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송금 효율화 위해 개발된 리플과 XRP
빠른 처리 속도, 금융권 이해 쉬운 합의 체계로 각광
SEC, 리플이 판매한 XRP도 ‘증권’이라며 기소
기관에 판 XRP만 증권으로 인정돼 리스크 해소
리플 홈페이지 화면. 리플 홈페이지 캡처
이들의 비전은 처음부터 명확했다. 연간 155조 달러가 넘는 자금이 오가는 글로벌 국제 송금 시장을 고치는 것이었다.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시스템은 있었으나 높은 수수료가 문제였다. 여러 중개 은행을 거치다 보니 수수료는 물론 결제 시간도 길어졌다. 길게는 단순 결제에만 며칠씩 걸릴 정도였다.
리플페이는 국제 송금에 최적화된 디지털 자산을 만들고자 했다. 비트코인에 비해 빠르고 효율적이며 전력 소모량도 적어야 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XRP 레저(XRP Ledger·XRPL)와 암호화폐 XRP였다. 2012년, IT 금융계의 거물 크리스 라슨(Chris Larsen)이 합류하며 이 기술을 중심으로 한 사업체 ‘오픈코인(OpenCoin)’이 설립됐다. 이후 리플 랩스(Ripple Labs), 그리고 현재의 리플(Ripple)로 사명을 변경하며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했다.
리플의 목표는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비트코인은 국가가 지배하지 못하는 화폐 시스템을 꿈꿨다. 이더리움은 거기에 한발 더 나아가 블록체인으로 프로그래밍을 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 힘쓴다. 이들이 꿈을 좇는다면 리플은 현실에 발을 대고 있다.
블록체인 사용해 국제 송금 불합리 해결
리플의 핵심 서비스는 ‘ODL(On-Demand Liquidity)’이다. ODL은 XRP를 ‘중간 통화(bridge currency)’로 활용해 국제 송금의 근본적 비효율성을 해결한다. 전통적 국제 송금 방식에서는 은행들이 상대방 국가의 통화로 미리 자금을 예치해 ‘노스트로-보스트로(Nostro-Vostro)’ 계좌를 유지해야 한다. 언제 송금이 일어날지 모르니 은행은 해당 계좌에 넉넉히 잔고를 확보해 둔다. 이 과정에서 자금 확보 및 잔고 유지 등 자본 및 시간 비용이 발생하게 된다.ODL은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해결했다. 송금이 시작되면 은행은 자국 통화를 XRP로 즉시 환전한다. 환전된 XRP는 리플을 통해 단 몇 초 만에 수취 은행이 있는 국가의 거래소로 전송된다. 수취 은행은 XRP를 현지 통화로 즉시 환전해 최종 수취인에게 지급한다. 이러한 전 과정이 거의 실시간으로 이뤄진다. 이렇게 되면 각 은행은 더는 해외 계좌에 막대한 자금을 미리 예치해 둘 필요가 없고, 송금을 예비해 묶어놨던 자본을 다른 곳에 활용할 수 있게 된다. 리플에 따르면 ODL을 통해 국제 송금에 드는 비용을 40~60%까지 절감할 수 있다.
ODL 서비스는 특히 라틴아메리카(브라질-멕시코), 아시아 일부 국가 등 유동성이 부족하거나 전통적인 금융 체계가 발달하지 않은 지역에서 큰 호응을 얻고 있다. ODL 거래량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리플의 파트너사인 트랑글로의 집계에 따르면 2021년 ODL의 순 거래 규모는 5300만 달러였으나 2022년에는 9억7000만 달러로 급증했다. ODL 거래량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ODL을 사용할 수 있는 지역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7월 22일 리플은 “나이지리아, 이집트, 아랍에미리트(UAE)로 ODL 서비스를 확장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7월 18일 서울 강남구의 가상자산 거래소 업비트 전광판에 XRP(리플) 시세가 표시돼 있다. 동아DB
속도 빠르고, 비용도 덜 드는 블록체인
송금에 이용되는 만큼 리플은 거래 속도가 빠르다. 3~5초면 거래 한 건이 성립된다. 속도의 비결은 리플만의 합의 메커니즘이다. 블록체인은 각각 코인에 모든 거래와 변동 사항을 기록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일부 블록체인은 ‘합의’라는 방식을 사용한다. 대표적으로 비트코인은 일종의 암호인 해시함수를 계산해 새로운 블록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변동 사항을 기록한다. 이 과정을 흔히 ‘채굴’이라 한다. 해킹이 불가능한 구조이지만 해시함수 계산을 위해 막대한 전력과 시간, 컴퓨터의 성능이 필요하다.반면 ‘합의’는 이 같은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리플은 ‘리플 프로토콜 합의 알고리즘(Ripple Protocol Consensus Algorithm·RPCA)’을 이용한다. RPCA는 ‘연합 합의(Federated Consensus)’라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 방식은 블록체인에 변동이 생기면 이를 자동으로 기록한다. 이후 이 기록이 유효한지 여부를 투표에 부친다. 리플에는 ‘검증자(Validator)’라는 집단이 있는데, 새로운 거래가 발생하면 이들이 거래의 유효성을 검토한다. 검증자 중 80% 이상이 거래에 동의할 때 해당 거래가 블록체인에 남는다.
경쟁이 아닌 협의를 통해 이뤄지므로 빠르고 효율적으로 거래를 블록체인에 남길 수 있다. 리플의 백서에 따르면 최대 초당 1500건 이상의 거래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다. 거래 수수료는 건당 평균 0.00001 XRP로 사실상 무료에 가깝다. 채굴 과정이 없으니 전력 소모도 거의 없다.
리플에도 약점은 있다. 기존의 암호화폐에 비해 ‘탈중앙화’라는 가치와 멀어질 위험이 있다. 합의에 거치는 시간이 줄어든 만큼 개인이 블록체인에 참여할 기회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초창기에는 리플이 대부분의 검증자를 직접 운영하며 사실상 네트워크를 통제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에 리플은 수년에 걸쳐 검증자 다변화를 위해 노력해 왔다. 2025년 기준 전 세계에 150개 이상의 독립적인 검증자들이 대학, 거래소, 기업, 개인 등 다양한 주체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리플이 직접 운영하는 검증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기술적으로 리플이 단독으로 네트워크를 중단하거나 거래를 검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리플의 ‘신뢰 기반’ 탈중앙화 모델은 논쟁의 대상이지만, 리플의 핵심 고객인 금융기관에는 매력적 요소다. 금융은 신뢰할 수 있는 주체들 간의 관계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리플의 UNL(Unique Node List·신뢰할 수 있는 검증자들인 특정 노드 집합) 모델은 이러한 전통 금융의 신뢰 모델을 블록체인으로 구현한 모양새다. 이는 리플이 제도권 금융을 공략하기 위해 내린 전략적 선택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리플은 기존 금융시스템인 송금의 비효율성을 해결하려는 극도의 실용주의에서 출발했다. 이러한 ‘비즈니스 우선’ 접근 방식은 리플이 금융기관과 파트너십을 맺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지만, 동시에 법적 다툼의 씨앗이 됐다. 리플이 사전 발행해 판매한 1000억 개의 XRP가 문제가 됐다. 리플은 신생 기업이 지분을 팔아 투자금을 유치하는 것처럼 XRP를 팔아 운영자금을 만들었다.
리스 라슨(Chris Larsen) 리플 공동 설립자의 X(전 트위터) .계정. X 캡처
이에 맞서 리플은 XRP가 결제수단으로서 명백한 유용성을 가진 상품(Commodity) 또는 화폐이지 증권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또한 SEC가 수년간 XRP의 성장을 지켜보다가 갑자기 소송을 제기한 것은 ‘공정한 고지(Fair notice)’ 원칙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수년간의 치열한 공방 끝에, 2023년 7월 아날리사 토레스 미국 연방 판사는 약식 판결을 내렸다. 판결의 핵심은 XRP 판매 방식을 두 가지로 명확히 구분한 것이었다. 법원은 리플이 헤지펀드 등 기관투자자들에게 직접 계약을 통해 XRP를 판매한 행위는 미등록 증권 판매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이들 구매자가 리플이 성장하면 XRP의 가치가 상승할 것이라는 합리적인 기대를 가지고 투자했다고 봤다.
반면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암호화폐거래소에서 이뤄진 XRP 판매는 증권 판매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법원은 거래소의 불특정 다수로부터 XRP를 구매한 일반 투자자들은 자신이 누구에게서 코인을 사는지 알 수 없었으며, 따라서 기관투자자처럼 리플의 노력에 직접적으로 의존해 이익을 기대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 판결은 리플의 승리이자 암호화폐 산업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선례를 남겼다. 이는 디지털 자산의 증권성 여부가 자산 자체의 내재적 속성보다는 ‘어떻게 판매됐는가’라는 거래의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명확히 했기 때문이다.
블록체인 프로그래밍, 스테이블코인도 넘봐
SEC와의 법적 분쟁이 마무리되면서, 리플은 국제 송금을 넘어 더 큰 금융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리플은 그동안 결제에 특화돼 이더리움과 같은 블록체인 프로그래밍 기능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리플은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두 가지 전략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하나는 ‘EVM 사이드체인(Ethereum Virtual Machine·이더리움 가상 머신과 호환되는 별도의 블록체인)’의 도입이다. 이를 통해 이더리움 개발자들이 기존의 코드와 도구를 그대로 사용해 리플 생태계에서 블록체인 프로그램인 ‘디앱(dApp)’을 구축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훅스(Hooks)’라는 ‘네이티브 스마트 콘트랙트(자동 계약)’ 기능의 개발이다. 훅스는 자동 저축, 자동 거래 조건 설정 등 특정 기능에 최적화돼 있다.
리플은 스테이블코인 시장에도 진출하려 한다. 리플은 미국 달러와 일대일로 가치가 고정되는 자체 스테이블코인 ‘RLUSD’를 출시했다. RLUSD는 미국 달러 예금, 단기 국채 등 투명한 자산을 100% 담보로 발행된다. ‘신동아’ 8월호에 소개했던 테더(USDT)나 서클(USDC)의 경쟁 상대가 생긴 셈이다.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Central Bank Digital Currency, 이하 CBDC) 플랫폼 개발에도 나섰다. 리플은 전 세계 중앙은행들이 자체 디지털 화폐를 발행하고 관리할 수 있는 포괄적 플랫폼을 제공하고 있다. 명실상부 현재 이 분야의 선두 주자다. 리플의 CBDC 플랫폼은 각국 정부가 자국의 통화정책과 규제 요건에 맞춰 디지털 화폐의 발행, 유통, 소각 등 전체 수명주기를 관리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이미 팔라우, 부탄, 홍콩, 콜롬비아, 조지아 등 여러 국가와 파일럿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실질적인 기술력과 경험을 축적하고 있다.
리플의 미래는 그들이 지닌 핵심적 역설을 어떻게 풀어나가느냐에 달려 있다. 즉 중앙화된 기업 구조의 강점을 활용해 전통 금융시스템의 신뢰를 얻고 제도권으로 진입하는 동시에, 기반 기술이 탈중앙화되고 개방적임을 증명해야 한다. 기나긴 법적 터널은 지났지만, 이제부터가 진정한 기술과 비즈니스, 그리고 철학의 경쟁이 시작되는 무대다. 리플이 이 거대한 도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단순한 암호화폐 프로젝트를 넘어 글로벌 금융 인프라의 핵심 플레이어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 주목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