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정치적 반대 세력 키워 스스로 독립하게 해
②독립 정부가 신속하게 러시아 합병 요청하게 만들어
③러시아가 요청 허여(許與)하는 방식으로 합병
필요하면 군사적 수단으로 진행 과정 엄호도 불사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발렌티나 마트비옌코 상원의장(왼쪽), 세르게이 나리시킨 하원의장(오른쪽)과 함께 2014년 3월 21일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크림반도 합병을 완료하는 최종 법령에 서명하고 있다. Gettyimage
트럼프를 비롯한 서방의 지도자는 푸틴의 언행 속에서 그의 의도를 직시해야 한다. 푸틴은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젤렌스키가 원하는 ‘종전+영구 평화’인가. 아니다. 트럼프가 원하는 ‘종전+트럼프식 국제 평화’인가. 절대 아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에서 젤렌스키를 축출하고, 친러 정권을 구축하려는 명확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푸틴 시대의 친러 우크라이나 정권은 냉전시대 구소련의 위성국가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렇다면 푸틴은 어떤 방식으로 친러 정권을 만들려 하는 것일까. 푸틴식 하이브리드 전략에 그 답이 있다.
푸틴식 하이브리드 전략의 치밀함
푸틴의 하이브리드 전략은 2013년 러시아군 총참모장, 발레리 게라시모프(Gerasimov doctrine)의 견해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게라시모프는 “군사수단과 비군사수단을 결합해 정치 ·외교적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상정한 군사적 수단은 △전쟁 △전략적 배비(配備) △군사적 조치 △군사행동을 말한다. 비군사적 행동은 △정치·외교적 압력 △정치적 반대 세력 형성과 활용 △우호적 정치세력의 집권 지원 등 정치심리전 전략을 의미한다.이러한 전략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전쟁과 평화 사이의 회색지대를 만든다. 회색지대가 존재하는 시기에 정규군 부대를 평화유지군이나 위기관리 부대로 위장시킨다. 그의 이론은 정치공작과 군사 공작을 적절히 배합해 전략 목표를 달성하는 데 목적이 있다. 게라시모프의 전략은 아주 새로운 전략은 아니다. 소련군이 발전시킨 정치위원(political commissar, political officer)을 21세기 상황에 맞게 현대적으로 활용한 군사작전이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 육군 병사들이 5월 7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드보르초바야궁 광장에서 열린 승전 기념일 군사 퍼레이드 총연습에 참석하기 위해 행진하고 있다. 뉴시스
푸틴은 1차적으로 크림반도 지역 자치정부 및 65%에 이르는 러시아계 주민을 지원해 독립을 선언하도록 하는 전략을 썼다. 그 과정에서 복면을 한 러시아 정치 장교들이 주요한 역할을 했다. 우크라이나 정부에 대항하는 반대 세력이 중심이 돼 독립을 선언하게 하고, 이른바 신생 크림 독립 정부를 러시아 연방에 가입하도록 하는 절차를 통해 러시아 영토로 편입한 것이다. 실제로 2014년 3월 17일 크림 자치정부가 독립을 선언한 데 이어 이튿날인 3월 18일 러시아 병합을 선언했으며 푸틴은 이를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해 크림반도를 점령했다. 푸틴의 하이브리드 전략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가 전광석화같이 러시아의 일부가 된 것이다. 현재 우크라이나, 유럽, 국제사회는 크림반도를 러시아 영토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의 실효적 통치를 부정할 수도 없고, 다시 우크라이나 영토로 바뀔 거라고 믿는 사람도 없다.
푸틴은 크게 3단계 하이브리드 전략을 통해 크림반도에 대한 정치·군사적 목적를 달성했다. 1단계로 크림반도 내부의 정치적 반대 세력을 형성, 강화해 스스로 독립하도록 조치했다. 2단계로 사실상 푸틴의 지원으로 수립된 독립 정부가 신속하게 러시아의 합병을 요청하도록 조치했다. 3단계로 러시아가 크림 정부의 요청을 허여하는 방식으로 합병을 완성했다. 이러한 절차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국제사회의 군사적 개입을 예방할 수 있는 조치도 신속하게 마련했다. 비군사적 수단을 주로 사용하되, 필요하면 군사적 수단으로 진행 과정을 엄호해 크림반도를 손에 넣은 것이다.
우크라이나에 벌인 푸틴의 ‘특별 군사작전’ 현재 상황
2022년 2월 푸틴은 ‘특별 군사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략했다. 그리고 3년 6개월 이상 전쟁을 치러 8월 현재 돈바스 지역을 중심으로 우크라이나 영토 20% 이상을 점령하고 있다. 젤렌스키 정부는 서방과 트럼프 이전 대통령인 조 바이든이 이끄는 미국 정부의 지원 속에서 러시아의 속전속결 군사전략을 좌절시키면서 전쟁을 장기전으로 만들고 있다. 17차례에 걸친 유럽연합(EU) 국가의 다양한 러시아 제재로 러시아의 전쟁 지속 능력에 손상을 주면서 푸틴을 진퇴양난의 위기로 만든 순간도 있었다.그러나 2기 트럼프 대통령은 젤렌스키와 푸틴에게 조기 종전을 요구하면서 상황이 급반전됐다. 트럼프는 젤렌스키에게 러시아가 이미 점령한 영토를 내주고, 평화를 얻으라고 강권하고 있다. 대신 향후 평화를 보장하는 집단적 안보 조치를 만들겠다고 한다. 또한 트럼프는 젤렌스키에게 거의 공개적으로, “종전 종용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전쟁 지원을 중단하겠다”는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젤렌스키로서는 억울하지만, 영토 회복보다는 안전보장을 확실하게 약속받는 데 골몰하는 모습이다. 푸틴과의 양자 회담에 적극적인 모습이 안쓰럽지만, 냉엄한 현실 앞에서 그가 취할 다른 방도는 딱히 없어 보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8월 15일 미국 알래스카주 엘멘도르프-리처드슨 합동기지에서 회담하고 있다. 뉴시스
가장 큰 변수는 인도, 중국, 튀르키예가 러시아의 값싼 에너지를 수입한 데 있다. 푸틴에 대한 트럼프의 정전 종용을 위협하기 위한 카드는 인도, 중국에 대한 2차 제재가 거의 유일해 보인다. 그런데 9월 초 진행된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와 중국의 전승절 행사로 푸틴과 시진핑 중국 주석과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군사동맹 수준의 협력을 다지는 모습이 언론에 공개됐다. 이 같은 국제공조는 푸틴에게 종전 협상이 아닌 항복 수준의 전쟁 종결에 자신감을 심어줬을 터. 푸틴이 하이브리드 전략으로 우크라이나 전체를 친러화하겠다는 야심을 더는 감추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부터),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9월 1일 중국 텐진 메이장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에 앞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
푸틴, 친러 우크라이나 정부 수립 가속페달 밟을 듯
푸틴은 크림반도를 점령한 하이브리드 군사전략 방정식을 우크라이나에도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적용할 것으로 전망된다. 첫째, 젤렌스키 정부를 가능한 한 빨리 퇴진시키려 할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를 직접 점령하기보다는 우크라이나 내 반(反)젤렌스키 정치세력과 반전 세력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이다. 약 18%에 이르는 러시아계 우크라이나 국민에 대한 정치공작을 강화할 것이다.둘째, 군사 공세를 획기적으로 강화해 우크라이나 국민의 전쟁 의지를 고갈시키려 할 것이다. 9월 7일에 있었던 키이우 정부청사에 대한 직접 공격은 그러한 차원에서 진행한 것으로 봐야 한다. 우크라이나 내부의 반전 세력의 목소리를 키울 것이다. 셋째, 러시아는 핵무기 카드를 이용해 서방의 직접 군사 지원을 막으려 할 것이다.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직간접적으로 내비치면서 트럼프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지도자의 군사적 개입을 막을 것이다.
넷째, 친러 우크라이나 정부를 수립해 나토 가입 영구 포기, 러시아와의 새로운 우호 협정 체결 등을 통해 사실상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실질적 영향하에 있도록 할 것이다. 친러 우크라이나 정부가 수립될 경우, 그 정부를 압박해 나토가 아닌 러시아와 군사동맹 조약을 체결하도록 종용할 가능성도 있다. 다섯째, 우크라이나에 대한 영향력 확대가 과거 구소련 영향력하에 있던 발트 3국 등에 대한 대외정책으로 확장될 가능성도 있다.
푸틴은 2022년 군사작전을 통해 조기에 친러 정권을 수립하려던 정치적 야심을 위해 장기전이라는 희생을 치렀기에, ‘트럼프 전쟁 종용 활용+군사작전+정치공작+핵무기 활용’이라는 하이브리드 전략을 활용해 목적을 달성하려 할 것이다. 푸틴이 만들려는 친러 우크라이나 정권 수립을 트럼프 정부가 모른 체하는 것 같다. 그 위험성과 여파를 직시할 것을 강권한다.
북한의 ‘푸틴’식 하이브리드 전략 경계해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해방 정국에서 구소련 25군 소속의 레베데프 정치위원을 중심으로 한 정치장교들이 김일성 정권을 수립한 과정을 우리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크림반도,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에서 진행하고 있는 러시아의 정치공작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9월 4일 프랑스 의회 소속 한불우호협회 소속 의원 4명이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사업회를 찾았다. 필자는 그들에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궁극적으로 친러 정권을 만들려고 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막을 방안이 있느냐?”라고 질문했다. 그들은 필자의 판단에 동의했지만, 막을 방법에 대해서는 답을 아꼈다. 대신 “프랑스는 평화가 필요한 순간 언제든지 한국 곁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졸면 죽는다”는 마음으로 핵무기를 보유한 북측의 하이브리드 전략을 경계해야 할 때다.
● 1961년 출생
● 부산대 정외과 졸업, 경북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 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장
● 국방부 차관, 20대 국회의원
● 現 전쟁기념사업회 회장, 국민대 석좌교수, 한중안보평화포럼 회장
● 저서 : ‘백승주 박사의 외교이야기’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