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무원이 작은 목소리로 무엇을 마시겠느냐고 묻는다. 하얀 반누보(vent nouveau) 종이로 된 메뉴판 음료 항목을 훑어본다. 튀르키예 초행길. 튀르키예식 커피를 고른다. 얼마 뒤, 에스프레소 잔만 한 커피잔을 가져다준다. 진한 갈색, 따스한 한 모금을 마신다. 곱게 간 커피콩 알…
“강 저 너머 하늘로 불이 날아다녔어요.”경북 안동시 낙동강 북단 육사로(路)에서 나이 지긋한 택시 기사가 말했다. 택시는 오른쪽으로 보이는 낙천교를 지났다. 태백산 황지(潢池)에서 발원한 낙동강과 일월산에서 흘러나온 반변천이 Y 자 모양으로 만나는 부근에 낙천교가 놓여 있다. 안동은…
충무공 이순신은 우리에게 성스럽다. ‘성웅(聖雄)’이라는 호칭은 아무에게나 붙이지 않는다. 신처럼 떠받들린 존재다. 친숙함보다는 근엄함이 앞선다. 김훈 김탁환 같은 작가가 그를 인간으로 보려 했다. 고뇌하고 갈등하며 실수하고 자성하는. 45년 만에 충남 아산 현충사(顯忠祠)를 찾았다.…
충무공 이순신은 우리에게 성스럽다. ‘성웅(聖雄)’이라는 호칭은 아무에게나 붙이지 않는다. 신처럼 떠받들린 존재다. 친숙함보다는 근엄함이 앞선다. 김훈 김탁환 같은 작가가 그를 인간으로 보려 했다. 고뇌하고 갈등하며 실수하고 자성하는. 45년 만에 충남 아산 현충사(顯忠祠)를 찾았다.…
세찬 파도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크지만 경쾌하다. 창밖으로 날개에 달린 프로펠러가 속도를 서서히 높이며 회전한다. 다른 쪽 창밖에서도 또 하나의 엔진이 으르렁댄다. 78인승 ATR-72 600 비행기.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2열 종대로 좌석이 놓여 있다. 승무원은 2명. 그곳에…
20년 전 김훈 작가가 지인이 자그마한 집을 짓고 있는 전남 고흥군 바닷가를 찾았다. 바다를 등지고서 집을 보곤 “개집이구먼” 하던 김 작가가 돌아서 바다를 향했다. 이내 그가 말했다고 한다. “절경이다.” 기자가 고흥으로 향한 이달 15일, 봄비답지 않게 거센 비가 쉼 없이 내렸다.…
지난달 초 버스를 타고 전북 순창군으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창밖을 보니 하늘이 뿌옜다. 중국발 미세먼지가 여기까지 미치나 보다, 했다. 다만 대도시에서 보는 미세먼지 잔뜩 찬 대기와 달리 어딘가 물기를 머금은 듯 보였다. 이튿날 눈을 떠 언덕에 자리한 숙소 밖으로 나가 둘러볼 때도 마…
차가워진 다다미 기운이 요를 통해 전해지며 눈을 떴다. 창호지 미닫이 창문을 열자 통창 밖 에치고(越後)평야가 다가온다. 뾰족뾰족 벼 그루터기로 빼곡한 논이 멀리까지 뻗어 있다. 그 너머로 겹치며 이어지는 산등성이들은 희끗희끗하다. 어디선가 백조들이 나타나 삼삼오오 허공에 긴 줄을 긋…
한차례 경매가 지나간 위판장 물기 어린 바닥에 주홍빛 집게다리 하나 뒹군다. 대게잡이 어선에 가득 실려 온 어느 붉은대게(홍게)에서 떨어져 나왔나 보다. 8개 다리 모두 살로 통통하고 꽉 들어찬 내장으로 몸통이 단단한 것들은 이미 상품(上品)으로 팔려 떠났다. 아침 댓바람에 부두로 들…
우리나라는 성곽(城郭)의 나라다. 조선 초기 집현전 직제학(直提學) 양성지(1415∼1482)의 말이다. ‘세조실록’에 기록된 상소(上疏)에서 그는 국방을 강화해야 한다며 이같이 아뢴다. 아닌 게 아니라 북한 지역을 제외하고도 현재까지 확인된 성이 2100개를 넘는다. 90%는 산성(…
“타이가르, 타이가르.”12인승 승합차 운전사가 오른쪽 창밖을 바라보며 짧게 말했다. 새벽 미명(未明)에 덜 깬 눈을 비비며 내다봤지만 어둠뿐이다. 운전석 뒤 탑승객이 “뭔가 길옆 수풀 속으로 움직인 것 같다”고 했다. 타이가르, 타이거(tiger), 호랑이였다. 네팔 제2의 도시 포…
제주도 한 달 살기 바람이 몇 년째 가실 줄 모른다. 살아 본 사람들의 경험을 담은 책과 유튜브 프로그램은 수십 권, 수십 건이다. 바다 건너 섬 생활 이야기가 이웃 마을 ‘맘 카페’ 댓글 보듯 가깝다. 제주가 익숙해진 것 같다. 그걸로 충분한 걸까. 누구 말대로 제주는 언제나 ‘낯선…
나는 돌이로소이다. 비릿한 바다 냄새와 싱싱한 흙내, 짭조름한 갯내 물씬한 전남 장흥(長興)에서 나는 돌이로소이다. 물도 아니고 뭍도 아닌 내가 주역입네 할 생각은 없소. 다만 그동안 가려져 있던 나를 슬그머니 드러내 보려 할 뿐이오. 세계 전체 고인돌의 40%가량이 모인 한반도에서도…
천안지안인자안(天安地安人自安). 하늘이 편안하고 땅이 편안하니 인간 또한 편안하다. 충남 천안이 그만큼 살기 편안하다고 자부하는 표현이다. 한갓진 곳이냐 하면 그건 아니다. 유관순의 아우내장터와 독립운동가 이동녕 이범석 생가에 독립기념관까지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가 있다. …
‘동반치악(東蟠雉岳) 서주섬강(西走蟾江).’ 동쪽으로 치악산(雉岳山)이 둘러 있고 서쪽으로 섬강이 내달린다. 조선 초기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강원 원주를 이렇게 묘사했다. 치악산은 원래 적악산(赤岳山)이었다. 가을 단풍에 빨개진 산이 절경일 터다. 치악산의 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