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호

청계천 복원 20주년, 물의 도시 서울 탄생기

[Interview] 박현욱 초대 청계천문화관장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입력2025-10-01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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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00년 서울을 품은 작지만 큰 하천

    • 32개 물길, 97개 다리 한양은 물의 도시였다

    • 세종과 집현전의 개천 논쟁, 풍수냐 백성이냐

    • 일제가 주도한 근대화, 사라진 물길과 ‘탁계천’

    • 청계천과 지천은 강북의 푸른 생명선

    • 도심 곳곳에 물이 흐르는 서울 꿈꾸다

    박현욱 초대 청계천문화관장. 청계천박물관 한양의 옛 물길 지도 위에서 포즈를 취했다. 조영철 기자

    박현욱 초대 청계천문화관장. 청계천박물관 한양의 옛 물길 지도 위에서 포즈를 취했다. 조영철 기자

    세종 26년(1444) 11월 개천의 용도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다. 집현전 수찬 이현로가 풍수설을 내세워 “개천(開川) 물에는 더럽고 냄새나는 물건을 버리지 못하도록 금지하여 물이 늘 깨끗하도록 해야 하겠나이다”라고 건의하자, 영의정 황희를 비롯해 우의정 신개, 좌찬성 하연, 우찬성 황보인, 예조판서 김종서 등 대부분의 조정 신료가 찬성했다. 다만 좌참찬 권제가 풍수설을 따르면 백성들의 불편을 초래하고 실제 효과성이 의문스럽다고 반대하면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같은 해 12월 이번엔 집현전 교리 어효첨이 풍수설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도읍의 땅에서 사람들이 번성하게 사는지라, 번성하게 살면 더럽고 냄새나는 것이 쌓이게 되므로 반드시 소통할 개천과 넓은 시내가 그 사이에 종횡으로 트이어 더러운 것을 흘려내어야 도읍이 깨끗하게 될 것이니, 그 물은 맑을 수가 없습니다.”(세종실록)

    개천을 명당수로 유지하자는 이상론과 도시의 하수도로 활용하자는 현실론 사이에서, 세종은 “어효첨의 논설이 정직하다”며 현실론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후 개천의 기능은 도심의 생활하천으로 결정됐다. 이 개천이 바로 청계천이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개천의 용도를 놓고 어전회의에서 논쟁이 벌어졌고, 한 번도 아니고 여러 차례 논의가 있었으며, 다수의 신료가 풍수설을 앞세워 이상론에 치우쳤으나 세종은 현실론, 즉 백성의 편의를 우선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청계천은 그만큼 도성 사람들의 삶과 밀착된 하천이었다.

    “그 물은 맑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청계천에 맑은 물이 흐르는 것을 마다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다들 이현로 편을 들잖아요. 그러나 당장 백성들이 겪을 고충을 생각하면 국왕으로서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없었던 겁니다. 만약 세종이 이현로의 손을 들어주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실록에서 이현로는 군사를 동원해 각 집을 나눠 맡아 개천에 오물을 버리지 못하도록 감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개천의 물이 맑으려면 그곳으로 흘러드는 수많은 지천까지 감시해야 합니다. 백성들은 감시가 소홀한 야밤에 몰래 오물을 버릴 것이고 지키고 있던 군사들은 이들을 잡아 옥에 가둔 뒤 한 번은 개도하고 두 번은 곤장을 치고 세 번은 목을 치든가 엄벌을 내렸을 겁니다. 그랬다면 역사에서 세종은 성군이 아니라 폭군으로 기억됐겠죠.”



    박현욱 초대 청계천문화관장(2005년 9월 26일 서울역사박물관 분관 청계천문화관으로 개관해 2015년 청계천박물관으로 개칭)은 ‘세종실록’에서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청계천복원추진본부에서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2002년 10월 1일 청계천복원추진본부에 합류한 뒤 2005년 10월 1일 ‘새물맞이’ 완공식이 열리기까지 3년 동안 겪었던 수많은 논쟁과 선택의 순간이 600년 전 세종의 고뇌가 겹치기 때문이다. 

    “서울역사박물관 건립과 개관(2002년 5월 21일) 작업을 마치고 막 숨을 돌리던 참에 청계천 복원이 결정됐죠. 청계천은 서울이라는 도시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적 장소이기에 저는 향후 서울역사박물관 전시기획을 염두에 두고 청계천 관련 뉴스들을 빠짐없이 스크랩하고 있었죠. 그 무렵 최동윤 청계천복원총괄담당관으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연락이 왔어요. 처음엔 청계천 전문가도 아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싶어 거절했는데 문득 ‘내 평생 언제 이런 역사적 현장에 뛰어들어 보겠나’ 싶더라고요. 청계천은 단순히 도시시설이 아니라 서울이라는 수도가 탄생하면서부터 같이해 온 역사적 장소니까요. 2002년 7월 1일 서울시 산하 청계천복원추진본부가 출범하고 3개월 뒤 역사문화팀에 합류했습니다.”

    청계천 복원에 대한 뜨거운 관심만큼 논쟁도 치열했다. 철거와 복원과 발굴이 거의 동시다발로 진행되다 보니 한쪽에서는 “역사문화 복원이 아니라 역사문화 파괴”라는 따가운 질책이 쏟아졌다. 

    “청계천 역사문화 복원과 관련해 3년 동안 회의가 무려 48번이나 열렸어요. 그중 35번은 문화재위원들과 회의였고, 13번은 청계천시민위원회 회의였죠. 그 외에도 문화재청장(현 국가유산청장) 등 고위공직자들이 수차례 현장을 찾아왔어요. 전례 없는 일이었죠.”

    2003년 12월 복원 공사가 시작된 지 5개월여 만에 청계천을 덮고 있던 콘크리트를 걷어내자 모습을 드러낸 물길. 사진 동아일보

    2003년 12월 복원 공사가 시작된 지 5개월여 만에 청계천을 덮고 있던 콘크리트를 걷어내자 모습을 드러낸 물길. 사진 동아일보

    1910년 종로~남대문 간 전차선로 복선화 공사로 자취를 감췄던 광통교가 2005년 청계천 복원과 함께 95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진 동아일보

    1910년 종로~남대문 간 전차선로 복선화 공사로 자취를 감췄던 광통교가 2005년 청계천 복원과 함께 95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진 동아일보

    복원의 딜레마, 명분론과 현실론 사이에서

    청계천 복원의 명분은 생태환경과 역사문화 복원이었다. 쉽게 말해 오염된 하천에 맑은 물이 흐르도록 생태계를 복원하는 것이 생태환경 복원이라면, 콘크리트 덮개 아래로 사라진 광통교를 찾아내고 장충단으로 옮겨간 수표교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처럼 청계천과 주변의 역사를 발굴하는 것이 역사문화 복원이었다. 거기에는 1950~60년대 서울의 대표적 슬럼가였던 청계천 무허가 판자촌과 철거 문제, 복개 이후 청계로를 중심으로 펼쳐진 노동운동의 역사도 포함됐다. 

    그러나 막상 고가도로를 철거하고 반세기 가까이 덮였던 청계천을 열고 보니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명분론의 당위성과 현실론의 불가피성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부터도 환영받기 어려운 중립적 답을 찾아내는 것이 역사문화 복원 실무자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광통교는 조선 초 도성 건설 때 놓인 오래된 다리로 경복궁에서 숭례문 방향 남북대로를 연결하는 중심 통로였습니다. 도성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왕래하던 다리인 만큼 여러 차례 개축하면서 길이보다 폭이 넓은 다리가 됐어요. 하지만 1910년 광통교 위에 1m가량 콘크리트를 붓고 전차선로를 설치하면서 광통교는 도로 밑에 묻혀버렸습니다. 복원 공사 때 콘크리트를 걷어내니 교각이나 상판석이 훼손되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어 환호했죠. 문제는 다리 길이였어요. 광통교 길이는 12m가 조금 넘는데 그 사이 하천 폭은 20m로 훨씬 넓어진 거죠. 청계천은 ‘200년 빈도 홍수’에 견딜 수 있게끔 설계된 하천이거든요. 결국 다리를 복원해도 제 기능을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원위치에서 상류로 150m 정도 옮기는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광통교와 함께 청계천을 대표하는 다리였던 수표교의 복원은 또 다른 고민을 안겼다. 세종 때 놓인 이 다리는 개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 다리 서쪽에 눈금이 새겨진 수표석을 세운 뒤 수표교로 불렸고, 1958년 청계천 복개 때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다. 

    “수표교는 오랜 세월 풍화돼 만지면 부서질 정도였어요. 돌 하나하나 정밀검사를 해보니 해체해서 옮기는 순간 그 충격으로 70%가량을 사용할 수 없다는 진단이 나왔죠. 70% 교체를 감수하더라도 원래 자리로 옮기는 것이 맞는지 장충단공원에 그대로 보존할 것인지 논쟁이 있었죠.”

    일부 시민단체 인사는 돌을 다 교체하더라도 제자리에 있어야 진정한 복원이라고 주장했지만 박 관장은 “석가탑, 다보탑도 새 돌로 싹 바꾸고 모양만 비슷하면 그것도 문화재냐”며 반대했다. 

    박현욱 초대 청계천문화관장. 조영철 기자

    박현욱 초대 청계천문화관장. 조영철 기자

    개천, 대천, 청개천, 청계천, 탁계천

    “‘여지승람’에 이르기를 백악(북악), 인왕, 목멱산(남산)의 여러 물이 합하여 동쪽으로 흐르며, 도성 중심을 가로질러 세 개의 수문으로 빠져나가 중량포로 들어간다. 우리나라는 강물이 모두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나 한양의 개천은 동쪽으로 흐르므로 수세(水勢)가 정도(正道)를 얻었다.”

    조선 후기 유본예가 쓴 ‘한경지략’에 나오는 도성 안 큰 물길, 즉 개천에 대한 기록이다. 길게는 약 11㎞(백운동천 발원지에서 중랑천 합류부까지), 짧게는 8.12㎞(청계광장에서 중랑천 합류까지)의 이 하천은 중랑천과 만난 뒤 남행하고, 다시 서쪽으로 흐르는 한강과 합류한다. 개천과 한강이 만나는 형상이 마치 태극과 같아서 옛사람들은 한양이 개천으로 인해 명당 자격을 제대로 갖췄다고 여겼다고 한다. 

    이 명당수를 중심으로 사람들은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광통교 북쪽 상류 지역을 웃대(상촌), 광통교에서 종묘 앞 효경교에 이르는 개천 양안 지역을 중촌, 효경교에서 오간수문(청계천 물이 도성 동쪽 밖으로 빠져나가는 수문)에 이르는 하류 지역을 아랫대(하촌), 백악산 남쪽 기슭을 북촌, 목멱산 북쪽 기슭을 남촌, 낙산 서쪽 기슭을 동촌, 서대문과 서소문 사이를 서촌(경복궁 옆 서촌과는 별개)이라고 불렀다. “북촌은 노론, 남촌은 소론”이라 할 만큼 촌마다 사는 사람도 사는 모습도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오늘날 개천의 사전적 의미는 ‘시내보다는 크지만 강보다는 작은 물줄기’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개천은 ‘도랑을 파는’ 일종의 토목공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천(川) 대신 도랑을 뜻하는 거(渠)를 써서 ‘개거’라고도 했다. 한양은 북쪽 백악산, 서쪽 인왕산, 남쪽 목멱산, 동쪽 타락산(낙산) 등 내사산(內四山)이 빙 둘러싸고 있는 분지형 도시였다. 주변 산과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작은 물길이 모두 도성 한가운데로 모여들었다. 이처럼 청계천으로 합류하는 수많은 지천과 구분하기 위해 개천 본류를 ‘대천(大川)’이라 부르기도 했다. 

    청계천은 평상시에는 대부분 말라 있는 건천이지만 큰비가 오면 천변 저지대는 물난리를 피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역대 조선의 왕들은 청계천 바닥을 파고 물길을 넓히고 양안에 축대를 쌓는 치수에 매달렸다. 태종은 즉위 후 잦은 물난리를 겪자 한양의 개천을 정비하는 ‘개거도감’(‘개천도감’으로 변경)을 설치했다. 오죽하면 태종이 “천을 파내는(開川) 일을 이미 마쳤으니 내 마음이 평안하다”고 했을까. 이후 개천은 배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파낸 하천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였다가 청계천이라는 특정 하천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굳어졌다. 

    청계천(淸溪川)이라는 명칭의 유래와 관련해, 영조가 청계천 준설공사를 독려하면서 직접 쓴 ‘어제준천명병소서(御製濬川銘幷小序)’에 청개천(淸開川)이 등장한 데서 나왔다는 견해가 있고, 일제가 조선의 하천 명칭 정리 작업을 하면서 상류인 청풍계(인왕산 부근에서 발원해 경기상고 부근에서 백운동천 물길과 합류)의 ‘청’과 ‘계’를 따서 청계천이 됐다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청계천이라는 명칭이 일반화된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그러나 ‘맑은 계곡물’이라는 이름과 달리 인구 증가로 늘어난 생활하수뿐만 아니라 천변 주변 공장에서 배출하는 산업폐기물로 인해 청계천의 수질이 급격히 나빠지면서 ‘탁계천(濁溪川)’이 됐고, 전염병의 온상으로 지목되면서 ‘도시의 암종’이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유지보수냐 철거 복원이냐 선택의 기로에서 

    일제 식민 정부는 처음부터 청계천과 실핏줄처럼 연결된 물길(지천, 세천)들을 하천이 아닌 하수도로 취급해 암거화(暗渠化)로 눈앞의 불결함을 감추는 데 치중했다. 1918년부터 1943년까지 4차례 실시된 하수도개수사업의 결과, 청계천으로 흘러들던 물길 대부분이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1920년대 이후 식민 정부는 수시로 청계천 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택지를 조성하겠다, 자동차 전용도로를 만들겠다, 고가철도를 건설하겠다, 위로는 전차 아래로는 지하철을 부설하겠다 등 수많은 청사진이 나왔지만 1937년 태평로에서 무교동 구간을 복개하는 데 그쳤다. 

    광복 이후 혼란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월남민까지 천변으로 몰려들자 청계천의 슬럼화는 더욱 심화했다. 더는 방치할 수 없었던 서울시는 1955년 광통교 상류 135.8m 구간을 복개했고, 1958년부터 청계천 전면 복개 공사에 착수했다. 1961년 광통교에서 동대문 오간수교까지, 1967년 신설동까지, 1977년 신답철교까지 청계천 전 구간이 복개됐다. 

    동시에 청계로에 교각을 세우고 자동차 전용 ‘하늘길’을 만드는 사업도 추진됐다. 1967년 착공해 1971년 완공된 삼일고가도로(1984년 청계고가도로로 개칭)는 대한민국 근대화의 상징으로 모든 정부 홍보물 표지를 장식했다. 하지만 이 첨단 고가도로는 개통과 동시에 노후화를 걱정해야 했다. 완공 20년도 안 돼 도심의 애물단지가 됐다. 

    “1960년대는 기술력도 경제력도 부족했고, 무엇보다 교통수요 예측이 빗나갔습니다. 청계고가도로 완공 당시 하루 1만5000여 대를 소화할 수 있다고 자랑했는데 철거 직전엔 하루 통행량이 16만 대에 달했으니까요. 해마다 부분보수, 전면보강 공사를 반복했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죠. 2000년대 초 구조안전성 정밀진단에서 대대적 전면 보수공사가 불가피하며 1000억 원의 예산이 든다는 결과가 나오자 차라리 고가도로를 철거하고 청계천을 복원하자는 주장에 힘이 실리기 시작합니다.”

    노수홍 연세대 교수와 소설가 박경리 선생을 중심으로 ‘청계천살리기연구회’가 꾸려지면서 꾸준히 제기되던 청계천 복원은 2002년 연구회가 주최한 심포지엄에 참석한 이명박 서울시장 후보가 자신의 공약으로 내걸면서 급물살을 탔다. 유지보수냐 철거 복원이냐 선택의 기로에서 엄청난 교통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복원하자는 여론이 우세했고, 시민들의 뜻은 서울시장 선거 결과로 확인됐다. 

    1969년 착공해 1971년 완공된 삼일고가도로(1984년 청계고가도로로 변경)는 청계천을 복개한 위에 세워진 하늘길로 산업화의 상징이었다. 사진 동아일보

    1969년 착공해 1971년 완공된 삼일고가도로(1984년 청계고가도로로 변경)는 청계천을 복개한 위에 세워진 하늘길로 산업화의 상징이었다. 사진 동아일보

    당신은 지금 물길 위를 걷고 있습니다

    반세기 만에 모습을 드러낼 청계천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예상치 못한 파장을 가져왔다. 청계천추진본부로 기자와 시민들의 문의 전화가 쇄도한 것. 당연히 응답은 역사문화팀의 몫이었다.

    “청계천의 다리는 몇 개인가. 발원지는 어디인가. 하랑교인가 하량교인가. 하랑교와 신교는 같은 다리인가 다른 다리인가. 온갖 질문이 쏟아지는데 정작 아는 게 별로 없었어요. ‘연락처를 남겨주시면 확인 후 답변 드리겠습니다’라고 한 뒤 부랴부랴 옛 지도와 문헌들을 찾아보기 시작했죠.”

    그때부터 박 관장은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준천사실’ ‘한경지략’ ‘대동지지’ ‘동국여지비고’ 등 문헌에 기록된 옛 물길과 다리의 현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도성대지도’ ‘한양도성도’ ‘도성지도’ ‘수선총도’ 등 고지도를 보며 물길의 흐름과 다리의 위치를 확인했다. 일제강점기 이후 변화된 물길은 ‘경성부시가도’ ‘경성시가도’ ‘서울특별시정도’ 등을 통해 그 흔적을 추적했다. 

    조선시대 한양의 길들은 기본적으로 물길의 방향을 따라 생겼고, 작은 길들은 자연적 물길의 형태를 그대로 따르다 보니 부채꼴 또는 삼각형 땅을 만들기도 했다. 예를 들어 광교사거리에서 청계천 남쪽 남대문로 오른쪽에 직삼각형에 가까운 지형이 있다. 삼각형의 빗변에 해당하는 길(남대문로 10길)이 과거엔 남산에서 발원한 물이 합류해 옛 수표교 방향으로 흘러가는 중요한 물길이었다. 이곳은 현재 중구 삼각동이라는 법정동으로 남아 있다. 박 관장은 도시화 과정에서 완전히 맥이 끊겨버린 물길도 있었지만 많은 물길이 대로의 한 부분이나 좁은 골목길의 형태로 도심 곳곳에 남아 있음을 확인했다.

    2002년 당시 청계천복원추진본부는 중구 예장동 남산 자락에 있었다. 하랑교(세운상가 서쪽)에 대해 찾다 보니 청계천의 지천인 주자동천의 발원지가 바로 본부 근처였다. 현 서울시소방재난본부 뒤편에서 발원한 물이 남산스퀘어(옛 극동빌딩) 동쪽으로 흘러 하랑교 부근에서 청계천과 합류했다. 조선시대 활자를 주조하던 관청인 주자소(충무로역 5번 출구 옛 극동빌딩)가 있어서 주자동, 주자동 동쪽을 지나는 물길은 주자동천, 물을 건너기 위해 만든 다리 이름이 주자동교였다. 물길은 지도상에서 사라졌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 물길 위를 걷고 있었던 것이다. 

    본부에서는 문화재보호법에 따른 지표조사와 발굴 보고 등 행정 업무 위주였지만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로서 학술적 부분도 간과할 수 없었다. 박 관장은 공사 현장을 오갈 때마다 일부러 옛 물길을 찾아 걸었다. 주자동천을 따라 내려갔다가 필동천을 따라 돌아오고, 다음엔 생민동천(남산 아래 생민동에서 발원해 필동천과 합류)을 따라가는 식으로 추진본부에서 근무한 3년 20일 동안 지도 위에서 사라진 청계천의 물길을 전부 걸었다. 그렇게 물길을 잇고 옛 다리의 위치를 찾아 하나씩 점을 찍어나갔다. 

    2003년 청계천(청계광장~모전교~광통교 구간) 야외도서관에서 가을을 즐기는 시민들. 사진 동아일보

    2003년 청계천(청계광장~모전교~광통교 구간) 야외도서관에서 가을을 즐기는 시민들. 사진 동아일보

    지난 여름 20년 만에 개방된 청계천 상류 구간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어린이들. 사진 동아일보

    지난 여름 20년 만에 개방된 청계천 상류 구간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어린이들. 사진 동아일보

    아름답고 생명력 넘치는 도시, 상상은 현실이 된다 

    도성 안에서 청계천으로 흘러드는 물길은 24개. 백운동천, 옥류동천, 사직동천, 삼청동천, 대은암천, 안국동천, 회동·제생동천, 금위영천, 북영천, 경복궁·경희궁 내수, 창경궁옥류천, 성균관흥덕동천, 정릉동천, 창동천, 회현동천, 남산동천, 이전동천, 주자동천, 필동천, 생민동천, 묵사동천, 쌍이문동천, 남소문동천. 이들이 모두 합류하는 청계천과 과거엔 도성 밖이었지만 지금은 서울에 포함된 물길 7개(중랑천, 홍제천, 무악천, 동활인서천, 석곶천, 안암천, 영미정동천)까지 지도 위에 그리고 보니 32개 하천, 97개 다리가 완성됐다. 100년 전 도시 곳곳에 푸른 생명선처럼 뻗어 있던 크고 작은 물길과 다리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복원 공사가 마무리될 즈음 시민들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정리해 둔 원고가 책 한 권 분량이었다. 2006년 청계천 복원 1주년을 맞아 ‘서울의 옛물길 옛다리’라는 책을 출간하며 그는 미완의 청계천 복원에 대한 아쉬움을 이렇게 남겼다. 

    “2002년부터 시작된 청계천 복원사업은 청계천뿐만 아니라 청계천으로 흘러드는 많은 다른 물길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일부에서는 청계천 복원과 함께 상류의 지천들도 복원하자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변화된 도시 환경을 고려할 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청계천 복원을 계기로 그러한 노력은 계속돼야 할 것이다. 몇몇 복원 가능한 물길만이라도 살아난다면 서울은 훨씬 더 아름답고 생명력 넘치는 도시가 될 것이다.”

    쉽지 않다고 말했지만 일부는 현실이 됐다. 20년 전 그는 인왕산 자락 종로구 수성동 안평대군의 옛 집터에 있었던 ‘기린교’에 대해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없다고 썼다. 그러나 2009년 수성동 계곡에 있던 옥인아파트를 철거하고 공원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기린교의 존재가 확인돼 서울시기념물31호로 지정됐다. 삼청동천도 청진동 일대 재개발사업을 계기로 2011년 일부 구간이 중학천이라는 이름으로 복원됐다. 교보생명 뒤편에서 동아일보사 동쪽 골목을 지나 모전교 상류에서 청계천에 합류하는 물길이다. 

    가장 극적인 것은 2008년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이간수문을 발굴한 것이다. 한양도성 축조 시 건설된 것으로 추정하는 이간수문은 장충단공원 부근에서 발원한 남소문동천이 도성 밖으로 빠져나가는 수문이었다. 2006년 박 관장은 “일제강점기 동대문운동장이 들어서면서 이간수문의 위치를 정확하게 찾을 수 없으나 현대 동대문운동장 축구장과 덕운시장 사이쯤 있었지 않았을까 추정된다”고 했지만, 2025년 현재 동대문운동장은 사라지고 이간수문의 홍예문은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내에 남아 있다.

    남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도성 밖으로 빠져나가는 수문이었던 이간수문과 성곽 일부. 2008년 동대문운동장 철거 과정에서 발견돼 현재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안에 있다. 사진 동아일보

    남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도성 밖으로 빠져나가는 수문이었던 이간수문과 성곽 일부. 2008년 동대문운동장 철거 과정에서 발견돼 현재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안에 있다. 사진 동아일보

    쉬리와 명당수

    청계천에 쉬리가 나타났다. 지난 5월 서울시설공단은 국립중앙과학관과 함께 청계천에 사는 어류종을 조사한 결과, 2급수 이상의 깨끗한 물에서만 서식하는 민물고기인 쉬리가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쉬리의 등장은 복원 20년 만에 청계천이 명실상부한 ‘맑은 물’로 돌아왔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이 ‘맑은 물’의 정체는 매일 자양취수장에서 퍼 올린 한강물 9만t(최대 12만 t)과 인근 지하철에서 유입되는 지하수 2만t이다. 

    “청계천 복원에서 가장 큰 논란은 자연하천이냐 인공하천이냐였습니다. 환경론자들은 각 지류에서 물이 흘러들어 자연적으로 흐르도록 해야 진정한 복원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이상론에 불과해요. 청계천은 건기와 우기의 유량 차가 너무 커서 자연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한 하천입니다. 자연 상태로 두자는 것은 방치지 관리가 아니에요. 조선시대 세종은 지류의 물이 개천 본류로 한꺼번에 흘러들어 홍수가 나는 것을 막기 위해 인공수로를 만들고 물길을 기역자로 꺾어 하류에서 유입되도록 했습니다. 옛 물길이라고 하지만 안국동천이나 회동·제생동천은 자연하천이 아니라 전형적인 인공하천이에요. 영조는 스스로 준천(濬川)을 탕평, 균역과 함께 자신의 3대 치적이라고 할 정도로 개천 정비에 힘을 쏟은 임금입니다. 준천이란 물의 흐름을 막는 토사를 걷어내고 막힌 수문을 보수하고 무너진 교량을 보수하는 일입니다. 영조는 반대하는 신하들을 물리치기 위해 15년간 준비했고 준천을 독려하기 위해 직접 오간수문 위로 10여 차례 행차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모두 기록한 ‘준천사실(濬川事實)’을 편찬케 하죠. 청계천은 기본적으로 인공하천이에요.” 

    청계천 복원 공사를 시작하며 박 관장은 1960~70년대 복개 자료부터 찾아봤지만 남아 있는 게 별로 없었다. 향후 복원 관련 자료를 모아둘 곳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서울시는 2003년 7월 1일 복원 공사 착공과 동시에 청계천문화관(현 청계천박물관) 건립을 계획했다. 덕분에 준공 직전인 2005년 9월 26일 청계천문화관이 개관했다. 처음에는 서울시설관리공단(현 서울시설공단)이 운영했으나 유지관리 위주여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맡는 방안이 검토됐고, 그때 박 관장이 청계천문화관 운영계획을 수립했다. 

    “청계천 복원 자료 일괄 관리, 청계천 주제 기획전시 개최와 교육 프로그램 운영, 문화행사 등이 포함된 내용을 이명박 시장께 보고드렸더니 ‘정말 이렇게 할 수 있겠냐’고 물으시더군요.” 

    졸지에 그는 청계천문화관 초대 관장으로 부임했다. 청계천 복원 20주년과 함께 청계천박물관도 개관 20주년을 맞았다. 청계천박물관은 이미 청계천의 성공 사례를 벤치마킹하려는 외국인들의 필수 코스로 자리 잡았다. 올해 8월까지 외국인 방문객 수는 1972명, 그중에는 유네스코 물안보국제교육센터, 세계지방정부기후총회 참석자, 뉴질랜드 해밀턴시 시장 대표단, 국토연구원 초청 아프리카와 아시아 7개국 공무원 연수단 등이 있다. 9월에도 부탄, 에티오피아 등에서 242명의 외국인이 청계천박물관을 찾았다. 그들은 복원 후 20년간 청계천을 둘러싼 변화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9월 26일 ‘청계천과 함께한 서울, 20년의 시간’이라는 주제로 개관 20주년 기념 학술대회도 열린다. 박 관장은 ‘청계천과 청계천박물관: 개관 20년과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발표할 예정이다. 

    “시간이 갈수록 청계천에 물이 흐르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지천을 복원해야 한다는 생각도 점점 사라지는 게 안타깝죠. 옛 지도를 보면 서울은 물의 도시예요. 도심에서 산책하기 좋은 길은 예전에 모두 물길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만약 이 물길들이 살아나서 서울 도심 곳곳에 물이 흐르는 광경을 상상해 보세요. 얼마나 청량하고 아름다운 도시가 될지. 저는 매일 보이지 않는 물길을 상상하며 서울을 걷습니다.” 

    박현욱 초대 청계천문화관장은… 1996년부터 2002년까지 서울역사박물관 건립 및 개관 작업을 했고, 2002년 10월부터 2005년 10월까지 청계천 복원사업에 참여한 뒤 초대 청계천문화관(현 청계천박물관) 관장을 지냈다. 지난해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부장을 끝으로 공직 생활을 마치고 서울에 대한 연구와 강의를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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