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이달 초 금산분리 완화 가능성을 언급했다. 현장에서 본 재계 반응은 의외로 냉랭하다. 좋게 봐줘도 미적지근한 정도다. 누가 봐도 금산분리 완화의 ‘수혜’를 볼 것으로 보이는 대기업일수록 더 그렇다.
산업계의 냉랭한 반응 이면에는 “또 그러다 말겠지”라는 체념이 섞여 있다. 금산분리 완화는 정권마다 거론됐지만 매번 흐지부지됐다. 단 한 번도 ‘재벌 특혜’와 ‘금융 안정 훼손’ 등 반대 논리를 넘지 못했다. 이번에도 똑같은 과정을 거칠 것으로 보이니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일부 기업은 “정권이 바뀌면 (이번 금산분리 완화 시도가) 정경유착 사례로 꼽힐 것 같으니 우리 이름은 거론하지 말아 달라”고 기자들에게 부탁할 정도다.
하지만 지금이 예전처럼 재벌 특혜 등의 이유로 금산분리 완화 논의를 미룰 수 있는 상황일까. 대통령까지 나선 데는 이미 상황이 시급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일 것이다. 이 문제는 향후 50년 이상 우리가 먹고살 신산업 개척과 연관돼 있다.
한국형 금산분리 완화가 지향하는 ‘롤 모델’은 일본 소프트뱅크다. 소프트뱅크는 일본에선 통신사지만, 일본 밖에선 세계적 투자 회사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초기부터 펀드를 만들어 글로벌 혁신 기업에 투자해 왔다. AI칩을 독점한 미국 엔비디아, 영국 반도체 설계기업 ARM, 중국 전자상거래 기업 알리바바 등이 소프트뱅크가 초기에 돈을 댄 투자 포트폴리오의 일부다. 이런 기업들에 초기 투자하기 위해선 산업 흐름을 읽는 선구안이 중요하다. 손정의로 대표되는 일본 기업인들이 일본 자본을 모은 뒤 본인의 안목으로 전 세계에 투자하는 것이다.
한국은 정확히 그 반대 지점에 서 있다. 우리 기업들은 AI로 인한 산업 지각변동을 지켜보고 있지만 투자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현재 글로벌 AI 투자는 수십조 원이 우스울 정도로, 기업 한 곳이 홀로 투자할 수 없는 판이 됐다. 반대로 한국 금융기관들은 넘쳐나는 유동성을 쓸 곳이 없다. 오픈AI 등 초격차 기업은 돈만 있다고 투자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들만의 ‘리그’에 합류해야 함께 갈 수 있다. 최근 진옥동 신한금융지주 회장이 “기업형 벤처캐피털이 펀드 운용사 역할을 한다면 은행이 같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금융권 첨단산업 투자의 한계를 절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금산분리 원칙을 무턱대고 모두 풀자는 얘기가 아니다. 과거처럼 “재벌에 은행까지 안겨 준다”는 식이면 누구의 공감도 받을 수 없다. 현 상황에서 한국경제에 금산분리 완화가 꼭 필요하다면 국민들에게 이번 논의의 목적이 ‘재벌 은행’ 탄생이 아닌, 한국의 글로벌 투자 생태계 진입이라는 점을 명확히 알려야 한다. 그래야 이미 시작된 일부 정치권과 시민단체들의 금산분리 완화 반대 목소리를 넘어설 수 있다.
1982년 금산분리 규제가 도입된 이후 40년 넘게 지났다. 이제 글로벌 산업 변화와 자본의 흐름을 모두 반영하지 못하는 낡은 제도가 됐다. 2025년 현시점의 첨단 산업들인 AI, 반도체, 플랫폼 등은 모두 자본과 산업의 결합으로 성장한다. 미래 신산업의 문을 열기 위해 금산분리 규제 중 어떤 것을 고쳐야 할지 찬찬히 뜯어볼 시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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