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전승절 행사 때 북·중·러 3국 ‘반미 연대’ 과시
트럼프 ‘미국우선주의’, 韓에 위기이자 기회
한미원자력협정 개정으로 ‘핵잠재력’부터 확보해야
9월 3일 중국 베이징 톈안먼 망루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가운데) 양옆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가 서 있다. 뉴시스
시진핑은 김정은과 과거 다섯 차례 정상회담을 하면서 북한의 비핵화를 촉구했다. 그런데 이번 열병식 행사 이후 개최된 6차 북·중 정상회담에서는 북한 비핵화에 대한 논의가 아예 실종됐다. ‘절대로 핵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북한의 입장을 중국이 수용해 정상회담에서 비핵화에 대해 더는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이 같은 변화는 앞으로 한반도 비핵화 프로세스에 변화를 몰고 올 가능성이 높다.
김정은, 中 전승절 참석한 5가지 이유
그동안 다수 정상이 참석하는 국제행사에 모습을 드러내길 꺼리던 김정은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 중국 전승절 참석을 결정한 배경으로는 다음 다섯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북한이 올해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80주년 기념행사와 내년 노동당 9차 대회를 성대하게 치르려면 중국의 원조가 절실한 상황이다. 지난해 상반기까지 북한 시장에서 1㎏당 5000원대를 유지하던 쌀 가격은 2025년 6월에 1㎏당 1만 원을 넘어섰고, 7월에는 1만3000원대로 올랐다. 만약 중국으로부터 대규모 쌀 수입을 하지 못하면 북한 지도부는 주민들의 냉담한 반응 속에 두 개의 중요한 행사를 치러야 할 상황이다. 그런데 김정은이 중국 전승절 행사에 초대받음으로써 자연스럽게 중국 측에 경제 지원을 요청할 기회를 갖게 됐다.둘째, 트럼프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 간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이 시작됐기 때문에 북한도 러·우 전쟁 이후에 대비할 필요가 생겼다. 이후에도 북·러 협력 분위기는 유지되겠지만, 북한으로서는 지금까지의 ‘특수’가 사라지게 될 것이기에 북·중 관계 복원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셋째, 10월 말~11월 초 경주에서 개최될 APEC 정상회의에 시진핑 주석이 참석해 이재명 대통령과 너무 가까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김정은이 북·중 관계 복원에 나섰다고 볼 수 있다. 김정은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푸틴 대통령과 두 차례 정상회담을 하면서도 중국과는 고위급 교류나 협력을 소홀히 했다. 그러나 이제는 중국 관리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넷째, 김정은의 이번 방중은 이재명 대통령의 방일 및 방미를 계기로 한미일 협력이 강화되는 것에 대응하는 성격도 있다. 김대중 정부 시기를 제외하고 한국에 진보 정부가 출범하면 한일 관계가 소원해지곤 했다. 그런데 이재명 대통령이 미국 방문 전에 일본을 먼저 방문하자 큰 충격을 받은 북한이 그동안 러시아만 바라보던 상태에서 벗어나 중국과 관계 회복을 서두르게 된 것으로 분석된다.
다섯째, 김정은의 이번 방중은 트럼프 대통령의 APEC 정상회의 참석을 계기로 이루어질 수도 있는 북·미 정상회담에 대비해 중·러와 입장을 조율하는 성격도 있을 수 있다. 김정은은 2018년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 전에 시진핑 국가주석을 먼저 만났고, 2019년 하노이 정상회담 전에도 중국을 방문해 시 주석을 만나 양국의 정책 공조를 모색한 바 있다.
시진핑, 김정은에 ‘비핵화’ 요구 포기
중국 전승절 열병식에는 정상급 외빈 20여 명이 참석했다. 그런데 의전에서 김정은은 푸틴 다음으로 중요한 대우를 받았다. 이는 북한이 중국과 러시아와 대등한 핵보유국으로 자리매김했음을 의미한다. 사실상 북한이 ‘핵보유국 클럽’ 편입됐다는 상징적 위상을 획득한 것이다. 의전은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정치적 메시지다. 중국은 이 같은 의전을 통해 반미 연대와 권위주의 국가 간의 협력체제를 과시했다.중국이 이처럼 김정은을 특별히 예우한 것은 그만큼 북한의 전략적 가치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포탄 부족 등 많은 문제에 직면했는데 뜻밖에 군사적으로 가장 큰 도움을 준 국가가 북한이었다. 북한은 러시아에 병력까지 파견함으로써 러시아의 전투 수행에도 기여했다. 만약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기로 결정했을 때, 북한이 동북아에 또 하나의 전선을 만들어 미국의 군사 역량을 분산한다면, 중국의 대만 점령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트럼프는 재집권 후 “핵을 보유한 국가들과 잘 지내야 한다”면서 북한을 ‘사실상의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발언을 하고, 김정은과 좋은 관계를 과시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중국도 북한과 관계를 회복할 필요성이 더욱 커졌고, 김정은과 좋은 관계를 미국에 과시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중국이 북한에 대한 ‘비핵화’ 요구를 포기하고, ‘사실상의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시진핑은 과거 김정은과 한 다섯 차례 정상회담에서 “북한이 비핵화를 위한 협상에 적극적으로 임할 것”을 요구했다. 그같은 내용은 중국 관영 신화통신 등을 통해 보도됐다. 그런데 9월 4일 베이징에서 열린 6차 북·중 정상회담에 대한 신화통신 보도에는 북한 또는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논의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신화통신은 시진핑이 “중국 (공산)당과 정부는 중조(북·중) 전통적 우호를 매우 중시하며 양국 관계를 잘 유지하고 공고히 하며 발전시키기를 원한다”며 “국제 정세가 어떻게 변하든 이 입장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했다고 보도했다. 이어 신화통신은 김정은이 “국제 정세가 어떻게 변하더라도 북·중 우호의 정은 변하지 않으며, 북·중 관계를 끊임없이 심화, 발전시키는 것은 북측의 확고한 의지”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즉 이번 정상회담에서 북·중 양국 정상은 “양국은 ‘운명 공동체’라며 공동 이익을 함께 수호하자”는 데 뜻을 모은 것이다.
김정은은 “한반도 문제에서 중국의 공정한 입장을 높이 평가한다”며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유엔 등 다자 플랫폼에서 계속 조정을 강화해 양측의 공동 이익과 근본 이익을 수호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시진핑도 “북·중이 운명을 함께하고, 서로를 지켜주는 좋은 이웃이자 친구이자 동지”라면서 “한반도 문제에서 중국은 줄곧 객관적이고 공정한 입장을 견지해 왔으며, 계속해서 북측과 조정을 강화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시진핑은 중국이 한반도 문제에 ‘객관적이고 공정한 입장’을 견지해 왔다고 주장함으로써 향후 시진핑이 방한을 통해 한중 관계가 개선되더라도 그것이 북·중 관계에 부정적 영향이 가지 않게 하겠다고 사실상 약속한 것이다.
시진핑은 이어 “북·중은 국제·지역 사안에서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고 공동 이익을 수호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한 김정은의 중국 80주년 전승절 열병식 참석에 대해 “북·중 양당·양국이 우호 협력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고 강조했다. 김정은도 “북한은 대만·티베트·신장 등 중국의 핵심 이익과 관련된 문제에서 확고히 중국의 입장을 지지하고, 중국이 국가 주권과 영토 보전을 수호하는 것을 지지할 것”이라고 화답했다.
9월 4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가 제6차 북·중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뉴시스
北, 中에 경제협력 희망 피력
북학은 중국과 경제 분야 협력에 대한 희망도 피력했다. 김정은 “중국은 시 주석의 강력한 영도와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사상의 지도하에 위대한 발전을 거뒀다”면서 “북·중이 모든 단계에서 밀접하게 왕래하고, 당의 건설·경제 발전 등의 경험을 교류하고, 조선노동당과 국가의 건설사업 발전을 돕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이어 “양국이 호혜적인 경제무역 협력을 심화해 더 많은 성과를 얻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북·중 정상회담의 이 같은 발표 내용을 분석해 보면, 김정은은 중국의 북한 비핵화 요구를 중단시키는 데 성공했고, 한반도 문제에 대한 중국의 ‘공정한 입장’ 견지 약속을 받아내며, 양국 경제협력 확대의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판단된다. 대신 중국은 대만·티베트·신장 등 핵심 이익과 관련된 문제에서 북한의 지지를 이끌어냈으므로 중국보다는 북한이 더 큰 외교적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시진핑과 김정은은 북·중 정상회담 이후 소규모 차담과 만찬을 함께 했다. 26개국의 정상과 고위급 인사들이 베이징에 집결한 상황에서 시진핑이 김정은을 위해 단독 만찬을 마련한 것은 ‘국빈 방문’ 수준으로 파격적 예우를 한 것이다. 따라서 이후 북한과 중국 간 교류 협력도 크게 활성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2025년 중국 전승절 행사를 계기로 동북아 안보 지형은 근본적 변화를 보이고 있다. 첫째, 신냉전 구도가 더욱 명확해졌다. 과거에 중국은 북한과 연대하는 데 소극적 입장을 보였지만, 이번 행사를 계기로 북·중·러 연대가 더욱 공고해졌다. 따라서 한미일 간의 안보협력도 더욱 강화하는 것이 불가피해졌다.
둘째, 중국이 기존의 한반도 비핵화정책을 사실상 폐기하고 이번에 북한을 ‘사실상의 핵보유국’으로 인정함에 따라 한국의 전략적 선택지가 좁아졌다. 이는 핵비확산조약(NPT) 체제의 근간을 뒤흔드는 사건이다. 이에 따라 한미일의 북한 비핵화정책은 힘을 잃게 되고, 억제력과 연대 강화 외에는 현실적 대안이 사라졌다. 이미 동북아에서는 북한과 중국이 핵무기를 급속도로 늘려감으로써 핵비확산 체제에 심각한 균열이 생기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한국과 미국이 실현 가능성이 더욱 희박해진 북한 또는 한반도 ‘비핵화’정책을 계속 추구한다면, 그 같은 정책은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한반도와 동북아 안보 상황은 더욱 악화할 것이다.
이제 한반도 안보 정책의 패러다임은 ‘비핵화’에서 ‘핵 억제’로 전환돼야 한다. 이는 한국 외교안보 정책의 근본적 재구성을 요구한다. 그동안의 북한 비핵화정책은 북한의 핵무력 강화를 중단시키지도 못했고, 오히려 한국의 안보역량 강화를 지연시켰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미국우선주의 정책은 한국에 위기이자 동시에 기회로 작용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과거 대통령들과는 다르게 동맹국들에 자강을 요구하고 있다. 그는 2016년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 시절에 한국과 일본이 북한과 중국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미국의 핵우산에 의존하는 대신 스스로 핵을 개발하도록 허용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후에도 그의 입장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미국을 방문한 외교 안보 전문가들은 미국 전문가들로부터 트럼프는 한국의 핵무장을 용인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한미동맹 2.0 준비할 때
현재 미국의 국방정책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엘브리지 콜비 국방부 국방정책 담당 차관도 한국과 일본의 핵무장에 우호적 입장이다. 그는 2024년 한국 언론과 한 인터뷰를 통해 “미국의 대중 견제를 위해서도 한국의 자체 핵무장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피력한 바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만약 한국 정부가 미국의 묵인하에 자체 핵 억제력 확보의 길로 나아가는 방안을 계속 외면한다면 역사에 큰 죄를 짓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현재 트럼프 2기 행정부는 해군력 강화와 원자력산업을 부흥하기 위해 한국의 적극적인 협력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러므로 한국은 한미원자력협정 개정을 통해 먼저 핵잠재력을 확보하고, 미국과도 협력해 핵추진잠수함을 단독 또는 공동으로 건조하며, 양국이 핵과 해군력, 방산 등의 분야에서 더욱 전략적으로 협력하는 한미동맹 2.0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미일 안보협력을 확대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호주, 나토와도 안보협력을 좀 더 제도화하고 공고화하는 방향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