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호

[에세이] 소르본 길에서

  • 이은승 남서울대 관광경영학과 교수

    입력2025-07-11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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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파리 소르본대학 정문에서 바라본 전경. Gettyimage

    프랑스 파리 소르본대학 정문에서 바라본 전경. Gettyimage

    파리는 길의 도시다. 불바르(큰길·Boulevard)에는 혁명과 변화의 흔적이, 알레(골목길·allée)에는 사색과 연애의 정취가 스며 있다. 그중에서도 ‘뤼 드 라 소르본(소르본 길·Rue de la Sorbonne)’은 시간을 함께 딛는 길이다.

    소르본 길, 여정의 시작

    나는 이 소르본 길에서 청춘의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떤 날은 학교 앞 노천 분수 앞에서 친구들을 기다렸고, 또 어떤 날은 무거운 수업의 무게를 견디며 이 거리를 헤매기도 했다. 세미나와 포럼 중심의 수업은 내게 광활한 광야처럼 느껴졌다. 비판적 사고와 학문적 자유는 낯선 풍경이었고, 교수와의 토론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 속에서 나는 질문을 던지는 법을 배웠다. 

    소르본의 아침은 정적 속에서 깨어났다. 거리의 빵집에서는 버터 가득한 빵 냄새가 새어 나왔고, 학생들은 커피를 들고 조용히 건물을 오갔다. 그날의 수업 주제는 ‘주체의 형성’이었다. 교수는 “누가 나를 나라고 말하게 하는가?”라는 물음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앉아 있었다. 답을 모른다기보다 질문이 너무 낯설었기 때문이다. 이방인의 언어로, 이방인의 생각을 따라가는 일이 내겐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떤 날은 어찌할 바 몰라 강의실에서 나와 분수대 옆 벤치에 오래 앉아 있기도 했다. 묵음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나만의 언어로 조심스럽게 대답을 써가기 시작했다.

    기댈 곳 없이 표류하던 날도 있었지만, 그 길은 고비와 좌절만을 주진 않았다. 배움의 심연 속에서 나는 때때로 학문의 기쁨을 느꼈다. 소르본 길 한가운데의 작은 광장, 고요히 물을 뿜는 분수 옆에서 나는 오래 머물곤 했다. 비둘기들이 날고 앉는 그곳은 소르본대학과 맞닿아 있다. 잔잔한 풍경 속에서 학문은 추상적 개념이 아닌, 손끝에 닿는 현실로 다가왔다. 그 분수대 앞에 앉아 있던 날들이 떠오른다. 누군가는 손에 쥔 종이를 넘기며 발표를 준비했고, 또 누군가는 커피를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자리를 잡았다. 마치 작은 회의라도 열리는 듯, 우리는 자주 그곳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곤 했다. 전공과 국적을 넘나드는 목소리들은 때로 충돌했고, 때로는 서로를 비추며 변해갔다. 나는 그 속에서 프리즘처럼 굴절되는 사유의 결을 배웠다.

    지성의 거리에서

    1253년, 로베르 드 소르봉이 가난한 신학생들을 위해 세운 작은 신학 학교는 오늘날 프랑스 지성의 상징인 소르본대학의 시초가 됐다. 이 도시에선 길 위에서도 토론이 이어진다. 카페테라스의 커피잔 사이로 철학, 정치, 그리고 삶의 사소한 문제까지 이야기가 흐른다. 목소리는 낮고, 대화는 길다. 파리에서는 이런 풍경이 낯설지 않다. 프랑스혁명도 궁전이 아닌 거리와 광장에서 시작됐으니 말이다.



    18세기 파리는 단지 도시가 아니라 사유의 무대였다. 프랑스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루이-세바스티앵 메르시에는 자신의 저서 ‘파리의 풍경’에서 카페와 광장, 서점과 서재가 하나의 대화 공간으로 작동한다고 묘사했다. 그는 파리를 ‘말하는 도시’라 불렀고, 그 안에서 철학은 삶의 습관이자 저항의 언어가 됐다. 사유는 왕궁보다 골목에서 더 자주 발견됐고, 가장 예리한 문장은 종종 테이블 끝의 담배 연기 사이에서 탄생했다. 

    이 좁은 거리 위를 데카르트, 볼테르, 루소가 걸었다. 그들이 남긴 사유의 흔적은 지금도 거리의 공기 속에 은은하게 감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로 존재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졌고, 그 물음은 오늘도 나를 흔든다. 볼테르는 자유를 외쳤으며, 그 외침은 시대를 넘어 여전히 울리고 있다. 루소는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다시 묻기 시작했다. 그들의 질문은 단지 학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살아가고 더 나은 사회를 가능케 하려는 고뇌였다. 

    그들의 문장을 처음 마주했을 때, 나는 흔들렸다. 데카르트의 문장은 날카로웠고, 볼테르의 문장은 불편했다. 루소의 문장은 낯설었다. 하지만 그 낯섦은 나를 방관하지 않았다. ‘나는 정말 생각하고 있는가’ ‘나는 자유로운가’ ‘나는 나로 살아가고 있는가’ 같은 질문이 내 안에서 일었다. 강의실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텍스트를 따라갔지만, 거리에서는 그 문장들이 가만히 길을 잃게 만들었다. 

    어느 날은 카페 창가에 앉아 있다가 루소의 말을 되뇌었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다.” 그 말이 그날따라 유난히 내 삶에 닿았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 ‘묶여’ 있었는가. 내가 원한 삶이었는가, 아니면 주어진 궤도를 무의식적으로 따라온 결과였는가. 그 사유는 강의실 밖에서도 이어졌다. 

    소르본은 단순한 대학이 아니다. 지성의 요람이자 혁명과 변화의 심장이다. 이곳에서 피어난 사유와 성찰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초석이 됐다. 소르본대학교 ‘명예의 뜰(Cour d’Honneur)’에는 두 개의 상징적 조각상이 있다. 왼쪽에는 ‘레 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가, 오른쪽에는 미생물학의 선구자 루이 파스퇴르가 있다.

    위고의 동상은 단호하면서도 사색적 표정으로 인간 존엄과 정의를 말하고, 파스퇴르의 조각상은 실험 도구를 손에 든 채 과학과 인류애의 결합을 상징한다. 이 두 사람은 문학과 과학, 사유와 실천이 만나는 프랑스 지성의 이상을 보여준다. 소르본의 한 강의실은 시간의 층위를 그대로 품고 있다. 고풍스러운 나무 책상과 초상화들 사이, 데카르트와 볼테르, 루소가 여전히 젊은 학도들을 지켜보고 있다. 나는 강의가 끝난 후에도 그 방에 남아, 초상들을 바라보곤 했다. 그들의 시선은 조용히 말한다. “여기서의 생각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 길에 다시 서며

    어느 겨울날, 나는 특별한 목적 없이 소르본 길을 걷고 있었다. 구름은 낮게 드리워 있었고, 젖은 돌길을 조심스레 걷던 나는 차가운 벽에 손끝을 스쳐봤다. 문득 감동이 밀려왔다. 이것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었다. 여전히 나를 흔드는 생각의 잔향이었다.

    소르본대학 명예의 뜰을 지나, 다시 조용히 소르본 길의 돌길 위에 선다. 건물 벽은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바랬지만, 이 길만큼은 여전히 그들의 발자취를 간직하고 있다. 잿빛 석조건물 사이로 노란 햇빛이 스며들고, 창가마다 붉은 커튼이 바람에 흔들린다.

    가게 유리창에는 손으로 쓴 오늘의 메뉴가 붙어 있고, 그 너머에는 고서와 낡은 연극 포스터가 층층이 쌓여 있다. 거리의 소리는 날카롭지 않고, 도시의 심장처럼 조용히 뛴다. 학생들이 지나가고, 누군가는 벽에 기대 담배를 피운다.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이곳은 단지 도시의 한 구역이 아니다. 내게는 풍경이자 기억이자 지식의 공간이다. 과거와 현재가 한 장면처럼 겹친다.

    바람이 불어온다. 카페테라스의 나뭇잎이 작게 흔들리고, 맞은편 창틀 위의 작은 국기가 느릿하게 펄럭인다. 석조건물의 회색 벽, 아이보리빛 햇살, 유리창에 비친 내 그림자까지 모든 것이 고요한 순간처럼 멈춰 있다. 

    파리의 겨울 햇빛이 좋았다. 금세 사라지는 그 빛 속에서 나는 회상한다. 

    익숙한 돌길을 지나, 이제는 낯선 골목의 풍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소르본에서 시작된 여정은, 또 다른 이야기를 향해 서서히 발길을 돌린다. 그리고 문득, 다른 골목에 접어든다. 고개를 든다. 오래된 지붕 너머로 구름이 흘러간다. 그 고요한 틈 사이, 다시 걷는다. 나의 보폭으로. 

    이은승
    ● 1970년 서울 출생
    ● 2002년 프랑스 소르본누벨대 문화관광박사
    ● 現 남서울대 관광경영학과 교수
    ● 국가기록위원으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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