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상훈]막다른 골목에서 빠진 캄보디아 범죄의 늪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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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정책사회부장
이상훈 정책사회부장
최근 캄보디아에서 발생한 한국인 납치 감금 피해 사건은 2010년대 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거마 대학생’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취업난과 등록금 부담에 몰린 청년들, 특히 지방 출신 대학생들이 ‘고수익 아르바이트’라는 유혹에 넘어가 서울 거여·마천 일대 불법 합숙소에 감금당하며 악성 다단계 판매에 내몰린 사건이다. 허름한 골목길 빌라 건물에 단체로 들락날락하던 대학생들의 초점 잃은 불안한 눈빛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세월이 지나면서 수법은 바뀌었지만, 막다른 골목에 몰린 젊은이들의 등골을 빼먹는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십수 년 전 거마가 2025년 캄보디아로 옮겨졌고, 건강식품과 옥장판이 보이스피싱과 불법 도박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때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구분할 수라도 있었지만, 캄보디아 사태는 감금 피해자가 피싱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이기도 해 해석마저 복잡해졌다. 열심히 살면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깨진 자리에서 청년들은 인생 한 방을 노리며 범죄의 늪에 빠진다.

땀 흘리는 노력 비웃는 절망

캄보디아의 1인당 국민소득은 2627달러, 주력 산업인 의류 신발 제조업 임금은 월 30만 원 남짓이다. 숫자로만 따지면 한국의 1980년대 중반과 엇비슷하고, 세계적 인플레이션과 상대적 국력 수준을 고려하면 한국의 1970년대보다 낫다고 할 수 없다. 이런 곳에 고수익 아르바이트 광고를 보고 간 청년들이 건강한 일자리를 기대했을 리 만무하다. 그 끝은 알려진 대로다.

한국의 청년들은 왜 그런 무모한 선택을 했을까. 밑바닥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유혹에 빠지기 쉬운 구조가 생겼다. 청년층(15∼29세) 고용률은 작년 5월 이후 17개월 연속 하락하며 45%대에 머물고 있다. 청년층 취업자는 올 8월 기준 전년 동월 대비 22만 명 가까이 감소하며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8월 이후 가장 많이 감소했다. 제조업 취업자는 14개월째, 건설업은 16개월째 줄어들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고용의 질이다. 졸업 후 첫 일자리가 1년 이하 계약직인 청년 비중은 올해 처음으로 30%를 넘어섰다. 임시 일용직까지 포함하면 10명 중 4명 가까이가 불안정한 일자리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청년들이 첫 직장에서 받는 월급은 200만 원 안팎이 대다수이고 정규직 진입 장벽은 갈수록 높아진다. 사회에 진입해도 평생직장의 꿈은커녕 ‘단기직-이직-구직 포기’라는 굴레에 갇힌다. 2000년대 중후반 일본의 취업 빙하기 세대가 보여주듯, 한번 어긋난 출발은 중년이 돼도 회복되지 않는다.

속았다고 하지만, 캄보디아로 향한 청년 대부분은 잘못된 계산에 스스로 발을 들였다. 아르바이트하며 취업을 준비할 수 있었고, 성실하게 학교에 다니며 미래를 기약했어야 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일부 청년들이 범죄의 문을 두드렸다. 문제는 성실하게 하루를 사는, 겁이 나 잘못된 선택을 할 엄두를 못 내는 청년들이 땀 흘리는 노력을 어리석게 비웃는 절망에 좌절하고 있다는 점이다.

구조 그대로면 제2의 캄보디아 생긴다

캄보디아에서 범죄에 가담한 청년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러나 그 선택이 구조적 문제에서 나온 것이라면, 캄보디아 사태는 개인 일탈로 끝나지 않는다. 번듯한 일자리를 꿈꾸기 어려운 변두리 계층 청년들이 인생을 걸고 마지막 한탕을 잡기 위해 범죄의 길에 뛰어들었다. 그들이 저지르는 보이스피싱 등 범죄의 대상 역시 그들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서민들이다. 이런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캄보디아 사태는 국내에서도, 또 다른 국가에서 언제라도 벌어질 수 있다. 비극은 끝난 것이 아니라,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캄보디아#한국인 납치#청년 취업난#불법 합숙소#다단계 판매#보이스피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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