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환율이 심리적 마지노선인 달러당 1400원을 넘어 연일 고공 행진(원화 약세)하고 있다. 통상 코스피가 오르면 원화 값도 같이 상승(환율 하락)하는 게 일반적인 흐름이지만 한미 통상 협상 불확실성과 일본 새 총리 변수 등이 원화 값 하락세를 부추기는 모습이다. 전문가들은 환율이 펀더멘털보다 정책·통상 리스크나 심리 요인에 더 영향을 받고 있다며 당분간 1400원 초중반대에서 움직일 것이라고 전망한다.
22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미 달러당 원화 값은 전날보다 2원 오른 1429.8원에 주간 거래를 마쳤다. 12거래일 연속 1400원대다. 환율 종가는 지난달 25일(1400.6원) 1400원에 진입한 후 단 하루(9월 29일)를 제외하고 줄곧 1400원대에서 움직이고 있다. 이달 14일(1431원)에는 5개월 반 만에 1430원대까지 치솟았다가 이후 1410원대로 내려왔지만 이날 다시 장중 1430원을 찍었다. 13일 외환 당국이 1년 6개월 만에 구두 개입할 때 수준인 환율에 다시 근접했다.
최근 1400원대에 머무는 기간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2022년(9월 22일 이후 31거래일), 올 상반기(지난해 12월 2일 이후 101거래일) 다음으로 세 번째로 긴 기간이다.
주목할 점은 원화가 강세를 보일 환경인데도 원화 값은 속절 없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 코스피 지수는 외국인의 폭풍 매수 행렬을 기반으로 4000선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국내 증시로 자금이 유입되면 원화 수요도 커지기 때문에 원화 가치가 오르는 게 필연적인 흐름인데 이달 들어서 ‘디커플링’이 심화되는 모습이다.
유동성 지표도 마찬가지다.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은 최근 양적긴축(QT) 종료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 경우 미 달러 유동성이 회복돼 신흥국 통화가치가 오르는 게 일반적이다. 다음달 미 연준이 정책금리를 인하할 것이 확실시 돼 한미 금리차가 축소되는 점도 원화에는 호재다. 하지만 최근 원화 가치는 정반대로 뚝뚝 하락하고 있다. 우리나라와 경제구조가 비슷한 대만의 통화인 대만달러보다 최근 한 달간 원화의 절하 폭이 1.62배 더 크다.
이는 한미 관세 협상의 핵심 쟁점인 ‘3500억 달러 대미투자펀드’ 조달 방식과 관련해 여전히 윤곽이 안 나오면서 시장 불안이 가라앉지 않기 때문이다. 문다운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이달 말 경주에서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원화에 우호적인 협상이 타결될지는 여전히 미지수”라며 “현금 투자 비중이 크게 축소되지 않는 한 원화 가치가 다시 상승 탄력을 받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전날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자민당 총재가 첫 여성 총리로 선출된 점도 원화 약세에 영향을 주고 있다. ‘여자 아베’로 불리는 다카이치 총리는 일본 전 총리인 아베 신조와 마찬가지로 대규모 양적완화와 재정지출 확대를 예고한 바 있다. 이에 글로벌 금융 시장에서 엔화 약세가 촉발됐고 엔화의 프록시(대리) 통화로 분류되는 원화도 영향을 받았다.
이낙원 NH농협은행 FX파생전문위원은 “엔화 약세를 지지하는 일본의 새 총리 선출 소식에 엔화가 약세를 보였고 원화도 이에 연동됐다”며 “주식시장만 보면 위험선호(risk-on) 분위기지만 외환시장은 대미 투자 관련 부담과 엔화와의 높은 상관성 등에 더 영향을 받고 있다”고 분석했다. 서학개미의 해외 주식 매수 행렬도 원화 값을 지속적으로 압박하고 있다.
시장 전문가들은 대체로 당분간 원화 약세 기조가 이어질 것으로 본다. 환율이 국내 증시 흐름, 한미 금리차 등 펀더멘털 요소 보다는 한미간 무역 협상 등 외부 변수에 더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일각에서는 환율 상승 압력이 조만간 완화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이민혁 KB국민은행 연구원은 “일본 물가가 높은 상황을 고려하면 일본은행(BOJ)의 금리 인상 기조가 유지될 확률이 높아 장기적으로 다카이치 트레이드(엔화 약세 베팅)가 지속할 가능성은 낮다”며 “이 경우 원화 가치의 하방 압력도 줄어들 수 있다”고 말했다.
박상현 iM증권 연구원도 “일본 경제는 이미 인플레이션에 진입해 과도한 돈 풀기가 어렵다”고 전망했다. 아베 총리 때와 경제 및 증시 상황이 달라 다카이치 총리가 대규모 확대 재정정책을 추진하기 힘들고 이에 ‘슈퍼 엔저’가 지속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