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호

오늘의 피해자가 내일의 가해자가 되는 순간

[황승경의 Into The Arte] 역사에 숨겨진 진실 다룬 ‘영광의 날들’ ‘두 여인’

  • 황승경 예술학 박사·문화칼럼니스트 lunapiena7@naver.com

    입력2025-10-18 09:00:01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프랑스 지키러 나선 식민지 병사

    • 식민지 출신이란 이유로 논공행상 제외

    • 상 대신 내려진 ‘약탈 면허증’

    • 제국주의 피해자가 자행한 ‘치오차리아’ 약탈

    • 성폭행까지 벌어지며 다른 피해자 양산

    •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제국주의, 전쟁 폐해

    영화 ‘영광의 날들’의 포스터(왼쪽). 영화 ‘영광의 날들’에서 프랑스 식민지 북아프리카에서 온 병사들이 프랑스 국기를 내걸고 전쟁에 나서는 모습. IMDB, 네이버영화

    영화 ‘영광의 날들’의 포스터(왼쪽). 영화 ‘영광의 날들’에서 프랑스 식민지 북아프리카에서 온 병사들이 프랑스 국기를 내걸고 전쟁에 나서는 모습. IMDB, 네이버영화

    영화 ‘두 여인’의 포스터(왼쪽). 영화 ‘두 여인’의 주인공 체사레타(소피아 로렌·왼쪽)와 그의 딸 로제타(엘레오노라 브라운). IMDB

    영화 ‘두 여인’의 포스터(왼쪽). 영화 ‘두 여인’의 주인공 체사레타(소피아 로렌·왼쪽)와 그의 딸 로제타(엘레오노라 브라운). IMDB

    사회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내가 옳고, 나만이 정의롭다”는 믿음이 팽배하다. 정치 논쟁, 일상의 작은 갈등 속에서 상대를 배제하고 단죄하기는 쉽다. 다른 의견은 오류로, 내가 겪지 않은 일은 거짓이라 치부하면 된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언제나 복잡한 진실이 숨어 있다. 역사는 선과 악으로 단순히 나눌 수 없다. 어제의 피해자가 오늘의 가해자가 될 수 있고, 가해자의 뒤에는 또 다른 눈물이 자리한다. 피해와 가해, 정의와 불의가 얽힌 그 회색 지대야말로 역사의 진실이 숨는 자리다.

    프랑스 영화 ‘영광의 날들’(Indigènes·2006)과 이탈리아 영화 ‘두 여인’(La Ciociara·1960)은 이 가려진 회색 지대를 조망하는 작품이다. 

    잊힌 병사들, 두 번 배신당한 목소리

    ‘영광의 날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서사의 중심에서 잊힌 이들의 목소리를 다룬다. 모로코를 비롯한 북아프리카 출신 병사들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프랑스 식민지에서 태어났지만 고향을 떠나 프랑스군에 자원해 유럽 해방을 위해 싸운 사람들이다. 프랑스는 승전국 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나 식민지 병사들의 이름은 오랫동안 역사와 공식 기록에서 지워졌다. 식민지 출신이라는 이유로 정당한 인정과 대우를 받지 못했다. 군공도 가려졌다. 감독 라시드 부샤렙(72)은 이러한 정치적·역사적 맥락을 평생의 주제로 삼아, ‘프랑스군’이라는 화려한 이름 뒤에 숨겨진 불편한 진실을 세상에 드러냈다.

    영화는 ‘사이드’(자멜 드부즈), ‘압델카데르’(사미 부아질라), ‘메사우드’(로시디 젬)라는 세 인물의 시선을 따라간다. 각기 다른 사연을 안고 군에 합류했지만 목표는 같았다. 프랑스의 해방을 위해 입대해 목숨을 걸고 전장에 나갔다. 그러나 전장에 선 그들을 기다린 현실은 냉혹한 차별이었다. 함께 피를 흘린 전우였음에도 끝내 ‘프랑스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진급 기회는 은폐됐으며, 물자 배급에도 차별 대상이었다. 본토 출신은 ‘흰 빵’을 받았지만, 식민지 출신에게는 ‘검은 빵’만 돌아갔다. 사소해 보이지만 상징적인 차별은 제국주의가 얼마나 뿌리 깊게 위선과 불공정을 구조화했는지 보여준다.



    승전 후에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들은 환영은커녕 사회의 냉대 속에서 잊혔다. 약속했던 연금과 보상은 이행되지 않았다. 1956년 모로코가 프랑스 치하에서 독립하자 이들의 위치는 더 애매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들은 새로운 조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진퇴양난에 빠졌다. 결국 그들은 두 번 배신당했다. 독립한 조국에 그들을 위한 곳은 없었다.

    부샤렙은 이 병사들을 영웅으로 미화하지도, 단순한 가해자로 낙인찍지도 않는다. 그는 기억의 부재와 정치적 침묵이 어떻게 개인의 삶을 지워내는지 응시한다. 전쟁영화지만 웅장한 전장의 양상을 담으려 노력하지 않는다. 대신 등장인물의 눈빛과 숨결, 굴욕과 희망의 파편에 집중한다. 

    이 영화가 프랑스 영화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제2차 세계대전을 소재로 한 프랑스 영화는 주로 ‘저항과 승리’를 그려왔다. ‘영광의 날들’은 그 이면의 침묵과 불편한 기억을 들춘다. 개봉 당시, 식민지 출신 참전용사 후손을 둘러싼 갈등은 여전히 깊었다. 영화는 관객에게 그 문제를 역사적 맥락에서 보라고 요구한다. 실제로 상영 이후 참전용사 연금 문제가 재조명되며, 정부가 일부를 뒤늦게 조정하기도 했다. 예술이 사회적 책임을 환기하고 역사를 다시 쓰게 하는 힘을 증명한 순간이었다. 

    영화 ‘영광의 날들’ 스틸컷. 네이버영화

    영화 ‘영광의 날들’ 스틸컷. 네이버영화

    전쟁이 남긴 또 하나의 비극 ‘모로치니아테’

    제2차 세계대전의 여러 전장 중 이탈리아 전선, 특히 몬테카시노 전투의 기억은 모로코 출신 병사들에게 복합적이고 잔혹한 상처로 남았다. 1944년 5월, 독일군의 최후 방어선이 무너졌다. 당시 자유 프랑스군 소속 북아프리카 출신 병사들을 이끌던 알퐁스 쥐앵(1888~1967) 사령관은 승전의 대가로 약탈 기회를 선사했다. 그의 휘하 병사들은 ‘50시간 동안 마음대로 행동하라’는 사실상의 ‘약탈 면허증’을 받았다. 

    이 명령은 군 지휘부의 무책임과 방임을 드러낸다. 이 ‘면허증’을 빌미로 병사들은 마을을 약탈하고 살인을 저질렀으며, 무엇보다 수많은 여성이 집단 성폭행의 희생양이 됐다. 피해자는 수만 명에 달했고, 어린 소녀부터 노인, 임산부까지 예외는 없었다. 

    남성들은 가족을 지키려다 쓰러졌고, 이 비극은 치오차리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세대를 넘어 전해졌다. 수도원 건물은 복원됐으나, 모로치니아테(Marocchinate·모로코인들의 짓)’라는 멸칭은 오랫동안 여성들의 삶과 명예를 짓눌렀다. 이 단어는 피해 여성을 성적으로 더럽혀진 존재로 낙인찍는 모욕적 표현으로 쓰였고, 지역의 여인들은 그 후에도 조롱과 괴롭힘에 시달려야 했다. 성폭력의 상처는 단지 그 순간에 멈추지 않고, 일상 속에서 계속 반복되며 고통을 이어갔다. 

    모로코 독립 직후 발표된 이탈리아 작가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소설 ‘두 여인’(1957)은 치오차리아의 비극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이후 이탈리아 영화 감독 비토리오 데 시카(1901~1974)가 은막으로 옮긴 ‘두 여인’(1960)은 그 참상을 더욱 선명하게 시각화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엽 남편을 잃은 체사레타와 열두 살 딸 로제타는 로마의 폭격을 피해 고향 치오차리아로 향한다. 고향에 도착해 잠시 안도했지만 전쟁은 멈추지 않았고, 마을의 일상은 끝내 무너졌다. 그러던 중,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에 로마로 돌아가려 했지만 끔찍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녀는 교회 안에서 ‘해방군’이라 불리던 프랑스군 산하 북아프리카 병사들에게 붙잡혀 집단 성폭행을 당했다. 어린 로제타는 그 자리에서 순결을 잃었다.

    이 비극은 단순한 전쟁범죄라 볼 수 없다. 자유와 정의를 외치던 해방의 이름 아래에서 일어난 폭력은 인간 존엄을 무너뜨리고 피해자들의 삶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겼다. 

    1956년, 모로코가 독립을 쟁취하고 수에즈전쟁이 발발했을 때, 제국주의의 균열은 더욱 뚜렷해졌다. 유럽의 지식인들은 불편한 진실과 마주해야 했다. 자신들이 한때는 전쟁의 피해자였지만, 동시에 식민지인들에게는 오랜 가해자였다는 사실이다. 

    모라비아가 ‘두 여인’을 집필하며 느낀 무거움은 바로 이 아이러니에서 비롯됐다. 유럽은 더는 ‘피해자’라는 얼굴 하나로 자신을 정의할 수 없었다. 전쟁 속에서 무너진 인간성은 총탄과 폭격 속에서만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식민지 억압과 여성에 대한 폭력 속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두 여인’은 단순한 이탈리아 농촌 가족의 비극을 넘어, 해방의 이름으로 약자에게 되풀이되는 억압과 상처를 비추는 보편적 은유가 됐다.

    활자에서 스크린으로, 더 선명해진 고통

    영화 ‘두 여인’ 스틸컷. IMDB

    영화 ‘두 여인’ 스틸컷. IMDB

    데 시카는 전쟁의 참상을 과장하지 않고, 일상 속에 스며든 잔혹한 흔적을 고요히 비췄다. 체사레타 역할을 맡은 소피아 로렌(91)은 어머니의 삶을 온몸으로 살아냈다. 전쟁의 폭력 속에 딸을 지킬 수 없었던 무력감, 끝내 포기하지 않은 모성의 끈질김, 인간의 존엄이 산산이 부서지는 절벽 끝의 절망까지. 그녀의 연기는 과장 없는 진실로 인간 고통의 결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이 압도적 연기로 로렌은 제34회 아카데미 시상식(1962)에서 외국어 영화 최초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이탈리아 영화의 위상을 세계에 각인했다. 

    로제타 역의 엘레오노라 브라운(77)은 말 대신 눈빛으로 증언했다. 뇌리에 새겨진 상처는 한 아이의 인생을 망가뜨렸다. 브라운의 연기는 고통이 세대를 넘어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몸으로 체현했다. 데 시카는 단순히 가해를 고발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폭력이 인간의 내면을 무너뜨려 도덕과 양심마저 흔드는 과정을 현미경처럼 집요하게 따라갔다. 감독은 사건을 과장하지 않았다. 대신 배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먼지 자욱한 골목, 가난한 식탁, 스쳐 지나갈 법한 교회 같은 평범한 풍경 속에 ‘폭력의 그림자’를 심어놓았다. 

    이 모든 비극 뒤에는 유럽 제국주의 국가의 구조적 폭력이 있다. 몬테카시노 전투에서 사령관이 내린 ‘약탈 면허증’, 식민지 출신 병사들에게 약속했던 연금을 외면한 행정 등은 모두 유럽 제국주의 국가가 만든 체제 속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어느 나라 정부도 이들이 겪은 비극에 대해 사과하거나 책임을 지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역사의 진실은 그렇게 묻혀버렸다.

    그러나 그 침묵은 과거에만 머물지 않는다.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는 언제든 다시 폭력을 불러올 수 있다. 역사는 우리에게 낮지만 단호하게 속삭인다. 인간의 선함은 권력과 특권 앞에서 너무도 쉽게 무너진다. 모로코인들이 겪은 수모와 치오차리아에서 벌어진 참상은 권력이 책임을 버리는 순간 도덕이 얼마나 빠르게 붕괴하는지 보여준다. 그곳에서 무너진 것은 건물이나 마을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 자체였다. 

    우리는 역사를 손쉽게 선악의 이분법으로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실제 역사는 훨씬 복잡하고 여러 층이 겹쳐진 잿빛 현실이다. 어제는 피해자였던 사람이 오늘은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정의라 믿었던 집단이나 제도 역시 알게 모르게 새로운 억압을 낳기도 한다. 

    두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겉으로 드러난 역사만이 아니라, 그 이면에 숨어 있는 고통과 침묵을 보라는 것이다. 피해의 언어 뒤에 가려진 또 다른 피해를, 정의라는 말 속에 숨어 있는 배제를, 영웅담의 화려한 빛 뒤에 눌려 있는 이름 없는 얼굴들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영광의 날들’은 잊힌 병사들의 억울한 목소리를 불러내고, ‘두 여인’은 그들이 남긴 폭력의 흔적을 응시한다. 두 작품은 서로 다른 시선으로 같은 상흔을 비추며, 우리가 외면해 온 그림자 속에서 아직도 흐르고 있는 고통과 눈물을 고요히 드러낸다. 

    황승경
    ● 1976년 서울 출생
    ● 이탈리아 레피체국립음악원 졸업,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성균관대 공연예술학 박사
    ● 前 이탈리아 노베 방송국 리포터, 월간 ‘영카페’ 편집장
    ● 저서 : ‘3S 보컬트레이닝’ ‘무한한 상상과 놀이의 변주’ 外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