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우석
서우석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연재 중
문화 프리즘
10개의 칼럼 #문화
  • 문화 프리즘
    경상도. 먼저 경상도의 예를 보자. “저 사람이 김씨니? 김씨가 저 사람이니?”는 경상도 식으로 발음하면, “절마가 김가가? 김가가 절마나?”가 된 것이다. “절마”는 “저 놈(者)”의 뜻이다. 여기서 “놈”은 비하의 뜻이 아니다. 그 대답인 “절마 아이고, 일마다”의 “일마”에도 비하의 뜻은 없다. 이 어투를 표기하면 1번과 같다. 2번은 “김(金)씨”를 “가(賈)씨”로 바꾼 것이다. “가”가 열번 반복되는 재미있는 말놀이가 된다. 오래 전에 강의 시간에 억양를 설명하면서 문득 만든 말이다. 1. 절1 마2 가0 김0 가1 가0, 김0 가2 가1 절0 마1 가0 아1 이2 다1, 절1 마2 아1 이1 고0 일0 마2 다1 2. 가2 가0 가1 가2 가1, 가1 가2 가0 가2 가0 1번이나 2번은 억양이 없으면 뜻을 짐작하기 어렵다. 1번 둘째 줄의 “아1이2다1”는 “아니다“의 뜻이다. 이 억양은 발음의 굴곡만으로도 의미를 갖는다. “어1어2어1”나 “어1언2제1” 둘 다 “아니다”의 뜻이다. 억양을 대신함으로서 뜻을 대신하는 것이다. 1과 2의 중간과 끝 종지 부분은 같은 음 높이의 “가1”일 수도 있고, 낮은 “가0”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은 경상도의 일상 대화 중의 흔히 듣는 말이다. 3. 어1 제0 아1 래1 니1 뭐1 했2 노2? 4. 아1 이2 시1 예0~ 여2 좀0 널0 짜2 주1 이1 소0 아1 이2 시1 예0~ 여2 좀1 널1 짜3 주2 이2 소1 3번은 억양이 달라지더라도 그 뜻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나 4번은 경상도 억양에 맞게 발음해도 뜻을 알기 힘들다. 이 말은 택시를 내릴 때에 손님이 택시 기사에게 부탁하는 말이다. “널짜준다”(내려준다)는 경상도 사람들만 사용하는 말이다. 이 말은 “기사님, 여기서 좀 내려주세요”의 뜻이다. 4의 둘째 줄은 “여2좀0”으로 두 칸 내리지 않고 “여2좀1”으로 부드럽게 내려온 다음 “좀1”에서 두 칸 뛰어 오르는 모습이다.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던 “3”이 사용되었다.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의 억양에서 두 칸 도약이나 하강은 중요한 특성이므로 시작음이 1이라면 3으로 도약할 수 밖에 없다. 시작 음높이에서 “상행/하행”의 양자 택일 전에, 같은 음높이를 유지하느냐 아니면 달라지느냐의 선택이 앞서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달라졌음의 선택 후 높은/낮은 음의 선택이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두 단계 도약/하강은 내면적으로는 긴 과정을 겪은 것이다. 따라서 차원이 다른 의미가 부여된다. “여2-좀1”은 “여기서 내리면 좋겠습니다”의 진술이라고 한다면, “여2좀0”은 “저는 여기서 꼭 내려야 합니다”는 의견을 함축한다. “널1 짜3 주2 이2 소1” 역시 “널”이 “1”에서 출발했음으로 “3”으로 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이 역시 “반드시 내려야 합니다”의 강한 의사를 전달하게 된다. 다음은 야구 펜의 대화다. 5. 니2- 롯2 데2 가0 ? 어1 어2 어0 삼1 성2 이1 다1 “니2- 롯2 데2 가0?”는 “너 롯데 편이니?”의 뜻이고 “어1어2어0, 삼1성2이1다1”는 “아니야 나는 삼성 편이야”의 뜻이다. 앞서 말했듯이, “어1어2어0”는 같은 억양으로 “어1언2제1”가 사용되기도 한다. 여기서 억양은 의미 전달의 결정적 역할을 한다. 경상도의 사투리는 억양이 필수적이다. 찾아보면, 억양만으로 “아니야”의 뜻을 담는 경우가 더 있을 것이다. 경상도 역양의 특징이 폭이 넓은 음높이의 변화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다. 이제 호남의 억양을 살펴보자. 전라도. 전라도의 사투리에는 우리가 알아듣기 어려운 단어가 많다고 한다. 예를 들어 “징하네, 어쨔스까? 허벌나게”등은 전라도에서는 흔히 쓰는 말이라고 한다. 6. 어0 쨔0 스0 까2 ?/ 시0 방0 간0 당0 께2/ 허0 벌0 나2 게0 6번의 세 구절은 모두 끝을 약간 올리는 어투를 보여준다. “시방 간당께”는 서울 지방의 어투인 “지1금1 갑1니1다1”처럼 끝을 올리지 않던지, 또는 “지1금1 갑1니1다2”로 끝을 한 단계 치켜 올릴 것이다. 서울 지방 사람들은 “시방 간당께”를 흉내낼 경우에도, “께”를 치켜 올리더라도 한 단계 올리는 것이 보통이다. “허0벌0나2게0”(엄청나게)는 “나”의 두 단계 도약이 통상적인 듯하다. 남도의 경우 치켜올릴 때에는 강조의 의도가 담길 경우, 두 단계 올리는 것이 통상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제 조금 긴 말을 보기로 한다. 이제 말을 줄이는 경우를 보자. 7. 암1 시1 롱0 먿2 땜1 시0 물1 어1 보1 것1 능0 가2 ? (알면서 무엇하러 물어 보셨어요?) “암시롱”의 “암”은 “알면서”의 “알”과 “면”의 두 음절을 합해서 “암”으로 줄여 만든 것으로 보인다. “시롱”의 “시”는 “알면서의”의 “서”의 문법적 기능을 새끼줄 꼬듯 꼬아 “롱”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추론해 본다. 이러한 조합은 다음에 볼 충청도 사투리에서도 볼 수 있다. “먿 땜시”는 “무엇 때문에”의 줄임인데 경상도의 경우, 이 줄임은 “뭐 따에”이다. 여기서 어투의 굴곡은 “먿”(무엇)의 강조와 “능가”에서 질문을 위한 상행 발음 외에는 굴곡이 없는 편안한 발음진행을 보인다. 전라도 어투가 경상도에 비해 두 번 도약을 아끼고 있는 듯하다. 문장의 길이를 줄이고 큰 굴곡을 주지 않은 어투가 특징이다. 이는 다음에 살필 충청도에서 더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다음 좀 더 긴 문장을 보자. 8. 아1 따1~ 짜1 자1 내1 서0 으2 따1 써0 먹0 으0 까2 (아이고/ 적고 부실해서/ 어디다/ 쓸수있겠나) 9. 어1 찌1 코1 름0 히2 놀1 놀1 하0 능0 가2 ? (왜 그렇게 핼쓱하게 보이니?) 8번의 어투는 괄호안의 “/”표로 표시한 단위를 줄인 모습을 볼 수 있다. 부연하자면, “아이고 → 아따”, “적고 부실해서 → 짜자내서”등으로 줄인 것이다. 반면 끝의 도약을 제외하면, 어투의 굴곡은 부드러운 편이다. 9번 8번과 패턴이 같다. 충청도. 충청도의 어투를 보자. 흔히들 충청도 사투리의 특징으로 “~여”와 “~혀”를 말 끝에 많이 사용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야기할 내용을 최대한 줄인 다음 천천히 느리게 발음한다. 아래 예문 10번의 경우, “여”는 “여기”이고, “둔눠”는 “드러누워”의 줄임이다. 10. 여~ 둔눠 (여기, 드러누워) 11. 왜 그랴? 뭐 씅깔나는 일 있어? (왜 그래? 뭐 화나는 일 있었니?) 2. 뻐굼살이 할껴? 내가 아빨텨니, 엄마혀? (소꿈장난 할래? 내가 아빠할테니 니가 엄마해) 10-12 모두 억양은 1로 일관한다. 다만 물음표로 표시된 질문의 경우 한 단계 올려 2로 발음하는 것으로 보인다. 부드러운 진행이다. 충청도의 경우긴 내용을 줄인 후 부드러운 억양을 선택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 두 경우는 긴 내용을 충청도 식으로 짧게 줄인 것이다. 두 음절을 느리게 발음해야 할 것이다. 13. 출텨? (춤 한번 추시겠어요?) 14, 개혀? (개고기 드실 줄 아세요?) 13의 대답은 행동으로 보이거나 “못혀” 중 하나일 것이고, 14의 대답은 “혀⤴/ 못혀⤵” 중 하나일 것이다. 표준어를 사용하는 서울 사람들은 “2의 2승”과 “2의 e 승” 그리고 “e 의 2승”의 셋을 차이나게 발음하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 발음을 표기해 보자. 2의 2승 → 이1 의1 이1 승1 2의 e승 → 이0 의0 이3 승2 e의 2승 → 이3 의2 이1 승1 이 세 발음에서 주목할 점은 영어의 “e”를 아주 높여 발음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수한 기호 읽기는 수학, 화학, 물리학 등 자연과학 분야에서 더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예를 들면, “어린 ‘아이’를 말하니? 허수 ‘i’ 를 말하니?“의 경우에도 앞서 설명한 발음 방식과 같을 것이다. 지금까지, 경상, 전라, 충청도의 억양 다르게 말해 사투리를 살펴 보았다. 아마도 생각했던 것보다는 단순한 원리에 의해 발음이 운용된다는 것을 감지했을 것이다. 이 외에 경기도, 강원도,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등 많은 사투리 억양을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문화 프리즘은 여기서 일단락을 짓는다.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약력]서울대 명예교수 [저서]시와 리듬(1981, 개정판 2011), 음악을 본다(2009), 세계의 음악(2014) 등 [번역]기호학 이론(U. Ecco, 1984), 서양음악사(D. J. Grout, 1997)
    2024.08.24 06:20:00
    경상·전라·충청 사투리
  • 문화 프리즘
    우리는 지금 K-팝과 K-드라마가 세계 여러 곳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있다. 때로는 한국의 팝과 드라마가 세계 문화의 주류가 될 것이라는 의견도 접한다. 이에 대해 생각해 보자. 세계에 알려지고 있는 한국의 드라마들은 TV 드라마이고, 그 주제는 잘 사는 가정이나 궁중 이야기들이다. 쉽게 말하자면, ‘이야기-즐기기’의 드라마들이다. 한국의 TV 드라마는 과거의 진실을 파헤치는 역사·사회적 또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 질문, 현실에 대한 반성 등의 지성적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영화 역시 비슷하다. 이념 선전에 치우친 영화들이 대부분이다. 역사적 사실을 추구해야 하는 다큐멘터리 마저 사실 규명을 소홀히 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20세기 중반 이후 대중문화가 전통 상류문화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대중문화가 귀족문화를 밀어낸 것은 대중시대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대중문화가 전적으로 오락에만 빠져든 것은 아니다. 유럽에서는 진지함을 추구하는 지성적 작품이 이어져 온다. 체코 태생의 헝가리 감독인 벨라 타르(Bela Tarr)의 ‘사탄 탱고’(1994년)와 ‘토리노의 말’(2011년)이 좋은 예일 것이다. 대단한 작품들이다. ‘사탄 탱고’의 상영 시간은 439분으로,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긴 시간의 영화였다. ‘토리노의 말’은 한국에서도 상영되었고 벨라 타르 감독은 부산 영화제에도 참여했었다. 아시아를 보자. 이슬람의 종교적 족쇄 하에서도 이란은 ‘올리브 나무 사이로’(1994)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와 같은 아름다운 영화를 발표한다. 이들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한국의 영화가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2000년 이후 제작된 한국의 영화를 끝까지 본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하지는 못 하겠다. 욕설과 폭력으로 뒤덮힌 초기 장면을 견디기 어려워 초반을 넘겨 본 영화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K-팝은 어떤가? 노래는 멜로디와 가사로 이루어져 있다. 멜로디에는 좌우의 이념이 없다. 정치적 이념에 무관심한 대중이 몰두하는 곳이 스포츠와 음악이 아닐까? ‘푸른 곰팡이’(BTS)와 ‘사건의 지평’(유하)은 항생제와 블랙홀의 용어를 가사로 사용한다. 이념에 무관심하다는 제스처다. 음악 이야기를 하면, 애호가들은 “클래식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 한다. 베토벤, 브람스에 이어 20세기 초, 바르톡, 스트라빈스키로 이어진 클래식이 어떻게 변모했는지 궁금한 것이다. 음악과 미술은 20세기 중반 이후 개념 예술로의 길을 간다. 개념화된 예술이 무엇인지, 대중이 떠나 버린 그림과 음악을 살펴 보기로 하자. 그림은 기억 속의 남아 있는 모습을 그리는 작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암각화가 그렇고 성당의 벽화와 성화가 그러했다. 이들에게는 멀리 있는 사물을 작게 그려야 할 이유가 없었다. 기억 속의 그림은 크기의 구별이 없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를 지나면서, 원근법이 등장해 그림을 지배한다. 원근법에 의하면 멀리 있는 것은 작게 그리고 가까이 있는 것은 크게 그려야 한다. 현실을 분석한 것이다. 19세기에 이르면 색채 역시 분해해서 그린다. 지적인 분석이다. 이 모든 변화는 그려야 할 대상을 지적으로 분석한 결과다. 대상에 대한 과학적 접근인 셈이다. 그후 관심은 대상에서 주체로 옮겨 온다. 19세기의 문화적 특징이다. 그림의 경우, 한 시점이, 두 시점으로 분산된다. 앞에서 본 얼굴과 옆에서 본 얼굴을 겹쳐 그리게 된 것이다. 두개의 객관이 하나의 주관 안에 들어온 것이다. 대상을 보는 ‘내’가 탈-시간화된 것이다. 그후 지적 관심은 “그림이란 무엇인가”로 도약한다. 1917년 마르셀 듀쌍은 소변기를 ‘Fountain’(샘)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하고, 1929년 르네 마그리뜨는 ‘La Trahison des Images’(이미지의 배반)을 발표한다. 그림 안의 문구인 'Ceci n'est pas une pip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의 메시지는 “이것은 그림, 즉 파이프의 기호이지 입에 물 수 있는 실물 파이프가 아니다”이다. “그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인 셈이다. 그림은 대상의 미적 표현을 넘어선다. 화가의 철학적 신념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변모한 것이다. 그림이 철학적 의견이 되었다. 다음의 세 그림은 미국의 마크 로스코(1903-1970)의 추상화다. 첫 그림은 ‘세계는 검은 색 속의 오랜지 색’이라는 철학적 견해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런 상징적 해석이 싫다면 색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보아야 한다. 이때 색은 사물을 벗어난 색, 즉 추상이다. 이 그림을 보고 “이런 그림이라면 나도 그리겠다”고 이견을 제기한다면, “콜럼버스의 달걀을 생각하세요”라는 답을 들을 것이다. 음악에 대해서 살펴보자. 바로크 시대 이후, 제1주제와 제2주제를 각각 tonic(으뜸조)과 dominant(딸림조)의 두 조 위에 얹은 것은 ‘아랫 마을과 윗 마을’이라는 두 공간을 도입해 음악적 공간을 확대하기 위함이었다. 그후 바그너는 이 기법을, 짧은 시간 동안 여러 조를 정신 없이 드나드는 기법으로 확산시킨다. 쇤베르크는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옥타브의 열두 음 하나하나를 독립된 공간으로 생각해, 열 두개의 공간 연속체를 만들자고 제안한다. 12음 음열이다. 시간 흐름에 의해 파악되는 공간 에서 시간을 빼앗은 것이다. 음악의 진행이 공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간이 시간을 먹어버린 결과를 낳는다. 음악의 시간적 청취가 없어진 것이다. 쉽게 생각해보자. 쇤베르크의 12음 음악은 멜로디를, 12개의 음열로 대체한다. 이는 대상, 즉 각 성부의 수평적 진행의 아름다움인 멜로디의 포기한 것이다. 감성적 판단의 자리를 수학의 아름다움이 빼앗은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의 물체를 창조한 것이다. 그곳에 ‘들음’, 즉 청취는 없다. 음악 듣기에는 음들의 상하 관계가 있었다. 음열 음악에서는 그러한 으뜸-딸림의 위계가 없어진다. 멜로디가 없어진 추상-음악이 된 것이다. 1960년 이후, 한국 대학의 클래식 작곡가들은, 쇤베르크가 내다 버린 ‘대상의 감성적 아름다움’를 가슴에 안은 채, 12음 기법으로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려고 매달린다. 모순된 일이다. 지금도 여전하다. 이처럼 개념화된 그림과 음악이 대중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남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화가와 작곡가들의 기괴한 행동과 포퍼먼스가 등장한다. 호기심을 자극해 대중을 갤러리와 콘써트홀로 유도하려는 시도였다. 화가들의 기괴한 행동은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여기서는 현대음악 작곡가의 기괴함을 보기로 한다. 슈토크하우젠(1928-2007)은 9.11 테러 당시 언론을 향해, "이런 사건에서도 나는 음악적 영감을 얻는다"고 공언한 후 언론의 맹렬한 질타를 받는다. 이어 그는 며칠 전 안드로메다 성운을 다녀 왔다고 주장한다. 기자들의 여러 번의 질문에도 끝까지 자기 주장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연주자에게 기하학적 그림을 제시하며, 보고 생각나는 대로 연주하라고 요구한다. 지금까지 유럽의 지성적 예술이었던 그림과 음악의 개념화 과정을 살펴보았다. 몰락에 가까운 변질이다. 20세기의 문화는 지성과는 무관한 대중이 소비자인 문화다. 전통 예술의 입장에서 보자면, 음악과 미술이라는 한 쪽이 죽어버린 가지 사이에서 새로운 싹이 솟아나는 현상으로 비유해야 할 것이다. 음악의 경우, 대중음악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미술의 경우, 설치미술, 환경미술, 액션페인팅 등의 여러 모습으로 변모한다. 세계의 여러 나라의 경우를 보자면, 드라마와 영화는 여전히 지적 작품을 생산하고 있다. 넓게 보자면 문학, 즉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도 이제 시간 때우기를 넘어선 인간과 역사 그리고 경험하는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에 근거한 질문을 던지고 이를 추구해야 한다. 그것이 문화가 가야 할 바른 길이기 때문이다. 1900년 이후 우리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마주하는 지정학적 조건 아래 살아 왔다. 20세기 후반, 놀라운 경제 발전을 이루었고, 우파들이 경제에 열중하는 동안, ‘종북 가짜 진보’들이 대중 문화를 뒤덮어 왔다. 이제 가짜의 세계를 벗고 진실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진정한 질문을 할 수 있는 시대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K-팝과 K-드라마가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다는 말에 취하지 말고 미래의 올바른 문화를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토리노의 말’을 한번 보기를 권한다. 보고 나면 잠시 생각에 잠기게 될 것이다. 긴 시간 동안 수레를 끄는 말의 몸 구석구석을 관찰하면서 역사적 팩트를 직시해야 함을 느끼기 바란다. 우리도 이제 이런 드라마를 만들어야 한다.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약력]서울대 명예교수 [저서]시와 리듬(1981, 개정판 2011), 음악을 본다(2009), 세계의 음악(2014) 등 [번역]기호학 이론(U. Ecco, 1984), 서양음악사(D. J. Grout, 1997)
    2024.10.12 08:26:56
    K-팝과 K-드라마
  • 문화 프리즘
    우리는 소리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철학에서도 그렇다. 인도 철학만이 유일하게 소리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다. 1600년 이후 유럽의 물리학은 소리의 원인이 물체의 진동이며, 진동은 공기를 통해 파동으로 우리에게 전해진다는 사실을 밝혀왔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는 “소리의 감각적 질이 외부에 존재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다. 요즈음 철학에서는 감각적 질을 “qualia”라는 말로 지칭하며, 감각적 질은 뇌 안에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뇌 밖에는 공기의 흔들림이 있을 뿐이다. 박쥐가 반사파로 지각하는 “qualia”가 시각적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요즈음의 생각이다. 우리는, 새 소리는 새의 내면에 “qualia”로서 존재하고, 바람소리는 바람의 속성 안에 “qualia”로서 존재하며, 음파는 단지 그것을 전달해주는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해 온 것이다. 사물이 소리를 가지고 있다는 물신론적 생각이었다. 그러나 스피커를 통해 교향곡을 듣는 경우를 생각하면, 판단이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스피커로부터 바이올린의 멜로디와 첼로의 반주, 그리고 관악기의 집적거림도 듣는다. 이때 스피커의 콘은 하나의 단선적 변화로 진동한다. 우리는 이 하나의 진동에서 동시에 여러 소리를 듣는다. 달팽이관은 고막의 진동을 수백 개가 넘는 “sine wave”로 분해한다.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뇌는 이 단순파들을 받아들여 개개의 악기 소리로 다시 합성해야 할 것이다. 그 기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1927년 코펜하겐의 “양자 이론” 논쟁에서 아인슈타인은 덴마크 출신인 닐스 보어(Niels Bohr)에게 “눈을 감으면 달이 없다는 뜻이냐?”는 질문을 던진다. 이에 대해 보어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아인슈타인은 펄쩍 뛴다. 속으로 “이 친구 미쳤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 “귀를 막으면 새들의 노래가 없는 것이냐?”는 질문에 우리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외부에 진동은 있지만, “qualia”가 없기 때문이다. 붓다의 생각을 보자. “감지되는 모든 것은 보이는 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보이는 것의 원인인 연기(緣起)의 단서로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팔리어의 “paticca-samuppada”가 “緣起”의 어원이다. “의존해서-생겨남”의 뜻이다. 중국은 이 부분을 “色卽是空”으로 번역하였다. 이 번역의 단순성 때문에 그 뜻에 대한 이론이 분분했었다. 멋 부린 표현은 항상 복잡한 해석을 낳기 마련인가 보다. 소리에 대한 흥미로운 그러나 잘못된 생각을 살펴보자. 그리스인들은 두 물체의 충돌로 소리가 발생하며, 높은 소리는 낮은 소리보다 그 속도가 빠르다고 생각했다. 지금 우리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뛰어가는 사람을 낮은 목소리로 부르면 다들 이상하다고 쳐다 본다. 중국의 樂記는 “凡音之起, 由人心生也. 人心之動, 物使之然也.”라고 소리를 정의한다. 요약하자면, “凡音之起는 由人心生이고, 人心之動은 物使之然이다.” 즉, “모든 소리의 일어남은 마음이 생긴 때문이고, 마음의 움직임(생김)은 사물이 시켜서 그렇게 된 것이다”로 풀이된다. 결론은 “마음이 소리를 그렇게(然) 만들어냈다”는 주장이다. 문제는 “然”이다. 우리의 관심은 “그렇게”가 아니라 “어떻게”이다. “어떻게”를 괄호 안에 넣어 설명해 보자. “마음의 움직임은 그렇게(然: 아이콘을 떠 올리려, 발음이 일어나게 해서) 소리를 만든다”가 된다. 한자가 먼저고 소리는 나중이라는 뜻인데, 이를 “然”으로 감춘 것이다. 소리는 뒤로 밀려나고, 아이콘, 즉 표의문자가 중국의 사고방식을 지배하게 된다. 소리에 대한 오해의 절정은 쭈커칸들(Victor Zucherkandl)의 주장에서 볼 수 있다. “Sound and Symbol”(1956, 번역 서인정, 1992. <소리와 상징>)에서 그는 “제 3의 공간”을 제시한다. 음악을 들을 때에 음들은 공간 안에서 움직인다. 음들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도 하고 다시 내려오기도 한다. 음들이 움직이기 위해서 공간은 필수적일 것이다. 그는 시각적 공간과 정신적 공간에 이어 청각적 공간을 설정하고, 이 공간 역시 생활공간과 같은 실존하는 공간이라고 주장했다. 청각공간이 외부에 존재한다는 그의 믿음은 “qualia”가 외부에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위상수학을 생각해 본다. 위상수학은 공간을 정의한다. 공간은 하나의 집합이며, 한 집합(X)과, 그 집합과 똑 같은, 그러나 그 안에 공집합, 전체집합, 부분집합, 합집합, 교집합 등의 가족을 설정한 (T) 집합을 가정한다. 그리고 (X) 집합의 원소 하나하나와 (T) 집합의 가족 간의 연결을 결정해 준다. (X) 집합과 (T) 집합을 나눈 것은 설명을 위한 것일 뿐, 사실 둘은 하나의 집합이다. 모든 점과 모든 점이 연결되어 있는 공간이 우리의 몸이 존재하는 삶의 공간이다. 점과 점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한편 지하철 공간의 집합에는 1, 2, 3 호선 등의 부분집합과, 그 부분집합 간에 교집합이 있다. 환승역들이 교집합이다. 다른 라인에 있는 두 역 사이에는 직접적 연결이 없고, 집적적인 거리도 없다. 환승을 거쳐야만 연결된다. 음악적 공간은 음의 집합으로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 거리가 없는 공간이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완성되는 마음 속의 공간이다. 몇 개의 음으로 시작해, 원소를 늘여 가며 커가는 공간이다. 집중해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소리의 원시적 공간을 벗어나, 새로운 공간을 만든다. 이 공간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공간이다. 그래서 같은 음악이라도 다시 들을 때마다 새롭게 들을 수 있다. 만들어가는 기쁨이 항상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한 철학자는 음악이 외부에 없다는 뜻에서 음악을 “Nicht-in- diesem-Welt-Gehörenheit”라고 정의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존재”라는 뜻이다. 이 말을 했던 철학자의 이름이 생각나지를 않는다. 검색을 해도 찾을 수가 없다. 소리에 대해 내가 아는 바는 여기까지다.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약력]서울대 명예교수, 전 서울대 음악대학교 학장 [저서]시와 리듬(1981, 개정판 2011), 음악을 본다(2009), 세계의 음악(2014) 등 [번역]기호학 이론(U. Ecco, 1984), 서양음악사(D. J. Grout, 1997)
    2024.04.13 06:00:00
    소리란 무엇인가
  • 문화 프리즘
    일본 문화가 상징이라는 ‘기모노’를 입고 있다면, 일본 음악은 ‘유겐’(幽玄)과 ‘모노노 아와레’(物の哀れ)라는 속옷을 입고 있다. 사물을 바라보는 ‘유겐’과 ‘아와레’(哀れ)의 두 태도가 일본의 미-의식이라고 한다. 먼저 유겐을 살펴보자. 우리도 사용하고 있는 ‘깊고 그윽함’이라는 뜻의 ‘유겐’(幽玄)은 언어가 표현할 수 없는 것이지만, 저 세상의 일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유겐은 세상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안에 있는 ‘깊고 그윽한 곳’이다. 이 세상에 속하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 그것이 ‘유겐’이다. 무인정치가 시작되는 무로마치(室町, 1336–1573) 막부 시대의 연예인이었던 제아미 모토키요(世阿弥 元淸)는 유겐의 뜻을 다음의 시로 묘사한다. 꽃 덮힌 언덕 위로 석양이 사라지고 거대한 숲속을 거닐며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멀리 섬 뒤로 사라지는 배를 보고 구름 사이로 보이듯 안 보이는 기러기를 바라본다. 대나무의 미묘한 그림자가 대나무에 드리움이다. 이 시는 ‘사라지는’ 순간과 ‘보이지 않는’ 순간을 노래한다. 사라지면서 보이지 않는 순간, 그것이 사물의 근원이고, ‘깊고 그윽한 곳’이며 아름다움의 시작이라는 주장이다. 한편 ‘모노노 아와레’(物の哀れ)는 에도 시대의 문학 평론가인 노리타가(本居宣長, 1730~1801)가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 1008)를 해설하면서 제시한 개념이라고 한다. 사물을 접하는 순간, 논리와 윤리가 나타나기 전의 ‘느낌의 세계’를 뜻한다. 진/위, 선/악 이전에 인지된 세계다. 유교적 권선징악의 이념을 벗어나 있다는 뜻이다. ‘바쿠후’(ばくふ, 幕府)라는 군부정치의 이념을 연상케하는 바가 없지 않다. 그러나 막부정치의 영향 보다는 유교로부터 벗어나려는 욕구가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 추구의 보다 근본적 원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불교적으로 말하자면, 연기(緣起)에 앞선 존재의 근원적 인식을 뜻한다. 예를 들어, 벌레를 노려보는 개구리의 모습에서, 약육강식의 논리나 삶과 죽음 등의 선악을 판단하지 말고, 그 감정에 앞서서 바라보라는 것이다. 이것이 ‘物の哀れ’이고, 미-의식의 근본이다. 이 때의 인식이 ‘아름다움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그 느낌은, 불교에서 말하는 욕망에 몰두하는 취착(取着), 취착을 유발하는 갈애(渴愛), 그리고 갈애에 앞선 ‘느낌’의 세계에 도달함을 뜻한다. 그러나 까다롭게 설명하자면, 이는 붓다가 설명한, 감각이 대상과의 접촉에서 발생하는 ‘좋은/ 나쁜/ 무덤덤함’을 느끼기 이전의 상태라는 주장이지만, 붓다는 ‘좋은/ 나쁜/ 무덤덤함’에 앞선 순간에 대해 말한 바가 없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셋 중 하나를 느끼는 것은 원초적이다. 그에 앞선 것은 없다는 뜻이다. 어쨌건, 이 점에서 ‘物の哀れ’는 유교의 이념과는 상반된다. 유교적 이념을 택한 조선과 문화적 차이를 낳은 시작일 것이다. 사라지면서 보이지 않는 먼 곳(幽玄)과, 가까이서 본 즉각적인 느낌인 ‘애처로움’(哀れ), 이 둘은 서로 보완한다. 무한한 시간과 정지된 시간이 만나는 것이다. ‘유겐’과 ‘아와레’는 세계 인식의 근원을 찾는다는 점에서 서로 보완한다. 그러나 둘 다 상징 체계의 명료성을 회피한 것으로 보인다. 샤미센 음악이 이 미적 세계를 잘 보여준다. 샤미센의 연주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에게, ‘너, 지금 무슨 얘기를 하니?’라고 묻지 마세요. 저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제 중얼거림을 그냥 보여드릴 따름입니다. 왜 보여 주느냐고요? 그건 저도 모릅니다. 저는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샤미센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음악이다. 악보를 이용해 설명해 보자. 다음의 악보는 샤미센 음악의 흐름을 설명하기 위해 내가 만든 음-진행이다. 위 악보를 보고 “mi re fa re mi fa.... ”를 노래해 본다. 다만 두 음이나 세 음의 반복이 느껴지게 노래해서는 안 된다. 분절이나 강조되는 음이 구조를 만들지 않게끔 노래해야 한다는 뜻이다. 까닥 잘못하면, 끝 머리의 “re mi fa, mi, re mi fa” 에서 “re-mi-fa”의 반복 구조가 들리게 된다. 이를 피하려면, “re-mi, fa-mi-re, mi-fa”로 연주하면 될 것이다. 이렇게 연주하면, 이 음악은 우리에게 “그냥 들으세요. 의미있는 구조를 만들지 마세요”라는 말을 걸어오게 된다. 물론, 실제 음악은 샤미센이 반주하고, 직접 또는 옆에서 가사를 얹어 노래를 부르는 형식을 취하기도 한다. 그런 연주에서도 샤미센의 반주는, 앞서 말한 “그냥 들으세요”라는 느낌을 벗어나지 않는다. 인터넷을 통해 샤미센 연주를 들어보기 바란다. 작은 반복은 있지만 구조로서의 반복은 없다는 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샤미센 악기를 잠시 살펴보자. 샤미센(三味線)은 일본의 남쪽 열도 국가였던 오키나와로 부터 유래되어, 에도 시대에 유행하게 된 악기다. 3 현(絃)을 ‘바찌’(ばち, 撥)로 튕겨 연주하는 악기로서, 중동 지역에서 중국에 이르기 까지 널리 전파된 유형의 악기다. 오키나와에서 일본의 본토로 전해진 다음, 악기의 모습은 세련된 여러 형태로 발달한다. 그러나 근본은 3 현이고 깍찌로 튕겨 소리를 내는 발현 악기다. 한편, 일본의 ‘아악’(雅樂, 가가쿠)으로 알려진, 에텐라쿠(越天樂)가 추구하는 상징은 샤미센의 음악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준다. 고수가 천천히 손을 들어 팔로 원호를 그리며 내려치는 북소리와 함게 흘러나오는 히치리키(ひちりき, 篳篥 피리)의 강렬한 직선적인 멜로디가 에텐라쿠 음악의 기본이다. ‘미’음을 오래 끌다가 다음 음으로 치켜 올라가고 이어 ‘레’음으로 답하는 진행은 더 이상의 조형을 거부하겠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분절이 완성되었음을 암시한다. 조형의 거부는 음악적 건축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지만, 분절을 마무리 짓는 것은 상징의 명료성를 드러내는 일이다. 이 상징의 명료성은 샤미센의 끊임 없는 중얼거림과는 선명한 차이를 보여 준다. 이 외의 일본 음악은 주로 무대 음악이다. 일본의 무대 음악은 음악의 장르라기 보다는 연극의 장르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옳은 견해일 것이다. 일본식 오페라 가부키(歌舞伎), 인형극 분라쿠(文楽), 가면극 노가쿠(能楽) 등은 음악적인 면에서 그 중요성이 매우 약하다. 반면 무대 예술의 관점에서 보자면, 복잡한 무대 장치와 소품을 수반한, 그리고 그 하나하나에 중요한 연극적 의미가 부여된 독특한 장르이기도 하다. 일본 음악의 상징은 그 장르에 따라 상징성에 있어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일본의 모든 음악은 상징이 기본이다. 음을 상징적으로 처리하는 방법은, 오페라를 대신하는 아리아처럼, 널리 알려지는 멜로디를 만들지 못한다. 짧은 노래일지라도 스스로의 공간을 가져야 하는데, 음악적 공간은 다른 공간을 흉내내거나, 상징적 편법을 써서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음악의 공간은 근본적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가 스스로 음을 듣고 만들어내어야 하는 공간이다. 그래서 성장기에 좋은 음악-듣기가 중요하다. 수준 높은 음악의 이해는 보다 복잡한 위상 공간을 우리의 뇌가 만들어 내고 체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음악은 일본 문화의 상징적 체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음악적 공간이 매우 좁다. 그 틀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벗어날 수 없었음을 일본의 음악사가 보여 준다. 13세기초부터 19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막부 정치는 틈틈이 솟아오른 서민의 흥행적 유행을 허용하지 않았다. 음악의 경우, 민요적 다양성, 다시 말해 자유롭게 노래 부르면서 획득한, 서민들의 음악적 공간을 수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처럼 중-하류층의 음악이 상류층으로 흘러 들어와 예술 음악이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지 못한 것이다. 일본 문화가 기모노라는 상징을 입고 있음으로 해서, 샤미센이라는 민속화된 음악마저도, 그 압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냥 들으세요 보여드릴 뿐입니다”는 속옷을 벗어 던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본은, 상징이 온 몸을 옥죄이고 있는 나라인 듯 보인다. ‘성 아래 기모노를 입은 두 여성’을 보고 당신은 무엇을 느끼십니까? 나는 후쿠시마(福島) 아이즈(会津), ‘쓰루가죠’(鶴ヶ城)의 저 높은 성곽이, ‘두 처녀가 기모노를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를 무서운 눈초리로 내려다보고 있음을 느낍니다. “物の哀れ”입니다.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약력]서울대 명예교수 [저서]시와 리듬(1981, 개정판 2011), 음악을 본다(2009), 세계의 음악(2014) 등 [번역]기호학 이론(U. Ecco, 1984), 서양음악사(D. J. Grout, 1997)
    2024.07.06 04:00:00
    상징과 일본음악
  • 문화 프리즘
    우리는 자녀들 또는 손자 손녀들의 현실 인식이 자신의 현실 인식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 때가 많다. 주변에서 그런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중학교 시절 나는 부모 세대로부터 자신들이 어린 시절 목격했던 1919년의 3·1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일본 순경들이 휘두르는 칼을 피하지 못해 팔의 피부가 잘려나가 피를 흘리는 젊은이가 집으로 도망쳐 뛰어 들어왔을 때, 흘리는 피를 막기 위해 솜에 불을 붙여 상처 난 곳을 불로 지져 지혈했다는 이야기였다. 처참한 내용이었지만, 나에게는 내가 6·25 때 직접 보았던 일들만큼 절실한 감정을 일으키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 몇 학년 때인가 확실하지 않지만, 3·1 운동 선언문의 전반부를 외운 적이 있었다. 외워야 했던 것이 분명한 것은, 지금도 선언문의 첫 몇 문장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吾等은 玆에 我 朝鮮의 独立国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此로써 世界万邦에 告하야 人類平等의 大義를 克明하며 此로써 子孫万代에 誥하야 民族自存의 正権을 永有케 하노라.’ 20세기 초 일본의 핍박 아래 있었던 가난했던 조선의 이 선언문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克明하며”와 “正権을 永有케”의 단어는 기억나지 않는다. 혹시 당시 교과서에는 다른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2000년 이후 태어난 후배들은 이 선언문이 한국의 선언문인지 중국의 선언문인지 헷갈릴 것이다. 백년의 세월을 넘긴 지금 한국은 그만큼 달라졌다. 나에게 3·1운동이 기록의 역사이듯이, 지금 젊은 세대들에게 내가 겪은 2000년 이전의 모든 사건은 기록의 역사일 것이다. 기록된 사건과 경험한 사건의 차이는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요즈음 세대들은 과거의 사건이 지금 우리 삶과의 연결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왜 그럴까?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일이 너무나 흔하고 과거를 꾸며대는 가짜 뉴스가 너무 많아, 이들의 사고를 그렇게 안이하게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기록의 역사와 현실 체험 둘을 서로 관계가 없는 다른 나라의 일인듯 여기는 사고 방식은 자신이 속한 그룹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집단이 그런 태도를 조장한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교육하고, 그렇게 역사 왜곡을 일반화시킨 것이다. 지금 학생들은, 한국의 건국을, 1948년 이승만 정부수립과 1919년 상해 임시 정부 수립 중 어느 하나를 택해도 상관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올바른 역사 인식을 위해서는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들은 “명성황후의 이미지는 뮤지컬에 등장하는 화려한 모습이면 되었지... 하루가 멀다고 궁중에서 무당 굿을 벌였다는 이야기를 꼭 덧 붙여합니까?”라고 반문한다. 이런 안이한 역사 의식의 꼬투리를 찾아보자. 한국의 방송은 스포츠, 바둑시합을 방송할 때 그것이 재방송인 경우, 사건의 시각과 장소를 밝히지 않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밝히더라도 구석에 밀어넣어 보이지 않게 만든다. TV와 유튜브 모두 같다. 역사 인식의 기본을 파괴하는 일이다. 사건 발생의 시각와 장소는 역사 인식의 기본 틀이다. 이들은 다음과 같이 변명을 할 것이다. “지나간 시합임을 알리면 시청률이 떨어져요, 지금 진행되는 경기인듯 보여야 시청률이 올라가거든요” 시청률을 위해 역사 인식의 틀을 짓밟아 버리는 것이다. “역사 인식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시청률이 더 중요해요, 시청률은 돈입니다. 돈...” 여기서 우리는 돈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깊이 생각해보면, 방송이 사건의 시각과 장소를 알리지 않는 것은 마땅히 알려야 할 정보를 알리지 않는 일이다. 인식의 틀에서 보자면, 대한민국의 건국 정보를 정확히 알리지 않는 일과 다르지 않다. 알리지 않는 배경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모든 역사 왜곡은 방송처럼 그로부터 덕을 보는 이익 집단이 있게 마련이다. 지금 우리의 언론은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설명해 주지 않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는 우크라이나 역사의 이해가 절실하다. 동유럽 역사가인 티머시 스나이더(Timothy David Snyder, 1969-)는 저서 ‘피에 젖은 땅’ (Bloodlands, 2010, 번역 2021)에서 우크라이나의 양민 학살을 상세히 설명한다. 1934년 이후 1945년까지 히틀러와 스탈린은 폴란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지역의 1400만 민간인을 살해한다. 전쟁으로 싸우다 죽은 것이 아니다. 무덤을 파게 한 다음 집단으로 총살하고, 불태워 죽이고, 굶겨 죽인 것이다. 1940년에 이르면, 곡물 수출 물량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다음 해에 심을 씨앗까지 징발해, 우크라이나인을 굶겨 죽인다. 나는 유튜브의 해설자로부터 이 책을 알게 되어, 구입해 읽었다. 끝까지 읽지 못하고 끔찍한 학살의 여러 페이지를 남겨둔 채 책을 내려 놓지 않을 수 없었다. 학살의 기록이 이어질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러-우 전쟁은 2년을 넘기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알게 될 경우, 이 전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달라질 것이다. 한 밤 중 러시아의 미사일이 느닷없이 날라와, 유치원, 어린이 병원을 폭격한다. 평화로운 아파트 건물 한쪽을 날려버리기도 한다. 그곳에 아이들과 잠 자던 가족들은 모두 죽는다. 주민들은 이 장면을 보고도 돌아서서 끝까지 싸우겠다고 다짐한다. 그들의 역사를 알면, 그들 모습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달라질 것이다. 나는 한국에, 우크라이나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인식을 거부하는 집단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누군가의 눈치를 보느라고 입을 다물고 있는 언론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친구들과 이야기해 보면 “너는 왜 그걸 모르니?”라고 반문한다. 무얼 모르는 것일까? 모르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들 한다. 지식인들의 나태가 원인이라고도 말한다. 지식인들에게 “당신들은 해방 후 80년간 국민에게 무슨 담론을 마련해 주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들은 “공부하느라고... 바빠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공부? 그건 개화기 초에나 정당화될 수 있는 답변이다. “출세하느라고 바빴겠지.” 가짜 뉴스가 횡횡하고 언론이 담론을 왜곡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공부하지 않았던 결과의 결과다. 70년대 이후 당시 대학은 학기가 시작하고 한 달을 넘기면 데모에 휩싸였고 70년대 후반부터는 4월 휴교가 다반사였다. 개강하면, 먼저 과제를 주고 리포트를 받아 놓아야 했었다. 학점을 줄 근거를 마련해야 하니까 말이다. 공부하지 못한 이들 386 세대의 전성기는 지난 정권으로 흘러간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현실은 전교조 교사로 진출한 386이 성장기의 어린 학생들의 뇌를 수십년에 걸쳐 비틀어 놓은 결과일 것이다. 그 세뇌가 지금 일부 여성들의 맹목적 열정이고 태연한 가짜 뉴스이고, 왜곡된 담론이다. 이제 우리는 대체 무엇을 기대해야 할까? 10년 후를 내다보자. 어차피 롱-텀의 게임이다. 신 세대의 세뇌 거부는 본능적일 것이다. 2030년대 후반, 이들이 사회적 담론을 주도하게 될 때, 새로운 한국이 태어날 것임을 확신한다. 그때의 한국은 지금과는 다를 것이다. 희망을 가지고, 공산화만은 막아내자.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약력]서울대 명예교수 [저서]시와 리듬(1981, 개정판 2011), 음악을 본다(2009), 세계의 음악(2014) 등 [번역]기호학 이론(U. Ecco, 1984), 서양음악사(D. J. Grout, 1997)
    2024.07.13 05:50:00
    역사 의식과 세대
  • 문화 프리즘
    요즈음 외국 여러 나라의 젊은 층에서 한글의 인기가 대단한 모양이다. 시쳇말로 난리가 난 정도라고 한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자. 한글을 배우면서 느끼는 재미와 쾌감을 한번 생각해 보자는 뜻이다. 언어에 사용되는 소리를 지칭할 때에 영어에서 “phone”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한국어로는 “말소리”일 것이다. “phoneme”는 “음운/음소”의 두 뜻 모두로 사용하는가 보다. 여기서 우리는 “phoneme”를 “음소”로, “phone”을 “말소리”로 번역해 사용하기로 한다. 훈민정음은 “말소리”를 위해 28자의 “음소”를 제정한다고 명시했으며, 음소들을 자음과 모음으로 나누었고, 이를 조합해 “말소리”를 기록하는 방법을 문자-모양의 그림으로 예시하였다. 한글의 자음/모음 조합으로 만들 수 있는 “말소리” 즉, 글자 수는 8천 개가 넘는다고 한다. “송아지”라는 말소리를 들으면 그 뜻을 모르는 사람의 경우, 그것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생각해 낼 수가 없다. 그 관계가 인위적이기 때문이다. 이를 “상징의 관계”라고 한다. 우리 주변에는, 특히 시각적 상징이 많다. 시각적 상징의 예를 들어보자. “☎”는 전화기, “♨”은 온천, “♀”은 암컷, “π”는 원주율을 상징한다. 앞쪽의 둘은 그 뜻의 짐작이 쉽지만, 뒤의 둘은 사전 지식이 없으면, 알 수 없는 상징들이다. 청각적인 상징을 보자. 우리는 고양이 울음를 “야옹”으로, 중국은 “미야오, 미야오”(喵喵), 일본은 “냐, 냐”라는 의성어로 상징화한다. “喵”은 글자 자체가 고양이의 울음 소리를 뜻하는 한자라고 한다. 의성어는 “전화기”의 상징처럼 짐작하기 쉬운 상징일 것이다. 그러나 언어의 “말소리”는 모호성이 대단히 높은 상징이다. “말소리”의 다음 단계인 단어 차원에 들어서게 되면, 언어의 모호성은 더욱 증가한다. 언어 상징의 모호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미리 공부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서 잠시 일본과 중국의 경우, “말소리”에서 시작되는 상징의 모호성을 줄여나간 방법을 살펴 보자. 일본은 한자를 도입함으로서 이 모호성을 줄였고, 중국은 원천적으로 한자를 만듦으로서 모호성을 해소했다. 일본과 중국 모두 시각적 기록을 사용한 것이다. 일본이 보조적이었다면, 중국은 원천적이다. 그러나 두 언어 모두 “말소리”와 “한자”의 관계를 암기해 두어야만 한다. 물론, 암기하고 나면 편리하다는 것을 말할 필요가 없다. 이 편리함이 한자 사용을 고집하는 원인일 것이다. 조선 역시 한자를 도입해 사용했다. 그러나 일본과는 다른 점이 있다. 한자의 발음을 하나로 정해 놓고 그것을 준수한 것이다. 일본의 경우 “泉”을 음독으로 읽으면 “せん”(센)이고, 훈독으로 읽으면 “いずみ”(이즈미)이다. 한국어에 빗대어 말하면, “木”을 “목”으로도 읽고, “나무”로도 읽는다는 뜻이다. 일본어의 훈독은 뜻을 지칭한다는 의미에서 중국어 방식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중국어는 몇몇 어조사(語助辭)와 외국어의 음성표기를 제외하면, 모두 훈독이다. 중국은 사투리, 또는 언어가 다른 종족에 따라 같은 한자를 다르게 읽는 경우가 한 둘이 아닐 것이다. 중국 문자는 모두 뜻 글자이기 때문에 “코카콜라, 아프리카”등을 표기하는 데에 상당한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이 사물을 뜻하는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야 하지만, 교육용 문자의 수를 줄여야한다는 주장 앞에서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프리카를 “阿非利加”(āfēilìjiā)로 음성표기하고 약해서 “非洲”(fēizhōu)로 표기한다고 한다. 한국어에는 훈독이 없다. “蟲”을 “벌레”로 읽지 않는다는 뜻이다. 표의문자를 거부하고 표음문자를 철저히 지킨 점이 한국은 일본과 다르다. 표의문자 세계에 들어서기를 거부한 것이다. 물론 지식인 층의 자기 보호와 과시 본능으로 인해 한자의 표의적인 지각, 즉 한자의 시각적 인식 없이 듣기만으로는 그 뜻을 알기 어려운 문장을 만들려는 경향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시각적 개입의 최소화로 인해 한국어는 표음 체계를 철저히 지킬 수 있었다. 이는 말을 알아 듣게 되는, 말소리와 뜻 사이의 연결을 직접적인 것으로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다시 말해, “吾等은 玆에 我 朝鮮의 独立国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와 같은 어려운 표현도 말소리만 듣고도 그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한글을 읽을 때에 더 중요한 점은 한글의 글자 모양이 세밀한 근육 운동을 구체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글자의 모양으로 자음과 모음 조합을 명료하게 보여줌으로서, 발음을 위한 신경회로의 형성을 논리적으로 알려준다. 글자를 볼 때마다 구강의 많은 근육들을 어떻게 배합해야 하는가를 직감하고 이를 수행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한글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 연습의 단계를 넘어서서 발음 수행의 자동화에 도달해야 한다. 자동화는 신경회로의 확립과 그 고정화일 것이다. 넘어져가며 연습한 후에, 신경 쓰지 않고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단계에 이르는 것과 같다. 자전거를 배울 때의 즐거움과 성공한 순간의 만족감을 “한글-읽기”에서도 느끼는 것이다. 모호성의 감소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일본인들은 “さん”(산)이라는 말소리를 들을 때에 그것이 “낳음/재산”(産), “시큼한 맛”(酸), “셋”(三), “산”(山) 중 그 뜻을 선택해야 한다. 뜻의 모호성을 없애기 위해 한자가 도움을 준다. 따라서 기록이 필수적이다. 언어 발달 과정에서 기록은 구어를 억압하고 지배하기 때문에 한자를 선택하고 나면, 기록된 한자는 “갑의 입장”에 서게 되고, 피할 수 없는 억압으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 중국 사람들은 “hé”(하) 발음을 들을 때에, 그 모호성을 없애기 위해, 그것이 뜻하는 바에 따라 글자를 새롭게 만들었다. “河”(강), “和”(화합하다), “合”(더하다), “何”(무슨), “盒”(작은 상자)라는 글자를 만들어 그 모호성을 없앤다. 다섯 글자 모두 성조(声调)에서도 같은 “phone”이다. 물론 여기에는, 글자가 먼저 있었는지 말이 먼저 있었는지에 대한 논란을 있을 것이다. 말이 먼저인 경우도 있었고 글자가 먼저인 경우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표의문자의 개입으로 일본과 중국에서는 새로운 발음 개발이 진행되지 않았던 것이다. 새로운 말소리를 만들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만들지 않게 되었다. 중국은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해결했기 때문에 고민할 일이 없었다. 일본의 경우, “さん”(산)의 여러 뜻인, “낳음, 재산”, “시큼한 맛”, “셋”, “산”을 발음만으로 구별해야하는 요구가 오랜 동안 지속되었다면, 새로운 발음이 개발되었을 것이다. 이 네 뜻을 표기하기 위해 예를 들면, “産”를 “섭”, “酸”을 “싴”, “三”을 “삼”, “山”을 “산”등으로 한국처럼 한 음절로 된 새로운 발음 개발을 개발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보는 것이다. “산”(山)을 제외한 세 발음은 일본어에는 없는 “말소리”들이다. 새로운 발음이 생긴다는 것이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새로운 말소리를 발음을 하기 위해서는, 뇌는 복잡한 과정을 겪어야 한다. 처음 만나는 말소리를 시도한다는 것은 호흡에서부터 발음과 관련된 혀와 입의 근육 운동, 발음 후의 청각적 확인 등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시도이고 경험이다. 이어서 근육의 움직임을 자동화하고, 발음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즉시 수행이 이루어지는 신경회로를 고정화해야 한다. 한국 사람 중에도 지역과 나이에 따라 “관광산업”을 “간강산업”으로 잘 못 읽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 기존의 고착화된 신경회로를 없애고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일본 사람들 거의 전부가 “김치”를 “기므치”로 발음하는 것을 보면 올바른 발음 수정이 쉬운 일이 아닌 모양이다. 이제 세계의 젊은이들이 한글을 배우는 즐거움을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글의 글자를 보았을 때에, 그들은 “자음-모음” 또는 “자음-모음-받침”으로 조합된 하나의 “글자” 모양을 보고, 각각의 자음과 모음의 발음을 순서대로 구사하라는 명령을 뇌에서 내려 보낼 것이다. 계속해서 나타나는 한글을 보고 새로운 “phone”를 시도해야 하고 신경회로의 자동화를 이루어나가야 한다. 정확한 발음에 도달한 다음, 단어의 뜻을 생각하게 된다. 한국어 이해의 긴 여정에 들어서는 것이다. 한글을 배우는 외국인들은 위 표의 “큘, 턀, 펼”등과, “훑어본다”던지 “괜찮다”에서 “훑”과 “찮” 등의 발음을 시도하기 위해서 구강 근육의 경이로운 조합을 명령해야 한다. 우리는 사용하지 않는 “말소리”임을 알고 있는, “퓒, 홻, 괆”같은 한글 글자를 상상할 수 있고, 발음을 시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 놀라운 발음이 상상의 세계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새로운 발음을 연습하고 읽혀 갈 때, 한글을 배우는 젊은이들이 느끼는 즐거움과 쾌감은 대단할 것이다. 한글을 일상적으로 읽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 즐거움을 짐작하기 어렵다. 그들은 한글을 배우면서, 글자 하나하나를 읽을 때마다 자전거 타기에 성공하는 즐거움을 맛보는 것이다.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약력]서울대 명예교수 [저서]시와 리듬(1981, 개정판 2011), 음악을 본다(2009), 세계의 음악(2014) 등 [번역]기호학 이론(U. Ecco, 1984), 서양음악사(D. J. Grout, 1997)
    2024.08.10 06:30:00
    한글의 유행
  • 문화 프리즘
    요즈음 한글과 한국어에 대한 세계적 관심이 전과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다. 한글로 자국어를 표기하는 국가가 나타나는가 하면, K팝에 몰입한 청소년들에게 한국어와 한글을 가르치는 나라도 여럿 생겼다. 한국 문자와 한국 말의 성격을 생각해보자. 먼저 한글을 보자. 한글을 배우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분석 능력을 획득한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분석이다. “생각한다”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이 소리를 한 덩어리로 인식한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어로 “생각한다”는 뜻의 말을 듣는다면, 우리는 그 소리를 한 덩어리로 인식할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어느 나라 문자이건 발음 덩어리를 음절로 나누는 일은 첫 번 일어나는 통상적인 작업이다. 한글은 한 단계 더 진전한다. “생각한다”를 “생/ 각/ 한/ 다”로 나눈 다음 다시 각각을 자음과 모음으로 분석한다. 한글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소리 덩어리를 음소차원까지 분석하려는 의지를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 “さ, し, す, せ, そ (사, 시, 수, 세, 소)”로 음절을 분절하지만 다시 자음과 모음으로 분절하지 않는다. 영어 역시 이런 점에서 그 분절이 명확하지 않다. 같은 “i”라도 경우에 따라 발음이 달라진다. “gh”나 “k”처럼 발음하지 않는 경우도 한 둘이 아니다. 어려서부터 한글의 이런 엄격한 논리를 터득한 아이들에게 사고의 단점이 생길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의 나의 경험을 하나 이야기해 보자. 초등 1년 때, 중 1이었던 형이 나에게 “영어는 정말 어렵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어려울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생각한다”는 말의 경우 “생, 각, 한, 다” 등에 해당되는 영어의 음절이 있을 것이며, 이 음절의 대응을 알면, 그 뜻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언어는 그만큼 논리적이라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영어의 번역이 단어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음절 또는 음소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형도 그렇게 상상했었기 때문에 영어가 어렵다고 말했는지 모른다.어릴 때부터 이런 논리적 경직성이 범국민적으로 생긴다면, 옳고/그름을 엄격하게 나누는 2분법에 함몰되는 것이 아닐까. 해방 후 한글 전용이 이루어졌고 지금의 한국인은 거의 전부가 한글 전용세대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의 사고가 한자 시대와 달라졌다면 말이다. 한국어를 생각해 보자. “꽃이 아름답다”와 “꽃은 아름답다”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모교 출신인 20대 후배로부터 들은 답이다. “‘꽃이 아름답다’는 감각적이고 ‘꽃은 아름답다’는 의도적”이라는 답이었다. 이는 어느 정도 문장의 성격을 파악한 대답이다. “꽃이 아름답다”는 현실의 이야기다. 즉, 사실을 서술한 말이다. 반면, “꽃은 아름답다”는 현실이 아닌 마음 속의 이야기다. 다르게 말해, 개념서술이다. 한국어는 “는”과 “이”에 따라 개념서술, 사실서술로 나뉘는 것으로 보인다. 개념서술이 사실서술로 바뀌면, 토픽 서술이 된다. 개념 서술에 현실을 알리는 단어인 “이”가 들어갈 경우 토픽으로 바뀐다는 뜻이다. “이 꽃은 아릅답다”는 토픽서술이다. 섬세한 경우도 있다. “꽃은 아름답네요”가 그런 경우다. 이 말은 “꽃은 아름답다”와는 다르다. “~네요”는 현실적 대화를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꽃은 아름답네요”는 토픽서술이다. 토픽을 정하는 “는”은 문장의 여러 성분에 첨가가 되어 그 앞 단어의 의미 범주를 토픽으로 설정한다. “철수가 오늘 학교에 간다”의 경우 “철수는 오늘 학교에 간다”, “철수가 오늘은 학교에 간다”, “철수가 오늘 학교에는 간다”등이 가능하다. “는”이 여러 곳에 붙는다는 통사론적 설명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토픽은 “그것에 대해서만 말하겠다”는 의미이므로 한 문장에 토픽이 한번 들어가는 것이 원칙이다. 물론 예외가 있다. 예외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 한 문장 안에 “는”이 두 번 들어가 비문이 되는 경우를 가끔 보게 되는 것은 토픽 서술에 대한 교육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영어에도 개념서술 문장이 있다. 그러나 이를 명시하는 문법적 장치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Fire is hot”은 개념서술인지 사실서술인지 분명치 않다. 보통, “불은 뜨겁다”로 번역하는 것을 보면, 개념서술로 간주하는 것으로 보인다. “Fire is hot”을 평평하게 발음하면 사실서술 쪽으로 치우치고, “fire”를 강하게 발음하면, 개념서술이 되지만, 토픽서술로도 이해된다. “Fire is hot”에서 “hot”을 토픽으로 삼으려면, “hot”을 강하게 발음하거나 “hot”을 앞으로 끌고와 “Hot is fire”로 말해야 할 것이다. 여하간 복잡하다. 문법적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어에서는 분명하다. 개념서술에 현실적 지시가 들어가면, 또는 사실서술에 “는”이 개입되면 토픽서술의 문장이 된다. 한국어는 이를 문법적으로 정립한 것이다. 한국어의 사실/개념/토픽 서술은 한글의 영향 만큼이나 우리의 사고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니?”의 뒤에는 그런 영향이 숨어있을 것이다. “너는 지금 토픽 개념없이 이야기 하는 구나” 하는 지적이다.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약력]서울대 명예교수, 전 서울대 음악대학교 학장 [저서]시와 리듬(1981, 개정판 2011), 음악을 본다(2009), 세계의 음악(2014) 등 [번역]기호학 이론(U. Ecco, 1984), 서양음악사(D. J. Grout, 1997)
    2024.04.06 05:30:00
    한글과 한국어
  • 문화 프리즘
    조율에 대해 알아 보자. 기타(guitar)의 지판(fingerboard)에는 음높이를 결정하는 줄받침(fret)이 고정된 위치를 지키고 있다. 이처럼, 조율은 음높이를 정하는 일이다. 기타의 줄길이가 ‘90cm’라고 하자. ‘90cm’의 개방현이 ‘도’ 음을 낸다면 ‘레’는 ‘10cm’를 줄인 곳에 프렛을 설치해 ‘80cm’를 진동시켜 낸다. 줄길이의 비례는 ‘9:8’이고 진동수비는 ‘8/9’다. ‘레-미’의 줄길이 비례는 ‘10:9’이므로 ‘80cm’에서 ‘8cm’를 줄인 곳에 프렛을 설치한다. 그러면 ‘미’ 음을 들을 수 있다. 개방현인 ‘도’와 ‘미’의 실제 줄길이가 ‘90cm’와 ‘72cm’이므로 비례는 5:4다. (줄길이 비례는 ‘:’로 진동비는 ‘/’로 표시한다.) ‘도-레-미-파’가 ‘8/9, 9/10, 15/16’의 진동비이듯이 ‘솔-라-시-도’도 같은 비례로 조율된다. 그리고 아래 ‘도-파’와 위 ‘솔-도’가 연결되는 ‘파-솔’의 간격을 ‘8/9로 설정하면 순정조(just intonation)가 완성된다. 여기서 비례로 사용된 숫자들이 2, 3, 5와 그 배수들임을 알 수 있다. 진동의 입장에서 보자면 정수 배의 진동들이다. 이를 배진동이라고 한다. 배진동을 이해해 보자. 그네를 타고 있는 아이 옆에서 그네를 밀어 준다고 하자. 한번 왕복에 한번, 두 번 왕복에 한번 밀어 주어도 된다. 세 번에서도 한 번이다. 힘의 공급수와 그네의 진동수는 배수 관계다. 기타의 줄이 1초당 100번 진동하면 줄이 묶여 있는 악기의 어느 한 부분은 이 힘의 공급을 받아 200, 300, 400번…의 진동을 만들 수 있다. 모든 진동은 정수 곱이 되는 진동을 동시에 만들어 낸다. 음악에서는 이를 배음(overtone)이라고 칭한다. 순정조는 2, 3, 5의 배진동을 이용해 음계를 조율하는 반면, 피타고라스조는 2, 3 배음만을 사용한다. 순정조의 ‘레-미’인 ‘9/10’에는 5의 배수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9/10’을 ‘8/9’로 대체한다. ‘도-레’와 ‘레-미’를 ‘8/9’로 조율하면 피타고라스 조의 ‘미-파‘가 남게 된다. 피타고라스의 ‘미-파’는 순정조보다 좁은 ‘243/256’ 이다. ‘3’과 ‘2’의 배수들이다. ‘cent’ 단위로는 90이다. ('cent'는 지수함수를 이용해 곱셈을 덧셈으로 하는 음정 단위다) 바로크 시대에 이르면, 조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 현악합주에서 ’도미솔‘, ’파라도‘, ’솔시레‘의 3화음 연주에는 순정조 조율이 적격이다. 세 음의 진동 비례인 4:5;6은 모두 ’1‘의 ‘overtone’들이므로 좋은 울림을 만든다. 한편, 바이올린은 ‘시’에서 ‘도’로 멜로디를 끌어 올릴 때, 간격이 좁은 피타고라스 반음을 선호한다. 그러나 건반악기인 하프시코드에서 문제가 생긴다. 건반악기를 순정조로 조율할 경우, ‘c-d’ 사이는 ‘8/9’(204)이고, ‘d-e’ 사이는 ‘9/10’(182)이다. 따라서 ‘c’와 ‘d’를 ‘도-레’로 사용하는 C 장조의 연주는 가능하지만, ‘d’와 ‘e’를 ‘도-레’로 사용하는 D 장조의 연주는 불가능하다. 해결책으로 204와 182의 중간 값인 193을 선택한다. 이 선택은 진동수 비례를 계산한 것이라기 보다는 중간이라는 느낌의 음높이를 찾는 조율이었을 것이다. 이를 ‘중간음 조율’(mean tone system)이라고 칭한다. 중간음 조율의 건반에서는 서너 개의 조를 자유롭게 옮겨다닐 수 있게 된다. 바로크 시대의 음악이 발전하면서 모든 조를 옮겨다닐 수 있는 조율이 요구된다. 중간음 조율을 넘어서서, 반음이 두개 모이면 온음이 되는 조율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옥타브를 12개의 똑 같은 크기로 조율하자는 요구다. 열두 번 곱해서 2가 되는, 즉 2^1/12의 값을 구하는 일이다. 여기서 이 값의 숫자를 굳이 밝힐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센트 값으로 말하면, 100 센트의 크기다. 모든 반음은 100, 모든 온음은 200센트이다. 이것이 평균율 조율이다. 유럽의 조율이 2의 12승 근을 찾았듯이 아랍의 음악은 2의 17승 근, 또는 19승 근을 찾았었다. 튀르키에의 한 조율 연구자는 그 값을 찾아 평생을 바쳤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무리수의 개념이 없었으니까 분수로 찾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과장된 이야기이겠지만, 그의 아들 손자까지 3대를 바쳤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평균율은 옥타브의 열두 음들이 평등한 자격을 지닌다는 의미를 부여한다. 옥타브 내의 여러 음들은 자연 상태에서 평등하지 않았다. 어떤 음은 “사장”(으뜸음)이고 어떤 음은 “지배인”(딸림음)이었으며 멜로디의 진행에서도 음들 사이에는 상하 관계가 있었다. 이 관계는 음계의 음 관계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평균율 조율은 음들 간의 계층성을 포기한다. 각 음들은 자신의 권리를 양보한 것이나 다름 없다. 말하자면, 민주주의 사회가 구현된 셈이다. 평균율과 민주주의를 비교해 보자. 누구나 한 표씩 구사하는 권리가 민주주의의 기본이라고 한다면, 처음부터 한 표씩이었을까? 민주주의가 시작된 시점에서, 영국은 귀족과 납세자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했다, 투표지의 수도 달랐다. 부자는 두 세 장의 투표지를 받았다. 스위스에서 여성 참정권은 1959년 남성들만의 국민 투표에서 압도적표 차로 부결되었고, 1957년 불어 사용 지역이 여성 참정권을 선언한 후, 60년대에 이르러 여성이 투표를 했으며, 전국의 여성 투표는 1971년에 이루어진다. 한국의 상황을 보자. 한국은 1948년 5월 총선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결정으로 남녀평등, 1인1표 제도가 시행된다. 놀라운 일이다. 그후 정치의식과 윤리의식은 빠른 경제성장을 따라 잡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 우리의 어려운 현실이 중진국 진입 후 출생한 세대들의 “원래부터 이 정도 잘 살았지!”하는 무관심과 자만 때문인지, 아니면 “역사는 직진하지 않는다”는 세계사적 진리 때문인지? 헷갈린다. 초등 1년생이 얼떨결에 전교 1등을 한 뒤, 제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 아닌지? 어떻게 하겠나, 이해해야지. 이것이 지금 한국의 상황일까? 평균율을 설명하면서 생각이 여기까지 이른다.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약력]서울대 명예교수 [저서]시와 리듬(1981, 개정판 2011), 음악을 본다(2009), 세계의 음악(2014) 등 [번역]기호학 이론(U. Ecco, 1984), 서양음악사(D. J. Grout, 1997)
    2024.05.04 05:20:00
    순정조와 평균율
  • 문화 프리즘
    인도네시아의 음악은 우리 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음악이다. 영어권에서는 “gamelan”(가믈란)이라는 별칭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네시아를 오랜 동안 지배했던 네덜란드에게 가믈란은 친밀한 음악이다. 네델란드의 몇몇 대학은 자국 학생들과 인도네시아 태생의 연주자들로 구성된 가믈란 연주단이 있을 정도다. 그 외에 인류학적 관점에서 음악에 관심이 많은 유럽의 몇몇 대학과 미국 서부의 대학에 가믈란 악기 세트와 연주자들이 있다고 한다. 인도네시아의 국토는 1만 7000개가 넘는 섬으로 구성되어 있고, 섬들은 400개가 넘는 화산을 품고 있다. 섬들 간의 동서의 거리(5300km)는 한반도 남북 거리(1100km)의 다섯 배가 될 정도여서, 문화적 통일이 그리 쉽지 않으며 섬 주민들은 해변에 거주하며, 섬 내부 고지대 원주민들은 외부로부터 고립되어 있다. 수도가 있는 자바 섬이 문화의 중심이다. 가믈란의 어원은 인도네시아어의 “gamel”(손으로 다룸)에서 유래된 말이며, 지금은 가믈란 악기를 두들기는 막대기라는 뜻으로도 쓰인다고 한다. 정통적인 가믈란 음악 역시 자바 섬이 중심이다. 가믈란은 특이한 음악이다. 음악이라기 보다는 크고 작은 여러 종소리가 함께 울리는 종소리 음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외워서 흥얼거릴 수 있는 멜로디가 존재하지 않은 음악이다. 이 종들을 “gong-chime”이라고 부른다. 베트남 북부의 “동선문화”(東山文化, B.C.1000 - B.C.100)의 청동기는 인도차이나, 말레이 반도, 중국, 티벳에 이르기까지 주변 지역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친다. 공-차임의 원조인 동선-드럼이 기원전 400년경 인도네시아에 소개된 것으로 전한다. 도입된 악기는 사진과 같은 청동-케틀드럼(bronze kettledrum)이었다. 케틀-드럼은 반구형의 통 위를 가죽으로 덮고 가장자리를 당겨 음높이를 조절하는 북을 통칭하는 악기다. 유럽의 팀파니가 그 좋은 예다. 공-차임 악기는 전쟁 후 퇴각한 적군이 남긴 무기를 녹여 제작한 것이었기 때문에 값 비싼 물건이었다. 금속 악기는 귀족들의 애호품이었고, 금속 자체가 신비의 대상으로 여겨져 공-차임 악기들은 초자연적인 힘을 지닌 신앙의 대상이 된다. 이때 청동을 다루는 대장장이들이 등장하게 되고, 이들의 후손이 지금도 악기를 제작하고 있다. 사진에서 보듯이, 공-차임은 크기와 모습에 있어 차이를 보인다. 한국의 냄비 비슷한 모양도 있고 속이 빈 기둥 모습도 있다. 돌출되어 있는 부분은 막대기 끝으로 두들기는 부분이다. 왼편 “징”에도 돌출부가 있다. 인도네시아 전역은 13-16세기 간에 이슬람화된다. 그 이전의 인도 문화의 유적으로는 자바섬 자카르타 북부의 보로부두르(Borobudur) 불교 사원이 대표적이다. 이 사원 벽면에는 가믈란 연주단 모습이 부조되어 있다. 이슬람의 칼리프가 인도네시아의 대부분을 점령하면서, 가믈란 악기 세트를 가진 지역 귀족들이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가믈란 악기의 연주를 금지시키고 악기를 압수해 땅에 묻어버리는 정책을 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민중의 반발이 자주 일어나자, 발굴하여 다시 사용하게 허락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처럼 인도네시아의 공-차임의 문화적 전통은 그 뿌리가 강력하다. 가믈란 음악은 관광객 코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관광객들은 악기에 대한 설명을 듣고 직접 연주하는 과정을 즐긴다고 한다. 공-차임은 타악기여서 손가락을 사용하지 않고 연주할 수 있으므로, 연주가 쉽다는 점이 매력적일 것이다. 가믈란에도 활을 사용하는 레밥(rebab)과 취주 악기인 술링(suling)이 있지만 주된 악기는 모두 타악기다. 다음 사진은 가믈란 정식 연주단의 정좌한 모습과 외국 관광객들이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다. 공-차임의 조율은 매우 어려우며 전문적인 작업이다. 현악기의 경우 연주자가 직접 조율하지만, 공-차임의 경우 악기의 표면을 부분 부분을 갈아내어 조율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악기공인 대장장이들은 귀한 대접을 받는다. 이미 사용하고 있는 악기들도 제작 후 10년이 지나면 다시 한번 조율해야 한다고 한다. 공-차임의 음계 설정을 살펴보자. 음계의 설정은 줄의 진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배음(overtone) 인식에서 출발한다. “overtone”은 우리 말로 옮기자면 “위에-있는-음”들이란 뜻이다. “배음” 보다는 “상위음”이 더 적절한 번역일 것이다. 음을 들을 때에 우리의 뇌는 “위에-있는-음”들을 무의식에 담아둔다. 의식에서는 “위에-있는-음”들을 음색으로 전환해 인지하는 것이다. 배음은 우리가 직접 인지하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음이기 때문에 뇌에 각인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무의식에 각인되어 있던 음높이의 관계가 음계 설정의 원칙이 된다. 원시 상태에서 노래를 부를 때에도 이 관계가 표면으로 등장해 음계를 형성하는 단서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차임 악기는 1, 2, 3번 등의 배음을 만들지 않고 20, 21, 또는 29, 30 ... 등의 높은 곳의 “overtone”만을 만든다. 쇳소리로 들리는 이유다. 배음 분포가 음색이기 때문이다. 공-차임의 음만을 듣는 인도네시아인들에게는 배음의 구조가 뇌리에 담기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가믈란 악기들은, 순정조에서 조율의 방법으로 사용하는 1번에서 5번까지의 배음의 진동비, 즉 “1:2”, “2:3”, “4:5”의 비례와는 무관한 조율을 추구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 결과 옥타브를 균등하게 나눈 5-음 음계인 “slendro” 음계와 7-음 음계인 “pelog” 음계를 설정하는 결과를 낳는다. 균등한 음간 거리를 추구하지만, 정확할 수가 없다. 우리의 뇌리에는 그런 균등한 거리의 경험과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곡은 어떻게 구성할까? 곡의 구성 방법은 크고 작은 여러 공-차임에 따라 규칙이 주어진다. 여기서는 악기 이름들과 구성 방법을 지시하는 전문적인 용어를 피하려고 한다. 전문 용어와 복잡한 설명은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낮은 소리를 내는 큰 징은 긴 호흡으로 중요한 분절 지점에서 울리고, 높은 음의 차임은 여러 음들이 규칙 없이 연결되는 화려하고 빠른 음-진행을 만든다. 중간 음역과 악기들은 저음역과 고음역 사이에서 자신의 역할을 한다. 간단히 말하면, 낮은 소리일 수록 덜 자주 울리고 높은 소리일 수록 자주 그리고 빠른 속도로 울린다는 뜻이다. 저음역은 가끔 소리를 내고, 높은 고음역은 쉴틈 없이 연주하여 윗쪽은 화려하고 아랫쪽은 든든한 구름 덩어리와 같은 모습을 만드는 것이다. 가믈란 음악은 공중에 떠있는 소리의 구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믈란 음악에 대한 설명을 처음 듣는 분이 많을 것이다. 처음 접하는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설명도 중요하지만 직접 음악을 듣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요즈음 인터넷 상에는 정통적인 음악과 멋대로 변형시킨 음악이 섞여 있어서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유투브에서도 마찬가지다. 확실하지는 않겠지만, 이를 구별하는 방법을 안내한다. “google”이나 “naver”에서 “gamelan java”를 검색한 다음 동영상을 선택하는 사이트가 나타나면, 연주자의 모습과 악기의 정렬이 정통적이라고 느껴지는 동영상을 택해 감상하면 된다. 한 두번 경험하면 정통적인 것과 아닌 것을 구별할수 있을 것이다. 앞서 설명한 균등 간격의 두 음계를 들어 보려면, “pelog”, “slendro”를 검색 후 “wikipedia” 사이트를 선택해 두 음계의 음들을 들을 수 있다. 인도네시아 음악에 대한 설명은 가능한 한 전문적인 용어를 피해 설명하려고 했다. 생소한 단어와 전문 용어는 글을 번잡하게 만들고 이해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번 기회에 가믈란 음악을 한번 들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약력]서울대 명예교수 [저서]시와 리듬(1981, 개정판 2011), 음악을 본다(2009), 세계의 음악(2014) 등 [번역]기호학 이론(U. Ecco, 1984), 서양음악사(D. J. Grout, 1997)
    2024.07.27 06:40:00
    인도네시아 음악    
  • 문화 프리즘
    일본의 문화는 많은 상징을 담고 있다. 종교, 생활, 놀이, 스포츠 등 모든 곳에서 상징이 넘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의 종교관은 특이하다. 일본 문부성 조사에 의하면, ‘신토’(神道)와 ‘불교’를 선택한 수를 합하면 그 수가 전체 인구의 150%를 넘는다고 한다. 다른 나라의 경우 타 종교에 대해 배타적인 것이 보통인데, 일본은 특이하다. 2010년의 조사에 의하면, 일본의 신사(神社)의 수는 10만을 훨씬 넘는다고 한다. 이 시기의 일본 전역의 편의점 수가 5만여 개라는 점을 감안하면, 동네마다 신사의 수가 서너 개일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인구의 거의 전부를 포용하는 종교인 신토는 세계의 여러 종교와는 다른 점이 많다. 창시자가 없고, 가르침과 원칙에 해당되는 교조나 교리도 없다. 성경이나 코란과 같은 경전이 없다는 뜻이다. 천황의 계보를 정리한 고사기(古事記, 712년), 일본 정사인 일본서기(日本書紀, 720년), 헤이안 시대의 신토 자료인 고어습유(古語拾遺, 807년) 등의 역사 자료를 신도들에게 경전 대신 추천한다. 교주/ 교리/ 경전 등, 종교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 바로 일본 특유의 상징일 것이다. 일본의 상징을 살펴보자. 위 사진의 ‘도리이’(鳥居)는 신의 영역과 속세를 구별하는 상징적인 문이다. 사진에서 처럼 ‘도리이’를 바다에 세운 경우도 흔하다고 한다. 바다의 ‘도리이’는 이곳의 수심이 낮다는 것을 알리는 표시이기도 할 것이다. 신도가 모시는 신(神, かみ)도 다양하다. 황실을 모시는 황실 신사를 비롯해 개인의 조상, 산과 바다 등을 모시는 신사도 있다. 사원에는 나무 가지에 매단 소원을 적은 종이 잎사귀, 나무에 소원을 세긴 에마(絵馬), 경배시 울리는 ‘방울’(鈴鐘) 등 모두가 상징이다. 신사는 상징으로 가득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사를 경배하는 순서도 엄격하게 정해져 있다. 그 순서의 엄격함은 상징의 엄격한 절차일 것이다. 신사에 도착하면, 도리이와 미카도(神門)를 지날 때 목례한다. 데미즈야(手水舎)에 이르러, 손을 씼은 다음, 오른손으로 물을 떠서 왼손을 오무려 물을 받아 입을 헹군다. 이때 국자에 입을 대지 않아야 한다. 참배 전에 소원을 적은 다마구시(玉串, 종이 오리)를 지정된 곳에 묶는다. 참배 길을 지나서 새전 함에 돈을 넣고, 줄을 당겨 영종(鈴鐘)을 울린 다음 배례한다. 두번 절하고 두번 박수 친 다음 한번 절하는 것이 배례의 기본이다. 참배 시에는 눈을 감지 않아야 한다. 절하는 순서는 조선의 제사와 비슷하다. 이제 스포츠의 상징을 살펴보자. 프로 선수들이 참가하는 일본 최대 스모 경기인 오오즈모(大相撲)도 상징으로 가득차 있다. 준비 동작인 시코(四股)는 양다리를 쩍 벌리고 한 발씩 들었다가 지면을 강하게 내리 밟는 행동이다. 시코(四股)는 시코아시(醜足)의 약칭이라고 한다. 민속적 신앙으로 땅 속의 사악한 영령을 짓밟아 누르고, 대지의 기운을 밟아 가라앉혀, 잠자는 초봄의 대지를 깨워서 한 해의 풍작을 약속받는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요비다시(呼出)는 부채를 펼치고 다음 대결에 나올 선수의 호명을 칭하는 말이다. 특이한 목소리로 노래하듯 리키시(力士)의 이름을 길게 읊는 모습은, 리키시가 물로 입을 헹구고, 소금을 뿌리는 행동과 더불어 스모 경기 상징의 절정일 것이다. 치카라미즈(力水)는, 승리한 선수가 다음 리키시에게 국자로 물을 떠주면 출전할 리키시가 입을 헹구고 물을 뱉어내는 의식이다. 그 다음 건네준 치카라가미(力紙)로 입을 닦는다. 전통 종이인 치카라가미를 반으로 접어 입을 닦는 의식은 리키시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다는 뜻이다. 신사와 스모의 여러 상징들은 처음부터 전체로 주어진 것이 아닐 것이다. 시간을 두고 하나씩 추가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추가는 일본의 문자 세계에서도 일어난다. 일본의 한자에는 새로 만든 문자가 많은 편이다. 일본 특유의 한자를 찾아 보자. 인터넷 검색을 통해, 더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다음은 재미있는 글자로서, 사고의 소박함을 보여준다. 峠 (도우게, とうげ) 고개 辻 (스지, つじ) 네 거리 凪ぐ(나구, なぐ) 바람이 그치다 刈る(가루, かる) 머리털 등을 깎다 (髪を刈る) 姫 (히메, ひめ) 귀인의 딸 새 한자를 만드는 이유가 있다. 새로운 발음만으로 새 단어를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본어에는 발음 수가 많지 않다. 위의 예에서, ‘凪ぐ’의 발음은 ‘なぐ’(나구)인데, 이미 ‘薙ぐ’(후려치다), ‘和ぐ’(평온해지다)에서 사용되고 있는 발음이다. 이들 단어도 한자를 병기해야 구별된다. ‘辻’(つじ, 쯔기)의 발음도 ‘머리 중앙의 가마’(旋毛)의 뜻으로 이미 쓰이고 있는 발음이다. 새로 만든 글자는 키보드로 입력하기 위해서는 여러 절차를 거쳐야 한다. 디지털화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일본의 문화는 수치화할 수 없는 상징으로 가득 있다. 다른 표현을 쓰자면, 유겐(幽玄)의 상태를 선호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풍성한 상징은 민심을 깊고 그윽한 한 곳으로 모을 수 있겠지만, 일본 국민들을 숫자화하는 ‘마이남바’(my number)를 찬성으로 이끄는 데에는 방해가 되어, 통신과 디지털 거래를 어렵게 만든다. 상징 애호는 일본인들이 카드 결제보다는, 지폐 사용을 선호하는 원인일 것이다. 일본의 상징에 대한 지금까지의 긴 설명은, 간략한 설명으로는 일본의 상황을 실감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일본 문화의 상징은 여기서 마무리하고, 이어 일본 음악에 대해 설명하기로 한다.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약력]서울대 명예교수 [저서]시와 리듬(1981, 개정판 2011), 음악을 본다(2009), 세계의 음악(2014) 등 [번역]기호학 이론(U. Ecco, 1984), 서양음악사(D. J. Grout, 1997)
    2024.06.29 05:40:00
    상징과 일본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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