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호

난자 냉동은 출산 가능성 지키는 과학적 준비

[난임전문의 조정현의 생식이야기] 피라미드 미라 부장품 볍씨, 수천 년 뒤 발아 성공

  • 난임전문의 조정현

    입력2025-09-11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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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취한 난자를 동결하는 모습. Gettyimage

    채취한 난자를 동결하는 모습. Gettyimage

    “말은 죽을 때까지 새끼를 낳다가 죽는다.”

    의대 시절, 미국에서 내분비학 교수가 된 대선배가 초청 강연 중에 한 말이다. 말은 생명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생식기능이 유지된다는 뜻이다. 인간은 어떨까. 선사시대 인류의 평균수명은 고작 40세 전후였을 테니 여성은 평생 아이를 낳다가 생을 마감했을 것이고, 생식과 생명이 같은 궤도를 그리며 끝났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은 다르다.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폐경 이후의 삶이 전체 인생의 3분의 1을 훌쩍 넘기게 됐고, 평균수명 100세에 이르면 폐경 이후 기간이 전 생애의 절반에 달한다. 평균수명이 늘어난 만큼 생식능력도 자연스럽게 함께 연장될 것이라는 기대가 생겼다. 과연 그럴까.

    유감스럽게도 생식능력은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생식능력은 수명과 비례하지 않았고, 영양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훨씬 더 복잡한 생물학적 기전이 존재했다. 요즘 들어 과유불급(過猶不及), 즉 ‘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의 뜻이 새삼 피부에 와닿는다. 비만과 영양 과잉이 영양 불충분보다 더 해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늘어난 생명, 늘어나지 않는 생식능력

    수명이 길어지고, 결혼과 출산 시기도 늦어지면서 늦은 나이에 출산을 꿈꾸는 이들이 늘고 있다. 평균수명 100세 시대지만 생식세포의 시계는 그만큼 시간이 늘어나지 않았기에, 늦은 나이에 출산하려면 분명한 대책이 필요하다. 



    많은 이가 “난자의 수태능력을 보존할 방법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가장 대표적 방법은 가능한 한 젊을 때 난자를 채취해 냉동보존했다가 필요한 시점에 해동해 시험관아기시술(IVF)을 진행하는 것이다. 동결해 둔 난자를 해동한 뒤 정자와 수정시키고, 배아가 세포분열을 통해 일정 단계까지 발달하면 자궁에 이식해 착상을 유도한다. 이 방식이 현재로서는 가장 현실적 난자 보존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식물의 씨앗을 떠올려 보자. 대부분의 씨앗은 상온에서도 두꺼운 외피 속에 수분이 거의 0%에 가까운 고체 상태로 보존되며, 약간 어둡고 건조한 환경에서는 오랜 시간 안정적으로 보관될 수 있다. 실제로 피라미드에서 발굴된 미라의 부장품 안에 있던 볍씨가 수천 년이 지난 뒤에도 발아에 성공했다는 뉴스가 전해진 바 있다. 이처럼 난자를 포함한 대부분의 세포는 적절한 동결 보존 후 해동을 통해 기능을 회복할 수 있다.

    난자의 경우 영하 196℃의 액화질소에 담가 세포 내 수분을 제거하고 고체 상태로 만들어 보존하는 기술이 사용된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이러한 냉동 기술은 지금처럼 정밀하지 않았다. 많은 의사가 최신 냉동 기법을 배우기 위해 논문을 들여다보고 미국에 유학하거나 학회에 참석하던 때였다. 당시 미국 오하이오주 주립대 병원에서 연구 중이던 한 한국인 유학 의사는 미국 남부에서 열린 냉동학회에 참석했다. 유리화(vitrification·물질이 유리처럼 비결정질 고체 상태로 변하는 현상)를 전공한 저명한 교수가 강의하는 자리였다. 

    강의가 끝난 후 그는 강연장 밖에서 그 교수를 붙잡고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그런데 돌아온 답이 뜻밖이었다. “요즘 성적이 좋지 않아서 유리화 냉동 방법을 접었다”는 실토였다. 

    수정란의 세포분열 과정. Gettyimage

    수정란의 세포분열 과정. Gettyimage

    그 말을 들은 순간, 그 유학 의사는 복잡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많은 비용을 들여 미국에 연구 의사로 갔고 국내선 항공권, 학회 등록비, 호텔 체류비까지 써가며 학회에 참석했는데 뜻밖의 고백을 들었으니 얼마나 허탈했을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

    그러나 유리화 냉동 기술은 거기서 주저앉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점부터 이 기술은 전환점을 맞는다. 소의 수정란을 활용한 실험과 개선을 통해 한 단계 향상됐고, 결국 의료계에 정착하고 보편화하기에 이르렀다. 수정란의 냉매제 농도를 높이고, 난자와 배아 내 수분을 급속도로 탈수한 후 액화질소 안으로 넣어 초급속 냉각을 시행함으로써 동결 보존의 안정성이 크게 향상됐다. 

    일반적으로 세포는 작을수록 냉동·해동 후 회복률이 높다. 예컨대 정자처럼 크기가 작은 세포는 동결 보존 후 해동해도 생존율이 매우 높다. 반면 난자나 수정 직후의 초기 배아는 크기가 커서 회복률이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수정란이 세포분열을 거쳐 2세포기, 4세포기, 8세포기, 포배기를 지나 5일째 도달하는 배반포 단계는 냉동·해동 후 회복률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로 세포가 분열하며 성장해 가는 과정을 ‘배아 발달’이라 하는데, 이 발달이 순조롭게 이뤄져야만 배반포까지 도달할 수 있다.

    난자 냉동은 미래를 위한 보험

    필자의 환자 중에도 결혼 전 미리 만들어둔 자가 냉동 난자로 임신에 성공한 사례가 있다. 30대 후반에 결혼한 그녀는 IVF를 바로 시작했지만 신선 배아 이식을 다섯 차례나 시도했음에도 모두 임신에 실패했다. 당시 자궁 내에 이식된 배아는 형태상으로는 나쁘지 않았지만 수가 적고 분열 속도도 다소 느린 편이었다.

    그녀의 재도전은 자연배란 주기에 맞춘 IVF였다. 결혼 전 동결 보존한 난자를 해동해 정자와 수정시킨 뒤 배아를 만들었고, 신선 배아 1개와 냉동 난자로 만든 배아 2개, 총 3개의 배아를 자궁에 이식했다. 놀랍게도 냉동 난자에서 생성된 배아의 질이 훨씬 우수했다.

    배란포. Gettyimage

    배란포. Gettyimage

    필자의 바람대로 그녀는 임신에 성공했고, 이후 건강한 아이를 출산했다. 올해 마흔이 된 그녀는 최근 둘째 아이를 계획하며 다시 외래로 필자를 찾아왔다.

    필자가 운영하는 난임 클리닉에서는 5년 전부터 자가 난자은행을 운영하고 있다. 단순한 난자 동결 보존을 넘어 개별 상태에 맞춘 ‘질적 맞춤 동결법’을 개발해 왔다. 난자 냉동의 궁극적 목적은 임신, 나아가 출산이다. 동결 보존된 난자가 해동 후에도 높은 수정률과 임신률을 유지하려면 건강한 성숙란이 확보돼야 한다. 이를 위해 채취한 난자를 체계적으로 선별하고, 개별 상태에 맞는 보관 전략을 설계한다. 현재는 세포를 3단계로 정밀 분류한 뒤 각기 다른 체외 성숙 시간을 거쳐 냉동하고 있다.

    최근 미혼 여성들 사이에서 난자 냉동 보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난자 냉동이 더는 ‘특별한 선택’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보험’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여성의 삶이 달라졌고, 출산의 패턴도 바뀌었다. 생식세포를 관리하는 방식 또한 달라지고 있다.

    가장 생식력이 좋은 시기에 학업과 커리어로 바쁜 삶을 살아가는 여성이 자신의 난자를 동결함으로써 난자의 ‘청춘’을 붙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임신과 출산이 당장의 과제가 아니라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선택지가 됐고, 생식을 바라보는 인류의 시선도 달라지고 있다.

    이제 난자 냉동은 출산 가능성을 ‘지켜내기 위한 준비’에 가깝다. ‘지금은 준비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사랑에 빠져 결혼도 하고, 아이도 갖고 싶다’는 여성들의 그 ‘언젠가’를 가능하게 하는 과학적 준비인 것이다. 이는 생식적 선택권의 확보이자 미래를 향한 가장 정밀한 보장책일 수 있다. 

    조정현
    ‌● 연세대 의대 졸업
    ● 영동제일병원 부원장. 미즈메디 강남 원장 강남차병원 산부인과 교수
    ● 대한산부인과의사회 부회장
    ● 現 사랑아이여성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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