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탄핵해도 반복되는 정치적 불행 숙고와 설득의 과정 생략하는 데 익숙한 국가주의와 K-엘리트 성취 모델이 원인
박원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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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非常)이라는 말은 일상(日常)의 반대말, 혹은 일상이 깨어지는 상황을 뜻한다. 작년 12월 3일, 윤석열 당시 대통령의 불법적 비상계엄 선포를 듣던 순간으로 시간을 돌린다면 그보다 더 심각한 비상 상황이 있었을까. 이는 후세 사람들에게 남겨질 한국 정치사의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당시에는 확신했다.
그러나 이후 진행된 상황은 국정농단 사건으로 떠들썩했던 8년 전의 데자뷔, 혹은 잠깐 꿨다가 잊혀진 악몽이 현실에서 반복되는 듯한 기시감을 준다.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 헌법재판소의 파면, 뒤이은 궐위선거와 새 정부의 출범은 예외 없이 매우 비상한 일이지만, 돌이켜보면 불과 8년 전에 이미 다 치렀던 과정이 아닌가. 그 뒤를 이어 국회에서 여야가 교체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정쟁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모든 것이 2024년 12월 3일 이전의 ‘일상’으로 되돌아간 듯해 배신감마저 느껴진다.
이런 정치적 불행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빌런’은 개인 윤석열이다. 계엄을 선포했고 아직까지도 최소한의 반성이나 책임의식도 없을 정도의 유아적 정무 감각을 지녔다는 것이 드러났으니, 그에게 당연히 돌아올 법적 책임과 함께 정치적 책임을 묻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그러나 8년 전 모든 문제의 근원을 박근혜 개인의 기벽(奇癖)으로 돌린 것이 우리 정치 발전에 하등의 도움을 주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 정치의 구조적 문제들을 윤석열 개인의 문제로 치환한다면 별로 배울 것도 나아질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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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 우리는 이 질문들을 심각하게 물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묻지 않았으며 제대로 된 답변을 듣지 못했다. 아무도 반성하지 않았고, 어떤 실천이 필요한지에도 합의하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8년 만에 똑같은 악몽을 겪게 된 것이다.
위 질문들에 대한 가장 손쉬운 해답은 잘 알려진 것처럼 개인이 아닌 제도에 눈을 돌리는 것, 즉 우리가 ‘제왕적 대통령제’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다. 헌법에서부터 사소한 관행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에게 너무나 많은 권한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반정치적이고 비민주적인 대통령-‘제왕’-을 가지게 됐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개헌 등을 통해 대통령의 권한을 약화시키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12·3 계엄을 반추하면서 ‘제왕적 대통령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모순이다.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하면서 들었던 것이 자신이 야당 다수의 국회에 막혀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즉 너무나 ‘제왕적이지 않아서’라는 이유였기 때문이다. 또한 대통령의 계엄선포권이 현행 법질서에서 얼마나 제한적인지는 앞으로의 내란 재판이 분명히 밝히게 될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윤 전 대통령은 한국 대통령의 취약성을 온몸으로 드러내 보인 셈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3명의 대통령이 탄핵되고 2명이 이미 파면된 한국의 대통령제를 ‘제왕적’이라 부르기는 어색하다. 좀 더 정교한 논의가 앞으로 필요할 것이다.
나는 몇 개월 전 이 지면에서 ‘K-엘리트의 파산’에 대해 쓴 바 있다. 윤석열 정부의 출범은 대한민국의 압축적 경제 성장과 근대화의 과업을 주도적으로 성공시켰던 한국의 압도적 국가주의와 관료제가 처음으로 직접적 선출 권력의 역할을 맡게 된 사건이라는 것, 이들이 국가 운영에 대한 무한한 자신감에 충만했지만 그 결말은 결국 처절하게 실패하고 파탄에 이른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한때 세계사적으로 유례없이 성공적인 한국의 발전국가를 이끌었던 엘리트 집단의 숨겨진 무능과 둔감이 새삼스럽게 밝혀지는 과정이기도 했으며, “빠르게 가는” 국가 주도의 리더십과 효율성이 더 이상 우리의 정치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처절하게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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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