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는 베스트셀러. 창작자들은 자신이 만든 콘텐츠가 베스트셀러가 되길 꿈꾸지만, 실제로 실현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이 희귀한 확률을 뚫고 베스트셀러가 된 콘텐츠가 탄생한 과정을 들여다본다. 창작자의 노하우를 비롯해 이 시대 사람들의 욕망, 사회 트렌드 등을 확인할 수 있다.
한강 작가가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후 그의 책들이 서점가를 휩쓸었다. 한데 그의 책 없이 노벨상 열풍으로 잭팟을 터뜨린 곳이 있다. 트로이목마 출판사로, 책은 시리즈 ‘알아두면 쓸데 있는 유쾌한 상식사전’의 ‘과학·경제 편’이다. 박창흠 트로이목마 대표(53)가 한강 작가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에 담긴 시와 ‘알아두면 쓸데 있는…’에 나오는 내용을 재치 있게 연결시켜 포털사이트에 올린 글이 큰 주목을 받으며 판매가 껑충 뛴 것.
한강 작가의 시다. ‘전철 4호선,/선바위역과 남태령역 사이에/전력 공급이 끊어지는 구간이 있다./숫자를 세어 시간을 재보았다./십이 초나 십삼 초./그사이 객실 천장의 조명은 꺼지고/낮은 조도의 등들이 드문드문/비상전력으로 밝혀진다./책을 계속 읽을 수 없을 만큼 어두워/나는 고개를 든다./…(중략)…/확연히 느려졌다고 느낀 순간,/일제히 조명이 들어온다. 다시 맹렬하게 덜컹거린다./갑자기 누구도 파리해 보이지 않는다./무엇을/나는 건너온 것일까?’
실제 전철 4호선을 타면 전력 공급 방식 변경으로 일부 전등이 소등되고 냉난방 장치가 잠시 정지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이 구간에서는 좌측통행 교류 방식의 철도와 우측통행 직류 방식의 지하철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세계 최초의 공법을 적용했다고 한다. 이를 설계한 과학자가 “무엇을 나는 건너온 것일까?”라는 작가의 질문을 들었다면 “입체 교차 방식의 꽈배기 굴을 통과하셨습니다!”라고 답했을 것이라는 것. 박 대표는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 우리 출판사 책과 한강 작가를 연결시킬 게 없을지 고민하며 작가의 책들을 살펴보다 찾아냈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지난달 출간한 ‘책을 마케팅할 때 알아야 할 10가지’(sbi)에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성과를 낸 과정을 소개했다. ‘엄마의 말 공부’, ‘만화로 보는 3분 철학’ 시리즈 등을 히트시킨 민혜영 카시오페아 대표(48)도 함께 낸 ‘마케팅을 품은 출판 기획’(sbi)을 통해 독자의 갈증을 풀어주는 책을 만드는 방법을 공개했다.
이들 책은 한국출판인회의가 운영하는 출판 전문교육기관인 서울북인스티튜트(SBI)가 올해 개원 20주년을 맞아 기획한 출판 교육 실무서 ‘본(本) 시리즈’로 출간됐다. ‘마케터의 팔리는 글쓰기’(정민호 문학동네 마케팅국장 지음), ‘에디터를 위한 보도자료 실전 매뉴얼’(백우진), ‘출판인을 위한 AI 활용법’(박찬규 위키북스 대표)까지 총 5권이 지난달 나왔다. 이들 책은 곧바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책에 대해 다뤘지만 생생한 사례를 통해 기업, 지방자치단체 등 분야에 상관없이 마케팅과 홍보가 필요한 이들에게 영감을 준다.
박 대표와 민 대표, 김인호 서울북인스티튜트 원장(바다출판사 발행인)을 서울 마포구 한국출판인회의 사무실에서 지난달 16일 만났다.
‘책을 마케팅할 때 알아야 할 10가지’를 쓴 박창흠 트로이목마 대표. 박창흠 대표 제공
박 대표는 출판사에서 사회 생활을 시작하기 전 취업에 줄줄이 고배를 마셨다.
“원서를 넣은 회사가 100곳이 넘어요. 계속 떨어졌죠. 일일이 세기 힘들 정도로 거절당하니까 너무 아팠어요. 출판사에 첫 출근한 날짜 2000년 3월 2일을 늘 기억하고 있습니다.”
출판계에 마케팅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던 시절, 그는 판매를 늘리기 위해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혀가며 여러 시도를 했다.
2010년 전국동시지방선거 때 책 ‘스위치’를 서울시장 후보로 내세워 홍보하는 모습을 시민들이 바라보고 있다. 웅진씽크빅 제공
그가 웅진씽크빅에서 근무하던 2010년 ‘스위치’ 출간을 앞두고 있었다.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한 행동설계의 힘을 다룬 책이었다. 선인세를 많이 준 책이어서 널리 알려야했다. 마케팅 회의 때 신입 사원이 이 책을 서울시장 후보로 내세워 선거 유세 형식으로 길거리 홍보를 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당시 전국동시지방선거 기간이었다. 신입 사원은 책 제목이 ‘스위치’이니 시장 선거를 통해 서울시를 바꿔보자는 개념과도 맞아떨어진다고 했다. 황당하게 들렸지만 박 대표를 포함해 회의 참석자들은 재밌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문의한 결과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스위치’를 기호 5번 후보로 내세웠다.(서울시장 후보가 4명이었다) 선거 유세 차량 스타일로 트럭 2대를 만들어 하루 종일 서울을 누비고 다녔다. 책 표지에 있는 캐릭터인 코끼리탈을 쓰고 책을 알렸다. “당신의 투표가 서울을 ‘스위치’합니다”라는 문구도 붙였다. 이는 단박에 대중의 큰 주목을 받았다.
“처음 신입 사원의 얘기를 들었을 때는 ‘책이 사람이야?’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바로 말하지 않고 더 들어보기로 했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성과가 났어요. 특이한 아이디어를 내면 면박 주지 말고 격려해야 참신한 시도를 할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만화 출판사 직원들이 책을 판매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그린 일본 드라마 ‘중쇄를 찍자!’. 일본 TBS 제공
‘기요사키와 트럼프의 부자’ 책을 담당하던 때, 재고가 많이 쌓였다. 그는 독자 한 명에게 여러 권을 팔 방법을 고민했다. 오래 전 유명 네트워크마케팅회사 사업자 모임에 참석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최상위 등급 사업자가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를 소개하자 참석자들이 책 이름을 메모하며 구매했던 모습이 생각났다.
다행히 ‘기요사키와 트럼프의 부자’에 네트워크마케팅 파트가 한 꼭지 있었다. 이에 대형 네트워크마케팅회사 쇼핑몰에 입점된 온라인 서점에 연락해 이벤트를 열었다. 1권, 3권, 5권, 10권을 샀을 때 각각 다른 선물을 줬는데 10권 세트가 특히 인기가 많았다.(도서정가제가 시행되기 전이었다.) 네크워크사업자들은 하부 조직을 관리하기 위해 책을 대량으로 사서 나눠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 이에 한 달 만에 1000권 넘게 팔았다.
2009년 출간된 리처드 탈러의 ‘넛지’가 6개월 만에 10만 권 넘게 판매되며 베스트셀러가 된 후 판매량이 뚝 떨어졌다. 평소 신문을 꼼꼼하게 읽던 박 대표는 기사를 보다 무릎을 쳤다. 영등포구의 한 지역 담벼락에 쓰레기 투기가 계속돼 경고 문구를 붙여도 소용이 없었는데 구청 공무원의 아이디어로 장미꽃 넝쿨을 조성하자 쓰레기 투기가 사라졌다며 이를 ‘넛지 효과’라고 한 것. 그는 작은 계기가 행동의 변화를 일으키는 ‘넛지’가 보통 명사처럼 사용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에 환경부와 함께 넛지를 적용한 환경 개선 아이디어 공모전인 ‘넛지 공모전’을 진행했다. 넛지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졌고 이는 책 판매로도 이어졌다.
그는 금융, 여행, 엔터테인먼트 등 여러 업종에서 일하는 마케터들의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2005년 기사를 보고 이런 모임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출판계 담당자는 없더라고요. 기자에게 메일을 보내 모임 운영자의 메일 주소를 알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모임에 참여하고 싶은 이유와 제가 어떤 도움이 될 지 자세하게 써서 메일을 보냈죠.”
모임에 가입한 후 서로 정보를 나누고 다른 분야의 트렌드도 파악한다. 협업을 하기도 한다.
“여행박람회 때 출판사로는 유일하게 부스를 만들어 책을 알렸어요. ‘알아두면 쓸 데 있는…’ 시리즈의 저자도 이 모임을 통해 만났습니다.”
그는 책이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품위를 더해줘 어떤 종류의 상품과 연계해도 잘 어울리는 매력을 지녔다고 말한다. 박 대표는 “안 될 것 같다고 판단하지 말고 일단 한 번 던져보는 게 중요하다. 마케터에게 필요한 건 ‘왜?’가 아니라 ‘왜 안 돼?’라는 자세”라고 강조했다.
민 대표는 기존에 다루지 않았던 주제 혹은 형식의 책을 선보여 반향을 일으킨 마케터로 유명하다. 그는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들어낸다”는 말을 듣는다.
민 대표는 “책은 읽는 이의 관심사, 선호도 등을 정교하게 고려해야 하기에 마케팅하기 정말 까다롭다”고 했다.
“홈쇼핑에서 책을 판매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당시 홈쇼핑 MD들이 ‘책 파는 건 너무 어렵다. 책을 팔 수 있으면 못 팔게 없다’고 말하더라고요.”
아이의 마음을 얻고 성장을 이끄는 말하기 방법을 구체적으로 다룬 ‘엄마의 말 공부’는 20만 권 넘게 판매되며 큰 호응을 얻었다. 민 대표는 같은 주제로 책을 또 내면 ‘엄마의 말 공부’ 시장을 갉아먹을까봐 우려해 후속책을 내지 않았다. 한데 다른 출판사에서 이 주제로 만든 책들을 연달아 냈고 판매도 많이 됐다.
“처음엔 너무 억울하고 속상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제가 독자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죠. 독자들은 부모의 말하기 방법에 대해 절실하게 더 알고 싶어했는데 말이죠. 이 사실을 알고 나서 비로소 ‘엄마의 말 연습’, ‘66일 인문학 대화법’, ‘부모의 어휘력’ 등 이런 욕망의 계보를 잇는 다른 책을 냈습니다.”
말 공부를 한 후에는 독자들이 더 섬세한 표현과 확장된 관계에 눈길을 돌릴 것으로 보고 ‘말 그릇’을 출간했다.
낯선 조합으로 기회를 만드는 것도 방법이다. ‘만화로 보는 3분 철학’ 시리즈가 그렇다.
“어렵게 느껴지는 철학이 만화라는 쉬운 형식과 결합했을 때 새로운 독자층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봤습니다. 처음에는 대학생을 타깃 독자로 설정했는데 반응이 없었어요. 당시 고등학교 비문학 독해와 철학 관련 킬러 문항이 입시 주요 이슈로 떠올랐습니다. 이에 ‘입시에 도움이 되는 철학 개념 정리서’로 홍보하자 뜨거운 반응이 바로 왔습니다. 3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철학을 만날 수 있다는 걸 강조한 것도 효과적이었습니다.”
민 대표는 알프레드 아들러의 이론을 담은 ‘미움받을 용기’가 국내에 출간되기 전 아들러 심리학을 다룬 ‘항상 나를 가로막는 나에게’를 냈고 4만 권 넘게 판매했다. 일본에서 ‘미움받을 용기’가 베스트셀러가 됐고 국내에도 곧 출간될 예정이었다.
“아들러 심리학에 관심을 가진 변지영 번역가님이 이를 번역한 원고를 써서 여러 출판사에 타진하고 있었어요. 아들러를 다룬 책을 빨리 내야겠다고 판단했죠.”
민 대표와 박 대표는 책에서 이른바 자신의 ‘영업 비밀’을 모두 털어놓았다. 20년 넘게 일하며 쌓아온 경험인데 밝히기 망설여지지 않았을까. 이들은 “전혀 아깝지 않다. 출판사는 규모가 작은 곳이 많아 체계적으로 교육해 줄 사수 없이 홀로 맨몸으로 부딪히며 일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싶다”고 했다.
‘책을 마케팅할 때 알아야 할 10가지’, ‘마케팅을 품은 출판 기획’ 등이 포함된 ‘본(本) 시리즈’ 5권. 서울북인스티튜트(SBI) 제공
김 원장은 SBI에서 출판인을 위한 강의를 계속 진행했지만 이를 책으로 남기지 않아 아쉬웠다고 했다.
“그동안 SBI에서 강의했던 분들 중에서 주제별로 잘 쓸 분들을 저자로 뽑았습니다. 출판사 대표님들이 십시일반으로 기금을 마련했고요. ‘본(本) 시리즈’는 우선 16권을 기획했고, 100권까지 내는 게 목표입니다. 일을 크게 벌여서 여러 사람을 이렇게 고생시킬 줄은 몰랐습니다.(웃음) 현업에서 바로 활용할 수 있게 만든 본 시리즈를 통해 출판 생태계가 더 커지고 활성화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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