았다고 당장 우리가 문화대국으로 우뚝 서게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확인한 사실이다. 


노벨 과학상도 다르지 않다. 노벨 과학상 수상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일 수는 없다는 뜻이다. 오히려 노벨 과학상을 위한 노력을 통해 이제 우리도 인류의 과학 지식 증진에 기여하겠다는 진정한 선진국의 목표가 필요하다.

 

※필자 소개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2012년 대한화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과학기술, 교육, 에너지, 환경, 보건위생 등 사회 문제에 관한 칼럼과 논문 3200여 편을 발표했다.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거의 모든 것의 역사》《우리 몸을 만드는 원자의 역사》《질병의 연금술》《지금 과학》을 번역했고 주요 저서로 《이덕환의 과학세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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