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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정임수 논설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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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3~2025-10-23
칼럼100%
  • ‘현금 천국, 전월세 지옥’ 불러온 10·15 대책 [오늘과 내일/정임수]

    문재인 정부가 5년에 걸쳐 전국 시군구의 절반 가까이를 규제 사정권에 넣었다면, 이재명 정부는 출범 4개월 만에 서울 전역과 경기 12곳을 ‘규제 3종 세트’로 묶었다. 1978년 토지거래허가제 도입 이래 전례 없는 초강력 조치다. 암세포가 번지는 걸 막겠다며 주변 장기를 모두 도려낸 격이다. 정부와 여당 인사들은 10·15 부동산 대책을 두고 “실수요자 보호를 위한 초강수”, “과열을 차단해 장기적으로 주거 사다리를 보장한다”는 자평을 내놓지만, 고개를 끄덕일 국민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증폭되는 서민·청년층 주거 불안감 가장 억울한 이들은 서울 ‘노도강’(노원·도봉·강북), ‘금관구’(금천·관악·구로)와 경기 외곽 지역 주민이다. 이들 지역은 3년 전 집값을 아직도 회복하지 못했는데 강남이나 한강벨트와 똑같은 규제를 적용받으면서 집을 제때 사기도, 팔기도 힘들어졌다. 정부는 풍선효과 차단을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대책에서 빠진 구리, 동탄, 다산신도시 등의 집값은 벌써 들썩이고 있다. 이러다가 토지거래허가구역 면적만 더 키울 판이다. 게다가 잠실 시그니엘, 강남 타워팰리스 같은 초고가 주거용 오피스텔과 연립주택은 규제를 비켜 가 상대적 박탈감이 더 크다. 이제 규제지역에서 전세 끼고 집을 사는 갭투자는 원천 봉쇄됐고 무차별 대출 규제까지 더해졌다. 15억 원이 넘는 주택은 대출 한도가 4억 원으로, 25억 원이 넘으면 2억 원으로 축소됐다. 이는 문 정부가 15억 원 넘는 주택에 대한 대출을 금지한 2020년 12·16 대책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당시 ‘초고가 아파트’의 기준이던 15억 원은 서울 아파트값 평균이 됐다. 지난달 KB부동산 시세로 서울 아파트 평균 매매가는 14억3600만 원을 넘어섰다. 이런 상황에서 “수억, 수십억 원 빚내서 집을 사게 하는 게 맞느냐”는 여당 원내대표의 발언은 ‘현금 부자’가 아닌 서민과 청년들은 집을 살 자격이 없다는 말과 다를 게 없다. 더군다나 이번 대책은 가뜩이나 불안한 전월세 시장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 됐다. 요즘 서울 주요 아파트들은 전세 매물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인데, ‘2년 실거주 의무’까지 적용돼 다주택자와 갭투자자의 전세 공급 물량이 사라지게 됐다. 여기에다 내년 서울 아파트 입주 물량은 올해보다 60% 넘게 급감한다. 전세난은 물론이고 전세의 월세 전환을 가속화해 월세 가격까지 끌어올리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게 뻔하다. 이미 서울 아파트 월세 가격이 역대 최고치로 치솟은 상황에서 서민들의 주거비 부담이 가중되면 내수 활성화도 멀어진다. 서울 주택 공급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재건축·재개발 사업 역시 차질이 불가피하다. 재건축·재개발 조합원을 겨냥해 전매 제한, 주택 공급 수 제한, 재당첨 제한, 대출 제한 등의 규제가 한꺼번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재건축에 본격 시동을 건 분당, 평촌 등 1기 신도시까지 사정권에 포함됐다. 그러잖아도 지지부진한 재건축·재개발 사업이 위축되면 중장기적으로 수도권 집값을 더 끌어올릴까 우려스럽다. 무주택자 숨통 틔워 주고 공급 속도 내야 이런데도 이 대통령은 21일 “가용한 정책 수단과 역량을 집중 투입해 비생산적 투기 수요를 억제해야 한다”며 규제 의지를 분명히 했다. 정부와 여당은 “부동산으로 돈 버는 시대는 끝났으니 주식으로 갈아타라”, “돈 모아서 집값 떨어지면 사라”고 할 게 아니라 날벼락을 맞은 실수요자와 서민, 청년들의 숨통을 틔워 줄 후속 보완책부터 고민해야 한다. 아울러 수요자들이 원하는 곳에, 원하는 주택이 충분히 공급될 수 있다는 믿음을 줘야 한다. 공급 없이 징벌적 규제로만 집값을 잡으려다가는 수십 차례 대책에도 시장의 내성만 키워 되레 집값 급등을 부추긴 문 정부의 전철을 밟을 것이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18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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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임수]노벨상이 주목한 ‘창조적 파괴’

    20세기 경제학의 양대 산맥이지만 대공황 이후 정부의 시장 개입을 주장하며 스타로 떠오른 영국인 케인스에 가려져 뒤늦게 이름을 알린 이가 오스트리아 출신 조지프 슘페터다.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라 불리는 기업가의 혁신이 자본주의를 이끄는 힘이라고 본 그의 이론은 기술 혁신 기반의 4차 산업혁명이 화두가 되면서 특히 빛을 발했다. 혁신의 아이콘인 애플의 스티브 잡스보다 무려 한 세기나 앞서 혁신을 강조한 경제학자인 것이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슘페터의 뒤늦은 재발견이다. 슘페터의 사상을 현대적으로 확장한 경제학자 3명이 노벨 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필리프 아기옹 프랑스 콜레주드프랑스 교수와 피터 하윗 미국 브라운대 교수는 창조적 파괴 이론을 수학적으로 정립한 업적을, 조엘 모키어 미국 노스웨스턴대 교수는 기술 진보를 통한 성장의 전제 조건을 규명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들이 밝힌 기술 혁신과 창조적 파괴의 메커니즘이 세계 공통 난제인 저성장과 고령화를 타개할 돌파구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아기옹과 하윗은 30년 넘게 슘페터 이론을 계승하며 공동 연구를 해왔다. 다양한 국가 데이터를 바탕으로 기업 간 경쟁과 기술 투자가 혁신을 일으키고 후발 기업들의 진입을 촉진해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끄는 과정을 정량적으로 분석하는 데 성공했다. 한국과의 인연도 눈길을 끈다. 아기옹은 2021년 한국은행 연구진과 함께 쓴 논문에서 재벌 중심의 경제 구조를 개혁한 한국의 산업 정책이 혁신 주도 성장을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하윗은 브라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하준경 대통령실 경제성장수석의 스승이다. ▷경제사학자인 모키어는 기술 진보가 지속적인 성장을 이끈다고 강조하며 이를 뒷받침하는 문화와 제도가 중요하다는 점을 역사적으로 입증했다. 2000년대 초반 3차 산업혁명의 효력이 다해 전 세계가 저성장 국면에 빠질 것이라는 일각의 주장을 반박하며 4차 산업혁명을 통한 또 한 번의 퀀텀점프가 가능하다고 내다봤다. 그의 전망대로 과거와는 질적으로 다른 기술 혁신이 생성형 인공지능(AI), 자율주행, 로봇 같은 신산업을 등장시키며 성장을 이끌고 있다. ▷이들의 통찰력은 0%대 저성장에 갇힌 한국 경제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수상자들은 기자 회견에서 “한국 경제가 혁신을 지속하려면 새로운 기업이 시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강력한 반(反)독점 정책이 필요하다”, “고령화·저출산 해법의 핵심은 국경을 뛰어넘는 개방성”이라고 꼬집었다. 전 세계적으로 AI발 기술 경쟁이 치열한 지금, 신기술 확보에 뛰어든 기업들의 혁신을 방해하지 않도록 법과 제도, 시장 환경을 갖추는 게 시급하다. 슘페터 후예들의 고견이 더 무겁게 다가오는 요즘이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2025-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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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임수]‘중국인 3대 쇼핑 방지법’이라니…

    중국 최대 명절인 국경절 연휴에 인천국제공항으로 입국한 중국인은 13만 명을 넘겨 지난해보다 30% 늘었다고 한다. 중국인 단체 관광객(游客·유커)을 대상으로 무비자 입국이 허용된 여파다. 중국인 관광객이 한국에서 쓴 돈은 지난해 평균 1622달러(약 230만 원)로 압도적 1위다. 정부는 내년 6월까지 시행되는 무비자 조치로 중국인 100만 명이 추가로 방한할 것으로 기대하는데, 단순 계산해도 2조3000억 원의 효과가 있는 셈이다. ▷이를 통해 얼어붙은 국내 관광 산업과 내수 경기를 되살리고, 사드 갈등 이후 골이 깊어진 한중 관계를 회복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건 극우 단체를 중심으로 확산되는 혐중(嫌中), 반중(反中) 시위다. 유커 무비자 입국을 계기로 이들을 겨냥한 혐오 발언과 음모론은 도를 넘어서고 있다. ▷그런데 야당인 국민의힘이 중국인의 의료·선거·부동산 등 이른바 ‘3대 쇼핑 방지법’을 당론으로 추진하겠다고 한다. 국민의힘 김은혜 원내정책수석부대표는 “우리 국민은 해외에서 건강보험 혜택도, 선거권도, 부동산 거래 자유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데 중국인은 제도의 빈틈을 파고들어 의료, 선거, 부동산 쇼핑을 하고 있다”며 “바로잡아야 할 국민 역차별”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를 두고 근거가 희박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 원내수석부대표는 “2만 원이 안 되는 건강보험료를 내고 수천만 원 혜택을 받는다”고 했지만, 그런 사례가 있더라도 극히 일부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 요건이 강화되면서 국내 체류 중국인들의 건보 재정은 흑자로 돌아섰다. 2020년대 초반까지 있었던 수백억 원대 적자 또한 통계 오류로 밝혀져 적자 폭이 줄거나 흑자로 수정됐다. 더구나 이런 논리라면 특정 국적자 대상 건보 재정이 적자로 돌아선다면 나라별로 일일이 법을 만들어야 할 판이다. 게다가 서울 아파트를 소유한 외국인은 미국인이 중국인을 훨씬 앞선다. “왕서방들이 실제 살지도 않으면서 월세를 받아 간다”고 했지만, 중국인 보유 아파트는 차이나타운이 있는 구로구, 영등포구 등에 몰려 있다. ▷앞서 국민의힘의 한 최고위원은 무비자 입국 중국인들로 인해 “마약 유통과 불법 보이스피싱 등이 확산될 수 있다”, “전염병 확산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고 했다. 원내 제2당이 지지층 결집을 위해 반중 정서를 부추긴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무분별한 반중, 혐중 정서를 확산시키고 한중 관계 개선의 싹을 꺾는 건 국익과 직결된 문제다. 한국 사회가 오랜 기간 일본의 혐한(嫌韓) 시위를 비판했던 기억이 선명한데, 이젠 우리가 누군가를 혐오하는 주체가 됐다니 씁쓸할 뿐이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202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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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정임수]기재부 죽이고 금융위 살린 ‘묻지 마’ 개편

    이재명 정부가 기획재정부 해체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덩달아 수술대에 올린 게 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이다. 대선 유세 과정에서 “금융위에 감독과 정책 업무가 뒤섞여 있어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금융 조직 개편이 시작됐다. 이렇게 해서 확정된 것이 기재부를 재정경제부와 기획예산처로 쪼개고, 금융위는 금융 정책 기능을 재경부에 넘긴 뒤 금융감독위원회로 재편하는 방안이다. 그 밑에 금감원을 분리해 신설 금융소비자보호원을 함께 두겠다고 했다.일방통행 조직 개편, 국민 신뢰 갉아먹어 그런데 지난주 정부조직법 개정안 처리를 불과 3시간 앞두고 정부와 여당은 금융위·금감원 개편을 없던 일로 만들었다. 최장 6개월이 걸리는 패스트트랙(신속처리 안건) 지정까지 불사하겠다고 해놓고선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꾼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경제 위기 상황에서 금융 조직을 장기간 불안정한 상태로 둘 수 없다” “야당 반대에 따른 불가피한 결정”이라는 이유를 댔지만, 실제로는 금융계의 거센 반발과 준비 부족이 겹친 탓이 크다. 당초 금융 정책과 감독 기능을 4곳(재경부·금감위·금감원·금소원)으로 쪼개는 것을 두고 업무 중복과 혼선을 가중시키고 위기 대응 능력을 떨어뜨린다는 비판이 컸다. 금융사 입장에선 시어머니만 4명이 돼 관치 부담을 키운다는 불만이 쏟아졌다. 그런데도 조직 개편 당사자는 물론이고 금융 현장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은 없었다. 조직 분리를 위해선 9000개가 넘는 법조문을 개정해야 하는데, 기본 설계조차 없어 최근까지 금융당국 직원들이 일일이 조항을 분리 검토하는 작업을 했다고 한다. 이는 새 정부의 금융 조직 개편이 얼마나 졸속으로 추진됐는지 보여주는 단면이 아닐 수 없다. 금융당국 직원들과 금융회사, 소비자 모두에게 공감을 얻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금융당국 쪼개기라는 개악은 피했지만, 일방통행식으로 개편을 밀어붙이다가 갑작스럽게 번복하는 과정에서 정책 혼란과 불신만 남긴 꼴이 됐다. 더 큰 문제는 금융 조직 재편이 백지화되면서 금융 정책 기능을 넘겨받지 못하는 재경부다. 경제 정책 핵심 수단인 예산, 세제, 금융 중 예산은 예정대로 기획예산처로 빠져나가고 내년 1월 출범하는 재경부는 세제 기능만 남게 됐다. 과거 재무부 시절부터 정권의 필요에 따라 합치고 쪼개고를 반복해 왔지만, 이번처럼 경제 총괄 맏형 부처를 최약체로 만든 적은 없었다. 세제 기능만 갖고 범부처 간 정책을 조율하고 다른 부처를 움직이게 할 동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경제 컨트롤타워 공백·예산 낭비 우려 재경부 장관이 명목상 부총리 지위를 유지하지만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까지 부총리로 격상된 마당에 경제부총리의 권한과 위상도 반쪽으로 축소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구윤철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이 추진하던 AI국 신설이 최근 관계 부처의 반대 등으로 올스톱됐다고 하는데, 벌써부터 경제 사령탑의 힘이 빠지고 있다는 평가마저 나온다. 미국발 관세 압박과 저성장 타개를 위해 어느 때보다 강력한 정책 조율이 필요한 상황에서 경제 컨트롤타워 기능이 무너질까 우려스럽다. 게다가 과거 사례에서 보듯 국무총리 산하로 가게 된 기획예산처는 대통령실과 정치권의 입김이 세질 공산이 크다. 미래 세대가 세금으로 갚아야 할 나랏빚이 해마다 110조 원씩 늘어나는 처지에서 예산처가 정권의 현금자동입출금기(ATM)로 전락하면 재정 건전성 악화가 불 보듯 뻔하다. 과거 이 대통령은 지역화폐·기본소득 등 트레이드마크 정책을 두고 사사건건 기재부와 충돌했다. 기재부를 겨냥해 “왕 노릇” “월권” “만행”이라는 질타도 서슴지 않았다. 이번 기재부 해체가 ‘분풀이용 손보기’가 아니라면, 경제 컨트롤타워에 힘을 실어주고 예산 낭비를 억제할 방안은 무엇인지 답을 내놓아야 할 때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2025-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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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임수]청년 ‘경보녀’ 영올드에게 ‘리스타트’ 기회를

    최근 5% 밑으로 떨어진 청년 실업률을 보면 두 자릿수를 기록하던 과거보다 사정이 나아 보인다. 하지만 이 숫자 뒤에는 일할 의욕을 잃은 채 경제 활동을 아예 포기한 청년들이 더 많다. 학업이나 육아 같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데도 구직 활동을 하지 않고 ‘그냥 쉰’ 20대가 지난달 43만5000명에 달한다. 노동시장을 이탈해 실업률 통계에도 포함되지 않는 이들이다. 저성장 기조가 굳어지며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해진 데다 기업들의 경력직 채용 선호로 청년을 위한 취업문이 좁아진 탓이다. 단순 실업보다 더 심각한 문제다. ▷60세 이상 고용률이 청년층 고용률을 앞서는 기현상이 6개월째 이어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5060세대 ‘영올드(Young old)’들의 일자리 상황이 더 나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한국 중장년층의 일자리 불안이 해외 주요국과 비교해 최악이라는 평가마저 나온다. 법정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40, 50대에 주된 일자리에서 밀려난 뒤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이들이 많아서다. 한국의 55∼64세 근로자 가운데 임시직으로 일하는 비중은 3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압도적 1위다. 회원국 평균의 4배를 웃돈다. ▷출산과 육아를 위해 일터를 떠났던 여성들이 다시 취직할 때도 임시직 같은 비정규직으로 겨우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여성 임금근로자가 처음으로 1000만 명을 돌파했지만, 수십 년째 남녀 임금 격차 OECD 1위라는 불명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이 때문이다. 여성 10명 중 4명은 출산과 육아, 자녀 교육으로 경력 단절을 경험하고, 취업을 하더라도 비정규직 비율이 높아 남성이 100만 원의 월급을 받을 때 여성은 71만 원을 받는다. ▷2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리스타트 잡페어’에는 기업 인사담당자를 만나 직접 상담하거나 경력을 살려 재취업을 하려는 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취업·창업 정보를 얻으려는 청년과 경력보유여성(경보녀), 제2의 인생을 설계하는 영올드가 고루 눈에 띄었다. 일자리야말로 모든 세대에 걸쳐 절실하고 보편적인 문제임을 절감한다. ▷갈수록 악화되는 일자리 상황은 단순히 정년 연장만으로는 이들의 고용 불안을 해소할 수 없다는 걸 보여준다. 30년 근속자가 신입보다 3배 가까운 연봉을 받는 구조에서 정년이 연장되면 청년 신규 채용은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인공지능(AI)과 로봇은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인간의 일자리를 잠식하고 있다. 정부가 서둘러 경직된 노동 환경을 손보고, 새로운 성장엔진을 발굴해 다양한 형태의 일자리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다. 이게 원하는 일자리를 찾지 못해 좌절하는 청년과 경보녀, 영올드의 ‘리스타트’를 돕는 길이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2025-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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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임수]홈플러스에 롯데카드까지… MBK의 그늘

    올 4월 포브스가 발표한 한국인 부자 순위에서 1위를 차지한 사람은 MBK파트너스의 김병주 회장이다. 경남 진해에서 태어나 10대 때 미국으로 이민 간 한국계 미국인인 김 회장의 재산은 95억 달러(약 13조 원)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다시 제쳤다. 사모펀드라는 개념조차 생소하던 시절, 김 회장은 자신의 영문 이름 ‘마이클 병주 김’의 약자를 따 한국형 사모펀드 운용사를 세웠다. 20년이 흐른 지금 MBK가 기업을 사고팔며 굴리는 자금은 약 42조 원, 투자한 기업의 매출을 더하면 68조 원이 넘는다. ▷하지만 ‘아시아 사모펀드의 대부’로 꼽히는 김 회장의 명성이 요즘 흔들리고 있다. MBK가 인수한 기업이 잇따라 경영에 실패하거나, 투자금 회수 후 사실상 껍데기만 남은 사례가 속출하면서다. MBK 인수 10년 만에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밟으며 줄폐업을 앞둔 홈플러스가 대표적이다. MBK는 홈플러스 인수 자금의 절반 이상을 금융권에서 빌렸는데, 이를 갚기 위해 알짜 점포들을 줄줄이 매각해 마트 경쟁력을 떨어뜨렸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신용등급 강등을 당하면 뼈를 깎는 자구 노력부터 하는 게 상식이지만, MBK는 기다렸다는 듯 홈플러스의 법정관리를 신청했고 신청 직전까지도 개인투자자를 상대로 단기 채권을 판매하며 피해를 키웠다. 남의 돈으로 기업을 비싸게 사들인 뒤 자산 매각으로 배를 불리고 실적이 나빠지면 나 몰라라 하는 ‘먹튀 경영’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파문이 커지자 김 회장은 사재 출연을 약속했지만 6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실질적 조치는 전무하다. ▷게다가 MBK가 2019년 인수한 롯데카드에서는 외부 해킹 공격으로 고객 297만 명의 정보가 유출됐다. 이 중 28만 명은 카드 번호와 비밀번호, CVC(카드 뒷면 3자리 숫자)까지 빠져나가 부정 결제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MBK는 2022년 롯데카드를 3조 원에 팔겠다고 내놨다가 실패했고, 최근엔 몸값을 2조 원으로 낮췄지만 새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재매각에 정신이 팔려 보안 투자를 소홀히 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롯데카드는 5년간 보안 내부 감사를 단 한 차례만 했고, 정보보호 투자액도 3년 새 15% 줄였다. ▷MBK는 해외 기업 사냥꾼에 맞설 토종 사모펀드를 키워야 한다는 여론을 등에 업고 성장했다. 정부도 외환은행을 헐값에 사들이고 ‘먹튀’한 론스타 등에 당하지 않겠다며 2005년 법을 만들어 한국형 사모펀드 육성에 나섰다. 하지만 홈플러스와 롯데카드 사태가 연이어 불거지자 토종 사모펀드 맏형인 MBK가 이 정도로 무책임한 줄 몰랐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이번 사태로 사모펀드를 악마화하는 편견을 가질 필요는 없지만, 단기 차익만 좇는 사모펀드의 탐욕에 제동을 걸 장치는 긴요해졌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2025-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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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정임수]물·원전·환경 다 품은 ‘공룡부처’의 탄생

    환경부가 대대적으로 몸집을 키운 건 2018년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취임 직후 내린 ‘업무지시 5호’에 따라 30년 넘게 국토교통부와 나눠 맡던 물관리 업무를 가져오면서다. 수질·환경 규제를 앞세운 환경부가 수량·하천 관리까지 넘겨받으면서 치수 컨트롤타워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는 논란이 많았는데, 지금도 극한 홍수와 가뭄이 반복될 때면 환경부 중심의 물관리 일원화가 도마에 오른다.환경 규제-에너지 육성, 충돌 불가피 이제 환경부는 7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초대형 부처로 변신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재명 정부의 첫 조직 개편안에 따라 산업통상자원부가 전담하는 에너지 정책을 가져와 ‘기후에너지환경부’로 확대되는 것이다. 환경부에 전력과 재생에너지·원전 등 에너지 전반의 정책 기능을 몰아주고, 산업부에는 원전 수출과 석유·석탄·가스 같은 화석연료 정책만 남긴다고 한다. 새 환경부는 한국전력·한국수력원자력 등 메가 에너지 공기업들을 거느리고 기후대응기금 등 막대한 재원도 관리하게 된다. 기후 위기에 대처하고 탄소 중립에 속도를 낼 컨트롤타워를 만들겠다는 취지이지만, 비대한 권한을 분산하겠다며 기획재정부를 쪼개 놓고 또 다른 ‘공룡 부처’를 만드는 꼴이 아닐 수 없다. 에너지 정책이 산업부에서 분리되는 건 1993년 상공자원부 출범 이후 32년 만이다. 이번에도 ‘규제 DNA’를 가진 환경부가 국가전략산업인 에너지 산업을 총괄하는 데 대한 회의적 시각이 많다. 온실가스 감축, 원전 감축 등에 초점을 맞춘 환경부가 값싸고 안정적인 에너지를 공급하도록 관련 산업을 육성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창(에너지 진흥)과 방패(환경 규제)를 한꺼번에 내세우는 모순의 부처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새 환경부가 규제를 강화하고 재생에너지 확대로 급격히 방향타를 틀 경우 전력 생산단가가 오르고 전기요금 인상으로 이어져 국민과 기업의 부담을 키울 소지가 다분하다. 이미 환경부는 2035년 온실가스 배출량을 최대 67%까지 줄이는 방안을 국회에 보고했다. 문재인 정부 때 수립한 ‘2030년 40%’ 감축 목표도 달성하기 어려운데, 환경단체 등이 주장하는 목표치를 검토하겠다는 것이다. 새 조직 체계에선 산업 현장의 의견을 반영해 환경부 과속을 제어했던 산업부의 견제 기능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탈원전론자로 꼽혔던 김성환 환경부 장관은 9일 간담회에서 거듭 “탈원전은 없다”면서도 전임 정부에서 계획한 신규 원전 2기 건설과 관련해 재검토를 시사했다. 이재명 정부가 내건 ‘인공지능(AI) 3대 강국’을 실현하고 반도체 등 주력산업 경쟁력을 높이려면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필수인데, 감(減)원전과 비싼 재생에너지로 가능할지 의문이다. 비용도 문제지만 원전 없이 전기 먹는 하마인 AI를 키운다는 건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불가능에 가깝다.쪼개진 원전 관리, 생태계 훼손 우려 국내 원전 건설과 운영은 기후에너지환경부가 맡고 원전 수출은 산업부가 담당하는 이원화 구조는 원전 생태계를 위축시킬 여지가 적지 않다. 신규 원전 건설과 기술 개발에 소극적인 나라의 원전을 어떤 국가가 선택하겠나. 미국과 유럽의 원전 재건 바람을 타고 세계 시장이 열리는 와중에 K원전의 수출 경쟁력을 갉아먹고 스스로 족쇄를 채우는 결과가 될까 우려스럽다. 국가 에너지 대계를 뿌리째 흔드는 조직 개편을 정부·여당은 충분한 공론화 과정도 없이 속도전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이달 하순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하기로 한 만큼 그때까지라도 전문가와 각계 의견을 수렴해 문제점을 보완해야 한다. 전기가 국가 경쟁력이 된 시대에 기후 위기 컨트롤타워가 산업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국민 부담을 키운다면 그 뒷감당은 누가 책임질 건가.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2025-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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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임수]갈수록 수상한 양평고속도로 종점 변경

    2031년 개통 예정이던 서울∼양평고속도로는 2017년 첫 계획 단계부터 2021년 예비타당성 조사를 거칠 때까지 줄곧 경기 양평군 양서면이 종점이었다. 관광객이 몰리는 인근 양평 두물머리의 교통난을 해소하려는 취지에서였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 2년 차에 느닷없이 양평군 강상면을 종점으로 한 대안이 공개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강상면 종점에서 500m 떨어진 거리에 김건희 여사와 모친, 형제자매가 4만 ㎡의 땅을 소유한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국비 1조9000억 원이 투입되는 고속도로의 구간 변경에 대해 정부는 제대로 된 설명조차 없었다. ▷양평고속도로 노선 변경 의혹을 수사 중인 김건희 특검팀은 당시 국토교통부 도로정책팀장을 맡았던 김모 서기관을 ‘1차 키맨’으로 꼽고 있다. 김 서기관은 윤 전 대통령 당선 직후인 2022년 3월 민간 설계용역업체 두 곳을 만나 종점을 강상면으로 변경하면 편의를 봐주겠다고 말한 것으로 특검이 파악한 인물이다. 특검 수사 과정에서 김 서기관의 집에서 수백만 원 상당의 돈다발이 발견된 데 이어 용역업체들로부터 금품을 받은 정황까지 포착됐다고 한다. ▷김 서기관의 요청이 있고 일주일쯤 뒤 용역업체들은 강상면을 종점으로 하는 설계도면을 만들었다. 통상 노선을 변경해 설계도면까지 만드는 데 수개월이 걸리는 것을 감안하면 현장 실사도 없이 졸속으로 종점 변경 설계부터 한 것으로 의심된다. 이어 업체들은 그해 11월 강상면 종점안에 대한 타당성 조사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국토부 공무원들이 ‘윗선’의 지시에 따라 급하게 종점 변경을 추진했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게다가 강상면 종점안이 국토부가 주재한 회의에서 공식 문건에 등장해 처음 논의된 건 공교롭게도 2022년 5월 원희룡 전 국토부 장관의 취임날이다. 원 전 장관 측은 “당시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회의 내용을 보고받지도 않았다”고 하지만, 그의 취임 시점과 맞물려 종점 변경 작업이 본격화했다는 의혹을 살 만하다. 1년여 뒤 김 여사 일가 특혜 논란이 일자 원 전 장관은 “임기 끝까지 의혹에 시달리는 것보다 제가 책임지고 손절하는 게 좋다”며 양평고속도로 사업을 백지화했다. ▷2022년 비공개로 양평고속도로 타당성 조사 착수 보고회가 열렸던 날, 김 여사 모친 최은순 씨의 사무실 컴퓨터에서 강상면 일대 토지 정보를 일일이 검색한 기록도 포착됐다. 비공개 정보가 실시간으로 김 여사 측에 유출된 건 아닌지 특검이 수사로 가릴 일이다. 늦어도 한참 늦어진 수사인 만큼 특검팀은 누구의 지시로 왜 노선을 변경했는지, 김 여사 일가 특혜 의혹이 사실인지 국민적 의구심을 말끔히 해소해야 한다. 그래야 물거품이 돼버린 지역 주민들의 숙원인 양평고속도로 사업도 재개될 수 있을 것이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2025-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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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임수]990원 소금빵… 원가 논란 명암

    한 달에 100개 안팎의 팝업스토어(임시 매장)가 생겼다 사라지는 서울 성수동에서 요즘 가장 핫한 곳은 명품이나 아이돌 굿즈 매장이 아닌 빵집 팝업이다. 지난달 30일 문을 열었는데 영업 전부터 수백 명이 대기하는 건 기본이고 3시간 넘게 기다렸다 빵을 샀다는 후기가 줄을 잇고 있다. 구독자 361만 명을 보유한 경제 유튜버 ‘슈카월드’가 직접 연 빵집이라는 화제성도 있지만, 소비자들의 발길을 사로잡은 건 가격이다.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3000∼4000원대에 판매하는 소금빵과 바게트를 이곳에선 990원에 팔고 있다. 식빵(1990원), 단팥빵(2930원) 등도 일반 빵집보다 훨씬 싸다. 슈카는 “빵값이 미쳐 날뛰고 있다. 가격이 낮은 빵을 만들면 시장을 흔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며 팝업을 기획한 의도를 밝혔다. 슈카의 지적대로 국내 빵값은 ‘빵플레이션’(빵+인플레이션)이라는 신조어가 생겼을 정도로 소비자 부담을 키우고 있다. 밀가루, 원유, 설탕, 계란 등 원재료 가격이 뛰면서 빵값은 최근 5년간 38% 넘게 올랐다. ▷990원 소금빵이 가능한 비결에 대해 슈카 측은 버터, 달걀 같은 고가 원재료를 최소화하고 주요 원재료를 산지에서 직송해 유통비를 낮췄으며 빵 모양과 포장을 단순화해 비용을 절감했다고 한다. 요즘 가성비를 앞세워 인기를 끌고 있는 지하철 역사 내 ‘1000원 빵집’ 구조와 크게 다르지 않은 셈이다. 하지만 빵집을 운영하는 자영업자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가격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인지도와 홍보력을 가진 유명 유튜버의 박리다매가 아니면 불가능한 가격이라는 것이다. ▷비싼 인건비와 임대료는 물론이고 복잡한 제빵 원재료 유통구조를 무시한 채 일반 빵집들이 폭리를 취하는 것처럼 만들었다는 비판까지 제기되고 있다. 실제 국내 제빵 제조 원가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29%로 식품 제조업 평균의 3배를 웃돈다. 주요 원료 대부분을 수입하는데 수입업체, 도매상, 소매납품업체로 이어지는 유통 단계마다 마진이 붙다 보니 동네 빵집은 원재료를 저렴하게 공급받기도 힘들다. 우크라이나 전쟁 직후 급등했던 국제 밀 가격이 하락해도 국내 빵값은 그대로인 배경이다. ▷대기업 프랜차이즈 빵집이 시장을 과점한 탓에 동네 빵집들이 이를 기준 삼아 가격을 정하기도 한다. 임대료 비중도 높아 같은 브랜드 빵이라도 목 좋은 상권에선 비싸게 판매된다. 이런 구조적 요인들이 모두 더해져 한국의 빵플레이션이 유독 심해진 것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해 이를 해결하겠다며 제빵업 유통구조 개선 방안 마련에 나섰지만 아직 대책은 나오지 않고 있다. 슈카가 쏘아올린 빵값 논쟁이 단순한 가격 실험을 넘어 이 같은 구조적 문제를 해소할 기폭제가 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202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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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정임수]‘검사’ 이복현 떠난 자리 ‘변호사’ 이찬진

    3년 전 윤석열 정부의 첫 금융감독원 수장으로 검사 출신의 이복현이 발탁됐을 때 이런 말이 돌았다. 윤 전 대통령이 장관급을 포함해 요직 3개를 제안했는데, 이 전 원장이 가장 자신 있고 인사청문회를 거치지 않아도 되는 금감원장 자리를 ‘픽’했다는 거였다. ‘윤석열 사단의 막내’라는 위세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3년의 임기를 다 채우고 떠난 이 전 원장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기존 금감원장 역할을 한참 벗어났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대통령의 복심’답게 임기 내내 금융위원장보다 더 센 금감원장으로 통했고, 직무를 넘어선 돌출 발언으로 정책 엇박자와 월권 논란을 빚었다. 검찰이 피의 사실을 흘리듯 감독·검사 과정을 언론에 공개하며 금융사를 압박하기도 했다.‘李변호인’ 7명 청문회 없는 요직 이제 검사 출신이 떠난 자리에 변호사 출신이 왔다. 이번에는 큰돈을 빌려줄 정도로 막역한 대통령의 38년 지기 절친이다. 지난주 취임한 이찬진 신임 금감원장은 이재명 대통령의 사법연수원 18기 동기로, 연수원 내 운동권 서클인 기(期)모임과 노동법학회에서 함께 활동했다. 이 대통령의 성남시장 시절부터 각종 송사를 도왔고, 대통령 당선으로 재판이 중단된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과 쌍방울 대북송금 의혹 사건에서 변호인을 맡았다. 2019년에는 이 대통령의 분당 아파트를 담보로 5억 원을 빌려주기도 했다. 그동안 금감원장에 학계나 정치인 출신이 발탁되면 파격 인사라는 얘기가 나왔는데, 대통령 최측근인 법조인 출신이 연이어 자리를 꿰찬 셈이다. 금융권 안팎에서 ‘이복현 시즌2’가 펼쳐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이 대통령이 금융권의 ‘이자 놀이’를 질타하고 장기 연체자 빚 탕감, 100조 원 펀드 등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상황에서 심복인 이 원장이 총대를 메고 금융회사 군기 잡기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참여연대·민변 등을 거친 이 원장은 금융 분야 전문성이 떨어지고 뚜렷한 경력도 없어 우려를 더한다. 정부는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을 지냈고 자본시장 회계 관련 소송을 맡은 적이 있어 문제될 게 없다지만 시장의 반응은 싸늘하다. 국정기획위원회에서도 사회1분과장으로 새 정부의 보건·의료 정책을 맡았던 이 원장을 금융시장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금융감독 수장으로 임명하는 게 맞느냐는 것이다. 내 편이라는 이유라면 검찰 선후배들을 요직 곳곳에 앉혔던 윤 전 대통령과 다를 게 없다. 이 원장을 포함해 새 정부에서 대통령실과 정부, 여당에 포진한 ‘이재명 변호인’은 모두 12명으로 늘었다. 지난해 총선에서 대장동 5인방이 국회에 입성한 데 이어 최근 7명의 변호사가 법제처장, 국가정보원 기조실장, 대통령실 민정비서관 등 청문회 없이 임명만 하면 되는 요직에 올랐다. 이 대통령을 변호한 데 대한 대가성 인사이자 임기가 끝나면 재개될 재판에 대비한 방탄성 보은 인사란 비판이 나오는 배경이다. 윤석열의 ‘검찰 공화국’이 저무니 이재명의 ‘변호사 공화국’이 열렸다는 얘기를 들어도 이상할 게 없다.‘금감원의 정치화’ 더는 없어야 이복현 전 원장은 두 달 전 퇴임식에서 금감원 임직원과 금융회사, 유관기관을 상대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불미스러운 일로 중도하차하는 것도 아닌데 금감원장이 퇴임사에서 거듭 ‘사과’, ‘송구’, ‘제 부족 탓’을 언급한 건 이례적이다. 여의도 저승사자로 군림한 데 대한 사과일 것이다. 이찬진 원장도 금융권 안팎의 논란을 의식한 듯 “어떤 괴물이 왔나 궁금하실 텐데 과격한 사람이 전혀 아니다”, “모든 의사결정을 독단적으로 하지 않겠다”며 한껏 몸을 낮춘 모습을 보이고 있다. 3년 뒤에도 이 같은 말이 유효할지, 또다시 금융감독 업무를 정치화하지 않을지 이 원장의 행보를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일이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2025-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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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임수]MASGA 동참하는 은퇴 ‘용접 장인’

    제2차 세계대전 시작과 함께 미국은 60곳이 넘는 조선소에서 군함과 수송선 수천 척을 찍어내며 조선업 황금기를 열었다. 1950년 흥남 철수 작전 때 피란민 1만여 명의 목숨을 구한 미국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도 당시 만들어진 수천 대 화물선 중 하나였다. 바다를 지배한 미국의 힘은 2차대전 승리를 넘어 미국 중심의 세계 자유무역 질서를 구축하는 기반이 됐다.▷70여 년이 지난 지금 미국 조선업의 위상은 초라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중국 국영 조선사(CSSC) 한 곳이 지난해 250척이 넘는 선박을 생산하는 동안 미국은 10여 개 조선소에서 7척을 만드는 데 그쳤다. 해군 함정 수도 중국이 미국을 추월한 지 오래다. 조선업이 쇠퇴하면서 미 해군은 새 함정을 만드는 것도, 낡은 함정을 유지 보수하는 것도 어려운 처지다. 미국 싱크탱크는 “반세기 만에 미국이 해상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진단했다.▷미국이 한미 관세 협상에서 한국이 제안한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에 화답한 배경이다. 작년과 올해 연이어 국내 조선소를 찾은 전현직 미 해군성 장관들은 “한국 기술력에 어안이 벙벙하다” “한국의 자본과 기술을 미국에 유치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원더풀’을 연발하고 돌아갔다. 이들은 선박 계약 단계부터 정확한 납기 일정을 제시하고, 실시간 건조 현황을 모니터링하는 시스템에 놀랐다고 한다. 우리로선 당연한 일이지만, 조선업 생태계 전반이 붕괴된 미국에선 상상하기 힘든 구조다.▷한화오션이 인수한 필리조선소만 봐도 미국에서 배 만드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있다. 필리조선소는 지난해 현지 인력 1700명을 고용했는데 숙련공은 70명뿐이다. 인력이 부족하고 생산성도 낮아 선박 건조 속도도 느리다. 2차대전 때만 해도 미국 조선소에서 100만 명 넘게 일했지만 1980년대 이후로 20만 명을 넘긴 적이 없다. 특히 용접·도장·배관 등 핵심 공정에 투입되는 기능 인력과 선박설계 등에 필요한 연구 인력은 거의 없다.▷1500억 달러가 투입되는 마스가 프로젝트를 위해 국내 조선소에서 은퇴한 숙련 용접공 등 전문가를 미국 조선소에 파견하는 방안이 추진된다고 한다. 국내 대형 조선사에서 매년 은퇴하는 이들이 1000여 명인데, 이들을 재고용한 뒤 미국으로 파견해 숙련 기술을 전수하겠다는 것이다.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 수출 때도 현장 경험이 많은 한국인 퇴직자들이 현지에서 활약한 적이 있다. K조선의 핵심 경쟁력 중 하나가 용접 기술 같은 현장 손기술인데, 미국 조선업 재건에도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적지 않다. 한국 제조업 역사상 전례 없는 해외 진출이 될 마스가의 첫걸음이 시작됐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2025-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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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정임수]방시혁의 ‘분노’ vs 개미들의 ‘분노’

    방탄소년단(BTS)은 군 공백기를 끝내고 ‘완전체’로 다시 날아오를 태세지만, 이들이 속한 엔터테인먼트 기획사 하이브의 주가는 날개 없이 추락하고 있다. 이달 들어 코스피가 3,200 시대를 여는 와중에도 하이브 주가는 20%나 빠졌다. ‘BTS의 아버지’ 방시혁 하이브 의장의 오너 리스크 때문이다. 방 의장의 주식 부정거래 의혹을 두고 지난주 경찰이 하이브 본사를 압수수색하며 강제수사에 나선 데 이어 29일엔 국세청이 특별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주식으로 장난치면 패가망신”이라고 경고한 뒤 금융·사정 당국의 칼날이 매섭다.하이브 상장 때 2000억 부당이익 혐의 하이브가 주식시장에 입성한 건 BTS가 빌보드 차트를 휩쓸며 월드스타로 자리매김한 2020년 10월이다. 방 의장은 상장 하루 만에 국내 8위 주식 부자에 오르며 돈방석에 앉았다. 하지만 기업 대주주는 상장 이후 일정 기간 주식을 팔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보호예수’ 규제에 걸려 바로 돈을 만질 수는 없었다. 이를 피하려고 방 의장은 사모펀드들과 상장 후 지분 매각 차익의 30%를 넘겨받는 계약을 맺었다고 한다. 이 중엔 방 의장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하이브 전 임원들이 설립한 사모펀드도 있었다. 방 의장 측은 상장 준비를 하고 있으면서도 하이브 주식을 가진 기존 투자자들에게 상장 계획이 없다고 알린 뒤 해당 사모펀드에 주식을 팔도록 유도했다. 보호예수 규제를 비켜간 사모펀드들은 상장 직후 5%에 가까운 지분을 내다 팔았고, 방 의장은 계약에 따라 2000억 원을 손에 쥐었다. 금융당국은 방 의장과 관계자들이 상장 과정에서 기획 사모펀드를 동원해 부당이득을 챙겼다고 보고 자본시장법상 사기적 부정거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이를 두고 방 의장 측은 사모펀드와 맺은 계약은 사적 계약인 만큼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사모펀드가 지분을 대량 매도하면서 상장 첫날 35만 원을 웃돌았던 하이브 주가는 열흘 만에 15만 원대로 수직 낙하했다. 당시 BTS의 군 입대 리스크 같은 애꿎은 이유만 찾으며 주가 폭락에 눈물 흘렸던 개미투자자들의 피해는 누가 책임질 것인가. 투자자들은 5년이 지난 뒤에야 ‘진짜 이유’를 알고 분노하고 있다. 주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주주 간 계약이 상장 과정에서 철저히 은폐됐다는 사실에 기막힐 뿐이다. 이번 사태로 새삼 주목받는 게 하이브 상장 1년 전에 있었던 방 의장의 졸업식 축사다. 방 의장은 모교인 서울대 졸업식에서 스스로를 만든 건 “꿈이 아닌 분노”라고 했다. “최고 아닌 차선을 택하는 무사안일에 분노했고, 음악산업의 불공정거래 관행에 분노했다”는 것이다. “공공의 선에 해를 끼치고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욕망을 이루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주식시장 불공정거래 혐의로 전방위 수사를 받게 된 방 의장에게 투자자들이 되돌려주고 싶은 말일 것이다.“주가조작 패가망신” 엄포 아니어야 역대 정부마다 ‘일벌백계’를 다짐했지만 자본시장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불공정거래는 끊이지 않고 있다. 하이브와 SM엔터테인먼트 인수를 놓고 지분 경쟁을 벌였던 카카오 김범수 창업자 역시 시세조종 혐의로 재판 중이고, 윤석열 전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도 주가조작 혐의로 특검 수사를 받고 있다. 혐의 적발부터 법원 판결까지 몇 년씩 걸리는 데다 ‘감옥 가도 남는 장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처벌 수위가 낮은 탓이다. 이를 해결하겠다며 막강한 권한을 가진 범정부 차원의 ‘주가조작 근절 합동대응단’이 어제 출범했다. 불공정거래가 한 번이라도 적발되면 자본시장에서 퇴출시키는 ‘원스크라이트 아웃제’도 시행한다고 한다. “패가망신” 경고가 일회성 엄포가 아님을 이번에는 꼭 입증해야 할 것이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2025-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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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임수]수면시간 줄어드는 대한민국

    한때 한국 수험생들에게 ‘나폴레옹 수면법’이 유행한 적이 있다. 성인에게 권장되는 하루 수면시간은 7∼9시간이지만, 나폴레옹처럼 서너 시간만 자고도 멀쩡하게 일상생활을 하는 ‘쇼트 슬리퍼(short sleeper)’가 있다는 게 알려지면서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잠을 적게 자는 체질이 아니라면 수면 부족은 치명적이다. 생체리듬이 깨져 면역 기능이 떨어지는 건 물론이고 기억력과 집중력이 저하되고 비만이나 고혈압, 당뇨, 치매 같은 질병에 걸릴 위험도 높아진다. ▷세계수면학회가 매년 3월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 직전 금요일을 ‘세계 수면의 날’로 정해 수면 건강의 중요성을 알리는 이유다. 그런데 한국인은 지난해 하루 평균 8시간 4분을 잠자는 데 썼다고 한다. 통계청이 10세 이상 국민 2만5000명을 대상으로 24시간 활용 실태를 조사한 결과다. 1999년부터 5년 주기로 이뤄진 6번 조사 가운데 우리 국민의 수면시간이 줄어든 것은 처음이다. 2019년 수면시간은 8시간 12분이었다. ▷특히 국민 10명 중 1명은 자려고 누웠지만 제때 잠들지 못하고 평균 30분 넘게 뒤척이는 것으로 조사됐다. 60세 이상 고령층에서는 수면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20%에 육박했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를 세며 불면의 밤을 보내는 한국인이 이만큼 많다는 뜻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수면 장애나 불면증으로 진료를 받은 사람은 2022년 현재 110만 명에 달한다. 동네 곳곳에 수면 클리닉이 들어서고, 6년 전 올라온 ‘수면 유도 음악’ 동영상이 조회수 1억 회를 돌파한 배경이다. ▷통계청 조사는 그나마 양호한 편이다. 앞서 글로벌 헬스케어 기업이 17개국 3만6000명을 조사한 결과에서는 수면의 양과 질에 대한 한국인의 만족도가 40%에도 못 미쳤다. 매일 숙면한다는 응답자도 7%로 세계 평균의 절반에 그쳤다. 한국인이 꿀잠을 자기 위해 지갑을 여는 규모는 이미 한 해 3조 원을 돌파했다. 오죽하면 ‘마약 베개’, ‘기절 베개’에 잠자기 전 스마트폰 사용을 강제로 막을 ‘휴대전화 감옥’까지 등장했겠나. ▷꿀잠을 방해하는 건 여럿이지만 과도한 스트레스와 극심한 경쟁, 불안 등이 1순위로 꼽힌다. 이번 통계청 조사에서도 직장인의 84%, 학생의 73%가 업무와 학업으로 인한 피로를 호소했다. 여기에다 한국인이 스마트폰, 태블릿 등으로 유튜브, 넷플릭스 같은 미디어를 시청하는 여가 시간은 5년 전 조사보다 2배 가까이 급증했다. 침대에 누워서까지 스마트폰을 쥐고 사는 생활 습관이 수면의 질을 떨어뜨리고 불면 사회를 고착화시키는 셈이다. 잠은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영역이지만, 수면 부족은 사회·경제적 손실로 이어진다. 도둑맞은 한국인의 잠을 되찾아야 할 때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2025-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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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정임수]빚 탕감 ‘산소호흡기’로 연명하는 개미지옥

    이재명 대통령이 성남시장 시절 빚으로 고통 받는 서민을 돕겠다며 만든 게 ‘주빌리은행’이다. 50년마다 노예를 풀어주고 빚을 탕감해주던 성경 속 희년(禧年), 주빌리에서 이름을 따왔다. 이 대통령은 4일 충청권 시민들과 만나 이를 소개하며 “문명사회에서 죽을 때까지 빚지는 것은 비극”이라고 했다. 그런데 한국에선 5년마다 ‘부채 희년’이 찾아온다. 노태우 정부부터 현 정부까지 정권이 바뀌면 어김없이 농가 부채 탕감, 신용 사면, 장기 연체 면제 같은 대규모 빚 감면 정책이 반복되고 있어서다.李정부, 123만 명 22兆 빚 없애기로 주빌리은행장 출신답게 이재명 정부는 역대급이다. 자영업자 등 취약계층 113만 명을 대상으로 7년 이상 연체된 5000만 원 이하의 빚을 일괄 탕감해주기로 했다. 또 코로나 위기로 피해를 입은 소상공인 10만 명은 연체 원금을 최대 90%까지 깎아준다. 123만여 명의 개인·자영업자가 안고 있는 22조6000억 원의 빚을 없애주겠다는 것이다. 생계를 위협받는 취약계층을 지원하고 재기를 돕는 건 정부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특히 팬데믹 대응 과정에서 빚의 수렁에 빠진 영세 자영업자들이 불황의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도록 하려면 어느 정도의 채무 조정은 불가피하다. 문제는 역대 정부마다 되풀이된 빚 탕감 정책이 취약계층의 여건을 장기적으로 개선시키기보다는 ‘빚으로 빚을 막는’ 구조적 위험을 더 키웠다는 점이다. 소득 하위 20%인 취약계층의 신용대출액 추이를 살펴보면, 탕감이 있을 때 반짝 줄었다가 다시 늘어나는 행태를 반복한다. 과거 구제 대상자의 20%가 다시 빚을 내 신용불량자(금융채무불이행자)로 전락했다는 통계도 있다. 지난 정부에서 연체 소상공인·자영업자의 빚을 감면해주는 새출발기금이 출범했지만 금융회사 3곳 이상에서 빚을 낸 저소득·저신용 자영업자는 3년 새 50% 급증했다. 무엇보다 일회성 빚 탕감으로는 고질적인 공급 과잉으로 ‘개미지옥’이 된 자영업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팬데믹을 거치면서 전체 취업자에서 자영업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20% 밑으로 떨어지긴 했지만, 주요 선진국에 비하면 여전히 2∼3배 높다. 괜찮은 일자리가 부족해 청년층부터 조기 퇴직한 베이비부머까지 대거 생계형 창업에 뛰어드는 탓이다. 준비도 없이 성급하게 창업한 뒤 빚으로 버티다가 폐업으로 내몰리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자영업자 3명 중 1명은 월평균 최저임금(월 210만 원)도 못 버는 신세다. 2차 베이비붐 세대(1964∼1974년생)가 본격적으로 은퇴하면 상황은 더 심해질 게 뻔하다.과포화 자영업 구조조정 병행해야 이 같은 구조적 위기를 방치한 채 부실이 쌓인 자영업자에게 채무 조정과 탕감을 반복하는 건 국민 혈세를 부어 ‘좀비 자영업자’만 늘리는 꼴이 될 수 있다. 회생 가능성이 있는 소상공인에게 흘러갈 자금 여력까지 막아 자영업 생태계의 지속 가능성을 해칠 우려도 있다. 더군다나 이 대통령은 4일 행사에서 “추가 탕감”까지 언급했는데, ‘안 갚고 버티면 된다’는 도덕적 해이를 부추길 소지가 크다. 현 정부가 내건 탕감 조건(7년 이상 연체, 5000만 원 이하)의 빚을 이미 성실하게 갚은 사람이 361만 명인데, 이들이 느끼는 박탈감은 상당하다. 정부는 빚 탕감 전력이 있는 사람을 걸러내는 등 엄격한 기준을 마련해 부작용을 최소화해야 한다. 아울러 고통스럽더라도 빚으로 연명하는 한계 자영업자를 솎아내는 구조조정을 서둘러야 한다. 폐업 기로에 놓인 자영업자를 돕는 근본 처방은 단기적 채무 구제가 아니라 질서 있는 출구를 마련하고 맞춤형 직업교육, 일자리 알선 등을 통해 취업 기회를 열어주는 것이다. 위기의 자영업을 언제까지 빚 탕감 ‘산소호흡기’로 연명시킬 수는 없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2025-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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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임수]디올, 티파니, 까르띠에 이어 루이비통… 또 털린 고객정보

    은행이나 관공서도 아닌데 버젓이 고객에게 신분증을 요구하는 곳이 글로벌 명품 브랜드 매장이다. 오픈런을 위해 입장 대기 번호표를 받을 때도 소비자는 이름과 연락처, 생년월일 등을 제공해야 한다. VIP 맞춤형 서비스를 명분으로 기본 인적사항은 물론이고 직업, 가족·친구 관계, 취미, 각종 기념일 같은 세세한 개인정보를 수집하는 일이 다반사다. 해커들의 놀이터인 ‘다크웹’에서 명품 브랜드의 고객 정보가 일반 소비자 정보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거래되는 이유다.▷그런데 이처럼 민감한 사적 정보가 가득 모인 명품 브랜드에서 국내 고객들의 개인정보가 유출되는 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디올, 티파니, 까르띠에에 이어 지난주 루이비통코리아에서 고객 정보가 외부로 유출된 것이 알려졌다. 루이비통과 디올, 티파니는 세계 최대 명품 그룹인 프랑스 루이뷔통모에에네시(LVMH) 소속이고, 까르띠에는 스위스 명품 그룹 리치몬트 산하의 보석·시계 브랜드다. 불과 두 달 새 국내에서 인지도와 인기가 높은 명품 브랜드 네 곳에서 정보 유출 사고가 확인된 것이다.▷이들 브랜드에서 새나간 정보에는 이름, 연락처, 주소, 이메일뿐만 아니라 소비자가 예민할 수밖에 없는 구매 이력과 ‘추가 제공 정보’가 포함돼 빈축을 사고 있다. 신용카드나 은행 계좌 같은 금융 정보는 유출되지 않았다지만, 온라인 곳곳에 흩어져 있는 개인정보들과 결합해 2차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소비자들 사이에선 콧대 높은 명품 브랜드의 보안이 이렇게 허술한지 몰랐다는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소비자들이 더 분통을 터뜨리는 건 명품 업체들의 부실하고 안일한 대응이다. 루이비통은 지난달 8일 고객 정보가 유출됐지만 이달 3일에야 관계당국에 신고했다. 디올은 올 1월에 발생한 유출 사고를 100일이 지난 뒤에야 파악했고, 이마저도 고객에게 곧장 알리지 않았다. 티파니 역시 한 달이 넘어서야 정보 유출을 인지하고 해당 고객에게만 이메일로 알렸고, 까르띠에는 유출 시점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오죽하면 이름만 명품일 뿐 대처는 구멍가게 수준이라는 얘기가 나오겠나.▷게다가 해외 명품 브랜드들은 한국 지사에 정보 보안 책임자나 담당 부서를 두지 않고 해킹 사고에 취약할 수 있는 외부 클라우드 서비스에 고객 정보 관리를 맡긴다고 한다. 명품 브랜드가 국내에서 막대한 수익을 올리면서도 고객 정보 보호에 소홀한 건 한국 소비자를 ‘호갱(호구+고객)’으로 보는 것이나 다름없다. 루이비통과 까르띠에 등이 올 상반기에만 두 차례 가격을 올리는 등 명품 브랜드의 ‘N차 가격 인상’은 관행이 됐다. 기꺼이 개인정보를 넘겨주고, 값을 아무리 올려도 사겠다는 호갱이 사라지지 않는 한 명품 브랜드의 배짱 영업은 계속될 것 같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2025-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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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임수]20세기 이후 全無했던 ‘호르무즈 해협 봉쇄’, 이번엔…

    페르시아만과 맞닿은 중동 산유국에서 원유나 천연가스를 싣고 큰 바다로 나가려면 이란과 오만 사이에 있는 호르무즈해협을 지나야 한다. 호리병같이 생긴 이 뱃길은 이란과 오만이 절반씩 관할하지만, 수심이 100m 안팎으로 얕은 데다 폭이 가장 좁은 곳은 39km에 불과해 대형 유조선은 그나마 수심이 깊은 북쪽 이란 해역을 통과해야 한다. 여기서도 들어가는 배와 나가는 배는 각각 3km 너비의 정해진 항로를 따라 이동해야 한다. 배 한 척만 틀어져도 수로가 엉키며 마비되는 구조인 셈이다. ▷그동안 미국의 압박이 거세질 때마다 이란이 ‘호르무즈 봉쇄’ 카드를 꺼내든 배경이다. 전 세계 원유 소비량의 20%, 중동 산유국이 수출하는 원유의 85%가 오가는 이 길목을 막아 국제 사회에 타격을 주겠다는 것이다. 2012년 미국이 이란의 핵 개발 의혹을 제기하며 이란산 원유 수입을 금지하자 이란은 해협을 봉쇄하겠다고 엄포를 놨고, 2018년 도널드 트럼프 1기 행정부가 이란 핵 합의를 파기하고 제재를 복원했을 때도 봉쇄 위협으로 맞섰다. ▷미국이 21일(현지 시간) 이스라엘과 이란 간 전쟁에 개입해 이란 본토를 공습하면서 호르무즈의 봉쇄 가능성이 다시 고조되고 있다. 이란 의회가 곧바로 호르무즈 봉쇄를 의결해 최고국가안보회의의 최종 결정만을 남겨 놓고 있다. 국제 유가가 급등하고 주가와 환율이 출렁이는 등 글로벌 금융시장은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호르무즈 폐쇄가 현실화하면 국제 유가가 지금의 두 배로 치솟아 ‘워플레이션’(전쟁+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거라는 경고까지 나온다. ▷그런데 이란이 쥔 사실상 유일한 공세 카드임에도 20세기 이후 봉쇄가 현실화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이란 해군사령관이 한때 “호르무즈 봉쇄는 물 마시는 것만큼 쉽다”고 큰소리쳤지만, 실행에 옮기는 것이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서방의 제재로 극심한 경제난을 겪는 이란이 수출 대부분을 원유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수출길을 막는 건 자해나 다름없다. 게다가 저렴한 이란산 원유를 대거 수입하며 이란을 편드는 동맹국 중국에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점도 딜레마다. ▷호르무즈 봉쇄가 가시화하면 가장 큰 타격을 받을 나라는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이다. 호르무즈해협을 통과하는 원유의 70% 이상이 한국 일본 중국 대만 등으로 수출되고, 특히 한국이 수입하는 중동산 원유의 99%가 이곳을 거친다. 한국은 이란의 도발에 맞서 달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5년 전 아덴만에 파견된 청해부대를 호르무즈해협으로 파병한 적도 있다. 이번에도 국내 선박과 유조선이 표적이 되면 청해부대가 출동할 가능성이 크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 호르무즈 봉쇄의 불똥이 어떻게 튈지 걱정스럽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2025-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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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임수]“증여한 주식 돌려 달라”… 한국콜마 父子 전쟁

    K뷰티의 ‘제조 강자’로 꼽히는 한국콜마가 2세 경영 체제로 전환한 건 2019년이다. 일본과의 무역 갈등으로 반일 정서가 들끓던 당시, 창업주 윤동한 회장이 정부 대응을 비판하는 막말 영상 논란에 휩싸이며 경영에서 잠시 물러나면서다. 1남 1녀를 둔 윤 회장은 아들에겐 화장품과 의약품 사업을, 딸에겐 건강기능식품 사업을 맡기는 것으로 후계 구도를 그리고 지주사인 콜마홀딩스 지분을 물려줬다. 그해 말 아들 윤상현 사장은 부회장으로 승진하며 지주사 최대 주주가 됐고, 이듬해 초 딸 윤여원은 콜마비앤에이치의 사장이 됐다. ▷그런데 최근 아버지 윤 회장이 6년 전 아들 윤 부회장에게 물려준 지주사 주식 230만 주(지금은 무상증자를 거쳐 460만 주)를 돌려 달라는 소송을 냈다. 창업주가 2세 경영자를 상대로 증여 취소 소송을 제기하는 초유의 경영권 분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번 소송은 얼마 전부터 자회사 경영권을 둘러싸고 아들 윤상현 부회장과 딸 윤여원 사장이 벌인 ‘남매 다툼’이 ‘부자 싸움’으로 확전된 꼴이다. ▷남매간 갈등은 두 달 전 오빠 윤 부회장이 실적 부진과 주가 하락 등을 이유로 동생이 대표이사로 있는 콜마비앤에이치의 경영진 교체를 요구하면서 불거졌다. 동생이 이를 거부하자 오빠는 이사회 개편을 위한 임시주주총회를 열게 해달라는 소송까지 냈다. 이 같은 다툼이 알려지자 윤 회장은 창립 기념식에서 기존 후계 구도 방침을 거듭 밝히며 “창업주로서 직접 중재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아들이 “혈연 아닌 주주 가치 제고 원칙을 지킬 것”이라며 아버지의 뜻을 거부하자 부자간 소송전으로 번진 것이다. ▷부녀 측은 아버지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기 전 체결한 ‘3자 간 경영 합의’를 아들이 어긴 만큼 증여 취소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해당 합의에는 그룹 경영을 맡은 아들이 콜마비앤에이치의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경영권 행사를 지원·협조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으며, 이를 전제로 증여를 받았다는 것이다. 반면 아들 측은 당시 증여는 아버지의 사퇴로 인한 경영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이뤄진 것으로, 경영 합의를 전제로 한 ‘부담부증여’가 아니라고 반박하고 있다. ▷향후 재판에선 경영 합의에 어떤 문구가 포함됐는지, 경영 합의를 증여의 조건으로 볼 수 있는지 등이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일반 가정에서도 부담부증여를 취소해 달라는 소송이 끊이지 않는데, 대체로 자식이 증여 조건으로 내건 효도나 부양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며 물려준 재산을 도로 내놓으라는 사례라고 한다. 일반 가정의 증여 반환도 까다로운데 콜마 분쟁은 경영권까지 걸려 있어 장기전으로 치달을 소지가 크다. 집안싸움으로 K뷰티 수출에 일등공신 역할을 해온 콜마의 날개가 꺾이지 않을까 걱정스럽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2025-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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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임수]경기국제공항, 도의원들이 제동 걸고 나선 이유는?

    30여 년간 선거 때마다 경기 지역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단골 메뉴가 경기도를 남북으로 나누자는 분도와 수원·성남시의 군공항 이전이다. 김동연 경기도지사 역시 경기북부 특별자치도를 신설하고 남부권에 대규모 국제공항을 유치하겠다는 공약을 앞세워 2022년 지방선거에서 당선됐다. 군공항을 옮겨 민간도 함께 사용하는 통합 국제공항을 만들겠다는 것인데, 경기도는 그해 말 곧장 ‘경기국제공항추진단’을 꾸리고 이듬해 국제공항 건설 지원 조례까지 만들어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이어 지난해 11월엔 화성시 화옹지구 간척지, 평택시 서탄면, 이천시 모가면 등 세 곳을 국제공항 후보지로 선정했다. 인천·김포국제공항 이용객 10명 중 3명이 경기도민인데도 정작 도내에 공항이 없어 불편이 큰 데다, 15년 뒤 경기도 인구가 1479만 명으로 늘어나는 걸 감안하면 국제공항이 필요하다는 게 경기도의 주장이다. 여객 수요는 물론이고 반도체 클러스터 등 첨단산업단지를 기반으로 화물 수요 또한 경쟁력이 있다고 봤다. ▷그런데 최근 경기도의회 의원들이 국제공항 건설 지원 조례를 폐지하겠다는 조례안을 발의했다. 폐지 조례안에 참여한 도의원 10명 중 8명이 더불어민주당 출신으로, 같은 당 소속인 김 도시자의 역점 사업에 제동을 건 것이다. 도의원들은 수요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수도권에 국제공항을 또 짓는 건 명백한 예산 낭비라고 했다. 후보지 세 곳 모두 지하철 등 교통 인프라가 부족해 인천·김포공항을 가는 것보다 시간이 더 걸리고, 늘어나는 화물 수요는 인접한 청주국제공항을 활용하면 된다는 것이다. ▷국제공항 후보지에서 주민들의 반발이 이어지는 것도 사업 백지화 추진에 영향을 주고 있다. 특히 화성시 화옹지구는 2017년부터 수원 군공항 이전 예비후보지로 거론됐던 곳인데, 주민들은 “군공항이든 국제공항이든 다 싫다”며 범시민대책위원회까지 만들어 집단행동에 나섰다. 공항이 들어서면 소음 피해가 가중되고 고도 제한에 묶여 갓 출범한 화성특례시 개발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평택과 이천시 후보지 주민들의 의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자체와 정치권이 한 몸이 돼 자기 지역에 공항을 유치하는 데만 열을 올리는 상황에서 경기도의회의 움직임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공항 건설부터 운영까지 전액 국비가 투입되다 보니 지자체와 정치권이 합작해 예산을 퍼준 뒤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세금 먹는 하마’가 된 공항이 널려 있다. 국내 15개 공항 중 11곳이 만성적자의 늪에서 허덕이고, 인구가 줄고 전국 곳곳에 고속도로와 KTX가 뚫리는데도 새로 건설되거나 계획 중인 공항이 10곳에 달한다. 경기국제공항은 물론이고 선거를 치를 때마다 늘어나는 ‘공항 포퓰리즘’에 제동을 걸어야 하는 이유다.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2025-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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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임수]“모든 연령대 10년 전보다 소비 감소”

    한국 직장인들 사이에서 생활비를 한 푼도 쓰지 않는 ‘무지출 챌린지’가 유행한 게 3년 남짓이지만, 일본에서는 2000년대부터 일찌감치 극단적인 절제 소비가 두드러졌다. 버블 붕괴와 함께 ‘잃어버린 10년’을 거치면서 소비를 가치 없는 행동으로 여기거나 심지어 죄악시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당시 “화장품에 1000엔 넘게 쓰거나 새 차를 사는 사람은 바보”라는 인터뷰 기사가 넘쳐났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가성비인 ‘코스파(cost performance의 일본식 발음)’라는 신조어가 등장한 것도 이때다. ▷소비 대신 절약이 일상이 된 일본의 30여 년간 변화를 한국은 압축적으로 겪고 있는 듯하다. 한국인 전 세대가 10년 전에 비해 소비를 자제하며 지갑을 닫았다고 한다. 세금, 이자, 연금보험료 등을 내고 남은 가처분소득에서 소비 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인 ‘평균소비성향’이 모든 연령층에서 10년 전보다 하락한 것이다. 대한상공회의소가 2014년과 2024년의 세대별 소득과 소비 지출 변화를 분석한 결과다. ▷연령대별로 보면 60대의 평균소비성향이 62.4%로 내려 가장 큰 폭으로 떨어졌다. 지난해 100만 원을 벌면 62만 원 정도만 썼다는 얘기다. 또 소득이 늘어난 다른 세대와 달리 20, 30대는 소비금액뿐만 아니라 가처분소득까지 동시에 뒷걸음쳤다. 좋은 일자리가 부족한 젊은층은 쓸 돈이 없어 지갑을 못 열고, 준비 없이 은퇴를 맞은 고령층은 노후가 막막해 지갑을 안 여는 것이 통계로 확인된 셈이다. 전 연령층의 소비 감소는 단순히 경기 둔화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총체적으로 맞물린 결과다. ▷빛의 속도로 진행되는 저출산·고령화로 저성장이 만성화되는데, 성장 활력을 높이기 위한 구조개혁은 더디기만 해 일본식 극단적 절약 소비가 고착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높다. 최근 한국개발연구원(KDI)은 한국인의 기대수명이 1년 늘어날 때마다 평균소비성향은 0.48%포인트씩 하락한다고 추산했다. 한국인 기대수명이 2004년 77.8세에서 지난해 84.3세로 뛰었는데, 그만큼 길어진 노후에 대비하기 위해 30, 40대마저 저축은 늘리고 씀씀이를 줄인다는 것이다. ▷이 같은 소비 부진은 저성장 늪에 빠진 한국 경제의 침몰을 더 부채질하고 있다. 한국은행은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0.8%로 대폭 낮추고 ‘0%대 성장’을 공식화하면서, 민간소비가 성장률을 0.15%포인트 끌어내릴 것으로 내다봤다. 국민이 지갑을 닫는다는 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아무리 해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 크다는 뜻이다. ‘피크 저팬’에 이어 ‘피크 코리아’ 징후가 곳곳에서 감지되는 판에 무차별 돈 풀기식 정책만으로는 닫힌 국민들의 지갑을 열 수 없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2025-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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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임수]“맛있는 밥은 늦게 돼도 좋다”

    “중국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미국을 심하게 등쳐먹었다.” “관세 전쟁이든 무역 전쟁이든 다른 어떤 전쟁이든 중국은 끝까지 맞서 싸우겠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서로 죽일 듯 치고받던 미국과 중국이 ‘90일 관세 휴전’에 들어갔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고위급 협상에서 양국이 90일간 상호관세를 115%포인트씩 똑같이 인하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이 중국산 제품에 매기는 관세는 145%에서 30%로 낮아지고, 중국이 미국산에 물렸던 보복관세 125%는 10%로 인하됐다. 시장의 예상을 뛰어넘는 ‘깜짝 빅딜’이다. ▷양국이 첫 협상부터 극적인 화해 모드에 돌입한 건 이대로 가다가는 공멸할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치킨게임 같은 관세 전쟁의 역풍으로 미국 금융시장은 달러·주식·채권 가격이 동반 하락하며 패닉에 빠졌고, 1분기 성장률은 ―0.3%로 주저앉았다. 관세 폭탄 우려에 기업들이 수입품을 미리 사재기하면서 미국의 무역 적자는 더 커졌고, 곧 마트 진열대가 텅 빌 것이라는 경고까지 나왔다. 내수·부동산 침체로 고전하는 중국 역시 대미 수출이 막히면서 공장 폐업이 잇따르고 있다. ▷속전속결 ‘휴전 담판’을 두고 양국 정부는 각각 자국의 승리라며 자축하는 분위기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이번 합의로 미중 관계가 완전히 리셋됐다”며 “가장 큰 성과는 중국의 시장 개방”이라고 평했다. 제네바 회담에 나섰던 중국 협상팀 3인방 중 한 명인 리청강 상무부 국제무역담판대표는 “중국 속담에 ‘맛있는 밥은 늦게 지어져도 좋다(好飯不怕晩)’는 말이 있다”며 협상 결과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중국 관영매체 등도 “중국의 위대한 승리”, “미국의 상호관세 남용에 처음으로 반격한 국가”라는 자평을 쏟아냈다. ▷하지만 미국 현지에서는 사실상 ‘트럼프의 판정패’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뉴욕타임스는 시진핑 국가주석의 버티기에 트럼프의 공격적 전략이 한계를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위기를 조장한 뒤 양보를 얻어내는 전략을 썼지만 중국이 고통을 감수할 의지를 보이자 관세 강경책을 철회했다”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트럼프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그는 애덤 스미스와 무역 전쟁을 벌였고 패배했다”고 꼬집었다. ▷이번 관세 휴전이 영구적 평화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관세 인하에 90일이라는 꼬리표가 달린 데다 양국의 인식 차이가 커 후속 협상이 쉽지 않을 거라는 우려가 높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 주말 시진핑과 통화할 수 있다”고 했는데, 양국 정상이 만나야 실질적인 관세 전쟁 종식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불안한 휴전이긴 해도 한국의 1, 2위 교역국인 중국과 미국의 해빙 무드에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질 일이 줄어든 건 다행이지만, 우리 발등에 떨어진 관세 폭탄은 아직 그대로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 2025-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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