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연기금보다 패밀리오피스를 먼저 찾아갑니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한 사모펀드(PE) 운용사 임원이 털어놓은 말이다. 투자 심리가 얼어붙은 시장에서 운용사들의 발걸음이 조용히 자산가들로 향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이미 패밀리오피스가 사모펀드 운용사들의 주요 출자자(LP)로 자리 잡았다. 연기금과 공제회 등 기관 자금이 경기 변동에 따라 보수적으로 움직이는 사이, 패밀리오피스는 장기적인 투자 성향과 빠른 의사 결정으로 시장의 새로운 ‘큰손’으로 부상했다.
국내에서도 비슷한 조짐이 보인다. 최근 국민연금이 올해 국내 대체투자 출자를 건너뛰기로 하면서 자금 경색 우려가 한층 깊어졌다. 수조 원대 기관의 자금이 멈추자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사모펀드들이 패밀리오피스와 해외 대학 기금 등 민간 자본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시장의 자금 생태계가 재편되는 것이다.
한국은 제도적으로 사모펀드가 기관 전용형과 개인 전용형으로 구분돼 있다. 이 때문에 고액 자산가들이 직접 출자하기보다 신기술사업금융회사를 세워 간접 투자하는 구조가 일반적이었다. 덕분에 패밀리오피스의 시장 진입은 더뎠지만 출자 시장이 위축되자 운용사들이 먼저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국내에 거점을 둔 글로벌 PE들도 예외는 아니다. 패밀리오피스 전담 미팅이나 공동출자 제안이 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성담그룹이다. 염전 사업을 기반으로 성장한 성담은 안정적인 현금 창출력을 바탕으로 사모펀드 출자에 나서며 ‘투자형 패밀리오피스’로 변신했다. 카버코리아 매각 이후 개인 운용사를 세운 이상록 전 회장 역시 대표적인 개인 LP로 꼽힌다. 이들은 단순히 자산을 지키는 부자가 아니라 산업의 흐름을 읽고 리스크를 감내하는 ‘적극적인 자본가’로 나섰다.
하버드와 매사추세츠공대(MIT) 등 미국 주요 대학의 기금이 한국 사모펀드 출자를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글로벌 경기 둔화 속에서도 한국이 성장성과 안정성을 동시에 갖춘 투자처로 인식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국민연금이 한발 물러선 사이, 민간 자본과 해외 기금이 국내 시장의 새로운 활력으로 떠올랐다.
물론 과제도 남았다. 패밀리오피스 자본의 본격 유입을 위해서는 투자 구조의 투명성과 규제 명확성이 전제돼야 한다. 제도적 장치 없이 자금만 빠르게 늘면 부작용도 뒤따른다. 패밀리오피스는 본질적으로 사적 자본이지만 시장의 신뢰는 공적 기준 위에서 형성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