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호

[신동아 만평 ‘안마봉’] 2025년 네팔 전국에 부는 개혁 바람

  • 황승경 문화칼럼니스트·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입력2025-09-22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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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승혜

    ⓒ정승혜

    네팔 Z세대의 대규모 시위가 폭동으로 번지며 군 병력이 출동하는 등 네팔 전국에서 걷잡을 수 없는 소요 사태가 발생했다. 사건 초기, 히말라야산맥의 ‘조용한 나라’ 네팔에서 일어난 일이 맞는지 세계는 고개를 갸웃했다. 

    소셜미디어(SNS) 접속 차단과 부정부패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면서 대통령 관저와 국회의사당, 정치인들의 집이 불탔고, 일부 정치인들은 발길질을 당하고 뭇매를 맞으며 성난 국민들의 분노를 고스란히 몸으로 겪어야 했다. 

    이번 시위는 9월 5일 네팔 정부가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엑스(X·옛 트위터) 등 당국에 등록하지 않은 26개 SNS 접속을 차단하면서 촉발됐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젊은 세대의 오래된 좌절과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하면서 전국적 시위로 번졌다. 

    우선, 정부는 디지털 세대의 자유 공간인 SNS를 차단하면서 그들의 유일한 숨통을 끊어버렸다. 인구 2961만 명 중 90%가 인터넷을 사용하는 나라에서 국민의 의사소통이 막혔고, 해외에 사는 270만 명의 가족·지인들과 소통도 차단됐다. 현실의 고민을 나누고 불의에 공감하며 연대의 도구였던 SNS의 차단은 젊은 세대는 물론이고 SNS로 물건을 사고팔거나 가게 홍보를 하는 자영업자들에게도 분노와 좌절을 안겼다. 

    여기에 권력자가 친인척에게 특혜를 주는 ‘네포티즘(Nepotism)’으로 사치를 누린 권력층 자제들(네포 키즈)은 ‘딴 나라’ 사람이었다. 명품으로 치장하고 프랑스 파리 에펠탑을 배경으로 고급 와인을 마시는 이들의 사치와 서민들의 생활고를 대조하는 영상이 확산하며 네팔 국민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부패한 정치와 자국의 경제 침체를 바라보는 청년들의 미래도 불안했다.



    네팔 총리는 사임하고 SNS 폐쇄도 해제됐지만 부정부패를 근절하지 못하고, 청년들에게 공정한 기회와 언론·표현의 자유를 보장하지 못하면 ‘네팔의 불길’은 다시 세계 어느 나라로든 번질 수 있다.


    1933년
    조선 전국에 부는 모진 바람

    -‘신동아’ 1933년 2월호

    -‘신동아’ 1933년 2월호

    ‘신동아’ 1933년 2월호에는 만평 하나가 실렸다. 폐쇄령을 받은 강습소와 문을 닫은 학원이 즐비한 현실을 풍자한 그림이었다. 실제 ‘동아일보’ 지면에는 1930년 무렵부터 전국 각지의 학원과 야학이 속속 폐쇄되고 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1920년대 초·중반까지 민간이 세운 야학과 강습소는 민중의 열망 속에 급증했지만, 1925년 이후 일제의 탄압과 관제화 정책으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총독부가 독립운동의 불씨가 될 수 있는 자율 야학·사설 강습소를 ‘무인가 시설’로 분류해 본격 정리·폐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강습소는 가난한 아이들이 저렴한 비용으로 글을 배우고 기술을 익히던 최소한의 배움터였다. 강습소가 사라지자 교육을 향한 민중의 열망은 갈 길을 잃었다. 총독부의 통제를 받는 보통학교와 고등보통학교에서는 황국신민화 교육이 가능했지만, 민간이 자발적으로 세운 강습소와 야학은 언제든 독립의 의지를 키울 수 있다는 이유로 더욱 엄격히 단속됐다. ‘배움을 억누르는 것’ 자체가 식민 통치의 수단이었다. 이는 단순한 학제 운영 문제가 아니라, 조선 사회의 계층 이동과 민족적 자립을 봉쇄하려는 총체적 전략이었다.

    ‘집주인이 학교 폐쇄, 200여 아동 방황’이란 제목으로 보도한 ‘동아일보’ 1933년 1월 31일 석간 2면. 신문은 현장 취재와 사진, 집주인과 교장 인터뷰를 통해 상세히 다뤘다. 

    ‘집주인이 학교 폐쇄, 200여 아동 방황’이란 제목으로 보도한 ‘동아일보’ 1933년 1월 31일 석간 2면. 신문은 현장 취재와 사진, 집주인과 교장 인터뷰를 통해 상세히 다뤘다. 

    여기에 더해, 제도적 억압과는 다른 차원의 이유로 학교가 무너지는 경우도 있었다. 1933년 1월 31일자 ‘동아일보’는 개교 11주년을 맞은 ‘보광학교’ 사례를 다뤘다. 서울 종로4가에 있던 이 사립학교는 가난한 아이들이 글을 배우던 민중 교육 공간이었다. 1923년 조선소년회가 중구 다동에 마련한 작은 야학에서 출발해 1932년에는 상공학원과 합쳐 200여 명 학생을 둔 규모로 성장했다. 당시 중등 이상의 실업교육은 일본인 위주로 허용됐기 때문에, 민족계 인사들이 세운 이러한 사립 실업학교는 상업·공업 지식을 가르치면서 가난한 학생들에게 자립의 길을 열어줬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청소년을 위한 야학 형태로도 운영되며 사회적 수요를 충족시키는 교육기관이었던 것이다. 

    재정난에 봉착한 보광학교는 민가를 빌려 수업을 이어갔다. 1월 엄동설한의 어느 날, 집을 매각한 집주인이 교실을 자물쇠로 잠가 학교를 폐쇄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겨울방학을 마치고 돌아온 학생 200여 명은 발만 동동 구르며 수업을 기다렸다. 집주인은 매수자의 요구로 집을 비워줄 것을 수차례 통보했다고 했고, 보광학교 교장은 언론에 사과하며 “새 교실을 구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 호소했다. 그러나 아이들의 학업은 좌절의 문턱에 닫혀 있었다. 

    이 사건은 교육의 기회는 개인의 노력과 열망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잘 보여준다. 학교는 본질적으로 사회적 기반 시설이자 공적 자원 문제였으나, 식민지 조선에서 교육의 기회는 언제든 흔들릴 수 있는 불안정한 토대 위에 있었다.

    1930년대 조선인 아동의 보통학교 취학률은 40% 남짓, 고등보통학교 진학률은 2~3%에 불과했다. 반면 일본인 아동의 취학률은 거의 100%였다(조선총독부 통계연보 1935). 제도권 학교에 들어간 조선인 소수 아동은 제국에 충성할 것을 강요받았고, 다수는 아예 교육의 기회조차 빼앗겼다. 이는 식민 권력이 교육을 통해 어떻게 체계적으로 양극화를 재생산했는지를 보여준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교육의 보편성은 그렇게 늦고 좁게, 수많은 좌절과 억압을 뚫고서야 비로소 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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