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읍에 위치한 궁남지는 속칭 마래방죽으로 불리는 곳이다. 궁남지라 함은『삼국사기』의 기록에서 연유된 것이다.『백제본기』무왕35년조에 보면 <궁의 남쪽에 연못을 파고 20리 밖에서 물을 끌어 들였으며 연못가에는 버드나무를 심었다. 연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현재 복원된 연못이 백제 왕궁지의 남쪽에 해당하는 연유로 연못의
[창경궁의 여성공간 사진 갤러리] 창경궁은 1484년 성종이 당시 생존하였던 세 왕후(세조·덕종·예종)의 거처를 지은 궁궐로 옛 수강궁 터에 자리를 잡았다. 왕후를 위해 건립된 궁궐인만큼 궁중여성생활공간의 다양한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하였다. [양화당] [통명전] [환경전] [경춘전] [창경궁(昌慶宮)] 서울 종로구 와룡동(臥龍洞)에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 1484년(성종 15) 당시 생존하였던 세 왕
부안채석범주일원은 변산반도에서 서해바다 쪽으로 가장 많이 돌출된 지역으로 강한 파도와 바람의 영향으로 형성된 곳이다. 높은 해식애 및 넓은 파식대, 수 만권의 책을 정연히 올려놓은 듯한 층리 등 해안지형의 자연미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파식대, 해식애, 해안단구 및 화산암류, 습곡 등은 과거 화산활동 연구의 기초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또한 다양한 암벽 및 상록활엽수의 식생이 형
고종이 아관파천 이후 환궁한 곳은 경복궁이나 창덕궁이 아닌 덕수궁이었다. 원래의 이름은 경운궁인데 덕수궁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은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한 이후 살았던 궁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말하자면 덕수궁은 궁궐 이름이라기보다는 상왕에게 붙인 궁호인 셈이다. 덕수궁은 대한제국의 정치사적 무대이자 새로운 도시의 중심이었으며 불행한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현장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전진리 낙산 [창건연대] 671년 [이야기] 소나무의 꾸짖음 [참고자료] 『삼국유사(三國遺事)』, 사찰문화연구원,『전통사찰총서』2, 「영혈사사적」 [해설] 홍련암(紅蓮庵)은 낙산사 부속암자로 1984년 6월 2일 강원도문화재자료 제36호로 지정되었다. 676년(신라 문무왕 16) 한국 화엄종의 개조인 의상(義湘)이 창건하였으며, 관음굴(觀音窟)이라고도 한다. 그 유래와
[덕수궁의 여성공간 사진 갤러리] 덕수궁은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로 사적이다. 덕수궁의 많은 건물들중 일부 건물들의 다양한 모습을 사진으로 촬영하였다. [석어당] [석조전] [준명당] [즉조당] [함녕전] [덕수궁 (德壽宮)] 서울 중구 정동(貞洞)에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로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덕수궁이란 궁명(宮名)은 조선시대 초부터 있었던 이름으로,
[정의] 밤나무의 열매. [역사] 밤은 관혼상제에 필수적인 과실로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좋은 밤의 세계적 산지로 알려져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1700년 전인 진나라 때의 『삼국지 三國志』 위지동이전 마한조(馬韓條)에도 마한에서 굵기가 배만한 밤이 난다고 기록되어 있고 『후한서 後漢書』에도 마한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큰 밤을 생산하고 있는데 굵기가 배만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
[세종실록지리지] 경도 한성부(京都漢城府)조 삼각산(三角山)은 부(府)의 남쪽에 위치한다. 일명 화산(華山)이라도도 하는데, 세 봉우리가 우뚝 빼어나서 높이 하늘에 들어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조 삼각산(三角山)은 양주(楊州) 지경에 있는데, 화산(華山)이라고도 하며, 신라 때에는 부아악(負兒岳)이라고 하였다. 평강현(平康縣)의 분수령(分水嶺)에서 잇닿은 봉우리와 층층의 산
• 갈래 : 민담 • 시대 : 시대미상 • 신분 : 일반 • 지역 : 기타 • 출처 : 한국구전 (10102) • 내용 : 옛날 한 사람이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어렵게 살고 있었다. 한겨울에 어머니가 밤중에 슬그머니 나갔다가 새벽에 돌아오기를 매일같이 하였는데, 이를 이상하게 여긴 아들이 하루는 그 뒤를 밟게 되었다. 어머니는 한겨울에 다리도 없는 냇물을 맨발로 건너는 것이었다. 아들이 어머니의 뒤를
낙화암(落花巖) 충남 부여 백마강변의 부소산 서쪽 낭떠러지 바위를 가리켜 낙화암이라 부른다. 낙화암은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 때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일시에 수륙양면으로 쳐들어와 왕성(王城)에 육박하자, 백제의 주민들과 여성들이 이곳으로 도망왔으나 뒤쫓아온 당군에 포위되어 자의반 타의반으로 절벽아래로 몸을 던졌다고 한다. 훗날 왜곡되어 삼천궁녀가 몸을 던진 곳으로
정림사지에 있는 백제의 5층석탑으로 높이 833㎝이다. 석탑의 구조는 기단 위에 탑신부가 있고 상륜부는 복발[覆鉢]을 제외하고는 모두 없어졌다. 정림사지 탑은 큰 규모의 석조물이면서도 경쾌한 느낌을 주며 마치 다층누각 형태의 목조건물을 보는 듯하다. 이러한 점은 현존하는 일본의 호류지[法隆寺] 5층탑과도 비교된다. 이 석탑은 목조를 석조로 변형해 만든 것으로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공산성은 백제시대에는 웅진성으로 공주를 지키기 위한 백제의 대표적인 고대 성곽이다. 이러한 공산성은 웅진성, 쌍수산성, 공산산성, 공주산성 등으로 불리운다. 성곽의 총 길이는 2.660m이며 북으로 금강이 흐르는 해발 110m의 능선에 위치한 천연의 요새이다. 원래는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대부분 현재와 같은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성내 유적으로는 진남루, 공북루, 쌍수정, 명국삼장비,
부소산성(扶餘扶蘇山城)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대의 도성(都城)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에는 사비성.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웅진(현재의 공주)에서 사비(현재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538)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성왕 22년(500)경에 이미 산
상당산성은 삼국시대 백제의 상당현에서 유래된 이름인 듯하며 둘레가 4.2km, 높이 3~4m, 면적 54700평의 거대한 포곡식 석축산성이다. 조선 선조 29년[1596]에 수축된 이후 숙종 42년[1716]에서 45년까지 대대적인 성벽 개축과 그 후에도 여러 번의 수축이 이루어졌다. 현재 상당산성에는 동문[鎭東門], 서문[?虎門], 남문[控南門]의 3개문과 동암문 남암문의 2개 암문, 치성 3개소, 수구 3개소가 있다. 사
서울시 시청 앞 광장에서 명동으로 넘어가는 소공동 길 조선호텔 옆 후미진 곳에 주변의 화려함과 어울리지 않는 팔각지붕의 삼층건물과 석고(石鼓) 3개가 쓸쓸하게 서 있다. 이 건물은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하면서 세운 원구단(圓丘壇)의 부속건물로 황천상제(皇天上帝), 황지기(皇地祇), 태조(太祖)의 신위를 보관하던 황궁우(皇穹宇) 황궁우의 팔각당(八角堂)이다. 석고에는 제천(祭天)을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