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임’의 순우리말은 ‘애 배기 더딤’, ‘순풍순풍’ 낳았다는…

[난임전문의 조정현의 ‘한글날에 만나는’ 생식이야기]

  • 조정현 사랑아이여성의원 원장

    입력2025-10-09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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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신’은 아이 밸 ‘임(姙)’, 아이 밸 ‘신(娠)’…뿌리는 우리말

    • ‘순풍순풍 낳았다’는 바람이 막힘없이 지나가는 모습

    • K-컬쳐 확산으로 한글은 이미 세계적 언어

    •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락민정음(樂民正音)’으로 업그레이드 할 때

    ‘임신’은 ‘아이 밸 임(姙)’과 ‘아이 밸 신(娠)’이 합쳐진 한자지만 그 뿌리는 우리말에 있다. Gettyimage

    ‘임신’은 ‘아이 밸 임(姙)’과 ‘아이 밸 신(娠)’이 합쳐진 한자지만 그 뿌리는 우리말에 있다. Gettyimage

    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오래전부터 우리말과 한글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 한글은 알면 알수록 단순한 문자가 아니라 정교한 체계를 갖춘 과학적 성과라는 것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순우리말 역시 그 자체의 매력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예를 들어 ‘임신’은 아이 밸 ‘임(姙)’과 아이 밸 ‘신(娠)’이라는 한자가 합쳐진 것이다. 겉으로는 한자어지만, 그 뿌리는 우리말에 있다. 옛사람들은 아이를 가진 여인을 두고 “임신했다”가 아닌 “애를 뱄다”고 표현했다. 아이가 배속에 들어앉아 있어서다. ‘훈몽자회(訓蒙字會, 1527)’를 참고하자면 이 말은 세월을 거치며 한자의 옷을 입어 ‘임신’이 된 것으로 보인다. 말은 달라졌지만, 그 안에 담긴 생명의 경이로움은 변함이 없다. 곧 아이가 배 속에 들어앉아 있다는 뜻을 품은 말이니, 신체의 변화를 언어와 글자가 그대로 담아낸 셈이다.

    ‘순풍’은 본래 바람이 순조롭게 부는 모양을 나타낸 부사에서 비롯됐는데, 단순한 바람의 묘사가 아니라 출산과 자연스럽게 연결한 것이다. 산모가 출산 과정에서 짧고 잦은 호흡을 내쉴 때 나는 소리가 순한 바람결을 닮았고, 아이가 큰 어려움 없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모습은 바람이 막힘없이 지나가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아이를 순풍순풍 낳았다’고 표현했다. 호흡의 리듬과 출산 과정, 그리고 바람의 흐름이 겹친 우리말 특유의 비유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임신이 잘되지 않는 경우를 흔히 ‘난임(難姙)’이라고 한다. 임신이 아예 불가능하다는 느낌을 주는 ‘불임(不任)’보다 더 부드럽게 표현한 말이다. 그렇다면 옛사람들은 순우리말로 어떻게 표현했을까. ‘애 배기 더딤’이라 했다. 아기를 배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뜻으로, 아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부부에겐 참 희망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따뜻한 울림을 지닌 순수 우리말이 문자 체계로 다시 태어난 것이 바로 한글이다.

    디지털 환경에서 한글의 놀라운 효율성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는 인류 문명사에서 가장 앞선 발명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Gettyimage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는 인류 문명사에서 가장 앞선 발명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Gettyimage

    한글을 세종대왕이 1443년에 창제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세종은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서로 통하지 못한다. 글자가 없으면 정사가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고, 백성은 고통만 겪을 뿐이다”라며 백성을 진정 위하는 마음으로 한글을 만들었다. 단순한 새 문자가 아니라 “백성이 쉽게 배우고 편히 쓰라”는 뜻이 깃든, 애민 정신이 낳은 위대한 결실이었다.



    세종은 한글을 만드는 데 단순한 모방에 머물지 않았다. 조선의 말에 없는 글자는 과감히 버리고, 조선에서 통용되는 발음을 정리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명나라의 운학(韻學)과 표준 발음 체계를 참고했다고 하지만, 자음은 발음기관의 모양과 발성 원리를 본떠 체계적으로 배열했고, 모음은 천(·), 지(ㅡ), 인(ㅣ)의 삼재(三才) 원리를 반영해 무한히 조합이 가능하도록 설계했다. 외래 음운학을 바탕으로 하되 우리말을 온전히 과학적으로 기록할 수 있는 독창적 문자 체계를 만든 것이다. 무려 13년에 걸친 작업이었다고 한다.

    2000년대 초, 일본의 난임 의사들과 여러 차례 시험관아기시술(IVF) 관련 학술 교류를 한 적이 있다. 보통은 일본 의사들의 말을 영어로 받아 적었지만, 그들이 빠르게 이야기할 때는 일본 말을 한글로 받아 적는 것이 훨씬 수월했다. 일본어는 히라가나, 가타카나, 한자를 모두 알아야 쓸 수 있지만, 받침이 많지 않은 일본말을 한글로 옮기니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요즘은 일본 청소년들이 소통할 때 한글을 사용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실제로 한일 양국의 문자 전송 속도를 비교해 보면 한글이 월등히 빠르다고 한다.

    청나라 말 정치가 위안스카이는 1882년 임오군란 때 조선에 파견되어 사태를 수습한 뒤 중국으로 돌아가서는 “조선의 글이 훌륭하다. 조선의 글을 쓰자”는 주장까지 했다고 전해진다. 1930년대 활동한 중국의 문학가 루쉰은 “한자가 존재하는 한 중국인의 문맹은 사라지지 않는다”며 복잡하고 어려운 한자 때문에 문맹률이 높고, 중국이 근대화에서 뒤처진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중국은 마오쩌둥 시대에 와서 한자 발음을 돕기 위해 알파벳을 변형해 표시하기 시작했다. 글자 획수를 줄여 간소화한 한자를 만들기도 했지만, 여전히 한자는 배우고 익히기에 너무나 어렵다.

    중국어를 배우다 보면 한글의 우수성을 더욱 절감하게 된다. 특히 스마트폰과 컴퓨터, 그리고 SNS를 하는 오늘의 한국인들은 세종대왕의 혜안을 더욱 깊이 기억해야 한다. 발음을 자음과 모음으로 나누고, 소리를 입안 구조에 맞춰 정리했기에 디지털 환경에서도 한글은 놀라운 효율성을 보인다. 문자 입력이 단순하고 직관적이어서 짧은 순간에 수많은 생각을 글자로 옮길 수 있고, 이는 곧 현대 한국 사회의 소통과 창의성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는 인류 문명사에서 가장 앞선 발명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세계는 지금 한글과 한국어의 매력을 새롭게 발견하고 있다. K-POP 무대를 통해 전 세계 젊은이들의 입술에 한국어가 오르는 지금, 한글은 더는 한국만의 문자가 아니다. BTS, 뉴진스, 블랙핑크의 무대에서 흐르는 노래는 자막 속 한글과 함께 따라 불리며, 외국 팬들은 멜로디를 좇아 발음을 흉내 내다가 어느새 글자에 익숙해진다. 음악의 리듬과 언어의 리듬이 겹치는 자리에서 한국어와 한글은 이미 세계적인 언어의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다.

    ‘락민정음(樂民正音)’으로 업그레이드할 때

    한국어와 한글은 이미 세계적인 언어의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다. Gettyimage

    한국어와 한글은 이미 세계적인 언어의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다. Gettyimage

    다만, 한국어와 한글에는 구조적으로 넘어야 할 벽이 있다. 바로 영어 발음을 한글로 온전히 담아내기 어렵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는 영어 Fighting을 ‘파이팅’이나 ‘화이팅’으로 쓰고, Boy와 Voice의 첫 자인 ‘B’ ‘V’ 발음을 모두 ‘ㅂ’으로 쓴다. Three, Thousand, Smith 같은 단어의 ‘Th’ 발음은 ‘쓰리’, ‘싸우전드’, ‘스미드’로 제각각 적는다. R과 L 역시 ‘ㄹ’ 하나로 통일해 쓴다. 처음 한글을 접하는 이들에게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훈민정음을 만든 세종대왕의 후손답게 한글의 세계화를 위해 눈을 돌려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몇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부족한 발음 표시를 보완하기 위해 몇 글자를 새로 더하자는 것이다. 이를테면 F 발음을 표시할 새로운 글자, V 발음을 표기할 글자, R과 L을 정밀하게 가르는 장치, Th 발음을 담아낼 문자를 만들자는 것이다. 세종대왕이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떠 글자를 만든 원리를 그대로 이어받아 만들자는 것이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도 ㄹ, ㅁ, ㅈ, ㅉ 같은 자음이 더해져 체계가 풍성해졌다. 지금 몇 글자를 보탠다고 해서 본래 정신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글이 세계 속에서 더 널리 쓰일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다. 세종은 백성을 위해 안으로 눈을 돌렸다면, 지금 시대는 눈을 밖으로 향해야 한다. 한글은 이미 음악을 통해 세계인의 귀와 입에 닿고 있지 않은가. 좀 더 보완해서 완성한다면 한글이 세계를 위한 문자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훈민정음 업그레이드 버전의 이름을 지어봤다. ‘락민정음(樂民正音)’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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