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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든 싫든 우리는 트럼프의 미국과 3년 3개월을 더 동행해야 한다. 트럼프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잠시 트럼프의 눈으로 들어가서 한국을 바라보자.트럼프 정치의 핵심은 세 가지다.첫째는 팍스아메리카나를 위협하는 중국을 상대로 한 무혈 전쟁, 둘째는 만성적 재정적자와 무역적자라는 쌍둥이 적자 해결을 위한 우방국에의 전방위적 압박, 셋째는 미국 내 좌파 진지를 부수기 위한 이념전쟁이다. 미 지식인 사회 내의 좌파 헤게모니와 PC(Political Correctness)주의에 대한 트럼프의 적대감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그는 이탈리아 공산당 창시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진지화 전략처럼 곳곳이 좌편향됐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하버드대 등 주요 대학과 뉴욕타임스 등 언론, 실리콘밸리 등 진보진영의 심장부를 상대로 싸움을 벌이고 있다. 한번 건드려 보는 수준이 아니라 너가 죽나 내가 죽나 보자는 결기로 칼을 휘두른다. 트럼프가 잘하고 있다는 얘기가 결코 아니다. 미국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서 정작 미국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를 마구 훼손시키는 행태를 서슴지 않는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어쨌든 이게 현실이라는 뜻이다. 이런 트럼프에게 이재명 정권은 어떻게 비쳐질까. 트럼프 진영 핵심에 연계를 가진 미 전직 관료의 워딩을 소개한다.“‘정권이 출범하자마자 총리와 여당 대표를 다 반미 활동가 출신들이 차지했다. 국정원장에는 대표적인 자주파 인사를 앉혔다. 미군기지가 압수수색 되고, 친미파 종교지도자들(‘미국은 그들을 한국 내 반공을 지켜온 핵심 세력으로 본다’고 부연)이 소환조사 받고 있다. 주한미상공회의소 회장이 직접 나서 노란봉투법에 우려를 전달했는데도 묵살됐다. 예상대로 개성공단을 되살린다는 얘기가 나온다. 미국 주도의 대북제재 체제를 우습게 보는 것 아닌가. 제2의 문재인 아닌가?’… 대략 이런 인식이 MAGA 진영이 트럼프에게 주입시킨 한국 정권의 이미지다. 트럼프가 이를 어떻게 소화했는지는 당사자만 알지만 대략 이런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동의하기 힘들어도 이게 현실이다. 이 대통령은 냉철하게 트럼프 입장에서 역지사지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피투성이가 되어 중국 및 좌파와 싸우고 있는데 당신은 셰셰하고 있나? 우리가 수십 년 지켜준 나라라면 이럴 때 당연히 우리를 도와야 하는 거 아닌가?’이런 의구심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기 위한 획기적 태도 전환이 필요하다.물론 현재 미국의 3500억 달러 압박이 한국 정권에 대한 트럼프의 호오(好惡) 감정에 영향을 받았는지는 의심의 여지는 있어도 객관적 근거는 없다. 베테랑 통상협상 전문가의 설명이다. “트럼프의 한국 정권에 대한 비우호적 태도를 유추해볼 사례는 몇 있다. 이재명 당선후 첫 통화가 이례적으로 늦어진 점, 첫 정상회담 직전에 트럼프가 SNS에 올린 숙청 혁명 운운하는 메시지, 정상회담이 분위기는 좋았다고 했는데 동맹관계와 관세무역협상 두 주제 모두 합의문이 안 나온 점 등등이 그 예다.하지만 매크로하게 보면 미국은 한국을 콕 찍어서 공격한다기보다는 우방국인 일본 한국 유럽연합(EU)을 굴복시켜서 그 내용을 제3국, 제4국에 적용하려는 그랜드 디자인 속에 있다.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과의 협상에서 후퇴하면 앞으로 다른 나라들과의 협상에서 자기 패를 다 까고 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강경한 것이다.”이번 협상뿐만 아니라 앞으로 방위비 분담, 주한미군 역할 변경, 원자력 협상 등 숱한 난관들은 실무자들 차원에서 풀 수 있는 문제들이 아니다. 트럼프를 직접 공략해야 한다. 즉 트럼프의 시각을 최대한 우호적인 것으로 만들어 놓는 게 결과에 직결된다는 얘기다. 필수 선결조건은 한국 정권이 좌파가 아니며, 미-중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구경꾼이 아니라 미국의 든든한 동지라는 믿음을 주는 것이다. 그러면서 트럼프의 ‘거래적 관점’을 충족시킬 딜을 해야 한다.정권 주변의 자주파들을 대통령이 확실히 제어해야 한다. 특히 정동영 통일부장관이 남북 두 국가론을 외치고 다니는 건 정상적인 정부 체계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를 방치하면 북한 핵무장의 길을 완전 열어주고, 통일의 길을 막아버린 정권으로 역사에 낙인찍힐 수도 있다. 남북한은 국제법적으로는 별개 국가가 맞다. 하지만 별개의 다른 두 질서가 병존한다. 너하고 나하고는 한 가족이었고 다시 한 가족이 될 때까지 우리는 가족의 일원인 특수관계라고 하는 게 남북 기본합의서다. 김정은이 입장을 바꿨어도 우리는 불변이라고 해야만 대외적으로 북한 문제에 발언할 기반이 생긴다. 만약 동조하면 통일 탈북자 북한인권 북-중 북-러 관계 등등에 대해 한국은 아무런 상관없는 존재가 된다. 북한 급변 사태 시 중국군이 북한 땅을 점령해도 할 말이 없게 된다. 남의 일이기 때문이다.자주파가 밀어붙이고 이 대통령도 힘을 실어 준 전시작전권 전환도 위험천만하고 무책임한 질주다. 자주파 인사들 그리고 이 대통령이 전작권 시스템의 실체에 대해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지 의문이다. 현 집권당 인사들의 인식 수준을 엿볼수 있는게 전작권이 소재로 쓰인 영화 등에 대한 반응이다. 좌파감독들이 만든 영화나 드라마엔 미군이 자국 이익만을 염두에 두고 한국 국민에게 막대한 피해를 미칠 군사작전을 결정해도 한국 대통령이 속수무책인 상황들이 단골로 등장한다. 그런 영화를 보며 민주당 정치인들은 쌍수를 들고 전작권 전환을 외치는데 전작권은 그런 제도가 아니다. 전작권은 미군 마음대로 행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한미 간에는 데프콘(DEFCON·방어준비태세)의 각 단계별로 한미연합사에 배속시킬 부대를 규정한 ‘포스 리스트(Force List)’가 있다. 이 리스트엔 ‘자동배속(automatic)’과 ‘요구에 따라(requested)’의 두 항목으로 각각의 부대들이 구분돼 있다. ‘요구에 따라’로 규정된 부대는 연합사령관의 배속 요청을 한국 측이 수용해야지만 배속된다. 데프콘 격상은 한미 양국 합의로 정한다. 한국 대통령이 데프콘 격상에 동의 안 하면 아예 지휘권이 넘어갈 수 없는 시스템인 것이다.그리고 연합사령관은 양국 합참의장으로 구성된 군사위원회(MC), 그리고 그 위로 양국 대통령이 대표하는 ‘국가통수 및 군사지휘기구(NCMA)’의 지휘를 받게 된다. MC와 NCMA는 양국 간 합의제여서 항상 양국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어느 한쪽의 반대가 있으면 연합사령관은 아무 작전도 할 수 없다.연합방위체제를 구축한 나라들은 다 전시 단일지휘체계를 택한다. 서유럽 국가들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참여해 미군인 나토 사령관에게 지휘권을 맡기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영국 프랑스 독일 캐나다 등 32개 국이 다 국방자주권을 포기한 나라들인가?사실관계와 국제현실이 이런데도 수십 년 전 낡은 패러다임에 고착된 자주파 인사들은 끊임없이 대통령에게 ‘작전권도 뺏긴 나라’ ‘우리 민족’ ‘미중 균형론’을 불어넣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좌파든 우파든 투표에 이긴 쪽이 노선을 정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대통령에게 외교안보는 그런 선택의 자유가 없다. 국익을 생각한다면 선택지는 하나고 정답은 확실히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23일 유엔총회에서 7번째 기조연설자로 나선 이재명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국제사회 복귀”를 선언했고, 더불어민주당에서는 “민주주의 복귀를 알린 컴백 무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는 용비어천가가 쏟아졌다.사안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고 객관적으로 규정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대한민국이 언제 국제사회에서 밀려난 적이 있는가? 10개월째 내란 내란 외쳐대는데 윤석열이라는 광인의 계엄은 6시간짜리 소극(笑劇)으로 끝났고 헌정질서는 그날 새벽에 복원됐다. 계엄 전모를 밝히고 엄벌하는 것과, 이걸 과장해서 나라 전체가 내란세력에 의해 계속 흔들리는 것처럼 안팎에 선전선동하는 것은 별개다.대통령은 민주주의 복원을 선언했지만 자유민주주의 헌정질서가 오히려 집권세력에 의해 위기로 내몰리는 게 작금의 한국 상황이다.민주당은 절대 다수당이 된 이래 매일매일 민주주의의 벽돌 한장씩을 뜯어내더니 이젠 아예 기둥을 무너뜨리려 달려들고 있다.정청래 대표, 추미애 법사위원장이 쏟아내는 표독스럽고 저질스러운 말들은 연일 국민의 눈과 귀를 고문한다.정 대표는 “대통령도 갈아치우는 마당에 대법원장이 뭐라고”라고 했는데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 수준의 공부만 했어도 내뱉을 수 없는 무식한 논법이다. 대통령을 갈아치우는 건 헌법이 존중되는 공화국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데, 그 헌법의 핵심이 뭔가. 바로 삼권분립과 사법부 독립, 언론 자유다. 대통령도 갈아치울 수 있는 바로 그 체제이기 때문에 대법원장을 정치권력 마음대로 쫓아낼 수 없다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상식 아닌가.“윤석열 오빠”에 이르면 그 저질스러움에 귀를 막게 된다. 만약 발언 당사자인 추미애 위원장 등 민주당 여성 정치인들을 향해 누군가 민주당 출신 지도자의 이름을 앞에 붙여 ‘○○○ 오빠’식으로 표현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정, 추는 진작부터 그런 류의 사람들이니 그러려니 쳐도, 이를 용인하고 아무도 문제제기 하지 않는 민주당이라는 조직이 더 우려스럽다. 공당은 물론이고 회사 대학 동아리 등에서 누군가 그런 언행을 한다면 당장 퇴출되거나 동료들로부터 버림받을 것이다. 저들의 상스러운 언행이 DJ 김근태 등으로 상징되는 진보정치의 전통과 가치를 얼마나 훼손시키는지 민주당 원로나 의원들이 모를리 없을텐데도 아무도 꾸짖지 않는다.문제의 심각성은 현재 민주당의 폭주가 몇몇의 일회성 막춤에 그치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그들의 오버액션 기저에는 거대한 플랜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좌파진영 내부에 형성돼 있는 암묵적 합의이며 플랜이다.집요한 사법부 공격의 1차 목표 중 하나는 국민 누구나 짐작하듯 이 대통령의 퇴임 후 사법 리스크 탈출이고, 또 하나는 내란죄 유죄 선고 확률을 100%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계엄이 정신지체아 수준 사회적 지능을 지닌 광인들의 자폭행위였으며 윤석열 전 대통령이 법정 최고형을 받아도 마땅한 죄를 지었다는 것과 별개로 그게 내란죄에 해당하는지는 법리적으로 100% 장담하기 어려운 까다로운 문제다. 만약 윤석열 등에게 아무리 중형이 선고되어도 계엄법 위반, 직권남용 등만 인정되고 내란은 미수범 정도로 처벌된다고 가정하자. 내란 프레임을 주구장창(晝夜長川) 끌고 가려는 여권의 기본 정치 구도가 흔들리게 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지귀연 판사를 집요하게 공격해대고 특별재판부에 집착하는 것이다.여권 플랜의 2차 목표는 진지전(陣地戰)의 완성을 통한 장기집권 시스템 구축이다. 한국 사회는 1980년대 이래 학계 문화계 교육계 언론 노동계 등에서 좌파진영의 진지 구축이 공고히 이뤄져 왔다. 작금의 사법부 공격은 그 진지전의 완성을 목전에 둔 중대 전투다.입법 행정 사법 3권에 이어 내년 지방선거에서 지방권력도 장악한 뒤 앞으로 모든 주요 선거에서 영구적으로 과반수를 차지할 가능성을 높여줄 상부 및 하부 구조를 구축하는 게 좌파진영의 목표다.선거를 통한 장기집권이 반드시 국정 운영 성적에 연동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베네수엘라 헝가리 터키 등 많은 나라에서 현실로 나타나 왔다. 나라 경제가 망가져도 사법부 언론 문화계 등을 장악한 채 돈을 뿌리는 정권이 이기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남의 건물을 빼앗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외형상 소송 등의 법적 절차를 통해 뺏는 것이고, 또 하나는 협박하고 괴롭혀 스스로 건물에서 나가게 하는 것이다. 집권세력은 두 방법을 병행해 대법관 증원과 더불어 대법원장을 겨냥한 괴롭힘 강도를 계속 높일 것이다. 머잖아 개딸들이 출퇴근 길목 등에서 시위를 벌이는 장면이 펼쳐질 수 있다.5공 때도 이런 일은 없었다. 이승만, 유신 정권에서도 대법원장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공격한 적은 없었다. 사법부 장악이 이뤄지면 다음 단계로는 문재인 정권이 2018년 1월 시도했듯 헌법에 명시된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라는 국체(國體) 규정에서 자유를 삭제하려 할 것이다.지식인들이 더 이상 침묵해선 안 된다. 이는 진영의 문제가 아니다. 판사 출신 변호사들, 변호사단체, 헌법학자들의 침묵은 집권세력의 헌법 침해를 방조하는 것이다.물론 모든 게 집권세력의 뜻대로 이뤄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의회 절대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고, 대중문화 대학 방송 등 여러 부문에서 좌파의 진지화가 이뤄진 것은 사실이지만 국민은 여전히 50 대 50의 균형추를 유지하고 있다.권력 도취자들의 폭주는 결국 제동이 걸리고 영구집권 시스템 구축은 망상으로 그치겠지만, 그 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와 공동체가 받을 상처는 누가 보상할 것인가.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권력자가 뭐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시대’, 그런 암흑기는 고대나 중세의 절대왕권 시대에만 있었던 건 아니다. 아직 어린 중고교 시절이었지만 1980년대 초반 TV에서 쏟아져 나오는 국보위(국가보위입법회의) 뉴스들을 들으며 느꼈던 황당한 느낌은 지금도 기억난다. 당시 국보위는 집권세력이 원하는 건 뭐든지 법률로 만들어냈다. 1980년 10월 27일 출범한 국보위가 6개월간 만들어낸 법률은 무려 189건에 달했다.대학 신입생 시절 시위를 하다 잡혀간 선배들의 재판을 방청하면서 느꼈던 감정도 지금도 선명하다. 기계처럼 틀에 박힌 판결문을 읽으며 유죄를 때린 뒤 도망치듯 법정 뒤로 사라지던 판사들의 초라한 뒷모습이 생생히 떠오른다.최고 권력자가 입법 행정 사법 3권을 다 장악했던 무소불위 절대권력의 시대는 38년 전 종식됐다. 그런데 악몽을 꾸는 걸까. 데자뷔일까. 요즘 여당에서는 ‘국보위 마인드’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행태와 발상들이 쏟아져 나온다.특검이 청구한 구속영장이 몇 건 기각되니까 특별재판부를 만들려 한다. 내가 원하는 대로 결론이 나오도록 재판부를 아예 직접 인선하겠다는 상상 초월의, 정상적인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꿈도 꿀 수 없는 발상이다. 지금이 지리산에 반란군이 창궐하고, 군부 내 윤석열 추종 세력들이 쿠데타를 도모하는 그런 준전시 내전 상황이라는 환각에 빠져 있지 않는 한 어떻게 재판부를 자신들이 직접 만들겠다고 할 수 있는가.임기가 보장된 특정 기관장을 쫓아내기 위해 아예 그 기관을 해체하고 간판만 바꿔 새로 출범시킨다는 발상도 입법권을 만능 프라이팬 정도로 여기는 발상의 산물이다. 45년 전 국보위는 쌍방이 있는 쟁점들에서 한쪽 편을 일방적으로 편드는 입법을 남발했다. 대표적 예가 노동 관련법이다. 제3자 개입 금지, 산별노조 금지 등 노조 활동을 옥죄는 쪽으로 법 조항을 양산해줬다. 요즘 정청래 대표의 민주당은 정반대 방향에서 노란봉투법 등 한쪽의 손만 일방적으로 들어주는 법안들을 만들어낸다. 우리 세상이 됐으니 우리 원하는 거 전광석화로 다 해버리고, 다시는 뺏기지 않을 굳건한 지지기반 토양을 다지겠다는 발상이 45년 전과 닮았다. 다수결과 법률이라는 형식만 밟으면 다 법치주의라는 착각 속에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요즘 기업인들의 한숨을 들어봤는지 궁금하다. 최근 친분 있는 몇몇 중견 기업인들과 통화해봤다. 대부분 자수성가해서 한강 투신의 고비를 몇 번씩 겪으면서 어렵게 회사를 키워낸 사람들이다. 통화한 기업인들 전부가 해외로 공장을 이전하거나 사업을 접고 싶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형 로펌 관계자는 미리 클라이언트 계약을 맺자는 회사들이 줄을 잇는다고 전했다. 야당의 존재를 아예 인정하지 않으려는 점도 닮았다. 5공 초 민정당과 초록동색의 야당들만 있었듯, 요즘 좌파 인사들 입에서는 현 좌파진영 정당들끼리 진보 보수를 나누는 새로운 이념 구도 청사진이 서슴없이 나온다. 즉, 현재 1∼10의 이념 스펙트럼에서 6∼10은 정치적으로 절멸시키고 1∼5가 좌우 구도를 형성하겠다는 것이다.이쯤 되면 국민은 물을 권리가 있다. 당신들이 꿈꾸는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가를. 입으로는 민주주의를 말하지만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소수 의견을 존중하고 토론을 통해 접점을 찾아가는 숙의민주주의 △삼권분립 △권력견제라는 요소들은 다 내팽개쳐졌다.엄혹한 독재시절에도 온존했던 야당 배려 관행들마저 사라졌다. 이젠 야당이 추천한 야당 몫 자리의 승인마저 거부한다. 급우들 도시락 반찬을 뺏어가는 걸로 모자라, 아예 너는 내일 뭘 싸오라고 명령하는 일진 행태다.야당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여당은 내란과의 전쟁을 이유로 든다. 내란세력 척결이 우리 사회의 최대 과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12·3 계엄은 주도 세력과 가담자 99%가 직후에 다 체포됐다. 국민적 심판은 탄핵과 대선으로 이뤄졌고, 사법적 심판은 사상 최대 규모의 특검과 사법부가 이미 진행하고 이다. 아직 척결 못한 내란 세력이라고 해봤자, 비유하자면 마을에 내려온 빨치산에게 자의든, 강압에 의해서든 주먹밥을 제공했다는 의심을 받는 마을 주민 몇 명 정도일 것이다.그럼에도 정 대표 등이 끈질기게 내란세력 척결을 외치는 것은 내년 지방선거까지도 이 프레임을 끌고 가며 계속 정치적으로 이용하겠다는 전략일 것이다. 과대포장해서 집요하게 선전선동하는 것은 좌파의 골수 수법이니 새삼스러울게 없는 일이긴 하다.절대권력 독재시절을 연상케 하는 발상과 행태가 속출하는 것은 그들이 입으로는 민주화 운동 출신 운운하지만 막상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도 훈련도 전혀 안 된 사람들임을 스스로 증명해준다.혁명 정부적 발상, 입법 독주가 지난해 4월 민주당에 압승을 안겨준 민심이 바란 것이었을까? 지난해 총선은 투표 한두달전만 해도 국힘의 압도적 승리가 예측됐었다. 민주당의 압승은 100% 윤석열 김건희 부부가 선사한 선물이었던 것이다. 필자는 어떤 일이 벌어지면 여야, 좌우를 바꿔 대입시켜서 생각해보는 걸 습관처럼 한다. 예를들어 계엄 사태가 벌어지면, ’만약 윤석열이 아니라 문재인이 2019년 조국 사태같은 위기 상황에서 계엄을 했다면 나는 어떻게 판단했을까‘하고 생각하는 식이다. 샤넬백 등 김건희 추문이 잇따를때는 김건희 이름 대신에 김정숙을 대입해보곤 했다.이 대통령과 민주당도 역지사지 해보기 바란다. 만약 지난해 총선 당시 윤 부부가 진정성 있게 국민에게 엎드려 사과하며 엄정한 법의 심판을 받겠다고 약속하고, 개과천선한 겸손한 모습을 보였고 그 결과 국민의힘이 압승을 했다고 가상해보자.‘공산전체주의’를 유달리 강조했던 윤 대통령이 총선 승리로 국민의 위임을 받았다며 민주당을 종북세력과 연계된 정당이라고 공격하고, 대체근로 허용, 노조에 대한 징벌적 배상 강화, 사법부 내 좌파 척결 등을 밀어붙였다면 민주당은 다수결이니까 법치주의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라고 고개만 끄덕일 것인가.문학평론가 홍사중 씨는 권력은 술처럼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고 했다. 취할수록 더 마시듯 권력도 커지면 커질수록 더 취하게 된다. 천박한 권력일수록 주정꾼처럼 힘자랑을 못 참는다. 하지만 권력을 모두 움켜쥐려는 자는 반드시 모두 다 뺏기고 마는 게 세상의 이치임을 역사는 보여줘 왔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집권 두 달여, 이재명 대통령의 성향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요약하면, 자기 이익과 생존을 위해선 수단 방법 염치 상식 도덕 원칙에 구애받지 않으며, 오로지 핵심 지지층 결속을 최우선 과제로 추구한다는 것이다. 취임 첫날 인사(人事)에서 상대적으로 온건하고 합리적 인물들을 기용해 “의외네”라는 반응과 기대를 불러일으켰지만 그때뿐이었다. 자신의 범죄 혐의를 변호해 줬던 변호사들을 고위직에 두루 앉히고, 민변 전교조 민노총 등 진영 실세 그룹 출신들과 좌파 성향 학자들의 기용이 잇따른다.좌파 숙원 현안들에 대해 한 발 떨어져 중립적인 스탠스를 취하는 듯하다가도 결국엔 좌파 진영 강경파들의 목소리에 호응하는 쪽으로 결론 내린다. 선택의 잣대는 국익도 이념도 도덕도 원칙도 아니다. 오로지 표를 많이 가진 사람들과 지지층에의 화답이다.취임 두 달 밖에 안된 시점에 조국 윤미향 사면복권이라는 강수를 둔 데 대해 대통령 본인의 뜻인지, 휘둘려 끌려간 것인지 상반된 분석이 나오지만, 어차피 결론은 같다. 자기 이익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이해득실 계산의 산물인 것이다. 득(得)은 조국을 풀어줌으로써 친문 세력을 포섭하는 동시에 여권 내 머리 큰 사람들의 상호 견제 경쟁 구도를 만드는 효과를 노렸을 것이다. 윤미향 사면은 좌파 시민단체들에의 빚갚기다.실(失)은 중도와 온건 보수층의 지지 철회인데, 지지율이 빠져도 어차피 그들이 갈 곳이 없으므로 곧 만회할 수 있다는 계산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영리한 계산에서 빼먹은 게 하나 있다.그것은 바로 리더십의 핵심인 신뢰 자본을 까먹었다는 점이다. 리더에 대한 신뢰는 품성 도덕성 원칙존중 공선사후 등이 축적돼 형성되는데, 윤미향 등의 사면은 혹시나 하고 기대를 걸었던 온건 보수층에 “역시 유유상종”이라는 실망을 안겼으며 회복이 좀처럼 힘들 것이다. 사법정의와 공동체 도덕성을 거꾸로 진창에 처박음으로써 정권 스스로를 윤미향과 동급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1987년 민주화 이래 역대 정권의 사면복권 때마다 논란이 일었지만 이번처럼 비도덕적이고 파렴치한 사면은 없었다.이 대통령은 주사파 운동권 출신이 아니다. 다만 성공을 위해, 생존을 위해 좌파 활동가들과 연을 맺고 서로 밀어주며 커왔으며 그런 한편으로는 실용주의자로 자처해 왔다. 그런 그가 집권 두 달 만에 강성 지지층이 바라는 방향으로 좌향좌 신호등을 켠 것은 보수 진영이 초토화된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아무리 왼쪽으로 달려도 이에 반발해 이탈할 중도층과 온건 보수층을 흡인할 대항마로서의 보수정치 대안이 전무하기 때문이다.그러니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서도 떳떳해하는 운동권 속성이 재연된다. 방송법 강행을 보라. 민영방송까지 경영진 교체를 강제하며 ‘당장 다 우리 편으로 바꿀 거야’란 의도를 숨길 시늉도 안 한다.물론 이 모든 건 충분히 예상 가능했고 경고됐던 상황이다. 그러므로 그런 선택을 한 국민이 감당해야 할 몫이며, 길게 보면 언젠간 정반합 논리로 바로잡힐 것이다. 하지만 외교안보만은 다르다. 먼 훗날 바로잡힐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는, 한번 삐끗하면 회복하기 힘든, 국익과 국민 생존에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트럼프 백악관 내부 기류에 정통한 미국 인사의 최근 전언이다.“트럼프는 이재명에 대해 상당한 불신을 갖고 있다. 당선됐다는 소식에 이제 머잖아 제2의 정의용이 와서 뱀의 혀를 놀려 대겠지, 어떻게 나를 속이려 할까. 하지만 이번엔 안 속는다. 김정은은 내가 잘 안다…그런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서 나오기 시작한 게 주한미군 역할 재조정이다. 집권 1기 때는 미군을 빼겠다고 했지만 의회가 수권법안으로 지상군 감축을 못하게 하니, 역할 재조정으로 콘셉트를 바꾼 거다. 대만 위기 등을 명분으로 뺏다 넣었다 하는 건 내 마음대로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런 생각을 품은 채 고양이가 쥐를 바라보듯 한국 정부가 어떻게 나올지 팔짱 끼고 지켜보자는 분위기다.”그런 기류의 영향인지 국내외 일각에서도 미 지상군의 주둔 의미를 평가절하하는 논리가 나오기 시작하는데 매우 위험한 시각이다. 한반도에서 지상군 주둔은 정치적 상징적 의미가 심대하다. 유럽이나 일본의 미군과 다르다. 주한미군의 지위가 흔들리는 조짐이 생기면 먼저 외국자본이 빠져나갈 것이다.이 대통령이 국내 정치에선 좌파 지지층의 손을 잡는 게 이득이라고 계산했을지라도 외교에선 다르다. 좌파 진영의 의중에 은연중 압박감을 느껴 어정쩡한 스탠스를 취하면 바로 트럼프에 되치기당할 수 있다. 더구나 트럼프는 싱가포르에서 한 번 당했다는 생각에 벼르고 있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문재인의 업보까지 감당해야 하는 어려운 입지인 것이다.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라 했다. 당당한 외교로 국가 자존심을 지키고 싶지 않은 지도자는 없다. 하지만 외교는 현실에 근거해 행동해야 한다. 국익을 위해선 상대의 가랑이 밑이라도 지나갈 수 있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80년 전 이승만 전 대통령이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양 갈래에서 명확히 나라의 길을 선택해 오늘날 대한민국을 가능케 했듯이, 한미동맹 강화의 길로 손잡고 가야만 한다.국내 정치에서 좌향좌 신호등을 켰을지라도 외교안보에서만큼은 진짜 실용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줘야 할 때다. 임기 후 이 대통령을 평가할 주체는 소수의 좌파 이념가들이 아니다. 북한도 중국도 아니다. 바로 국민 전체와 역사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Character Above All’(캐릭터 어버브 올·‘무엇보다도 품성’).미국 대통령 10명의 성공과 실패 요인을 분석한 책의 제목이자 결론이다(번역판 제목은 ‘국민을 살리는 대통령 죽이는 대통령’). 지도자의 성패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자질은 인성 품성이라는 것이다. 윤석열 정권의 참담한 붕괴 과정을 목도한 한국인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결론이다.대통령뿐만 아니다. 정치인 관료 기업인 등 크고 작은 조직을 끌어가는 리더에게 품성만큼 중요한 자질은 없다. 품성은 후보 시절 이재명의 확장성을 가로막는 아킬레스건이기도 했다. 두 차례의 대선에서 국민 절반이 이재명 후보를 거부하며 꺼림칙해했던 대목이 품성이었다. 개인 과거사에 겹쳐 이른바 ‘개딸’(개혁의딸)들의 거친 행태, 후보 주변 인사들의 상스럽고 무책임한 언행이 오버랩되면서 인성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킨 것이다.다행히 이 대통령은 취임 후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리더십을 보이고 있으나 한편에선 공격적이고 입이 험한 성향의 인사들이 전면으로 나서려는 조짐이다. 여당 대표 경선에 나선 정청래 의원은 더불어민주당의 거친 언행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대표 출마 포부도 “싸움은 내가”다. 협치와 대화에 앞장서야 할 여당 대표 자리의 미션을 거꾸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정치를 처음 배울 때부터 그렇게 내면화됐는지 포털사이트에 정리된 ‘정청래/비판 및 논란’을 보면 그의 막말 논란 리스트는 제목만 다 읽으려 해도 눈이 아플 만큼 길다. 그런 정청래의 이미지가 이 대통령에 겹쳐 국민에게 비쳐진 게 2023년 6월 20일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의 교섭단체 대표 연설 때였다. “땅!땅!땅!~땅파세요!”라고 연신 고함치는 정청래 바로 옆에 앉은 이재명 대표는 말리는 대신 연신 미소만 짓는 모습이었다. 차관급 새만금개발청장에 임명된 김의겸 전 의원도 설화(舌禍) 리스트가 길기로는 빠지지 않는다. 21대 국회 입성 이후 온갖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김남국 전 의원도 대통령실 비서관으로 복귀했다. 입이 거칠거나 공격적이었던 민주당 및 좌파 진영 인사들을 꼽으라면 한결같이 메달권에 들 인사들이다. 그들의 이력에 따라다니는 긴 논란 리스트는 그만큼 경박하고 공격적이고 무책임하며 독선적인 언행의 결과물이다. 강선우 논란도 핵심은 품성이었다. 어느 사회 어느 조직이나 품성이 고약한 사람들이 있지만, 최근 수년간 민주당과 좌파 진영은 그런 이들의 인력풀(Pool)이 유난히 크다. 후보 시절 이 대통령이 곤경에 몰리는 상황이 잦았던 만큼 앞장서서 방패막이가 되어준 강경파들, 백척간두에서 삭풍소리에 시달리던 귀에 달콤한 아부를 들려줬던 이들이 양산된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공격수가 유용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일선 행동대원의 어깨에 그릇(캐퍼시티)보다 넘치는 권력의 견장(肩章)을 달아주면 상황은 달라진다. 정청래는 국회 법사위원장이 된 직후인 지난해 6월 청문회에서 전직 국방장관과 현역 장성 등 증인들을 학생 벌주듯 복도로 내쫓았다. 골수 좌파 지지자들은 박수를 쳤겠지만, 윤석열 김건희 부부에게 극심한 환멸을 느껴 국힘 지지를 철회한 수십만 온건 보수 중도 시민들로 하여금 “역시 민주당은 안 돼”라고 고개를 저으며 다시 국힘 쪽을 바라보게 하는 역효과를 발휘했다. 입이 험한 강경파들의 권력 진출이 많아지면 이 대통령이 계획하는 중도 확장에 찬물을 끼얹을 사건들이 양산될 가능성이 커진다.강성 팬덤 조직도 정리해야 한다. 노사모 이후 여러 지지모임이 있어 왔지만 이재명 대표 시절 개딸들의 행태는 일반 국민에게 매우 부정적으로 비쳐졌고, 후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덧칠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지금의 민주당 이미지는 과거 정통 야당과 너무도 다르다. YS DJ 시절엔 대(對)정부 투쟁은 강력히 하면서도 품격을 잃지 않는 진보 정치인들이 많았다. 그 시절이라고 인성 낙제점 인사들이 없었겠냐마는 당의 최고 실력자, 어른들이 이를 통제했다. 하지만 튀어서 강성 지지층의 환호를 이끌어낼수록 텃밭 공천 가능성이 커지는 환경이 갈수록 심화된 탓에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게 된 것이다.대통령 취임초 지지율이 60%를 넘은 것은 조심해서 인사하고 균형을 잡으려 노력한다는 인상을 줬기 때문이다. 위성락 정성호 강훈식 같은 상대적으로 온건하고 합리적이라는 평을 받는 인사들의 중용이 지지율 상승에 결정적 몫을 했다. 그러다 강선우 이진숙 등 몇 명 잘못 고르니까 상승세가 주춤해졌다.타협과 중용(中庸)의 미덕을 전혀 모르는 이들이 중용(重用)되면 정권이 품격과 거리가 멀어지고, 민주주의 건강성 지수는 점점 타락하게 된다. 정권 획득을 위해 질주하던 시기 진영 전체로는 거친 공격수가 필요했을지 몰라도 대통령 핵심 참모, 장차관으로선 배제해야 한다. 정치는 적을 이기는 기술이 아니라 국민의 마음을 얻는 예술이다.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을 ‘주머니 속의 송곳이 드러나듯 인재는 결국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는 원래의 뜻과 다르게 원용하면, 모난 인성은 주머니 속 송곳이나 오물처럼 다 드러나게 마련이다. 선거나 경선 때 아무리 넥타이 매고 점잖은 척해도 결국은 본성대로 가게 된다.바로 앞사람이 품성 때문에 망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취임 초 대미·대일 관계를 잘하고 원전 수출 등 실적을 냈는데도 왜 지지율이 곧 20%대로 떨어져서 바닥을 헤맸는지 생각해 보라. 오만한 태도로 큰소리치고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화를 내고, 본인이나 부인을 향한 비판과 충고에 귀를 닫은 채 강성 유튜브만 탐닉하다 결국 참담한 결말을 빚었다. 만에 하나 이 정권에서 막말과 공격 성향의 인사들이 득세하는 현상이 극심해져 국민이 ‘유유상종’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되는 상황이 된다면 대한민국으로서는 큰 불행이 될 것이다. 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문재인 우원식 김민석 정청래 등 여권 주요 인사들이 총출동한 가운데 지난 주말 인천에서 열린 김어준 콘서트는 상당수 국민이 잠깐 잊고 있었을 ‘이재명 저수지’의 본질을 상기시켜 준다. 대선은 대통령 한 사람만 뽑는 게 아니라, 국가라는 거대한 논에 물을 댈 저수지(인재 Pool)를 선택하는 일이다. 유권자가 김문수, 이준석 저수지 대신 ‘이재명 저수지’를 택함에 따라 이재명과 민주당이 지닌 인물 저수지에서 수많은 물고기가 5년간 공직을 차지하거나 권력 주변에서 입김을 미치게 됐다.그 저수지 속에는 위성락(국가안보실장) 정성호(법무장관 내정자) 같은 온건하고 신망 높은 인물들, 그리고 이번에 등용된 기업인들 같은 테크노크라트들만 있는 게 아님을 김어준 콘서트는 새삼 일깨워 준다.더불어민주당 정권의 저수지에는 십수년간 온갖 음모론과 괴담을 확산시키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공격해온 선동 선전가들, 백낙청류의 원탁회의 멤버들, 민노총 전교조 시민단체들, 경기동부연합 출신들, 문재인 정권에서 단물을 빨아먹은 운동권 출신 정치꾼 등이 헤엄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신중하게 붕어 잉어 위주로 첫 조각을 했지만 물속에는 블루길 배스 등 미칠 듯한 포식력을 지닌 생태계 파괴형 잡어들, 괴어(怪魚)들이 자기들 세상이 도래했다며 흥분해 지느러미를 퍼덕이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 대통령이 ‘이제 나 하고 싶은 대로 다해도 되겠다’는 자만심에 빠져 ‘피곤한 균형잡기’를 팽개치는 순간 잡어들이 우수수 수면 위로 튀어 오를 것이다.권력자가 절제하고 균형을 잡는 것은 고도의 노력과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제왕으로 변질되는 것은 한순간이다. 위태로운 균형 행보는 언제 깨질지 모른다. 이 정부가 그런 실패의 길로 접어들지 않도록 견제하는 데 필요한 게 강한 야당의 존재다.하지만 나머지 절반의 국민을 대변해야할 야당은 좀비 상태가 된 지 오래다. 차라리 소멸되면 처음부터 다시 재건을 할 수 있는데 지역 텃밭에 산소호흡기를 대고 있어 소멸도 안 된다.국민의힘은 민주당의 재기 과정을 일부 참고할 필요가 있다. 2022년 대선 패배 후 민주당은 일극 체제를 만들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질주해 왔다. 물론 이재명 정권 탄생은 99% 윤석열 김건희 부부의 공헌이지만, 자신들을 무소불위 절대 권력자로 착각해 황제놀음에 빠져 있던 ‘광인 부부’를 탄핵의 함정으로 빠뜨린 집요한 자극 전략과 입법독재 폭주는 민주당이 분열 없이 단일대오로 움직였기에 가능했다. 위기가 닥치면 우파는 더 분열하지만 좌파는 똘똘 뭉치는 특성을 보인다.국힘 재건의 최우선 과제가 ‘윤석열의 완전한 청산’을 통한 단합임은 삼척동자도 안다. 그러나 현실에선 딜레마가 크다. 보수의 자격을 잃은 세력까지 껴안고 갈 수는 없으므로 도려내야 한다. 그런데 자칫하면 몸통 거의 전부를 도려내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윤석열 청산 작업에서 계엄과 탄핵을 분리해서 다뤄야 한다. 계엄과 윤 부부를 옹호하고 투표일까지도 윤 청산을 거부했던 옛 지도부와 윤핵관 출신 인사들은 다 청산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탄핵 찬반은 다르다. 계엄을 찬성하는 국민은 거의 없지만 탄핵은 찬반 여론이 6대 4 정도로 갈렸다. 탄핵 반대에 선 이들 가운데는 계엄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탄핵이란 국민의 주권 행사를 무효화시키는 것이며 이재명 정권 창출을 뜻하므로 고개를 저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외과적 수술은 계엄을 옹호한 세력을 정조준해 정밀하고 신속하게 이뤄져야 한다.국힘이 윤석열이라는 오물을 깨끗이 씻어 버리지 못하면 국민이 국힘을 버린다. 하루속히 당 강령에 윤석열 정권의 완전한 청산을 명기해야 한다. 즉, 윤 부부의 권력 남용과 독선, 당 장악, 계엄, 계엄 후 당 지도부의 윤석열과의 단절 실패까지를 모두 기술해 보수 정당사 최대의 오점으로 규정하고, 당원과 국민을 배신한 것을 처절히 반성하며 이 교훈을 바탕으로 다시 태어나겠다고 명기해야 한다. 그렇게 윤석열의 강을 건넌 뒤엔 계파 간의 비방전도 멈춰야 한다. 다 제 눈 찌르기다.당 대표는 차기 대권과 100% 무관한 인물 가운데 당원과 국민의 존경과 신뢰를 받을 수 있고 보수 이념과 시대 흐름에 정통한 인사가 전권을 행사하도록 해야 한다. 외부에 문호를 개방해 추대하는 길도 열어야 한다. 차기 대권과 무관한 사람이어야 선거에 제 사람 심기를 안 하고 당 재건에만 집중할 수 있으며, 당내 분열에 계파를 불문하고 엄한 채찍을 휘두를 수 있다. 국힘의 절실한 과제인 세대교체도 젊은 정치인들의 자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므로 대표가 강한 의지로 세대 물갈이를 해야 한다. 혁명적 개혁을 위해 과도기적 일극 체제가 필요한 것이다.대선주자 충동구매는 더 이상 없어야 한다. 정책이든 인선이든 대중적 인기만을 중시하는게 정치적 포퓰리즘인데 대표적 실패 사례가 윤석열 영입이었다. 부인 리스크와 특수부 검사 시절의 거친 행태가 법조계에선 다 회자됐었는데 국힘은 내부 토론이나 인성 검증 한번 없이 모셔왔다. 수십년 전통의 정당에서 있을 수 없는 가벼운 정치였다.앞으로는 당과 더불어 커오며 인성이 관찰된 사람, 보수주의 철학과 이념을 학습한 사람, 그리고 세계의 격변을 통찰하는 훈련을 받은 사람을 검증하며 키워야한다. 반짝 인기가 아니라 이념 철학 정책방향 리더십 성정에 대한 신중한 평가를 바탕으로 인물을 내세워야 한다.국힘은 당이 국민에게 버림받든 말든 내 텃밭만 안전하면 상관없다는 사람들이 다수를 형성하는 좀비같은 존재가 됐다. 윤석열 부부가 구치소로 들어가 대중의 기억에서 잊혀지고, 민주당 정권 저수지 속의 강경 저질 인물들의 발호 같은 외부적 변수만을 기다리는 천수답 신세다.지난 3년간 지도부나 중진으로 당 운영에 관여한 이들은 자신들이 국민에게 얼마나 큰 배신감을 안겨줬는지, 보수 진영에 얼마나 큰 피해를 입혔는지 석고대죄해야 한다. 윤석열과 국힘의 행태가 몸서리치게 싫으면서도 표를 준 보수 유권자들의 심정을 헤아린다면 텃밭에서 금배지 연장만을 도모하며 웰빙 세력으로 온존하려는 그런 뻔뻔함은 도저히 가질 수 없을 것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대선 이후 뉴스와 담을 쌓고 지내는 사람들이 많다. 모임에서도 정치 얘기는 못 꺼내게 한다. ‘대통령 이재명’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싫은 것이다.역대 대선에서 어떤 유력 후보를 안 찍은 사람들이 그 후보에게 품는 적대감의 강도·농도를 측정할 때 후보 이재명에 대해서만큼 비(非)지지자들의 적대감이 큰 경우는 없었다. 전체 투표자 중 49.49% 즉 1731만 명이 김문수 이준석에게 표를 줬다. 이 중 상당수는 이재명이 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에서, 또는 어차피 이재명이 이기는 선거라 해도 득표 격차를 가능한 한 줄여야 폭주를 덜할 것이라는 절박감에서 던져진 표다.이 대통령이 국민 절반에겐 절대적 지지를 받으면서 나머지 절반에겐 혐오 대상이 된 이유는 누구나 안다. 하나는 개인적 신상, 인성 문제다. 피선거권 박탈형이 사실상 확정된 사람이 변칙·우회적 수단으로 권좌에 올랐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는 국민이 절반에 달한다. 정직이 거짓말을 이기고, 정도(正道)가 변칙을 이긴다는 가치관이 일그러졌다고 한탄하는 사람도 많다. 국민 절반에겐 전혀 문제가 안 되는 문제가 나머지 절반에겐 용납하기 힘든 흠결로 여겨지는 게 우리 사회의 현실인 것이다. 둘째, 이 대통령의 이념적 성향과 국정 방향에 대한 불신이다. 이는 정치인 이재명을 오랫동안 둘러싸고 지원해온 세력들에 대한 불신에 근거한다.모두의 지도자여야할 대통령이 국민 절반으로부터 심정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국가적 불행으로 시급히 치유가 필요하다. 하지만 인성에 대한 평가, 범죄 혐의로 인한 거부감은 당장 해결할 길이 없다. 범죄 혐의를 없애주는 법을 통과시킨다해서 불신이 사라질 것도 아니고, 형수욕설 같은 과거의 일을 되돌릴 수도 없다.그런데 이런 거부감은 길게, 크게 보면 차차 사라질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즉 “예상 밖이네?”라는 반응이 나올 만한 국정 사례가 쌓여가고, 온건하고 소통이 원활한 국정 운영이 이어지면 거부감이 컸던 만큼 오히려 만족도가 높아질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자신이나 가족의 이익이 걸린 사안에 대해 공선사후를 지키는 결정들이 나오면 불신은 급속히 줄어들 것이다.이를 위한 첫걸음으로 ‘한쪽은 감옥 한쪽은 권좌’인 극단의 담장 위를 걷던 시절 생존을 위해 사법부 등 국가 시스템을 공격하고 법을 바꾸려 했던 시도들을 다 거둬들여야 한다. 어떤 포장을 해도 국민의 눈엔 본질이 다 보인다.결국은 우려를 기우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등 돌린 국민의 마음을 녹이는 길인데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문재인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3파(派)를 멀리하면 된다. 그 3파는 강경파, 이념파, 지역파다. 첫째, 강경파. 어느 시대에나 권력이 창출되면 충성 과시에 혈안이 된 강경파들이 달라붙어 아부 경쟁을 벌이기 마련이고 결과는 역사가 선명히 보여줘 왔다. 정권을 망칠 강경파가 누군지 대통령 본인이 잘 알 것이다. 둘째, 이념파. 국민은 이 대통령이 성남시장 시절부터 경기동부연합을 비롯해 좌파 성향 시민단체 등과 가깝게 지냈다는 걸 안다. 그런 사람들에게 얹혀서 빛의 속도로 변하는 21세기 펄펄 나는 대한민국을 어떻게 끌고 가겠는가. 특히 문재인처럼 외교안보를 좌파 이념적으로 접근하려 하면 재앙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트럼프는 ‘한국의 좌파 정권에 속아 두 번이나 헛걸음하는 망신을 당했다’고 생각하며 강한 불신을 갖고 있다고 한다. 변칙적이고 돌발적인 트럼프가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미국은 대선 직전부터 주한미군 유연성 문제를 계속 띄웠다. 4500명 철수설도 돈다. 이게 의미하는 바를 놓치면 안된다. 한번 삐끗하면 나라 운명이 휘청일 수 있다. 주한미군 역할과 위상에 변화 기미가 보이면 자본과 사람이 빠져나간다. 국가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트럼프는 이재명 정부가 조금이라도 자유 진영을 실망시키는 노선을 걸으면 문재인 때 실점한 것까지 다 바가지를 씌울 태세라고 한다.이 대통령은 국내외 신망이 높은 정통 외교관 출신 국가안보실장으로 외교안보는 믿을 수 있다는 시그널을 주는 듯했으나 6인회 멤버 출신 자주파 대부를 국정원장에 임명해 우방에 헷갈리는 시그널을 줬다. 이미 정권 내부에선 강성 좌파들이 온건 그룹 출신 인사들을 상대로 공격에 나섰다. 외교부 장관 임명이 늦어지는 것도 이 맥락이라고 한다. 이념 편향세력으로부터의 독립은 자주파, 동맹파를 산술적으로 배분해 양쪽에 배치하는 것만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대통령이 확고한 철학으로 방향을 정해줘야 한다.문재인 정권은 경제에서도 골동품 이론으로 실패의 선례를 다 보여줬다. 이 대통령은 시장을 잘 알고 정책경험도 많이 해봤으니 어떻게 하면 실패하고 성공하는지 알 것이다. 셋째, 지역파. 민주당 정권의 기반이 호남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진정 호남을 위한다면 성공한 정권이 되어야 하고 그걸 위해선 호남정권 이미지를 벗어야 한다. 지역편향을 극도로 경계해야 한다.이 정권은 국민 절반의 강한 거부감 속에 출범했다. 하지만 이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앞서의 세 대통령이 모두 처참한 성적을 냈으며 특히 전임자는 건국 이래 가장 질 낮은 행태를 보이다 쫓겨났다. 게다가 ‘이재명’이란 이름에 대한 기대치는 워낙 낮다. 조금만 잘해도 박수를 받을 수 있는 조건임을 의미한다. 국민 절반의 눈에 이 대통령은 ‘개인적 흠결’을 다 씻어내지 못한 채 권좌에 오른 인물이다. 3파에 의존하며 “우려했던 대로”라는 반응이 나올 길로 간다면 여느 대통령보다 몇 배 강한 질타와 저항에 부딪힐 것이다. 반면 거센 반대 속에 시집온 며느리가 잘하면 더 귀염 받듯이 조금만 잘해도 더 큰 박수 속에 성공할 수 있다. 그 길은 강경파에 귀 내주지 않고, 이념파에 휘둘리지 말고, 지역에 빠지지 않는 것, 그 세 가지를 지키는 것이다. 강을 건널 때는 배가 필요했을지 몰라도 이젠 배를 버리고 말을 타야 한다. 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압도적 1위인데도 불안한 걸까. 또 한번 ‘확인 사살’을 한다.이재명 후보 얘기가 아니다. ‘이재명 대통령 만들기’ 기여도 콘테스트에서 압도적 1위를 달리는 윤석열 부부 얘기다. 여러 중대범죄 혐의로 피선거권이 박탈되고 교도소행 담벼락을 걸을 수도 있었던 사람에게 대통령자리행 초특급 열차를 마련해주고도, 뭔가 부족하다고 여겼을까. 수렁 속 보수 진영에 대선 막바지까지 오물바가지를 퍼붓는다. 부정선거 영화 관람을 비롯해 윤 전 대통령의 지난 수개월간 행태는 그가 최소한의 자기 객관화 능력, 즉 국민 대다수가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파악하는 인지 능력이 전무한 사람임을 입증해준다.좌파진영은 윤석열 구속 취소를 결정한 판사를 공격하는데, 문명국에서 이런 장면이 연출되는 것도 어이없지만, 윤 석방이 자신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를 모르는 좌파진영의 판단 능력도 어이없다. 판사가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윤석열 석방은 보수진영을 다시 윤석열 수렁에 빠뜨리는 메가톤급 피해를 입혔다. 만약 윤 부부가 지금 감옥에 있다면 윤 부부의 폐해는 과거지사가 되고, 대선 프레임도 바뀌었을 것이다.남편의 권력을 방패막이로 사법처리를 피해왔던 김건희 여사는 ‘파우치’ 수준으로 구설에 오른 게 자존심이 상했는지, 이제 대형 뇌물의혹 사건의 주인공으로 떠오르며 선거 막판까지 국민을 분노하게 하고 있다. 윤 부부에 비해서는 조족지혈이지만 ‘이재명 대통령 만들기’ 기여도의 상위권에는 권영세 권성동도 올라 있다. 계엄세력과 단절하지 못한 죄과에 추가해 한덕수-김문수의 단일화라는 과제를 통째로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심야의 후보 강제 교체라는 황당하고 비이성적인 결정이 없었다면 결국에 단일화는 가능했을 것이다. 두 권 씨는 단일화 약속을 어긴 김문수에게 경쟁자 자동 제거라는 선물을 안겼다. 그런 ‘뻘짓’의 장본인들이 참회와 정계 은퇴는커녕 반성 한마디 없이 여전히 행세하고 다니는 걸 보는 국민의 심정이 어떻겠는가. 더구나 후보 옆에 김재원 차명진 등 온건 보수들 사이에서 고약한 평판을 받는 인사들이 최측근으로 행세하는 걸 보면서 보수는 무슨 희망과 의욕을 갖겠는가.지금 국민의힘은 좀비정당 그 자체다. 무엇 하나 합리적 판단과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국민 눈에는 너무도 자명하게 보이는 활로(活路)를 고집스레 외면하며 굳이 망하는 길을 찾아 들어가는 것도 신기하다. 국민이 선거를 통해 공중분해시켜 달라고 읍소하는 듯하다.하지만 이렇게 바닥에 처한 국힘의 상황, 내부 종양들의 존재는 한편으로는 김 후보가 문제해결사, 개혁가로서의 존재감을 높여 역전타를 날릴 기회가 될 수 있다. 윤 부부가 다시 뉴스에 등장한 건 악재지만 신속하게 카운터펀치를 날리면 반전의 계기로 만들 수 있다. 이재명보다 먼저 더 강하고 확실한 의지로 윤 부부를 질타하고 엄정한 사법처리 의지를 밝혀야 한다. “김문수가 되면 다 봐주는 거 아냐?”라는 의구심을 불식시켜야 한다. 윤 부부가 몇 달째 조용한 상태였다면 뜬금없는 비판이 주저됐을 수도 있겠지만 윤 부부 스스로 이슈로 등장해준 절호의 타이밍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인간적 의리 운운은 난센스며, 국민과 역사에 대한 정치인의 도리, 책임의 방기다. 과거 독재와 불의에 항거했던 결기로 보수의 종양들을 제거해야 한다.그리고 후보 주변과 선거운동의 전면을 합리적 개혁적 얼굴들로 채워야 한다. 권성동 권영세 김재원 같은 낡고 무능한 보수는 더 이상 보이지 않게 해야 한다. 등 돌린 수백만 온건보수와 중도의 마음을 달래줘야 한다. 이들이 투표장에 가지 않으면 역대 최대 참패를 당할 수 있다. 설령 결국 뒤집지 못하는 경우에도 지는 게 다 똑같은 게 아니다. 만약 수백만 표 차가 나면 민주당은 국민 절대다수의 위임을 받았다며 반대 목소리를 묵살할 것이다. 지난 2년간 거부권이 행사된 온갖 이념성향의 법안들뿐만 아니라 평화협정 체결, 대북제재 완화 시도, 사법체계 대개조 등등 좌파 숙원 어젠다들이 추진되고, 수십년간 불문헌법처럼 지켜져 온 상식과 가치, 유무형의 인프라들이 흔들릴 수 있다. 이재명이 재판 받아 온 혐의들을 무죄로 만들어버리는 법률도 통과될 것이다. 권력자 1인을 위해 법을 마음대로 바꾸는 사회, 즉 중세 절대 왕조시대에서도 가장 질이 안 좋았던 장면으로의 퇴행이다. 김 후보는 절박한 소명의식을 갖고 남은 11일간 정말로 새로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 부족한 당내 지분에 얽매여 친윤과 아스팔트 세력의 눈치를 볼 때가 아니다. 이준석과의 단일화도 김 후보가 양보해야 한다면 기꺼이 그러겠다는 진심을 갖고 임해야 한다. 지금은 단일화 효과가 그리 커보이지 않지만 양측이 정말 자신의 모든 걸 버리는 모습을 보여줘 단일화가 성사되면 그 효과는 지금의 계산과는 달라질 것이다. 자신을 버리고 비우면 길이 보이고 국민이 감동한다.김문수는 범부(凡夫)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존경스러운 삶의 기록을 갖고 있다. 그런데 상식을 가진 국민 누구에게나 훤히 보이는 활로를 외면하다 참패한다면 대선 출마는 그의 인생경력에 큰 오점을 남길 것이다. “졌지만 잘 싸웠다”가 아니라 잠깐 등장해 우물쭈물하다 보수 궤멸의 돌탑에 마지막 돌을 얹은 인물 정도로 희미하게 기억될 것이다. 독재에 저항하고 고문에 굴하지 않았던 그 용기와 결단력, 희생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대법원이 이재명 후보의 유죄를 확정한 것은 지연됐던 사법정의의 뒤늦은 실현이다.더불어민주당은 “부당한 대선 개입”이라고 반발하지만 실제로는 방기돼 온 의무를 뒤늦게나마 이행한 것이 진실이다.민주당이 순리와 법치에 대한 존중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즉각 후보 교체에 나서야 한다. 만약 항소심 판결이 6월 3일 투표일 이전에 나오지 않아 이 후보가 그대로 출마한 상태에서 당선된다면 그 후 벌어질 혼란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모든 선거는 통합의 의미가 있다. 투표일 직전까지는 서로 다투지만 다수결 원칙에 의해 모두가 승복해 하나가 되는 절차다. 그런데 유죄가 사실상 확정된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면 투표일 다음 날부터 임기 끝날 때까지 합법성과 인정 여부를 놓고 온 나라가 갈라질 것이다. 물론 당위론이 아니라 현실을 놓고 볼 때 민주당이 그런 정당한 순리를 따를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오히려 한 달간 대법원을 포함한 대한민국 시스템을 겨냥한 기득권 타도 공세를 통해 좌파 결집에 나설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이재명 출마 강행, 사퇴 어느 쪽이든 판세는 국민의힘이 희희낙락할 상황이 아니다. 유죄 확정으로 중도층은 흔들리겠지만 위기의식을 느낀 좌파 조직들과 특정 지역 지지세 결집의 강도가 몇 배 강해질 공산이 크다. 만약 민주당이 다른 후보를 내세울 경우 이재명보다 더 강한 중도 확장력을 보일 수 있다.국힘은 더욱 백배사죄하는 마음으로 무릎 꿇은 자세로 선거에 임해야 하는데, 이재명 유죄로 인해 국힘 내부의 다툼은 더 심해지고, 한덕수 전 총리와 국힘 후보 간의 단일화도 더 산고(産苦)를 겪을 가능성이 크다.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처럼 지리멸렬하면 이재명이든 대타든 국힘에 어려운 선거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경선과정을 보라. IMF 이후 최대 위기라는 경제·통상 파고를 어떻게 넘을지가 아니라 찬탄 반탄 윤석열을 놓고 이전투구했다. 좌파가 어떻하든 끄집어내려 안간힘 쓰는 과거완료형 이슈를 스스로 재부각시킨 것이다.뜬금없어 보이는 한덕수 현상은 그래서 생긴 거다. 한덕수 출마에 좌파는 경기(驚氣·‘경끼’)에 가까운 반응을 보인다. “형사 처벌” “매국노” 등등 저주가 쏟아진다. 그들이 저주를 퍼붓는 이유를 알려면 한덕수라는 이름 대신에 윤 정권에서 총리 후보로 거론됐던 다른 사람들의 이름을 넣어보면 된다. 예를 들어 출마하려는 총리 겸 대통령 권한대행이 김기현 권영세 등일 경우에도 민주당은 지금처럼 신경질적 반응을 보일까. 좌파의 저주는 역설적으로 한덕수 카드의 경쟁력을 가늠케 해준다.물론 한 전 총리의 출마를 보는 시각에는 긍정·부정, 찬반이 양립한다. 부정론을 요약하면 대략 세 가지다. ①내란 세력이다 ②심판이 선수로 나간다 ③국가 위기를 관리해야 할 권한대행의 책임 방기다. 따져 보자. 먼저 ①번. 한덕수가 실패한 윤석열 정권의 총리였으며 계엄을 막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폐족(廢族)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반론도 가능하다. 한 전 총리가 계엄에 반대했음은 국무회의 참석자들의 증언과 헌재 심판 과정에서 명확히 밝혀졌다. 실패한 정부의 총리를 지냈다는 점은 한덕수가 벗기 힘든 약점이다. 하지만 그를 윤 정권 2인자라고 비난하는 민주당도 내심 씁쓸할 것이다. 한국 정치에서 총리가 어떤 자리인지, 더군다나 윤석열은 취임이후 거의 모든 주요 정책을 상의없이 독단적으로 밀어붙였으며 국정 1, 2인자 권력은 윤 부부가 독점해 왔음을 민주당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 전 총리가 계엄 사태 당시 사표를 던지거나 몸을 던져 막지 못했다는 점은 한계고 멍에다.②번, 즉 심판이 선수로 뛴다는 비난에 대해 중앙선관위는 최근 “선거관리는 선관위가 한다”며 심판은 선관위임을 분명히 했다. 대통령 권한대행은 투표일 지정 등 행정적 절차의 수행자일 뿐이라는 뜻이다. ③번, 즉 “위기관리를 책임져야 할 중책을 버렸다”는 민주당의 비판은 그런 자리를 식은 밥 팽개치듯 석 달간 직무정지시킨 게 자신들이라는 점에서 퇴색된다. 한 전 총리의 앞에 놓인 최대의 과제는 윤석열을 완전히 떨쳐내는 것이다. 부부 모두 감옥행 위기에 처한 윤 부부는 어떡하든 지분을 챙기려 손을 뻗칠 것이다. 물론 윤 부부가 숟가락을 얹으려고 시도한다는 것과 한덕수가 응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최근 윤석열의 최고위급 참모가 한덕수를 돕겠다며 마포에 사무실을 차리려 하자 한 전 총리가 격노하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한덕수 출마론은 시작부터 윤석열과는 무관하게 이뤄져 왔다. 국힘 의원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형성됐고 그 바탕에는 보수 지지자들 내부의 이심전심 여론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는 사실·진실에만 기반해 진행되는 세계가 아니다. 좌파는 ‘윤석열 아바타’ ‘친윤 후보’ 프레임 공세의 강도를 높일 것이다. 한 전 총리가 강단 있게 윤석열을 단절하고 단죄의 의지를 밝힐 수 있을지가 첫 시험대다. 만약 길거리 몇십만 표에 미련을 가지면 결국 전체를 잃게 된다.또한 경제·통상 전문가로서의 실력이 실패한 정부의 총리라는 핸디캡을 상쇄할 수준인지 스스로 증명해 보여야 한다.두 차례 총리와 수석 등 고위직에서 여러 대통령의 성공과 실패를 근거리에서 지켜보며 얻었을 지혜와 경륜에 대한 기대는 동시에 관료주의, 현실 순응주의에 대한 우려와 병존한다.김문수 한동훈 후보도 미래를 놓고 겨뤄야 한다. 보수정당의 최대 강점은 경제다. 경제를 주제로 국민을 유혹할 수 있는 시기에 이를 스스로 걷어차며 스스로의 눈을 찌르는 바보짓을 이어가면 안 된다. 윤석열 작(作) 계엄 광극의 어부지리로 결승점 직전까지 다다랐던 이재명의 질주는 사법정의에 의해 일단 멈춰 섰다. 한덕수의 합류로 보수진영 판세도 요동치고 있다. 반전(反轉)의 연속인 한국 정치극은 항상 새옹지마로 귀결된다는 교훈을 잊어선 안 된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스타 연예인들의 급작스러운 추락이 잇따른다. 마약이나 음주운전 전력에 발목 잡혀 목숨을 끊는 젊은 연예인들을 보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한국은 공인(公人)이나 유명인에게 매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집요하게 따지는 사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예외가 있으니 바로 정치인이고, 특히 이재명 전 대표다. 연예인들에게 들이댄 잣대의 100분의 1만 적용해도 그는 대중 앞에 설 수 없을 것이다.필자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 전 대표가 형수에게 한 것 같은 수준의 저열한 표현을 직접은 물론 3류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도 접해 본 적이 없다. 바람피우는 사람들을 보긴 했지만, 총각 행세로 상대를 속인 것으로도 모자라 상대를 정신병자(허언증)로 몰아붙이는 수준의 뻔뻔함을 본 기억도 없다.대통령은커녕 말단 공직도 맡길 수 없는 수준의 ‘인성 기록’을 지닌 사람이 대통령의 문턱까지 왔다. 그것도 건국 이래 전무후무한 절대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입지다. 기막힌 기적을 가능케 한 것은 100% 윤석열 김건희 부부의 공로다. 부인이 온갖 스캔들과 국정 개입으로 국회 192석을 헌납하더니, 남편은 계엄령으로 정권을 반납했다. 그런데도 정작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자신들의 잘못이 얼마나 큰지 깨닫지 못한다.김 여사는 최근에도 “밖의(거리 시위의) 저 많은 사람들이 다 우리 편인데 뭐 기죽을 게 있느냐”고 했다고 한다. 착각의 세계다. 원균이 아무리 이순신을 모함하고 형편없는 지휘로 아군에 손실을 끼쳤어도, 백성들은 왜군과 전투가 벌어지면 그래도 원균의 승리를 기원한다. 여론조사들에서 탄핵에 반대한 30~45%도 그런 심정이었을 뿐이다.윤 전 대통령은 건국 이래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 진영에 가장 큰 폐해를 끼친 보수 정치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원균이 침몰시킨 건 아군 전선(戰船) 수십 척이지만, 윤석열은 보수 정권 자체를 침몰시켰다. 이재명의 죄과가 더 큰데 왜 윤석열을 비판하느냐는 일부의 항변은 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놔두고 원균을 비판하느냐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도요토미는 격퇴의 대상이지, 찬반 지지 여부를 논할 대상이 아니다.더 한심스러운 것은 아직도 부스러기 몇 조각 얻어먹으려고 윤 주변을 기웃대는 국힘 지도부와 중진 정치인들이다. 그런 행태가 이어지면 국힘은 대선 승리는 커녕 영원히 역사에서 윤석열 부부와 똑같이 취급받게 될 것이다. 그들이 자신의 밥그릇에만 골몰하는 동안 절체절명의 위기는 다가오고 있다. 만약 이재명 정권이 들어서면 헌정 이래 유례없는 권력 독점 시대가 열린다. 1987년 이래 여당이 소수정당의 저항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5분의3 의석(패스트트랙 요건) 이상을 차지한 것은 문재인 정권 말기(180석) 뿐이었다. 그때는 코로나 사태와 경제실정(失政), 곧 다가올 대선을 의식해야했지만 이번엔 다르다. 노란봉투법을 비롯해 지난 3년간 거부권 행사로 저지된 숱한 좌파 법안들이 다 실행될 수 있다. 80년대식 낡은 착취-피착취 패러다임에 젖어 있고, 의회민주주의의 요체인 숙의민주주의에 대해선 개념도 모른 채, 국회 입법을 요구르트 자동 제조기 정도로 여기는 민주당 강성 의원들에 의해 얼마나 놀라운 법안들이 만들어질지 상상해보라.이재명 전 대표는 벌써부터 ‘내란 적폐 청산’을 외치기 시작했다. 좌파진영 특유의 정략적이고 약탈적인 프레임 공세다. 그런데 적폐 청산 자체에는 국민 다수가 피로감을 느끼지만, 김건희 청산이 포함되면 국민 반응이 달라질 수 있다. 국민 다수는 김건희 논란의 완전한 해결을 원한다. 김 여사의 유무죄에 대한 선입견을 갖고 있지 않은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국민들은 대통령 부인이든 누구든 특혜 특권 없이 엄정하고 공정한 사법 절차를 거쳐 유무죄가 가려져 만약 결백함이 입증되면 명예를 회복하고, 유죄가 드러나면 합당한 처벌을 받기를 바라고 있다.이재명은 이런 국민 상식을 악용해 김건희를 빌미로 한 내란 청산으로 보수진영을 난도질할 것이다. 문재인표 적폐 청산이 망치질이었다면 이재명표는 도끼질이 될 것이다. 민주당은 김 여사 사법 처리에 실제로는 속도를 내지 않은 채, ‘김건희가 여전히 사법정의의 성역에 머무는 특권을 누리는데 그 비호 세력이 바로 국힘’이라는 프레임을 대선 투표일까지 끌고 가려 할 것이다. 국민 분노의 표적 좌표가 유지되는 상태에서 선거를 치르는 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걸 깨야 한다. 국힘은 김건희 관련 주요 의혹을 철저히 규명할 수 있는 특검법을 하루빨리 내놓고 주도적으로 처리해야 한다.윤 전 대통령은 사저정치를 꿈꾸는 듯한데 위험한 몽상이다. 내란죄는 유무죄 다툼의 여지가 크지만 계엄법 위반 등은 빠져나가기 어렵다. 국힘은 그를 하루빨리 제명시켜 관계를 단절해야 한다. 국힘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시도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소금 가마니를 멘 채 강물로 들어가는 꼴이 된다. 국힘 대선 후보는 윤 부부 사면은 없을 것임을 선제적으로 약속해야 한다.윤 부부와의 완전한 단절은 보수 통합은 물론이고 중도와 합리적 온건 진보까지 아우르는 반(反)이재명 연합전선 구축을 위한 기초 작업이다. 조직과 구도는 그렇게 반이재명 기치로 묶되, 후보는 경제와 외교에 집중해야 한다. 지난 미국 대선때 해리스는 트럼프 비판만 외치고 트럼프는 정책을 외쳤던 결과를 유념해야 한다. IMF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가 올 수 있는 현 상황은 좌파 포퓰리스트가 국민을 현혹하기 좋은 환경이다. 하지만 국민은 경제 외교 격랑을 헤쳐 나갈 실력을 따져볼 것이다. 보수는 건국과 산업화 경제 발전의 주역이다.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다. 지진은 피할 수 없지만 정치판의 예고된 지진은 전략적으로 대처하면 피할 수 있다. 2021년 6월 국힘 당 대표 경선에서의 전략적 선택처럼 이번에도 당원과 국민의 집단 지성이 창출하는 내부 혁명이 일어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속도전에 나섰던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가 늦어지는 것은 사안의 복잡다단성을 반영한다. 계엄직후 야당이 설정한 내란프레임에 온 사회가 순식간에 휩쓸렸지만 사실 그렇게 간단명료한 성질의 사안이 아니었다.만약 윤석열 대통령이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를 무시했거나, 의원 체포·구금이 실제로 이뤄졌다면 복잡할 게 전혀 없었다. 그런데 현실에서 벌어진 일들은 합법과 불법, 헌법상 권한과 위헌의 미세한 갈림길을 수없이 오간다. 문제성 발언·지시들 중에도 면밀히 계획된 것인지 우발적·즉흥적인 것인지 경계에 있는 것들이 많다.대통령 탄핵 심판은 대통령 개인의 잘못을 처벌하는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부통령제가 없는 우리 시스템에선 대통령에게 투표한 1639만 표를 무효화시키고, 국민의 나라 방향 선택 자체를 바꾸는 일이다. 국제 질서의 펀더멘털이 바뀌는 관세전쟁 상황에서 불확실성·불투명성의 장기화는 우려스럽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나라의 방향이고 집권 세력의 정치이념이다. 최대치까지 정밀하고 신중하게 따져봐야 한다.현재로서 분명한 것은 윤 대통령이 파면되든 복귀하든 윤석열 정권은 머잖아 끝난다는 점이다. 탄핵이 기각돼 복귀해도 대통령이 개헌을 전제로 임기 단축을 약속했기 때문에 조기 대선은 불가피하다. 분명한 것 둘째는 김건희 여사 문제가 마침내 사법 절차의 영역에 들어설 것이란 점이다. 대통령이 파면돼 대선 국면에 들어가면 여야 후보 모두 경쟁적으로 김건희 사법 처리를 밀어붙일 것이다. 만약 윤 대통령이 복귀해 거부권을 행사해도 재의에서 통과될 가능성이 높다. 정권을 곪아 문드러지게 만든 ‘김건희 수렁’의 종료다.조기대선 국면에 영향을 미칠 가장 첫 변수는 이재명과 윤석열이 각각 어느 정도로 자기 진영 기둥을 훼손할지다.탄핵이 기각될 경우 이재명 대표는 연말이나 내년 초로 늦춰질 선거 이전에 대법 판결이 나와 출마 기회가 박탈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대표가 마은혁 임명을 압박하며 “몸조심” 운운한 것은 이런 다급한 상황과 그 특유의 정치인성 DNA가 결합돼 나온 결과물이다.영화 속 장면들이 떠오른다. 조폭 두목이 평소 상가 상인들에게 인자하고 예의바른 사업가처럼 처신하다 점포 하나를 손봐야겠다고 생각하면 주변 시선을 전혀 개의치 않고 무자비하게 폭력을 퍼붓는다. 목적이 달성되면 다시 온화한 사업가로 돌아가고…. 이 대표는 평소엔 여론, 중도층을 의식하다 원하는 결과의 달성 여부에 생사가 걸렸다고 판단되는 순간엔 오로지 목적 달성에만 집중한다. 지난 총선 때 공천 학살 과정을 보라. 세상의 눈을 전혀 개의치 않고 칼을 휘둘렀다.이번에도 자칫하면 자신의 미래가 대통령에서 감옥으로 급전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드니까 조폭이 밀실에서나 할 만한 협박 표현을 해댄 것인데 이는 핵심 지지층에게 보내는 명확한 좌표 찍기이기도 하다.몸조심 같은 표현은 의도한 용어 선택이든 아니든 그의 평소 정신세계를 보여준다. 평생을 대결적·전투적으로 살면서 상대를 쓰러뜨리거나 잡아먹히거나 둘 중의 하나의 세계로 살아온.원하는 것 획득을 위해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상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는 이런 행태는 푸틴, 차베스 등 권위주의 체제의 장기집권 지도자들이 공유한 특질이기도 하다. 그런 성향의 지도자가 일단 권력을 쥔 뒤 절대권력으로 굳혀가는 과정을 역사는 숱하게 보여줘 왔다. 그런 개연성이 시나브로 현실화되어도 막을 장치가 없는 게 민주주의의 함정이다. 천천히 데워지는 냄비 속 개구리가 어어 하다 당하듯 합법적 절차를 통한 단계적 독재화의 저지는 지난(至難)하다. 이 대표에게 가장 큰 약점은 현재 다수 국민이 그런 위험을 경계하고 있다는 점이며, 그걸 알면서도 이 대표가 자신의 본성을 부지불식간에 자꾸 노출시켜 국민에 상기시킨다는 점이다. 진보진영의 최대 장애물이 이재명의 탁한 본성(本性)이라면, 보수진영 최대 수렁은 윤석열이라는 존재 자체다.지난해 12월 14일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지금까지 여론조사 추이를 분석해 봤다. 결론은 간단했다. 윤석열이 노출되면 될수록 ‘보수 측 지표’(윤 지지+정권 연장 희망+탄핵 반대)는 떨어지고, 윤이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올라갔다. 윤 대통령이 구속돼 구치소에 들어갔을 때 최고치로 올랐다가 헌재에 나와 제스처를 크게 쓰니 내려갔고, 변론 끝나고 다시 조용해지니 좀 올랐다가, 주먹 세리머니를 하며 구치소를 나오니 또 떨어졌다. 관저정치 비판을 의식했는지 며칠 조용해지니 다시 조금 올라간다. 사실 이런 추이는 정부 출범 때부터 이어져 왔는데 이는 ‘국민적 비호감’의 반영이다. 정치의 기본은 간단하다. 동정받으면 이기고 잘난체하면 진다. 겸손하면 이기고 어깨에 힘주면 진다. 들으면(聽) 이기고 말하면 진다. 이 간단한 진리를 무시하면 줄반장 자격도 없다.윤 대통령이 “나를 위해 강추위에 거리에 나선 수십만 지지자가 있는데 무슨 비호감이냐”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필자는 이번 탄핵 반대 집회를 계기로 거리에 나서기 시작한 5명의 속내를 들어봤다. 5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의 대졸 학력 중산층들이다. 거의 비슷한 답을 들었다. 그중 한 분(자영업)의 말을 전한다. “나는 여론조사 전화는 다 받아준다. 그리고는 윤을 지지한다고 답한다. 윤이 좋아서가 아니다. 이재명이 안 되게 하기 위해서다. 나는 윤이 김건희만 싸고도는 행태에 화가 나고, 계엄 때도 혀를 찼다. 그럼에도 이재명 세상이 오는 게 너무 싫어 집회에 나간다.” 조만간 탄핵 국면은 정리된다. 이 대표는 윤석열이 선물한 계엄 로또가 당첨돼 사법 리스크를 벗어날지 겸허히 기다리고, 윤 대통령은 자신이 무너뜨린 보수의 초가삼간 주인들에게 이렇게 약속해야 한다. “그림자 속에만 머물겠다. 나를 잊어달라.”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윤석열 대통령은 25일밤 68분간의 헌법재판소 최후 변론 중 40%가량을 야당과 좌파가 저지른 ‘폭거’ 사례를 열거하는 데 할애했다. 전체 1만9341자의 변론 가운데 7637자에 달했다. <국정원 대공수사권 박탈→간첩법 개정 거부→국방예산중 핵심 감시정찰예산 삭감→방산물자 수출 발목잡기→ 한미일 군사훈련 비난 등 군의 안보활동 방해 →대통령 취임전부터 탄핵 공세→입법폭주→장관 방통위원장 감사원장 검사 판사 등 공직자 줄탄핵 → 예산폭거…> 물론 뉴스를 매일 접해 온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들이다. 필자 역시 그런 야당의 행태를 칼럼에서 다룬 게 15회가량에 달한다. 그런데도 옴니버스식으로 열거된 사례들을 보니 새삼 놀라웠다. 정말로 지난 2년 반 동안의 이재명 민주당은 극악스러웠다. 건국 이후 이런 야당은 없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윤 대통령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묻고 싶었다. “그럼 그동안 대통령은 뭘 하고 있었나?” 대통령이 국민에게 실상을 알리고 경각심을 호소할 기회와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대통령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확성기를 가진 자리다. 기자회견을 매일 열어도 언론은 생중계하고 대서특필해 줄 것이다. 대통령이 수시로 마이크를 잡아 야당의 행태가 국익에 미칠 영향을 진솔하게 설명하며 자제를 호소하는 소통을 했다면, 국가 원로들을 포함해 중도와 보수 전체가 호응했을 것이다. 그런데 취임 100일 기자회견 이후 1년 9개월간 한 번도 회견을 안 하며 국민과의 소통을 거절한 것은 윤 대통령 본인이었다. 국민이 야당의 폭거를 모르거나 다 잊거나 덮어주려 했던 것도 아니었다. 지난해 4월 총선은 투표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여당의 압도적인 승리가 예상됐었다. 국민은 이재명 민주당의 오만과 폭주를 심판할 마음을 다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걸 스스로 차버린 게 윤 대통령 본인이다. 오로지 아내만 감싸고 돌다 정권의 도덕적 기반을 무너뜨리고, 고집불통 버럭 행태로 야당보다 더 거만하고 오만한 이미지를 굳힌 자업자득이었다. 보수 진영의 위임을 받아 성루에 선 수성(守城) 총사령관으로서의 책임을 방기하다 기껏 대책이라고 내놓은 게 황당하고 어설픈 계엄이었다. 그 결과가 뭔가. 만약 탄핵이 인용되고 그 여세로 5월 대선에서 민주당이 집권하면 87년 민주화 이후 사실상 처음으로 행정·입법 권력을 진보(좌파) 진영이 완전 장악한 체제가 된다. 물론 과거에도 여대야소는 있었지만 기껏해야 과반을 한두 석 넘긴 데(2004년 열린우리당 152석, 2008년 한나라당 153석, 2012년 새누리당 152석) 불과했다. 다수당의 법안 일방 처리를 막는 장치인 선진화법(2008년 제정)을 무력화시키는 패스트트랙을 통해 모든 입법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5분의 3 의석(180석)을 차지한 정권은 2020년 코로나 총선에서 180석을 차지한 문재인 정권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시는 정권 임기가 2년밖에 안 남아 대선을 의식해야 하고 부동산 실정(失政) 등으로 정권의 힘이 빠진 상태였다. 그런데 만약 현 민주당이 5월 대선에서 집권하면 최소한 2028년 4월 총선까지 3년간은, 임기 초의 무소불위 대통령과 슈퍼 의석 여당이 일사불란하게 수십, 수백 개의 이른바 개혁입법(좌파 숙원 법안들)을 통과시키고 경제·사회·공영언론·문화·역사 등 나라 구조 전체를 바꿔 놓는 ‘대변혁’의 시기가 될 수 있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명시한 헌법에 위배된다는 논란이 일어도 한때 좌파 혁명 노선을 추구했던 노동단체 간부 출신 재판관을 포함해 우리·국제법연구회 출신들이 다수 포진한 헌재가 최대한 폭넓게 진보적으로 헌법을 해석해 줄 것이다. 나라의 항로가 지금까지와 많이 다른 방향으로 갈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헌재의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을 생각할 때 유념해야 할 대목이 있다. 한국의 대통령 탄핵은 미국과는 의미가 다르다. 미국은 대통령이 탄핵돼도 정권 자체는 유지된다. 러닝메이트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해 잔여 임기를 채우기 때문이다. 닉슨이 탄핵위기에 처해 사임하니 같은 당 소속 부통령인 포드가 승계해 잔여 임기를 채운게 그 예다. 국민의 4년 임기 정권 선택 자체가 무효화되지는 않는 것이다. 대선은 대통령 개인을 뽑는 선거인 동시에 나라의 항로에 대한 선택이다. 앞으로 5년간 우리나라가 이 방향으로 가길 원한다고 국민이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통령 개인의 허물로 인해 국민의 5년짜리 결정 자체가 무효화된다. 다른 공직자와 달리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여부 판단은 헌법 위반 정도의 심각성이 공직 권한을 박탈하기에 충분한지뿐만 아니라, 국민 전체의 5년짜리 체제 선택 결정 자체를 무효화할 만큼 중대했는지도 판단해야 한다. 민주당에 이런 판을 열어준 윤 대통령은 얼마전까지도 탄핵이 당연히 기각될 것으로 확신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계엄 선포 때도 드러났지만, 객관적으로 판세를 읽고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에 대해 의구심이 생길 수 밖에 없는 대목이다. 부산 엑스포 유치나 지난 총선의 결과가 나오기 직전까지도 승리를 확신했다는 외눈박이 판단력, 즉 ‘자기 객관화 능력 부재’의 연장선상이다. 수감 후 여당 지도부와의 면담 때 윤 대통령은 당이 왜 안 움직이느냐고 불만을 터뜨렸고, 보다 못한 당 간부가 “왜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어린애처럼 칭얼대느냐”고 질타했다고 한다. 윤 대통령은 설령 탄핵이 기각돼 복귀한다고 해도 보수 재건의 중심축이 될 능력도 자격도 잃었다. 이미 리더십은 바닥을 드러냈고. 신뢰 자본을 까먹었다. 탄핵이 인용되든 기각되든 보수 진영 재건 움직임에서 윤석열이라는 이름은 키워드에서 지워야 한다. 윤석열에 대한 입장이 새 리더십 선택의 기준이 돼선 안 된다. 윤석열을 중심에 놓으면 범보수 진영이 결집될 수도 없고, 설령 뭉쳐진다 해도 그 한계는 명확하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보수 진영 결집의 속도와 강도가 예사롭지 않다. ‘박근혜 탄핵’(2016년12월~2017년 3월10일) 때는 탄핵안 국회 통과부터 탄핵 인용 때까지 8대 2 정도의 비율로 탄핵 찬성이 반대를 압도하는 현상이 지속됐었다. 이번엔 계엄 직후 8대2 가량이었던 탄핵 찬반 여론이 한달여 만에 6대4 이내로 격차가 줄었다.여당 지지율도 박근혜 탄핵 때는 2016년 10월말 29%→18%(최순실 구속)→12%(탄핵소추안 통과)를 거쳐 8%까지 추락했으나 이번에 국민의힘 지지율은 32%→24%로 떨어진 뒤 반등해 계엄 이전 수준을 넘어섰다.이를 놓고 윤석열 대통령 측은 자신에 대한 지지로 여기고, 국민의힘은 탈윤석열 행보에 제동이 걸린 채 어정쩡한 행보다. 더불어민주당과 좌파 진영은 가짜뉴스와 극우 세력의 발호로 해석한다.다 어이없는 착각이다. 파도가 몰려오면 거품이 아니라 물속 흐름을 봐야 한다. 거대한 흐름의 중심은 보수의 비상한 각성이다. 한국 우파의 주축인 온건·중도 보수 시민들은 오랫동안 참고 침묵해왔다. 87년 이후 사회 각 부문의 좌향좌를 불편한 심정으로 지켜보면서도 과거의 우편향에서 균형점으로의 이동이라고 여기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현실은 균형점을 지나쳐 좌편향으로 치달았다.한국사회는 유신, 전두환 시절까지 균형추가 우측으로 심하게 쏠린 상태였다. 6·25전쟁의 영향으로 좌파 세력은 미미했고, 그 덕에 경제발전과 안보라는 한 방향으로 에너지를 모으는 게 가능했다. 그러다 민주화 이후 추(錘)가 좌측으로 이동하기 시작하더니 문재인 정권에 이르러 정점을 찍었다. 보수층의 인내심은 총선 이후 민주당의 극단을 치닫는 입법독재 행태를 보며 한계점에 달했고, 계엄 이후 한덕수 탄핵, 공수처와 헌법재판소의 균형 잃은 행보에서 결국 폭발했다.좌편향에 대한 반발기류는 미국 유럽 등 전세계적으로 과도한 PC(정치적 올바름)주의에 대한 반발, 소수자 보호에 치중한 결과 빚어지는 역차별과 제도·전통·문화의 왜곡에 대한 반발이 한창인 것과 맥을 같이한다. 지나치면 항상 역작용을 부르게 마련이다. 지난해 4월 총선 때 윤 대통령의 김건희 여사 비호 행태에 화가 나 조국에게 표를 준 사람들이 많듯이, 이번 보수의 결집도 이재명 민주당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보복적 지지’ 심리가 영향을 미쳤다. 자폭한 윤석열을 이 대표와 헌재, 공수처가 좀비처럼 되살려준 셈이다.계엄 이후 국민은 판사쇼핑을 하는 공수처의 얄팍함, 서부지원 판사의 월권, 헌재의 균형 잃은 행보를 목도했다. 사실 이런 행태의 뿌리는 문재인 정권으로 거슬러간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기본 존중이 있는 정상적 정치인이라면 아무리 자기편이 임명권을 가져도 절제를 한다. 좌우 이념 스펙트럼을 1~10으로 놓고 볼 때 최고 법원 판사는 4~6의 인물들을 지명해야 마땅하지만 문재인 정권은 그런 절제의 양식이 실종된 시기였다. 오로지 주류세력 교체 욕심으로 전체 판사의 5% 이내인 우리법·국제법연구회 출신들로 진보 몫을 대부분 채웠다. 이번에 이 대표는 한술 더떠 헌법재판관 후보 2명을 모두 서부지원(정계선, 마은혁)에서 골랐다.판사에 대한 사상 검증은 위험하다. 하지만 일반 판사가 아닌 헌법재판관은 헌법의 최후 보루이며 최종 해석자다. 6·25전쟁을 ‘노동자 농민의 승리가 결정적이던 순간에 미 제국주의가 개입해 수백만 명을 살해한 전쟁’으로,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미국이 2000여 광주시민(공식 집계 희생자는 사망 154명, 행방불명 70명) 학살을 지원했다’는 주장을 하는 단체와 관련된 전력이 있다면 이는 차원이 다르다. 그후 어떤 사상적 이념적 변천을 겪어왔는지는 남들이 재단할 수 없지만, 만약 국힘이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과거 “빨갱이들이 주도한 좌익폭동”이라고 망언한 전력이 있는 변호사를 재판관에 추천했다면 민주당은 “당신네 추천 몫이니 상관없다”며 문제 삼지 않을 것인지 역지사지해 보라. 이 대표가 더 확실한 우리 편을 욕심내다 무리수를 둔 거다. 민주당은 윤 대통령의 허물로 자기들 허물이 가려질 것이라 착각했지만 국민은 어리석지 않다.그렇다고 해서 윤 대통령이 보수의 결집을 자신에 대한 지지로 여긴다면 큰 착각이다.아파트 1층 주민이 현관 앞 복도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지르겠다고 소리쳤다고 가정하자. 주민들에게 포박된 그의 하소연인즉 2층 남자의 횡포에 참다 못해 경고용으로 이런 행동을 했다고 한다. 층간소음은 물론이고 화단으로 담배꽁초를 마구 던지고. 항의하면 식칼로 위협하고, 관리사무소에 얘기하면 무슨 특수한 관계인지 은근히 2층 남자 편을 든다는 거다. 2층 남자의 평소 무뢰배 행태를 익히 알고 있던 주민들은 “오죽했으면…”이라며 동정심을 갖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파트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방화 위협을 용서하는 건 결코 아니다. 윤 대통령은 보수 진영 내에서 그나마 최대한 우호적으로 봐주는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도 ‘동정심이 가는 악당’(심퍼테틱 빌런·sympathetic villain) 정도의 위치에 있다고 판단하는 게 올바른 자기 위치 파악이다. 보수가 뿔이 난 것은 맞지만 그것은 윤석열 개인에 대한 지지가 아니며 계엄을 정당화시켜 주려는 것도 아니다. 나라의 앞을 보고, 나라가 바르게 가야 한다는 간절함에서 분노한 것이다.보수의 모처럼의 각성 분노 결집이 열매를 맺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윤석열이라는 존재다. 당장은 반(反)이재명 깃발에 결집했지만 결국 윤석열을 놓고 분열될 가능성이 크다.윤 대통령은 집권 2년 반 동안 부인만을 감싸며 왕이라도 된 듯 격노하고 고집을 부려 찍어준 사람들을 부끄럽게 했다. 황당한 계엄령으로 더 부끄럽게 만들었다. 속죄할 길을 고민해야 마땅하다. 그는 지난달 체포되기 직전 “임기 2년 반 더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했다. 빈말이 아니었다면 하루빨리 국힘당을 자유롭게 해주고 보수의 짐, 즉 스스로를 치워줘야 한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영혼의 근수(斤數) 측정.’40년 전 읽은 단편소설 장면이 생각난다.외모 학식 재산 등 모든 걸 벗고 한 인간으로서의 무게, 즉 인격 양심 감성 등을 종합한 영혼의 무게를 재는 장면이었다. 나도 갑작스레 그 저울에 올라가게 된다면…? ‘윤석열 계엄사태’ 이후 대한민국도 저울에 올라섰다. 그런데 저울 바늘이 형편없이 낮은 숫자에서 춤춘다. 번듯한 외관과는 달리 국가 시스템의 실제 근수는 빈약하기 그지없는 것이다.만천하에 생중계된 ‘윤석열 계엄 소극(笑劇)’을 헌법과 법률에 따라 심판하는 것은 그리 복잡한 문제가 아니다. 공정하고 엄격하게 법적 절차만 준수하면 크고 작은 난관을 뚫고 갈 수 있다. 그런데 내란죄 수사권을 가진 경찰을 제치고 왜 굳이 공수처가 나서서 윤 대통령에게 저항할 빌미를 줬을까. 공수처는 왜 관할 법원을 제치고 서부지법에 영장을 신청해서 ‘판사 쇼핑’ 논란을 자초했을까. 영장 담당 판사는 왜 영장에 월권적 내용을 넣어서 논란을 자초했을까. 행정담당자인 헌법재판소 사무처장은 왜 계엄 위헌성에 대해 개인 의견을 내놓을까. 헌법재판관 8명 가운데 소장 권한대행을 포함해 3명이 우리법 또는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이라는 점에서 강경 우파들이 헌재의 흠결을 찾아내려고 눈에 불을 켜는 상황인데 왜 불신의 단초를 제공할 경거망동을 할까.이런 사법기관들의 행태는 대한민국 시스템의 무게와 깊이의 경박함을 드러내준다. 우리 사회에는 세상이 한 방향으로 몰려가면 어떤 무리수를 둬서라도 그 행렬에 합류하고 눈도장을 찍으려 발버둥 치는 천박함이 팽배하다. 집단적으로 흥분해서 가장 거대한 상자로 포장해 때려잡는다. 경중은 따지지 않는다. 천박한 달려듦에는 국가 기관들도 빠지지 않는다. 헌법이나 법률에 의해 수권 받은 국가 기관의 권한 행사는 최대한의 절제와 신중함을 견지하며 이뤄져야 하는데 오히려 국민보다 더 흥분한 기색을 드러낸다. 외형상 법적 절차만 밟으면 된다는 듯 꼼수를 동원하는 데서 화려한 과자 포장지 속의 초라한 내용물처럼 시스템의 얄팍함이 드러난다.우리 사회에서 숙의민주주의, 상식과 절제가 사라지고, 법치주의가 법절차만 등에 업으면 되는 요식행위로 전락한 것은 문재인 정권, 특히 2020년 봄 코로나 사태로 민주당이 압도적 의석을 차지한 뒤부터다. 교조주의적인 좌파 성향 대통령, 그리고 민주주의 훈련을 전혀 받지 못한 586 출신들이 주축이 된 슈퍼 의석이 결합해 무소불위의 힘자랑이 시작됐고, 지난해 하반기 공직자 탄핵 남발, 예산 농단에서 정점을 찍었다. 이런 행태를 내놓고 할 수 있는 것은 특정 지역, 이념진영의 ‘묻지 마 지지’가 갈수록 더 공고화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비상식적인 행동을 해도 미래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특정 지역, 지지층의 이익에 영합하는 방향이기만 하면 금배지가 보장되기 때문이다.국회 만의 현상이 아니다. 경찰 국정원 등 정치바람이 세게 부는 상당수 조직들에선 지역·이념적 연줄에 얽힌 충성 경쟁과 미래권력 향방을 쫓는 이익 계산 바람이 불고 있다.87년 체제의 한계라고들 얘기하지만 결국은 사람이 빚은 문제다. 문재인이라는 시대착오적 이념편향 정치인이 박근혜 탄핵 덕분에 횡재하듯 정권을 잡아 나라를 갈라치고, 그 여파로 윤석열 이재명이라는 권위주의적 인물들이 양쪽 진영의 지휘봉을 쥔 게 시스템의 붕괴를 가속화시켰다.윤석열 이재명은 여러 면에서 닮았다. 헌법상 권한을 빙자한 권력남용도 닮은꼴이다. 윤 대통령이 헌법 요건에 맞지 않음을 알면서도 계엄 선포를 강행한 것이나, 이 대표가 취임 이틀밖에 되지 않은 방통위원장을 비롯해 검사 판사 감사원장 등의 탄핵이 헌법 요건을 충족하지 못함을 알면서도 다연발 탄핵을 강행한 것은 닮은꼴이다. 윤이 직권남용이면 이도 직권남용이고, 계엄선포 자체가 헌법농단이면 공직자 탄핵 남발도 헌법농단이다. 라이터 불장난을 주유소에서 했느냐, 골목 쓰레기통 앞에서 했느냐처럼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죄목은 같다.물론 계엄선포 과정의 법 절차 이행 미비, 그리고 내란 혐의는 별개의 문제다. 윤 대통령이 국회 병력투입, 체포시도 등으로 국회의 판단 과정을 방해하는 행위를 계획했다면 이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된다. 윤 대통령의 내란 혐의는 계엄선포 자체가 아니라 이 대목에서부터 본격화한다.일극체제 구축에 집착해 전통 깊은 정당을 망가뜨린 점도 닮은꼴이다. 윤 대통령의 여당 사당화는 실패했지만 이 대표는 일단 성공했다. 하지만 이재명이라는 존재가 민주당 재집권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민주당의 집권은 국회 슈퍼의석과 제왕적 대통령 권한을 동시에 갖는 일극체제의 완성을 뜻하는데, 그 체제의 절대 권력자가 될 사람이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전투적 공격적 성향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면 많은 국민이 주저할 것이다.‘170석 의회만 갖고도 저렇게 힘자랑을 해대는데 대통령까지 차지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 대한민국은 이재명이 원하는대로 다 할 수 있는 나라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이 대표가 넘어야할 큰 장애물이 될 것이다. 2030 세대 수백만명이 해외주식에 투자하는 시대에 한미일 동맹 강화를 탄핵사유로 여기는 시대착오적 발상의 이미지도 장애물이 될 수 있다.대한민국이라는 얼굴의 양쪽에는 각각 커다란 혹이 달려 있다. 양측 진영논리에 매몰된 사람들은 그게 자신의 살덩이라며 떼어내면 안 되는 것처럼 지키려 한다. 그러나 혹은 혹일 뿐이다. 달리기 선수의 다리에 달린 모래주머니처럼 먼저 떼어내는 쪽이 이긴다. 윤 대통령 체포로 우파는 혹을 떼어내는 수술대에 강제로 눕혀졌다. 반대편의 혹마저 떨어져 보수 진보 양 진영의 리더들이 동시에 교체되면 대한민국 정치는 대전환의 새로운 지평이 열릴 수 있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국민 절반은 나머지 절반의 지도자를 거부하는, 지난 수년간의 반목이 더 심한 형태로 이어질 것이다. 대전환이냐, 과거보다 더 어두운 과거로의 회귀냐, 대한민국은 기로에 서 있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저 감옥 가나요?”명태균 사태가 본격화하기 직전인 올 초가을, 유명 역술인 A 씨에게 모녀가 찾아왔다.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과 장모였다.“모녀가 와서 ‘나 감옥 가냐’고 묻더군요.”“미쳤네요. 선생님 것(역술)이 어떻다는 게 아니라, 자기 남편이 평생 검사였으니 정답은 자기 남편이 알지….”(A 씨 지인)“그래 말입니다, 허허.”물론 당시 특검법 공방 상황에서 김건희 여사가 느꼈을 불안감 압박감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대통령실 안팎에 법률 자문·예측을 해줄 최고의 전문가들이 숱한데도 역술인을 찾아가는 모습은 윤 부부가 인생 항로를 헤쳐가는 방식이 세상의 상식과 얼마나 괴리돼 있는지를 재확인시켜 준다.자기 진영 안방에 폭탄을 터뜨리며 정치적 자폭을 한 윤 대통령의 행동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사회학 정치학 심리학 정신의학적 분석은 물론이고 역술·무속의 영향까지도 포함해야 한다. 근저에는 부인에 대한 맹목적 애정이 있는데, 그 부인은 무속에 상당히 심취한 데다 자기가 정권 창출의 주역이며 정치와 사람 포석에 있어서는 남편보다 내공이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데 윤 대통령은 난제에 닥쳤을 때 정상적으로 풀어갈 문제 해결 방식 프로세스를 훈련받거나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검사·수사관들을 대거 풀어 다 압수해 오고, 피의자가 소변을 지리도록 겁을 줄 수 있는(신정아 씨의 자서전 주장) 그런 일방적 힘의 우위 상태에서 상대를 다루며 목적한 바를 이뤄가는 과정을 수십 년 반복하다 보니, 일반 직장생활이나 자영업 3년만 해도 체득하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작용 반작용을 예측 계산하고 적절한 방식을 찾아가는 상호관계 훈련을 전혀 거치지 못한 것이다.올가을 김 여사는 체중이 40kg도 안 되는 상태였다고 한다. 스트레스가 극심하면 물도 마시지 않으며 남편의 속을 끓게 했다. 그런 부인에게 남편은 벼락부자가 자식에게 묻지 마 애정을 퍼붓듯 시종일관 감싸며 권력을 나눠줬고, 부인 문제의 상식적 처리를 요구하는 모든 이를 원수로 여겨 적대했다.초등학교 줄반장만 되어도 조심했을 기초적 공사(公私)구분을 안 한 결과가 오늘날 파면과 구속 위기에 처한 참담한 모습이다. 부인도 머잖아 사법처리 수순을 밟게 될 것이다.당사자 부부만 폭망한 게 아니다. 윤 대통령이 계엄이 황당무계한 오판이었음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대신 강경 지지층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바람에 보수는 다시 갈가리 찢길 위기에 놓였다. 윤 대통령이 보수진영을 궤멸 위기로 내몬 데 일말의 죄책감을 느낀다면, 그리고 결과적으로 좌파가 침투시킨 트로이 목마 같은 역할을 했지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키려는 마음만은 진심이었다면 조금이나마 속죄할 길은 있다.첫째, 하루빨리 스스로 국민의힘을 탈당하는 것이다. 무조건 자신을 싸고도는 맹목적 지지층을 향해 “보수진영은 더 이상 나의 탄핵 문제로 다투지 말아 달라”고 호소해야 한다. 계엄이 정당했다는 주장은 지지자들을 향해서가 아니라 수사기관과 헌재 심판대에서 하라. 더 이상 보수진영 내에선 윤석열을 주제로 한 싸움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둘째, 만약 헌재에서 탄핵이 기각된다 해도 개헌에 필요한 일정한 기간을 거쳐 자진 하야할 것임을 약속해야 한다. 절대다수 국민들로부터 과대망상·정신착란 상태 아니냐고 의심받는 상태에서 어떻게 리더십을 발휘하겠는가. 억울하다고 여기기 전에 자신의 판단력, 정서적 상태가 정상인지를 진지하게 자문해봐야 한다. 국회 의석 거의 3분의 2를 적대적 야당이 갖고 있는 상태에서 계엄은 결코 성사될 수 없다는 기본적 사실 관계를 외면하고 계엄을 선포해버리는 그 판단력은, 무속의 영향으로 맹목적 성공 믿음을 가졌거나 신체적으로 판단력 상실 상태에 빠졌거나 둘 중의 하나일수 밖에 없다. 병정놀이보다도 허술한 준비로 무모하게 밀어 붙인 자신의 나사 빠진 업무 추진 능력도 자체 진단해보라.셋째, 부부 모두 감옥에 가는 상황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등 사법절차를 존중하겠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침대축구’ 같은 저질스러운 행태는 보수의 사전엔 없다. ‘저질 좌파’나 하는 짓이다. 보수의 품위를 훼손하면 안된다. 군 통수권자로서 수사기관과 법정에서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장병들이 무슨 죄가 있겠느냐”며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물어달라고 호소해야 한다. 정치인 윤석열은 전통과 역사가 있는 정통 보수정당에 3년 전 영입돼 벼락승천(陞遷)하듯 대통령이 됐다. 하지만 그가 잠깐 머물렀던 한국의 정통 보수정당은 그로 인해 씻기 힘든 상처를 받았다. 윤 대통령은 이제 자신과 이 당의 인연은 끝났음을 인식해야 하고 보수정당은 ‘윤석열 악몽’에서 깨어나야 한다. 국힘이 윤석열과 결별해야 하는 이유는 차고 넘친다. 윤 대통령은 보수의 지지로 당선됐지만 보수의 핵심적·시대적 요구를 외면했다. 그는 문재인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졌다. 울산 선거 부정, 원전 수사 등 정의 실현은 매번 문재인 턱밑에서 멈췄고, 보수는 절망했다.보수가 윤석열과 분리돼 탄핵 찬반 수렁에서 벗어나야, 천운의 횡재를 한 듯 흥분한 야당과 좌파세력이 덮어씌우고 있는 선동 프레임에 맞설 수 있다. 국힘 일각에서 결별을 망설이는 유일한 이유는 이재명 대표 때문인데, 당당하게 윤석열을 빨리 손절할수록 보수에겐 회복 기회가 커진다. 패배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국힘이 윤석열을 청산하면 이재명을 청산하지 못하는 좌파에게 할 말이 생긴다. 만약 대선에서 보수가 참패한다면 이는 이재명이 강해서가 아니라 보수가 윤석열 후유증으로 분열된 채 반(反)이재명 이외에 보수가 열어갈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해리스가 반(反)트럼프만 외치다 참패했듯이.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패악질을 일삼아 온 망국의 원흉, 반국가세력을 반드시 척결하겠습니다.” 한밤중 용산 대통령실에서 중계된 소극(笑劇·Farce·우스꽝스럽고 터무니없는 상황을 연출하는 짤막한 희극) 같은 장면들을 이해하기 위해 카메라를 3년 반 전 서울 서초동 아크로비스타 아파트 실내로 옮겨 보자. “선배님, 이제 그만 가져오셔도 됩니다.” 문재인 정권의 불의에 맞서 사표를 던진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아직 선거 출마를 선언하기 전의 시기였다. 윤 전 총장의 자택에 60대 초반 남성이 초인종을 눌렀다. 초청하지 않아도 거의 매일 찾아오는 그의 손에는 여의도 정가 동향을 정리한 문서가 들려 있었다. 충암고 1년 선배인 남자는 윤 전 총장을 “아우님”이라 호칭했다. 문서 내용은 허술했다. 하지만 그 정성이 지극해 윤 전 총장은 “힘드실 텐데 그만 가져오셔도 된다”고 조심스레 사양하기도 했다. 그 후 대선 캠프를 꾸린 윤 전 총장은 그 선배를 외교안보팀에 넣어줬다. 거기서도 보고서 퀄리티가 떨어진다는 소리가 나왔다. 팀장은 우회적으로 “직접 쓰기 힘드실 텐데 현역 시절 데리고 있던 부하들한테 시켜 보지 그러느냐”고 권했고 보고서 내용이 업그레이드됐다. 고교 후배의 집에 드나든 그 전직 장성은 윤석열 정부 출범과 더불어 대통령 경호처장이 됐고, 2년 4개월 뒤에는 국방장관이 됐다. 그러고는 장관 취임 3개월 만에 황당하고 엉성해서 ‘자학 개그’라고 불러도 좋을 계엄 사태의 ‘조연’을 맡았다. 조연이라고? 김용현 국방장관이 계엄을 건의했으니 주연 아니냐며 갸우뚱할 독자들을 위한 설명은 잠시 후에 하겠다. 게재 요일이 정해져 있는 고정 칼럼은 보통 며칠 전부터 준비한다. 오늘 자에 게재될 칼럼도 이미 지난 화요일 오후쯤 제목과 내용의 골격을 완성해 놓은 상태였다. 제목은 ‘국민은 민주당과 이재명을 탄핵하고 싶다’였다. 공직자 탄핵 남발과 예산 농단 등 민주당의 의회 권력 남용이 건국 이래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여서 곧 민심의 역풍을 맞게 될 것임을 경고하는 내용이었다. 사람 됨됨이를 알고 싶으면 권력을 줘보라고 했는데, 현재 민주당의 힘자랑은 이재명 정권에서 펼쳐질 전횡의 예고편이므로 스스로 낙선 운동을 하는 셈이라는 논지였다. 이 대표가 175석 권력에 취해 자기 발등을 찍고 있다는 게 최근 필자가 취재한 중도층과 온건 보수층의 민심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기적처럼 수호천사가 다시 나타났다. 지난 총선 때 김일성의 남로당 숙청을 연상케 하는 공천 학살로 참패가 예상됐던 이 대표에게 선거 직전 막판 등장한 윤석열 부부가 대승을 안겨줬듯, 이번에 윤 대통령은 정치사에 남을 어처구니없는 방법으로 이 대표 구원자 역할을 해냈다. 필자 취재에 따르면 계엄은 순전히 윤 대통령 본인의 흥분 격노에 의해 돌발적으로 결정됐다. 윤 대통령을 결정적으로 분노에 휩싸이게 만든 사안은 민주당이 경찰의 대공 수사에 쓰일 특활비 특경비까지 삭감한 대목이었다. 국정원 대공수사권을 없애더니 이젠 경찰 수사까지 마비시킨다고? 종북주의자들이 정말 국회 깊숙이 침투한 것 아니냐며 격노했다고 한다. 계엄을 선포해 봤자 국회 표결로 무효화된다는 엄연한 현실은, 군이 알아서 조치하겠지라는 막연한 기대에 묻혔는데, 믿었던 국방장관은 고도의 정교함과 치밀한 사전 준비가 요구되는 이런 고난도 작전을 실행할 능력도, 시간 여유도 없었다. 즉흥적, 감정적이며 고집대로 밀어붙이는 윤 대통령의 성정과 예스맨 충성파만 선호하는 인사 스타일이 합쳐져 자기 발등을 찍은 것이다. 윤 대통령은 “야당 행태를 보라, 내가 뭘 잘못했냐”며 여전히 억울해한다고 한다. 물론 야당이 상상 초월 수준으로 저급하고 노골적인 의회 독재 행태를 보이는 건 국민도 다 안다. 하지만 야당에 슈퍼 의석을 만들어준 장본인이 자신임을 잊어선 안 된다. 명품백 사건 직후 물도 안마시고 드러누운 아내를 설득해 사과하게 했다면, 선거 직전 의료대란·이종섭 출국 등의 현안에 대해 고집만 조금 꺾었더라면, 총선 결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이 대표는 총선 때 윤 대통령에게서 175석 요술방망이를 선물 받은 데 이어 이번에는 대권행 고속도로를 선사 받았다. 이대로 탄핵을 밀어붙이면 사법 리스크는 사라지고 대권 쟁취는 식은 죽 먹기다. 보수는 딜레마다. 국민의힘이 최고 지도자로서의 신뢰 자본을 잃은 윤 대통령을 감싸고 돌면 공멸이 불문가지다. 하지만 탄핵이 된다면 대선은 해보나 마나다. 계엄 선포는 자폭 테러나 마찬가지였는데 폭탄을 터뜨린 곳이 상대 진영이 아니라 자기집 건물 한복판이었던 셈이다. 그런데도 친윤계는 윤 대통령의 탈당 출당조차 반대하고 있다. 정말 민심을 전혀 모르는 안이한 집단이거나, 정권이 좌파에 넘어가는 게 TK 등 보수 아성에서 의원직을 오래 하는 데 불리하지만은 않다는 이기적 계산의 발로다. 윤 대통령의 정치 생명은 회생 불가능하다는 엄중한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만 대책이 모아진다. 보수가 궤멸을 피하려면 지지층 재결집을 호소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덕적 명분을 쌓아야 한다. 보수 몰락의 최대 요인이었던 김건희 여사 문제가 특검법 통과로 엄정한 사법 처리 절차 궤도에 올라서고, 계엄 주도 세력이 처벌 받고, 윤석열이라는 이름이 쥐 죽은 듯 눈과 귀에서 멀어져야만 등 돌린 온건 보수 시민들이 “그래도 헌정 중단은 안 된다. 좌파 너네들은 더 큰 허물이 있지 않느냐”며 재결집할 마음이 생길 것이다.야당이 강성 좌파와 손잡고 사태를 정략적으로 이용해 사회를 더 극심한 혼란의 도가니로 밀어넣으면 국민의 냉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계엄령 사태의 책임은 냉정하게 법에 따라 엄히 물으면 된다. 계엄령 사태에 국민이 분노한다고 해서 야당의 의회 독재와 이 대표의 범죄 혐의에 면죄부를 준 것이 아님을 한시라도 잊어선 안 된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2년 반 동안 실망을 거듭했지만 그래도 많은 이들이 마지막 반전의 전기(轉機)를 기대했을 것이다. 지지율 10%대라는 처참한 성적표를 받은 데다 마침 임기 반환점이므로 진정성 있는 반성과 쇄신의 다짐을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윤석열 대통령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정말 이 사람은 안 바뀌겠구나’ ‘변할 의지도, 자신을 변화로 이끌 내적 역량도 없구나’…. 실낱같은 기대를 품었던 사람들마저 다 고개를 돌리고 포기한다. 성공한 대통령을 기원하며 애정 어린 비판을 아끼지 않던 이들은 “더 말해봤자 입만 아플 뿐”이라며 입을 다문다. 지난달 21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와의 면담부터 지난주 기자회견까지의 짧은 기간에 윤 대통령은 남은 임기에 대해서도 암담한 전망을 하게 만드는 특질들을 드러냈다. 첫째, 내재적 관점으로만 자신을 바라볼 뿐 외부의 시선으로 자신의 상황을 객관화시켜 보는 훈련이 전혀 안 돼 있음을 드러냈다. 끝없는 자기합리화와 장광설이 그래서 나온다. 둘째, 그의 ‘와이프 퍼스트’ 철학은 일반인의 가족 감싸기와는 완전히 다른 초(超)상식의 수준임이 드러났다. 소설·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세속의 도덕가치 시선 판단을 뛰어넘는 절대적 차원의 결속이다. 윤 대통령이 진짜로 김 여사의 행태를 고 육영수 여사가 가정 내 야당 역할을 했듯 “여보, 회의에서 너무 화내지 마세요”라고 조언하는 그런 수준으로 인식하고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아내가 정권 최고 실력자 행세를 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아내로서의 조언’이라고 규정했다면 이는 국민 기만이고, 육 여사에 대한 모독이다. 대통령 부부는 변할 의향이 없다. 포화가 거세니 잠시 웅크린 것이다. 김 여사가 그간의 권력 행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뉘우치고 앞으로는 정말 아내로서의 역할만 충실하겠다는 생각이 있었다면 직접 사과하러 나왔을 것이다. 처참한 성적표에 관중은 떠나고 전광판은 꺼졌지만 앞으로도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기 어렵다. 트럼프 당선으로 격랑에 휩싸인 국제 무대로 달려갔는데 반짝 반등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효과만으로는 길게 가지 못한다. 길게 보며 차분하고 냉정하게 대응해야 할 외교안보 현안에서 성급하고 성과에 안달을 내는 일이 없도록 경계해야 한다. 업보(業報)라는 단어가 자꾸 생각난다. 업보는 발버둥치고 노력해도 어쩌기 힘든 운명적 굴레다. 윤 대통령이 한 대표와의 면담 다음날 부산 범어사 방문에서 “업보로 생각한다”고 했는데 김 여사 문제처럼 자신의 의지만 있으면 해결할 수 있는데도 안풀고 있는 일을 업보라 칭하긴 곤란하다. 한국의 보수 진영에게 ‘윤석열 정권’이라는 존재가 던지는 고민이야말로 업보라 할만하다.“우리 대통령”이라고 옹호하다가는 공멸하기 십상인데,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다. 싫든 좋든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인 채 정권 재창출이라는 고지를 올라야 한다. 그 험난한 등정을 위한 필수 선결 조건은 정권의 남은 임기 동안 김 여사 문제를 분리시키는 것이다. 야당이 특검법 수정안을 냈으니 여당도 위헌성과 정략적 이용 가능성을 최대한 줄이는 방향으로 협상을 이끌며 국면을 주도해야 한다. 특검 대상도 도이치모터스와 명품백, 그리고 용산 이전 과정에서의 김 여사 관련 특혜 여부로 집중해야 한다. 명태균 관련은 검찰 수사를 지켜본 뒤 추진해도 늦지 않다. 김 여사로선 억울한 누명과 가짜뉴스의 수렁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고, 잘못이 있다면 지금 처벌 받는 게 낫다. 지금 피하면 다음 정권에서 몇 배 더 혹독하게 치르게 된다. 천지가 무너져도 검찰 포토라인에 못 서겠다면 조용히 아프리카 등 제3세계로 가서 임기말까지 봉사 활동하라. 여사 문제를 풀지 못하는 한 국민이 다시 윤 정권 지지로 돌아오는 건 기대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보수는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박근혜 탄핵의 경험 때문에 보수는 그동안 사실상 윤 대통령 부부에게 인질처럼 매인 형국이었다. 좌파에 정권이 넘어가선 안 된다는 걱정 때문에 어떡하든 설득해 끌어안고 가려 했다. 하지만 이러다간 초가삼간 마지막 칸까지 다 태워 먹을 수 있다. 한동훈 대표는 그동안 민심을 전달하려 노력했으나 최근엔 현상 유지에 급급한 모습을 보이는데 그렇게 되면 ‘윤석열 아류’가 된다. 윤 대통령의 방향을 바꿔주는 역할을 하면 국민이 다시 쳐다보겠지만 이도 저도 아닌 상태라면 큰 그림을 놓칠 수 있다. 보수진영은 주체적으로 정권 재창출 운동에 나서야 한다. 이를 주도할 동력은 국힘 당원과 지식인들이다. 하루빨리 부인 문제를 정리하고 정상궤도로 돌아와 달라는 당원들의 뜻이 서명운동을 비롯한 조직적 내부 혁신 운동으로 분출돼야 한다. 대학, 싱크탱크, 단체 등의 온건 보수 지식인들도 나서야 한다. 대통령이 쇄신을 거부하면 아예 보수진영에서 설 자리가 없어질 것이라는 압박을 해야 한다. 야당·좌파의 정략적 이용 가능성을 엄중히 경고하면서 대통령의 변화를 끌어내는 보수 내부 혁신운동이다. 보수진영 원로와 중진, 잠룡들은 개인적 이해타산을 떠나서 다음 세대 보수 리더들이 등장할 토양을 마련해줘야 한다. 내가 뽑았다는 사실에 지나치게 얽매일 건 없다. 보수가 뽑았어도 잘못하면 보수가 엄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래야 보수의 새로운 터전이 열릴 수 있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결국은 이 지경까지 왔다. ‘김건희 특검’을 피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헌법과 법치주의를 모독하는 편향된 내용의 야당 특검법이 대통령 거부권의 장벽을 넘어서는 장면이 머잖아 펼쳐질 가능성이 크다. 헌정사에 상처가 될 이런 상황을 초래한 주된 책임은 윤석열 대통령에게 있다.김 여사 문제에 대한 그의 인식을 보여주는 발언들이 한동훈 대표와의 면담 다음 날 부산 범어사 방문에서 나왔다.“업보로 생각하고 나라와 국민을 위해 좌고우면하지 않겠다”, “돌을 던져도 맞고 가겠다”. 업보는 현 상태에선 아무리 발버둥쳐도 어쩔수 없는 운명적 굴레다. 그런데 김 여사 사태는 대통령 본인의 의지만 있으면 언제든 극복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이를 업보라 여기는 건, 비유하자면 사탕과 과자를 끊지 못해 초고도 비만 위기에 처했는데 그걸 끊을 생각은 않고 비만은 나의 업보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국민을 위해 좌고우면 않겠다”는데, 지금 향하는 길은 후보 윤석열을 지지했고 지금도 윤 정권이 정상궤도로 복귀해 성공하길 염원하는 수많은 국민의 뜻과 정반대 방향이다. “돌을 던져도 맞고 가겠다”는 건 나라를 위해 옳은 길을 가는 과정에서 세상의 오해로 비난을 받아도 감수하겠다는 의지를 다질 때 하는 말인데, 자기 아내의 비리 의혹을 감싸는 일에 국민과 대의명분이 끼어들 자리가 어디 있는가. 지금 대통령 부부에게 쏟아지는 건 우중(愚衆)의 돌팔매가 아니라 공정과 상식을 회복시키라는 정당한 요구다.윤 대통령이 이런 착각에 빠진 것은 두 가지 요인 때문이다. 첫째, 좌파의 선동과 민의를 혼동한다. 윤 대통령은 김건희 논란이 선동과 가짜뉴스 탓이며, 여기에 보수진영과 여당 일부까지 휩쓸려 부화뇌동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런 광풍(狂風)에 김 여사가 희생양이 됐는데 사내 대장부가 나 하나 살자고 아내를 마녀사냥의 제물로 던져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김 여사를 향한 비난에 좌파의 가짜뉴스와 선동, 편견이 섞여 있음은 분명하다. 그게 90%쯤 차지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나머지 10%의 진짜 허물을 감싸고 법치의 예외 특권지대에 두려다 90%의 선동과 뒤섞이게 만든 게 대통령 본인이다. 필자는 민심은 과학이라고 본다. 이는 민심이 항상 100% 옳다는 뜻이 아니다. 민심은 선동과 가짜뉴스에 휩쓸려 광풍이 될 수 있다. 산사태가 쏟아질 때 그 흙탕물엔 온갖 가짜뉴스 선동 괴담이 뒤섞인다. 이 단계에서 광풍을 민심으로 오독(誤讀)하면 억울한 희생양을 양산한다. 괴담에 휩쓸린 군중의 광란이 역사를 그릇된 방향으로 이끈 사례들을 우리는 수없이 목도했다.그러나 민심의 강물이 본류에 이르면 오물은 걸러지고 투명해진다. 숙려 과정을 거친 단계의 민심은 진실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김 여사 논란은 시작된 지 2년 반이 지났다. 그동안 여러 녹취들이 터져나왔고, 항소법원 판단도 나왔다. “아내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던 대국민 약속과 달리 공동정권 주인인 양 행세한 단초들이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이 아내를 사법 절차의 심판대에 서게 하는 건 희생양으로 내놓는 게 아니라, 특권의 갑옷을 벗고 검사 부인, 대통령 부인이 아니었다면 누구나 거쳤을 절차를 거치게 하는 것일 뿐이다.윤 대통령이 민심과 괴리된 착각을 하게 된 또 하나의 요인은 버럭 성미다. 여사 문제에 대해 쓴소리를 하면 호통 벼락이 떨어지니 바른 소리의 씨가 마르고, 구미에 맞는 얘기를 해주는 유튜브만 보니 여론과 동떨어지게 된 것이다. 만인환시리라는 걸 개의치 않은 채 감정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잦은 것도 옆에서 만류해 줄 참모의 부재 때문이다. 한 대표에겐 “우리 의원들이 야당 편에 서면 나도 어쩔 수 없다”며 담대함을 보여놓고 돌아서선 바로 원내대표를 불렀다. 이중적인 속내가 드러나는 그런 장면은 목도하기조차 민망할 지경인데도 정작 본인은 투명 유리병 바깥에서 지켜보는 국민의 시선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한 대표도 정치력이 부족했다. 여당 대표가 대통령의 고집을 꺾어 설득하는 건 토끼 간을 빼오듯 고도의 정치력이 요구되는 일이다. 한 대표가 요구한 사항들은 옳았지만, 여당 대표라면 언론이나 야당과는 전달 방식이 달랐어야 했다.윤 대통령의 극적인 인식전환이 없는 한 특검은 피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김건희 이슈를 거부권에 의지해 계속 덮어 둔다는 것은 보수 전체의 공멸을 의미한다는 인식이 여권 내에 계속 확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특검은 보수진영 전체에 커다란 질곡이 될 것이다. 특검의 칼날이 광란하듯 춤추며 밑바닥의 잔재물까지 다 들춰내다보면 탄핵 세력에 악용될 사안들이 튀어나올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여사 특검을 피할 수 없는 이유는 여사 문제를 이대로 덮어두면 남은 임기 동안 대통령의 리더십 관리에 치명적 걸림돌이 돼 국정 운영의 동력을 소진케 하고 보수정권 재창출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특검이 시작되면 보수의 초가삼간이 흔들리겠지만 그래도 김 여사 블랙홀에서 빠져나오려면 청산 변곡점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최선의 길은 윤 대통령 스스로 팔을 잘라내는 결단을 내리는 것이었지만 정반대 방향으로 내달았으니 타의에 의해서라도 도려내야 한다. 회복은 지난한 과정일 수도 있지만 그게 두려워 수술을 기피해서는 안된다. 아직 임기가 절반 남았으므로 특검 광풍이 지난 뒤 국정동력을 되찾을 시간이 있다. 공정하고 중립적인 특검이 되게 하려면 윤 대통령이 “합리적인 안이라면 받으라”고 한 대표에게 프리핸드를 줘야 한다. 그래야 여당이 혼연일체가 돼 특검법안 내용을 놓고 야당과 줄다리기를 벌일 수 있다.지금 상태에선 한 대표가 특검 내용을 갖고 야당과 협상에 나섰다가는 친윤의 반발로 당이 깨지는 위험을 안아야 한다. 야당도 분열된 여권의 속사정을 알기에 자기들 뜻대로 밀어붙일 것이다. 그러다보면 결국 야당 원안이 여권 이탈표를 업고 통과될 공산이 큰데, 이는 헌정사와 법치주의, 대통령 부부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보수정권 재창출이라는 밥그릇을 엎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는 정치력을 발휘해야 할 때다. 그러려면 윤 대통령이 하루빨리 귀를 열고 민심을 들어야 한다. 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김건희 여사의 사과를 놓고 여권 내에서 왈가왈부하는데, 다 부질없다. 때를 놓쳤기 때문이다. 사과로 문제를 풀 수 있는 단계를 한참 지나버렸다.결론부터 말하면 유일한 해법은 사법적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이다. 대선 때부터 3년 넘게 보수진영 전체를 욕보이고 있는 여사 문제 수렁에서 헤어나려면 김 여사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일반 국민 누구나에게 적용될 절차를 거쳐 공정하고 엄정한 사법적 처분을 받는 것 이외엔 그 어떤 출구도 없다. 명품백 사건이 터진 직후인 지난해 12월초 필자는 김 여사가 국민에게 사죄하고 사가(私家)로 가 근신해야 하며, 윤석열 대통령이 배우자 문제의 재발을 막을 근본적 장치를 마련하지 않으면 여사 리스크가 돌이키기 힘든 지경까지 치달을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만약 그런 민의에 순응했다면 최소한 명품백 문제는 일단락됐을 것이고, 그 후 10개월간 터져나온 온갖 새로운 논란들도 예방됐을 것이다.부끄러운 일을 행했으니 사과는 당연히 해야 하지만 이젠 사과만으로는 안 된다. 명품백 수수 같은 참담한 일이 공개됐는데도 전당대회 문자 공개, 대통령실 이전 공사 업체 선정 논란, 공천 개입 논란 등의 낯부끄러운 일들이 계속 터져나오는 걸 보면서 국민들은 김 여사에 대해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정말 최소한의 공사 구분 의식, 자기 위치 파악 능력, 윤리관마저 갖추지 못한 상태로 권력 정점부에 들어가 있구나라는.설상가상으로 새로운 논란의 눈뭉치들이 구르면서 더 큰 눈사태를 예고하고 있다. 최근 논란이 커지고 있는 공천 개입, 그리고 끊임없이 소문이 도는 공공기관·공기업 인사 개입 논란은 정권에 심대한 타격을 안길 수 있는 소재들이다. 오래전부터 정치권 주변에선 브이원(V1) 브이투(V2)라는 말이 돌았다. 브이는 VIP를 줄인 표현으로 대통령을 지칭한다. V2는 김 여사의 영향력이 막강하다는 취지의 신조어인데, 필자는 이를 미확인 풍문을 근거로 한 과장된 용어로 치부해 왔다.그러나 요 몇 달 필자는 김 여사가 실제로 공기관 인사에 관여하고 있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는 사례들을 접했다. 전언으로 들은 것들까지 합치면 여사의 영향력 행사는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라고 판단할 수 밖에 없는 정황이다. 더 놀라운 대목은 과거 정권들에서 처럼 베갯밑 송사로 대통령을 통해 간접적으로 뜻을 관철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김 여사가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며, 자신이 이런 영향력 행사를 할 권리가 있다고 여긴다는 전언이다.김 여사는 자신이 윤석열 정권 탄생에 상당한 지분이 있다고 여긴다고 한다. 예를 들어 남편이 검사 시절 정치적 탄압에 의해 좌천됐을 때 로펌에서 고액 보수를 제시하며 영입하려 했는데 자신이 검사의 길을 계속 가도록 설득하는 등 고비마다 자신의 조언이 남편을 오늘로 이끄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승이 아무리 훌륭하게 제자를 키웠어도 제자의 월급을 같이 쓰자고 할 수 없듯이, 김 여사는 국민에게서 실오라기만큼의 권력도 위임받은 적이 없다.사인(私人)이 국정에 개입하면 그게 국정농단이고 그걸 막기 위해 시스템이 있는 건데, 시스템을 요식행위로 만들어버리는 행위가 용인된다면 이는 국민에 대한 배신이다.대통령의 공천 개입도 범죄(박근혜 공천 개입 징역 2년)인데, 하물며 배우자가 공천이나 인사에 손을 댄다면 초가삼간이 아니라 정권 전체, 보수진영을 태워 초토화시킬 수 있는 위험한 행위임을 인식해야 한다. 만약 어디서 녹취라도 나온다면 탄핵몰이에 광분하지만 정작 윤 대통령이 실정법을 위반한 내용을 찾을 수 없어 재료 빈곤에 시달리는 좌파에겐 최대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여권은 이런 눈사태가 본격화하기 전에 신속히 김 여사가 사법적 심판을 받게 해야 한다. 과거 전직 대통령들 수준에 버금가게 소환돼 밤샘 조사받고, 만약 조금이라도 실정법 위반 혐의가 있다면 영장실질심사를 받아야 한다. 귀 막고 시간을 보낸다고 해소될 문제가 아니다. 지금 덮고 가면 다음 대선에서 여당 후보들이 먼저 여사 문제를 공약할 것이다. 여야 누가 이기든 그때는 종합세트로 탈탈 털리는 사법 심판을 받게 된다. 다음 대선까지 버티기도 쉽지 않다. 특검법에 대한 여당 이탈이 그나마 적은 이유는 단 두 가지다. 하나는 야당의 특검법이 너무 편파적이고 자의적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특검 광풍이 몰아치고 만약 의혹들이 사실로 확인되면 여권 전체가 헤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팽배하기 때문이다. 여당 의원들이 김 여사가 억울하다고 여겨서 특검법에 반대하는 게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의원들 머릿속엔 이대로 거부권에만 기대 버티는 건 공멸의 지름길이라는 인식도 함께 퍼져 있는 그야말로 딜레마 상태다.여권에 최악의 시나리오는 밀리고 밀리다 이탈표로 인해 특검법이 거부권을 넘어서는 상황이다. 그때 맞게 될 매는 지금보다 몇 배 혹독하고, 여권은 “우리는 대통령 부인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집어넣는다”는 생색도 못 낸 채 공멸 위기를 맞게 된다. 아직 대통령 임기가 절반 넘게 남아 있다. 자기 팔을 도려내는 결단이 대통령과 여권 전체는 물론 김 여사를 위해서도 현명한 해법이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검찰 수사가 흉기가 되고 정치보복 수단이 되는 현실이 개탄스럽다.”지난 일요일 문재인 전 대통령을 방문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문다혜 씨 관련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를 정치보복으로 규정했다. ‘문 정권 비리 청산’이 중단되어야 할 정치보복인지, 정의의 복원을 위해 반드시 완수되어야 할 시대적 과제인지를 판단하는 건 어렵지 않다. 몇 가지 기준점을 따져보면 되기 때문이다.첫째, 정치보복 여부는 비리 의혹의 내용을 보면 판단할 수 있다. 기획수사로 주변까지 샅샅이 뒤져 흠결을 찾아내고, 얼기설기 엮어 몰아갈 경우 이는 정치보복에 해당한다. 그런데 지금 사안이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야당 내에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현재 드러난 의혹들은 정치적 내용이 아니다. 개인비리 의혹도 정치보복이어서 조사를 못한다면 법질서는 왜 존재하는가. 이 대표도 정치보복 주장만 펼 게 아니라 논리적으로 판단의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앞으로 본격적으로 법의 심판대에 올려야 할 울산시장 선거 개입,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탈원전, 통계 조작, 대중(對中) 삼불일한 약속, 대북정책 의혹 등의 주제들 역시 해당 사건의 장본인이 문재인이든 윤석열이든 김대중이든 김영삼이든 덮어주고 넘어갈 수 있는 사안들이 결코 아니다.이미 드러난 것만으로도 응당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내용들이고, 묻혀 있는 최종 진실이 반드시 밝혀져야만 후속 정책을 이어갈 수 있는 사안들이다.둘째, 전임 정권 청산이 반복되면 국민 분열이 더 심각해질 것이라는 우려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미 정신적 내전 상태인 좌우 진영 간 대립이 더 격화되는 것은 안타깝지만, 비리를 눈감아주고 넘어가는 걸 관례로 만들 수는 없다. ‘전임정권의 허물을 처벌하는 악순환은 멈춰야 한다’는 주장도 일리는 있지만 진실도 밝히지 않은 채 덮어주고 가는 것이 화해와 용서는 아니다. 서로의 비리를 눈감아주는 건 화해가 아니라 야합이다. 설령 윤 정부가 전임 정권 비리 청산을 하지 않는다해도 야당이 차기 집권할 경우 전임 정권 청산의 수레바퀴는 다시 더 거세게 돌아갈 것이다.협치가 더 어려워질 것이란 우려도 말장난에 가깝다.그동안 윤 대통령이 문재인 비리 청산을 뭉개 왔다고 해서 협치가 이뤄졌나. 좌파 진영과 친문 친명계가 보수 정부에 조금이라도 협력할 의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좌파는 압박을 느낄 때 협상장으로 나선다. 비리의 시시비비를 가려 엄정하고 원칙적으로 임하는 게 결과적으로 협치의 지렛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셋째, 적폐 청산을 하려면 힘있는 임기 초에 했어야지 이미 임기 반환점을 목전에 둔 시점에 매달리면 소모적 싸움만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들린다. 맞는 지적이다. 하지만 늦었다고 해서 끝내 뭉개버리면 이는 전임 정권의 비리에 방조범이 되는 것이다. 시대적 과제를 뒤늦게라도 명확히 인식하고 실행한다면 평가받을 것이다.물론 늦은 이유는 여러 가지다. 대통령실 주변에선 자꾸 검찰총장 탓을 하지만 통치권자가 명확한 방향 설정을 안 한 탓이 가장 크다. 국민은 윤 대통령이 자신을 발탁해준 인사권자에 대한 의리 때문에 시대적 과제를 외면해 온 것 아니냐는 의혹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사실이다. 문다혜 건은 본질과 관련 없는 곁가지라는 지적도 백번 맞다. 울산시장 선거, 서해 공무원 사건 등의 최종 책임소재를 가리지 않는다면 법조인 출신 대통령이 법치주의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충성 의무를 배신하는 것이다. 청산해야 할 문재인 비리 리스트에는 사법적 정의 차원을 넘어 국가 운영 차원에서도 필수불가결한 내용들이 허다하다.남북 간에 어떤 내용과 제의가 오갔는지 후임 정부는 모른다. 정의용 당시 안보실장은 무슨 근거로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강조했는지, 대통령이 김정은에게 준 USB엔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 대북 지원 약속은 어떤 내용이었는지 다 비밀로 봉해졌다. 중국에 삼불일한을 누가 어떤 워딩으로 약속했는지도 비밀이다. 그런 핵심 내용을 모른 채 후임 정부가 어떻게 전략을 짜고 정책을 구상할 수 있다는 말인가.통치권은 사법처리 대상이 아니라는 주장도 나온다. 하지만 통치행위라해서 절대적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니다. 진실은 명백히 밝혀내야 하며, 결정 과정에서 법률 위반이 있었다면 처벌 받아야 한다. 사법적 심판의 대상으로 삼기 어려운 사안이라면 감사원이 나서서 진상을 밝힐 수 있다.물론 저항도 갈수록 거세질 것이다. 지난 일요일 이재명-문재인 간의 ‘방탄동맹’이 구축됐는데 이는 2년 전의 데자뷔다.2022년 10월 감사원이 서해 피살 공무원 감사와 관련해 서면조사를 요청하자 문 전 대통령은 “대단히 무례한 짓”이라고 반발했고, 이 대표는 “국민이 맡긴 권력으로 전 정부에 정치보복을 가한다”고 거들었다. 민주당은 자신들의 집권 기간에 임명된 감사원장을 공수처에 직권남용 혐의로 고발하고 감사원법을 개정해 특별감사시 국회 승인을 의무화하겠다고 나섰다. 2년 전의 방탄동맹은 흐지부지됐지만 이번엔 다를 것이다. 상대의 손을 놓으면 죽는다는 절실함으로 손을 잡을 것이고, 진영 내의 분열을 용납하지 않은 좌파 생태계 특유의 ‘보이지 않는 손’의 힘이 강하게 작용할 것이다. 검찰을 흉기로 규정하며 반발하는 이 대표와 민주당에 제안하고 싶다. 문재인 비리를 수사하는 검찰을 그렇게 못 믿겠고 편파 보복수사가 우려되면 특검 도입을 선도하라. 정말 정치보복이면 특검에서 문 전 대통령의 결백이 다 밝혀질 것 아닌가. 국민이 가장 분노하는 점은 문 정권이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을 훼손하고 나라의 궤도를 이상한 쪽으로 틀어버리려 한 점이다. 진실을 밝혀 책임을 묻지 못하면 자기 멋대로 나라의 근간을 뒤흔들려는 권력자가 또 나오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국민이 정치 초보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밀어준 것은 이 과제를 가장 잘 수행할 적임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권 심판을 위한 첫걸음을 이제 겨우 뗐다. 조족지혈(鳥足之血)이고 만시지탄(晩時之歎)이지만 당연지사(當然之事)다. 늦은 만큼 더 확실히 해야 한다.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