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영상이 하나 있다. 한강 불꽃축제가 열리던 밤. 철교를 지나는 전동차에 기관사의 안내방송이 울려 퍼진다. “밝게 빛나는 불꽃처럼 어제보다 더 빛나는 내일이 되시길 바랍니다. 열차에서 보는 불꽃놀이가 올 한 해 뜻깊은 기억으로 남길 바라겠습니다.” 이윽고 전동차 안에 불이 꺼지…
새벽에 엄마네 집에 도착했다. 짐을 푸는 사이 엄마와 아이들은 까무룩 잠들었다. 아이들 발을 붙잡고 발치에 웅크려 잠든 엄마. 새벽녘, 작은 집에 맴도는 훈기에는 손주들 먹이려 고아둔 미역국 냄새가 배어 있었다. 몸집은 어린애처럼 조그마한데, 주름은 할머니처럼 자글자글해진 엄마. 이불…
불볕더위로 푹푹 찌는 여름. 쨍쨍한 거리를 걸으면 온몸으로 뙤약볕을 받아내는 사람들이 눈에 밟힌다. 청소하는 미화원과 짐 옮기는 택배기사, 공사하는 인부들과 배달하는 라이더들.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떠올라서 뭉클. 해마다 날씨가 악독해지는 걸 실감한다. 나는 일기예보가 아주 징글징글하…
어른들 어깨너머로 들었다. 솜씨 좋은 가게를 가려거든 애먼 데 헤매지 말고 오래된 간판에서 사람 이름부터 찾으라고. 이를테면 순희식당, 예원세탁소, 슬기빵집, 지영미용실 같은 간판들. 특히나 자식 이름을 건 가게라면 눈 딱 감고 믿어 보라고 했다. 그래서 찾아갔는데 외양은 낡았어도 문…
평온한 날씨가 이어졌다. 나는 주말마다 공원으로 가 시간을 보냈다. 숲길을 산책하다가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자면 빛 나무 빛 그림자 사이에 가만한 나 하나. 이따금 스치는 여린 바람에도 이파리들은 팔랑거리며 빛그물을 끌어 덮어줬다. 거기에 사로…
요즘 나는 동네 곳곳에서 잠복 중이다. 담벼락이나 의류 수거함, 자동차 뒤꽁무니에 숨어 아홉 살 쌍둥이 형제를 염탐한다. 골목이 얽혀 있는 오래된 동네는 조심할 것들이 많다. 그래도 아이들은 밖을 나선다. 현관 밖으로, 아파트 밖으로, 울타리 밖으로 동네를 자박자박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갓 귀농한 젊은 부부를 봤다. 농사가 서툰 남편은 잡초가 무성한 밭에서 손가락만 한 고구마를 캤다. “세상에, 이렇게 작은 고구마 본 적 있어요?” 남편이 웃자 “고구마 사세요. 세상에서 제일 작은 고구마 사세요!”라며 아내가 장난을 쳤다. 농사를 망친 것임이 틀림…
병원에선 좀처럼 웃을 일이 없다. 기다리는 시간은 길고 말 붙일 사람은 없다. 아프고 외롭고 낯설어서 다들 입을 다물고선 말을 삼킨다. 큰 병원에는 노인들이 많다. 고부라진 등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 엄마 같아서 가슴에 소슬한 바람이 인다. 대기석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중얼거렸다. “추…
“넌 잘 웃어. 그게 씩씩해서 좋아.” 언젠가 언니가 그랬다. 나는 아무 때고 잘 웃는 사람. 좋을 때도 낯설 때도 힘들 때도, 무릎이 픽픽 꺾일 때조차 툭툭 웃고선 잘 일어난다. 사람들에겐 되도록 다정하게 웃어주려 노력한다. 이건 타고난 성정이라기보단 오래 보고 자라 체화한 태도에 …
나는 늘 글을 쓰고 싶었다. 장래 희망은 글 쓰는 사람. 글쓰기는 꼭 해보고 싶은 일이자 희망, 열망이자 꿈이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백일장 키즈’로 자라며 글쓰기는 평가받는 과제가 됐고, 긴장되고 부담되니까 어렵고 두려워졌다. 점점 글쓰기는 대단한 예술이나 업적, 타…
어떤 기억은 사무쳐 평생 잊지 못할 이름으로 남기도 한다. 나는 우유를 보면 재호가 떠오른다. 눈사람을 보면 고은이 떠오르고, 손으로 접은 쪽지를 보면 우정이, 카세트테이프를 보면 기원이 떠오른다. 재호, 고은, 우정, 기원. 누군가에겐 평범한 이름들이 나에게는 우유와 눈사람과 쪽지와…
“망했어!” 숙제하던 아이들이 공책을 내던지며 엉엉 울었다. 가슴이 와르르 내려앉았다. 지난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쌍둥이 형제는 학교에서 무언갈 배우기 시작했다. 칠판을 마주하고 열 맞춘 책상에 앉아 시간표를 따라 교과서를 펼치고 수업을 들었다. 책가방을 메고 현관문을 나설 때부터 긴장…
바닷마을에서 자란 나는 해마다 바다에 뜨는 해를 보며 나이를 먹었다. 나를 키운 여자들은 세월이랑 사랑 같은 걸 ‘먹는다’고 표현했다. 가만있어 보자. 해가 얼마나 먹었나. 갸가 벌써 그래 나이 먹었드나. 말린 생선 가가 꿔 먹어라. 참으로 귀한 거라 얼라들 꿀떡꿀떡 잘도 받아먹잖니.…
“예쁘네.” 언니들이 나를 스치며 키득거렸다. 웃음에 얇디얇아서 속이 훤히 비치는 습자지 같은 조롱이 스며 있었다. 시골에서 오래 살았고, 집안 사정이 넉넉지 않았던 탓에 내게는 어디선가 물려받은 출처 불명의 옷이 많았다. 그래도 눈썰미가 좋았던 엄마 덕분에 브랜드 옷은 아니더라도 깔…
매일 오가던 길이 평소와 달랐다. 초록불이 점멸하는 횡단보도 한가운데서 황망해졌다. 에스컬레이터가 고장 난 지하철 계단에서 아득해졌다. 낯선 두려움을 맞닥뜨렸다. 내 다리로 무사히 지날 수 있을까.갑작스러운 무릎 부상을 당했다. 깁스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걷거나 계단을 오르내릴 때 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