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호

삼성에 앞섰던 산요 회장의 한마디 “우리가 진 이유를 알겠다”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 한일 수교 60주년, 산업협력의 뿌리를 돌아보다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5-08-04 09:00:02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산요의 그림자’에서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서다

    • “삼성의 성장 비결은 무엇이고, 산요는 왜 사라졌나”

    • 1960년대, 공장은 물론 기숙사까지 정리정돈 철저

    • 직원 위해 공장에 김치 항아리 100개 묻다

    • 경영자에게 핵심은 사원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느냐

    • 최고 수준 인재에 최고 수준 교육을…IBM 뛰어넘어

    • 국적 가리지 않고 우수 인재 모으기 위해 열심

    재단법인 이희건한일교류재단(이사장 하태윤)은 6월 19일 일본 오사카 웨스틴 호텔에서 ‘이희건 상’ 초대 수상자로 일본 산요전기 창업자의 후손인 이우에 사토시 전 산요전기 회장을 선정했다. 이날 시상식에 참석한 이훈 재단 고문, 이우에 전 회장, 이경재 재단 이사(왼쪽부터). ‘이희건 상’은 신한은행 창업주인 고 이희건 명예회장의 뜻을 이어 한일 교류에 기여한 인물을 기리기 위해 올해 처음 제정됐다. 이희건한일교류재단 홈페이지

    재단법인 이희건한일교류재단(이사장 하태윤)은 6월 19일 일본 오사카 웨스틴 호텔에서 ‘이희건 상’ 초대 수상자로 일본 산요전기 창업자의 후손인 이우에 사토시 전 산요전기 회장을 선정했다. 이날 시상식에 참석한 이훈 재단 고문, 이우에 전 회장, 이경재 재단 이사(왼쪽부터). ‘이희건 상’은 신한은행 창업주인 고 이희건 명예회장의 뜻을 이어 한일 교류에 기여한 인물을 기리기 위해 올해 처음 제정됐다. 이희건한일교류재단 홈페이지

    올해는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이 되는 해다. 한 세대의 시간이 두 번 바뀌는 동안 양국은 때로 경쟁하고 협력하며 걸어왔다. 이 시점에서 그 첫 장면을 다시 바라보는 일은 단순한 과거 회상만은 아닐 것이다.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되기까지 한국 사회는 뜨거웠다. 1964년 시작된 한일회담 반대투쟁은 광복 후 4·19혁명에 이은 격렬한 반정부 시위였다. 1964년 3월 24일 고려대 학생들이 처음으로 회담 반대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고, 이후 서울 전역으로 확산됐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급기야 1964년 6월 3일 서울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실탄을 장전한 군인과 경찰들은 최루탄과 몽둥이로 시위대를 공격했다. 

    한일 수교에 반대한 학생과 시민들은 한일회담이 일본 예속으로 직행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의 저항 밑바닥에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반감도 크게 작용한 것이었지만 당시 팽배했던 반일 감정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했다. 

    격랑의 1960년대, 교차점에 놓인 두 기업

    통계청 자료를 보면 1960년대 초반 남한 인구는 약 2500만 명이었다. 이 중에서 일본 식민 지배를 경험한 사람들은 1945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로 약 100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일제강점기 경험이 생생한 이들이 대다수인 상황에서 일본과의 수교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은 이런 민심에 반기를 든 것이다. 1965년 6월 22일 도쿄에서 한일 수교 조인식을 마친 박 대통령은 이튿날 특별담화를 발표하는데 담화를 읽다 보면 미래를 내다본 지도자의 절체절명 심정이 느껴진다. 담화 중 일부다.



    한 민족, 한 나라가 운명을 개척하고 전진해 나가려면 무엇보다 국제 정세와 세계 조류에 적응하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국제 정세를 도외시하고 세계 대세에 역행하는 국가 판단이 우리에게 어떠한 불행을 가져오고야 말았는가는 이조 말엽에 우리 민족이 치른 뼈저린 경험이 실증하고 있습니다.…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수호하고 내일의 조국을 위해서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과거의 감정을 참고 씻어버리는 것이 진실로 조국을 사랑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나의 확고부동한 신념입니다.…우리는 일본과 깊은 원한 속에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독립을 말살하였고, 부모형제를 살상했고, 재산을 착취했습니다. 과거만을 따진다면 그들에 대한 우리의 사무친 감정은 불구대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박 전 대통령은 일본에 겁먹지 말고 일본을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을 말한다.

    그처럼 일본에 자신이 없고 피해의식과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일본이라면 무조건 겁을 집어먹느냐 하는 것입니다. 일본 사람하고 맞서면 ‘언제든지 우리가 먹힌다’ 하는 이 열등의식부터 깨끗이 버려야 합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는 대등한 위치에서 오히려 우리가 앞장서서 그들을 이끌고 나가겠다는 우월감은 왜 가져보지 못하는 것입니까?

    1965년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06달러, 일본은 970달러였다. 지금은 한국이 3만4000달러, 일본이 3만6000달러로 거의 대등해졌다. 한국의 GDP는 60년 전 일본의 3% 수준에서 지난해 44% 수준까지 올라왔다. 농업 중심 국가로 산업기반도 거의 없었던 한국은 디지털 전환에서 상대적으로 느린 일본을 누르고 반도체, 디스플레이, 조선 등에서 세계 1위 국가가 됐다. 60년 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본에 겁먹지 말고 이제 그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말은 단순한 몽상적 선동이 아니라 현실이 된 것이다. 

    60년 전 뜨겁게 달아오르던 그 격랑의 교차점에서 만난 두 기업이 있으니 글로벌 시장에서 무명이었던 삼성, 그리고 세계적 전자 기업이었던 일본 산요였다. 

    삼성산요전기의 초기 흑백TV 생산 라인. 1970년 삼성산요전기는 흑백TV를 생산해 이듬해 파나마에 처음 수출한다. 1975년 삼성산요전기는 사명을 ‘삼성전기’로 바꿨다가 1977년 삼성전자에 합병된다. 동아DB

    삼성산요전기의 초기 흑백TV 생산 라인. 1970년 삼성산요전기는 흑백TV를 생산해 이듬해 파나마에 처음 수출한다. 1975년 삼성산요전기는 사명을 ‘삼성전기’로 바꿨다가 1977년 삼성전자에 합병된다. 동아DB

    삼성과 산요의 역전 드라마

    한일 수교가 이뤄지면서 일본의 자본과 기술, 기계와 인력이 한국에 밀려들어 왔다. 이는 박정희 정부의 산업화 전략과 맞물려 시너지를 만들어냈다.

    당시 일본이 한국에 준 돈은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 차관 약 3억 달러였지만 이보다 중요했던 건 돈을 통해 들어온 일본 기업의 기술과 인력이었다. 

    일본은 단순한 투자자 수준이 아니라 ‘기술의 창고’였다. 삼성전자, 금성사(현 LG), 대우, 현대 등은 일본 기업들과 기술제휴를 통해 기초를 다졌다. 전자제품은 당시 세계 최고급 기술 수준을 자랑하고 있었던 NEC와 도시바, 섬유는 고기능성 소재 전문 기업인 도요보와 도레이, 자동차는 도요타 등등 일본의 글로벌 간판 기업들이 한국 기업과 합작회사를 세웠고, 조립 공장을 운영하고, 제품을 수출했다.

    삼성전자의 모태는 1969년 일본 산요전기와 기술제휴로 탄생한 삼성산요전기 주식회사(삼성산요전기)다. 당시 한국은 전자 기술 불모지였고, 산요는 라디오와 세탁기, 흑백 TV 등 가전 분야에서 일본 내 3대 가전 브랜드 중 하나이자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명품 기업이었다. 산요(三洋)라는 이름은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에 걸친 전 세계를 무대로 사업을 전개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작명이었다. 

    삼성은 산요의 부품과 설비, 기술 자문을 통해 처음으로 전자제품을 생산했다. 첫 흑백 TV(P-3202)는 ‘산요의 그림자’라 불릴 만큼 협력에 의존한 결과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기술을 빌려 쓰던 삼성은 반세기 만에 세계 전자산업의 정점에 섰지만 산요는 2010년 파나소닉에 인수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삼성전자에 입사해 생산기술본부장, 전략기획실장, 삼성전관(현 삼성SDI) 대표, 삼성인력개발원장을 지낸 손욱 전 농심 회장은 삼성과 산요의 역전극에 대한 경험을 2012년 3월 14일 ‘한경비즈니스’에 이렇게 적고 있다. 

    일본 산요전기의 이우에 사토시 회장이 2003년 이건희 회장의 초청을 받아 삼성을 방문했다. 이우에 회장은 삼성종합기술원도 찾아 필자와 만났다. 산요는 삼성전자의 역사에 없어서는 안 될 파트너였다. 삼성전자의 모기업은 삼성산요전기라는 합작회사다. TV만 조립해 수출하는 특화된 회사였다. 삼성의 전자산업 시작에 산요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삼성전자에 입사해 처음 배치받은 곳이 냉장고 사업팀이었는데 이때 역시 많은 기술을 산요로부터 도입했다. 많은 직원들이 직접 산요를 방문해 연수도 받고 기술 자료를 도입해 냉장고 생산을 시작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기업에 기술을 전수하고 사원 연수를 제공해 기업을 육성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 바로 이우에 회장이었다.

    이우에 회장이 방한한 2003년은 삼성과 산요가 처음 파트너십을 맺고 일한 지 30년 정도가 흐른 뒤였다. 당시 삼성전자는 글로벌 정상 기업으로 도약해 있었고, 산요는 점점 경영 상황이 어려워져 고전을 면치 못하던 때였다. 이우에 회장으로선 격세지감이 컸을 것이다. 이우에 회장은 ‘삼성의 성장 비결은 무엇이고, 산요는 왜 쇠퇴했는가’라는 화두를 들고 만감이 교차하는 감회를 품은 채 방문했다고 한다. 

    당시 산요는 차세대 에너지 사업으로 오랫동안 연료전지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2차전지에서는 글로벌 1~2등을 차지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그룹 전체의 힘이 약해지니 추진력이 떨어지고 있던 차였다. 20여 년간 축적된 기술을 묻히기에는 너무 아까워 삼성에서 먼저 공동 개발을 제안하기도 했다고 한다. ‘30년 전 협력했던 정신으로 함께하자’는 제안이었다. 그리고 이를 기술원과 산요가 공동 협력하는 것으로 계약을 성사시켜 추진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은 감이 많았다. 결국 얼마 안 돼 산요의 연료전지 부문은 마쓰시타에 인수됐다. 이를 지켜보며 정말 안타까웠던 기억이 있다.

    2005년 1월 3일 삼성전자 생활가전총괄 이문용 부사장(오른쪽)과 일본 산요전기 구로카와 사장이 고효율 냉난방 기기 분야에서 협력을 지속한다는 계약을 체결하고 있다. 삼성전자 50년사

    2005년 1월 3일 삼성전자 생활가전총괄 이문용 부사장(오른쪽)과 일본 산요전기 구로카와 사장이 고효율 냉난방 기기 분야에서 협력을 지속한다는 계약을 체결하고 있다. 삼성전자 50년사

    당시 사토시 회장이 삼성인력개발원의 시설과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소개를 듣고 내뱉은 첫마디는 “우리가 진 이유를 알겠다”였다고 한다. 25박 26일 동안 강도 높게 진행되는 신입사원 입문교육, 700여 개가 넘는 콘텐츠를 보유한 온라인 교육 시스템을 보며 이우에 회장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는 것. 

    이우에 회장은 일본으로 돌아가 산요그룹의 인력개발기관인 산요HRS를 통해 삼성의 교육 콘텐츠를 사갔을 정도였다. 

    한편 동아일보 2002년 4월 23일자 기사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2002년 4월 도쿄(東京) 니혼바시(日本橋)에 있는 일본삼성 사무실에 이우에 사토시 산요전기 회장이 방문했다. ‘한번 직접 보고 싶어서…’라며 불쑥 찾아온 산요의 최고경영자를 맞이하면서 삼성 직원들은 뿌듯함을 감추지 못했다.”

    1968년 서울에서 호암을 만나다

    삼성과 산요의 역사는 단순한 협력과 결별의 역사가 아니다. 기술은 누구나 배울 수 있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어떤 철학과 전략을 세우느냐는 전적으로 경영자의 몫이다. 

    기자는 최근 이우에 전 회장이 호암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에 대한 추억을 담은 삼성전자와 초창기 협업하던 시절 이야기를 담은 인터뷰 자료를 단독 입수했다. 창업자 이우에 도시오(1902~1969)의 장남인 그는 삼성전자와 초기 협업하던 시절을 소상히 기억하고 있었다. 

    삼성전자 설립 초기 이야기를 여쭤보고 싶습니다. 호암 이병철 회장과  만났다고 들었는데, 언제 처음 만났나요.

    “1968년 서울에서였습니다. 삼성물산 접견실이었습니다. 이건희 회장님도 얼핏 뵈었는데 방송국을 방문했을 때 인사만 나눈 정도였습니다. 거의 대화는 나누지 못했습니다.”

    삼성전자와 산요전기가 한국에서 사업을 시작하게 된 배경이 있을까요.

    “산요전기 창업자인 부친과 호암 회장은 종종 도쿄에서 만나 식사를 같이 하면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부친은 일본에서 또래 젊은 경영자들의 모임을 주선하고 있었는데요. 멤버 중에 산토리의 사지 사장님, 다이와하우스의 이시바시 사장님 등이 계셨습니다. 한마디로 ‘이우에 공부 모임’ 같은 성격이었습니다. 당시 호암이 비슷한 연배였는데 호암은 사람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기를 즐겼습니다. 국제적으로 교류하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전기나 전자 사업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도 같고, 그때 생각이 많이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한일 국교 정상화 직후에 두 분이 도쿄에서 만났을 때 호암으로부터 ‘한국에서 사업을 하고 싶은데 여러 가지로 지도 편달 받을 수 있을까요’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부친이 이를 흔쾌히 받아들이면서 협력이 시작됐다고 들었습니다.”

    기숙사까지 정리정돈 철저

    그는 당시 삼성이 어떤 회사인지 알아보기 위해 직접 방문했다고 한다.

    “1968년이었습니다. 제가 회사를 대표해서 어떤 회사인지 확인하고 오라는 지시를 받고 저희 회사 분들과 함께 방문했습니다. 삼성물산도 돌아봤고, 전자회사 부지로 예정된 경기도 수원도 견학을 갔습니다. 

    그때 돌아본 부지는 정말 넓고 광활했기 때문에 과연 삼성이 이걸 다 메울 만한 사업을 할 수 있을지 의아해 호암의 말씀이 다소 꿈같은 이야기처럼 느껴지던 시기였습니다. 대구에 가서 제일모직 공장도 돌아봤는데요, 제일 감탄한 것이 정리정돈이 무척 잘돼 있었다는 거였습니다.”

    삼성산요전기 공장 부지. 당시 국내에서는 삼성이 전자산업에 진출하면 과당경쟁을 불러올 수 있다는 비판여론 때문에 삼성은 제조품을 모두 수출하겠다는 조건으로 공장 설립을 허가받았다. 동아DB

    삼성산요전기 공장 부지. 당시 국내에서는 삼성이 전자산업에 진출하면 과당경쟁을 불러올 수 있다는 비판여론 때문에 삼성은 제조품을 모두 수출하겠다는 조건으로 공장 설립을 허가받았다. 동아DB

    정리정돈이 인상적이었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4년 전인 1964년, 아직 한일 국교 정상화가 되기 전이죠. 산요전기 그룹 배구팀을 대표해서 한국 정부의 초대를 받아 서울에 간 적이 있는데, 그때 한국 공장을 견학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1986년에 본 제일모직 공장은 그때 본 다른 공장들과 전혀 달랐습니다.

    곳곳에 정리정돈이 잘돼 있었고, 쓰레기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금 같으면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여자 기숙사를 둘러보기도 했습니다. 여직원들이 사용하는 벽장이나 서랍 속에 들어 있는 이불이나 옷도 깔끔하게 정리정돈이 돼 있어서 ‘아, 회사 차원에서 정리정돈을 지도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놀랐습니다. 

    울산에 있었던 비료 공장(한비)도 가보았습니다. 비료 공장은 그전까지 제가 본 적이 없는 중공업 일이기도 하고 장치산업이기도 해서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공장이기는 했지만 기계가 끝없이 나열돼 있어서 이만큼 투자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상당했을 것이라는 사실도 느꼈습니다.

    삼성물산, 제일모직. 한국비료 공장 세 곳에 대한 견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와 산요전기 임원 회의에서 산요와 삼성이 합작회사를 만들면 성공할 것 같다고 보고했고, 이후 사업이 본격화됐습니다. 

    1974년 삼성산요전기 생산 라인. 동아DB

    1974년 삼성산요전기 생산 라인. 동아DB

    그때 만들어진 회사가 삼성산요전기입니다. 일본과 한국이 각각 절반씩 투자했습니다. 일본 50%는 산요전기가 40%, 스미토모상사가 10% 지분을 갖고 시작했습니다.”

    시작은 순탄하지 않았다고 한다.

    “합작회사를 설립하고 나니 다양한 문제점이 드러났습니다. 우선 합작에 대한 정부 제도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였고, 정부와 삼성그룹 간 커뮤니케이션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합작 당사자인 저희와 삼성의 커뮤니케이션에 어려움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삼성산요전기가 만들어진 후에 삼성전자가 따로 또 만들어졌는데, 저희와 합작한 내용이 삼성전자 쪽으로 흘러 들어가는 거였습니다.

    예를 들어 삼성산요전기 직원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연수를 많이 받았는데 연수 기간은 석 달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 직원들이 막상 현장에 배치될 때는 저희도 모르는 사이에 삼성전자 쪽으로 소속이 바뀌는 거였습니다. 이런 건 계약 내용과는 크게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상황에 대해 “난처했지만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기에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고 했다.

    그 나름의 이유란 뭐였을까요.

    “우선 당시 한국 정부는 일본 기업과 합작회사를 설립하는 것에 대해서 정확한 지침이 없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외국 기업이 국내에서 비즈니스를 하려고 할 때 합작회사에서 만든 제품은 팔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모르는 내용이었죠. 국내에서 판매하려면 한국 독자 자본 100%로 만들어진 회사여야 했는데, 호암은 그때 ‘삼성전자든 삼성산요전기든 같다’고 해석하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 계약서를 보면서 일하는 단계의 사람들 처지에서는 그 점이 납득이 가지 않았고, 이런 상황이 지속됐습니다. 그래서 서로 익숙해질 때까지 대화를 나누고 어느 정도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게 되면, 이번에는 해당 직원이 삼성전자 소속으로 바뀌어버린다거나 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은 대단히 정치적 부분까지 포함한 것이어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기본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삼성그룹에서도 새롭게 입사한 우수한 인재가 많았지만 삼성의 철학을 아직 이해하지도 못한 사람도 다수 있었습니다. 아마 그 인식 차이도 상당히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됩니다.”

    좀 더 구체적인 사례가 있을까요.

    “예를 들어 삼성산요전기는 훌륭한 건물을 세우고 시작했지만 삼성전자 공장은 미군에게 불하받은 막사였습니다. 호암 회장님이 그걸 보시더니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이냐’고 하시면서 당시 책임자들을 모두 쫓아냈습니다. 저희는 그런 경위를 모르니까 산요전기랑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왜 다 쫓아내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회장님 입장에서는 이 토지에 우리는 앞으로 멋진 것들을 만들어나가는 타이밍에 왜 미군이 불하한 막사를 공장으로 사용하는 것인지, 제대로 된 것을 만들라는 뜻에서 화를 내셨다고 나중에 들었습니다.”

    “김치 항아리는 사원을 위한 투자다”

    이우에 전 회장은 “합작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고 했다. 

    “엄청난 커뮤니케이션 장벽에 부딪혀 합작회사를 계속 이어나가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에 포기를 생각했습니다. 조기에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국제 문제가 될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삼성 이외의 대안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한국에는 처음으로 프리존(수출자유지역)이 생겼습니다. 구미는 국가산업단지로 조성됐는데, 구미를 가보기도 했습니다. 서울을 거치면 시간이 걸리니까 부산을 통해서 구미로 가 공업단지를 견학했습니다. 앞으로 한국 경제 재건 등을 고려하면 따로 독자적인 공장을 세워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호암 회장님 귀에 들어갔습니다. 마침 제가 한국에 있을 때였는데 회장님이 서울로 급히 와달라고 하셔서 이야기를 나누게 됐습니다. 

    호암께서는 ‘내가 당신 아버지와 이야기했던 건 여기에 아시아 최고 회사를 만들자는 약속이었고, 이를 위해 당신이 한국에 온 것이 아니냐, 그런데 다른 회사와 일을 하게 되면 큰 문제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국내 판매를 위해 삼성전자와 삼성산요전기를 하나로 통합하는 새로운 회사를 만들고, 일본 자본 75%, 삼성자본 25%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또 크게 문제가 된 게 있었습니다.”

    그게 뭔가요.

    “다름 아닌 김치 항아리 문제였습니다. 당시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던 시절이라 종업원이 많아 배가 고파 오후에 일하는 도중에 쓰러지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회장님이 점심 식사는 무상으로 모든 종업원에게 제공하고 싶다면서 공장을 세울 때 설비투자 항목 중 일본에서 송금받은 돈으로 김치 항아리 100개를 사겠다고 했고, 공장 바닥 아래에 그것들을 놓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건 일본 정부가 지정한 설비투자 항목에 들어가 있지 않은 것이니 투자할 수 없다”고 주장해서 크게 의견 충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호암 회장님이 “종업원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회사가 성장할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셔서 결국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김치 항아리 100개가 공장에 구비되지요. 이렇게 서로 애를 써서 설립된 이후에는 순조롭게 합작사업이 진행됐습니다.”

    그러다 결국 헤어지게 되지요.

    “공장이 움직이고 제품이 생산되기 시작하자 정부로부터 외국인 지분을 50% 이하로 해야 한다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50%에 맞추려면 25%를 삼성이 매입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결국 50대 50으로 갔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국 정부로부터 산요라는 회사명을 쓰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옵니다. 이름까지 쓰지 말라고 하니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삼성과 이별하고 마무리를 짓기로 했습니다. 

    마무리가 나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기술 제공이라는) 당초 목적은 달성했으니 나머지는 삼성이 자력으로 (사업을) 확장해 나가고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뒤에서 응원하겠습니다’라며 이별을 했으니까요. 

    그러니까 앞으로도 제품을 거래하지 않는 등의 이별은 아니고 비즈니스 측면에서 열심히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으로 마무리가 지어졌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합작회사를) 해체하게 됐습니다.”

    그게 몇 년인가요. 

    “1977년으로 기억합니다. 저희는 삼성과 헤어진 후 100% 자본으로 마산에 직원 3000명 정도 규모로 독자 공장을 짓게 됩니다.”

    당시 제품은 모두 수출용이었나요.

    “네, 수출용이죠.”

    호암으로부터 사람 중심 경영을 배우다

    그는 삼성과 합작하는 과정이 고생스러웠지만 호암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경영자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사원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지키는 것이라는 것을 배웠지요. 김치 항아리도 얼마나 많이 논의했는지 모릅니다. 저희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지만 회장님의 열정에 졌습니다. 그 열정은 지금도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섬세하게 직원들에 대해 신경 써야 한다는 점을 당시 저는 철저하게 배웠습니다. 호암은 정말로 사원을 사랑하는 대단한 경영자였습니다.” 

    직원들의 근무 처우를 생각하는 호암의 마음은 그의 자서전 ‘호암자전’에도 나온다. 제일모직 공장 건설 당시를 회고하는 호암의 말이다.

    꿈과 이상의 일환이지만 여자 종업원의 기숙사 건설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공장이 가동되면 1000명이 넘는 젊은 여성들이 일하게 된다. 나는 도쿄 유학 시절에 ‘여공 애사(女工 哀史)’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비참한 노동조건 아래에서 일하는 방적 공장의 여공들의 참담한 생활을 그린 것이었는데, 당시 큰 충격을 받았었다. 

    내가 세우는 공장은 그래서는 결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우선 기숙사에 최상급의 쾌적한 시설을 갖추도록 하자고 굳게 마음먹고 스팀 난방을 설치했다. 요즘은 흔하지만 공장 내의 스팀 난방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목욕실, 세탁실, 다리미실, 휴게실 등에도 경비를 아끼지 않았다. 사치스럽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복도에는 회(槍)나무를 깔아 차분한 안정감이 나도록 하였다. 

    공장 내 환경미화에도 큰 관심을 쏟았다. 식수(植樹)에 돈을 아끼지 않았고, 연못과 분수도 마련했다. 부지 전체를 잘 다듬어진 정원으로 생각하는, 말하자면 정원공장(庭園工場)이라고까지 할 만한 것으로 꾸미고 싶었다. 그때 심었던 갖가지 수목(樹木)은 지금 공장 건물을 거의 뒤덮을 만큼 훌륭하게 자랐고 잔디도 곱게 자라, 대구시민들 사이에서는 우리 공장을 ‘제일 공원’이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기숙사나 조경에 그토록 마음을 쓴 것은, 여자 종업원을 포함하여 모든 종업원을 가족적으로 대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쾌적한 환경 속에서 일하면 작업 능률도 반드시 향상되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최고 수준 인재에 최고 수준 교육을

    이건희 회장은 1987년에 회장직을 물려받는데 마침 그전 해인 1986년 이우에 회장도 사장으로 취임하시지요. 뭔가 교류가 있었나요.

    “1983년에 삼성과 자판기 기술 원조 계약을 체결했을 때 이건희 회장님을 제 별장에 초대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업무 이야기보다는 일상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회장 취임 후에는 도쿄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는 인사 정도였습니다.” 

    1993년에 이건희 회장이 오사카에서 신경영 강의를 하셨을 때 뵌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신경영과 관련해서 회사를 어떤 식으로 바꿔나가고 싶다던가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나요.

    “오사카에 200명 정도 임원들과 함께 오셨습니다.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하셔서 식사를 함께 했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임원들을 모두 밖으로 보내 정보 수집을 하도록 했습니다. 개선할 점을 상세히 알아보고 오라, 삼성전자의 품질, 상품 개발 때 고객 니즈를 파악하는 방법 등에 대해서도 조사하라고 했습니다’라고 하시더군요.

    그러면서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호텔로 돌아가 결과 보고를 받아야 해서 죄송하지만 일어나야 되겠습니다’ 하고 인사했던 기억이 납니다. 직원 교육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고 감탄했습니다. 부친으로부터 인재를 육성하는 것에 대한 열정을 배우신 것 같았습니다.”

    그 뒤 2003년 이우에 전 회장은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서울 초청을 받는다. 앞서 소개한 손욱 전 회장의 말에 언급된 그때다.

    “어느 날 직접 연락을 주셨는데 ‘산요와 삼성이 같이 전자 업무를 시작하게 된 경위를 최근에야 공부하면서 알게 됐다’면서 창업자의 일원으로서 삼성이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해 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를 꼭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일본으로 직접 오시겠다면서 말이죠. 

    마침 저는 삼성 공장도 견학해 보고 싶어서 ‘제가 한국에 가보고 싶다’고 했더니 흔쾌히 초청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제 스케줄을 꼼꼼하게 준비해 주셨습니다. ‘몇 월 며칠 몇 시에 전세기로 모시러 가겠습니다. 보내드린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와주세요’라고 하셨고, 돌아올 때도 전세기를 내주셨습니다. 

    회장님과 서울에서 만난 장소는 호암이 돌아가신 방이었습니다. 회장님은 ‘일부러 이 방을 택했습니다. 이 장소에서 만나는 게 삼성에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여기에서 뵙고 싶었습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이렇게 삼성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하셨고, ‘앞으로도 서로 도움이 될 일이 있으면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가족 분들도 정말 마음이 따뜻한 분들이셨습니다. 

    호암 회장님 때부터 지금까지 삼성도쿄 직원들을 통해 제 생일에 매년 꽃을 받고 있습니다. 회사나 사람이나 무려 50년에 걸쳐서 이렇게 인연이 이어져 오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겁니다.  

    회장님은 정말 목표를 향한 엄청난 도전의식과 집요함이 있었습니다. 저도 럭비를 해서 아는데 회장님도 럭비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일을 추진하시는 데 예리함이라고 할까요. 보통 사람들은 견디기 어려운 것인데 그걸 견뎌내셨습니다. 꽃 선물 하나만 보아도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세심하게 신경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런 열정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앞서 손욱 전 회장은 당시 이우에 전 회장이 삼성의 성공 비결에 대해 직접 알아보고 싶었다고 했다. 

    비결을 찾았나요.

    “한마디로 ‘교육’이 아니었나 생각했습니다. 일단 직원 분들의 학교교육 수준은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높지 않나요? 아마 IQ테스트를 하면 세계 최고 수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의 대부분 서울대 출신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희만 해도 고졸이나 전문대를 졸업한 직원이 대다수였거든요. 기본적으로 학업 능력이 대단히 높은 분들이 모두 삼성에 모여 있었던 겁니다.

    이렇게 우수한 자원에 대해 회장님은 투자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삼성의 철학을 녹여내고 교육해 나갈 것인지에 중점을 두셨다고 생각됩니다. 실제 현장에서 체험한 교육제도를 살펴보면 정말 놀랄 정도로 열정을 쏟으셨습니다. 교육 내용도 철저해서 아예 인력개발원 안에 일본식 가옥을 만들어서 그 건물 안에 들어가면 한국어 사용을 일체 금지한 것도 놀라웠습니다. 안에 있던 가구 같은 살림살이도 전부 일본식이었습니다. 온돌이 아니라 고타쓰(일본에서 쓰는 테이블 형태의 난방기구)를 비치해 놓을 정도로 말이죠. 일본에 대해 공부한다면 이런 생활적 부분부터 배워야 한다는 교육이었지요. 정말 대단했습니다. 

    저는 미국 IBM 연수원에서 직접 훈련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훈련으로 평가받고 있는 곳인데 IBM과 비교해도 삼성의 연수는 수준이 달랐습니다.”

    그는 “또 인상적이었던 것이 밤에 식당에서 맥주나 술을 마실 수 있게 허용했다는 점이었다”고 했다. 

    “아직도 잊지 못하는데 버드와이저 브랜드 네온사인이 바 카운터 위에 자리 잡고 있었어요. 다른 회사 연수원은 대부분 절대 ‘노 알코올’입니다. 이런 점에서 삼성은 대단히 자유로운 회사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방이나 연수원 부대시설도 일류 호텔 수준이었습니다. 호암 회장님의 김치 항아리 에피소드도 그랬지만 이건희 회장님도 정말 인재를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구나 하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디램(DRAM) 개발 초기에 삼성이 일본 정부와 회사에 기술을 제공해 달라는 요청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다들 거절하자 회장님은 세계로 눈을 돌리셨지요. 제가 서울에 갔을 때 삼성연구소에서 일하던 러시아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는데, 마침 소련 연방이 붕괴되면서 러시아 과학자들을 모셔왔다고 하더라고요. 또 미국에 유학 간 한국인들도 데려오고 말이죠. 인재를 찾아오는 그 기민함과 창의로운 육성이 지금의 삼성을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회장님을 다시 만난다면 어떤 말씀을 하고 싶으신지요.

    “‘편안히 쉬십시오’라는 말밖에는 없네요. 회장님은 밖으로 알릴 수 없어서 그렇지 마음속으로는 다양한 것과 사투를 벌였을 겁니다. 고독한 선택을 해야 하는 일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정말 온 힘을 다해서 연구하고 고민하셨을 겁니다. 보통 사람들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지요. 그러니 ‘이제는 편안히 쉬십시오’라고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곧 따라가겠지만요…. 그때도 다시 많이 가르쳐주십시오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올해 93세인 이우에 전 회장은 한국과 인연이 깊다. 2010년에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수교훈장 숭례상을 받기도 했다. ‘왔소’라는 경상도 사투리를 활용해서 ‘어서 오세요’라는 뜻을 그대로 축제 이름에 반영한 ‘오사카 왓소 문화교류협회’를 설립해 폐지 위기에 처한 한일 전통문화 축제 ‘사천왕사 왓소’ 행사를 존속시킨 공로였다.

    지난 6월 23일에는 이희건 한일교류재단(이사장 하태윤)이 선정한 ‘이희건 상’ 초대 수상자로 정해져 오사카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이희건 상’은 ‘금융보국(금융으로 세상을 이롭게 함)’ 정신을 바탕으로 신한은행을 창업해 키운 고(故) 이희건 명예회장의 뜻을 이어받아, 한일 간 학술·경제·문화 교류에 기여한 인물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올해 처음 제정됐다.

    이우에 전 회장은 “고 이희건 명예회장의 뜻을 기리며 앞으로도 한일 간 상호 이해와 우호 증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