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마다 달라진 원자력정책 ‘직격탄’
文 한마디에 그룹 휘청…알짜 회사 매각하며 버텨
李 취임에 위기감 확산…두산 출신 산업부 장관 지명으로 반전
체코 원전 계약으로 기술 자립 의구심…제2 전성기 분수령
두산에너빌리티는 2024년 12월 미국 테라파워와 소형모듈원자로(SMR) 주기기 제작성 검토 등을 위한 계약을 체결했다. 사진은 미국 와이오밍주 테라파워 SMR 발전소 조감도. 두산에너빌리티
두산에너빌리티는 주요 발전 기자재 설계·제작과 발전소 서비스 사업, 발전 플랜트 설계·조달·시공(EPC) 사업 등을 영위한다. 발전설비 사업은 원자력 설비와 복합화력 설비, 해상풍력발전기 등으로 나뉜다. 이 가운데 정부의 에너지정책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는 부문은 원자력 설비 사업이다. 국가가 전체 그림을 그리는 산업 특성상 정부의 정책 방향에 따라 힘이 실릴 수도, 반대로 고사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바꿔 이야기하면 원자력 사업이 꽃피우려면 정부의 적극적인 지지가 반드시 뒷받침돼야 한다는 뜻이다. 두산에너빌리티의 사업보고서는 “일반적으로는 국가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육성하는 국가 기간 수출산업”이라고 명시됐다.
文 한마디에 그룹 휘청…알짜 회사 매각하며 버텨
두산에너빌리티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원전 주기기를 제작한다. 구체적으로는 원자로와 증기발생기, 터빈발전기 등 원전의 핵심 설비를 생산 및 공급하고 있다. 대형 원전용 기자재뿐 아니라 차세대 원전인 소형모듈원자로(SMR)의 핵심 부품 제작 기술도 갖췄다. 미국 뉴스케일파워와 엑스에너지, 테라파워 등 주요 SMR 기업과 잇따라 기자재 공급 계약을 체결하며 글로벌 ‘SMR 파운드리(위탁생산)’로 거듭나고 있다.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포털 검색창에 ‘두산에너빌리티’를 입력하면 연관 검색어로 ‘탈원전’이 따라붙는다. 두 단어가 함께 검색된 빈도가 높다는 의미다. 두산에너빌리티가 과거 탈원전정책으로 얼마나 큰 어려움을 겪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최근에는 탈원전에서 벗어났다는 뜻의 ‘탈탈원전’이라는 말도 등장했다. 윤석열 정부를 지나 이재명 시대에 들어서면서 과거 문재인 정부 때의 탈원전 정책이 더는 유효하지 않아졌다는 의미가 내포된 단어다. 하지만 결코 안심할 순 없다는 게 중론이다. 에너지정책 전환 시 언제든 과거의 악몽이 되풀이될 수 있기 때문이다.
6월 이재명 정부가 출범하자 원전 업계는 새 정부의 에너지정책 방향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확산 등으로 전력 수요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어떤 방식으로 대응 전략을 짜느냐에 따라 각종 에너지 공기업은 물론 민간기업도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 경험에 바탕을 둔 반응이기도 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정책 여파로 상당히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시작은 대통령의 말 한마디였다. 문 전 대통령은 2017년 ‘고리 1호기 영구 정지 선포식’에서 “원전 중심의 발전 정책을 폐기하고 탈핵 시대로 가겠다”며 “준비 중인 신규 원전 건설 계획을 전면 백지화하겠다”고 말했다. 정확히는 국내에선 탈원전을 추진하되 해외 원전 수출은 적극 지원하는 ‘상반된 투트랙’ 전략이었다.
후폭풍이 어마어마했다. 원전 관련 사업을 하는 모든 기업이 직격탄을 맞았다. ‘대마불사(大馬不死)’라는 말도 통하지 않았다. 업계 대표 격인 두산에너빌리티는 신한울 3·4호기 등의 건설 중단으로 수주 물량이 급감하며 실적이 크게 악화했다. 자체적으로 사업 부문을 통합·개편하고 직원 유급 휴직을 실시하는 등 살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쉽사리 유동성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주력 계열사의 부진은 그룹 전체가 휘청거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두산그룹은 2020년 차입금이 12조 원 수준으로 불어난 탓에 채권단 관리 체제에 들어갔고, 울며 겨자 먹기로 두산인프라코어(현 HD현대인프라코어)와 두산솔루스(현 솔루스첨단소재) 등 알짜 회사들을 매각했다. 대주주 역시 책임경영 차원에서 사재 출연을 하고 배당·상여금도 반납했다.
3월 25일(현지 시각) 체코 플젠시의 두산스코다파워 사업장을 방문한 체코 페트르 파벨 대통령(오른쪽 두 번째)이 손승우 두산에너빌리티 파워서비스BG장(오른쪽 세 번째)과 증기터빈을 살펴보고 있다. 두산에너빌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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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3조 원이 넘는 자산 매각 등 뼈를 깎는 자구 노력 끝에 2022년 채권단 체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기엔 ‘역대 최단기간 채권단 관리 졸업’이란 수식어가 따라붙었는데, 두산 구성원에겐 기록 경신에 대한 ‘기쁨’보단 고강도 구조조정에 대한 ‘악몽’으로 남았다.이 과정에서 두산에너빌리티는 신재생에너지와 가스터빈 발전사업 등 미래 산업 관련 투자를 확대하며 재도약을 준비했다. 2022년 초 친(親)원전을 기치로 내건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것도 도움이 됐다. 윤 전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부터 ‘탈원전정책 전면 백지화’와 ‘원전 최강국 도약’을 에너지정책 방향으로 공언했다. 2021년 27.4% 수준이던 에너지 내 원전 발전 비중을 2030년 30% 이상으로 확대하겠다는 목표도 제시했다.
이는 대권 경쟁자였던 이재명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의 에너지 노선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 후보는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정책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겠다며 ‘감(減)원전’을 꺼내 들었다. 기존 원전은 수명이 다할 때까지 운영하되 신규로 짓진 않아 서서히 숫자를 줄여가는 게 핵심이다.
그랬던 이 후보가 6월 제21대 대통령에 취임했으니 원자력 업계에서 기대 아닌 우려가 터져 나온 게 당연했다. 가까스로 살려놓은 원전 불씨가 정부 정책에 휘둘려 다시 사그라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이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태양광·풍력 등 신재생에너지 중심의 에너지 대전환을 강조해 왔다. 공약집에 인천에서 경북 동해안을 잇는 ‘해상풍력 벨트’와 경기와 서해안, 남해안, 영남 내륙을 연결하는 ‘태양광 벨트’에 대한 구상이 포함됐지만, 원전 관련 내용은 없었다. 민주당이 전통적으로 원전에 부정적 입장을 취해왔다는 점도 업계가 긴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그러던 가운데 예상치 못한 변곡점이 생겼다. 김정관 두산에너빌리티 사장이 이재명 정부의 초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에 내정된 것이다. 장관 후보자는 대통령이 지명한다. 해당 인사를 두고 민간기업 출신에게 산업정책 총괄을 맡겼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해석이 나왔다. 정부의 원전 관련 입장이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국내 대표 원전 기업의 고위 경영진을 산업부 수장에 앉힌 셈이기 때문이다.
김 장관 지명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나오자 대통령실은 다소 부담을 느낀 듯했다.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은 “두산의 현직 고위 경영진 발탁이 새 정부의 원전정책과 관련해 어떤 메시지를 준다고 볼 수 있나”라는 질문에 “이번 인사가 에너지정책의 방향을 알리려는 것은 아니다”라며 선을 그었다.
하지만 시장에선 충분히 ‘상징적인 인사’로 해석했다. 업계에 주는 시그널도 분명하다고 봤다. 기본적으로 이번 정부가 탈원전을 주창하진 않을 거란 공감대가 형성됐다. 만약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정책을 계승할 의도가 있었다면 이같이 시장에 혼란을 줄 수 있는 인사를 하진 않았을 거란 점에서다. 원전 업계는 이른바 최악은 피했다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나아가 원전이 이재명 정부의 에너지정책에서 어느 정도 의미 있는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대통령은 공약집에 원전을 다루지 않았지만, TV 토론회 등에서 생각을 밝힌 바 있다. 장단점이 공존해 “일도양단이 어렵다”는 게 그의 의견이었다. 방향성 측면에선 신재생에너지 중심으로 가는 게 맞지만, 전력공급의 안정성 등을 고려할 때 단숨에 원전 가동을 멈출 수는 없다는 취지였다. 원전을 석탄과 신재생에너지 사이의 ‘브리지 에너지’로 활용하는 게 현실적 대안이라는 의미로 해석됐다.
실제로 이 대통령은 후보 시절 TV 토론에서 “기본적으로 원전은 위험하고 지속성에 문제가 있다”면서도 “그렇다고 기저 전력으로서 ‘완전히 중단할 수 있나’라고 하면 ‘아니다’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과하지 않게 활용하고, 좀 더 안전한 SMR 등을 써야 한다”고 덧붙였다. 연장선상에서 ‘에너지 믹스’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원전과 재생에너지를 모두 쓰되, 비중을 어떻게 하느냐가 핵심이라는 것이다. 이를 두고 실용주의를 전면에 내세우고 의사결정을 하는 이 대통령의 스타일이 원전 정책에서도 드러났다는 해석이 나왔다. 전력 수요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원전을 배제하고 실용적 에너지정책을 논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취임 일주일 만에 페트르 피알라 체코 총리와 이례적으로 전화 통화를 해 실용주의적 면모를 보였다. 미국과 일본, 중국에 이은 네 번째 해외 정상과의 통화로, 기존 외교 문법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보통은 미국을 시작으로 주변 강대국과 순서대로 통화하는 게 관례이며, 한국 대통령이 체코 정상과 이처럼 빠르게 통화한 전례는 없었다. 26조 원 규모의 원전 계약 성사를 고려한 실용적 외교 행보라는 해석이 나온 배경이다. 한국수력원자력은 이 대통령의 임기 첫날이던 6월 4일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며 체코 측과 최종적으로 계약을 마친 바 있다. 두 사람은 한국수력원자력과 두산에너빌리티 등 ‘팀코리아’가 따낸 체코 두코바니 신규 원전 건설 계약과 관련해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업계에서는 이 대통령이 임기 내내 지금과 같은 기조를 이어간다면, 에너지정책에서 원전을 완전히 배제할 일은 없을 거란 관측도 제기됐다.
8월 25일(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 DC에서 ‘한미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 직후 진행된 SMR 사업협력을 위한 양해각서(MOU) 체결식에서 참석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박지원 두산에너빌리티 회장, 황주호 한수원 사장, 클레이 셀엑스에너지 최고경영자(CEO), 레이 포코우리 아마존 에너지정책 관리자,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 두산에너빌리티
웨스팅하우스 계약으로 기술 자립성 의구심…제2 전성기 분수령
시장에서는 두산에너빌리티가 탈원전 목전에서 가까스로 부활했다고 평가했다. 팀코리아의 일원으로 체코 두코바니 신규 원전 건설 수주에 성공하며 미래 먹거리를 확보했고, 주가가 연일 오르는 등 시장의 긍정적 반응이 이어지는 것도 고무적이다. 실제로 두산에너빌리티 주가는 현 정부 출범 이후 꾸준히 우상향해 7월 4일 장 중 한때 7만2200원을 찍었다. 대선 한 달 전인 5월 초 2만7000원대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불과 두 달 만에 264.5%가 뛰었다. 두산에너빌리티의 잇단 신고가 경신에 힘입어 작년 말 11위였던 두산그룹의 시총 순위가 7위까지 뛰어오르기도 했다. 두산에너빌리티(개별 종목 기준)는 6월 30일 하루 동안 시총 5위에 이름을 올렸다.다만 이후 문제가 생겼다. 한국전력과 한국수력원자력이 체코 원전 계약 성사를 위해 미국 원전기업 웨스팅하우스와 이른바 ‘굴욕 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알려지며 수익성 악화 우려가 빠르게 확산한 것이다. 최단 수십 년으로 알려진 계약서상 독소 조항이 팀코리아 기업들의 수익성과 성장성을 끌어내릴 거란 우려가 끊이지 않으며 주가 역시 5만 원대 후반까지 밀리는 등 크게 흔들렸다.
한국수력원자력 등이 해당 계약은 글로벌 시장 진출을 위한 차선책이었단 점을 적극 해명하며 일단 관련 논란은 잦아드는 모양새다. 다만 이러한 합의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로 기술 자립성에 대한 의구심과 수익성 저하 가능성이 제기돼 원전 산업의 재도약이 새로운 시험대에 올랐다. 두산에너빌리티가 이번 논란을 어떻게 돌파하느냐가 향후 ‘제2의 전성기’를 결정지을 중요한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