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호

시간 관장하는 ‘크로노스’는 시계 브랜드 지배했다

[브랜드가 된 신화] 주식거래 시스템은 기회의 神 ‘카이로스’가…

  • 김원익 홍익대 교수·㈔세계신화연구소 소장

    입력2025-10-21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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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세·현대에 더 잘 알려진 신 카이로스·크로노스

    • 뒤통수만 대머리인 기회의 신 카이로스

    • ‘놓치면 잡기 힘든 기회’ 형상화한 모습

    • 종교·철학계에서도 카이로스 이름 사용

    • 동명이신 크로노스로 오해받는 시간의 신

    • 티탄 신족의 왕 크로노스와는 무관

    • 시계·시간 관련 단어의 어원으로 활약

    이탈리아 화가 프란체스코 살비아티의 프레스코화 ‘정의의 천사’의 한 구석에 그려져 있는 기회의 신 카이로스. 위키피디아

    이탈리아 화가 프란체스코 살비아티의 프레스코화 ‘정의의 천사’의 한 구석에 그려져 있는 기회의 신 카이로스. 위키피디아

    그리스 신화에는 시간과 관련된 신이 두 명이 있다. 한 명은 물리적 시간을 관장하는 ‘크로노스’와 기회의 신 ‘카이로스’다. 카이로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가문과 출생도 불분명하다. 키오스섬 출신의 고대 그리스 극작가 이온은 카이로스를 제우스의 막내아들이라고 주장하지만, 정확한 근거를 대지는 못한다. 카이로스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도 없다. 헬레니즘 시기에야 비로소 카이로스의 조각품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그때부터 그리스 문화권에 카이로스에 대한 신앙이 생기기 시작한 듯하다. 

    카이로스의 모습을 맨 처음 청동 부조로 새긴 사람은 올림피아 출신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궁정 조각가였던 리시포스였다. 현재 그의 작품은 로마 시대의 복제품으로 일부만 남아 있다. 그 부조에서 확인할 수 있는 카이로스는 맨몸으로 달리고 있는 젊은이의 모습이다. 풍성한 머리카락이 온통 얼굴 앞쪽으로 치렁치렁 늘어져 있다. 정수리부터 뒤통수까지는 반질반질한 대머리다. 어깻죽지와 발꿈치에는 날개가 달려 있다. 왼손에는 천칭을 들고 오른손 집게손가락으로는 한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접시를 반듯하게 조정하고 있다. 

    ‘기회의 속성’ 나타낸 카이로스의 외모

    그리스 신화에서 카이로스의 모습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달라진다. 처음에는 어깻죽지에 날개만 달려 있다가 제우스의 전령 헤르메스 신처럼 발꿈치에도 날개가 달리더니, 급기야 법의 여신 테미스와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처럼 손에 칼까지 들게 된다. 특히 1522년 독일의 출판업자 안드레아스 크라탄더의 인쇄소 마크에 그려진 카이로스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이고, 날개가 없으며, 행운의 여신 티케처럼 둥근 구 위에 올라서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며 달리고 있다. 

    카이로스의 모습에서 가장 이채로운 것은 뒷머리 절반이 대머리이며 앞머리에 무성하게 나 있는 머리카락도 이마 쪽으로 길게 내려뜨리고 있는 모습이다. 기회의 신은 만나는 순간 얼른 앞에서 머리채를 잡아채야 하며, 실수로 놓쳐버리면 나중에 뒤에서는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상징한다. 어깻죽지와 발꿈치의 날개도 너무 빨라 잡기도 힘들고, 실수로 놓치면 따라잡기도 힘든 기회의 속성을 닮아 있다. 

    기회의 신 카이로스가 마치 법의 여신 테미스처럼 천칭을 든 채 집게손가락으로 약간 기울어진 접시를 조정하고 있는 것에도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 카이로스가 접시가 떨어지지 않도록 조정하는 모습은 최적의 기회를 찾는 인간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 



    카이로스가 행운의 여신 티케처럼 둥그런 구에 올라 아슬아슬하게 곡예를 벌이는 이유도 기회의 속성과 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회와 행운이라는 것은 동그란 구 위에 올라선 카이로스와 티케처럼 언제라도 떨어져 놓칠 지 모른다는 것을 암시하는 모습일 수 있다. 손에 칼을 든 의미도 해석할 수 있다. 한번 자신을 지나친 사람에게는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카이로스 신의 단호한 성격을 드러내는 장치일 수 있다. 

    미래에셋증권이 2013년 내놓은 HTS(Home Trading System) 프로그램 카이로스. 뉴스1

    미래에셋증권이 2013년 내놓은 HTS(Home Trading System) 프로그램 카이로스. 뉴스1

    기회의 신인 만큼 카이로스의 이름은 여기저기서 자주 쓰인다. 제주에는 카이로스의 이름을 딴 호텔과 카페가 있다. 연예기획사 중에도 카이로스가 있으며, 카이로스라는 학원도 가끔 눈에 띈다. 같은 이름의 농기구 생산 전문업체도 있으며 미래에셋증권의 HTS(Home Trading System) 프로그램 이름도 카이로스다.

    카이로스의 이름은 종교와 철학계에서는 다양하게 변용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카이로스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어떤 과업을 완수하라고 주는 특별한 기회’ ‘믿음과 불신 사이에서의 결단’ ‘죄를 회개할 수 있는 절호의 시간’ 등을 의미한다. 철학에서는 카이로스를 ‘인간이 살아가면서 대면할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라 정의한다.

    시간의 신 크로노스(Chronos)는 티탄 신족의 왕 크로노스(Kronos)와 비슷한 발음 때문에 자주 같은 신으로 여겨졌지만, 엄연히 서로 다른 신이다. 티탄 신족의 왕 크로노스는 아버지를 거세하고 자식들을 집어삼키는 무자비한 행동으로 유명하다. 그의 파괴적 행동이 모든 것을 소진하는 시간을 빼닮았다고 생각해 두 신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밀교에서 숭배하던 ‘시간의 신’ 크로노스

    시간의 신 크로노스는 전통적인 그리스 신화에 속하는 신은 아니다. 기원전 6~5세기 남부 이탈리아나 흑해 연안에 널리 퍼져 있던 오르페우스교의 천지창조에만 등장할 뿐이다. 오르페우스교는 이름 그대로 결혼하자마자 독사에 물려 죽은 아내를 구하러 지하 세계에 다녀온 리라와 노래의 달인 오르페우스를 교주로 모셨던 사람들이 모인 밀교다. 단편적으로 구전돼 온 그들의 핵심 교리는 크게 세 가지인데, 모두 오르페우스의 행적에서 만들어졌으며 동양의 불교와 비슷하다.

    그들은 오르페우스가 비록 아내를 구하는 데는 실패했어도 지하 세계에서 다시 살아 나왔다는 점에서 영혼의 윤회를 믿는다. 혼자가 된 오르페우스가 주변 처녀들이 아무리 간절하게 구애해도 모두 뿌리친 채 일편단심 아내만 생각하며 살다 죽은 것처럼 이 종교도 금욕을 강조한다. 오르페우스가 산 짐승을 찢어 죽이던 디오니소스 여신도들에게 죽임을 당한 만큼 살생도 금한다.

    오르페우스교에 따르면 시간의 신 크로노스는 태초에 카오스에서 혼자 생겨난 후, 창공의 신 아이테르와 함께 거대한 ‘태초의 알’을 하나 만들어낸다. 얼마 후 이 알에서 자웅동체이자 ‘빛나는 자’라는 뜻을 지닌 ‘파네스’라는 신이 스스로 태어나 만물을 창조한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시간의 신 크로노스에 대한 신앙이나 신전은 전혀 없었다. 도기나 조각 작품에서도 그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시간의 신 크로노스는 14세기 이후에야 비로소 화가들의 그림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그림이 크로노스를 인자한 노인으로 묘사한다. 턱수염이 무성하고 백발이 성성한 모습이다. 그림의 제목도 ‘진실을 구조하는 시간’ ‘진실을 드러내는 시간’ 등 긍정적 내용이 주를 이룬다. 한편 크로노스를 주연으로 하는 그림 중에는 ‘아버지 시간’이라는 제목도 종종 보인다. 이는 ‘진실은 시간의 딸’이라는 격언에서 착안한 제목이다. 이 격언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진실이 드러나는 것처럼 시간은 진실의 아버지 역할을 한다는 의미다. 

    그림 속 크로노스에게는 인자함과 거리가 먼 면모도 있다. 대부분의 그림에서 크로노스는 티탄 신족의 왕인 크로노스처럼 손에는 커다란 낫을 들고 있으며 어깻죽지에는 두 날개가 달려 있다. 그야말로 쏜 화살처럼 재빠르게 흘러가는 세월을 생각하면 시간의 신이 날개가 달렸을 것이라는 상상은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하지만 낫을 들고 있는 이유는 아무래도 석연치 않다. 

    시계 산업에서 각광받는 크로노스

    프랑스 화가 피에르 미냐르(1612~1695)의 그림 ‘큐피드의 날개를 자르는 크로노스’. 덴버 미술관

    프랑스 화가 피에르 미냐르(1612~1695)의 그림 ‘큐피드의 날개를 자르는 크로노스’. 덴버 미술관

    크로노스가 낫을 사용하는 모습이 드러난 그림도 있다. 대표적 예가 시간의 신 크로노스가 사랑의 신 에로스의 날개를 잘라내는 그림이다. 러시아 화가 이반 아키노프(1755~1814), 프랑스 화가 피에르 미냐르(1612~1695)가 이 모습을 그렸다. 두 그림의 내용은 거의 같다. 인자한 노인의 모습을 한 크로노스가 한 손에는 에로스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가위 혹은 낫으로 그의 깃털을 잘라내려 하고 있다. 아기의 모습을 한 에로스는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잔뜩 찌푸린 표정이다. 크로노스의 손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은 기색이 역력하다. 이 그림은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 그 의문은 바로 카라바조의 ‘승리자 아모르(에로스)’라는 그림을 보면 쉽게 풀린다. 

    카라바조의 그림에서 에로스는 날개를 활짝 펴고 마치 승리의 세리머니를 하듯 화살 몇 개를 움켜쥔 오른손을 높이 쳐든 채 활짝 웃고 있다. 또한 그의 발아래에는 무구, 악기, 악보, 월계관, 왕관 등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나뒹굴고 있다. 이것은 그림 제목이 암시하듯 왕위를 비롯해 이 세상 그 무엇도 에로스를 대적해서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의 작가 헤시오도스도 저서 ‘신통기’에서 에로스를 “모든 신과 인간의 머릿속 이성과 냉철한 사고를 압도하며 다리의 힘을 마비시키는 신”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시간의 신 크로노스가 천하무적 에로스를 제압해서 날개를 자른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일지 모른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세상 모든 것보다 우위에 있으나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시간의 신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의 그림 ‘승리자 아모르’.  베를린 미술관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의 그림 ‘승리자 아모르’.  베를린 미술관

    시계업계에서 시간의 신 크로노스의 이름을 종종 사용한다. 명품 시계로 이름을 알린 스위스에는 시간의 신 크로노스의 이름을 딴 ‘크로노스위스’라는 시계 브랜드가 있다. ‘크로노스’라는 이름의 시계 전문 격월간지도 있다. 

    시간을 다룬 창작물에서도 크로노스의 이름을 많이 쓴다. 1990년대 일본 게임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롤플레잉 게임 중 하나인 ‘크로노 트리거’에도 크로노스의 이름이 있다. 시간 여행을 소재로 이 작품은 1995년 출시돼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출시된 지 3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팬층이 두텁다. 

    크로노스를 어원으로 하는 단어도 많다. 영어 단어 중 ‘연대학 혹은 연대표’라는 뜻의 ‘Chronology’, ‘연대기’라는 뜻의 ‘Chronicle’, 항해할 때 쓰는 정밀 시계인 ‘Chronometer’, 등이 대표적이다. 지질학에서 지층을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처럼 시간대별로 구분해 도표로 만든 것을 ‘Chronostratigraphy’라고 하는데 이 단어에도 ‘크로노스’가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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