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눈길을 끄는 판결이 나왔다. 발단은 배우 변우석 씨의 지난해 7월 출국길이었다. 당시 변 씨의 경호원은 사진을 찍으려던 시민들 얼굴에 강한 플래시를 비추고, 탑승권까지 들여다봤다. 법원은 이를 위법한 물리력 행사로 보고 경호원과 경비업체에 각각 벌금 100만 원을 선고했다. 판사는 “촬영을 막으려면 일정을 비밀로 하고 조용히 이동하면 될 일인데, 오히려 팬미팅하듯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통과했다”고 꾸짖었다.
멀쩡히 공항을 이용하던 시민이 연예인 ‘행차’의 배경으로 전락하고, 경호 인력이 그 시민을 ‘방해물’처럼 다루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023년 2월 아이돌 그룹 NCT DREAM 입국 현장에서는 한 시민이 경호원과 부딪혀 늑골이 부러졌다. 지난해 6월엔 또 다른 아이돌 팬이 경호원과 충돌해 뇌진탕을 입었다고 주장했다.
이를 단순 해프닝으로 봐서는 곤란하다. ‘공항 패션쇼’는 연예기획사와 브랜드가 합작한 정교한 비즈니스 각본이다. 출입국 일정을 일부러 흘린다. 협찬받은 옷과 가방을 들어 보인다. 착용한 아이템은 금세 ‘완판’된다. 업계에선 이런 이벤트가 막대한 광고 효과로 환산된다. 돈 한 푼 안 들이고 차리는 런웨이다.
이게 얼마나 괴이한 광경인지부터 직시하자. 할리우드 스타들을 생각해 보라. 모델료가 한국의 수십 배인 그들이 비행기를 탈 때마다 공항이 마비된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 없다. 출퇴근 인파로 붐비는 지하철 신도림역 승강장에 연예인이 사전 예고를 하고 나타난다면 어떨까. 더구나 패션 브랜드로부터 ‘뒷광고’를 받은 상태라면. 공항 패션쇼는 ‘팬과의 소통’이라는 미명 아래 공공 공간을 뺏는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당국은 변죽만 울린다. 인천국제공항공사는 지난해 연예인 전용 출입문을 내밀었다가 특혜 논란에 시행 하루 전 백지화했다. 지난달 유관 기관 회의에선 ‘공항이용계획서 사전 제출’ 등이 제안됐지만 미봉책일 뿐이다. 통행 방해와 무단 촬영 자체를 막아야 하는데, 관련 법안은 1년 넘게 국회에 잠들어 있다.
해외는 다르다. 영국 런던 히스로 공항에서 촬영하려면 사전에 허가받아야 한다. 혹시 모를 피해에 대비해 1000만 파운드(약 190억 원) 규모의 보험까지 들어야 한다. 이를 어기면 조례 위반으로 퇴거 조치될 수 있다. 미국 일부 공항은 유료 VIP 터미널을 운영한다. 스타들이 알아서 돈을 내고 여길 이용한다. 무엇보다 해외 스타들은 동선을 공개하지도 않는다. 공항을 홍보 무대로 여기지 않는, 당연한 처사다.
연예계가 자중하기만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미 기형적인 수익 모델이 깊숙이 뿌리내려서다. 그렇다면 공항과 경찰이 명확한 기준을 세우고, 이를 어기면 과감히 제재할 필요가 있다. 경호업체의 ‘원청’인 연예기획사를 직접 제재하는 것도 방법이다. 상습적으로 불편을 초래한 기획사의 공항 이용을 제한하면 어떨까. 지금처럼 공항 패션쇼를 쉽게 생각하지는 못할 테다. “선 넘으면 손해 본다”는 신호가 쌓여야만 ‘팬과의 만남은 공항이 아닌 장소에서’라는 상식이 되살아난다. 공항은 모두의 길이지, 누구 한 사람의 런웨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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