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호

[3D] 학생 항일운동의 진원지, 나주에 살아 숨 쉬는 항일정신

[광복 80년:항일의 기억] 전남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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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영 기자

    kjy@donga.com

        

    입력2025-09-17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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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국으로 번진 11·3학생독립운동 발단은 나주역 충돌 사건

    • 일제강점기 토지 수탈과 식민지 교육에 저항 의식 고취

    • 신간회 나주지회 도움받아 11·27나주학생독립운동 발발

    올해는 대한민국이 일제강점에서 벗어나 빛을 되찾은 지 꼭 80년이 되는 해다. ‘신동아’는 광복 80년을 맞아 전국 항일 관련 현충시설을 찾아 소개하는 ‘광복 80년 : 항일의 기억’ 시리즈를 연재한다. 이와 함께 각 현충시설에 대한 디지털 트윈(리얼 3D VR 디지털 미디어)을 제작해 공개한다. <편집자 주>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홍중식 기자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홍중식 기자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바로가기

    전남 나주시 죽림동에 자리한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은 1929년에 일어난 11·3학생독립운동의 발단이 된 이른바 ‘나주역 충돌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설립됐다. 기념관 1층 입구에 전시된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중앙에는 주먹을 불끈 쥔 여학생을 선두에, 남학생 두 명을 양옆에 배치한 동상이 눈길을 끈다. 전영주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학예사는 “나주역 충돌 사건을 촉발한 당시 상황을 연상케 하는 동상”이라며 “나주역 충돌 사건은 나흘 뒤 일어난 11·3학생독립운동의 발단이 됐고, 이후 일어난 11·27나주학생독립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1·3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 ‘나주역 충돌 사건’

    전영주 학예사의 설명과 나주 독립운동사를 다룬 문헌 등을 종합하면 이날 나주역에는 통학생을 포함한 승객 30여 명이 하차했다. 개찰구에서 광주중학교 재학생 후쿠다 등 일본인 학생 3명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광주여고보)에 다니던 박기옥, 이광춘 등 여학생을 밀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를 본 박기옥의 사촌동생이자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고보) 2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준채가 격분해 후쿠다 등을 불러 꾸짖고 언쟁을 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후쿠다는 “조센징 주제에…”라며 모욕적인 발언으로 박준채를 자극했고, 이에 분개한 박준채가 후쿠다를 구타해 싸움이 발생했다. 이 일을 두고 순사는 일본인 학생만 두둔하고 박준채의 뺨을 때려 한국인 학생들이 항의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11월 1일 즈음 광주고보의 한국인 학생 전체와 광주중 일본인 학생 전체 간의 대립으로 비화했으며 마침내 11·3학생독립운동으로 폭발했다. 

    나주역 충돌 사건을 재현한 모형. 홍중식 기자

    나주역 충돌 사건을 재현한 모형. 홍중식 기자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시작된 11·3학생독립운동은 3·1운동, 6·10만세운동과 함께 일제강점기 3대 독립운동으로 꼽힌다. 이 사건의 발단은 나주역 충돌 사건으로 깊어진 한일 학생들 간 갈등이었다. 이 문제로 광주에서 광주고보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조직적으로 전개됐다. 

    그 배경에는 성진회가 있었다. 성진회는 1926년 결성된 광주 지역 중등학교 최초의 비밀 학생 모임이다. 광주에서 벌인 1차 시위 직후 성진회의 리더였던 장재성은 광주 지역의 사회운동단체 간부들을 만나 좀 더 조직적이고 강력한 투쟁을 전개할 것을 제의해 한국인 학생들의 총궐기를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전국적인 호응을 끌어내기 위해 광주 학생들은 2차 시위를 전개하기로 했고, 거사일은 광주 장날인 12일로 결정했다. 광주고보 학생들은 이날 대오를 정비해 충장로 광주우체국, 광주형무소 등으로 진출했고, 이날 시위에는 광주농업학교 학생들도 참여했다. 이후 목포에서는 11월 19일 목포상업학교와 정명여학교를 주축으로 학생독립운동이 이어졌다.

    나주에서는 11·3학생독립운동 당시 검거된 학생들의 석방과 독립을 목적으로 11월 27일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다. 나주농업보습학교 2학년생인 유찬옥이 신간회 나주지회의 지도를 받아 11·27나주합생독립운동을 주도했다. 신간회는 1927년 2월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 세력이 연합해 결성한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합법적 항일 사회운동단체로, 1931년 5월까지 존속했다. 11·27나주학생독립운동은 나주농업보습학교 학생 47명과 공립나주보통학교 학생 130여 명이 연합해 벌였다. 이 사건으로 16명이 검거·처벌을 받았다. 그럼에도 나주 학생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같은 해 11월 29일, 이듬해인 1930년 2월 10일에도 시위를 전개하는 등 끊임없이 항쟁을 이어나갔다.

    11·3학생독립운동은 여러 사회단체가 진상을 조사하고 지원하면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듬해 3월까지 전국에서 320개 학교, 5만여 학생이 참여하는 대규모 학생 봉기로 이어졌다. 국경을 넘어 중국, 만주, 일본, 미주 등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장영주 학예사는 “당시 학생들은 시위와 동맹휴학의 방법으로 광주학생들의 봉기에 동조하며, 식민지 교육과 식민지배에 저항했다”며 “그 과정에서 전국적으로 350여 명이 검거, 260여 명이 구속됐고, 퇴학당한 학생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전했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전경. 홍중식 기자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전경. 홍중식 기자

    일본의 극심한 수탈에 투쟁으로 맞선 나주 농민들

    이성자 전라남도문화관광해설사는 “나주역 충돌 사건과 11·3학생독립운동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나주 지역민이 일제강점기에 당한 수난과 그에 따른 저항 정신을 이해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그에 따르면 나주는 비옥한 토지와 영산강이 맞닿은 지리적 이점 때문에 일본인의 주요 침탈 대상이 됐다. 이 해설사는 “일제의 자원 수탈을 직접 목격한 학생들과 호남인들은 일제의 수탈과 탄압에 다양한 방법으로 저항했다. 학생독립운동의 시발점인 나주역 충돌 사건과 11·27시위 또한 일제의 자원 수탈과 교육 차별이 원인을 제공했다”고 지적했다. 

    일제강점기이던 1912~1918년 사이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막대한 국유지를 창출했다. 이러한 국유지는 곧 일본인 지주와 주식회사에 헐값에 넘겨졌다. 나주평야가 위치한 나주에 일본인의 진출이 집중된 이유도 쌀 수탈에 있다. 당시 일본인들은 대읍으로 이미 질서가 잡힌 나주에 먼저 진출하지 않고 작은 시골 마을이던 영산포에 진출, 본격적으로 나주평야를 수탈하기 위해 많은 일본인 지주와 식민 통치 기구를 정착시켰다. 영산포를 수탈의 거점으로 삼은 것은 호남 유일의 내륙항으로서 일본으로 물자를 이동하기 편했기 때문이다.

    당시 나주의 1대 지주는 구로즈미 이타로였다. 그는 1905년 영산포에 도착해, 1909년 영산포 제1지주가 됐고, 1930년에는 토지 1098정보를 소유하며 나주 제1지주가 됐다. 1정보는 3000평에 해당하며, 그가 소유한 토지 면적은 여의도의 약 4배에 달한다. 일본은 식민지 국가의 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동양척식회사라는 국책회사를 설립하고 양산포에 출장소를 건립해 나주평야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하는 데 앞장섰다. 1930년 나주군의 토지 소유 관련 자료에 따르면 조선인이 소유한 토지는 1인당 평균 310평이었으나 일본인은 그 30배가 넘는 1만10평에 달한다. 또한 1912년 일제강점기 초기와 1932년 산미증식계획이 일어났던 시기를 비교하면 조선의 쌀 생산량은 1.8배가 늘어나는 데 그쳤으나 수출량은 약 8배가 증가했다. 일제의 수탈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궁삼면 농민들의 투쟁을 기리는 나주궁삼면항일농민운동기념비. 홍중식 기자

    궁삼면 농민들의 투쟁을 기리는 나주궁삼면항일농민운동기념비. 홍중식 기자

    1920년대 나주 및 영산포 지역의 정치와 경제는 소수의 일본인이 장악했다. 그로 인해 한국인과 일본인의 지위는 주객이 전도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나주 지역에서는 청년운동, 노동·농민운동, 신간회운동, 야학 등 각종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특히 농민들은 일제의 토지 수탈에 맞서 강력하게 저항했다. 궁삼면민의 토지회수투쟁과 다시면 수리조합반대투쟁이 대표적이다. 

    궁삼면의 토지회수투쟁은 탐관오리 전성창이 세금을 대납해 주겠다는 명분으로 농민에게서 수탈한 토지 4만5000마지기의 소유권을 엄귀비(경선궁)에게 넘기고, 경선궁이 이를 1910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8만 원에 넘기면서 벌어졌다. 이 때문에 궁삼면민은 동양척식회사의 소작인으로 신분이 바뀌었고, 이에 분개한 궁삼면민들은 토지 소작권 회수 청원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러한 청원운동은 일제의 무력 탄압으로 일단락됐다. 

    나주역 구역사 전경. 홍중식 기자

    나주역 구역사 전경. 홍중식 기자

    침략자에 맞선 의병 발원지, 일제 차별에 봉기

    나주는 침략자들과 싸운 의병의 발원지이자 주요 활동 지역으로도 유명하다. 임진왜란 당시 호남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유팽로·김천일 의병장을 배출했고, 구한말에는 198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비롯한 을미개혁에 맞서고자 의병을 일으켰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나주는 다시 항일의병의 주요 근거지와 활동 무대가 됐다. 1907년 후반 이후 벌어진 헤이그 특사사건,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과 군대 해산 등에 항거하기 위해 장기 항쟁이 이어졌다. 나주 후기 의병에 참여한 인원은 총 143명.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김준, 김율, 나성화 등이 있다. 

    1896년 이후 호남 지역에서 여러 차례 이어진 의병 항쟁으로 인적 손실이 많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만세운동을 주도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주 지역에서는 최기정, 문근집 등이 3·1운동을 주도해 4월까지 산발적으로 만세 시위가가 이어졌다.

    나주 지역민들은 일본의 식민지 교육에도 강경하게 맞섰다. 1897년 ‘교육조서’가 발표됨에 따라 국내 최초의 관공립학교인 나주공립소학교가 나주에 문을 열었다. 일본은 1906년 ‘사립학교령’ ‘고등학교령’ ‘보통학교령’ 등 학교 시행규칙을 발표하고 일본인 교사를 앞세워 식민지 교육을 시작했다. 박경중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관장은 “일제의 교육령은 일본인과 한국인의 교육제도에 차별을 가했다. 식민지 교육은 일본의 지배에 순응하는 인력을 만드는 데 중점을 뒀고, 이러한 교육시스템은 조선인의 정체성을 약화시키고 일제의 충성심을 강화시켰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높아진 교육열로 한국 학생들의 고등학교 취학률이 높아지고 국내외에서 지속된 항일운동은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민족의식의 발현과 일제의 식민지 교육에 의한 차별은 학생들의 단결에 구심점으로 작용하고, 성진회 같은 비밀결사 조직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학생 비밀결사 조직은 학교 밖의 민족운동, 사회운동과 동맹휴학을 이끌었다. 박 관장은 “1926년 4월 순종의 인산일 이후에도 학교 수업이 계속되자 나주보통학교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결의했다. 이 동맹휴학은 1927년 이후 전국적으로 진행된 동맹휴학의 서막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의 설립 배경이 된 11·3학생독립운동을 이렇게 평가했다. 

    “다른 독립운동과 달리 순수 학생들이 주역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전국적이고, 조직적인 학생독립운동으로서 1920년대 학생운동을 총결산하는 운동이었으며 1930년대 민족운동, 사회운동으로 발전해 나가는 데 원동력이 됐다. 또한, 학생독립운동의 주 계층이던 학생들이 광복 이후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월항쟁 등에도 적극 가담해 민주화 과정에도 큰 역할을 했다.”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에 따르면 독립운동 유공자 서훈을 받은 나주 출신 인물은 총 118명. 이 중 34명의 사진을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에서 만날 수 있다. 박 관장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이라며 “나주를 방문한다면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숭고한 정신과 불굴의 역사를 확인해 보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김지영 기자

    김지영 기자

    방송, 영화, 연극, 뮤지컬 등 대중문화를 좋아하며 인물 인터뷰(INTER+VIEW)를 즐깁니다. 요즘은 팬덤 문화와 부동산, 유통 분야에도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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