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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함께하는 ‘아보하’ 소망, 추억의 흑백사진에 담다 [별별부산] ⑨
다사다난이라는 상투적 표현으로 퉁치고 넘기기엔 부족할 정도로 많은 사고와 난리가 났다. 답답하고 안타깝다는 생각을 넘어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도 많았다. ‘다이내믹 코리아’란 말도 2024년 대한민국 상황을 온전히 대변할 수 없을 것이다.
2024년 12월 대통령에 의해 난데없이 불거진 비상계엄은 국민의 일상을 뿌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더 테러 라이브’나 ‘서울의 봄’ 같은 영화를 보는 듯했던 상황은 앞선 그의 허물마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게 만들 정도였다. 2024년 마지막 일요일 발생한 여객기 참사는 대한민국을 깊은 슬픔의 수렁으로 몰아넣었다. 희생자들과 남은 가족에게 국민 모두가 마음 깊이 위로와 애도를 전하고 있다.
정국 혼란과 사회적 불안감이 이어지는 소용돌이 속에서 해가 바뀌었다. 밤새 일한 뒤 쉬지 못하고 다시 일터로 나선 것 같은 피곤함으로 맞는 새해다. 예년처럼 희망찬 새해를 맞자고 외치자니 어울리지 않는 옷을 걸친 기분까지 든다.
그래도 차분히 한 해를 되돌아보면 한 가지 빼놓으면 안 될 축복의 기억이 또렷하다. 바로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이다. 10월의 깜짝 발표와 12월의 비상한 시국 속에서 진행된 시상식의 아이러니함이란. 어쨌든 예상치 못한(사실 경사와 흉사는 예고 없이 닥친다) 낭보에 ‘한강 보유국’이 된 대한민국은 잠시나마 문학 르네상스에 흠뻑 젖어 보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이후 진행된 전국 각지의 문학 행사에선 ‘한강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몇몇 대형 업체들이 온기를 거의 다 가져가긴 했지만, 얼어붙은 출판계에도 강한 훈풍이 몰아쳤다. 크리에이터가 희망 직업 1위라는 유튜브 만능 시대, 24시간 기계를 돌리는 진풍경이 펼쳐진 종이 인쇄소 르포 기사를 접하는 건 상상하지 못한 경험이었다.
개인 SNS도 온통 책 사진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집안 곳곳에 묵혀 뒀던 한강 작품이 소환되거나, 동네 책방에는 ‘○일 입고 예정’ 안내문이 등장하기도 했다. 온 국민이 문학평론가인 나라로 불려도 손색없을 것 같았다. 이런 현상을 불편하게 받아들인 몇몇은 ‘과시적 독서’나 ‘패션 독서’라 질타하기도 했다. 하지만 비록 한때의 허영일지라도 다시 기대하기 힘든 문학 열풍이 그저 반갑고 고마울 뿐이라는 문단이나 출판계의 간절함에도 크게 마음이 가닿았다.
이른바 책을 읽는 것이 멋있다는 ‘텍스트힙’의 절정기에 보수동책방골목을 찾았다. 가장 고전적인 활자 매체인 책과 가장 보편적인 SNS 수단인 사진이 한데 어울리는 현장을 방문하기 위해서다. 크리스마스이브였던 지난달 24일 오후, 책방골목은 의외로 인적이 드물었다. 인근 국제시장이나 광복로, 자갈치 일대가 그나마 연말과 성탄절을 즐기려는 사람들도 제법 북적이던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1980년대까지 70여 곳이 성업하던 보수동책방골목은 현재 20여 곳으로 쪼그라들어 명맥을 이어 간다. 전국 유일 헌책방 거리라거나 부산시 미래유산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해마다 책방 수가 줄고 있다. 대청사거리에서 이어지는 책방골목 초입엔 공사장 가림막이 방문객을 맞았다. 서점 여러 곳을 매입해 오피스텔을 짓던 곳이다. 지금은 부동산 경기 악화 때문인지 공사가 중단된 채 방치돼 있다. ‘책방골목사진관’은 가림막이 끝나는 곳에 터를 잡고 있다.
외부에 전시된 사진 작품을 구경하고 있는 젊은 커플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니 정면에 헌책들이 빼곡히 들어찬 책장이 보였다. 책장 아래엔 여느 헌책방처럼 바닥부터 세로로 높다랗게 쌓아 올린 책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진관의 정체성을 한눈에 보여 주는 장면이다.
사진관은 장호림(40) 대표가 2018년 문을 열었다. 대학 졸업 후 서울에서 음반회사 일과 사진관 운영을 하던 장 대표가 어릴 적 오가던 고향 마을로 돌아와 시작한 곳이다. 사진관은 개업하자마자 방송에 등장하며 큰 주목을 받았다. 가수 유희열과 유시민 작가 등 ‘잡학박사’들이 전국 각지를 여행하며 지식을 나누는 인기 프로였다. 헌책방을 배경으로 찍은 흑백사진을 출력해 소장할 수 있는 특별한 사진관으로 소문나면서 전국에서 손님이 몰려들었다.
책방골목사진관은 헌책방과 사진관을 겸하고 있다. 당연히 장 대표도 책방골목번영회 회원이다. 장 대표가 처음 헌책방을 인수할 때는 판매용 책까지 몽땅 사들일 생각이 아니었다. 그저 일반적인 사진 스튜디오를 열 구상이었다. 그런데 책방골목이 사라지는 걸 안타까워한 옛 주인이 책방을 운영할 생각이 없다면 팔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렇게 책방과 사진관을 겸업하게 됐지만 다른 가게처럼 적극적으로 책 판매 영업을 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기껏 하루 2~3권 거래하는 게 다반사인 다른 가게 사정을 잘 알기 때문이란다.
사진관은 예약제로 운영한다. 홈페이지(사진관 이름과 같다)에서 예약이 가능한 날짜와 시간을 확인해 전화 문자를 남기면 예약이 진행된다. 매주 일요일과 책방골목 전체 휴무일인 매달 1, 3주 화요일은 문을 닫는다. 예약 없이 방문했다가 헛걸음하는 이들도 제법 있다고 하니 명심하자.
종이 액자에 넣은 4×6인치 크기 사진 한 장 가격은 5000원. 사진 파일까지 포함된 가격이다. 1인당 최소 두 장은 구매해야 한다. 사진관 안에는 책장과 책을 배경으로, 혹은 책을 머리 위에 얹거나 펼쳐 드는 등 다양한 포즈의 흑백사진 샘플이 놓여 있다. 장 대표 자녀 셋과 아내가 모델이 되기도 했다.
애도 속에서 출발하는 2025년. 희망에 앞서 무탈과 안녕을 기원하게 된다. 아주 보통의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새해 아침, 부산의 역사가 숨 쉬는 곳에서 가족이나 연인 등 소중한 이들과 함께 차분히 흑백사진 추억을 남기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 될 것 같다.
2025-01-02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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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버스 타고도 만날 수 있다 '푸른 초원 위 양 떼 풍경' [별별부산] ⑧
드넓게 펼쳐진 풀밭 위로 수많은 양이 떼를 지어 거닐고 있다. 티 없이 맑은 하늘엔 군데군데 하얀 구름이 떠 있고, 초록의 대지엔 마치 흰색 물감으로 점을 찍은 것 같은 양 무리가 고개를 숙인 채 풀을 탐하고 있다. 어릴 적 기억 속 멋진 풍경 사진이 담긴 달력에서 본 듯한 장면이다. 최근엔 시시각각 변신하는 컴퓨터 잠금화면에서 만난 듯도 하다. ‘그림 같은’ 이 장면은 남반구인 호주나 뉴질랜드를 여행한 이라면 한 번쯤 눈앞에서 마주했을 경험이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먼 이국 얘기로만 들리는 ‘푸른 들판 위 양 떼 풍경’은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부산에서 다녀오기엔 제법 부담되는 거리이긴 하지만, 1988년 문을 연 대관령양떼목장이 대표적이다. 그곳에서는 약 1.3km 길이의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양 떼를 관람하고 먹이 주기 체험을 할 수 있다. 성인 9000원, 소아 7000원(36개월 미만 무료)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강원도뿐만 아니다. 경기도 가평과 양평군, 전북 고창과 임실군, 전남 화순군, 경북 칠곡군 등 전국 곳곳에 유료로 운영되는 양 떼 목장이 있다. 어린 자녀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기꺼이 달려갈 부모가 한둘이 아닐 것이다. 부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울산과 경남 남해군에도 양을 만날 수 있는 야외 목장이 있다. 상대적으로 거리가 가까운 만큼 이미 다녀온 시민이 꽤 될 것 같다. 그렇다면, 부산에서는?
부산에서 풀밭 위를 거니는 양 떼를 만나는 건 진정 꿈에서나 가능한 일일까? 아마도 자녀를 둔 일부 부산 시민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 현장을 다녀왔다.
널찍한 주차장에 차를 대고 겸손하게 서 있는 정문을 통과했다. 장소 이름이 커다랗게 내걸린 멋진 정문을 생각했는데 약간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초등학교 입구의 안전지킴이 초소처럼 생긴 조그만 ‘안내소’에 고작 관람 전 미리 화장실을 이용하라는 안내문이 붙어있을 따름이었다. 62만 8275㎡(약 19만 평)에 달하는 광활한 부지 면적을 생각하면 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안내문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소박한 정문을 지나 몇 걸음 걷다 보니 키다리 느티나무 삼거리에 비로소 ‘해운대수목원’이라는 깔끔한 이름표가 보였다. 수목원에 양 떼 목장이? 의아함을 품고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떼니 곧바로 ‘미니 동물원 200m’라는 막대 이정표가 나왔다. 의심을 거두라는 듯.
겨울나기를 준비하느라 이파리를 들어내기 바쁜 나무들을 감상하며 얼마쯤 걸어가니 축사로 보이는 건물 뒤로 삼삼오오 찍혀 있는 하얀 점들이 언뜻 눈에 들어왔다. 지그재그 모양의 오르막길로 조성한 월가든을 휘휘 돌아 장미원 앞에 서니 비로소 아래로 펼쳐진 초원의 하얀 점들이 제대로 보였다. 분명 양이었다. 멀리 수목원 경계 밖 산업단지의 잿빛 건물들과 한 프레임에 잡히는 양 떼는 다소 비현실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어쨌든 ‘부산에서 만나는 초원 위 양 떼’는 실제로 눈앞에 펼쳐져 있는 현실이었다.
부산시가 쓰레기매립장으로 사용하던 해운대구 석대동 77번지 일원에 조성한 해운대수목원. 1단계 공사를 끝내고 2021년 임시 개방해 무료 운영 중이다. 현재는 내년 말까지 진행될 2단계 공사 완공에 맞춰 새로 운영할 프로그램 개발과 공간 재배치를 준비하고 있다.
수목원 측은 이에 맞춰 미니 동물원을 내년 6월 수목원 중앙의 장미원 뒤쪽으로 옮겨 새로 조성할 방침이다. 이곳에는 현재 어린이놀이원과 가족마당이 있다. 여기에 미니 동물원을 더해 자녀 동반 가족 방문객이나 어린이집, 유치원 단체 방문객이 다양한 체험을 동시에 할 수 있도록 한다는 구상이다.
동물원이라고 하지만, 현재 만날 수 있는 동물은 암컷 양 10마리가 전부다. 이 중 3~4마리가 임신 중이다. 내년 재개장할 동물원에도 새로 태어날 새끼를 포함해 양 13~14마리만 입주하게 된다. 가족 방문객의 발길을 이끌었던 타조와 당나귀는 재배치 계획에 따라 지난 10월 다른 지역 농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를 모르고 방문했다가 아쉬워하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기장군에서 온 남수빈(34) 씨도 그런 경우다. 최근 출산한 아내와 둘째를 두고 21개월짜리 첫째만 데리고 왔다는 남 씨는 “수목원에 와서야 타조, 당나귀가 떠나고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남 씨는 “평화롭게 풀밭을 거니는 양 떼는 볼 수 있어 그나마 오길 잘했다”며 안도했다.
실제로 수목원 측은 자연 방사 방식으로 양을 키우고 있다. 양들은 아침이면 축사를 벗어나 수목원 구석구석을 누비며 배를 채우다 해지기 전 무리 지어 축사로 돌아온다. 운이 좋으면 양 떼를 만날 수 있다는 얘기다. 먹이를 주는 건 금물이지만, 함께 사진을 찍는 행운까지 마다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날에는 자연 방사가 힘들 수도 있다. 매주 월요일이던 수목원 휴무일이 화요일로 변경됐다는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동절기인 내년 2월까지는 오후 5시까지 개방된다. 대중교통 이용이 여전히 불편하다는 점은 아쉽다. 현재 105, 106, 107번 3개 노선 시내버스만 수목원 정문을 경유한다.
해운대수목원 사육 담당 강엽 주무관은 “수목원이라는 정체성을 생각하면 많은 동물을 사육할 수 없는 게 현실이라 아쉽다”면서도 “내년 재개장 때에는 부산 아이들이 숲속에서 양과 함께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부산에는 사상구에서 운영하는 사상근린공원 미니 동물원에도 양 4마리가 있다. 토끼, 염소 등도 있는데, 자연 방사는 하지 않고 우리 안에서만 키우고 있다. 부산시가 운영하는 화명수목원 동물 학습장에서는 거위, 닭, 토끼, 칠면조, 염소를 만날 수 있다.
2024-12-05 [07: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